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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4대 문인 옥소 권섭의 영삼별곡
작품의 성격
옥소 권섭은 조선의 명문 사대가 출신으로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을 탐승하며, 제주도를 제외한 칠도를 여행하며, 한시, 국문 시, 가사, 구곡체가, 음악, 미술, 의복에 있어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음악에 있어 우리나라 최초로 수파형 악보를 만들었다. 또한 평생 꿈꾼 것을 기록하여 몽기, 몽화를 남겼는데,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꿈을 이렇게 세세하게 남긴 것은 유일하다 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남긴 <영삼별곡>과 한글 시조는 연군을 노래한 것과는 전혀 다른, 사물이나 백성들의 모습을 노래한 것이어서 더 값지고 아름답다.
이런, 까닭으로 옥소 권섭을 널리 알리기 위해, 몽기와 몽화를 바탕으로 한 몽심술이란 가상의 꿈 세계와 현실을 판타지로 엮어 젊은 세대들에게 널리 알려, 제천과 단양, 충주 등에 옥소를 찾아 여행할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만들고, 한글의 우수성과 지역의 옥소 발자취에 뜻깊은 명소를 만들고 훗날 옥소문학관 건립에 초석이 되고자 함.
<성성자의 비밀과 영삼별곡> 시높시스
의림지인은 유년 시절에 우연히 몽심술을 배운다. 몽심술은 꿈을 통하여 시공을 넘나드는 기술이다. 그는 금수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줍게 된 성성자 방울은 몽심술로 언제든지 시간을 여는 귀물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살아간다. 그는 유년 시절 꿈에서 이차돈의 도움을 받아 몽심술의 고수가 되었다가, 까마득히 잊고 산다. 한편 일본에서 1671년에 옥소 권섭과 같은 해에 일본에서 태어난 히마리겐코란 여자 또한 몽심술을 접하고, 우연하게 이무기 영단을 먹고선 수백 년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1936년에 조선을 찾았다가 몽심술 절정고수가 되어 꿈속을 경영하고자 하는 야망을 갖는다.
주인공 옥소 권섭은 한양 삼청동에서 1671년에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시에 두각을 나타냈다. 시와 평생 탐승하며 남긴 아름다운 시와, 한시, 가사, 등을 『옥소고』에 남겼는데, 옥소고 표지에는 몽심술로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비밀이 있었다. 의림지인은 옥소고 배접지를 분리하여 성성자의 비밀을 풀어낸다. 이후, 몽심술에 깊숙이 들어가 히마리겐코의 야망을 꺾기 위해 노력한다.
옥소 권섭이 34세 되던 해에 영월-삼척까지 여행하며 쓴, <영삼별곡>을 완성하게 되는데, <영삼별곡>에는 꿈속 경영, 즉, 몽심술에 꿈속에서 현실이 바뀔 수 있는 비밀을 134구 한글로 노래했다가, 이 비밀을 히마리겐코가 풀게 되면, 미래에 한글과 가요는 물론, 케이팝까지 사라질 위기에 봉착하고 모든 것이 일본문화로 된다.
옥소는 먼저 세상을 뜬, 동생 권영의 간곡한 부탁으로 <영삼별곡>에서 문제가 되는 두 페이지에 쓰인 21구를 뜯어내어 먹어버린다. 그래야만, 누군가 몽심술로 시간여행을 하더라도 한글과 후대의 문화를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히마리겐코는 태백의 구문소에서 이무기를 사냥하여 영단을 섭취하여 더욱 고강한 무공을 소유한다. 그녀는 옥소 권섭이 자신이 평생 꿈을 꾼 내용과 그림까지 그린 책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몽심술을 완성하여 미래를 바꿀 계획을 세우지만, 옥소 권섭과 팔도에 산을 지키는 호국령들이 의림지인을 도와 히마리겐코의 야망을 꺾고 찬란한 한국문화를 지키게 된다.
제천문인협회, 제천시낭송회 회장
2006년 서포문학상 수상
대표저서 : 《불혹의 아라리》, 《구골플렉스》,《성성자의 비밀과 영삼별곡》
섭봉燮蜂 우00
1900년 출생. 방송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제천문인협회, 제천시낭송회 회장
2006년 서포문학상 수상
대표저서 : 《불혹의 아라리》, 《구골플렉스》,《성성자의 비밀과 영삼별곡》蜂 우동구禹東九
사)한국옥소(權燮)문화연구소
선비 정신이 그리운 시대
시대에 따라서 사람들도 변천해 왔다. 선사시대를 지나고 인간에게 문자가 생기고 경제가 생기면서 다채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게 비슷하다. 다만, 그 도가 너무 지나치는 게 문제다.
제천시청에서 봉양 쪽으로 국도를 따라서 가다 보면 신동이란 마을이 있다. 신동은 조선 시대 4대 문인 안에 들어가는 옥소 권섭이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등진 곳이다. 산기슭에 <문암영당>이 자리하고 있다. 문암영당은 권상하, 선산군호부사 이조 참판(善山郡護府司吏曹參判)에 추증된 수암의 장자 권욱, 가의대부 동지중추부사(嘉義大夫同知中樞府事)인 수암의 조카 권섭,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권섭의 아우인 권영의 영정을 봉안한 안동 권씨 문중의 사당이다. 이곳에서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유인석이 의병을 일으킨 장암마을이 있다. 의암 유인석은 수암 권상하의 학문을 잇고자 이곳에서 수학하던 중 일제의 잔학함에 분연히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오로지 국민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각오로 임하였다. 이 땅에 살다간 선비들이 대부분 청빈 낙도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요즈음은 청빈 낙도의 삶을 살아가는 학자는 눈 씻고 구경하기 힘든 정도다.
권섭이 쓴 유행록에 안동지방을 여행하다가 그곳 아전들이 여행이 보탬이 되라고 수십 가지의 물품과 준 사람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그 목록은 쌀 한 말, 콩 한 말, 꿩 한 마리, 마른 대구 두 마리, 청어 한 두름이었다. 여행하는데 필요한 물품이었다. 하지만 권섭은 단, 한 개의 물품도 받지 않았다. 단지, 그 사람들 이름만 적힌 종이를 갖고 길을 떠났다. 그냥 그 마음만 받겠다는 뜻이었다. 권섭은 당시에 벼슬도 하지 않고 그냥 여행 중이었다. 참으로 올바른 선비가 아닌가 싶다. 권섭의 친인척은 대부분 높은 관직에 있었다. 그러니 본인으로 하여금 작은 잡음이라도 생길까 추호의 욕심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요즈음 이러한 선비 정신이 사회 전반에 스며 있다면 부조리나 아빠 찬스나 엄마 찬스라는 말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신동마을에는 아직도 권섭의 후손이 정착하고 있다. 비단 후손이 아닌 사람도 위대한 사람을 존경하는 게 당연하다. 다른 곳을 여행하다 보면 이효석 문학관이나 박경리 문학관 등, 유명 문학인의 문학관이 있는데 제천은 조선 시대 4대 문인 안에 드는 훌륭한 분을 두고도 알리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평생을 살면서 연군을 노래한 것도 없었다. 민초들의 언어로 시를 읊었고 함께 어울렸다. 올곧은 선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고 조선 시대 황금 문학기를 이끈 권섭의 유물이 있는 곳을 개발하여 일반에 널리 알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2022. 10. 1.
옥소의 여행기 영삼별곡
이 몸이 천지간에 쓸 데가 전혀 없어 이 몸이 텬디간天地間의 ᄡᅴ올 ᄃᆡ 젼혀 업서
삼십 년 세월을 흐지부지 보내다가 삼십년三十年 광음光陰을 흐롱하롱 보내여다
풍정이 호탕하여 속세 밖에 인연 두고 풍졍風情이 호탕浩蕩ᄒᆞ여 믈외物外예 연업緣業으로
녹수와 청산을 분수대로 다니더니 녹슈綠水 쳥산靑山의 분分대로 ᄃᆞᆫ니더니
어느덧 병이 들어 임장을 닫았으니 져근덧 병病이 드러 님장林庄을 닷아시니
어떤 뒷 절 중이 말 많기도 하였구나. 엇던 뒷졀 즁이 헌ᄉᆞ도 ᄒᆞᆯ셰이고
지팡이 느슨히 짚고 나에게 이른 말이 쥬령을 느지 집고 날ᄃᆞ려 닐온 말이
그대 병을 내 모르랴, 수석의 병이노라. 네 병病을 내 모ᄅᆞ랴 슈셕水石의 고황膏肓이라
봄바람이 느릿하며 온갖 꽃이 거의 질 때 츈풍春風이 완만緩晩ᄒᆞ여 ᄇᆡᆨ화百花ᄂᆞᆫ 거의 딘 제
산속에 비가 개니 날씨도 맑을 시고, 산듕山中의 비 ᄀᆞᆺ 개니 텬긔天氣도 ᄆᆞᆰ을시고
어화, 이 사람아, 철없이 누워 있으랴 어와 이 사ᄅᆞᆷ아 쳘 업시 누어시랴
청려장 재촉해 짚고 가는대로 가자꾸나. 쳥녀댜ᇰ靑藜杖 ᄇᆡ야 집고 갈 대로 가쟈스라
잠결에 일어나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결의 니러 안자 창窓을 열고 ᄇᆞ라보니
맑은 바람 문득 불고 새 소리 지저귈 때 쳥픙淸風이 건듯 블고 새 소ᄅᆡ 지지괼 제
시냇가 방초 길에 동협으로 이어졌구나. 시냇ᄀᆞ 방초芳草 길히 동협東峽의 니어셰라
아이 종을 불러내어 뼈 드러난 야윈 말에 아ᄒᆡ죵 블너 내여 ᄲᅧ 걸닌 여왼 ᄆᆞᆯᄭᅦ
채찍을 거두어 쥐고 마음대로 놓아가니 채직을 거더 쥐고 임의任意로 노하 가니
삼짇날 좋은 시절 마침 좋을시고, 삼삼三三 가졀佳節이 ᄯᅢ 마ᄎᆞᆷ 됴흘시고
시골 아이 노인들은 봄날 흥취 못내 겨워 산동 야로들이 츈흥春興을 못내 계워
탁주병 둘러메고 시골 노래 느리게 불며 탁쥬병 두러메고 촌가村歌를 느초 블며
오락가락 다니는 양 한가하기 한가할 사. 오락가락 ᄃᆞᆫ니ᄂᆞᆫ 양 한가閑暇토 한가閑暇ᄒᆞᆯ샤
말등에서 늦은 잠을 석양아래 비껴들어 ᄆᆞᆯ등의 느즌 ᄌᆞᆷ을 셕양夕陽의 빗기 드러
천만 봉우리 계곡을 꿈속에서 지나치니 쳔봉千峰 만학萬壑을 ᄭᅮᆷ 속의 디내치니
주천으로 흐른 물이 청령포에 닿았구나. 듀쳔酒泉 ᄂᆞᆯ인 믈이 쳥녕포淸冷浦로 다하셰라
말 내려 네 번 절하고 울면서 하는 말이 ᄆᆞᆯ ᄂᆞ려 ᄉᆞᄇᆡ四拜ᄒᆞ고 에에쳐 울온 말이
석벽은 하늘 찌르고 인적이 그쳤는데 셕벽石壁은 참텬參天ᄒᆞ고 인젹人跡이 긋쳣ᄂᆞᆫᄃᆡ
사철나무 옛 가지에 소쩍새는 무슨 일인가. 동쳥슈冬靑樹 녯 가지예 쵹ᄇᆡᆨ셩蜀魄聲은 므ᄉᆞ 일고
창오산에 저무는 구름 갈 길도 깊을시고, 창오산蒼梧山 졈은 구름 갈 길도 깁흘시고
동강을 건너리라, 물가에 내려오니, 동강東江을 건너리라 믈ᄀᆞ의 ᄂᆞ려오니
사공은 어디가고 빈 배만 걸렸나니 샤공沙工은 어ᄃᆡ 가고 뷘 ᄇᆡ만 걸렷ᄂᆞ니
상앗대 손수 잡아 거슬러 올라가니 사앗대 손조 잡아 거스리 올라가니
금강정 붉은 난간 어렴풋이 내닫거늘 금강졍錦江亭 블근 난간欄干 표묘漂渺히 내ᄃᆞᆺ거ᄂᆞᆯ
어느덧 올라앉아 머리를 들어보니 져근덧 올라안자 머리를 드러 ᄒᆞ니
봉래산 꼭대기에 고운구름 어리는데 봉ᄂᆡ샨蓬萊山 졔일봉第一峯의 ᄎᆡ운彩雲이 어ᄅᆡᄂᆞᆫᄃᆡ
늙은 신선 마주 보아 무슨 일을 물어볼까. 션옹仙翁을 마조 보아 므ᄉᆞ 일 뭇ᄌᆞ올 듯
물건너 섞인 봉우리들 취연에 잠겼구나 믈건너 석린봉들 취연翠煙에 잠겻고야
청산은 은은하고 벽계수 둘렀는데 쳥산은 은은ᄒᆞ고 벽계슈碧溪水 둘럿ᄂᆞᆫᄃᆡ
운니촌 산밑마을 이름도 좋을시고, 운리촌 뫼 밋 ᄆᆞ을 일홈도 됴흘시고
산속 집에 손님없어 개와 닭 뿐이로다 산가山家의 손이 업서 개와 ᄃᆞᆰ ᄲᅮᆫ이로라
귀리를 데친 밥에 풋나물 삶아 내어 귀오리 데친 밥의 픗ᄂᆞ믈 ᄉᆞᆯ마내여
포단을 펴 앉게 하고 싫도록 권하누나. 포단蒲團 펴 안쳐 노코 슬토록 권勸ᄒᆞ슨다
어화, 이 백성들, 기특도 한 게로다. 어와 이 ᄇᆡᆨ셩百姓들 긔특奇特도 ᄒᆞᆫ져이고
험한 냇물 스무굽이 건너고 다시건너 머흔 내 스므 구ᄇᆡ 건너고 곳여 간녀
십리 길 긴 계곡의 절벽도 좋거니와 십니 쟝곡의 졀벽絶壁은 됴커니와
계단 길 험한 곳이 양 골짜기 닿았으니 서덝 길 머흔 곳의 냥협兩俠이 다하시니
머리 위 조각하늘 뵈락말락 하는구나. 머리 우 조각 하늘 뵈락 말락 ᄒᆞᄂᆞ고야
밀거니 당기거니 꽃냄새 맡으면서 나아가니 밀거니 ᄃᆞᄅᆡ거니 곳 드르며 나간 말이
별이실 외딴 마을 해는 어이 쉬 넘어가니 별이別異실 외ᄯᆞᆫ ᄆᆞ을 ᄒᆡᄂᆞᆫ 어이 쉬 넘거니
봉당에서 자리보고 밤 지내고 가자꾸나. 봉당封堂의 자리 보아 더 새고 가쟈스라
밤중에 사립문 밖 긴 바람 일어나며 밤듕中만 사립 밧긔 긴 ᄇᆞ람 니러나며
새끼 곰 큰 호랑이 목 바꾸며 우는소리 삿기 곰 큰 호랑虎狼이 목 ᄀᆞ라 우ᄂᆞᆫ 소ᄅᆡ
산골을 울렸으니 기세도 대단하구나. 산山ᄭᅩᆯ의 울혀이셔 긔염氣焰도 홀난ᄒᆞᆯ샤
칼 깨어 곁에 놓고 이 밤을 겨우 새워 칼 ᄲᅢ혀 겻희 노코 이 밤을 계유 새와
앞 내에 빠진 옷을 쥐어짜서 손에 쥐고 압 내희 ᄲᅡ딘 오슬 쥡 ᄧᅡ셔 손의 쥐고
다른 길로 돌아가며 벌판 불에 쬐어 입고 긴 별오 도로 ᄃᆞ라 벌ᄲᅳᆯ의 ᄧᅬ야 닙고
진나라 때 숨은 백성 이제 와 보게 되면 진秦 적의 숨은 ᄇᆡᆨ셩百姓 이제 와 보게 되면
무릉도원 여기보다 낫다는 말 못하려니 도원桃園이 여긔도곤 낫닷 말 못ᄒᆞ려니
하늘가로 갈라진 산 대관령에 이었으니 텬변天邊의 ᄀᆞᄅᆞ진 뫼 대관녕大關嶺 니어시니
위험하고 높은 고개 촉도길이 이러할까. 위ᄐᆡ危殆코 놉흔 댓재 쵹도란蜀道難이 이러턴가
하늘에 돋은 별이 잘하면 만질 듯하다. 하ᄂᆞᆯ의 도든 별을 져기면 ᄆᆞᆫ질노다
넓고도 큰 바다가 그 앞에 둘러있어 망망茫茫 대양大洋이 그 알픠 둘러 이셔
대지와 산악을 밤낮으로 흔드는 듯 대디大地 산악山岳을 일야日夜의 흔드ᄂᆞᆫ ᄃᆞᆺ
밑 없는 큰 구렁에 끝없이 쌓인 물이 밋 업슨 큰 굴헝의 ᄒᆞᆫ限 업시 ᄡᅡ힌 믈이
만고에 한결같이 줄지 않고 있었던가. 만고萬古의 ᄒᆞᆫᄀᆞᆯ ᄀᆞ티 영튝盈縮이 잇돗던가
천지간의 장한 모습 반이 넘게 물이로다. 텬디간天地間 장壯ᄒᆞᆫ 경계境界 반半 남아 믈이로다
아마도 저 기운이 무엇으로 생겼는고, 아마도 져 긔운氣運이 무어스로 삼겻ᄂᆞᆫ고
성인을 언제 만나 이 이치를 물어보리, 셩인聖人을 언제 만나 이 니理를 뭇ᄌᆞ오리
바윗길 익은 중이 가마를 느릿 메고 바회 길 닉은 듕의 대 남여藍輿 느초 메워
떨어진 험한 벼랑 어는 듯 지나치고 ᄯᅥ러진 험險ᄒᆞᆫ 빙애砯崖 얼ᄂᆞᆫ ᄃᆞᆺ 디내티여
청옥산 큰 속으로 첩첩이 돌아드니 청옥산靑玉山 한 속으로 쳡쳡疊疊이 도라드니
운모 병풍 비단 장막 좌우로 펼쳤구나. 운모병雲母屛 금슈쟝錦繡帳이 자우左右로 펼쳐셰라
운교를 걸어 건너 솔숲에 쉬어 앉아 운교雲橋를 걸어 건너 솔 속의 쉬여 안자
나무하는 아이들아 지난 일을 물어보자. 나모 ᄒᆞᄂᆞᆫ 아ᄒᆡ들아 디난 일 뭇쟛고야
바람에 움직인 돌 날려온 지 그 몇 해며 ᄇᆞᆯ암의 움즉인 돌 ᄂᆞᆯ여젼 디 긔 몃ᄒᆡ며
짝 없는 옛 성문을 어느 때에 쌓았는가. ᄧᅡᆨ 업슨 녯 셩문城門이 어ᄂᆞ 적의 ᄡᆞ닷 말고
이 손님 뉘시기에 어이 들어와 계시는가. 이 손님 뉘시완ᄃᆡ 어이 들어와 계신고
낫고 새끼 메고 찬 앞 절의 상좌러니 낫 ᄉᆞᆺ기 메오 ᄎᆞ고 압 졀의 샹재上佐러니
나무 섶 따러 와서 무심히 다니노라. 나모섭 ᄯᆞ라 와셔 무심無心이 ᄃᆞᆫ니오네
진관암 문 닫은 줄 우리 다 알거니와 진관암眞觀庵 폐廢ᄒᆞᆫ 줄은 우리 다 알거니와
그 밖의 물을 일은 피리소리에 부쳤구나. 그 밧긔 몰을 일은 목젹牧笛의 부쳐셰라
산 밑에 서린 용이 변화도 무궁하여 뫼 밋희 설인뇽龍이 변화變化도 무궁無窮ᄒᆞ야
어둡고 깊은 오랜 못을 동굴 집을 삼고 있어 음심陰深ᄒᆞᆫ 오랜 소희 굴ᄐᆡᆨ窟宅을 삼아 이셔
층층 바위 백 척 위로 흰 베를 걸어두고 층애層厓 ᄇᆡᆨ쳑百尺의 일필년一匹練 거러두고
대낮에 벼락소리 동굴 계곡 잦았으니 ᄇᆡᆨ일百日 뇌졍雷霆이 동학洞壑의 ᄌᆞ자시니
굽혀서 내려 보려니 내 마음 약해지네. 구프려 보던 줄이 내일이 섬ᄭᅥ올샤
밝은 모래 잇달라 밟아 동해로 내려가서 명사明沙를 믄이 ᄇᆞᆯ아 동ᄒᆡ東海로 ᄂᆞ려가셔
백옥주 벌려둔 곳 헤치고 앉으면서 ᄇᆡᆨ옥쥬白玉柱 벌은 곳의 헤혀고 안즌 말이
동서를 모르는데 원근을 어이 알리. 동셔東西를 모ᄅᆞ거니 원근遠近을 어이 알니
물결위로 뜬 돌기 줄줄이 펼쳐 있어 창파滄波의 ᄯᅥᆺᄂᆞᆫ 돗기 주줄이 펼텨이셔
엊그제 어디 지나 어디로 간단 말고. 엇그제 어ᄃᆡ 디나 어ᄃᆡ로 간닷 말고
어촌의 늙은 사공 손 흔들어 불러내어 어촌漁村의 늙은 샤공沙工 손 헤여 블너내여
바다 위 소식을 실컷 물은 후에 ᄒᆡ샹海上 쇼식消息을 슬ᄏᆞ장 믈은 후後의
횃불을 재촉해 들고 성문으로 들어가니 홰블을 ᄇᆡ야 들고 셩문城門을 드러가니
소리 높은 나팔 소리에 바다 달이 돋았구나. 오오嗚嗚 군각셩郡角聲의 ᄒᆡ월海月이 도다셰라
금소정 도로 가니 일곱 신선 그 뉘런가. 금쇼졍琴嘯亭 도로 ᄃᆞ라 칠션七仙은 긔 뉘런고
금비녀 옛이야기 몇 해나 되었는가. 금ᄌᆞᆷ구ᄉᆞ金簪舊事ᄂᆞᆫ 몃 ᄒᆡ나 되엿ᄂᆞ니
소동파 적벽부의 학 그림자 그쳤는데 소션蘇仙 젹벽赤壁의 학영鶴影은 그첫ᄂᆞᆫᄃᆡ
좋은 세상 붉은 봉황을 헛되이 기다릴까. 셔셰단봉瑞世丹鳳을 헛虛되이 기ᄃᆞᆯ일샤
큰 칼을 빼어내어 손으로 걷어쥐고 댱검長劍을 ᄲᅢ쳐 내여 손 속의 거더 쥐고
긴 노래 한 곡조를 목 놓아 부르면서 긴 노래 ᄒᆞᆫ 곡죠曲調를 목 노하 블은 말이
산호벽수 걸린 처마에 바람에 비껴앉아 산호벽珊瑚碧 슈헌樹軒의 ᄇᆞ람의 비겨 안자
이적선의 풍채를 다시 만나 보겠구나. 니젹션李謫仙 풍ᄎᆡ風彩를 다시 만나 볼 거이고
장경성 붉은빛이 그 아니 그것인가. 댱경셩長庚星 ᄇᆞᆰ은 빗치 긔 아니 거롯던가
태백산 깊은 속에 거기 아니 가 있는가. 태ᄇᆡᆨ산太白山 깁흔 속의 게나 아니 가 잇ᄂᆞᆫ가
오르고 내리며 실컷 헤아리니 오ᄅᆞ며 ᄂᆞ리며 슬ᄏᆞ장 헤다히니
어화, 야단스럽구나. 내 아니 허황한가. 어와 헌ᄉᆞᄒᆞᆯ샤 내 아니 허랑虛浪ᄒᆞ냐
유하주 가득 부어 달빛을 섞어 마셔 뉴하쥬流霞酒 ᄀᆞ득 부어 ᄃᆞᆯ빗츨 섯거 마셔
가슴이 밝아오니 잘하면 날리로다. 흉금胸襟이 황낭晃朗ᄒᆞ니 져기면 ᄂᆞᆯ리로다
한평생 세상에서 근심 즐거움 모르거니 ᄇᆡᆨ년百年 텬디天地의 우락憂樂을 모ᄅᆞ거니
속세의 한 꿈이니 영욕을 내 알겠는가. 일몽진환一夢塵寰의 영욕榮辱을 내 아더냐
패랭이 풀미투리 다 떨어져 버리도록 펴랑이 초草메토리 다 ᄯᅥ러 ᄇᆞᆯ이도록
산숲과 호수 바다 마음껏 노니면서 산님山林 호ᄒᆡ湖海예 ᄆᆞᄋᆞᆷ긋 노니며셔
이렇게 저렇게 굴다가 아무려나 하리라. 이렁셩 져렁셩 구다가 아므리나 ᄒᆞ리라
2022. 10. 1.
<황혼의 사랑> 이야기
신동국여지승람(1531년)이 편찬되었을 때 현재 제천시 천남동에 천람역이 있었다. 천람역은 파발마를 갈아타거나 관원들이 쉬었다 가는 곳이다. 시간이 100여년 훌쩍 흘러 이곳 천남동에 천남거사란 분이 집을 짓고 살았다. 바로 옥소 권섭 선생이다. 권섭은 당시 명문가 안동 권 씨 사대부가에 태어났다. 하지만 과감히 기득권을 내려놓고 민초들과 평범하게 어울리며 삼천리강산을 여행하며 살았다.
350년 전에 조선은 신분제도가 확연한 때였다. 당대 명문가에서 태어나 기득권을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왜? 탄탄한 대로를 마다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옥소 권섭이 태어난 시기에는 각종 사화가 난무하던 시절이다.
당시에 송시열은 대학자로 추앙받고 있던 사상적 지주였다. 파격적인 자유사상을 신봉한 인물이다. 송시열의 수제자 수암 권상하는 옥소 권섭의 큰아버지다. 권섭은 어렸을 때부터 청풍에 살고 있던 큰아버지 권상하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삶에서 20년을 큰아버지 보살핌을 받았다. 옥소가 19세 되던 해 희빈 장 씨 소생 원자책봉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사약을 받았고 옥소 외가 친척 김수항,김수홍도 사사되었다.
기사환국은 현실정치에 환멸을 심어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옥소는 14세에 부친상을 당했고 16세에 결혼했다. 또한 부실도 있었는데 중의대부 대원군 광윤의 따님이었다. 기사환국으로 옥소 권섭이 기득권을 내려놓게 된 결정적 이유는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과거를 보고 관리가 된다한 들 시대가 목숨을 위태롭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을 지키고 사랑을 택하여 기득권을 포기했다.
같은 시기에 가련이 살았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를 지녔고 음악과 시에 정통했다. 또한 제갈량의 <출사표>를 외워 노래하기 좋아하는 여협女夾이었다. 그녀는 15세 때 목생이라는 서생과 깊은 사랑을 나눴다. 목생은 남인이었고 시간만 나면 서인을 욕했다. 그런 탓에 가련은 ‘남인의 종이 될지언정 서인의 첩은 되지 않겠다.’며 공공연히 떠들었다.
옥소와 가련은 동갑이었다. 옥소는 사랑을 위해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았고, 가련 또한 정절을 지키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시간은 흘러 무려 72년 뒤 운명적으로 이들이 만났다. 첫눈에 반한 가련이 시조 한 수를 불러 단번에 옥소 눈길을 사로잡는다. 서인과 남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사랑은 사랑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떨어질 수 없다. 사랑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다. 둘은 격정적으로 사랑한다. 살아온 날들은 개의치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삶. 주위는 아랑곳 않고 사랑에 정열을 불태웠다. 두 사람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 이별 후 그리움은 <번노파가곡15장>으로 기록되어있다. 우리는 사랑이 기록되는 것을 때론 두려워한다. 하지만 옥소 권섭은 모든 것을 기록하며 살았다. 심지어 꿈을 기록하고 꿈속 풍경도 그렸다. 그 부지런함과 천재적 재능은 조선문학사 황금기를 이끌어가는 가교를 넘어 황금기를 이끌게 되었다.
옥소 권섭은 현재를 늘 죽음과 삶의 경계로 살았다. 숙종에게 죽음을 불사하고 상소를 올렸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현재가 마지막 날인 것을 늘 경계하면서 살았다. 천남동에서 천남거사로 살아간 그는 죽음을 위해 떠밀려간 삶이 아니었다. 자신 의지대로 가족을 사랑했고 또한 지켰다. 오늘날 우리가 지향하는 휴머니즘을 실천하며 살았다. 전국 방방곡곡을 유람하며 금수강산 주인인 민초들을 노래했다. 아울러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삶을 살았다.
옥소 사후 100여년 뒤에 제천에서 문인들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난다. 제천 창의倡義 정신은 옥소 사상과도 적층된 뿌리다. 이는 송시열과 그 수제자 수암 권상하에서 옥소 권섭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화서학파 유중교-김평묵-유인석으로 제천에서 사상적 적통이라 할 수 있다.
청풍명월의 본향 제천은 오로지 백성을 위해 만든 의림지가 있고, 나라가 위급할 때 목숨을 바친 창의정신이 살아있는 고장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민초들이 이곳에 뼈를 뿌렸다. 지금으로부터 350여 년 전에 살다간 옥소 권섭은, 조선시대 문학을 황금기로 나아가게 하였듯이 제천 창의정신을 있게 한 굵은 뿌리였다. 이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는 의림지가 사라지지 않는 한, 제천은 문향文香과 창의倡義가 살아 숨 쉬는 중심으로 거듭날 것이다.
2022. 10. 1
사)한국옥소(權燮)문화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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