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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0:1-3 없음
막 10:4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신24:1의 말씀을 오해한 것이다. 거기 말씀한 바는, 까닭 없이 아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고 그 아내가 "수치스러운 일"을 하였을 때에 그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신명기에 있는 그 율법에 기준하시어 답변하신다.
"이혼 증서"는, 히브리 원어로 세펠 케리두드라고 하는데 그 서식은 "아무에게. . . 아무날. . . 나 아무. . . 아무의 아들이. . . 강요됨이 없이 자결정과 자의지로 너를 놓아 주노니 너는 네 마음 대로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결혼할 수 있다. 보아라! 너는 누구에게나 면허되어 갈 수 있다"라고 한다(Klostermann, Das MarkusEvangelium. p. 99).
막 10:5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 여기 "마음의 완악"이란말은, 원어로 스클레로칼디안이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둔감과, 애타정신의 결핍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 어귀의 뜻은 이 시대의 인심이 완악하여 이혼을 많이 하므로 그것의 대책으로 신24장에 이러한 규칙을 내었다는 것이다. 반 루웬(Van Leeuwen)은 말하되, 이 규칙은 양허식의 것이고 적극적 명령의 것은 아니다(H-et is een concessie aan, een rekening houden met de zondige werkelijkheid, dezekan van dien, aard zijn, dat een scheiding mogelijk moet blijven)하였다. 그러나 이 규칙은 적극적 명령이 아닌 것도 사실이지만, 양허식 규칙도 아니고 제지법령이라 함이 가하다. 그 이유는, 그 때 사람들이 완악하여 함부로 이혼을 하므로 모세는 그것을 제지하기 위하여 아내에게서 "수치스러운 일"을 발견한 자만이 이혼 증서를 써 주고 이혼할 수 있다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막 10:6-12
이 귀절들에서는, 이혼해서는 안되는 신본주의적 이유를 말한다. 1남 1녀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원시부터 정하신 바니, 그 규정을 어기는 것이 곧, 죄악이다.
막 10:13
만져 주심을 바라고. - 이것은 만지기만 해도 복이 될 줄을 알고 그리한 것이다. 이 때는 예수님의 명성이 절정에 오른 것이다. 실제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누구를 만지시기만 해도 그에게 복이 된 것이다(마 9:21).
어린 아이들. - 이것은 헬라 원어로 파이디아니 열 두살 된 아이도 이 명사로 일컬었다(Van Leeuwen).
막 10:14
보시고 분히 여겨. - 이것은, 하늘 나라의 일을 위한다고 하면서 하늘 나라의 일을방해하는 것을 가석히 여기시는 의미의 의분이고, 그 제자들을 미워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이 말씀은 아이가 부모를 의뢰하는 것처럼,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신뢰를 천국인의 성격으로 여기신 말씀이다.
막 10:15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 - 이것은, 천국 복음을 아이처럼 단순하게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음을 이름이다.
막 10:16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멸시하는 의미에서 그 데리고 온 자들을 꾸짖었으나(13절),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안으시고 안수하시며 축복하셨으니 이는 얼마나 어린 아이들에게 대한 그의 애착심이 많으심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안수"- 는 하나님의 은혜를 그들에게 전달하는 비유적 행동이다.
막 10:17
한 사람. - 마태는 그를 청년이라고 밝혔고(마 19:20), 누가는 관원이라고 하였다(눅 18:18). 그는 이렇게 어느 편으로나 이 세상의 자랑꺼리를 소유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사람이 내세워 생명을 구함은 귀하다. 그러므로 그 점에 대하여는 예수님도 그를 귀히 여기신 것이다(21절).
달려 와서 꿇어 앉아. - 이것을 보면, 그가 영생을 얻기 위한 열심이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심만 가지고도 영생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따라야만 그것을 얻는다. "영생"은, 헬라 원어로 조엔 아이오-니온이니 랍비 문학에서는 그것을 카에 하올람 하빠(내세의 생명)라고 한다.
막 10:18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불선하심이 있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대하실 때에 그 사람의 진리 지식의 정도를 보시고 가르쳐 주시는 일이 많다. 이 청년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서 그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나 그는, 예수님을 다만 사람 뿐으로 알고그런 말을 했으므로 그의 말을 잘못이라고 하심이다. 그 이유는, 사람은 다 죄인이어서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하다"는 관념은, 구원 받는 길을 찾음에 있어서 첫째 장애물이 된다. 그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율법 지킬 책임 있음을 가르쳐 주셨으나 그것은, 그로 하여금 그것을 지켜 구원 받게 하려고 그리하신 것은 아니다. 사람은 율법을 지켜도 죄인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율법을 잘 지켜 본 사람은자기가 죄인임을 더 명백히 깨닫게 되고 그리스도를 신앙할 필요를 느낀다. 그러므로예수님은, 먼저 그로 하여금 율법에 주의하게 하여 그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고그 다음에 자기(예수)를 따르도록 하신 것이다(2절).
막 10:19
예수님께서 여기서 10계명의 제 2부인 여섯 가지 중 다섯 가지에 그의 주의를 일으키신다. 탐하지 말라는 계명만은 말씀하시지 않은 이유는 벌써 그가 지키지 못한 것이 그것임을 아시고 그것에 대하여는 조금 후 따로 주의시키려는 까닭이다. 이 특수주의건은 마지막(21절)에 밝히 말씀하신다.
막 10:20-22
이 청년은 10계명의 제 2서판 곧, 사람 상대로 지켜야 할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탐심에 대한 계명을 완전히 지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가 비록 속여 취하지는 아니하였다 할지라도(19절), 물질에 대한 탐심은 있어서 가난한 자를 돕지 않았으니 만큼, 계명의 본 정신인 사랑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그소유한 물질이 화근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물질이 도무지 없어야만 주님을 따를 가능서이 있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에게 대하여도 이런 특수한 말씀을 주셨으니 곧,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 어떤 자는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도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으나, 어떤 자는 가난한 자로 살아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나를 좇으라. - 상반절에,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하신 후 이말씀을 하신 것은, 의미 심장하다. 그 모든 것을 다 희생함은 예수님을 성과 있게 따르려 함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은 재물을 따르는 생활보다 비교할 수 없이 부한 생활이며 또 유일한 영생의 길이다. 어떤 사본들(A. N)에는 여기 "그 십자가를 지고"라는 어귀가 달려 있다.
우리 본문에 문제가 되어 있는 부자 청년은, 물질을 너무 애착하는 마음이 있는 자였기 때문에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
막 10:23
본절의 뜻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못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뜻이니 특별히 재물을 애착하는 자가 그렇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나라. - 여기서 이 말씀은 종말관적 천국 곧, 내세를 의미하기보다는 차라리 예수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복음을 믿는 신령한 축복의 권계를 의미한다. 물론 후자는 전자와 연결되어 있다.
막 10:25
바늘 귀. - 이 말씀은 좁은 구멍을 대표하는 것이다. 혹설에 이것은 유대식 가옥에 있는 작은 문을 의미한다고 한다. 어쨌든 이것은, 약대로서 통과하기 어려운 구멍을가리킨다.
막 10:27
부자로서는 재물에 대한 시험 때문에 신앙을 가지기 어려우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될 수 있다.
막 10:29, 30
이 부분에 관한 설교 참조. 그리고 눅 14:25-35에 대한 설교를 참조하여라.
막 10:31
눅 13:30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막 10:32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 여기 "앞에 서서 가시는데"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엔 프로아곤 아우투-스이니 이것은 예수님의 바쁘심과 열심과격동의 태도를 보이는 행동이다(Van Leeuwen).
이것은, 그가 이 길을 다 가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앞두고 취하신 태도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실 일에 대하여 사모하시었으니만큼(눅 12:50), 이런 태도를 취하시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때에 열심으로 앞서 걸으셨으나 말로 다 할 수 없는 대위험을 예감하셨을 것이다.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 어떤 사본들(A. N. D)은 이와 좀 다르게, "저희가 놀랐고 또 따르면서 두려워 하더라"라고 했으나, 화란 학자 밴 루웬(Van Leeuwen)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우리 한역은, "제자들은 놀라고 또 다른 사람들(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 다른 사본들의 의미한 바는, 제자들이 놀라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였다는 말이다. 이 말은 마가 복음에만 있으니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다니던 베드로의 말을 직접 받은 마가의 기록인 증표이다.
막 10:33, 34
여기에 예수님께서 세번째로 자기의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예언하신다. 첫번 것은 막8:31에 있고, 둘째번의 것은 막9:31에 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 그가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심은 마지막 걸음이고, 거기 가셔서 고통 받으시게 될 것을 생각하시어 제자들에게 특별한 주의를 일으키신 것이다. "인자"- 란 말은 영광의 메시야를 이름이다. 인자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고난 받으심은 하나님의 백성의 구속을 위한 큰 희생인 것이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 대제사장과 서기관은 그 때에 종교가의 최고급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으니 이상스러워 보인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들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은, 부패한 종교가가 먼저 종교를 해한다는 것이며, 그 해하는 정도가 가장 심하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언하신 것이 역시 우리의 신앙을 일으킨다. 밴 루웬(Van Leeuwen)은 말하되, "예수님께서 이런 예언을 하시게 된 것은, 성령님을 무한히 받으신 그의 자의식이 메시야에 관한 성경을 완전히 통찰하시므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하였다(Markus p. 147).
막 10:35
야고보와 요한. - 마태 복음은, "세배대의 아들의 어미"라고만 하고 또 그가 그 아들을 위하여 대언한 것을 기록하였다. 그의 이름은 살로메인데(막 15:40; 마 27:56), 즈안(Theodore Zahn)은 그가 예수님의 이모라고까지 주장하였다(Klostermann, Marcus Evangelium p. 163). 만일 즈안의 견해가 옳다면 이들의 청원이 혈연 관계를 의지하고 나온 것이다.
막 10:37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 그들은 메시야의 영광을 오해하여 이 세상의 것으로 알았다. 그들의 생각에는 주님의 좌우석은 땅 위에서 가장 높은 관직이었던 것이다. 이런 의미로 그 자리를 구한 것은 허영심이다. 천국은허영심을 만족시키는 곳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을 버리고 자기를 이기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곳이다.
막 10:38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 그들이, 천국의 영광을 구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이 세상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니 참으로 무식한 청원이다. 천국의 영광이란 것은 내가 높아지므로 받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낮아지므로 누리는 것이다.
나의 마시는 잔. . . 나의 받는 세례. - "잔"은 분깃을 가리키는데(시 11:6, 16:5, 23:5, 116:13; 사 51:17-23; 합 2:16), 여기서는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의 분깃을 의미한다. "세례"는 고난을 의미하는데 그와 유사한 표현은 구약에도 많이 있다(시 69:2, 3, 14, 15, 42:7, 124:4, 5, 144:7; 사 43:2). 예수님의 내세 영광에 참예하려는 자는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해야 된다.
막 10:39
여기 나타내신 예수님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다(행 12:1; 계 1:9).
막 10:40
나의 줄 것이 아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의 미천하신 자리에 계시며 그 사명의 영분을 순종하시는 의미를 보인다. 그는 내세의 영광에 대한 주재권을 아버지 하나님의 예정과 통치에 돌리신다. 그리고 자기는 그것의 주재권에 대하여 땅 위에서 간섭하실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요점은, (1)주님의 고난에 참예할 길이나 부심(굽어 찾음)하여야 될것과, (2)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면서 내세의 상급을 조급히 다투어 구하지는 말고, 일체를 하나님의 예정과 통치에 일임해야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가질것은 하나님의 예정과 통치를 신뢰하며 거기서 안식할 것이다.
막 10:41
열 제자가 야고보와 요한에게 대하여 분히 여긴 것은, 저희의 허영심 때문이었다. 곧, 저희 생각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높아지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서로 높아지려는 허영심에 불탔던 것이다.
막 10:42
예수님께서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이 허영심에 불타고 있는 제자들의 잘못을 지적하신다. 그것은, 이방 집권자들의 실례를 들어 여기 표현되었다. 이방 집권자(혹은 대인들)는 백성을 마음 대로 주관하며 영광을 누린다. 그러나 그것은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 하는 일이다.
막 10:43, 44
이 부분 설교를 참조하여라.
막 10:45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여기 "대속물"이란 말은, 헬라원어로 뤼트론이니 70인역(LXX)에서 코페르(출 21:30), 파다(출 21:30), 카알(레 25:24), 메키르(사 45:13)에 대한 번역을 이말로 하였다. 물톤과 밀리간(Moulton, Milligan)이란 두 학자에 의하면 이 말은 "대신"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신구약 밖에서는 노예를 해방하기 위하여 주는 속전을의미한다(Buiten O. en N. Test. is de gewone term voor het losgeld, dat een slaaf vrijkoopt voor de Manumissio, vgl. Deissmann, L. V. O. S. 278- Van Leeuwen, Markus p. 192).
많은 사람의. - 이 말은, 헬라 원어로 안티 폴론이니 "많은 사람들 대신에" 혹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의미를 취하든지 이 귀절이 대신 속죄의 의미를 가르치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These important doctrinal passages- Mt. 20:28, Mk. 10:45- teach the substitutionary conception of Christ'sdeath, not because of itself means "instead", which is not true, but beca-use the context renders any other resultant idea out of the question. - Robertso-n, Gr. p. 573). 예수님께서 이 귀절을 말씀하실 때에 이사야서 53장을 마음에 두시고 하셨을 것이다.
막 10:46
바디매오. - 힛직(Hitzig)과 카임(Keim)은, 이 사람의 이름 뜻이 수리아 말로 "소경의 아들"이라고 하여 그 기록이 일종의 상상으로 지은 이야기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그릇된 추측은 바이스(B. Weiss)가 옳게 반박하였다(Plummer). 사람의 이름은 풀어보면 모두 다 뜻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이름 가진 사람은 실재의 인물이 아닐 것인가?
막 10: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 이 귀절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바디매오가 말한 "다윗의 자손 예수여"란 말은 그의 신앙 고백인 것이 틀림 없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그리하였다. "다윗의 자손"은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다.
막 10: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 생명 있는 신앙은 박해 밑에서 더욱 운동력을 내는 것이다. 군중이 그 소경을 꾸짖되 그는 움츠러지지 않고 한층 더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짖었다. 그것이야 말로 필부로서 대중의 압박을 이긴 담대한 신앙이다.
막 10:49
제자들은 소경을 꾸짖었으나 예수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의 소리를 들으시려고머물러 서신다. 여기 "서서"- 라는 말은 어순상으로 강세형을 띈다. 이 말을 이렇게한 이유는, 예수님은 특별히 저런 불쌍한 자를 위하여 시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사실을 보여주시려는 까닭이다. 눅 4:18 참조.
막 10:50
소경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 이것을 보면, 그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에즉응할 뿐 아니라 전심적으로 순종하노라고 자기의 옷도 내어버리고 나아간 것이다. 이것은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은 귀한 신앙이다.
막 10:52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이것은 그의 믿음 자체가 구원을 가져왔다는 말씀이 아니고, 오직 믿음을 주시는 이는 예수님 뿐이신데 그가 그 구원을 받은 것은 그의 믿음이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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