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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
1-8절,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하라
[1-5절]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에이스 텔로스)[끝까지]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우리는 낙망치 말아야 한다. 성도가 왜 낙망하게 되는가? 성도가 낙망하게 되는 것은 고난의 현실이 너무 커 보이고 자신의 부족과 무능만 생각하고 또 우리의 현실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주권적 하나님의 섭리를 굳게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고 현실이 작게 보이고 자신의 부족과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힘을 얻게 된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능을 믿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고 자기가 백세나 되어 자기의 몸이 죽은 것 같음과 아내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었다(롬 4:18-21). 그것이 참된 믿음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한 불의한 판사의 비유로 교훈하셨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판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그의 원수에 대한 그의 원한을 풀어 주기를 간구하였다. 그는 얼마 동안 그 과부의 말을 듣지 않았으나 후에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그 판사는 그 과부가 그를 끝까지 괴롭게 할 것을 염려하여 그의 탄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이다.
[6-7절]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비록 오래 참으실지라도](전통본문, KJV)67)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판사는 판결하는 권한을 가진 자이다. 그는 죄인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고 극악한 죄인을 사형시킬 수도 있는 권세를 가진 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는 사람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크신 판사이시다. 그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마지막 날 죄인들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고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질병이나 가난이나 기타 재앙으로 벌을 내리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판사가 아니시다. 그는 지극히 공의로우신 판사이시다. 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고 모든 일을 공의롭게, 공평하게, 공정하게 판단하시고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지극히 선하신 판사이시다. 그는 자기 독생자를 우리의 구원을 위해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또 그는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시며(신 10:18) 어려운 자들의 딱한 사정을 동정하시고 도우신다. 그러나 물론 그는 공의로 다스리신다.
또 우리는 불의한 재판관과 아무 상관이 없었던 과부와 같은 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택함 받은 자들인 것은 아니다.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있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께 주신 자들, 곧 그의 양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있다(요 10:27). 그들은 회개하고 믿고 구원과 영생을 얻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이 억울한 일 때문에 밤낮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잘 들어주실 것이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사모하며 찾는 것이다. 밤낮 부르짖는 기도는 간절한 기도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다. 믿음이 작으면 조금 기도할 것이지만, 믿음이 크면 오랫동안, 많이, 간절히 기도할 것이다. 참된 기도는 반드시 응답을 받을 것이다.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는 구절은 전통본문에는 옛날 영어성경(KJV)처럼 “비록 저희에게 오래 참으실지라도”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 보기에 때때로 더디다. 시편 10:1,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때때로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구하다가 낙망하기 쉬우나 낙망치 말고 기도 응답을 기대하며 인내하며 하나님께 더욱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8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人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속히 성도들의 원한을 풀어 주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시행이시다.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롬 12:19).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악을 반드시 벌하실 것이다.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도 그러하다. 주 예수께서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셨고(계 22:12) 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2:20). 주 예수께서 승천하신 지 벌써 2천년이 지났지만, 주께서는 반드시 속히 오실 것이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아신다. 그는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에 속히 응답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더딜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으시고, 그의 시간표가 우리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더 완벽하고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조금 더 참고 기도하면 그는 ‘속히’ 우리의 기도 제목과 우리의 원통한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다.
성경에는 고난 중에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은 예들이 많다. 신약시대에 헤롯 왕이 사도 야고보를 칼로 죽이고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옥에 가두었을 때, 성도들은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빌었다. 베드로까지 죽임을 당한다면 교회에는 큰 손실과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의 결과로, 헤롯이 그를 잡아내려 한 그 전날 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베드로를 기적적으로 구출시켜 주셨고 원수들의 계획과 기대를 폐하셨다(행 12장).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다시 오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께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영광스럽게, 갑작스럽게 오실 것이다. 그 날에, 죽은 성도들은 살아나고 모든 성도들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재림의 주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과 영생을 주실 것이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복된 소망이다.
그러나 주의 재림 직전의 세상은 믿음이 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물질적 부요와 평안, 그것과 더불어 생기는 육신적 쾌락과 죄악들이 믿음 없음의 큰 요인일 것이다. 세상 나라의 특징은 각종 불경건한 사상들과 종교들과 음행과 사치이다(계 18장). 가난과 고난과 질병은 오히려 사람의 구원과 참 믿음을 위해 유익하다.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삶이 사람들로 육체의 쾌락을 사랑하고 음란하게 만든다.
주의 재림 직전은 믿음 없는 시대, 배교 시대가 될 것이다. 데살로니가후서 2:3, “[재림 직전에] 먼저 배도(背道)[배교]하는 일이 있고.”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어려운] 때가 이르리니.” 디모데후서 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주께서는 멸망할 세상보다 교회를 더 염려하신다. 그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믿음이 식어지지 않고 그들의 기도 생활이 식어지지 않기를 원하신다. 기도 생활은 믿음에 비례한다. 우리는 고난 많은 세상에서 믿음이 약해지지 말고 열심으로 밤낮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낙망치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어려운 일에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확신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받은 자녀들이다. 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실 것이다. 기도 응답은 때때로 더디지만,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믿음이 견고해져야 하고, 성경에 밝히 계시된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을 따라 경건하고 정직하고 선하게 살아가야 한다.
9-17절, 겸손과 순진함
[9-10절]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주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한 비유로 말씀하셨다.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의 높은 수준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이 명령을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키지도 못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또 사람이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음으로 범하는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행위로 범하는 죄만 죄가 아니고 마음으로 범하는 죄도 죄이다. 탐심 즉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내는 것은 마음으로 범하는 죄이다. 주 예수께서는 마음에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5:28), 사도 요한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한 것이라고 말하였다(요일 3:15).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자신을 깨끗하고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게 된다. 자기의 부족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 보고 그를 멸시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큰 결함이 있을 수 있는데도 남의 결함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신의 크고 작은 결점을 깨닫는다면 남의 결함에 대해 안타깝게 여기고 그를 불쌍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한 이야기를 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이었다. 예수께서 하신 비유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자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중에 두 부류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다른 하나는 세리이다. 바리새인은 그 당시 성경을 믿고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들로 알려져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께서 이 비유로 말씀하고자 하신 대상들 곧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이었다. 반면에, 세리는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비난했었으나 그들 중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고 자신을 낮추는 자들이 있었다.
[11-12절]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프로스 헤아우톤)[자기 자신에게](NASB)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것),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서서 자기 자신에게 기도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하지만, 실상 자신에게 하는 독백과 같은 기도이었다는 뜻 같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은 자’로 표현했다. 그는 자신을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하는 죄인들과 구별했다. 그는 또 자신을 성전 한쪽 구석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와도 구별했다. 그는 세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고 멸시하는 마음뿐이었다.
그는 한 주간에 두 번씩 금식했고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다. 그는 매우 경건하게 보이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금식은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었다. 그의 십일조 생활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그가 누리는 복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13-14절]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한편,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기옵소서”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신의 선함을 자랑할 것이 없었고 마음으로 자신이 죄인인 것과 자기 속에 죄악된 성질들을 많이 있음을 깨닫고 통회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었다.
주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실 수 있다. 그는 그 세리가 그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평가하셨다. 그 바리새인은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경건하고 의롭게 보이는 그에게 무슨 죄가 있었는가? 그에게는 자신의 죄성(罪性)과 죄인 됨을 깊이 깨닫지 못하는 무지(無知)의 죄, 혹은 아는 데도 불구하고 의로운 척하는 기도를 올렸다면 위선의 죄, 또 남을 멸시하고 자신을 높이는 교만의 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는 하나님의 죄 용서하심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이치가 있다. 사람은 자신이 꽤 의로운 줄 알고 자신을 높이면 하나님 앞에서 물리침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자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고 그런 자가 하나님 앞에서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오늘날도 예배당에 드나드는 자들 가운데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외적으로는 종교적 의식을 잘 지키지만 자신의 부족에 대한 깨달음이 없고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남을 멸시하는 자요, 다른 하나는 세리처럼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여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이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이 참된 신자이다.
[15-16절]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는 어린 아기들을 가진 부모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어린 아기들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고 예수께서 그들을 만져주시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그 부모들을 책망했다. 그들은 그 부모들이 예수께서 자기 아이들을 사랑해주시기를 원하는 욕심을 가지고 그를 번거롭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어린아이들을 자기에게로 가까이 부르셨다. 그는 믿는 이들의 어린아이들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용납하셨다. 주께서 아이들을 용납하신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다.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구약시대의 할례에 대한 규정에서 명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에서 태어난 남자아이를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하심으로 그 아이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의 일원임을 증거하셨다(창 17:10-14). 믿는 가정에서 출생한 아이는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다(시 127:3).
이런 언약의 원리가 신약시대에도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근거가 된다. 구약시대에 유아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던 하나님께서 그 후에 그들을 교회에서 제외하신 적이 없기 때문에 유아들은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 표시로 교회는 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다.
[17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영접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아이의 성품은 천국 백성에게 필수적이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단순하고 순진한 성품을 가리킨다고 본다. 참된 믿음은 어린아이같이 단순함과 순진함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진실하고 확실하다. 단지, 사람의 마음이 복잡해서 그것을 잘 믿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어린아이같이 단순하고 순진한 마음을 가진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잘 믿을 수 있고 그때 그는 천국에 확실히 들어갈 수 있다.
경건했던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었고 왕이 된 지 8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였다(대하 34:1-3). 사도 요한의 제자요 순교자인 폴리갑은 아홉 살에 하나님을 믿었고, 영국의 청교도 지도자 리차드 백스터는 여섯 살에, 18세기에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일곱 살에, 유명한 찬송저자 아이삭 왓츠는 아홉 살에 각각 하나님을 믿었다고 한다. 사람은 어릴 때에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고 그런 자는 커서도 그 믿음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우리는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바리새인 같은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누더기 같은 자신의 행위의 의를 내세우지 말고 우리 자신의 죄와 부족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와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과 부족을 깨닫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을 것이지만, 자신을 높이고 자신을 의롭다고 여기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물리치심을 받고 정죄함을 받을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믿는 가정의 어린아이가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거절하지 말고 그를 영접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받드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믿는 가정의 어린아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며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다. 이것이 구약시대에 할례 제도의 근거이며 신약시대에 유아세례의 근거이다. 또 어린아이는 단순함과 순진함의 장점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고 순진하게 받아야 한다. 물론 그 말씀은 진실한 말씀이다.
18-30절, 영생의 길
[18-19절]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였다. 관원은 고급 공무원이며 지식이 있고 사회적 신분이 있는 자이다.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속이는 자,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 사형에 해당하는 자라고 보았으나, 이 관원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보았고 영생의 길에 대해 물었다. 그는 현세를 넘어서 영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생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다.
예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자신이 선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고 그 관원이 그를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고 단지 선한 사람으로 여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라고 본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사람은 다 악하다(롬 3:10). 사람은 죄성이 있어서 항상 선하게 살지 못하며 오직 거듭난 자는 그 속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조금 거룩과 선의 열매를 맺을 뿐이다. 예수께서는 단지 사람뿐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딛 2:13; 요일 5:20). 하나님만 선하시며 죄와 불결과 악이 없으시며 예수께서도 그러하시다.
[20-21절]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는 영생의 길이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율법의 내용이다. 레위기 18:5,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 사실은 사도 바울도 증거하는 바이다(롬 10:5; 갈 3:12). 단지, 사람이 그 율법을 다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을 얻지 못할 뿐이다.
그 청년이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힘썼던 것을 보면 그는 꽤 경건하고 도덕적인 사람이었다. 마가복음 10:21에 보면, 예수께서는 그를 보시고 사랑하셨다. 그러나 그 관원의 계명 준수는 실상 영생을 얻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완전한 의가 되기에 부족하였다. 그러나 그 관원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22절]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사람마다 연약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이 관원의 경우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한 것이 부족이었다. 재물에 대한 그의 애착은 하나님의 명령이나 주님의 초청보다 더 컸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세 가지를 말씀하셨다.
첫째,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주님의 말씀은 그가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재물을 초월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며 또 선행과 구제를 실천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선행과 구제의 실천은 그가 재물을 초월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둘째,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구제와 선행을 실천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원적 선행과 구제에 대하여 천국에서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고전 9:17).
셋째,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주께서는 아무에게나 이런 초청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그 사람을 제자로 부르시는 특별한 초청이었다. 실상, 여기에 구원의 참된 길이 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시며 영생의 길이시다(요 3:16; 행 16:31; 롬 3:21-22). 우리는 하나님보다 돈을 의지하거나 사랑해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랑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
[23절]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그 관원은 큰 부자이었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다. 그는 영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많은 재물을 버릴 수 없었다.
[24-25절]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저가 심히 근심하는 것을 보시고](전통본문)68) 가라사대 재물(국한문, ‘재산’)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26-27절]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께서는] 하실 수 있느니라.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구원 얻는 것은 다 같은 사실을 가리킨다. 구원은 하나님께 즉 하나님의 능력의 손안에 있다. 사람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가능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주이시다.
[28-30절]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것 곧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서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인 신약교회가 우리 모두의 집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우리 모두의 가족임을 뜻하신 것일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은 다 하나님의 가족이다(마 12: 50; 눅 8:2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외롭지 않다. 또 그런 자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복보다 더 귀한 복인 영생을 얻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영생의 길은 하나님의 계명 순종으로는 불가능하다. 그 관원은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주의 명령을 지킬 수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은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시지만, 우리는 그것을 다 지키지 못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영생의 길은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뿐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예수님을 거절했으나,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롬 10:4).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셋째로, 우리는 재물에 대한 애착을 포기하고 극복해야 한다. 우리는 돈을 벌기는 하지만,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것이 헛된 줄 알아야 하고(시 39:5-7; 전도서) 재물을 가지고 우리보다 어려운 주위의 이웃을 위해 선행과 구제에 힘써야 한다.
넷째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주께서는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에 복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성도들 간의 사랑의 교제와, 일용할 양식의 공급과, 심신의 평안과, 또 내세에 영광의 천국과 영생 등에 대한 약속이다. 돈 사랑을 버리고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확실히 영생의 길이다.
31-43절,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
[31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人子)에게 응하리라.
예수께서는 며칠 후 예루살렘에서 당하실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아시면서도 그리로 올라가셨다. 그때 그는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人子)에게 응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선지자들의 글인 구약성경은 번제 등 여러 가지 제사들이나 유월절 어린양이나 성막 등의 예표들을 통해 또 직접적 예언들을 통해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구약성경은 한마디로 오실 메시아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메시아에 대해 기록된 구약의 모든 내용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 성취될 것이다.
[32-33절] 인자(人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예수께서는 그의 지상 생애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사건 곧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에 대해 예언하셨는데, 이 두 가지 사건은 구약성경에서 예표되었거나 예언된 바이었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으시고 능욕을 받으시고 침 뱉음을 받으시고 채찍질을 받으시고 마침내 죽임을 당하실 것이다. 구약성경은 메시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표하였거나 예언하였다. 창세기 3:15,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암시했다. 구약시대의 짐승 제사들은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고 유월절 어린양도 메시아의 죽음을 예표하였고 성막 제도도 메시아의 피 흘리실 속죄의 죽음을 예표하였다. 더욱이, 이사야 53:5은 메시아의 대속적(代贖的) 고난과 죽음에 대해 예언하였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또 스가랴 3:9도 메시아의 고난을 암시했다.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둘째로, 예수께서는 장사되신 지 삼일 만에 무덤에서 살아나실 것이다. 이것도 구약성경에 암시된 바이었다.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예언하였다(호 6:2). 이 예언에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은 제3일의 부활로 표현되었고, 예수님의 부활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시작이며 그 증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근원이시며, 죽음은 단지 죄 때문에 왔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메시아의 생애는 죽음으로 끝날 수 없고 그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셨다. 그러므로 다윗은 시편 16편에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메시아께서 그 몸이 썩지 않고 부활하실 것을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행 2:25-32).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복음의 골자이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었다(고전 15:3-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중요한 까닭은, 그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죽음이며 그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그의 대속 사역의 진실함을 확증하였기 때문이다.
[34절]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의 말씀하신 바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때에만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작은 깨달음을 가질 수 있다.
[35-37절]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
여리고 성 가까이에서 한 소경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 그는 가족도, 친구도, 아름다운 세상도 볼 수 없었고 물질적으로 도와줄 가족도 없었다. 그는 구걸하는 거지이었다. 그 소경은 무리의 지남을 듣고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심을 알았다. 그것은 그에게는 다시 없을 좋은 기회이었다. 그는 예수께서 불쌍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38절]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말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었음을 나타낸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라.” 예레미야 23: 5,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에스겔 34: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호세아 3:5, “그 후에 저희가 돌아와서 그 하나님 여호와와 그 왕 다윗을 구하고 말일에는 경외하므로 여호와께로 와 그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그 소경 거지의 마음 속에는 예수께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고 생각했고 그를 메시아로 깨닫고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 소경은 지체치 않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예수님께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쳤다. 그것은 겸손한 부르짖음이었다.
[39절]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저가 더욱 심히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앞서 가는 자들의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보인다. 그들은 꾸짖을 것이 아니라 그를 동정하고 그를 주님 앞으로 인도해주어야 했을 것이다. 믿음의 길에는 때때로 방해거리가 있고 그것은 때때로 먼저 믿는 자들의 잘못된 말과 행동을 통하여 오기도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소경은 주님께 부르짖는 것을 중단치 않았고 더욱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질렀다. 우리의 믿음은 어려운 방해거리나 문젯거리를 하나씩 극복할 때 더욱 강해진다.
[40-41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물어 가라사대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 소경의 낙심치 않는 부르짖음은 마침내 응답을 얻었다. 예수께서는 머물러 서셨고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사람들의 뜻과 예수님의 뜻은 달랐다. 예수께서는 간구하는 자를 외면치 않고 불러주셨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그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소경은 보기를 원하는 분명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소원은 단순하고 분명했다. 오늘날도 모든 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도, 구원도, 내세도 알지 못하는 영적 소경인 것을 알고, 보기를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
[42-43절]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예수님을]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의 치료는 단순하고 즉각적이었다. 그가 “보아라”라고 말씀하시자, 그 소경은 곧 보게 되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치료하셨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이었다. 그 소경은 예수님을 만나 구원을 얻었다. 예수께서 사람을 불행에서 건져주시는 신적 구주이심이 증거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도 사람을 불행에서 건져내시기에 유능하신 구주이시다. 그러나 구원은 단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메시아이시다. 구약성경은 예표들과 예언들을 통해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해 또 그가 다윗의 자손이심을 증거했다.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예표되고 예언된 메시아께서 오셨다는 것과 또 그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다. 성경의 중심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의 중심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신 구원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메시아이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고난의 종이셨다. 그는 그가 친히 예언하신 바와 같이 사람들에게 희롱과 능욕과 침 뱉음과 채찍질을 받으셨고 죽임을 당하셨다. 오늘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길도 비슷하다. 우리는 그가 고난의 길을 가셨음을 알고 고난을 각오하며 그를 따라야 한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도우실 수 있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는 믿는 자들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다. 우리에게 큰 구원을 주신 예수께서는 우리의 영육의 다른 모든 문제들도 도우실 수 있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무슨 좋은 것을 받을 자격이 없으나 고침 받은 소경과 같이 오직 불쌍히 여기심을 구해야 한다. 그 소경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부르짖었다. 우리는 믿음도 적고 우리의 의롭고 선한 행위들도 보잘것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 얻었고 구원 얻은 후에도 여전히 부족투성이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거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응답을 구해야 한다(요 1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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