=====10:1
유대지경과 요단강 건너면 - 즉 베뢰아지방을 가리킨다. 이와같이 이시기의 지리적배경이 베뢰아인 것을 밝히는데 있어본서가 가장 명확하다. 마19:1에는 요단강건너 유대지경 으로 되어 저자가 강동편에 거주 했다면 바로 요단강서편 유대지경이되므로 혼란이 되기도한다. 당시갈릴리지방의 유대인들은 유대로갈때에 사마리아를통과하지않고(요4:9) 강동편 베뢰아를 우회한 것이 관례였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으로 들어가셨으나 사마리아인의 반항으로 베뢰아지방을 택하신사정을 누가는 전한다(눅9:51-56). 하여튼 이때유월절을 맞이하여 상경하는 수많은 순례자의 행열을 따라 예루살렘을 향하신 것이다.
무리가 모였거늘 - 제자들에게 주신 사적교훈(6:33 - 50)이 끝나고 다시 무리에게 에워싸여 공적 광장에 나서신 것이다.
=====10:2
그를 시험하여 - 당시바리새인들은 신24:1 - 2(사람이 아내를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일이 그에게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 . . ) 의 해석에서 대립되는 논쟁을 계속하였다. 엄격파인 샴마이파는 위의 수치되는일 을 간음으로보고 간음한이유외에는 이혼을 못한다고 하였고 , 자유적인 힐레파는 무슨조건이든(가령아내가 밥을태웠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여기 바리새인의 시험한 목적은 몇가지로 추리할수 있을 것이다. (1)예수께서는 모세의율법주의자보다 차원 높은 도덕을 가르켰으므로(마5:27 - 32) 이문제에대한 견해를 알고싶어서 (2)이와같은 논쟁에 예수를 끌어내어 어느편에 가담시키려고 (3)당시 헤롯이 이혼하였고 세례요한이 이를 반대하다가 죽었으므로 예수를 같은운명에 빠뜨리기 위해서 등으로.
=====10:3-4
모세가 어떻게. . . . . 이혼증서를 써주어 - 예수께서는 대답에 앞서 반문하시므로 질문자의 입장부터 밝히셨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으로 대밥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앞서 인용하신 신24:1 - 2을 들어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줌으로 이혼을 허락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이회답은 곧저들자신의 이혼관이었다. 저들은 모세의말을 문자적으로 취하여 이혼증서를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세의말의 근원을 캐서 밝히신 것이다.
=====10:5
마음의 완악함 - 합성혀으로 완고한마음 이다. 앞서 제자들에게 실물교수하신 어린아이와 (9:36)는 대조적으로 감수성이없는 굳어진 마음이다 . 모세의 율법은 정상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인간성의 완악한 것을 전재로주신 차선의 길이었다. 본절과 다음절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의계명과 모세의 계명을 대립시키거나 성경을 시정하시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신21:1의 참뜻을 밝히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뜻을 들어낸것과 인간의 실제적인 죄성과 그로 말미암아 어떤제한이 불가피한 사실과의 구별을 명백히 하셔야만 했던것이다 (Cranfield).
=====10:6-8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 창1:27 및 2:24의 인용으로서 모세를 거슬러 올려 창조에 시작 하신다.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원시적인 뜻과의 차이점을 지적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귀절은 문자적으로 한남자와 힝여자로 다. 하나님은 부부의제도를 창조하시되 일부 일처의제도로 창조하신 것이다. 그리고 일부 일처의 제도는 엄격한 의미에서 이혼한것에서는 벌써 파괴된 것이다. 그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 . . . 한육체가 될찌니라 (몸 가 아니라). 그러나 이는 히브리용법으로 단순한 육체적 결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몸 으로 또나아가 한인격 으로형성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은 어릴 때 부모의 보호로 성장하거나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아담과 하와는 떠날부모가 없었지만)이성을 마난 새로운가정을 형성한다. 가정은 한몸이요. 한인격인 것이다.
=====10:9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 - 여기 관계대명사는 단수로 부부는 둘이아니요 벌써하나인 것을 표시하고 , 동사는 부정과거형으로 단번으로 영영짝지워 주신 것을 말한다. 여기 영원 불변한 부부의 윤리가 제시되고 있다. 부부는 창조적인 원리에서 또개인적인 면에서 하나님이 짝지워 주신 것이다, 이와같은 신앙이 있는곳에 이혼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 그기원이 창조자이신 하나님 께 있으므로 피조물인 사람이 이를 파괴할 수는 없는 것이다.
=====10:10
집에서 제자들이 - 밖에서 무리에게 공적으로 가르치시고 집에들어가사 제자들에게 그교훈을 되새겨 주는 것이 예수의 관례였다. (4:10, 7:17. 9:33 등). 이때에도 이혼문제에관해 제자들은 질문하였고 , 그질문에 대답하셔서 보충설명을 하신 것이다.
=====10:11-12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 . . .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 마태에서는 산상보훈의 일부로 인용된다. (마5:32).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창조의 원리는 불변의 원리 이므로 가령 이혼증서를 써주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원리에서는 승인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부부관계는 불변이며 따라서 아내를 두고 다른여자에게 중요한 셈이되므로 본처에게 간음죄가 되고 .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랍비들의 가르침에는 남자가 유부녀와 간음했을 경우 그남편에게 간음죄가되고 아내의경우는 남편에게 간음죄가되나 남편이 아내에게 간음죄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하신 것은 랍비들의 교훈을 초월하는 것이라 하겠다.
=====10:13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 마태와 본서의 낱말은 갓난 어린아이를 가리키나 누가의 용어는 약간 큰아이를 뜻한다. 또 이동사는 미완료 과거형으로 계속 데리고 오던 것을 묘사한다 . 저들을 데리고 오다가 제자들의 꾸지람을 받은 것이다. 당시 유대인 아이들은 회당에서 납비에게 축복을 받는 풍속이 있었고 (Carr). 자녀들을 축복할 때 그머리위에 손을얻는 풍속도 있었다. (창48:14). 예수를 숭앙한 추종자들이 예수께 축복을 받고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것도 제자들의 자연스런 행동이다. 아이들을 경시하고 귀찮은존재로 억누른 것은 고대 사회의 공통성 이었다. 스팔타에서는 자녀의 생살여탈. 권은 아비에게 있었고 , 고대중국에서는 아이를 돈받고 파는수도 있었다.
=====10:14
분히여겨 - 본서에만 보이는 첨가로 감정묘사에 예리한 저자의 필치를 보이는 것이다. 제자들의 당치않는 행동을 강하게 제지 하신 것이다 . 예수께서 보시기에는 어린아이들이 가장 순수하였고 , 그들의 오는 것을 가장 반가왔는데 이런 스승의 뜻을 모르고 함부로 그들을 꾸짖는제자들에게 실망과 의분을 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자의 것이니라 - 예수께서는 이미 어린이의 위치를 높여줘 주 자신과 같이 두셨다(9:36-37). 여기에서 다시 어린이를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 이는 물론 문자적인 의미보다 어린이의 성품이 하나님의 시민의성품인 것이다 . 어린이의 성품은 여러 가지로 지적되나 중요한 것은 순결과 겸손과 신뢰(신앙)일 것이가. 이런 요소들이 하나님의나라 시민의 성품인 것이다. 하여튼 부모들은 단순한 축복을 바라고 아이들을 데리고 왔으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나라 시민에게 까지 그들을 올리시고 또 축복하신 것이다.
=====10:15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 눅18:17과 문자적으로 같으나 마태에서는 다른경우에 다른 말씀을 주셨다. (마18:3). 여기 내가 너희에게 진실로 이르노니 귀와 더불어 (3:28주참조)또 이중의 부정사와 더불어 뜻은 극히 강하다 . 전절을 받고 이를 부정적으로 반복하시면서 강조 하신 것이다.
=====10:16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 부모들의 요구(13절)보다 훨씬 더많이 하셨다(Bengel).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걸자의 그림자인 어린 아이들을 마음껏 축복하신 것이다. 축복하심은 미완료형이므로 얼마동안 계속된 것을 뜻한다. 아이들을 하나씩 품에 안으시고 축복하셨다. (Bruce)그러므로 그시간은 한참이나 걸리셨을 것이다.
=====10:17
한 사람 - 그는 마태에 의하면 부자였고 또 청년이었으며 (마19:22) 누가에 의하면 관원 이었다. (눅18:18). 중앙에 있는 산헤드린의 회원이었는지 지방의 관원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편이든 나이는 30세가 지났을 것이다. 아마30세가 겨우지난 청년 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집에서 (10절)나와길에 나가실때에 그가 달려와 생의 도를 물었다 . 부자요. 관원이요. 또청년인 그가 현세를 살기위하여는 최고의 조건들에 만족하지 않고 영생의 도를 물은 것은 장한 일이었다. 달려와서 꿇어앉아 - 본서에만 보이는 상세한 묘사다. 달려온데 그의 구도의 열심을 볼수 있고 꿇어 앉은데 그의 겸손을 엿볼수 있다. 실로 그는 여러면으로 좋은 점들을 갖추어 있었다. 그러나 한가지가 부족하여 영생의 길에서 탄락된 것이었다(21절)
선한 선생님이여 - 독특한 칭호로 랍비에게도 부른적이 없다. 마태에는 선한 이 다음어귀에 붙어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로 되어 있다. 두책을 종합하면그의 의도를 추측할수 있을 듯하다. 그는 영생을 얻으려면 선한일을 행하여야하고 선한 일이라면 선한 선생이신 예수께묻는 것이 첩경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여튼 그의 질문에 율법주의적 근본 과오가 들어났다 . 구원은 무엇을 행하는데 (to do)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같이 되는데(to be)있기 때문이다.
영생 - 본서에는 이절과 30절에 두 번나타나고 마태에 3회 누가에 3회만 보이나 요한복음에는 17회나 사용된다.
=====10:18
하나님의 한분이외는 선한이가 없느니라 - 여기 명사는 선한 이로다(마가. 누가)(선한일으로도(마태)번역할수 있다. 여기 예수께서는 자신의 선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유니테리안의주장처럼)그 부자청년의 구도적 자세의 과오를 고치시려는 것이었다 . 첫째는 그를 인간적 선의 개념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선으로 전환 시키려는 뜻이다. 그는 예수를 인간적 의미에서 선한 선생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 . 인간의 선은 진보적이고 상대적이나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인 것이다. 둘째는 율법적 선에서하나님께대한 신앙으로 돌이 키시는 것이다. 탈무드에는 율법외에 선한 것이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이런 관념에서 그를 깨우쳐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신앙으로 이끄시는 말씀일 것이다.
=====10:19
살인 하지말라. . . 속여 취하지말라, 네부모를 공경하라 - 제5. 6. 7. 8. 9. 계명. 즉 둘째 돌비의 계명들로 인간에 관한 것이다. 마태에는 결론으로 네이웃을 네몸과같이 사랑하라 는 계명으로 맺는다. 본서에는 제10계대신 속여 취하지 말라 를 첨가하고 있다. 제10계를 반영 하면서도 위의 계명들의 결론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서는 다같이 제5계를 마지막에 둔다. 이청년이 특히 이계명에 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Bengbl)그리고 여기 인륜에관한 계명만을 제시하신 것은 첫째 돌비에 나타난 하나님께대한 계명보다 중하기 때문애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구현하기 때문이다(Calvin)
=====10:20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 허위도 아니고 (다음절, 예수께서 그를 보시며 사랑하신 것으로보아), 예수의 진의를 파악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종래 탄락하여 물러간 것으로 보아). 그는 일반 유대인의 과정을 쫑아 6세에서 율법을 공부하고 , 또 준수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인 범위에서 였고 율법의 참뜻을 안 것은 아니며 . 따라서 중심으로 준수한 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10:21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 주의깊게 응시하시며 사랑하신 것이다. 역시 마가 톡특한 묘사다. 예수께서는 진실된 구도자에 깊은 관심을 두시고 또 사랑 하시는 것이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 누가에는 한가지 남은것 이라 하나 뜻은 같은 것이다. 전절의 나지키었다이다 의 대귀가 된다. 랍비들의 기록에 카니나(Chanina)가 죽을 때 죽음의 천사에게 네게 율법책을 가져와 거기 거룩한 것중에서 내가 미쳐 실행치 못핸 것이 있나 보아달라 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부자청년에게 부족한 한가지는 율법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물론 그에게도 많은 부족이 있었겠으나 재물이 그에게는 무상이었고 영생의길을 가로 막는 치명적 상쳐였다 . 그의 회의도 불안도 여기서 나왔고 , 그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한것도 재물 때문이었다. 이한가지 부족은 사람을 따라 같이 않을 것이다. 이한가지 죄를 발견하고 제거하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이는 충고가 아니라 명령이었으며 , 강압적이었으나 이영혼의 성격을 따른 개인 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수종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이명령을 같이주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재물을 소유하면서 온전한 자가 있을것이고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주고도 온전치 못한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명하신 것은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에게 줄것과 , 예수를 따를 것 두가지였다. 중심문제는 후자였으나 전자는 그조건 이었다. 전자를 실행하지 못하면 후자는 시작되지 않는 것이다.
=====10:22
슬픈 기색을띠고 - 마16:3에는 하늘에(하늘에 얼굴을흐리면)적용되었으나 여기서는 그부자청년의 얼굴색을 묘사한다. 그는 결국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마6:24)는 선택에 있어후자를 택했고 , 그결과는 마음의 근심이었다. 만일 그가 예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택하였다면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얻었을 것이다. 왈드의상인 베드로(Peter of Waldo. 1170-1217)는 이때 예수께서 부자청년에게 명하신 네게있는 모든 것을 가난한자에게 주라. . . 그리고 와서 나를 쫑으라 하신 말씀을 읽고 감격하여 문자적으로 모든재물을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고 리온의성자 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 부자청년이 근심하여 간 것은 그에게 아직 회개의 소망이 있는 표시가 될것이다(Cranfield).
=====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 본서의 특징어로 6회 나타난다. (3:5주참조)감정적 표정묘사에 능숙한 마가의솜씨인 것이다.
재물이 있는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도다 - 구약에서 부에대한 개념은 상반적인 두가지 였다. 하나는 선에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했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자가 경건하고 부자는 불경건한자로 지탄된 것이다. 첫째가 일반적 개념이었고 (제2계의 성취로)둘째는 특수한 개념이었다. (합1:4처럼)하여튼 이런 구약적 배경에 비춰볼 때 그리스도의말씀은 또하나의 그리고 전연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신 것이다. 부자는 개인에 한하지 않고 사회나 시대에도 적용될수 있을 것이다. 재물이 많은 부자가 경건된 신앙을 유지하기 어려운것처럼 재물이많은 시대나 사회역시 신앙에서는 후퇴한다. 현재의 서구제국이나 미국의 경향이 그것을 말할 것이다. 또부는 반드시 재물에 한하지 않을 것이다. 지식이아 지위 등에 부한자들도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10:24
제자들이 그말씀에 놀라는지라 - 구약적 개념에 젖은 제자들은 부자에대한 그리스도의 새로운 견해에 더구나 부자에게 모든 것을 버리라는 조건이 너무 무거움으로 놀랐을 것이다.
=====10:25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것이 - 약대 는 밧줄 의 뜻이있고 바늘귀 는 바늘문 이라 불리우는 성의 작은문으로 볼수 있으므로 이를 (1)밧줄을 하늘에 궤는 것처럼 어려운 것 (2)약대가 바늘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려운것등으로 조화하는 설명들이 있으나 수락되지 않는다. 이는 문자적이며 또 동양적 과장법으로 극히 어려운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랍비들이 인용한 바벨론 탈무드에 절대 불가능한일을 코끼리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것 이란 말이 있다. 탈무드의 다른귀에 바늘귀는 두친구를 위해서는 좁지않고 , 온세계도 두원수를 위해서는 넓지 않다라는 말도 있다 또 코란경에는 불경건한 자에게는 하늘의 문이 닫혀 있을것이고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기까지는 그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귀가 있다.
=====10:26
제자들이 심히놀라 -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엄격해지고 , 제자들의 놀람은 더욱 심해졉다. 누가에 의하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일반 군중들에게서 나왔다 . 제자들도 일반 군중도 다같이 예수의 엄격한 교훈에 놀랐을 것이다. 회당을 지배하던 관원이며 따라서 일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부자청년의 구원이 그렇게 어렵다면 다른사람들이야 누가 감히 구원을 얻을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10:27
사람으로는 할수없으되. . . . 하나님으로는 다하실수 있느니라 - 구원론의 대강령이다. 구원은 사람편에 있지않고 하나님편에 있는 것이다. 사람의 노력이나 수양이나 각성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하신다. 그것은 부자의 구원에만 한하지 않는다. 부자도 하나님은 구원하실수 있고 가난한자도 스스로 구원 하지는 못한다.
=====10:28
보소서 우리가 - 두낱말이 모두 강조적이다. 첫째는 감탄사며 둘째는 부자청년과 대조되는 우리다, 역시 제자들의 대변자격인 베드로의 발언 이었다. 예수와 부자청연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드로는 타락해가는 부자청년에대해 저들은 예수의 요구대로 행하였다는 자각에서 이렇게 감동적으로 발언한 것이다. 과연 제자들은 예수의 요구하신 것처럼 모든길을버리고 예수를 쫑았다. (1:18. 20. 2:14). 이와같은 저들에게 하나님의나라의 구원이과연 확실한지를 보장 받고 싶었던 것이다.
=====10:29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 3복음서에 모두 내가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귀로시작하여 강조적이다. 누가에는 하나님의나라를 위하여 로 되어 있다. 결국예수 . 복음. 하나님의 나라는 다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버릴것에대해서도 누가는 아내 를 첨가하고 전토 를 생략하나 뜻에는 차이가 없다. 마태는 세상이 새롭게되어. . . . . 너희도 열두보좌에 앉아. . . . 를 삽입시킨다.
=====10:30
금세에 있어. . . 백배나, 내세에 영생을 - 마태나 누가에게는 여러배 로 되어 있다. 본서의 백배도 그런 뜻이고 또 내용적인 의미에서 볼 것이다 . (모친과 아내 등을 몇배나 받지는 못할 것이므로). 본서의 특색은 핍박을겸하여받고 에 있다 . 성도들은 현세에서 축복을 받으나 늘 핍박을 각오하여야 한다. 정당한 수고가없이 받은 축복은마귀의 선물인 것이다(욥42:12-16). 하여튼 예수께서는 버리라고 말하시고 백배나 주리라고 보장하신다 . 그것은 신령한 세계의 역설인 것이다. 이 역설을 체험치 못하면 주의 깊은 은총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10:31
먼저된자로서 나중되고 - 마태에는 이 병행귀 외에 21:16에 다시 나타나 일종의 격언조로 되어 있다. (1)전자는 베드로이하 신도들, 후자는 그외신도들(Gould, Plummer, Cranfield), (2)유대인과 이방인(Clarke) (3)바리세인과 세리 (4)부자와 가난한자들 등으로 해석된다. 첫째가 일반적인 견해다. 하여튼 이는 종말적원리요 . 하나님의 세계의 순서다. 종말적원리는 현세적원리와는 상반되며 , 하나님의 순서는 인간의 그것과 는 모순된다. 이런사실을 통해 신앙적 우월감에 잠긴 제자들을 경계하신 것이다.
=====10:32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길에 - 아직 요단강 동편 베뢰아에 계시는 것인지(Bruce). dlal 요단강 서편으로 건너 가셨는지(Meyer)는 밝혀지지 않으나 여리고에 가까운 지점까지 당도한 듯하다. (46절). 이여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서 밝혀진다. 예수께서 제자들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쫑는 자들은 두려워 하더라 - 감정묘사에 정밀한 본서의 특징이 여지없이 나타난 장면이다. 예루살렘의 지명과 더불어 예수의 수난을 향해 감연히 앞서가시는 예수의 자세는 엄숙했다. 그리고 이와같이 엄숙한 주의 모습에서 심상치않는 정세를 감지하면서 제자들은 놀라고 일반 추종자들은 오히려 두려워한 것이었다. 열두제자를 데리시고 - 곁으로. 취한 것이다. 놀라 예수에게서 멀어지는 제자들을 곁으로 불러들이셔서 수난의 예고를 다시 주신 것이다.
=====10:33 - 34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 . . 그들이 능욕하며 침밴으며, 채찍질하고 죽일것이니 - 수난의 장소가 예루살렘인 것이 비로소 밝혀진다. 그리고 수난의 예고도 처음 두 번에비해 구체적이고 세밀하여 축자적으로 성취되었던 것이었다. 예수의 고난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유대 유권자들이 주동이되고 이를 이방인인 로마 정권자들의 힘을 빌어 모욕과 폭행을 가한후에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다. 그리고 3번의 예고에 빠짐없이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첨가하셨다. 그리스도의 수난이 승리로 끊날 것을 확인 하신 것이다.
=====10:35
야고보와 요한이 - 마태에는 그들의 어머니가 구한 것으로 되어있다. 아마모자가 같이말했을 것이다 . 야고보와 요한은 처음 부르심을 받은제자들이며 베드로와 더불어 특히예수의 신임을 받은제자였다. 또그들의 어머니살로메 (16:1)는 성모마리아와 자매간으로 믿어지고 있다 . 이와같은 사실들이 이런특청의 근거가 되었을지모른다 .
=====10:36
무엇을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 그들은 무엇이든지 우리의구한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였으나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고 유도하시기 까지는 그소원을 진술하지는 못하였다, . 역시 양심의 가책을 느껴 머뭇거렸를 것이다.
=====10:37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 하나는 좌편에 - 우의정과 좌의정의 자리였다. 우편과 좌편은 왕과 가장 친근하고 왕다음가는 영광의 자리였다. 베드로가 예수께 모든 것을 버린 보상을 요구 했을때(28절) 예수께서는 세상이 새롭게되어 인자가 자기영광의 보좌에 앉을때에 나를 쫑는 너희도 열두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리라(마19:28)하셨다. 그말씀을 기억하면서 이런 요구를 했을 것이다. 또 메시야가 오시면 곧지상에 왕국을 세우고 메시야 통치가 시작된다는 유대인의 일반적 개념 이었다(행1:6)예수께서 말씀하신 세상이 새롭게되는 때는 종말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종말 이전에 메시야의 고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때 야고보 형제나 유대인들의 오해는 종말적 메시야왕국 이전에 있을 고난을 생각지 못한 것이 었다. 하여튼 야고보 형제의 요구는 인간의 허무한 공명심을 비치는 밝은 거울 이었다(Calvin).
=====10:38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 근본적으로 말해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구하는바를 알지 못한다. 자기자신을 바로 알지못하며 자기의 하는일을 알지 못하는사람이 (눅23:34)자기의 구하는 것을 알수 없는 것이다(롬8:26)구체적으로말해 이때 야고보 형제는 그들이 구한 우편과 좌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다. (그곳은 두강도가 달린 십자가 들이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바라보면서 행진 하시는데 저들은 왕의 보좌를 연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착오에서 모든견해나 구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것이었다. 나의 마시는잔을 . . . 받는 세례를 - 구약에서 하나님의 총애도 뜻했으나 (시23:5, 116:13)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았다(시75:8, 사51:17-23, 렘25:15 - 28, 49:12, 51:7, 겔23:31 - 34, 합2:16, 슥12:2). 본문의 배경은 물론 후자다. <세례>는 본서에만 첨가된 것이다. 이낟말의 동사형은 물이 넘치는 것이나 거리에 사람들이 쇄도하는 것으로 넘치는 고난을 상징하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잔이나 세례는 다같이 그의 받으실 고난을 상징한 것이다.
=====10:39
할수 있나이다 - 이자신에 넘치는 회답은 저들이 아직 예수의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지 못한 증거였다. 그들의 오해는 두길로 추측할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잔과 세례를 영광으로 착각하고 이와같이 혼연히 대답할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가령 그것을 고난의 잔으로 알았다해도 메시야왕국을 건설을 위한 충신들의 고난 정도로 알았을것이고 십자가의 수치고 극심한 순교의 고난으로는 상상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어느편이든 저들은 예수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속단적으로 대답한 것이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잔을 마시며 - 그리스도는 높고 다른 차원에서 그들의 대답을 긍정하신다. 이와같이 차원을 달리하면서 이상하게 진전된 문답을 관찰할 것이다. 과연 야고보 형제가 장차 그리스도의 참뜻도 이해하게 되고 또 그뜻대로 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본절에 의해 야고보와 요한이 다같이 초기에 순교하였다는 교회의 오랜 전승이 성립 된 것이다. 야고보가 헤롯에 의해 조기의 순교한 것은 분명하나 (행12:21. 44년경)요한의 경우 그가 천수를 누리면서 도미시안 황제때 밧모섬에 귀양가서 계시록을기록하고 100세가 지나 죽었다는 전설이 유력한 것이다. 순교만이 주의잔을 마시는 것이 아니며 주를 위한 이와같은 고난의 생애 역시 주의잔을 마신 것이었다.
=====10:40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는지 - 마태는 보다 분명하게 :내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 하셨든지 라한다. 종말적인 메시야 왕국에서 메시야 의 좌우편에 앉을사람이 있을 것은 부정하시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는 이제 새삼스러히 예수께서 주실것이 아니라 이미 성부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사람이 얻을 것을 밝히신다. 이와같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에 복종하는것만이 성도들이 취할 태도인 것이다.
=====10:41
열제자가듣고. . . 분히 여기거늘 - 그들도 야고보 형제와 꼭같은 공명심이 있었고 그러므로 시기에 차서 분히 여길 것이다. 두사람이 예수의 좌우편 같은 가장좋은 지위를 독점하게되면 저들은 그 자리를 바라보지 못하므로 두사람에대해 노여워한 길이다. 교회는 언제나 이와같은 불순항 욕망 때문에 분규에 빠지는 것이다.
=====10:42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으로 주관하고. . . .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고 - 전자는 주로행세하는자로 왕을 말하고 후자는 권력을 행사하는 방백급의 중신을 가리킨다. 세속적 체계에 있어서는 왕이 백성을 임으로 주관하여 종으로 삼고 , 왕의 권력을 맡은 방백들역시 백성들위에 세도를 부리는 것이 상징적 일이가. 그러나 교회력 체계에 있어서는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이하 교훈은 야고보 형제에대해 분히 여기는 제자들에게 전반적으로 주신 것이다.
=====10:43-44
크고자하는자는. . . . 섬기는자가되도 으뜸이 되고자하는자는. . . . 종이 되리라 - 일종의 히브리 용법으로 같은 내용을 반복함으로 뜻을 강조하는 것이다. 같은교훈은 제자들사이에 누가 크냐는 다툼이 일어 났을 때 이미 주신바 되었다(9:35, 36, 눅22:25 - 27)세속적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같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정반대이다. 남의 으뜸이되고 위대해지는자는 오히려 남을섬기는 종의 자세에 서는 것이다. 섬기는자. 종 - 전자는 집사 로 번역되었고 (딤전3:8)후자는 당시의 노예제도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빌1:1). 전자는 일의 성격에서 , 후자는 일하는자의 신분에서의 표현이나 결국 같은 뜻이다.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일꾼(섬기는자)으로도(고전3:5, 엡3:7), 그리스도의종으로 롬1:1불렀다.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여 섬기려하고 - 접속사 왜냐하면 ( )으로 시작하여 전절의 의미를 설명한다. 제자들이 섬기는자가되고 종이 되어야학것은 스승되는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섬기기위해 세상에 오셨기 때문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전생애는 철저히 섬기는 생애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생명까지 바쳐 인류를 섬기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믿는자들에게 최고의 모본이 되었다. 자기목숨을 많은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본절은 그리스도의 대속을 논한 중요한 구절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근거로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는 가장 중요한 구절로도 취급된다. , 더구나 본절이 복음서의 일부로 그리스도 자신의 말슴이라는데 그으으는 큰 것이다. 우선 본귀절의 본문 비평적인 문제부터 취급해야 할 것이다. 여러 학자들은 본절의 진정성을 거부하여 왔다. 그근거로서는 (1)본문이 전후내용과 조화가 되지 않는 것 (2)대속물이란 낯말은 이곳이외는 신약 전체에서 나타나지 않는 것 (3)인자의 온것은이란 그리스도의 생애가 끊난 후를 암시하는 것 (4)사상적 내용은 바울의 영향이 현저한 것. 등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눅22:27(나는 섬기는자로 너희중에 있노라)가 원형이었고 본귀절은 후대의 신학적 첨가라는결론이 주어진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요한 발언은 언제나 어떤 기회를 따라 지나가는 말씀으로 주어졌다는사실에 비추어 본문의 위치를 의심할 필요도 없을듯하다.
대속물 - 가장 중요한 구절의가장 중요한 낱말이다. 신약에서 이곳에서 (마태의 병행귀와 더부어)한번만 나타나고 바울서신에는 합성형이 한 번(딤전2:6)보인다. 이낱말의 동사형 대속함은 3회(눅24:21, 딛2:14, 벧전1:18). 대속물을주고 성취된사실인 대속 이역시3회(눅1:68, 2:38, 히9:12)나타난다. 이낱말의어근은 푼다 이며 구약의 제사법전에서 출발하였다. 즉 (1)이스라엘남자들이 받쳤던 반세겔의 생명의속전(출30:12). (2)소가 사람을 죽였을때지불한 은30세겔의 속전(추21:30). (3)처음난 아들을위해 바친 대속전(민18:15) (4)팔린 친족을 속량하기위해 지불한속전(레25:47 - 53) (5)팔린 토지를 무르기위해친족이 지불한 대가(레25:25 - 27)등의 배경을 고찰할수 있다. 이낱말의고전 그릭의배경은 보통복수로 사용되고 포로나 노예들을 해방시키기위한 속전을 뜻했다. 이와같은 구약적 및 고전 그릭의 배경아래 이낯말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설명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게된 것이다. 즉 그가 죄와 죽음의 노예상태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위해 지불하신 보혈의값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은 교회역사를 통해 논의되어 (1)그리스도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공의에 만족을 주었다. (2)마귀에게 인간의죄값을 지불하셨다. (3)단지 인간에게 도덕적 감화를 주었다. 등의 학설로 발전되었다. 3번은 속죄론과 방향이 엇긋난 것이다. 2번에 있어 하나님은 인류의 범죄와 구원에관해 마귀를 징벌하실일이지 그에게 값을치루셔야 할의무는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값을 지불하신대상은 범죄한인간은 죽으리라(창2:17)는 하나님 스스로 정하신 법도이다. 결국 이와같은 하나님의 공의를 그리스도의죽음이 만족하게 성취하므로 인류를 죄의 결과인 죽음에서 구원하신 것이다. 많은 사람의 - 많은사람을 대신하여 다. 여기 역시 전치사중요한 것으로 을 위해On behaif"가 아니라 의 자리에서 (대신하여)in the Place of"다. 즉 이와동의어인 단수이 . . . 의 유익을 위한것 을 표시함에대해 이는 엄격히 남의자리에서 그를 대신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 여기<망은사람>은 오히려 모든사람 all 으로 이해된다. 딤전2:6(그가 모든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에는 모든 사람으로 되어 있으며 그외 명사나 전치사등도 본절과 대조가 되는 것이 주목된다. 아마 본절은 사53:11(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의 반영으로 보인다.
=====10:46
여리고에서 나가실때에 -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방을 우회하시고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강서편의도시오 예루살렘의 관문인 여리고에 이른 것이다 . 그것은 당시 북방 갈릴리인의 일반적 순례길이기도 했다. 여리고는 지중해면에서 2500미터나 낮은곳이며 따라서 해발 762미터의 고지인 예루살렘에서는 내림길이 있다. 사해 북쪽 요단강 하류의 서편에 위치한 비옥한 곳이며 현재는 엘리하Er - Riha라 불리운다. 일찍부터 주민이 많아 융성한 산업도시였고 헤롯대왕이 궁전을 건축하여 이도시를 미화시켰고 이곳에서 사망 하였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여호수아 때부터 관련되었고 지금도 구도시의 유적에는 여호수아가 파괴한 성곽이 남아있다. 기후는 아열대성이다. 디메오의 아들인거지소경 바디메오 - 그의 이름을 밝히는 것은 본서 뿐이다. 바디메오 역시 디메오의 아들 을 뜻함으로 결국 겹말이 된셈이다. 히브리어를 알지못한 이방인 수신자를 위해 주해적 설명을 부친 것이다. 그의 부친 디메오는 당시 여리고에 알려진 인물같다.
=====10:47
나사렛 예수시란. . . . . 다윗의자손 예수여 - 본서에는 흔하지 않는 이름이다. 전자는 1:24이후 처음이고 , 후자는 이곳에만 나타난다(48절 및 간접적으로는 12:35). 전자는 비하하신 주의 인성을 가리키고 (요1:46), 후자는 바로 메시야의 별명이다. 유대인은 메시야를 다윗왕의 재현으로 생각하고 그의 나타나심으로 사방의 적들을 정복하여 다윗왕국을 재건 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일반군중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가르쳐 줄때에 즉각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 부른데 이소경의 위대한 신앙이 엿보인 것이다 . 아마 그는 일찍부터 예수에 관해 들었고 이예수가 바로 메시야이신것도 믿어 그를 만나기를 소원 하고 있었을 것이다.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 . .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 짖궂게 돈을 구하는 것은 거지의 본성이었고 또 이런거지를 무조건 제지하는 것은 일반의 군중 심리였다. 그러나 입전만은 사정이 달랐다. 거지는 상대를 바로 알았고 또 바른 것을 구했고 군중은 그런 것을 모르고 무조건 제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지는 굴복하지 않고 더욱 소리지른 것이다. 신앙에는 언제나 장해가있고 그장해를 극복하므로 신앙은 성숙해 지는 것이다. 군중이 이적행사를 막기위해 거지를 제지한 것은 부당한 것이다. 저들은 거지의 성급한 다윗의자손을 제지했고 그것을 입성하실때까지 (11:10)마21:15. 보존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Gould) 아마 Gould의 견해역시 정당하게는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때 군중은 아직 예수의 메시야성(다윗의자손)에 명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49
머물러서서 저를 부르라 하시니 저희가 그소경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른다 - 갇은동사의 세변화가 주목된다 . 이부근의묘사는 본서에 독특하고 또 정밀하다. 목격자의 증언을받아 거룩한 본서의 특징인 것이다. 군중은 이제 약간의 동정을 나타내어 거지소경을 도와 예수께 나아가게 한 것이다. 하여튼 예수의 관심은 약한자, 그리고 진실된 구도자에게 쏠리신 것이다.
=====10:50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일어나 - 역시 본서만이 간직하는 생생한 묘사다. 소경은 기쁨과 열정 때문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 나와왔다. 천재 일우의기회를 잃을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수한 구도자를 주는 또한 환영 하신다.
=====10:51
네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 . . 보기를 원하나이다 - 직접적 질문에 솔직한 회답이었다. 예수께서는 이적을 행하시기전에 흔히 이와같은 질문을 하셨다(5:9, 30, 6:38, 9:21). 병자에게 용기를주어 신앙을 고백을 시키시려는 것이었다. 소경의 회답은 솔직하고 근본적이었다. 그는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돈을 구하지는 않았다. (행3:2) . 그리스도에게 우리는 근본적 해결을 구해야한다. 선생님이여 - 이곳과요20:16(부활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께 부른)에만 나타나며 , 선생에대한 최고 존칭어다. 일반적인용어 랍비 (9:5, 요1:38). 는 나의큰자 의뜻으로 선생 을 가리키나 이는 나의증인, 또는 나의선생 을 뜻한다. 앞선 다윗의 자손이여 와 더불어 이칭호에서도 이소경 거지의 큰 믿음이 보인다.
=====10:52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 5:34주 참조.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흔히 하신 말씀 이었다. (마7:50, 8:48, 9:22, 17:19, 18:42 등). 그리스도의 이적적 권능을 유도하는 것은 믿음이다. 본문의 경우 소경의믿음은 그의 간곡한 태도와 메시야적 칭호를 부른데 있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 소경이 고침을받은후 예수를 쫓는 것이 특기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받는자는 주의뒤를 따라살 의무가 있는 것이다.
전장에서는 예수께서 최초로 메시야 신분 및 그 사역의 본질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 이제 본장에서는 전장에서 계시된 내용이 더욱 구체적이고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첫번째와 두번째 수난 예고 사이에 변화산 사건이 수록되어 있는 점이나 수난 예고가 먼저 있은 연후에 변화산 사건이 등장하는 순서의 의미 등의 문맥상의 유의 사항은 마태복음 평행 부분(17장)의 강해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조하기 바라며, 여기서는 본장의 중심 주제를 다음 두 가지의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상고해 보기로 하자.
(1) 예수의 수난과 영광. 본장의 내용은 세 문단으로 나누어지며(1-13;14-32;33-50
절). 이 가운데 첫번째와 두번째 문단은 각기 예수의 영광과 수난을 시사하는 두개의 소단락으로 구분될 수 있다. 즉, 1-8절은 베드로에 의해 고백되어진 바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보여 주는 반면에, 9-13절은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인 십자가 수난을 재차 예고하는 내용이다. 또한 14-29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영광스러운 권능이 소개되는 반면, 30-32절에서는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 감당해야 할 수난이 다시금 예고된다. 마가가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광과 수난에 관한 내용을 거듭 교차시킨 것은 첫째로, 앞장에서 계시된 메시야의 신분과 사역의 본질을 보다 확실히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며, 둘째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고난에 함축된 역설적 진리를 강조하여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2) 제자 훈련. 공생애를 결산하는 시점에 이르러 예수께서 열 두 제자들에게 집중적인 교육과 훈련을 시행하기 시작하셨다는 사실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본장에 수록된 사건들이 결론적 교훈 및 경계 부분인 세번째 문단(33-50절)은 물론이고 본장 전체는 예수의 제자화 훈련에 대한 의지를 뚜렷이 보여 준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주님의 의도와는 달리 당신의 이루고자 하신 일을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32절). 아마 그들은 예수의 변화된 일련의 태도와 행동들을 통해, 그들이 기대해왔던 시기가 바야흐로 도래하고 있음을 인식하였던 것 같다. 메시야로서의 자기 계시와 영광스러운 변화산 사건 이후에는 항상 예수의 수난 예고가 뒤따랐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의 영광과 관련된 사실에만 집착하고 수난에 관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거나 의아해 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예수께서 이적적 권능을 행사하사 정치적 메시야로 등장하리라는 기대에만 부푼 나머지,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을 때를 전제한 자리 다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34절). 그들의 관심사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보다는 세상에로 집중되어 있었고 십자가 고통없이 면류관만 바라고 있었으므로, 예수의 영광과 수난이 동시에 함축되어 있는 역설적 진리를 깨달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제반 이유들로 말미암아 예수께서는 집중적인 제자 훈련을 시행하셨다.
1. 변화산 사건(9:1-13)
본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메시야직의 비밀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신지 엿새 후에 세 제자 앞에서 영광스러운 형태로 변모하신 내용이다. 이 변모(Transfiguration) 사건은 성육신(Incarnation), 십자가 수난(Crucifixion), 부활(Resurrection) 및 승천
(Ascension)과 더불어 예수 생애의 5대 사건에 해당하며,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마 17:1-13;눅 9:28-36). 마 17:1-13 강해에서는 변화산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순서별로 하나하나 상세히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사건의 목적 혹은 의의를 상고하는 데에 그치기로 하자.
(1) 메시야되신 예수를 증거함. 예수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에 세례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 선포받음 바 있거니와(1:11), 이제 공생애의 마감 시기에 즈음하여 다시 한번 하늘의 인정을 받고 있다(7절). 뿐만 아니라 본문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씀을 나누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4절), 이는 곧, 구약의 모든 율법과 예언이 예수를 메시야로 증거함을 암시한다. 또한 본문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골 3:4). 비록 고난받는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를 증거하는 본문은 8:29에 언급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확증이기도 하다.
(2) 제자들을 위한 위로와 교훈. 본문은 또한 예수의 제자 훈련이란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예수의 행동이나 메시지는 고난과 희생이라는 주제에로 더욱 집중될 것이었으며, 영적 무지의 늪을 벗어나지 못한 제자들에게는 이 주제가 감당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었다.특히 불과 며칠 전에 예수는 자신의 수난을 처음으로 공공연하게 예고하셨거니와(8:31), 이 예고를들은 제자들은 한편으로 의아해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불안에 사로잡혔음직하다. 따라서 예수는 영광스럽게 변화된 모습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제자들의 불안과 동요를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그들로 장차 당신의 영광을 널리 증거하게끔 훈련시키고자 하셨다고 볼 수 있다.
제자 훈련이라는 관점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우리는 예수의 거시안적(巨視眼的) 계획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광경을 보고서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곤경과 궁핍에 허덕이는 산 아래의 무리들(14절 ff.)을 도외시한 채 영광에만 집착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또한 예수를 모세나 엘리야와 동등한 위상(位相)에 두었다(5절). 이처럼 당시 제자들의 영적 상태는 실로 보잘 것 없었지만, 이 모든 체험들이 장래에는 그들을 교회의 지도자로서 봉사하게 하는 데에 큰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었다.
2. 귀신 축사(逐邪)와 두번째 수난 예고(9:14-32)
본문은 변화산 사건 직후에 예수께서 귀신들린 아이를 치유하시고 이어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8장에 수록된 메시야의 자기 공개가 예수의 공생애에 있어 일대 전환점을 마련하는 사건이었음은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전환점이란 측면에서 본문의 치유 기사는 예수께서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 또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후 처음으로 복음 사역을 개시하신 사실에 비견될 수 있다(1:14,15).
이 사건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수록되어 있으며(마 17:14-20;눅 9:37;43b), 그 중에
서 본서의 설명이 가장 상세하다. 마태는 이 사건을 비교적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제자들의 불신 상태를 지적하려는 의도를 강력히 시사한다. 따라서 마 1:14-21의 강해에서는 이 '믿음'의 문제에다 초점을 맞추어 믿음의 보존과 진보 및 믿음의 본질과 능력 등을 상고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본문을 통해 뚜렷이 부각되는 두 가지 대조적인 사항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고 예수의 두번째 수난 예고(30-32절)에 관한 강해는 본서에 수록된 예수의 세 차례의 수난 예고를 비교하는 주제 강해로 대신하고자 한다.
(1) 변화산 위와 산 아래. 라파엘로(Raffaello Santi, 1483-1520)라는 유명한 화가
의 그림 중에는 변화산상의 영광스러운 광경과 산 아래의 참경(慘景)을 선명히 대조시킨 것이 있다. 이 그림에서 보여 주듯이 제자들은 영광의 광경을 목격하고 흥분과 환희에 도취되어 예수께서 감당하셔야 할 사역과 자신들이 해야할 일들을 잊은듯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는 당신의 영광 가운데 계속 함께 머무르고자 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다. 주님은 변화산상에 계시면서도 자신이 필히 완수해야 할 고난받는 종의 사명과,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사 그들의 영육간의 궁핍함을 채우고자 하는 봉사의 삶을 결코 잊지 않으셨다.
변화산의 위와 아래의 대조적인 두 광경은 어거스틴(Augustine)의 말한 바 두 도성을 연상시킨다. 즉, 성도들이 위로는 영화롭고 이상적인 신천 신지(新天新地)에 대한 비전을 바라 보지만, 아래로는 온갖 부조리와 비극이 더불어 존재하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이 두 세계간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느냐 하는 문제야말로 신앙 생활의 큰 관건 중의 하나라 하겠다. 인간 상호간의 모든 수평적 관계를 건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에 충실해야 함이 당연하다. 따라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내밀하고도 깊이 있는 영교(靈交)의 시간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현실을 도외시하고 영원한 피안의 세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것은 바른 신앙 자세가 아니다. 묵상에서 실제적 활동(praxis)으로, 서재에서 구체적 삶의 터 (field)로, 밀실에서 가두(街頭)로 그리
고 주님과의 내밀한 영교에서 사단과의 전투로 나아가는 신앙이어야말로 올바르고 생명력 있는 신앙이라 하겠다.
(2) 예수의 권능과 제자들을 불신. 또한 본문에서는 귀신을 제어하는 예수의 권능과 믿음이 없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기력함이 뚜렷이 대조를 이룬다. 제자들은 이미 예수의 권능을 수(數)없이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도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그 크신 권능을 나타낼 수 있다는 약속을 받았다(마 21:22;요 1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믿음을 상실하고만 듯하다. 이제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기 시작하는 이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들은 잠시 예수와 떨어져 있는 사이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 훈련이 집중적으로 강화되어갔음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은 영적 무지와 불신에 대한 예수의 안타까움과 책망도 더 노골적으로 나타난다(41절).
불신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권능을 상실해 버린 이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다. 사단은 고통스러운 역경이나 달콤한 유혹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성도들을 은혜의 보좌로부터 멀어지게 하려 한다. 따라서 늘 기도에 힘쓰고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르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에만 저러한 사단의 궤계를 물리칠 수 있다(고전 15:58;빌 4:8;딤전 4:7,8;벧전 3:11).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영혼의 질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사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무수하다. 그리고 이들의 멸망을 방관하는 자는 주님 앞에 섰을 때에 그 책임을 반드시 추궁받을 것이다.
* 세 차례 수난 예고의 비교.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수난당하시리라는 예고는 공생애 초기부터 당신의 여러 말씀들 속에 암시되어 왔다. 그러나 예수께서 본격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수난을 예고하신 때는 메시야로서의 자기 공개 이후이다. 예수의 사역 면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한 이후로부터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집중적으로 예고 하심으로써, 예수는 메시야직의 본질적 의미를 확실히 표명함과 아울러 제자들도 고난과 희생에 내포된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당신의 뒤를 좇게끔 교육하고자 원하셨다. 세 차례에 걸친 예수의 공개적 수난 예고는 공관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각 수난 예고의 시기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직후(8:31-9:1;마
16:21-28;눅 9:22,23), 변화산 사건 직후(9:30-32;마 17:22;눅 9:43b-45)그리고 예루
살렘으로 올라가는 무렵(10:32-34;마 20:17-19;눅 18:31-34)등이다. 그리고 공관 복음
서 기자들 중 유독 마태만이 마 26:1-5에서 수난 예고를 한 차례 더 수록하고 있다.
세 차례에 걸친 공개적 수난 예고를 비교해 보면. 점차적으로 그 수난 과정과 수난 상황이 구체화 되어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예고에는 한결같이 예수의 부활이 동시에 언급됨으로써, 주께서 잠시 고난을 당하나 마침내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스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라는 종국적 승리가 제시되어 있다.
(1) 첫번째 예고는 수난의 전반적 측면 곧, 수난당하실 장소, 핍박의 주동 세력, 예
수의 죽으심과 부활 등을 예시하며, 예수의 고난에 제자들도 동참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2) 두번째 예고는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것을 묘사한다.
(3) 세번째 예고는 예수의 수난 장면을 가장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즉 예수께서 희롱과 능욕과 채찍질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게 되는 과정들을 생생하게 예언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는 자신 앞에 놓인 고난의 쓴 잔을 너무도 명백히 알고 있었지만, 그 잔을 회피하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감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고자 하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자발적이고도 완벽한 순종을 보게 된다(요 1:29).
* 귀신들림과 축사. 공관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데에 공생애의 상당한 부분을 할애하셨다(1:34;마 4:24;눅 4:40). 특히 여기서는 귀신 축사(逐邪)에 관해 일고해 보기로 하자. 이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 우리는 먼저 귀신의 존재와 속성 및 활동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분명 귀신의 존재를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성도들 중에도 귀신의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사람들의 있는가 하면 인정은 하되 귀신에 대한 비성경적 식견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1) 귀신의 속성과 활동. 귀신의 영적이며(9:25;마 17:18), 지적인 존재이며(딤전
4:1-4:15;마 13:25) 사단의 지배를 확장시키는 일에 주안점을 두고 전개된다.
(2) 귀신들림에 대하여. '귀신들렸다'는 것은 귀신이 어떤 사람 안에 거하면서 그
사람에게 직접적인 통제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여 정신이나(마 17:15;요 10:18-21) 몸을 (18절;마 4:24;9:32,33;눅 11:14) 해(害)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 묘사된 바에 의하면, 귀신들린 자는 미쳐 날뛰기도 하고(5:5,15) 각종 병에 걸리기도 한다(욥 2:7;눅 4:40,41). 하지만 모든 병의 원인이 귀신에게 있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편 그리스도인은 그 속에 성령께서 내주하시기 때문에 귀신에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도라 할지라도 불순종에 빠져 성령의 도우심을 스스로 제한시켰을 경우에는 귀신의 활동으로 말미암아 귀신들린 듯이 보이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3) 귀신 축사. 귀신은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고 인간을 파멸로 인도하기 위하여 활동하기 때문에 추방되어져야만 한다. 귀신은 초월적 존재이므로 인간보다 우월한 능력으로써 인간을 괴롭힐 수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성령 충만함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낼 수 있다(16:17). 축사함에 있어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능력이나 특별한 주술적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권능으로써 귀신을 쫓는다는 것이다. 한편, 귀신은 예수의 이름으로 쫓겨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모든 귀신이 사단과 더불어 불못에 던지움을 받게될 것이다(창 3:14;눅 10:18;계12:9;20:10).
3. 어린아이를 통한 교훈(9:33-37)
서로 높아지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혁신적인 가치관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마태복음에서는 본문의 기사가 시작되기 전에,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shekel)을 꺼내어 성전세를 내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마 17:24-27). 마가는 그 이야기를 생략하고 본문의 기사를 막바로 연결시켜 이를 9:1-32에 대한 결론적 교훈으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문을 상고할 때 유념해 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제자들과 예수 사이의 내면적 괴리 상태. 제자들은 예수의 거듭되는 수난 예고를 듣고서도 그 뜻을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데 대한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강렬하게 기대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머리 속에는 머리 둘 곳도 없이 빈한(貧寒)하게 지내시며 병들고 가난한 무리들을 위해 수고하시는 종의 모습 보다는 이적적 권능을 행하며 영광 중에 거하는 승리자의 모습만이 인상깊게 남아있었을 것이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서 그 수난의 의미를 주지시키기 위해 애쓰시는 주님과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영광에 더욱 집착해가는 제자들 간의 괴리감(乖離感)은 이후의 내용들에서 더욱 현저해져 간다. 그들은 외관상으로는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예수를 따랐지만, 참된 메시야관에 대해 무지하였고 신앙의 도리의 심오한 진면목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영적 측면에서는 갓난 아이나 다름없었던 것
이다.
(2) 새로운 가치관. 겸손과 봉사 그리고 나아가 자기 희생을 강조하는 예수의 교훈은 세상적 가치관에 비할 때 실로 파격적이며 혁신적이라 할 만하다.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상의 일반적 가치관을 지배해 왔다. 자연 세계에서 우리는 사슬식으로 연결된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해 생태계(生態系) 전체가 유지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사람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다스리는 만물의 영장이요, 다른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숭고한 차원의 윤리적 요구를 받은 존재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일에 몰두하기를 좋아하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기적 욕망들이 서로 충돌하면 소위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장소로 전락되고 만다. 인간의 삶을 이런 관점에서만 파악하게 되면, 어떤 이기적 목적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돈과 권력으로 압축되는 세상적 힘을 얻지 못하면 심히 불안해 한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는 날이 갈수록 약육 강식의 힘의 논리가 더 신봉되어가고 극단적 이기주의가 패배해 감에 따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숭고한 천국 시민의 윤리는 단지 허공에서만 맴도는 추상적 이상론에 불과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러나 악인의 영화(榮華)는 실로 덧없는 것이요(시 37:2,10,38;75:8;잠 14:2;벧후 2:17),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와 사랑의 나라가 조만간 온 누리에 임하리라는 믿음을 확고히 가진 자는 본문의 교훈을 정금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천군만만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여길 것이다.
4. 제자들의 무지와 독선 및 범죄에 대한 경고(9:38-50)
앞 문단에 이어 본문에서도 제자들의 헛된 야욕과 무지 및 이를 교정시키고자 애쓰시는 주님의 교훈과 경고가 소개된다. 본문의 내용을 편의상 두 가지 주제로 나누어 상고하는 것이 좋겠다.
(1) 화목을 가르치심. 본문에 수록된 예수의 말씀은 요한을 위시한 제자들의 시기심과 파벌의식을 직접적 발달으로 하고 있다(38절).
이와 유사한 상황은 민 11:26-29에서도 나타난다. 즉, 여호수아(Joshua)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칠십인의 장로들 중에 피택된 엘닷(Eldad)과 메닷(Medad)이 이스라엘의 진 중에서 예언하자 이를 금하도록 모세에게 요청하였다. 아마도 여호수아는 엘닷과 메닷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줄로만 알고 그러한 요청을 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영적 무지를 노출시킨 것에 불과하였다.
본문의 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세속적 야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주의 일꾼의 사역을 금지시켰다는 점에서 여호수아보다 훨씬 더 완악하고 무지하였다(38절). 앞 단락에서 제자들은 그들간에 서로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불화를 일으켰거니와, 이제 여기서는 그들과 친분 관계가 없는 자들의 활동에 대해 공통적으로 시기하고 있다. 아마 당시 제자들은 지상적 메시야 왕국의 도래시에 자신들 외의 사람들이 요직(要職)을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혔던 것 같다. 더구나 제자들의 기억 속에는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치유하지 못했던 쓰라린 경험(14-18절)이 강렬하게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세속적 권력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대외적으로도 이간과 경쟁 의식을 드러내 보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는 앞 단락에 이어 섬김의 도를 재차 강조하면서(41절) 화목을 추구할 것을 명령하셨다(50절;잠 3:30;20:3;빌 2:3;약 3:4). 그리고 배타적 편견과 독선적 특권 의식을 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될 것을 가르치셨다(33-37절). 본문에서 주님이 힘주어 경계하신 당파성과 분리주의는 초대 교회와(고전 1:12)향후의 교회사 전체를 통해 나타났던 가장 큰 병폐 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실리에 집착한 나머지 다른 교파로 갈라서거나 새로운 군소 교단을 만들어 행세를 하려는 자들은 예수의 심판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2) 범죄에 대한 경고. 43-49절은 범죄에 대한 경고라 할 수 있다. 직접적 경고 대
상은 (1)항에 설명한 배타적이고 세속적인 당파심이라 하겠지만 넓게는 제자들이 처한 전반적인 심령 상태,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적 무지와 완악함에서 벗어나지 않는 모든 불신 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특히 우리는 본문의 경고가 매우 신랄하고 엄격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께서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을 당하시지 않으면 안 되었을 만큼 인류의 죄악이 심각한 성질의 것임을 시사함과 아울러 영생의 축복이야말로 그 어떤 희생을 지불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고귀한 것임을 상기시킨다(마 13:45,46).
또한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의 연악함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으므로 당장에는 그들이 무지와 불신 가운데 크고 작은 실수를 연발하는 것을 용납하사 불쌍히 여기시며 사랑으로 훈계하셨지만 성숙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될 죄악된 요소들이 있음을 분명히 천명하고 계신다.
* 지옥에 대하여. 여기서는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각기 다양하게 표현되는 지옥에 관하여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정의. 지옥이란 구속함 받지 못한 죄인들이 마지막 심판 후에 들어가게 될 형벌의 장소 혹은 고통의 상태를 의미하며, 사후의 중간 상태와는 구별되는 개념이다(눅 23:43 주제 강해 '사후의 중간기 상태' 참조).
(2) 구약 시대의 지옥관.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는' 끔찍
한 상황에 대한 이사야의 진술(사 66:24)을 제외하면, 앞에서 정의한 바와 같은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서의 지옥에 관한 언급이 구약성경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음부'(* , 스올)라는 개념 속에 지옥의 개념이 어렴풋하게 내포되어 있을 뿐이다(사 14:15;겔 32:23등). 구약성경에서 음부는 어둡고 그늘진 장소이며(욥 10:21,22;시 143:3), 침묵의 장소로서(시 94:17;115:17), 여기서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을 뿐 아니라(시 6:5;88:10-12)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곳(욥 14:21;전 9:5-10)이라 묘사되었다. 결국 초기 구약 시대의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선인과 악인 사이에 약간의 구별이 있기는 하지만 두 부류의 사람이 함께 어두컴컴한 지하 세계에서 기거하게 된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신구약 중간기의 지옥관. 선인과 악인간의 거처의 구별이 빈약한 구약 시대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은 신구약 중간기에 이르러 점차 선인과 악인을 분리하는 사상으로 발전되기 시작했고, 이와 더불어 비로서 지옥의 개념이 히브리인들의 의식 속에 지배적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4) 신약 시대의 지옥관. 신약 시대에 이를러 음부의 개념은 더욱 발전되어 의인의 영혼들이 부활과 백보좌 심판을 기다리며 임시 대기하는 장소인 낙원(낙 23:43)과 대치되는 개념. 즉 악인의 영혼들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기 전에 임시 대기하는 장소를 의미하게 되었다(눅 16:23;계 20:13).
한편, 이와는 별도로 영원한 멸망의 처소인 지옥에 관한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사실 또한 신약 시대의 특기할 만한 계시의 진전이다. 개역 성경의 '지옥'이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게엔나'(* )는 히브리어 '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하였다. 힌놈 골짜기는 몰렉(Molech) 우상에게 아이들을 인신 제사로 바쳤던 곳이며(대하 28:3;33:6), 요시야(Josiah)의 개혁 때에는 불결한 곳으로 선언되어 쓰레기 태우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예레미야(Jeremiah)에 의하면 그렇듯 가증스러운 인신 제사 관습이 여전히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레미야는 그곳을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였다(렘 7:32;19:6). 이러한 개념을 확대되어서 나중에 힌놈의 골짜기는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될 곳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한편, 주목할 만한 사실은 '게엔나'라는 말이 약 3:6을 제외하면 공관 복음서에만
나오며, 공관 복음서에서도 예수에 의해서만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에 대한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예수의 계시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예수는 지옥을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48절), '풀무불'(마 13:50), '영원한 불'(마 25:41), '바깥 어두운 데'(마 8:12)등으로 묘사하였다. 기타 서신서나 요한계시록에는 지옥이란 말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내세에서의 혹심한 형벌이라는 의미에서 지옥과 동일한 개념을 시사하는 구절이 많이 발견된다(롬 2:3-9;살전 5:3;살후 1:6-9;히 10:27;벧후 2:4-9;계 14:11등).
이 모든 사실로 미루어 볼때, 예수는 지옥의 교리를 명백하게 그리고 강조하여 가르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성경을 그대로만 해석하려는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성도들은 지옥을 묘사하는 말들이 비유적 언어이기는 하지만 더할 수 없이 두려운 현실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겠다. 지옥의 구체적 위치나 구조에 관한 언급은 없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엄연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 관해서는 분명히 언급된 만큼,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해야 할 긴급한 사명이 바로 전도임을 일깨워 준다(16:15;시 96:3;마 2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