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탐방기행 - 문경의 고개]
이화령梨花嶺 애환
윤원영
추석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나섰다. 이번 추석에는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화목을 도모하고 추억을 쌓기 위해 문경새재 입구에 한 리조트를 예약하여 1박 2일을 뒹굴며 보냈다. 전에는 주로 문경새재나 인근 관광지를 찾았으나 오늘은 교통의 발달로 외면당하여 소외된 옛길을 찾아 이화령 고갯마루를 오르기로 하였다. 진안리 4차선에서 내려 이화령으로 오르는 구 도로를 갈아탔다. 최근에 들어서서 도로도 확장하고 포장도 하여 다소 다듬어졌다고 하나 타고 가는 승용차가 벌벌 떨고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옛길 따라 각서리로 향하는데 갑자기 경사가 심한 고갯길로 돌변하여 마치 S자형으로 꼬불꼬불 꼬부랑길이 이어졌다. 앞에는 백화산의 높다란 봉우리가 압도하고 아래에는 아찔한 벼랑길이 따라와 차를 모는 막내아들이 운전대를 꽉 잡고 땀을 뻘뻘 흘린다. 이때 나는 막내가 운전하는 모습을 안타까이 바라보며,
“옛날에는 이 길의 폭도 좁았고 비포장도로이고 지금보다 훨씬 경사도 심했었지. 서울로 가는 길이 이 길밖에 없었기에 버스가 숱하게 다녔지. 고갯길이 너무 험하여 버스기사들이 무서워서 벌벌 떨며 운전하였다고. 이화령 고갯길이 우리나라 고갯길 중에서 공포의 길이며 피하고 싶은 길이라고 소문났었다. 30여 년 전에는 이화령 고갯마루에서 버스가 전복하여 10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슬픈 사연이 있단다.” 이 말을 들은 막내는 더욱 긴장하여 속도를 낮추어서 차를 운전하며 구불구불 비탈길을 올라갔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운전에 열중하는 막내를 바라보느라니 20여 년 전 막내 결혼식 때 이화령 고갯길을 넘느라 고생하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신세기가 도래하였다고 떠들썩하던 21세기 초입 2월에 서울에서 막내아들 결혼잔치를 벌였다. 결혼식을 마치고 관광버스에 하객들을 모시고 돌아오는 길에 괴산이 지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연풍을 지나 이화령 입구로 들어서자 조령산의 산 그림자가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제법 커다란 눈송이가 차창을 세차게 두드린다. 이화령 고갯마루가 가까워지자 오르막길은 하얀 눈으로 포장되어 버스는 미끄러운 눈길을 거북이걸음으로 기어오른다. 기사는 손님을 안전하게 모시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운전대를 잡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여태까지 흥겹게 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춤을 추던 하객들도 긴장하여 조용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가까스로 이화령 정상에 오르자 잠시 주차를 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였다. 커피도 한 잔 마시면서 잔뜩 긴장된 마음을 안정시켰다. 점점 어둠의 그림자가 아래로 깔려오고 고갯길도 거칠어져 내려갈 길이 태산 같다. 기사와 동승했던 동료교사들과 상의하여 내려가면서 도로변에 쌓여있는 비상 모래주머니를 버스에 잔뜩 실었다. 미끄러워진 빙판길을 차바퀴 아래에 모래를 깔아가면서 내려오느라 한 시간 이상은 걸린 것 같다. 진안리 국도까지 내려오니 앞사람이 보일 말 듯 어둠이 깔렸다. 버스가 무사히 이화령 고개를 벗어나자 잔뜩 긴장했던 하객들은 너무나 기뻐 개선장군이나 된 것처럼 환희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 때의 감격이 2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벌써 고등학생이 된 귀여운 딸을 둔 아빠인 막내아들을 보니 감개무량하기만 하다.
천신만고 끝에 해발 548m의 이화령 정상에 오르니 확 트인 세상이 활짝 웃으며 우리를 환영한다. 고갯마루 전망대에 다가가서 벼랑아래 까마득한 세상을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고속도로, 국도가 여러 갈래 지나고 그림 같은 작은 마을들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내밀고 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보는 풍경 같다고나 할까. 이화령 옛길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조령산과 백화산을 연결하여서 생태계 파괴 현상을 막기 위해 터널화 하였다. 생태통로를 통하여 노루랑 산토끼들이 자유로이 오가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터널 상부에는 ‘백두대간 이화령’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정상 광장의 중앙에는 거대한 타원형의 까만 오석의 시비가 우뚝 솟아 있어 이화령의 명물이 되었다. 멀리 충남 보령시에서 동서화합을 위해 기증하였다고 한다.
휴게소 카페로 가다가 모퉁이에 빨갛게 단장한 전화박스를 닮은 낯선 구조물이 눈에 띄었다. 신기하여 다가가니 ‘국토종주 자전거 이화령 휴게소 인증센터’라고 씌어있다. 그러고 보니 금방 자전거에서 내린 라이더들이 자전거를 끌고 줄지어 몰려오고 있다. 조금 전 막내아들이 승용차로 이화령 고갯길을 힘들게 올라 올 때 자전거를 탄 라이더들이 험하고 가파른 고갯길을 숨을 헐떡거리며 고갯길을 누비며 달려서 오르는 것을 보았다. 해발 548m에 거리가 5km인 가파른 험한 고갯길을 30분 남짓이면 오른다고 한다. 이곳뿐만 아니라 전국 국토를 종주한다니 이들의 혈기왕성한 체력과 활기찬 기개에 감탄이 넘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새로 탄생한 국도와 고속도로에 밀려 과거의 영광을 모두 양보하여 차들이 사라져 호젓해진 옛 고갯길에 전국 각지에서 자전거가 몰려와 활개치고 있다. 이제 새로운 자전거 문화의 탄생으로 ‘이우릿재’의 영광을 되찾고 새로운 고개로 부활하여 자전거를 탄 라이더뿐만 아니라 다른 길손들도 이화령으로 몰려오기를 기대해본다.
이화령梨花嶺 고개는 백두대간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조령산鳥嶺山과 백화산白華山 사이에 있으며, 《고려사지리지》에 이화현伊火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후 《대동여지도》 등의 여러 지도에서도 이화현伊火峴 또는 이화치伊火峙로 표기하고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화현伊火峴은 연풍현 동쪽 7리 문경현 경계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화령은 예로부터 ‘이우릿재’로 널리 알려진 문경지역의 대표적인 고갯길이었다고 한다. ’이우릿재‘로 불러진 연유를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경상도 사람들은 문경聞慶에서 충청도 방면으로 넘을 때 3개의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제일 북쪽의 고개는 계립령鷄立嶺(하늘재)으로 충주忠州로 연결되었다. 다음은 조령鳥嶺(문경새재)으로 역시 충주로 통했고, 나머지 하나는 이화현伊火峴으로 연풍延豊을 거쳐 괴산槐山으로 향하는 고갯길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화현伊火峴은 인근 조령鳥嶺에 비해서는 통행량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조선 초기에 한양과 부산을 관통하는 영남대로가 개설되면서 문경새재가 인마와 물자의 통행이 증가한 주요간선도로로 우뚝 서게 되자 가장 인접한 이화현伊火峴은 잡초만 무성한 외딴 소로小路로 추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인적이 드문 고갯길에는 산짐승뿐만 아니라 도둑떼가 들끓어 공포의 고갯길로 변하여 사람들이 통행을 꺼리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이 이화령 고개를 넘고자 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넘었다고 하여 ‘이웃재’, ‘이웃리재’, ‘이우릿재’로 불러졌다. 고 한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에 길이 확장되고 이 도로가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신작로, 자동찻길로 탈바꿈하면서 이화령로梨花嶺路가 되고, 고개의 지명도 ‘이화령梨花嶺으로 바뀌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개 주위에 배나무가 많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는데, 고개 부근에 배나무도 없거니와 근거가 없는 낭설인 것만 같다.
최근 문경시에 의해서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지명으로 왜곡된 '이화령'이 100여 년 만에 옛 이름인 '이우릿재'란 본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문경시에 따르면 1910년대 이후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구한말지형도, 조선지형도에 본 이름인 이우릿재를 버리고 이화령梨花嶺으로 왜곡되게 기재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문경시지명위원회는 일제잔재를 청산하는 새주소 사업에서 100년 동안이나 잃어버린 이우릿재의 본래 이름을 되찾은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옛길인 이우릿재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우리의 곡물과 물자를 수탈하기 위한 신작로로 개통하게 되었다. 이 무렵부터 영남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던 이화령은 6.25전쟁 때는 남침의 통로가 되고 말았다. 이화령전투는 국군의 지연전 과정에서 제6사단 제2연대가 문경 북쪽의 이화령 일대에서 1950년 7월 13일부터 7월 16일까지 4일간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1사단의 남진을 지연시킨 방어 전투이다.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도 적군을 방어하며 지연작전을 펼쳤기에 공산군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 국군과 미군이 철수하여 사전에 낙동강 방어진지를 구축하였기에 백척간두의 국토를 사수할 수 있었다. 6.25전쟁과 산업화시대를 거치며 이화령은 국도 3호선으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되었다. 3번 국도가 4차도로로 확장되면서 이화령 터널이 뚫렸다. 이어서 2004년 12월에 이화령 터널 옆으로 중부 내륙 고속도로가 달리게 되자 이화령 옛길은 통행량이 급감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숨어버리게 되었다. 그 후로는 찾는 이가 감소되었는데 요즘 들어서서 주변의 산들이 사계절 아름답게 옷을 갈아입는 옛 고갯길이 보고파서, 이화령고갯마루가 그리워서 찾는 이가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화령 정상이 백두대간 줄기인 조령산(1026m) 산행의 출발점이기도 하여 등산객들이 심심찮게 오르내린다.
오늘은 추석날이어선지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길손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이화령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예부터 주요 교통로로 국토를 지키고 국가산업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이화령 고갯길을 우리 모두 잊지 말고 종종 찾아오자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윤원영 : 대전사범학교, 영남대학 교육대학원. 점촌중앙초등학교장 퇴임. 에세이스트 신인 등단(2022.1) 한국수필(2022), 문예비전(2021) 신인 등단. 문경새재문학 동인 활동. 문경교육상 수상, 황조근정훈장, 문교부장관 표창, 한국스카우트 봉사대상 금장, 공무원연금공단 주최〈은퇴공무원 사회공헌활동 수기 공모전〉 입상
이화령입구 환경생태통로
국토종주 자전거길
이화령고개 휴게소 인증센터
이화령고갯길을 달리는 바이더들
이화령 정상을 오르며
새재자전거길 표시판
보령시에서 기증한 오석 시비
이화령 정상에서 내려다본 경관
백두대간 이화령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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