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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2장 혼인잔치의 비유와 세금, 부활, 첫째 계명, 메시야의 신분 관한 논쟁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21-27장까지 이어지는, 이제 구속사역의 최종 성취를 위하여 주께서 예루살렘에 평화의 왕으로 공식 입성하시어 십자가 수난을 당하기까지의 소위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사건을 보도하는 일련 기사의 연속부분이다. 그중에서도 21:18에서 부터 26:15절까지의 사건들 및 예수님의 교훈은 모두 다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주간인 성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중에서도 제 3일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과 교훈들이다. 그리고 이를 다시 더 세분하면 21:23-23:39절까지가 주로 유대인 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논쟁을, 24:1-25:46까지가 주로 세상 끝 날의 징조와 이를 맞이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내용을, 그리고 26:1-16까지는 이제 유대지도자들과 예수의 갈등이 극에 달하여 마침내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이루는 직접적인 과정이 되었던 유대인들의 예수 살해의 음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보도하고 있다.
이 같은 문맥에서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의 논쟁을 보도하는 일련기사의 연속 부분인 본장은 전반부 1-14절이 전장의 두 비유에 이어 예수께서 주신 혼인잔치의 비유를, 그리고 후반부 15-46절이 세금 논쟁(15-22절), 부활 논쟁(23-33절), 첫째 계명에 대한 논쟁(34-40절),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논쟁(41-46절) 등을 각각 보도하고 있다.
먼저 1-14절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전장의 두 비유와 마찬가지로 1차적으로는 구약(舊約) 계시를 먼저 받았으면서도 바로 그 구약을 성취하시고 구약을 보다 승화시킨 신약(新約)을 새로 주시러 오신 주님을 거부한 유대인 및 유대 지도자들의 오류를 지적하는 비유이다. 동시에 이 비유는 다른 비유도 그러하듯이 예수 당시의 유대의 상황을 넘어 모든 시대의 사람들의 예수와 복음에 대한 잘못된 자세를 지적 내지는 예언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혼인 잔치의 비유는 한마디로 이 세상의 생활과 욕심에만 얽매여서 예수님이 제시한 천국 복음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자의 어리석음과 그들이 당할 운명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비유를 구속사적으로 개관할 때에 우리는 복음은 죄인의 구원을 위한 은총의 메시지(Message)인 동시에 순종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람이 만든 도덕률이 아니라 전 우주의 주권자(主權者)이신 하나님이 정하신 영생과 영벌의 유일한 기준이기도 함을 깨닫는다. 우리가 알다시피 주님이 이 세상에 오사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까지 하시고 또 이처럼 간절하게 죄인을 초청하시는 것은 주님과 하나님이 인간에게 무슨 의무가 있거나 아니면 이를 통해 이익이 생겨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당신이 창조하신 피조물(被造物)인 우리 인간을 향한 끝없는 사랑과 은혜 에서 우러나온 것 일 뿐이다. 따라서 주님이 주신 복음 곧 천국에의 초청은 은혜의 초청인 동시에 심판과 영생을 가름하는 법의 선포로서 우리에게는 이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 들일 자유는 있지만 그 결과까지 회피하거나 무시할 자유와 힘은 없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다음 15-40절까지의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 제기한 세 질문과 논쟁은 모두 다 순수한 질문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떻게 답하더라도 예수를 정치 ․ 종교적 혼란에 빠뜨릴 수 있도록 고안된 저의(應意)가 깔린 질문들이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다. 또한 그들이 구약 성경의 진리를 안다하면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야기된 것이라는 공통성도 갖고 있다. 또 이에 대하여 예수는 표면적 질문의 내용보다 궁극적인 그들의 의도 자체를 꿰뚫어 보시고 이에 대하여 각 경우마다 그와 관련된 절대 불변의 진리를 선포하시면서도 그 방법에 있어서는 지혜롭게 적절히 대응하심으로 그들이 숨긴 함정을 모두 다 뛰어 넘어 이기셨다는 공통성도 있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부터 구약의 일부 내용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곡해한 유대교적 오류를 고수하며 무조건적 이고 악의적인 편견으로 또 자신들의 알량한 세속적 종교적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유대 지도자들의 부당한 예수 배척, 또는 예수의 메시야직 에 대한 몰지각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그 세부 내용에 앞서 그 전반적인 배경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가 필요한바 이에 대해서는 본권 막 1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그리고 이 세 논쟁 각각의 내용과 그 저의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이 갖는 교훈과 의미는 해당 문단 장해를 참조하라.
마지막 단락인 41-46절의 그리스도의 신분에 대한 논쟁은 앞의 세 논쟁과는 달리 예수께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질문을 던지심으로 제기된 것이었다. 유대교(the Judaism) 또는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의 계시 전체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일부분만 편협하게 그것도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왜곡되게 수용하여, 잘못된 메시야관을 가짐으로 예수께서 모든 구약의 성취자요 구약을 보다 확장시킨 신약의 새로운 주체로 오신 사실을 인정치 않고 오히려 그를 배척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 위하여 메시야이신 자신과 관련된 구약의 모든 말씀을 그들이 온전히 깨닫지 못한 증거의 하나로서 주님의 신인 양성(神人兩性)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즉 표면적으로는 상호 모순인 것처럼 보이는 본문의 말씀을 제시한 것이었다.
보다 상술하자면 그들은 구약을 통해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을 따라 그의 후손으로 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일한 구약이 비록 그 분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시지만(삼하 7:11-17) 그 신분은 다윗의 주가 되는 신적 존재라는 사실 또한 다윗 자신의 입을 빌려 계시한 내용은 간과 했다(시 110:1). 이처럼 그들은 구약을 부분적으로만 수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육신으로는 분명히 다윗의 후손이지만 그 신분은 다원의 주가 되시는 메시야의 본질 전체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메시야 예수는 본래 제 2위 하나님 곧 성자로서 다윗의 육신을 타고 성육신하여 구속주요 메시야로서 세상에 오셨으나 이는 이 현 세상을 정복하여 유대인들만을 지배자 민족으로 격상시키는 정치적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버림받아 죽음을 당하심으로 택한 백성의 죄를 대속하고 오직 세상 끝 날에 새 천국을 세움으로 영원한 천국(天國)의 우주적 메시야(the Messiah)로서 우주적 왕권을 발휘하실 것이라는 예수의 메시야직의 본질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같은 구약 내에 있는 두 계시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심지어는 그런 구약 본문이 메시야에 대한 말씀인 것조차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들이 진실 전체를 모르기 때문에 표면상 모순일 뿐이었다. 어쨌든 이에 예수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사상과 논리의 근거로 삼고 있는 구약의 말씀 자체를 가지고 그들의 메시야직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겸허한 마음으로, 성경 말씀 전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깨달을 때에만 구속사의 진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인본주의적 자세로 자신의 판단에 맞는 일부의 내용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구속사(救贖史)의 실체를 왜곡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엄숙한 교훈을 깨달아야 한다.
혼인잔치의 비유
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6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7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 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세금 납부 논쟁
15 ○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21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부활 후 결혼 논쟁
23 ○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26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28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31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33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제 1 계명 논쟁
34 ○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계
41 ○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22:2-14 혼인 잔치 비유를 통한 교훈
1.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계속적으로 부르심(사 55:1-3)
2. 구원에는 신분의 제한이나 민족적 구별이 전혀 없음(행 2:39)
3. 주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은 언제나 구원을 예비해 두심(딛 2:11)
4. 오직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는 자만이 구원얻음(롬 10:9,10)
5. 구원에의 초청을 끝내 거절하는 자는 결국 멸망의 심판 당함(막 16:16)
풍습-22:ll-13 혼인 잔치 예복
본문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우리는 예복을 입지 않았다 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져진 한 사람을 보게 된다. 또한 임금이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들어왔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자기 행동에 대해 유구무언(有口無言)이었다.
이 비유는 근동 지방의 왕실이나 부자집에서 흔히 블 수 있는 혼인 잔치풍습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에 예복과 관련된 혼인 잔치 풍습에 대해 살펴 보고자 한다.
1. 혼인 잔치의 예복 착용
근동 국가들의 왕실이나 부자 집에서 혼인 잔치를 배설할 때는 잔치를 배설하기 수일, 혹은 수개월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청장을 보낸다. 그리고 초대에 응한 손님의 수에 맞추어 음식과 기타 여러 가지를 준비하게 되는데, 그 준비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혼인 잔치 예복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값진 의복은 그 어떠한 선물보다 귀한 선물로 여겨졌다(창 45:22; 왕하 5:5). 특히 부자나 왕들은 항상 선물용으로 많은 의복을 창고에 가득 보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복을 구입하기 위한 지출비로도 많은 돈을 썼다. 따라서 혼인 잔치 때에 의복을 선물로 준다는 것은 손님들에게 극진한 예우를 보이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임에 당연하다.
한편 초대 손님들이 혼인 잔치를 참석하게 되면 각자 예복을 선물로 나누어받게 된다. 물론 잔치에 참석하기 전에 초대 손님들의 집으로 미리 예복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예복을 받은 손님들은 다 그 옷을 입고 잔치에 참여하여 주인에게 예의를 표하며 축하했다. 만일 손님이 예복을 입지 않거나,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고 약간 걸쳐 입기만 하는 경우에 그것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으로 간주되었으며 곧 잔치에서 쫓겨났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왕의 잔치에서 이런 경우가 발생했을 때는 처형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한편 고대 근동의 이러한 잔치 예복은 웃을 갈아입어야 하는 그런 불편한 옷이 아니었다. 단지 다른 옷에 덧입는 가운이나 어깨에 둘러서 걸쳐 입는 망토 같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화려한 이 예복을 자신이 입은 옷 위에 걸쳐 입음으로써 초라하고 더러운 모습을 감추고 잔치 자리를 빛내도록 한 것이다.
2. 의의
이상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가 근동지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왕실이나 부자 집의 혼인 잔치 풍습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우리는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문밖으로 쫓아낸 왕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평범한 생활 풍습을 통하여 구원과 관련된 심오한 진리를 말씀하심으로써 그 진리의 말씀이 당대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의 성도들의 가슴 속에도 생생하게 살아 있게 하셨다. 실로 우리는 칭의(稱義)의 예복을 입고 귀한 하늘잔치에 참여해야 하겠다.
난제해설-22:15-22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여기서 가이사(the Ceasar)는 세상의 권력 또는 질서의 상징이다. 따라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라는 주의 말씀은 마치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역과 이 세상의 영역이 따로 있으며 사람은 각 영역에 속한 것은 그 영역 안에서만 해결하면 그만인 것이라고 말씀한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이는 성경 전체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전 우주와 역사에 대한 절대유일의 주권 사상과 위배된다. 또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만 그분의 뜻을 따르고 이 세속 생활에서는 세속영역의 논리로 살아도 무방하다는 즉 이중적 생활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결론이 된다. 또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는 원칙을 어떻게 생활에 적용하여야 하는가하는 문제가 새로 제기될 수도 있다.
1. 주님의 발언의 배경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로마 제국이 팔레스틴을 식민지로 삼아 통치하던 때였다. 따라서 식민 체제의 가장 초점인 세금납부 문제는 이 당시에는 그야말로 최대의 관심사였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권자들은 예수께 이 문제를 공개석상에서 제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께서 세금 납부가 가하다고 하면 유대 민중으로부터, 부당하다고 하면 로마식민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게 될 것이었다. 즉 어떤 대답을 택하든지 예수는 정치적 곤경에 빠지게 되어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그들의 흑백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또한 더 근원적인 시각에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제기하여 진리자체를 전락하시고자 바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 발언의 진의는 무엇인가?
2. 하나님의 영원한 절대 주권과 한시적 세속 질서의 독립허용
예수님의 발언은 결코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 두 개가 따로 있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역사는 절대 유일의 창조자이신 천부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모두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 따라서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이원론적 오류가 개입할 틈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사탄의 유혹으로 타락한 후 예수를 통한 구속의 법을 세우시고 이의 진행을 하되, 세상 끝 날까지 진행시키는 동안만큼은 일단 사탄의 죄성과 이에 호응한 인간의 죄성으로 오염된 이 세상 역사가 오직 당신이 세운 일반 은총적 섭리로만 통제되는 영적 존재들의 자유 의지에 따라서만 진행되도록 잠시 허용하셨다. 즉 인간 타락 이후 세상 끝 날까지 한시적(限時的)으로 세상이 일반 은총과 자유의지에 의해서만 진행되도록 허용하셨다. 그러나 동시에 태초부터 종말까지 당신의 택한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비록 세상 끝날 주어질 새 천국에서처럼 온전한 것은 아니지만 영적이고 부분적으로 임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본질적으로는 전 우주의 역사가 일원론적으로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나 한시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의 나라가 이중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에 예수께서는 이 같은 포괄적 진리를 모르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제기한 흑백논리식 올무를 극복하시고 또 세속나라의 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이 같은 발언을 하셨던 것이다.
3. 세속 질서와 세속 생활에 대한 성도의 자세
이상에서 우리는 세속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한시적으로 분명히 구분되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원론적 절대 주권이 영원히 유보된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훗날 우리의 행위대로 심판하실 하나님의 법을 엄존하므로 두 영역에서 서로 다른 생활을 해도 무방한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영역의 구분을 이해하고 이를 혼동하지 말며 살아야 할 것임을 일단 확인했다. 그러면 이제 한시적으로나마 두 영역을 동시에 살아야 하는 우리가 만약 두 영역이 상충될 때에는 자세를 취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새로 제기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이것 자체로서 깊이 더욱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먼저 세속 질서 또는 권력에 대한 성도 및 교회의 자세에 대해서는 롬 13장 연구 자료를, 그리고 이미 하늘나라의 시민이면서도 이 세상의 시민이기도 한 성도의 현실 참여 문제에 대한 이해는 눅 17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성경 전체의 교훈에 비추어 볼 때 세속 나라와 하나님 나라가 위배될 때에 할 원칙론적 교훈들만 제시 하기로 한다. 일단은 먼저 두 영역의 구분을 냉철히 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두 나라의 구분만 강조하여 방관해서도 안 된다. 최대한의 역량을 살려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려는 소극적 수호의 차원에서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 확장하는 적극적 선교의 차원에서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추어 세속 나라를 개혁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이럴 때에도 궁극적으로 성경은 이미 세속 나라는 끝내 타락하거나 종말을 맞을 것을 예언하고 있는데, 성도의 의무만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는 것으로 그쳐야지 마치 이 지상에 완전하고 영원한 낙원을 세울 것으로 착각하거나 실망해서는 안 되겠다.
원어연구-22:32, 나는‥‥이요
부활이 없다고 믿는 사두개인들과의 논쟁에서 예수는 출 3:6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잘못된 지식을 지적하셨다. 이에 그들은 아무 논박도 할 수 없었고 또 많은 무리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33절). 왜 이 구절이 부활의 증거가 되는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헬라어 본문에 사용된 동사를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본문은 '에고 에이미'( )이다. '에고'는 '나'(I), 여기에서는 '하나님'(God) 자신을 가리킨다. 그리고 '에이미'는 '~이다'라는 뜻으로서' 현재 직설법 1인칭
단수이다. 여기서 이 동사가 현재형으로 쓰여진 것이 논쟁의 핵심요소이다. 만약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죽어 그 존재가 사라졌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은 역사적인 과거 사실이므로, 본문과 같은 현재 직설법이 아니라 미완료 과거형인 '에멘'( )이 쓰여졌어야 옳을 것이다. 본문이 인용된 출 3:6의 상황에서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은 분명 과거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그들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산 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장차 육체와 함께 부활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모세 앞에서 자신을 소개 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헬, 에이미)'고 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에 대한 예수의 반박논지인 것이다.
주요 주제-22:34-40 계명 준수에 관한 예수 교훈의 특징
막 12장 자료 노트 참조.
주요 주제-22:41-46 예수의 선재성
요 8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22:23-33 부활에 관한 예수의 교훈
눅 20장 자료 노트 참조.
22:1-14 혼인 잔치의 비유
본문은 전장 마지막 단락(마 21:33-46)에 나타나는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 계속되는 부분으로 전장에 소개된 두 비유와 같은 맥락에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소개하고 있다. 다만 전장의 두 비유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죄악상을 폭로했다면 본문의 '혼인 잔치의 비유'는 복음을 무시해 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2-7절) 및 유대인의 배척으로 인해 복음의 주도권이 이방인들에게로 넘어가게 될 것(8-10절), 그리고 종말론적인 심판 등을 보여주고 있다(11-14절).
이러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께서 천국 잔치에 참석하도록 우리들을 초청하실 때 지체 말고 응하는 것이 지혜롭고 복된 태도이다. 본문의 비유에서 임금의 거듭된 초대에도 불구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거절한 자들의 태도는 왕의 주권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우(患)를 범하는 처사였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신의 완악함에 상응하는 형벌이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는 구원과 축복을 마다하고 기어이 심판과 멸망을 자초하는 강팍함을 결코 성도는 지니지 말아야 한다.
② 세상일에 부지런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열심을 내지 않는 자가 되지 않도록 성도들은 조심해야 된다. 본문의 비유에서 임금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잔치에 참석해서 먹고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이 자신들의 장래를 위해 훨씬 유익하다고 판단한 듯하다(5절). 하지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재물을 쌓아두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대해 부요하지 못한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다(눅 12:16-21).
③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임금의 초대에 응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복을 입지 않는 자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을 당했다(11-13절). 당시의 유대 풍습으로는 주인이 잔치에 참석하는 손님들을 위해 예복을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혼인 잔치의 예복'을 참조하라. 따라서 본문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채 잔치 자리로 나아간 자는 그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음을 아시고, 오직 여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누구든지 의롭게 될 수 있도록 하셨다(롬 3:20-28).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 구원에 도달하려는 일체의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요 14:6; 행 4:12).
22:1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 본장의 예수님의 비유는 마 21장의 연속적 상황이다. 전장에서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마 21:9)과 성전 숙정 사건(마 21:12,13)을 목도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정면 대결을 벌였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직접 질문함으로써 예수님의 행위의 부당성을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이다(마 21:23-46). 만약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를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주장한다면 신성 모독죄로 살해하려고 시도했을 것이고' 그가 자신의 권위를 명백히 제시하지 못하면 민중 선동죄와 성전 소란 죄로 기소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질문에 유대 교권자들의 음모는 무산되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의 완고한 죄악을 비유로 폭로 하신 것이다. 그리고 본장에서 계속되는 비유 또한 전장과 같은 맥락에서 행해졌다. 포도원의 비유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를 노정(露呈)시켰다면, 본장의 혼인 잔치 비유는 복음을 무시해버린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대답하여'라는 말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일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왜냐하면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농부의 비유를 끝으로 예수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막 12:12). 따라서 우리는 이를 마태의 독특한 기술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즉 마태는 예수께서 새로운 교훈을 말씀하신다는 것을 자기의 방식으로 이 문구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말씀하시기를'과 같은 의미이다(마 11:25 주석 참조). 한편 본문의 혼인 잔치 비유는 눅 14:16-24의 혼인 잔치 비유와 유사한 면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각각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이 비유의 기본적인 골격에다 약간 상이한 내용을 첨가한 데서 비롯되는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본장의 비유는 눅 14장의 비유와 유사함이 있지만, 혼인 잔치 예복(11-14절)과 같은 상이점이 많이 첨가되어 있는 것이다.
22:2 천국은 마치‥‥과 같으니. - 이런 식의 서두는 마 20:1에서도 확인되는 바와 같이 비유를 시작하는데 자주 채택한 형식이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은 '천국은‥‥임금과 같으니'라고 하여 임금이 마치 천국을 비유하는 듯이 보이나' 원문을 충실히 번역하면 '천국은‥‥혼인 잔치와 같으니'로서 혼인 잔치가 천국을 비유한다.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 본문에서 '혼인 잔치'(가무스)는 복수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혼인 풍습을 반영한 것으로 혼인 잔치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날에 걸쳐 계속되었음을 시사한다(창 29:27; 삿 14:12). 이와 관련해서는 창 24장 자료노트' '결혼 절차'를 참조하라. 한편 '아들'은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의 상속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물론 여기서 '아들'의 역할은 크게 부각되고 있지 않으나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라는 면에서 그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즉 예수는 자신의 사역을 임금이 그 아들을 위해 베푼 혼인 잔치에 비유하고 그 혼인 잔치의 주인공, 곧 천국의 실체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을 혼인식이나 잔치와 관련된 이미지로 이해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교회는 그 신부로서(계 21:9) 형상화되기도 한다. 혼인 잔치의 즐거운 분위기와 풍성한 음식(요 2:7) 등은 천국의 모습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합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임금. - '하나님'을 뜻한다. 이것은 혼인 잔치의 무게를 더해 주는 부분인데, 혼인 잔치의 주체가 바로 하나님임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잔치가 중요한 것은 자기 아들을 위한 혼인 잔치라는 점에서도 약간 부각이 되지만, 그보다는 그 잔치를 임금이 주최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왕이 잔치에 손님들을 초청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무한한 은혜와 축복을 상징하는 반면, 이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그 자체가 진노의 대상이 됨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서 베푸신 복음의 잔치이기 때문이다.
22:3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 - 고대 근동의 관습에 의하면 잔치를 배설할 때 며칠 전에 종들을 보내어 미리 초대해 놓고 잔칫날이 이르면 또 다시 종들을 보내어 손님을 인도하여 오게 한다(에 5:8; 6:14). 본절에서 보낸 종들은 이미 손님으로 초대된 자들을 인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절의 '종'은 천국의 임박함을 선포하고(마 3:2), 예수를 신랑으로 소개한(요 3:29)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먼저 보낸 종들은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나라와 메시야의 강림을 예고했던 구약의 선지자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청함 받은 자'들은 유대 민족을 가리킬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금되신 하나님께서 배설하신 천국 잔치에 일찍부터 초대받는 특권을 누린 자들이었다(롬 9:4).
오기를 싫어하거늘. - 초대받은 자들이 무슨 이유로 초청에 응하지 않았는지 본문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이 초대에 응했다가 정작 잔칫날에 이르러서는 초청을 거절한 것은 그들이 임금에 대하여 반역을 획책했을 것으로 밖에 추정할 도리가 없다. 하여간 이들이 초청을 거부한 것은 세례 요한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싫어했던 유대인들의 상태를 묘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2:4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 임금은 자신의 초청이 거절되자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에 응해줄 것을 간청했다. 물론 임금의 이와 같은 간청은 그가 손님들이 아쉬웠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손님들에 대한 특별한 배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고대 왕정 시대에 임금의 청에 불응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으며 또한 임금이 이처럼 간청하다시피 초청한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절을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 대하여 오래 참으심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전장의 악한 농부의 비유(마 21:33-46)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의무와 책임을 바르게 준수하길 요구한 것이라면, 본장의 혼인 잔치 비유는 하나님의 그 백성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려는 사랑에 근거한 인내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의무도 다 이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복음에로의 초청도 거절하고 말았다. 한편 여기서 '다른 종들'은 예수님 사후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도들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 잔치의 풍부함과 완비된 것을 의미한다. 즉 임금이 준비한 혼인 잔치의 연석은 양과 질에 있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는 천국이 초대된 모든 사람에게 최대의 만족을 줄 수 있는 곳임을 시사한다.
22:5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 이 표현은 사람들이 임금의 초청을 얼마나 가소롭게 여겼는가에 대한 언급이다. 즉 그들은 임금의 초청을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의 복음에 대한 유대인의 일반적인 반응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상업차로 가고. - 이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예수의 천국 복음에 대해 무관심했던 자들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당장의 현실적인 유익에 눈이 어두워 천국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대부분의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다(눅 16:14; 18:18-23).
22:6 그 남은 자들은‥‥능욕하고 죽이니. - 여기서 '남은 자들'은 자신의 현실적 유익에 눈이 어두워 천국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대부분의 유대인들과는 달리 천국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보냄 받은 자들을 적극적으로 박해했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대개 이들은 자신들의 생업에 종사하는 대신 유대교의 종교적 행사나 의전을 맡았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실제로 세례 요한 뿐 아니라 예수님까지도 죽였던 장본인들이다. 임금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라는 아름다운 소식(나 1:15)을 전하는 자를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는 예수님의 비유는 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야만적인 행동의 비약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교회사들을 상고해보면 예수의 이 비유는 조금도 과장이 섞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을 능욕하고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행 5:40; 7:59; 12:2; 14:19; 16:23). 결국 이러한 임금 되신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적대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의 표시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에 반역을 하려 했는가? 그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갖고 있는 집단 이기주의와 왜곡된 선민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집단 이기주의는 주로 종교적인 제사와 직무에 관련된 각종 이권에 대한 욕심을 말한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자신들의 현세적 기득권에 위협을 받게 되자 하나님께 반역을 선포하고 나선 것이다(마 21:23).
22:7 임금이 노하여. - 악한 농부의 비유에서처럼 주인이나 임금의 전령을 무시하는 일은 곧 그 주인에 대한 모독으로 직결된다(삼하 10:4). 이처럼 하나님의 계속된 인내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다 제 갈길로 떠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박해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따라서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인내의 은총을 거두시고, 완악한 유대인들의 행위에 걸 맞는 보응을 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군대를 보내어. - 여기서 군대는 구체적으로 로마 군대를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진노의 막대기'(사 10:5; 13:5; 렘 25:9; 렘 25:9; 51:20)로 사용하신 것을 비롯하여 역사상 자주 이방 군대를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기 위한 막대기로 사용하셨다. 그와 같이 A.D. 70년 예루살렘 멸망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로마 장군 디도(Titus)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다. 결국 예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은총을 거절하고 하나님께 반역하여 대적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 임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계신 것이다.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 이 구절은 비유의 한 부분이지만 실제 예루살렘 멸망 때 일어났던 구체적인 사건들이다.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 전쟁 중 로마 군인들은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살륙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 동네를 불사르고. - 여기서 동네는 예루살렘을 뜻한다. 한때 이곳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룩한 도성이었지만' 이제는 살인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으로(사 1:21) 전락해 버렸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곳을 불사르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실제 로마 군대는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성전과 건축물들을 초토화시켜 버렸고,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버렸다(마 24:2).
22:8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물론 이는 하나님께서 변덕쟁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유대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복음을 배척하고 하나님을 멸시한 결과였다(Lenski). 한편 이러한 본절은 처음 초대된 자가 버림을 받고 새로운 사람들이 초대될 것을 시사하는바 복음의 주도권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전환될 것을 보여 준다.
22:8 사거리 길에 가서. - 종들이 다시 명령을 받고 간 곳은 '사거리 길'이다. 여기서 '사거리 길'은 '교차로'라는 뜻을 지녔는데 ' 이곳은 여러 도시나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이곳은 지방에서 도시로 들어오는 사람과 지방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만나는 곳으로 항상 많은 사람들이 붐볐다. 이런 의미에서 '사거리 길'은 예수의 천국 복음이 예루살렘이나 유대 땅이라는 지역적 ․ 인종적 제한성을 극복하고 범세계적 ․ 범민족적 방향으로 개방될 것을 암시한다.
사람을 만나는 대로. - 이런 식의 초청은 분명 파격적이다. 그러나 이것은 초청받은 사람들의 거듭된 거절에서 야기된 것으로서' 이제 혼인 잔치 초청 대상자의 자격 조건이 철폐되었음을 말해 준다.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 주인의 명령을 받은 종들은 즉각 '길'(호두스)에 나가 사람들을 초청했다. 이때 '길'은 9절의 '사거리 길'과 동일한 의미로서' 사도들이 예수님 명령에 따라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했음을 알려주는 말이다(행 8:5,38; 10:28,48; 13:46).
악한 자나 선한 자나. - 초청의 제한이 철폐된 데서 올 수 있는 결과를 말해 준다. 실제 교회사를 상고해 볼 때 교회 내에는 항상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에는 일정한 기간이나 자격에 구애 없이 세례가 행해졌는데' 이 중에는 고넬료(행 10장)와 경건한 헬라인(행 17:4)과 같은 참 신자도 있었지만' 고린도 교회 교인처럼(고전 6:11) 거짓 신자도 왜 많았었다. 결국 본절은 현세 교회에 선악이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 준다 하겠다(마 13:24-30).
손이 가득한지라. - 주인의 종들이 '만나는 대로 데려 온 자들'로 혼인 잔치는 북적거렸다. 여기서 '손'(아나케이메논)은 '기대어 누운 자들'이라는 뜻으로 당시 유대인들의 흥겨울 때 기대어 누워 식사하는 관습을 엿보여 준다. 따라서 이때는 혼인 잔치가 무르익는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22:11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 이는 임금이 손님들을 환영하고' 그들의 준비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거리에서 초청된 자들은 비록 처음 초청된 자들의 거절로 말미암아 그 기회가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잔치에 참여할 때는 그에 합당한 예를 갖추어야 마땅하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혼인 잔치와 그 집 주인을 모독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임금의 입회는 혼인 잔치에 예복을 준비한 자들에게는 무한한 영광이지만, 예복이 미비된 자들에게는 추방을 당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유대인의 패역함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지만 이방인들에게도 천국에 합당한 준비를 갖추어야 할 것을 보여 준다.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 - 여기서는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주목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영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래서 통상 이들은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석할 수 없는 가라지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마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명목상의 교인을 대표하는 염소 편에 해당하는 사람들과 같다고 하겠다(마 25:41). 한편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예복 준비'와 관련된 것인데' 본 비유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예복을 착용했는지에 대해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그래서 잔치에 초대된 사람들이 예복을 착용하게 된 과정을 상세히 밝히지 않은 관계로 해서 어떤 사람들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에 대한 임금의 심판이 부당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한다. 즉 사거리 길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혼인 잔치에 데려 왔다면
이들이 어떻게 예복을 준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잔치에 초청된 사람들에게는 주인이 예복을 한 벌씩 주는 당시 유대 관습에(창 45:22; 삿 14:12) 비추어 볼 때 전혀 타당하지 않다(Clarke' Bluce). 즉 본절의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은 예복이 지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입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예복에 관한 유대 관습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혼인 잔치의 예복'을 보다 참조하라. 그가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누구나 왕 앞에서 응당 갖추어야 할 예를 갖추지 않음으로서 왕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예복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들이 입어야 하는 '의의 옷'(사 61:10)을 가리킨다. 물론 여기서 '의'는 회개와 믿음의 옳은 행실을 의미한다(롬 10:9'10; 계 19:8). 이 회개와 믿음의 옳은 행실이 없다면 비록 천국 잔치에 초대되었다 할지라도 곧 쫓겨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절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 장면을 묘사한 것이라 할 것이다.
22:12 친구여 어찌하여‥‥여기 들어왔느냐. - '친구여'라는 말은 외형상 다정다감한 정서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내용상 엄중한 문책과 심판의 기운이 담긴 말이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에 '친구'가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여기서 임금은 그가 잔치에 참석한 사실을 꾸짖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친구여'라는 호칭을 예수께서 자신을 팔아넘기기 위해서 다가오는 가룟 유다에게 사용했다는 사실은(마 26:50) 이 사실을 더욱더 분명하게 해 주고 있다.
저가 유구 무언이어늘. - 임금의 질문에 대한 예복 입지 않은 사람의 반응이다. 이미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는 이 사람은 임금의 위엄과 영광 앞에서 더 이상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은 변명을 할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유구무언'(에피모데)은 소의 입에 망을 씌우는 일과 관계된 동사로서(고전 9:9; 딤전 5:18)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모든 죄인들이 자신들의 죄들을 변명하고 은폐할 수 없음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22:13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 여기서 '사환'(디아코노이스)은 앞서 초청의 임무를 맡았던 '종'(둘로이)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즉 초청의 임무를 맡았던 종들은 복음의 전도자들이었던 반면' 본절의 사환은 그 임무와 관련해서 볼 때 하나님의 명을 쫓아 심판을 집행하는 천사들을 의미한다(마 13:41,49).
수족을 결박하여. -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수족을 결박하는 것은, 그에게 내려진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었음을 시사한다.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 여기서 '어두움'은 혼인 잔치가 벌어지는 천국과는 상반된 개념으로서, 지옥을 가리킨다. 그런데 지옥이 어두움으로 묘사된 것은 그곳이 소망의 가능성이 완전히 봉쇄된 곳이기 때문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 지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용인되지 않은 최후의 심판의 결과이기 때문에 지옥의 죄인들은 슬픔과 분노만 남게 될 것이다. 이때 슬픔이란 후회의 감정이 아니라 지속되는 고통의 눈물일 것이며, 이를 가는 분노는 극단적인 감정의 폭발을 뜻한다. 그런지만 이들의 슬픔과 분노는 현실을 반전시킬 수 없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회개와 반성은 이 세상 생명이 허락하는 한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도들은 항상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겸손한 경건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22:14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 본 구절은 본 비유의 결론에 해당한다. 본 구절이 문자적으로 의미하는 바, 즉 청함을 받은 사람의 수보다 택함을 받은 사람의 수가 적다고 하는 사실은 비단 본 비유에서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의 숫자적 개념을 넘어선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본 구절은 최후의 심판 때 있을 실제 상황의 현재적 표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한편 가라지가 알곡과 함께 공존하는 교회 공동체에서 최후의 심판 때 어린 양 혼인 잔치에 참석할 성도가 많지 않다는 경고의 말씀은, 세기말적인 증세인 교만과 방종이 지배하는 세대에 직 ․ 간접적 영향을 받고 사는 성도들에게 경종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그때에는 본 구절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비록 자신은 청함을 받았던 사람으로 생각하다가, 택함을 받지 못하는 경우에 봉착하는 이들의 슬픔과 분노가 충천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의 혼인 잔치에 초청을 받아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아 과연 어린양의 혼인 예식에 참예하기에 합당한 의의 옷을 입고 있는지 돌아보고 의의 옷을 입지 못했다면 속히 회개하고 믿음의 옳은 행실을 보여야 할 것이다.
22:15-22 납세에 대한 논쟁
앞서 유대 교권주의자들은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권위에 대한 질문을 예수께 했다가 완전히 참패하여 물러갔었다(마 21:23-46). 그러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예수님께 도전하는데, 본문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연합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해, 납세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장면이다(15,17절).
그런데 여기서 바리새파와 헤롯당은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세력으로 사상적으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집단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시대의 사회 문화적 배경'을 참조하라. 특히 세금 문제에 있어서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반면에' 헤롯 당원들은 헤롯을 중심으로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 모인 친 로마 계열의 사람들로 그들은 서로 대립관계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의 공동의 적인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려 음해하려는 데는 서로 연합 전선을 펼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로마 정부에 대한 납세를 찬성하면, 바리새인들이 나서서 예수를 반민족주의자로 매도함과 아울러 유일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거역하는 자로 정죄하고, 반대로 로마 정부에 대한 납세를 예수께서 반대하면, 이번에는 헤롯 당원들이 나서서 예수를 로마 황제에 대해 반역을 선동하는 자로 고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들의 사악한 음모를 미리 간파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구별하여 말씀하심으로써 너무나 간단히 그들의 간계를 물리치셨다(21절). 예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해당 주석과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 나라를 반대하고 진리를 배척하기 위해 악한 세력들은 서로 연합한다.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은 원래 적대 관계에 놓여 있던 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항하기 위해 굳게 연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번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묘안을 강구해 내기 위해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노력했다. 하지만 악한 자들이 아무리 연합할지라도 그들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시 2:1-7).
② 성도들은 모두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지만 동시에 각자 세상 나라의 시민권 역시 지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법과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 한, 세상 나라의 법도 준수해야 될 의무가 있다(롬 13:1-4; 벧전 2:13-17). 만약 성도가 공연히 국가의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결국 그것은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커다란 장애를 초래하고 만다.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 여기서 '이에'(토테)는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접속사의 하나로 여기서는 마 21:46과 연결되고 있다. 즉 성전에서 행한 예수의 행위를 트집 잡기 위해 온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지혜로운 답변과 비유로 인해 대패하고 물러간 후 예수를 음해할 다른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 여기서 '올무에 걸리게 하다'(파기듀소)는 말은 '계교를 부리다', '술책을 베풀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 바리새인들이 교묘한 질문을 통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음모를 꾸미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 여기서 '자기 제자들'이란 바리새인들의 문하생을 가리킨다. 즉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문하생과 헤롯 당원들을 함께 예수께 보낸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처럼 자신들이 직접 가지 아니하고 그의 제자들을 보낸 것은 아마도 자신들은 이미 예수님과 인연이 있는 터라 공개적으로 다시 나설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 것으로 여겨진다. 하여튼 여기서 문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신들의 제자를 헤롯 당원들과 함께 보냈다는 사실에 있다. 이들 '헤롯 당원'들은 당시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대리 통치자인 헤롯 왕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주로 담당한 일은 세리의 임무처럼 세금을 징수하고, 로마 정책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중들의 입장에서 이들은 매국노 집단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반면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통치와 세금 징수를 반대했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이들 두 집단은 본래 물과 기름 같아서 도저히 합치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지금 예수를 음해하는 데는 공동전선을 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이 두 집단에게 다 같이 그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그들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공동의 적인 예수를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 이들 두 정파의 사람들은 일단 자신들의 불순한 의도를 숨기기 위해서 매우 그럴 듯한 인사말을 건네고 있다. 이들은 지금 예수님에 대한 평판을 종합한 듯한 발언을 하는데' 그 내용은 예수께서 지금껏 하나님의 바른 길을 아무런 편견 없이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예수께 대한 칭찬은 사실 있는 내용 그 따로였다. 하지만 이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와 이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불순한 의도를 숨기고 예수로 하여금 자신들에 대해 경계를 늦추도록 하기 위해 이와 같은 말을 한 것 뿐이었다. 실로 그들은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을 소유한 자들이었던 것이다(잠 26:23).
22:17 그러면‥‥우리에게 이르소서. - 이 구절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이 지금 예수께 자신들의 고민들을 내어 놓고 풀어 주기를 청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의 간절한 청원은 흡사 그들의 지혜로서 이 문제를 풀 수 없다는 한계를 고백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법에 저촉되는 말씀을 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 당시 세금은 로마 정부가 속주의 백성들 가운데 남 14세, 여 12세 이상 65세까지의 사람들에게 부과했던 인두세를 말한다. 그리고 '가이사' (Caesar)는 당시 로마 제 2대 황제 디베료(Tiberius, A.D. 14-37년)을 가리키는 말로, 본절의 질문은 결국 선민 이스라엘 사람들이 로마 황제에게 인두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이냐? 옳지 못한 것이냐? 라는 요지의 내용이다. 사실 이것은 상당히 대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으로서, 인간의 지혜가 총동원되어 짜낸 흔적이 역력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시 로마 황제에게 납세하는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로마 간에 상당한 마찰을 빚었던 예민한 문제로서 아직도 각 정파 간에 일치된 의견 접근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당시 열심당원과 같은 정파에서는 일체의 납세를 거부했을 뿐 아니라 납세를 반대하여 갈릴리의 유다와 같은 사람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것이다(행 5:37, Josephus). 반면 본문에 나타난 헤롯 당원은 헤롯 가문의 재 부흥이라는 기치아래 로마의 정책에 적극 찬성하며 협력했다. 하여튼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선민인 자신들이 이방의 군주에게 납세를 한다는 것에 대해 매우 껄끄럽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납세는 곧 가이사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가이사를 동일한 위치에 두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의 권력에 눌려 어쩔 수 없이 세금을 납부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이 같은 복잡한 기류가 형성되어 있는 상황에서 본절의 질문은 상당한 긴장감을 유발시켰음이 분명하다. 또한 비록 전지하셨던 예수께서 이들의 불순한 의도를 간파하셨다 하더라도(18절) 이것을 빌미로 회피할 수는 없으셨다. 왜냐하면 주위에 둘러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이 메시야라고 생각했던 예수의 입장을 알고 싶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퇴양난의 처지로 몰아세운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들이 예상했던 상황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① 예수께서 자신을 메시야로 떠받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실망시킬 수 없어서 납세를 거부해야 한다 로 대답할 경우이다. 이 경우는 이들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들이 가장 원했을 대답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 예수님은 일시적으로 민중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겠지만 곧바로 로마 황제에 대한 반란죄에 해당되어 사형을 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② 예수께서 이들의 의도를 알고, 납세를 허용했을 경우이다. 이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입장에서 볼 때 최선의 결과는 아니지만 대체로 만족할만한 상황이다. 그들은 애초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지만 그를 선지자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선 때문에 여러 번 좌절된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 여기서 납세를 허용한다면' 백성들은 더 이상 예수를 선지자로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언제든지 예수를 체포할 수 있는 상황이 되는 까닭이다. 이들은 이 같은 상황을 기대하면서 분명 득의만만했을 것이고, 백성들의 관심은 순간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아닐 수 없다.
22:18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 이것은 질문에 배어있는 불순한 의도를 예수께서 간파하셨다는 말씀이다. '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 (잠 1:17)이라는 잠언 기자의 말씀처럼 이 구절에서 이미 예수께서는 이들의 질문에 신적인 지혜로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 예수께서는 전에도 여러 번 '외식하는 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마 6:2,5,16; 7:5; 15:7), 이 단어는 주로 외식과 악독으로 가득찬 바리새인들에게 적용되었다.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의 질문의 진의를 간파하시고' 먼저 이들의 악의에 찬 음모를 질타하셨던 것이다. 이로써 이들이 애써 감추었던 불순한 의도는 폭로되고 말았다. 사람의 심령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22:19 셋돈을 내게 보이라. - 여기서 '셋돈'은 특별히 세금을 낼 때 사용되는 로마 화폐였는데, 로마 정부는 세금을 황제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로마 화폐로 받칠 것을 강요했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전역에서 이 로마 화폐는 널리 통용되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로마 화폐를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 데나리온은 은으로 주조된 로마 화폐로서 당시 일용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녔다. 이 화폐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황제가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Hendriksen).
22:20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데나리온 동전에는 로마 황제의 형상과 그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다. 즉 동전의 앞면에는 '티카이사르디비 아복파복스트브스'(존엄한 신의 아들 디베디우스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내용이' 뒷면에는 '폰티프 막심'(최고의 제사장)이라는 내용이 각각 새겨져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눅 20장 자료노트' '가이사상' 삽화를 참조하라. 따라서 이러한 로마의 화폐가 유대인들에게 혐오감을 주었을 것은 당연하다. 하여튼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은 매우 평이한 내용으로서, 눈이 나쁘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대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을 역공하시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해주는 유도 질문이었다. 즉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던진 질문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오히려 그들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역공하고 계신 것이다.
22:21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이 대답을 하는 데까지는 특별한 분석이나 조사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데나리온에 새겨진 형상의 주인을 대답하면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머뭇거렸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도 그들은 이 대답을 하면서 예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납세 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이것(가하니이까)도 저것(불가하니이까)도 아닌 제 삼의 것이었다. 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예수님의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의 공세에서 벗어나기 위한 임기웅변적인 대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대답에는 그의 탁월한 신적 지혜와 오묘한 진리가 담겨 있다. 즉 예수께서는 국가에 대한 의무와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결코 모순된 것이 아님을 강조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납세 문제를 제기한 것은 사실 이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된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권력 역시 하나님께 속한다는 점에서 (롬 13:1-7) 국가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
무를 거스리는 것은 아닌 것이다(벧전 2:13-17). 즉 국가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곧 하나님께 대한 의무의 하나를 이행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골 3:23). 물론 여기서 국가에 대한 의무는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국가가 하나님께서 국가를 제정하실 때의 본래 목적, 곧 세상의 질서를 세워 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나갈 때를 말하는 것이요, 국가가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위배될 때는 의무
행함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다음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국가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게 하는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국가에 대한 의무 이행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② 국가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어떤 개인의 숭배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③ 성도들은 국가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되 더불어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국가와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22:22 저희가‥‥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그것을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떠나가고 말았다. 특별히 여기서 '기이히 여겨'라는 말은 예상치 않은 결과에 깜짝 놀라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답변이 너무 완벽하고 그들의 부패한 심령을 찌르는 것이어서 감히 어떠한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보여준다. 즉 그들은 비록 사탄의 하수인으로서 예수를 살해하려고 갖은 음모를 다 꾸민 자들이지만'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 앞에서는 더 이상 일언반구도 대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그들 스스로 패배를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더구나 지켜보던 군중들 역시 대세의 흐름을 감지했던 터라 꼬리를 감추고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이들은 돌아가서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 7:46)라고 자신들의 스승들에게 보고했는지도 모르며,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스승들은 권위 논쟁에서의 패배(마 21:23-46) 이후 또 다시 쓰라린 참패를 느껴야 했을 것이다.
22:23-33 부활 논쟁
예수를 음해하려는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의 시도가 무산되자(15-23절),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등장하여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음해하기 위해 당시 유대 정치 ․ 종교 지도자들이 총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여튼 본문을 보면 사두개인들은 영적인 존재와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답게 부활에 관한 신학적 질문을 예수께 제기했는데, 특별히 그들의 질문은 유대 사회의 계대결혼(繼代結婚)과 관련된 것이었다(23-28절). '계대 결혼'과 관련해서는 신 25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즉, 극도의 이성주의(理性主義)에 젖어 있던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이 유일한 정경(正經)으로 인정하는 모세 오경에 언급된 계대결혼 제도(신 25:5-17)를 근거로 예수께서 가르치는 부활교리가 논리적으로 모순이 있음을 밝힘으로써 예수의 교훈의 가치를 떨어뜨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두개인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부활 후에는 결코 결혼 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심으로써 그들의 말문을 막으셨을 뿐만 아니라(29-33절),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사두개인들의 무지를 여지없이 폭로하셨다(29절). 그러므로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려던 사두개인들로 인해서' 오히려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이 지니고 있던 어리석음과 예수께서 지니고 계시던 영적 지혜가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예수의 답변은 성도들의 사후 부활체의 삶의 양식이 어떠할지 암시해 주는 바, 그것은 천사와 같게 되리라는 것이다(30절). 즉 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않고 새로운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본서 제 1권 성경 교리, 기독론 부분을 참조하라.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깨닫게 된다.
① 부활에 관한 신앙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으며 성경을 진리로 인정한다고 말하면서도 부활신앙을 갖지 않는다면, 바로 그 사람은 구원의 복음을 거부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부활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고, 결국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헛되며 여전히 우리가 죄 가운데 빠져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고전 15:12-19).
② 성도들은 이성주의에 젖어, 성경을 믿음과 순종의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합리적 해석과 비평의 대상으로 여기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사두개인들은 유대 종교의 제사장 계급에 속한 자들로서,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온전한 순종의 자세를 견지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세속에 물들어 너무나 형식적인 신앙생활만 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오늘날에도 이성 제일주의와 과학만능주의에 빠진 자들이 교회 안팎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은연중에 자신의 신앙이 그런 풍조에 물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된다(롬 12:2; 약 1:27).
22:23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 예수님을 음해하려는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들의 음모가 예수님의 신적인 지혜 앞에 무산되자,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결국 예수를 음해하는 데에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마 21:15)을 비롯하여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16절), 그리고 본절의 사두개인 등 당시 모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가담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모두 예수의 대적이 될 수 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하여튼 사두개인들은 지극히 합리적 현실주의자들로서, 부활과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사두개파에 대해서는 신약 총론 신약 시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유대교 종파 부분을 참조하라. 따라서 이러한 성향을 지닌 사두개파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 당연히 가소롭게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의 현실주의적인 관점으로서 예수님의 비합리적인 사상을 타파할 수 있다고 여겼던 바, 부활에 관한 질문을 통해 예수의 권위를 실추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22:24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 사두개파 사람들 역시 예수께 경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 경어가 정치적인 사교술에 불과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하여튼 이들은 자신들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모세 오경 중 신 25:5,6을 근거로 예수에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기록된 제도는 일명 '형사취수 제도'(兄死取據制度)라 불리는 것으로서 형이나 아우가 아들을 얻지 못하고 죽었을 때, 그 미망인을 살아 있는 형이나, 아우가 취해서 대를 잇게 해주는 제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가문과 기업이 멸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제정하신 은혜로운 규례로서, 성경에는 실제로 '보아스'가 '룻'을 취해 가문의 대를 잇게 하는 경우가 언급된다(룻 4:1-8). 또한 이 규례를 거부했던 오난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경우도 언급되고 있다(창 38:8-10). 이에 대해서는 신 25장 연구자료, '계대 결혼법'을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이 같은 제도는 비록 드문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꾸준히 준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의 입장에서는(행 23:8) 이 규례가 부활이 없다는 가장 큰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22:25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 사두개파의 불순한 저의를 유감없이 드러내어 주는 구절이다. 그들의 논지, 즉 부활이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경우만 상정하면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두 형제의 경우를 언급하면 될 터이다. 그런데 그들은 굳이 일곱 형제의 경우를 상정해서 '부활 교리'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경멸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당연한 반응이라고
한다면, 진리를 경멸하는 것은 사탄의 직접적인 사주로 인해 나타나는 반응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더 크다 할 것이다.
22:26 그 둘째와 세째로 일곱째까지. - 부활의 진리를 조소하고 경멸하는 사두개인들의 유치한 질문은 일곱 번째 형제에까지 열거하고 있다.
22:27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 사두개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여인은 생전에 칠 형제의 아내로 지냈는데, 문제는 그 여인이 죽으므로 발생하게 되었다.
22:28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 사두개파의 질문의 핵심이다. 생전에 칠 형제의 아내가 된 바 있는 이 여인의 진정한 남편은 누구인가? 그녀의 첫 남편인가, 아니면 마지막 남편인가? 혹은 그녀와 가장 오래 산 남편인가? 그녀가 가장 사랑한 남편인가? 이런 사두개파의 질문은 당연히 부활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한 술책으로서, 그 내용이 너무나 조잡한 세상사의 이면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이것은 그들 스스로 영적인 것에 관심이 없었고, 이를 무시했기 때문에 만들어낸 조잡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의 최대 관심은 '지금', '여기' 뿐이었고, 보이지 않는 내세인 저 너머의 세계는 그들의 영적 능력 밖에 있었다. 그래서 사두개파는 '부활'의 세계를 이 세상의 드문 경우의 실례를 가지고 부인하려고 했던 것이다.
22:29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오해하였도다. - 예수께서는 먼저 사두개파의 질문의 허점을 지적하셨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논리를 가지고 부활 교리를 뒤집으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논리의 불충분성을 두 가지로 지적하셨다. 첫째는 성경의 진리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의 질문 근거인 신 25:5,6은 부활 교리를 뒤집는 근거가 될 수 없고, 오히려 그들이 믿는 모세 오경 전체는 부활 교리를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31,32절). 둘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에 무지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 25:5,6로 인한 규례로 말미암아 야기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는 분이 아니다(30절). 부활 때의 몸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육신의 '몸'과는 전혀 다른 영적인 몸으로서 변화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철저한 현세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사두개파 입장에서는 부활을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자니 하나님의 능력 또한 알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보면서 성경적 진리에 불명확한 인식은 오히려 하나님을 제한하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말씀을 날마다 상고하되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히 깨달음은 물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항시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해야할 것이다.
22:30 부활 때에는‥‥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 이 구절은 성도들의 사후 모습을 짐작케 해주고 있다. 그때는 장가도, 시집도 갈 필요가 없다. 본래 결혼 제도는 인류를 보존하고 번식시키기 위해 주신 하나님의 창조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부활 때에는 창조의 법칙이 이미 완성된 때일 뿐만 아니라 범죄의 결과인 죽음의 지배를 벗어난 때이다. 그러므로 그때에는 지상에서와 같이 인류 보존이라는 목적에서 발생한 결혼 제도가 필요 없게 된다. 물론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쾌락이나 만족은 더 새롭고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대치될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성도들의 부활체의 상태가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론 이것은 부활체와 천사들의 존재 양식이 같게 되리라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천사들은 단순히 영적인 존재인 반면, 부활체는 영육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고전 15:35-58). 다만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부활한 성도들의 삶의 양식이 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즉 부활한 성도들은 더 이상 세상의 법칙에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새로운 하늘의 법칙에 따라 살게 될 것이다. 결국 본절은 내세와 현세를 동일한 관점에서 취급한 사두개인들의 과오와 그들의 잘못된 사상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부활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1권 성경교리' 기독론 중 '부활' 부분을 참조하라.
22:31,32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 이는 사두개인들의 성경적 무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구절로 예수께서는 성경적 증거를 들어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고 계신다. 여기서 32절은 출 3:6의 인용문으로 이는 하나님께서 호렙 산 가시떨기나무 화염 속에 나타나셔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소임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보통 선민의 하나님,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기에 한 차원 높은 의미를 부여하는바 부활의 실제성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사실 모세가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의 세 열조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야곱의 하나님이로다'고 말씀하실 때는 그들이 살아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이 말은 세 열조가 현 세에는 죽었으나 내세에는 살아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특별히 출 3:6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것은 그 사실을 확고히 뒷받침해 준다. 하지만 사두개인들은 그들의 경전으로 사용했던 모세 오경을 읽으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까닭에 부활을 인정할 수 없었고 본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유치한 잘못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22:33 무리가‥‥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 사두개인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사두개인의 불순한 의도를 봉쇄했을 뿐 아니라 주위에서 관망했던 무리들에게 경탄을 자아내게 했다.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의 가능한 한 모든 지혜를 짜내어 던진 질문이 예수님에 의해 질문의 불충분성을 지적받게 되자' 더 이상 어떠한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이런 광경을 시종 일관 지켜보았던 군중들은 예수님의 깊은 성경 해석과 신적인 위기 극복 능력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이스라엘에서 가장 해박한 성경 지식과 막강한 권세를 가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 모두가 추풍에 낙엽 떨어지듯 맥을 못 쓰는 광경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서기관 중의 한사람이 나아와 예수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라고 고백한 것으로 나타난다(눅 20:39). 이 서기관은 아마도 바리새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 바리새인들은 비록 예수님을 음해하는 일이 실패로 돌아가기는 했으나 자신들의 경쟁 상대자인 사두개파가 예수께 여지 없이 패하는 것을 보고 쾌재를 불렀던 것 같다.
22:34-40 가장 큰 계명
본문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의 답변을 언급하고 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모두 613개 조항으로 구분했고 그 중에서도 248개 조항은 보다 중요한 것으로, 나머지 365개 조항은 덜 중요한 것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처럼 율법을 분류한 것은 그들이 613개나 되는 조항을 전부 다 지킨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차선책으로 율법을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여 중요한 조항만이라도 반드시 지키도록 했다. 하지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율법의 중요한 조항과 덜 중요한 조항을 분류하는 데에 항시 논란이 있었다. 본문의 바리새인의 질문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는데, 그는 과연 어떤 계명을 제일로 여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예수를 시험하고자 한 것이다(34-36절). 이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15-17절)과 사두개인들(23-28절)의 질문에 이온 예수를 책잡으려는 시도로서' 여기서 우리는 예수를 음해할 거리를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당시종교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도전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예수께서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해 첫째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37, 38)와 둘째 계명으로 '이웃을 사랑하라'(39절)는 것을 제시하셨는데' 이는 성경의 어느 특정 계명을 제시하신 것이라기보다는 구약 성경의 모든 율법을 관통하는 계명이자 율법의 근본정신이었다(39절). 나아가 예수께서 제시하신 두 계명은 사랑이야말로 모든 율법의 환성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롬 13:18-10). 결국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랑이 없는 율법 준수는 종교적 형식주의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경고해 주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정녕 하나님의 계명들 중 어느 하나라도 사랑에 기초하지 않고는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 만약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억지로 계명을 지키는 자가 있다면' 결국 그는 실패하고 말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과 품성하신 은혜 때문이다(롬 8:39; 요일 4:18,19).
②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충성은 반드시 이웃에 대한 사랑과 봉사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노라고 말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는 거짓말하는 자이다(요일 3:16-18; 4:20,21). 따라서 그런 자들은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엄청난 책망과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마 25:31-46).
22:34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의 음모를 분쇄하고 그들을 침묵케 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모였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경쟁 상대인 사두개인들을 예수께서 패퇴시키신 사실을 보고 기뻤지만 예수께서 그 일로 인하여 민중들에 의해 추앙받는 일은 결코 달가워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음해할 새로운 음모를 꾸미기 위해 모인 것이다.
22:35 한 율법사가. - '율법사'는 '서기관' (마 2:4; 7:28'29)' 혹은 '교법사'(눅 5:17)로도 불리는 자들로 율법을 해석하는데 당대의 권위자이자 전문가였다.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 마태는 여기서 율법사의 질문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마가는 마태와는 달리 율법사의 개인적인 호기심이 작용했으며' 그래서 율법사의 깨끗한 마음을 언급하고 있다(막 12:28-34). 또한 예수께서 이 율법사를 칭찬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양 복음서 간의 차이는 자칫 성경의 기록이 모순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양 복음서의 차이는 모순된 것이 아니라 기록의 관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 율법사는 예수를 음해하기 위한 바리새파의 계획에 따라 파견된 듯하다. 그러나 율법사는 막상 예수님의 신적 지혜를 보자 감탄하여 예수께 존경스런 마음을 가지고 이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이를 기록하면서 마태는 바리새파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초점을 맞추었고' 마가는 율법사 개인의 마음 상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22:36 선생님이여‥‥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이 질문은 당시 랍비의 세계에서 중요한 이슈(issue)가 되는 문제였다. 당시 랍비들은 율법 조항을 613개로 구분했고, 이 중에 248개 조항은 중요한 것으로, 나머지 365개 조항은 덜 중요한 것으로 분류했다. 이들이 이렇게 조항을 구분한 것은 613개나 되는 율법 조항을 전부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그들은 이를 중요성에 따라 구분하여 중요한 조항은 반드시 지키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이런 당시 상황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중요한 조항과 그렇지 못한 조항 사이의 기준이었는데, 이것에 대해서 당시 랍비들 사이에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지금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한 내용은 이런 배경에서 비롯되었다.
22:37 네 마음을 다하고‥‥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신 6:5의 인용문이다. 이 구절은 예수의 두 답변 중 첫째 번 대답인데,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도리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한 '신앙고백문'인 '쉐마'(Shema)의 한 구절이었다(신 6:4-9; 11:13-21; 민 15:37-41). 신 6:5에서는 '뜻' 대신에 '힘'으로 기록되었다. 여기서 마음은 정서와 의지의 좌소를, 목숨은 살아있는 육신의 생명력을' 뜻은 지성의 좌소를 상징하는 것으로, 결국 본절은 전인격을 가지고 온전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사랑'의 명령은 사실 십계명 가운데 첫 번 돌비에 새겨진 네 계명, 곧 하나님께 관련된 계명들의 포괄적인 요약이다. 따라서 '하나님 사랑'의 명령은 결국 하나님께 관련된 계명을 온전히 지킬 것을 명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2:38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 '하나님 사랑'의 명령은 율법을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계명으로' 다른 모든 계명은 이 계명에 근거할 때만이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22: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와 같으니'라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는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교훈의 차이이다. 즉 당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 행하다 보면 사람에 대한 의무는 소홀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 15:1-9).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사람에 대한 의무를 동일 선상에서 취급하고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것으로 규정하고 계신 것이다. 사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 사랑이라는 말에서 하나로 융합된다. 즉 이웃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자 징표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 눈에 보이는바 형제나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요일 4:7-21).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 구절은 레 19:18의 인용문으로 십계명 가운데 둘째 돌비에 새겨진 여섯 계명, 곧 사람에게 관련된 계명들의 포괄적 인용이다. 한편 여기서 '이웃'은 본래 율법이 주어질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과 그 땅에 거주하는 외국인만을 의미했으나, 예수께서는 원수를 비롯하여(마 5:44), 자기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눅 10:29-37)에게까지 확대시키셨다. '이웃'의 개념에 대해서는 눅 10:29-37 본문과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 문자적으로 '이 두 계명에 그 율법과 그 선지자가 매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 전체를 가리킨다(마 5:17 주석 참조).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이 구약 전체의 기둥이요 핵심이라는 의미가 있다. 사실 구약의 중심은 모세 오경이라 할 수 있고, 모세 오경은 십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으며, 십계명은 다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계명으로 집약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두 계명이 무시된 것은 그 어느 것이라도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22:41-46 다윗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
거듭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바 있는 예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그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계신다. 이러한 본문은 세 차례에 걸쳐 있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질문(15-40절)애 대한 결론적 성격을 띠면서, 또한 그들에 대해 저주와 심판을 선포하시는 마 23장의 내용에 대한 도입부 역할을 한다. 하여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신 질문은 다윗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묻는 것이었다(41,42절).
그런데 예수께서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시정시켜 주시고 그들의 무지를 폭로하기 위함이었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 가운데 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42절) 그는 인간일 뿐 그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다시 말해서 메시야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 110:1의 다윗의 시를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임을 밝힘으로써 유대인들의 잘못된 메시야관을 교정시켜 자신이 바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지니신 메시야이심을 깨닫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43-46절). 바로 그것은 그리스도와 다윗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었는데, 유대 종교의 지도자들은 아무도 거기에 대해 답변하지 못했다. 결국 본문에서 우리는 육신적으로 다윗의 혈통에서 태어나셨지만 영적으로는 다윗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야 말로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아울러 갖추신 존재로서 은 세상을 구원하실 메시야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롬 1:3,4).
이러한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동시에 인정하지 않는 자는 결코 올바른 신앙을 소유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만일 예수님의 육신적 생애만 강조하여 마치 4대 성인(聖人) 중의 한 사람이거나 유대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키려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혁명가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생각이라 할 것이며, 반대로 예수님의 신적인 속성만 강조하여 성육신(成肉身)을 부인하는 것 역시 지극히 위험한 이단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요일 4:2). 진정 예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사람의 모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온 인류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신 분(빌 2:6-8)이심을 믿는 자만이 참신앙의 소유자라 할 것이다.
22: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물으시되. -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란 바리새인들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를 음해하기 위해 모인 때(34절)와 같은 때이다. 따라서 본절의 '때'란 '가장 큰 계명'에 대한 율법사의 질문과 예수의 답변이 있은 직후이다. 즉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공세를 봉쇄한 후 그들이 예수를 공격하기 위해 사용한 율법을 통해 바리새인들을 반격하시고 아울러 그들과 무리들에게 자신이 메시야되심을 드러내셨던 것이다.
22: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고, 그들의 무지와 편견을 드러내시기 위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신 질문이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메시야관으로(마 1:1 주석 참조)' 예수의 질문을 받은 바리새인들의 대답이다. 즉 당시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실 것으로 생각하며 고대했던 것이다(시 110:4; 사 11:1'10; 렘 23:5). 사실 이 메시야관은 예수께서도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과 그도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셨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옳다(마 21:15,16). 그러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의 메시야관은 메시야를 정치적 메시야로만 이해했을 뿐 온 세상을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실 분임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막 서론 특별자료' '메시야의 이해'를 참조하라.
22:43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 앞 구절에서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임을 분명히 대답했다. 그런데 이들은 '다윗의 자손'이 인간 중에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 분이 '하나님'되신다는 사실에는 수긍하지 않았다. 즉 그들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은 너무도 영광스럽고,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과 상면할 수도 없고, 더구나 그분이 인간의 몸으로 성육신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는 것을(요 5:19-47)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를 돌로 치려고 했던 것이다. 즉 이들의 신학적 입장 속에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성육신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지금 이들의 완고한 신학적 입장의 교정을 시도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다윗이 오실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성령에 감동되어 '주'(主)로 고백했다는 예증을 들고 있는데, 이는 결국 다윗왕이 자신의 후손을 주로서 고백했다면, 당연히 오실 그리스도가 '주'로서 고백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계신 것이다.
22:44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 이 구절은 70인역(LⅩⅩ)의 시편 110:1의 인용문으로, 히브리 원문에는 '여호와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 메시야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이다. 한편 이 시는 다윗이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한 것으로, 이는 결국 다윗이 그의 자손 가운데서 나실 메시야가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임을 알았음을 의미한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를 가리킨다. 한편 여기서 '네 원수'는 그리스도의 원수, 곧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하나님을 대항하고 그의 백성을 유혹하여 넘어지게 함은 물론 심지어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이제는 그들이 유업을 이을 자인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악의 세력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심은 물론 승천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그 보좌에서 일어나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그의 원수들은 그의 발 아래 두실 것이다(히 10:12'13). 특별히 여기서 '발 아래 둔다'는 말은 고대 왕들이 정복당한 왕들의 목을 발로 밝음으로써 승리를 표시하였던 것(수 10:24)을 반영한 말로서 원수들의 완전한 패배와 굴복을 의미한다.
내 우편에 앉았으라. -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영광과 권세를 받는 상태를 잘 보여 주는 말이다. 이에 관해 신약은 곳곳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엡 1:20; 히 8:1).
22:45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 이것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만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일종의 도전적인 질문이다. 다윗이 언제 날지도 모르는 자신의 후손을 가리켜 '주'라고 고백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속한다. 즉 자신의 후손이 자신의 주가 된다는 불가능한 가능성을 다윗은 성령에 감동을 받아 스스럼없이 고백했던 것이다. 따라서 메시야인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가 되시고, 더 나아가 모든 이스라엘이 섬길만한 '주'되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지금 자신이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충분한 역사적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서, 바리새인들 스스로 편협된 생각을 버리고 자신을 그리스도로 받아 들여야만 한다고 공박하고 계신 것이다.
22: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 말씀을 통한 예수님의 자기 계시는 성경의 교사로 자처했던 바리새인조차 감히 사족을 달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권위가 있었다. 그러기에 이들은 더 이상 구차한 트집을 잡는 식의 질문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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