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옷을 정리하며
김미숙
아침저녁으론 아직 좀 쌀쌀하지만 한낮엔 봄기운이 완연하다. 겨우내 입었던 옷이 무겁고 탁하게 느껴져 정리를 시작했다. 겨울동안 추위로부터 보호해준 패딩점퍼와 코트는 세탁소에 맡기기 위해 빼놓고, 화사한 봄옷은 옷장 앞쪽으로 꺼내 걸었다. 2년 가까이 입지 않은 멀쩡한 옷은 중고매매 사이트에 올리고, 보풀이 생기거나 해진 옷은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그러다가 문득, 옷도 계절이 바뀌면 입을 것과 입지 않을 것을 구분하지 않는가.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얼마전 있었던 씁쓸한 기억이 떠올랐다.
옷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거나 입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선 어찌 그리 간단하단 말인가. 살이 쪄 작게 된 옷도 색이나 디자인이 마음에 들면 선뜻 버리기 힘들다. 살이 빠지면 입어야지 하며 애초에 정리하려고 했던 초심을 잃고 다시 옷장 안에 남기지 않던가. 한낱 옷도 그러할 진데 한때 서로 좋은 감정을 나눴던 사람의 경우는 그보다 몇 갑절 고민되기 마련이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느라 밤잠을 설치기도 하고 ‘이번에도 나만 가만히 있으면 그냥 넘어갈 테니 또 참아볼까?’ 하고 마음을 고쳐먹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악순환이 계속 될 것이 뻔하고 더 이상 관계 유지할 이유조차 없어졌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연유로 자연스럽게 관계 정리가 된 사람은 남편친구 S이다. 그는 남편의 고등학교 친구로 타 지역에 살고 있다. 모임이나 볼일로 제천에 오게 되면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밥과 술도 얻어먹고 집에서 잠도 자고 갔다. 남편의 친구인데다 집이 타지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군말하지 않고 늘 챙겨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그가 사는 지역 장례식장에 갈일이 생겨 문상을 마치고 그에게 전화를 했단다. 그러자 그는 반가운 내색은 커녕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일 잘보고 가라며 그냥 전화를 끊더라는 것이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한참을 속상해 했다. 처음으로 친구가 사는 곳에 가던 차에 술도 한잔하고, 밤새 이야기도 나누며 자고 올 생각까지 하고 갔던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부인이 아이들 챙기느라 힘들다며 얼굴조차 보여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자신은 온다는 말도 없이 오는데다 자고가도 되냐고 묻지도 않고 매번 자고 갔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음으로 연락한 친구를 나 몰라라 하고 박대했다고 생각하니 화까지 났다. 결국 나는 남편에게 “이번 기회로 그 사람을 알게 된 것 같으니 앞으로는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고 말했고 남편도 그래야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얼마 전에는 당구 동호회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되었다. 동호회라는 것은 회원들이 우리구장을 주로 이용해 게임을 하고 우리는 한 달에 한번 무료 대관해주어 월례대회를 치르며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회원들이 하나, 둘 타 구장으로 가서 게임을 하고 월례회 당일에만 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무료대관뿐만아니라 식사와 주류까지 대접한 날에도 타 구장으로 가서 게임을 하였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참고 기다렸으나 회원들이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더 이상 동호회를 운영할 이유가 없어졌고, 그들에게 더 이상 무료대관을 할 수 없다고 통보하면서 그들과의 관계가 정리되었다.
사람이면 염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염치가 없는 남편친구와 동호인들을 보면서 우리가 참고 한없이 잘해준다고 해서 좋은 관계가 유지 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친구가 당구장을 개업 할 때나 집을 샀을 때나 축하한다는 말은커녕 빈손으로 온 것까지도 이해한다. 올 때마다 융숭한 대접을 해준 친구가 연락을 했으면 버선발로는 못 쫓아 나오더라도 차 한 잔 정도는 얼굴 마주보며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동호인들도 마찬가지다. 한 달에 한번 무료대관해주고 음식까지 대접했으면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그날은 우리 구장에서 게임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함없이 염치없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정리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어떤 책을 통해 본적이 있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나는 어떤 사람이든 잘 대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또 그러기 위해 항상 노력했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먼저 관계 정리를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었던 일인데다가 그러면 안 된다는 마음의 소리가 항상 먼저였다. 하지만 내 나이 오십하고도 중반이 넘은 지금, 변함없이 염치없는 사람들과는 단절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건강에도 이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절이 바뀌면 적당한 옷으로 바꿔 입고 맞지 않는 옷을 정리하듯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것이다. 이번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첫댓글 맺고 끊는게 삶이 겠지요
나를 돌아보게 하네요
야무지게 사는 모습 보기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