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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안.
영상이 끊겼다.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내가 주인공인 납량특집 공포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본 기분이었다. 그래, 차라리 영화배우였으면...어린아이로 분장하여 연기를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착잡한데다 후텁지근한 기운이 이마와 목에 흐르는 땀방울과 뒤섞여 더욱 끈적이게 했다. 손도 약간 저렸다. 나도 모르게 힘을 줬나 보다.
라희가 숄더백에서 물티슈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자, 이거!”
땀을 닦다가 잠시 라희의 표정을 살폈다. 미안한 감정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은근슬쩍 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만 모르고 있었던 내 삶. 꼭꼭 숨겨야 할 치부가 모두 드러나 부끄럽다 못해 경악스러워서 시선을 피해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나인데 말이다.
그나저나 라희에게 할 말이 너무 많다.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을 뿐더러 대체 어떤 질문부터 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라희...라희야!”
“혼란스럽지? 알아. 많이 혼란스러울 거야. 오늘은 이만 하자. 내일 다시 올게.”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현수야! 오늘은 쉬고 내일 얘기하자.”
“내일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어?”
“그건 아니지만......”
“넌 참...볼수록 이기적이다.”
“왜?”
“아까 가라고 했을 때는 안 갔잖아. 오늘 나를 찾아온 것도 그렇고, 결국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그랬던 거 아냐? 이번에는 내 차례니까 앉아 있어.”
“.....”
라희의 반달모양 눈을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방금 전에 보여준 거.......모두 사실이니? 여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거야?”
라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내 인생에 대해 제일 많이 알고 있어야 할 사람이 나 아닌가. 그런데 나만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간 있었던 미스터리한 일들과 오늘 벌어진 일까지. 이 모든 사건들의 성격을 미루어 볼 때, 영상 속의 내용도 사실일 가능성이 99.9%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누구야?”
“나와 우리 아빠 그리고 현수 부모님.”
너무 괴로웠다.
라희와 라희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엄마는? 그동안 왜 엄마는 침묵했었을까? 나에게 어떠한 비밀도 없으셨던 분이.
충격 받을까봐?
모르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아서?
그리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신 아버지는? 아버지는 무슨 죄인가.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한동안 원망도 많이 했었는데. 결국 나 대신에 연쇄살인사건의 주범으로 오명을 뒤집어쓰셨다.
“라희 너, 우리 부모님과 연락하고 지내니?”
혹시 몰라 던진 질문이었는데, 의외의 답변이 튀어나왔다.
“네 엄마와는 따로 연락 안 했고, 네 아버지와는 꾸준히 연락하고 있어.”
“아버지와 연락하고 있다고? 나조차 아버지 안 본 지가 20년이다. 근데 네가.......”
왜 연락하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단순한 안부확인은 아닐 터. 필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희야! 지금부터 딱 3가지만 물어볼게. 꼭 사실대로 답변해줘. 부탁이다.”
라희가 고개를 잠깐 숙이더니 이내 고개를 쳐들었다.
“알았어. 말해.”
“190일간 슈빌라이칸 문자 보낸 사람, 어제 등기우편 보낸 사람...너지?”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안, 나에겐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천장을 향해 눈을 한번 치켜 뜬 라희. 긴 한숨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보냈어.”
설마 했는데, 깜짝 놀랐다. 정황상 그걸 보낸 사람은 라희 밖에 없다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빨리 인정할 줄은 예상 못했다.
“네가...보냈다고?”
“그렇다니까. 내가 보냈어.”
라희의 수긍은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라희는 내가 아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 따라서 어떤 존재인지 따져 물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전에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간 수신차단을 뚫은 일. 전화번호를 바꿨는데도 바로 문자가 들어온 일. 그리고 찢고 불태웠던 종이가 원상태로 돌아온 일 등등 현대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에 대해 어느 정도 궁금증이 해소된다.
다만, 문자를 보낸 기간이 왜 190일인지, 문자를 수신한 시간이 하필 저녁 6시 15분인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두 번째 질문이다. 라희 네가 원하는 게 내가 슈빌라이칸이 되는 거지? 맞냐?”
“어, 맞아.”
“슈빌라이칸이 의미하는 게 뭐야? 그리고 내가 슈빌라이칸이 되어야 하는 이유, 납득할 만한 이유를 말해봐.”
“슈빌라이칸은 지배자를 뜻하는 말로 ‘수빌라이간’이라고도 해. 아주 오래 전부터 그렇게 불리어왔는데,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는 나도 잘 몰라. 또한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전설로만 내려오는 경지, 즉 주술 최고레벨의 경지를 뜻해.”
“주술? 어떤 주술? 무당들이 하는 굿 따위를 말하지는 않을 테고.”
“그런 유치한 수준이 아니야. 네 눈으로 똑똑히 봤잖아. 수신차단 뚫는 것도 봤고, 찢고 불태운 종이 원상복구된 것도 봤고. 주술은 서양에서 말하는 일종의 마법 같은 거야.”
“인간이 도달할 수 없다면서 어떻게 슈빌라이칸이 될 수 있어?”
“힘든 건 사실이지만, 아예 불가능하지만도 않아. 조건이 갖춰지거나 또는 어떤 기연을 만나면 가능할 수도.......”
“조건? 에가리스 주술사 천명 어쩌고 하는 거? 그럼 네가 하면 되겠네, 슈빌라이칸. 너 능력 있잖아.”
“난 안 돼. 여자는 그 경지에 올라갈 수가 없어. 데라칸까지만 가능해.”
“데라칸은 또 뭐야? 후훗! 주술에도 단계가 있나봐? 웃긴다야.”
순간, 내 말에 기분이 나빴는지 라희가 정색을 했다.
“좀 진지하게 임해줄래?”
“알았어, 미안. 내가 슈빌라이칸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 너도 알다시피, 나는 주술사도 뭐도 아니잖아. 난 그저 공부만 해온 사람이라구.”
“설명하려면 너무 길고 복잡해. 결론적으로 말하면 네 운명이다. 피할 수 없는 네 운명.”
“그래서 운명을 믿냐고 물어본 거니? 그럼 라희 네 운명은 뭐냐? 할 말 없으면 꼭 운명 탓으로 돌리더라.”
“현수야!”
“생각해봐. 네 말마따나 타고난 운명이라 치자. 그렇다 해도 무조건 수긍해야 하냐고? 받아들일만한 어떤 꺼리라도 있어야 최소한 생각이라도 해볼 거 아냐? 내말 틀렸어?”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다. 갈증이 났는지, 아니면 답답했는지, 라희가 사무실입구에 있는 정수기로 가서 물을 여러 잔 들이켰다.
“내 운명이 뭔지 물어봤지? 내 운명은 현수 네가 슈빌라이칸이 될 때까지 도와주는 거야.”
“그래? 그럼 그걸 누가 부여했는데?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 내 맘대로 사는 세상이야. 하기 싫음 하지 마.”
“지난날 너 하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어. 물론 네 잘못은 아니야. 너는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그 비극은 끝나지 않았어. 현재도 진행 중이야. 현수 네 아버지가 쫓기고 있다.”
“쫓겨? 누구한테?”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위험한 자. 이 모든 비극의 원흉.”
말을 듣자마자, 영상 속에서 아버지가 언급했던 이름이 떠올랐다.
“혹시 영원대군이라는 자를 말하니?”
“맞아.”
“대군이라면 조선시대 왕족이자 이미 죽은 자일 텐데, 그런 자한테 아버지가 어떻게 쫓겨?”
“오래 전에 그자의 영혼이 부활하여 다른 사람 몸속에 들어왔어. 어렸을 적에 우리 마을에서 함께 살았었고.”
“다른 사람 몸속이라면, 누구?”
“하태식.”
“아...기억나. 영농조합을 이끌었던 태식이 아저씨. 근데 그분은 엄청 착하시고 똑똑한 분 아냐?”
“겉모습만 그렇지. 너를 이용했잖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내말 똑똑히 들어. 영원대군은 하태식 몸속에 빙의되어 하태식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지배했어. 뿐만 아니라 어린 너를 이용해서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던 장본인이야.”
라희는 단호한 어조로 연쇄살인사건의 주범을 각인시켜 주고 있었다. 즉, 하태식 몸속에 빙의된 영원대군이 내 몸속에 빙의된 박평을 이용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이다.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귀신 몰아내는 일인데, 어떻게 귀신한테 쫓길 수 있지?”
“현수 아버지는 우리나라 퇴마분야의 넘버원이셔. 최고의 능력을 갖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영적 존재도 상대가 안 되는데, 그자만 예외야. 그자는 너무 강해, 슈빌라이칸에 버금갈 만큼. 얼마든지 다른 사람 몸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어. 그래서 쫓기고 있는 거라구.”
“아버지가 현재 위험한 상태에 놓여있니?”
“아직은 아니지만...멀지 않아 위험해질 수 있어. 그 다음은 네 차례야. 지난날 네 인생을 망쳐놓은 것도 모자라.......”
라희가 연속해서 강조하는 지난날은 초등학교 5학년 때를 말한다. 영상 속에서는 그때 내가 동굴에 가서 박평의 영혼을 깨웠다고 했고, 그건 영원대군의 모사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내 인생을 망쳤다는 의미가 아마도 그걸 말하는 듯.
“그래서 그자와 맞서 싸우기 위해 슈빌라이칸이 되라는 거네. 슈빌라이칸이 되는 방법은 뭐야?”
“두 가지 방법이 있어. 하나는 너도 알고 있는 에가리스 주술사 천명의 진원 진기를 얻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라희가 잠시 뜸을 들였다.
“너무 힘든 길이야. 모든 걸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하기도 하고...그건 다음에 얘기해줄게.”
“자,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190일째가 되는 날,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는 말이 오늘 내가 의식을 잃었을 때 사람들을 구한 일과 관련 있지? 그렇다면 증명해봐. 내안에 다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그럼 앞으로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다 믿을게.”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내 눈으로 확인을 해볼 수밖에. 이렇게라도 해야 라희 말을 상당 부분 인정할 것이며, 또한 이 기막힌 상황을 이해할 방법이 떠오를 테니까.
라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일순간 무섭게 집중하는 듯 보였다. 창백해진 낯빛위로 음침한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더니, 이내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 몸에 이상반응이 찾아왔다.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스윽, 스윽!
뱃속이 물결치듯 불룩불룩하게 출렁였다. 이게 뭐야? 왜 이러지?
몸 어딘가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겪어보는 식겁한 현상.
이게 내 안에 빙의된 존재, 박평이란 말인가. 몹시 두려웠다. 그런 내 심리를 읽었을까? 라희가 손짓을 멈추었다. 동시에 몸속 이상움직임도 멈추었다. 아마 조금 더 진행되었다면 영화 속 에이리언 같은 생명체가 배를 뚫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몸은 벌써 오한에 들려있었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몸을 겨우 진정시킨 후,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손으로 훔쳤다.
“현수 너는 꼭 확인해봐야 직성이 풀리지? 이제 됐어? 이제야 내말 믿겠어?”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라희 말이 다 맞다.
“혼자 있고 싶다.”
라희가 내일 오겠다는 말을 한 후 밖으로 나갔다.
다음날.
아침부터 휴대폰에 불이 났다. 수십 통의 전화와 수백 통의 문자.
[현수야! 인터넷으로 봤어. 정말 멋있다.]
[장하다, 현수! 네가 멋진 놈이라는 걸 진즉에 알았지.]
[운동은 언제부터 했냐? 그렇게 민첩한 몸을 갖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
어제 사람 구하는 장면을 누군가가 인터넷에 올린 모양이다. 사실, 나도 궁금하다. 어떻게 구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