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정읍학연구회장, 사단법인 민족문화연구소장)
1. 서언
어떤 지역이든 역사를 살펴보면 그 지역에는 의로움[義]을 드높인 의인 열사들이 없을 수 없겠지만, ‘정읍’은 여러 면에서 이 ‘의로움’ 면에서는 역사적으로 남다른 데가 있는 고장이다.
일찍이 조선 후기 순창 출신 유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정조 22~1879/고종 16)은 「건재 선생 문집 서문健齋先生文集序」에서 “의병義兵이란 본래 나리를 평정하고 폭도들을 제압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춘추시대春秋時代 이전에도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있는 이가 충의忠義로써 호부虎符 군대 동원 표지.
도 없이 서로 더불어 일어나 국난에 대응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병義兵이라 한 것은, 의병이 관병官兵과 다른 점을 구별하기 위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이러한 의병義兵은 우리나라 선조대왕 시절 임진년에 처음 나타났으며, 그 이전에는 일찍이 없었다.” 김천일 지음, 김익두 옮김(2018), 『건재 김천일 전집』 Ⅰ, 서울: 문예원, 65쪽.
라고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의병義兵‘은 호남지방 최초의 본격적인 의병 활동으로 알려진 1592년 5월 건재 김천일 선생의 나주 의병 거병도, 그 거병 발발의 싹은, 건재 선생이 그의 스승인 호남 유학의 비조鼻祖 정읍 북면 거주 일재一齋 이항李恒(1499/(연산군 5~1576/선조 9) 일재 이항은 장성의 하서 김인후(1510년/중종 5~1560/명종 15)와, 김인후는 해남의 미암 유희춘 (1513/중종 8~1577/선조 10)과 친사돈 관계를 맺어, 이 세 분은 사돈 관계로서, 호남 유학의 3대 비조로 알려져 있고, 미암 선생은 나중에 건재 선생을 관계에 천거한 사람이기도 하다.
선생 문하 수학의 결과였다. 나중에 일재가 서거한 후, 자신의 건재는 자신의 나이 41세 때에 정읍시 북면 보림리에 남고서원을 세워(1577) 그 사당에 일재 선생의 신위를 모시었다.
정읍은 일재 선생의 제자 교육을 통해서 호남 의병의 주요 인물들인 건재 김천일, 오봉 김제민(정읍), 도탄 변사정(김제), 물재 안의(정읍), 원모당 김후진(정읍), 월봉 김대립(정읍), 한계 손홍록(정읍), 매헌 소산복(남원) 등의 임난 의병 혹은 준 의병들을 양성해 내었다. 이항 지음, 권오영 옮김(2002), 「일재선생유집 3권, 부록: 문인록」, 『국역 일재선생 문집』, 일재선생 문집국역추진위원회, 164~175쪽
한편, 최현식 선생의 『정읍 의병사』를 보면, 정읍의 의병/절의 인물로 기록된 인물은, 임진왜란 52명(송상현, 신호, 김제민, 백광언, 류희진, 이경주, 민여운, 전덕린, 이경국, 류경인, 류준필, 이대축, 이환, 이허량, 권극평, 안의, 허상징, 김진태, 김신문, 정윤근, 김흔, 김안, 류윤근, 류희사. 이안국, 희묵, 손승경, 하광수, 최준, 김명, 김의립, 이시화, 송인신, 손오상, 류희문, 임희건, 안량우, 손홍록, 김대림, 김후진, 이수일, 김복억, 송지순, 김엽, 류극인, 김지백, 최안, 최경행, 송창, 정염, 이영국, 이원신), 정묘호란 · 병자호란의 의병/절의 인물로 14명(김준, 이유, 김유성, 최응립, 백함생, 김득룡, 김징, 배명순, 최억룡, 김지문, 김지수, 김성, 김남식, 김지서), 한말 의병/절의 인물로 7명(김영상, 류병우, 임병찬, 류종여, 이성화, 김기술, 김우섭) 등을 인물별로 그 업적과 일생을 간략히 기록해 놓고 있다. 최현식(2006),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30~104쪽.
이 기록에 의하면, 정읍과 관련된 의병/절의 주요 인물들은 총 73명이나 된다. 이것은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들이고, 이런 기록에 주요 인물로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일반 의병들, 곧 이렇게 기록된 의병/절의 인물들을 따라 의별/절의 활동을 하였던 평범한 일반 의병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본고는, 이상에 간략히 언급한 정읍 의병/절의 인물들 중에서, 임진왜란 때의 의병 활동가로 기록되어 있는 의병장 민여운 선생에 관한 기록들을, ‘정읍학’의 입장에서 집중적으로 종합 · 검토하여, 이분에 관한 역사 기록 자료들이 가지는 ‘정읍학’에서의 의미와 가치를 논의하고자 한다.
2. 민여운 선생 관련 의병 활동 자료들
민여운 선생의 의병 활동과 관련된 역사적인 기록 자료들로는 현재 다음과 같은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민여운 선생 유족 민득기 선생의 조사 자료에 크게 힘입은 것임을 밝혀둔다.
① 『임계기사壬癸記事』(1592~1593) 기록 : 이 기록은 민여운 선생에 관한 가장 오래된 역사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이 기록물은 현재 전라북도 정읍시, 정읍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2017년 3월 31일 전라북도의 유형문화재 제245호로 지정되었다.
○ 安義孫弘祿爲義穀都有司時 別錄
癸巳九月 募取 白米五百石 木花四百斤 細木一疋 白綿紬一疋 壯紙卄卷
自出 白米五百二石二斗 木花百斤內 白米三百卅八斛七斗 木花五百斤 白綿紬一疋 細木一疋 壯紙卄卷 全羅道他義穀未送之前 先送義州行臺(物目成冊 踏印本縣 在戶曹)
餘分送高崔閔三義兵大將
送勇健奴三名于前府使高敬命大將
送勇健奴三名于前府使崔慶會大將
送勇健奴二名于前縣令閔汝雲大將
崔義兵軍功磨鍊時 報巡察使道成冊內 泰仁幼學安義孫弘祿 自恨以儒生不能赴戰 自 募代送勇健壯奴太福孟斤 其爲國誠心 極爲可嘉
閔義兵 報奴秋同射殺賊 (落字) 射中二
體察使 柳成龍
副察使 金鑽
巡察使 權慄
體察使 鄭澈
穀物募取記
前郡守 金福億 白米平二石十斗
前主簿 金慶億 白米平二石
安義 白米平二十石 木花一百斤
孫弘祿 白米平二百十二石二斗 木花一百斤
金後進 白米平二十石十斗
金知白 白米五斗
李守一 白米平一石
金大立 白綿紬一疋
鄭思謙 木花四百斤
宋昌 細木一疋
官奴 扇匠 莫終 大壯紙 卄卷
○ 泰仁閔義兵 軍粮勸諭文
都繼運將 泰仁幼學安義孫弘祿 痛哭渾淚 再拜謹告于大小人員 伏惟 我朝禮義之國 主上 聖明之君也 是以德洽一國 化及遠夷 遠夷之國感而服之者 其來久矣 不意今者蠢蠢倭賊 乘我昇平日久 大小恬憘 侵陵我郊畿 魚肉我生靈 使二百年祖宗 宗社盡蕩爲灰燹 使我堯舜之聖主 播越於天西千里之外 嗚呼 爲臣民者 孰不切齒腐心 欲臠其肉哉 思之其罪 其罪不容誅 曷勝痛哉 孔子曰 微管仲 吾其爲披髮左袵 孟子曰 夷狄不可與中國 況君父之讐 不可共戴一天也 則其可甘爲異類而同處一國乎 嗚呼 値此危亂之日 孰能仗忠奮義以雪其恥以洗其辱乎
前龍潭縣令 閔公汝雲 有仁有德之將也 其雄謀忠略 特出於湖南 郭汾陽之受拜回紇 崔致遠之檄走黃巢 可復見於今日矣 其爲大將不 (落三四字) 與敵愾同志之士 倡義振旅 人皆影從而響 (落三四字) 千矣 勢如破竹 談笑可擊 第凶荒連年 軍 (落三四字) 嗟그難 可辦 願有忠義慷慨之心者 毋惜數斛之穀 數疋之布 給我義兵 使之恢復 雪一國之恥 報君父之讐 千萬幸甚
慷慨作詩三絶 詩曰
聖繼神承二百年 那知金闕鎖腥烟 當時害物跳粱罪 直斬其頭祭彼天
孔曰成仁孟曰義 臣民當死爲吾君 臨危財寶何須惜 恢復如今在義軍
美人何處彼西方 遙望天涯淚自滂 一倡義兵能雪恥 願君毋惜數升粮
扈從時 慷慨吟成四韻
聖繼神承二百春 不料金闕鎖腥塵 怏怏眞殿栖岐下 咄咄前旒寓漆濱
義士荷戈忘雨雪 腐儒嘗膽守昏晨 後來天道還歸順 佳氣蔥蘢繞紫宸
○ 안의와 손홍록이 의곡義穀 도유사都有司가 되었을 때의 별록別錄
계사년(1593) 9월에 백미 500섬, 목화 400근, 세목 1필, 흰 명주 1필, 장지 20권을 모취募取함. 스스로 백미 202섬 2두, 목화 100근을 출연함. 그 안에 백미 338곡斛 7두斗, 목화 500근, 흰 명주 1필, 세목 1필, 장지 20권을 전라도 다른 곳에서 의곡義穀을 아직 보내지 않을 때 의주義州 행재소에 보냄. <물목 성책物目成冊에 본현本縣 관인官印을 찍었는데, 호조戶曹에 있음> 나머지는 나누어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민여운(閔汝雲) 세 명의 의병대장에게 보냄.
용감하고 건장한 사내종 3명을 전 부사前府使 고경명 대장에게 보냄
용감하고 건장한 사내종 3명을 전 부사 최경회 대장에게 보냄
용감하고 건장한 사내종 2명을 전 현령前縣令 민여운 대장에게 보냄
최의병崔義兵, 최경회)의 군공軍功을 마련(磨鍊, 헤아려 갖춤)할 때 순찰사에게 보고하는 성책成冊 내용 안에 ‘태인의 유학 안의와 손홍록이 유생으로서 전쟁터에 나아가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겨 스스로 모집한 용감하고 건장한 사내종 태복太福과 맹근孟斤을 대신 보냈으니, 나라를 위한 지극정성은 매우 가상하다. 민의병(閔義兵, 민여운)이 사내종 추동秋同이 활을 쏴 왜적을 사살 (글자 원문 빠짐)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
부찰사副察使 김찬金鑽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
<곡물 모취기穀物募取記>
전 군수前郡守 김복억金福億 백미白米 평平 2섬 10두斗
전 주부前主簿 김경억金慶億 백미 평 2섬
안의安義 백미 평 20섬, 목화 1백근
손홍록孫弘祿 백미 평 212섬 2두, 목화 1백근
김후진金後進 백미 20섬 10두
김지백金知白 백미 5두
이수일李守一 백미 평 1섬
김대립金大立 흰 명주 1필
정사겸鄭思謙 목화 4백근
송창宋昌 세목細木(올이 가는 무명) 1필
관노官奴 부채 만드는 장인[扇匠] 막종莫終 대장지大壯紙 20권
○ 태인泰仁 민의병閔義兵(의병장 민여운의 의병부대)의 군량 권유문軍糧勸諭文
도계운장都繼運將 유학 안의와 순홍록이 통곡하며 눈물을 닦고 두 번 절을 하고 대소신료들에게 삼가 다음과 같이 고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예의의 나라이며 주상전하는 성스럽고 현명하신 군주입니다. 이 때문에 성덕이 온 나라에 넘치고, 교화가 먼 오랑캐까지 파급되었습니다. 먼 오랑캐 나라에서 이를 감격하여 복종한 지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뜻하지 않게 지금 못된 왜적들이 우리나라의 오랫동안 태평성대가 오래되고 대소 신민들이 편안히 여김을 틈타 우리나라 경기지역 까지 침범하여 우리 생령을 어육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백여 년 조정의 종묘사직이 다 사라져 잿더미가 되게 하였고 요순 같은 성군께서 하늘가 천리 밖에까지 파천하게 되었습니다. 아 신민이 되는 자가 어떤 사람인들 누군들 절치부심하며 그 왜적을 죽이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보면 왜적의 죄는 죽음으로써 용납되지 못하니 어찌 그 애통함을 견디겠습니까. 공자가 말씀하기를,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고 하였고, 맹자가 말씀하기를, “오랑캐는 중국에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군부(君父)의 원수는 같은 하늘 아래에서 함께 살 수는 없으니, 그렇다면 기꺼이 오랑캐가 되어 한 나라에 함께 있어야 되겠습니까. 아, 이런 위급한 날을 당하여 누가 능히 충의를 의지하여 떨쳐 일어나 치욕을 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전前 용담현령龍潭縣令 민공 여운閔公汝雲은 인덕仁德이 있는 장수입니다. 그의 뛰어난 계책과 충성스러운 전략은 호남에서 특출났습니다. 회흘回紇을 복종시켰던 곽분양郭汾陽과 격문檄文으로 황소黃巢를 달아나게 했던 최치원崔致遠을 오늘날에서도 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대장이 되어 (3, 4 원문 글자 빠짐) 적개심을 가지고 뜻을 같이 하는 선비들과 의병을 주도적으로 일으키는 사람들이 모두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따라 (3, 4자가 결락됨) 그 형세가 파죽지세로 담소하는 사이에 적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다만 흉년이 이어져 군사가 (3, 4자 원문 글자 빠짐)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원컨대, 충의忠義의 강개한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몇 곡의 곡식과 몇 필의 베를 아끼지 말고 우리 의병에게 주어 국토를 회복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으며 군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도록 하심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강개한 마음으로 시를 짓는다. 절구絶句 3수首는 다음과 같다.
성군들이 왕위를 계승한 지 이백여 년
궁궐에 오랑캐 연기 가득할 줄 어찌 알았으리.
지금 사람을 해치고 날뛰는 저 왜적들의 죄
곧장 머리를 베어 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리라.
공자는 살신성인, 맹자는 의리를 말씀하셨지.
신하와 백성들은 임금님을 위해 죽어야 하리.
위급할 때 재물을 어찌 아낄 필요가 있으리오.
지금 나라를 회복하는 건 의병에 달려있네.
아름다운 님이여, 어디에 계시나 저 서쪽이로다.
멀리 하늘가를 바라보며 눈물을 펑펑 흘리노라.
의병을 한번 일으키면 치욕을 씻을 수 있으니
원컨대, 그대들이여 몇 되 양식을 아끼지 마소.
호종扈從(어진御眞을 모시고 따라감)할 때 강개한 심정을 사운四韻으로 읊조려 씀.
성군들이 왕위를 계승한 지 이백여 년
궁궐에 오랑캐 먼지가 가득할 줄 생각지 못했네.
즐겁지 않구나, 어용이 기산 아래에 깃들이고
탄식하는 면류관 쓴 임금은 칠수 물가에 있구나.
의병은 창을 메고 눈과 비를 잊고 있는데
이 못난 선비 충정으로 아침저녁 수직을 했네.
훗날, 천도가 다시 올바르게 돌아오면
아름다운 푸른 기운이 대궐을 감싸리. 자료 제공 : 이용찬.
② 『선조왕조실록』 선조26년(1593) 계사 7월 16일(무진) 기록
이때 변보邊報가 매우 위급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서 6월 24일 진주로 달려 들어갔고, 충청병사 황진黃進이 7백 명,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가 5백 명, 의병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가 4백 명, 부장副將 장윤張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이 1백여 명, 의병장 변사정(邊士禎)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이 2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미 먼저 와서 본부목사本府牧使 서예원徐禮元과 김준민金浚民ㆍ이종인李宗仁 등과 수성守城을 의논하고 있었다.
③ 『선조수정실록』 선조 26년(1593) 6월 1일(갑신) 기록
이윽고 심유경이 적영賊營으로부터 돌아와서 또한 말하기를, “행장이 청정을 극력 저지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므로 행장은 종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군사는 진주를 공격하고 그만둘 것이니 다른 걱정거리는 없을 것입니다.”하였다.
김명원金命元이 한효순韓孝純과 더불어 심유경을 만나보고 그 군사를 중지시켜 주기를 강력히 청하니, 심유경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행장에게 중지하도록 간청하였고 행장의 생각도 중지했으면 하나, 그 형세가 이미 이루어졌으므로 끝내 돌릴 수 없습니다. 지금은 다른 방책이 없으니 다만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성을 비우고 잠깐 피하게 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나의 말을 따르지 않으니, 나 역시 어찌하겠습니까.”하였다.
유정劉綎이 청정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맹약을 어긴 것을 꾸짖고 화복禍福의 이치로 타일렀으나 청정은 답하지 않았다. 이에 원수元帥가 관군과 의병에게 전령하여 나아가 진주를 지키게 하였다. 창의사 김천일은 군사 3백을 거느리고 먼저 달려가 성에 들어갔고, 충청 병사는 군사 7백을 거느리고,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는 군사 5백을, 의병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는 군사 4백을, 부장副將 장윤張潤은 군사 3백을,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은 군사 1백여 명을,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 부장 이잠李潜을 보내어 군사 3백을 거느리게 하고,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백을, 강희열姜希悅ㆍ고득뢰高得賚ㆍ강희보姜希輔ㆍ오유웅吳宥熊 등도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거제현령 김준민金俊民 및 김해 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은 먼저 성안에 있으면서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과 수비책을 의논하고 있었다.
④ 『복납지伏南志』 ‘곤坤’(1624/인조 2년, 혹은 1684/숙종 10년 추정) 기 록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물인 이 책은 이 책 2권/하권 부록에 실린 ‘우재尤齋’라는 사람과 윤극尹極이 라는 사람이 주고받은 서간문의 작성 날짜 갑자년/1624년인 것으로 보아, 이 책이 쓰여진 년대가 1624년/갑자년 혹은 1684년/갑자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우재尤齋’라는 호를 쓴 사람은 고령 출신 의병 이영숙李永淑(1564~1630)인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이 이 두 사람 사 이에 편지를 주고 받은 당대에 기록된 것이라면 1624년/갑자년이 기록 시기일 것이고, 그보다 뒤에 쓰여진 것이라면 그 후 60년 후인 1684년/갑자년 정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飛義將閔汝雲 與其副將鄭允謹 歃血同盟 以熊字爲軍標 守城七日 督戰不已 斬獲甚衆 身被十餘創褁創 復戰左手斷右手折 而力戰愈督忽中賊矢而死 副將允謹代領其衆 使子昌文 收公屍歸葬於鄭之先山 奴秋同亦勇建善射者 從公入城斬獲甚多 及與公同死於賊 ―『伏南志』 坤篇
비의장飛義將 민여운閔汝雲은 삽혈 동맹을 한 그의 부장 정윤근과 함께 웅熊자를 군표로 삼아서 7일 동안 성을 지키며 싸움을 독려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찔려 죽거나 사로잡힌 병사들이 심히 많고, 자신의 몸에는 십여 군데 창상을 입었으나, 다시 싸워 왼손은 끊어지고 오른 손은 부러진 상황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홀연히 날아온 적의 화살에 죽으니, 부장 정윤근이 병사들을 대신 이끌었으며, 정윤근은 자신의 아들 창문昌文을 시켜서 공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가 정씨의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가노家奴 추동秋同 또한 용감하고 건장하여 활을 잘 쏘는 자였는데, 공을 따라 성에 들어와서는 많은 적을 죽이고 잡아 들였으며, 공과 더불어 함께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복남지』 곤편/하편
⑤ 『백사집白沙集』 (1629) 기록
이때에 변보가 시급하자, 창의사 김천일金千鎰은 군사 300명을 거느리고 14일 동안 말을 달려 진주로 들어왔고, 충청병사 황진黃進은 군사 700명을, 경상병사 최경회崔慶會는 군사 500명을, 복수사 고종후高從厚는 군사 400명을, 의병장 장윤張潤은 군사 300명을,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은 군사 400명을, 의병장 변사정邊士貞은 그의 부장 이잠李潛을보내어 군사 300명을,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은 군사 200명을 각각 거느리고 먼저 와 모였으며, 본 고을 목사 김해부사 이종인 등은 바야흐로 성을 지킬 것을 의논하였다. 이항복, 「백사기사白沙記事」, 『건재 김천일 전집』(김익두 · 허정주 옮김, 서울: 문예원, 2018), 439쪽에서 재인용.
김천일의 경우는 그 공과 마음은 고경명과 똑같으나, 그 행적은 남보다 두어 등급이 더 높은 데가 있습니다. 진주晉州가 급해진 때를 당하여, 김천일은 의병장義兵將으로서 마침 도내道內에 있었던 바, 당시에는 상장上將이 명령을 전달하거나 지휘하는 일도 없었으므로, 24일에 홀로 3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장 먼저 진주성晉州城에 들어갔는데, 그런 다음에야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장윤張潤, 이계련李繼璉, 민여운閔汝雲 등이 풍문을 듣고 차례로 진주성을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그 첫 번째 어려운 일입니다. 이항복, 「상신 이항복 헌의相臣李恒福獻議」, 『건재 김천일 전집』(김익두 · 허정주 옮김, 서울: 문예원, 2018), 433쪽에서 재인용.
⑥ 『월파집月坡集』(1647) 제3권 임진 기록
○ (임진년, 1592년) 6월 12일(경자)
진군進軍하여 태인泰仁에 당도하였다.
이 고을의 전 현령 민여운閔汝雲이 정윤근鄭允謹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왔 다.
⑦ 『학봉일고鶴峯逸稿』(1649) 부록 제3권/학봉김문충공사료초존鶴峯金文忠公史料鈔存 하 『난중잡록亂中雜錄』의 기록
선조 26년 계사(1593) 1월 8일에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이 장계하기를, “지난해 12월에 진주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 신이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정랑工曹正郞 박성朴惺을 나누어 보내어, 호남의 좌도와 우도의 의병에게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임계영任啓英, 최경회崔慶會 두 장수는 호남과 영남은 광대뼈와 잇몸이 서로 의지하는 것과 같은 형세가 있어서 존망과 성패가 매우 긴밀하다고 하면서 즉시 군사를 거느리고 서로 잇달아 달려와 응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전 주부主簿 민여운閔汝雲도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는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인하여 성주星州와 지례知禮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여러 번 접전하여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에 왜적들의 기세가 자못 꺾어져서 숨어만 있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바, 온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지하여 함께 앞뒤에서 협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후략)
⑧ 『일성록日省錄』(1799) 정조 23년 8월 22일 기록
云李魯日記 有曰閔汝雲崔慶會則湖南義兵將也. 韓明胤朴以龍則湖西義兵將也, 同陣于牛旨嶺下 以禦金山知禮留屯之賊 號令嚴肅軍容克壯
또 이로의 일기에, “민여운閔汝雲과 최경회崔慶會는 호남의 의병장이고, 한명윤과 박이룡은 호서의 의병장이다. 함께 우지령牛旨嶺 아래 진을 치고 김산金山과 지례知禮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적을 막았는데, 호령이 엄숙하였고 군대의 위용이 매우 장엄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후략)
⑨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1799) 임진왜란을 비롯하여 정유재란과 이괄의 난 및 정묘호란 · 병자호란, 그리고 이인좌의 난 등에서 국 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의거를 일으켜 절의한 호남출신의 의적義蹟을 수록한 책.
기록
○ 閔汝雲 字龍從 驪興人 文仁公令謨後 贊成齊仁孫 慷慨有氣節志略過人 蔭敍二縣令皆有治績 任辰與同縣鄭允謹 募得鄕兵二百餘人 傳檄列邑聚糧餉治戒械 倡起義旅誓雪國恥 衆推公爲大將鄭允謹爲副將 公登壇歃血同盟 以熊字爲軍標 自號飛衣將 率兵踰八狼峙至咸安等地 每遇賊必克斬獲無數 癸巳六月賊復大至圍晋城時 公麾下義士有三百餘人 公斫指出血誓以同死仍檄勵忠義 衆皆有效死之心 乃與倡義使金千鎰 復讐將高從厚 慶尙兵使崔慶會 忠淸兵使黃進 彪義將深友信 諸公同入晋城 固守七日督戰不已斬獲甚衆 身被十餘創褁創 復戰左手斷右手折 而督勵將士 力戰愈急士皆奮力焉 二十七日巡城時 忽中賊矢而死 鄭允謹代領其衆 使子昌文收公屍歸葬鄭之先山事 聞贈左承旨綠宣武原從勳
○ 奴秋同亦勇健善射者 從公每戰斬獲甚多 同入晋城射殺賊酋二于 及亦死亦死於賊
○ 鄭允謹 字仲欽 慶州人月城君宗哲後 器局魁偉弓馬閑熟 壬辰與閔公汝雲 齊聲倡義同赴晋州 閔公爲大將公爲副將入城死守 受圍八日閔公中矢已死 公代領其兵 與崔慶會合陣督戰 氣盡手折遇害于賊 贈軍器寺主簿 子昌文搜得公屍歸葬 丁酉南原之役 昌文欲復讐 率家僮數十 哭辭廟訣其母赴賊而死 母洪氏妻鄭氏聞其死 幻着男服赴南原俱死於賊 鄭氏子夢台生纔一歲 臨行屬婢莫禮以養兒繼嗣之意諺書遣其子.
○ 민여운閔汝雲은 자가 용종龍從이요, 본관이 여흥이다. 문인공文仁公 영모令謨의 후예로서 제인濟仁의 손자이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며 절개가 있고 지략이 뛰어나며 음서蔭敍로 두 고을의 현령을 지내면서 치적治積을 남겼다. 임진년에 같은 현에 사는 정윤근과 더불어 향병鄕兵 2백여 명을 모집하고 고을마다 격문을 전하여 군량을 모으고 군율과 병기를 정비하여 나리의 수치를 씻고자 의병을 일으키니, 병사들은 공을 대장으로, 정윤근을 부장으로 추대하였다. 공은 단상에 올라 삽혈동맹[손가락을 베어 피를 흘려 모은 다음 나누어 마시며 맹세하는 의식]을 하고, 웅熊자를 군표로 삼고 스스로 비의장이라 불렀다. 병사들을 거느리고 팔랑치八良峙를 넘어서 함안咸安 등지에 이르러, 적을 만날 적마다 반드시 무찌르고 수없이 죽이고 잡아들였다. 계사년 6월 적들이 다시 많이 몰려와서 진주성을 에워쌌을 적에, 공에게는 휘하에 삼백여 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공은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다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충성스런 대의를 북돋아 주니, 병사들이 모두 죽기를 각오하였다. 그리고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경상병사 최경회, 충정병사 황진, 표의장 심우신등 여러 제장들과 함께 진주성에 들어갔다. 성을 지킨지 7일째 되는 날 많은 병사들이 죽고 잡혀가서 전투를 독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몸에는 십여 군데 창상이 있고 또 왼손을 부러지고 오른 손을 꺾이었음에도 장사병에게 싸우기를 독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힘을 다해 나섰다. 27일 성을 순시할 적에 홀연히 날아온 적의 화살을 맞아 순직하였다. 정윤근은 대신 그 병사들을 거느리며. 아들 창문으로 하여금 공의 시신을 거두어서 정씨의 선산에 장사를 지내게 하였다. 좌승지로 증직되고 선무원종훈을 녹하였다고 들었다.
○ 가노 추동秋同 또한 똑같이 또한 용감하고 활을 잘 쏘았다. 공이 싸움에 나설 적마다 따라나서 참으로 많이 죽이고 잡아 들였다. 진주성에 같이 들어가서 적의 장수 두명을 쏘아 죽이고 공이 죽자 또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 정윤근鄭允謹은 자가 중흠仲欽이요 본관은 경주로써 월성군 종철의 후예이다, 그릇이 컸으며 활과 말을 잘 다루었다. 임진년에 민여운과 같이 나서서 주창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함께 진주에 갔었다. 민여운이 대장, 공이 부장으로 성에 들어가서 죽음을 다하여 지켜냈다. 성이 포위 당한지 팔 일째 되는 날 민여운이 화살을 맞아 죽자 공이 대신 그 병사들을 거느리고 최경회와 합진하여 싸움을 독려하다가 기운이 다하고 손이 부러진 상황에서 적에게 해를 입었다.(죽었다) 군기시주부로 증직되었다. 아들 창문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다. 정유년 남원에서 전투가 벌어지자 창문은 복수를 하려고 가동 수십명을 거느리고서 사당에 울면서 말씀드리고 그의 어머니를 이별하고 적있는 데로 가서 죽임을 당하였다. 어머니 홍씨와 부인 정씨는 그의 죽음을 듣고 남자의 복장으로 변장하여 남원에 함께 가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정씨의 아들 몽태夢台는 태어난 지 겨우 한 살이었는데 남원에 가려할 적에 거느리던 여종 막례에게 아이를 잘 키워서 가문을 잇도록 하고 그 뜻을 그의 아들에게 언문의 글로써 남겼다.
⑩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광주향교본, 연대미상) 기록
민여운閔汝雲 : 자字는 용종龍從이요, 본관은 여흥驪興이니, 문인공文仁公 영모令謨의 후예이요, 찬성贊成 제인濟仁의 손孫으로 기절氣節이 강개慷慨하고 지략智略이 과인過人하였으며, 음사蔭仕로 용담현령龍潭縣令이 되어 크게 치적治績을 쌓았다.
임진년壬辰年에 동향인同鄕人 정윤근鄭允根과 더불어 향병鄕兵 이백여 인을 모득募得하여 열읍列邑에 격문檄文을 발發하여 군량軍糧과 병기兵器를 정비한 후, 사중士衆에 의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자 공은 개연慨然 등단登壇하여 삽혈동맹歃血同盟을 하고 웅자熊字로 군표軍標를 하여 비의장飛衣將이라 자호自號하고, 팔랑치八狼峙를 넘어 함안咸安 등지等地에서 무수한 적을 참살하였다.
계사년(癸巳年 6월에 적장賊將 청정淸正이 전년前年의 진주晉州 참패를 보복코자 합병合兵 수십만으로 진주를 침공하려 하매, 공은 휘하 의사義士 삼백여 인과 혈서血書로써 순국殉國할 것을 맹세하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복수장復讎將 고종후高從厚, 경상병사慶尙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 표의장彪義將 심우신沈友信 등 제공諸公과 더불어 진주에 입성하여 항전 칠일 동안에 십여처十餘處의 창상槍傷을 입고 좌우 손가락이 다 절단되었으되, 그 아픔을 잊고 더욱 독전督戰하다가 이십칠 일 순성중巡城中 적의 유시流矢에 맞아 순국殉國하니 정윤근鄭允根이 공의 직職을 대섭代攝하고 자신의 아들 창문昌文으로 하여금 공의 시체를 수렴하여 귀장歸葬케 하였다.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록錄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贈하였다. ―태인(泰仁
정윤근鄭允根 : 자字는 중흠仲欽이요, 본관은 경주, 월성군月城君 종철宗哲의 후예로 기국器局이 괴위魁偉하고 궁마弓馬에 한숙閑熟하였다.
임진년壬辰年에 민여운閔汝雲과 더불어 창의倡義하고 계사년癸巳年에 진주晉州로 입성하여 부장副將으로써 성을 사수死守하다가 역전力戰 팔일八日만에 민공閔公이 전사하매 공이 민공의 대장직大將職을 대행代行하고 최경회崔慶會와 더불어 합력合力 독전督戰하다가 기진수절氣盡手折하여 적에게 우해遇害되었다.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증贈하였다.
⑪ 『태인삼강록泰仁三綱錄』 (연대미상) 기록
閔汝雲 字龍從 驪興人 贊成齊仁孫 慷慨有氣節志略過人 蔭敍二縣令皆有治績 壬辰與同縣鄭允謹 募得鄕兵二百餘人 傳檄道內聚糧治戒倡起義旅 衆推公爲大將鄭允謹爲副將 公登壇歃血同盟誓 以熊字爲軍標自號飛衣將 率兵踰八狼峙至咸安所到邑 遇賊必克斬獲無數 癸巳六月賊大至圍晋城時 公斫指血誓以同死仍檄勵壯士 衆皆效死 乃與倡義使金千鎰復讐將高從厚慶尙兵使崔慶會 忠淸兵使黃進彪義將深友信同入晋城 固守七日 督戰不已斬獲甚衆 身被十餘創左手斷右手折 忽中賊矢而死 鄭允謹代領其衆收屍歸鄭之先山事 聞贈左承旨綠宣武原從勳 奴秋同亦勇健善射 同公入晋城射殺賊酋二人亦死於賊
鄭允謹 字仲欽 慶州人 月城君宗哲後 器局魁偉弓馬閒熟 任辰與閔公汝雲倡義同赴晋州 公爲副將入城死守 受圍八日閔公中矢已死 公代領其兵與崔慶會合陳督戰 氣盡手折遇害于賊 贈軍器寺主簿 子昌文搜公屍歸葬 南原之役昌文欲復讐率家僮數十 哭辭廟訣其母赴賊而死 母洪氏妻鄭氏聞其死 幻着男服赴南原俱死於賊 子夢台生纔一歲 臨行婢莫禮以養兒繼嗣之意 諺書遣其子
민여운閔汝雲의 자는 용종龍從이다. 본관은 여흥으로 찬성을 지낸 제인齊仁의 손자이다. 기절氣節이 강개하고 지략이 뛰어났으며, 음서蔭敍로 두 고을의 현령을 지내면서 치적을 남겼다. 같은 고을의 정윤근과 더불어 향병鄕兵 2백여 명을 모집하고, 도내에 격문을 보내어서 군량를 모으고 규율을 만들어서 의병대를 일으키니, 병사들이 공을 대장으로 정윤근鄭允謹을 부장으로 추대하였다. 공은 등단하여 삽혈동맹[피를 같이 나누어 마시면서 같이 맹세함]을 하고는. 웅자熊字를 군표軍標로 삼고 스스로 비의장飛衣將이라 불렀다. 병사들을 거느리고 팔랑치八狼峙를 넘어서 함안咸安에 있는 고을에 도착하여, 적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무찌르고 수없이 죽이고 잡아들였다.
계사년癸巳年 6월 적의 큰 부대가 진주성을 에워쌌을 적에, 공은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고 다 함께 죽자고 맹세하며 장사병을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죽음을 각오하였다.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표의장 심우신과 같이 진주성에 들어가서 성을 지킨 지 7일째 되는 날, 병사들이 많이 죽고 잡혀가서 싸움을 독려할 상황이 아니였다. 몸에는 10여 군데 창상을 입었고 왼손은 끊어지고 오른손을 부러졌는데, 홀연히 날아 온 적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 정윤근이 대신 병사들을 거느리고 (민여운의) 시신을 수습하여 정씨의 선산에 장사를 지냈다. 좌승지로 증직되고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책록되었다고 들었다. 가노家奴 추동秋同 또한 용감하고 건장하였으며 활을 잘 쏘았다. 공과 같이 진주성에 들어가서 적장 2명을 쏘아 죽이고, 역시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정윤근鄭允謹은 자가 중흠仲欽이요, 본관은 경주로써 월성군月城君 종철宗哲의 후예이다. 그릇이 크고 활과 말을 잘 다루었다. 임진년에 민여운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서 진주에 같이 다다랐다. 공은 부장으로써 성에 들어가서 죽음을 다해 지켰다. 성이 포위된 지 8일째 되는 날 민여운이 활을 맞아 죽자, 대신 그 병사들을 거느리고 최경회와 합진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다. 기운이 다하고 손이 부러진 상태에서 적을 만나 죽었다. 군기시 주부軍器寺主簿로 증직贈職되었다. 아들 창문昌文은 공의 시신을 거두어서 장사를 지냈다. 남원에서 싸움이 벌어지자 창문은 원수를 갚고자 가동家僮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사당에 울면서 말씀을 올리고, 그 어머니를 이별하고 적에게 이르러 죽었다. 어머니 홍씨와 처 정씨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자의 복장으로 변신하여 입고, 남원에 가서 적에 가 함께 죽었다. 아들 몽태夢台는 겨우 한 살이었는데, 남원에 갈 적에 여종 막례莫禮에게 길러서 가문을 있도록 하고, 그 뜻을 언서諺書로 써서 그의 아들에게 남겼다.
⑫ 『김천시사金泉市史』 (1999) 및 『디지털향토문화대전』(김천시) ‘석현전투石峴戰鬪’ 기록
개요 : 임진왜란 때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돌고개[석현]에서 벌어진 김천의 대표적 전투.
개설 : 이 석현전투로 인해 고개는 돌모리로 불리게 되었으며 면 이름도 석현면으로 불리게 되었다. 석현[돌고개]은 조선 시대에는 김산군, 지례현의 접경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상좌원리는 1914년 석현면에 편입되어 상좌원과 도동, 원앞을 통합하여 하원리가 되었다. 구미의 석현면 면청사가 유실되어 석현 과곡면과 합하여 지례현의 옛 이름인 구성면이라 하였다. 지금도 석현 산마루에 돌무덤이 묻혀 있다.
역사적 배경 : 경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개령현에 주둔하여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경상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군정을 실시하였다. 당시 개령의 주둔 왜병은 3만~4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에 인근의 의병 군진이 호남의 일부 의병군과 합동 작전을 통해 왜군 후방 사령부를 토멸하려고 하였다. 김면金沔 의병 대장을 주축으로 한 2,000명의 병역은 상좌원에 포진하고,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예하 1,000여 명은 웅현[거창군]을 경유하여 개령으로 집결하고, 지례에 있는 의병과 경상도의 승병은 남쪽을 돌아 개령으로 진군토록 하였다. 호서의 의병군은 우치현[우두령]에서 왜의 내원군을 막는 한편, 상주의 의병군은 상주 통로를 막는 가운데 김면의 본진군이 개령 왜군 사령부 동쪽 산에 숨어 올라가 횃불로 신호하면 김함 · 정유회 · 김몽린의 군병과 좌우 돌격장의 병졸이 일시에 공격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11월 25일 날이 밝자 개령의 왜군이 먼저 거창을 향해 진군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이곳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돌고개, 즉 석현石峴의 산 위에 매복하여 접근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석현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경과 : 석현의 산 위에 매복한 의병군은 미리 쌓아 두었던 돌을 산 아래 왜군에게 투척하고 활을 쏘았다. 이 전투는 쌍방 간 진격과 후퇴가 세 번이나 거듭될 정도로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결국 왜군이 물러남으로써 끝이 났다. 석현의 전투에서 계원장 김충민과 함양의 정병 최운의 노비 억복이 말탄 왜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경우도 군관 유사홍이 전사하고, 장암 의병장 권응성權應聖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⑬ 『정읍의병사』 (2006)의 기록
본관 여흥驪興. 자 종용 용종龍從. 봉사奉事 은관恩寬 ‘사관思寬’의 잘못 표기로 보임.
의 아들. 음사蔭仕로 벼슬이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용담현령龍潭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정윤근鄭允謹과 의병 이백여 명을 거느리고 각 고을을 돌아 군량軍糧과 군기軍器를 모으고 군오軍伍를 정했는데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추대되고 정윤근은 부자副將이 되었다. 웅자熊字를 군표軍標로 정하고 스스로 비의장飛衣將이라 했다. 의병을 이끌고 팔량치八良峙를 넘어 함안咸安 등지로 들어가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다음 해 6월에 왜군이 진주성晉州城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때 민여운은 2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동생공사同生共死를 혈서血書로 맹세하고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고경명의 아들) 최경회崔慶會(경상병사) 황진黃進(충청병사) 심우신深友信(표의장彪義將深) 등과 진주성으로 들어가 접전 7일에 많은 전과를 올리고 10여군데의 창상創傷을 입고 손이 부러져 있는데도 독전督戰을 하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니 정윤근이 대장이 되어 독전했다. 용맹했던 종[奴] 추동秋同이 함께 전사했다.
뒤에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표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고 1858년(철종 9) 이조참판吏曹參判에 가증加增되었다.
참고자료 : 호남절의록, 정읍군사, 여흥민씨족보 최현식(2006), 『정읍의병사』, 정읍문화원, 56~57쪽.
3. 조사된 자료들을 통해 본 정읍 의병장 민여운 선생의 삶과 업적
(1) 의병장 민여운의 삶
가문 및 인품 : 민여운의 본관은 여흥, 문인공文仁公 영모令謨의 후예이자, 성균관전적 민구손閔龜孫의 증손자, 찬성 벼슬을 지낸 민제인閔齊仁의 손자. 봉사奉事 벼슬을 지낸 민사관閔思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재 이항의 문인이라고도 하나 미상이다.
앞의 『임계기사壬癸記事』의 「태인泰仁 민의병閔義兵의 군량 권유문軍糧勸諭文」 기록의 “전前 용담현령龍潭縣令 민공 여운閔公汝雲은 인덕仁德이 있는 장수입니다. 그의 뛰어난 계책과 충성스러운 전략은 호남에서 특출났습니다. 회흘回紇을 복종시켰던 곽분양郭汾陽과 격문檄文으로 황소黃巢를 달아나게 했던 최치원崔致遠을 오늘날에서도 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구절을 보면, 민여운 선생의 인품은 “인덕仁德이 있고 계책이 뛰어난 충성스런 전략을 갖춘, 호남에서 특출난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절의록』 · 『태인삼강록』 등의,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며 절개가 있고 지략이 뛰어나며”란 언급도 그의 이러한 인품과 지략을 엿보게 하는 기록들이다.
출생시기 : 최현식의 『정읍의병사』(정읍문화원, 2006)의 정윤근鄭允謹 항목에 보면, 정윤근의 출생 연대는 1539년(중종 25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이런 기록이 참고한 책자로는 『호남절의록』, 『호남지』, 『정읍시사』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정윤근은 바로 민여운과 ‘동향인’으로 그와 함께 태인에서 의병 거병을 하여고, 민여운이 의병장, 정윤근이 그 아래 부장副將을 한 것으로 보아, 둘 사이의 나이 차는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본다면, 민여운의 출생도 대체로 1539년(중종 25년)을 전후한 시기였을 것이고, 자신이 의병대장을 하고 동향인 정윤근이 부장副將을 한 것으로 보아, 정윤근보다는 나이가 더 많았을 가능성이 높다.
출생지 : 앞의 『태인삼강록』 기록에 의하면, “같은 고을의 정윤근과 더불어 향병 이백여 명을 모집하고(與同縣鄭允謹 募得鄕兵二百餘人)”라는 말, 그리고 『정읍의병사』의 ‘(정윤근이) 동향의 민여운과 창의하고’란 기록 앞의책, 73쪽.
등으로 보아, ‘태인 고현내古縣內’ 곧 지금의 칠보 혹은 산외면 정량리 원정 마을 출신으로 보인다. 송재옥 · 유종국 외(2015), 「우리 마을의 인물」, 『산자수려한 충의의 고장 산외』, 정읍: 모아디자인, 156~212쪽. 김익두 · 허정주(2019), 『샘고을[井邑] 원정元貞 마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을 갖춘 생태 민속 마을』, 서울: 광대와바다, 301~303쪽.
어쨌든, 그의 출생지는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 · 산외면 어름인 것으로 추정된다.
성장 : 그의 성장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태인 고현내古縣內 출신’ 정윤근鄭允謹과 같은 고을[同縣] 출신이란 말로 보아, 아마도 ‘태인 고현내’ 인근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관해서는 아직도 좀 더 자세한 조사 연구가 필요한 상태이다.
벼슬 : 앞의 기록들에 의히면, 그는 음사蔭仕/음직蔭職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종사품 경관직인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그리고 용담현령 등 두 고을의 현령 직을 역임하였다.
교우관계 : 민여운의 교우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삼계三溪 최경회(1532/중종 27~1593/선조 26)와의 관계이다. 최경회는 벼슬을 성균관전적을 시작으로 해서 사헌부감찰 · 형조좌랑에 이어, 옥구 · 장수 · 무장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후처인 논개는 장수현감을 할 때, 논개의 숙부가 민며느리로 팔아버린 것을 논개의 어머니가 다시 찾아온 송사를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들 모녀가 거처할 곳이 없음을 말하자, 이들을 관청에서 지내게 배려하면서 알게 되었다. 『위키백과』, ‘최경회’ 조 참조.
이후 무장현감으로 임명될 때 이들을 데리고 갔다. 그는 이어 영암군수와 영해 · 담양부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에 벼슬 임기 중인 150년 모친이 서거하자 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 화순으로 돌아갔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 활동에 뛰어들었다.
최경회와 민여운의 교우관계에 관한 직접적인 사료는 발견할 수 없으나, 앞의 기록들에서 발견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을 통해서 이 두 사람의 밀접한 관계가 어느 정도 유추된다.
첫째, 민여운이 용담현령을 지낼 때(1578/선조 11~1580/선조 13) 『진안군지』 참조,
, 최경회가 그 바로 인근인 장수현감으로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앞의 『임계기사』에 보면, 태인에서 안의 · 손홍록이 모취한 군량과 병력들을 최경회와 민여운에게 함께 제공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것은 태인과 민여운 및 최경회의 긴밀한 관계를 암시해 주며, 이에 따라 민여운과 최경회의 긴밀한 관계도 암시한다.
셋째, 앞의 기록 중 ‘석현전투’ 기록에 보면, 이 전투에 민여운과 최경회가 함께 참전하고 있다는 점도 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말해준다.
넷째, 이 둘은 마지막 전투인 진주성 2차전투에서도 민여운 부대의 장수 민여운이 전사하자, 그의 부장 정윤근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최경회 진영과 합진을 하게 된다.
다섯째, 최경회의 둘째 부인이 민여운의 집안과 본관이 같은 여흥민씨이다. 민여운 후손 민득기씨 제보. 민득기씨는 ‘석현전투’ 이후 마지막 진주성에 입성하기까지 5개월 동안 (임진년 12월∼ 계사년 5월) 민여운의 구체적인 전적이 드러나지 않고 있는데, 이러한 이 둘 사이의 돈 독한 관계로 비추어 볼 때, 민여운은 이 기간 동안의 의병 활동에서 최경회와 내지는 합동 작전을 전개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의병활동 : 앞의 민여운 관련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민여운 선생은, 태인 거병 → 남원 → 운봉 → 팔랑치 → 함양 → 거창 → 성주 · 지례 → 김천 개령 → 김천 석현 → 함안 → 진주성 등의 순서로 의병 활동의 행로가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관한 고증은 아직 추정 단계에 있는 부분들이 있는 상태이므로, 앞으로 이에 관한 사학계의 좀 더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① 거병 시기 : 우선, 앞의 유팽로柳彭老 『월파집月坡集』(1647) 제3권 임진년 기록에 “(임진년, 1592년) 6월 12일(庚子). (유팽로가) 진군進軍하여 태인泰仁에 당도하였다. 이 고을의 전 현령 민여운이 정윤근과 더불어 향병鄕兵을 모집하여 왔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민여운이 태인에서 의병을 거병한 시기는 이 시기를 전후한 시기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② 출발과 1차 이동 : 앞의 『호남절의록』 및 『태인삼강록』에 의하면 태인에서 거병한 다음에는 “팔랑치八狼峙를 넘어서 함안咸安에 있는 고을에 도착하여”라는 말로 보아, 그는 일단 팔랑치를 넘어 경상도 쪽으로 나아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팔랑치는 남원에 있고 남원에서 팔랑치를 넘어 경상도로 갈 때 처음 닿는 곳은 함양 고을이므로, 일단 팔랑치를 넘은 다음에는 함양을 거쳐야 했다.
③ 2차 이동 : 그 다음, 『김천시사』에 의하면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예하 1,000여 명은 웅현[거창군]을 경유하여 개령으로 집결하고”라는 언급으로 보아, 민여운은 김천시의 개령면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이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일단 함양에서 거창으로 가이만 했다.
④ 3차 이동 : 그 다음에는, 『학봉일고鶴峯逸稿』(1649)의 “전 주부主簿 민여운閔汝雲도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는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지만, 인하여 성주星州와 지례知禮의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 정인홍鄭仁弘 등과 힘을 합하여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여러 번 접전하여 적병을 죽인 것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에 왜적들의 기세가 자못 꺾어져서 숨어만 있고 나오지 못하고 있는바, 온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지하여 함께 앞뒤에서 협격하는 형세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라늘 기록, 그리고 『일성록日省錄』(1799)의 “민여운閔汝雲과 최경회崔慶會는 호남의 의병장이고, 한명윤과 박이룡은 호서의 의병장이다. 함께 우지령牛旨嶺 아래 진을 치고 김산金山과 지례知禮에 남아 주둔하고 있던 적을 막았는데, 호령이 엄숙하였고 군대의 위용이 매우 장엄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민여운 의병부대는 거창을 거친 다음에는 성주와 지레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⑤ 4차 이동 : 그런 다음, 앞의 『김천시사』의 기록, 곧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예하 1,000여 명은 웅현[거창군]을 경유하여 개령으로 집결하고”라는 언급으로 보아, 민여운 부대는 거창→지례를 거쳐 김천의 개령으로 나아갔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⑥ 5차 이동 : 그런 다음에는, 앞의 『김천시사』의 기록인 11월 25일 날이 밝자 개령의 왜군이 먼저 거창을 향해 진군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이곳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돌고개, 즉 석현石峴의 산 위에 매복하여 접근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석현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민여운 부대는 김천의 ‘돌고개’ 곧 석현石峴으로 나가갔음을 알 수 있다.
⑦ 6차 이동 : 그런 다음에 민여운 부대는 함안으로 나아갔다. 기록상으로 민여운 부대가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진주성인데, 다른 기록인 『호남절의록』 및 『태인삼강록』 등의 기록인, “병사들을 거느리고 팔랑치八狼峙를 넘어서 함안咸安에 있는 고을에 도착하여, 적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무찌르고 수없이 죽이고 잡아들였다.”라는 기록에 의하면, 함안으로 갔음이 분명하므로, 김천의 석현전투를 성공한 다음에는 함안으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김천 석현에서 그 다음 전투지인 진주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함안을 지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좀 더 세심한 논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⑧ 7차 이동 및 최종 전투지 진주성 1차 전투 : 마지막으로, 민여운 선생 의병 부대는 1593년 계사년(癸巳年) 6월 24일, 함안을 거쳐 마침내 최종 전투지인 진주성에 도착하여 끝까지 항전하였다.
(2) 의병장 민여운의 의병활동 업적 및 추증
이상에서 살펴본 민여운 선생의 삶과 활동을 종합해 볼 때, 그는 우리나라 의병사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은 업적을 이룩한 것으로 판단된다.
첫째, 1592년 임진년 6월을 전후한 시기에 정읍 ‘태인 고현내’을 중시으로 하여, 정읍지역 주민들이 주동이 된 의병 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점은 이 부대가 ‘임진왜란 정읍 대표 의병부대’로서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그 의병 부대의 대원 수는 모든 기록 자료에서 200명 이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숫자는 거의 모든 기록에서 동일하기 때문에, 이 의병 부대는 그 조직 거병 이후 끝날 때까지 그 대오가 흐트러지지 않는 매우 강력한 의병 부대 조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점도 이 부대가 임란시 대표적인 정읍의 의병부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역사 기록에 기록된 첫 번째 혁혁한 전투 전공은 최경회 의병 부대와 함께 참여한 김천 석현전투이며, 이 전투에서 왜군을 물러나게 하는 전과를 올렸다.
넷째, 이 석현전투 이후 민여운 의병 부대는 다시 함안 쪽으로 이동하여, 적을 만날 때마다 수없이 무찌르고 죽이고 잡아들이는 전과를 올렸다. 이는 앞의 『호남절의록』 및 『태인삼강록』의, “함안咸安에 있는 고을에 도착하여, 적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무찌르고 수없이 죽이고 잡아들였다.”라는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1593년 계사년(癸巳年) 6월 24일 마침내 최종 전투지인 진주로 가서,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쓰고 다 함께 죽자고 맹세하며 장사병을 격려하며,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종후, 경상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표의장 심우신과 같이 진주성에 들어가, 최경회 부대와 합세하며 성이 함락될 때까지 끝까지 싸우다가, 7일째 되는 날 전사하였으며, 그의 부장 정윤근에 의해 정윤근의 선산인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인근 선산에 안장되었다.
여섯째, 서거 후에는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표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으며, 1858년(철종 9) 이조참판吏曹參判에 가증加增되었다.
4. 결어―‘정읍학’의 입장에서 보는 민여운
최현식의 『정읍의병사』(2006)에 의하면,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정읍 의병사에 빛나는 인물들로는, 앞서 서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총 52명(송상현, 신호, 김제민, 백광언, 류희진, 이경주, 민여운, 전덕린, 이경국, 류경인, 류준필, 이대축, 이환, 이허량, 권극평, 안의, 허상징, 김진태, 김신문, 정윤근, 김흔, 김안, 류윤근, 류희사. 이안국, 희묵, 손승경, 하광수, 최준, 김명, 김의립, 이시화, 송인신, 손오상, 류희문, 임희건, 안량우, 손홍록, 김대림, 김후진, 이수일, 김복억, 송지순, 김엽, 류극인, 김지백, 최안, 최경행, 송창, 정염, 이영국, 이원신) 등의 의병 및 절의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분들의 활동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동래부사 송상현(순절), 남원 교룡산성 수어장 신호(순절), 웅치전투 김제민, 전 현령 용인전투 백광언(순절), 직산 및 남나령 전투 류희진(순절), 김제민 부장 웅치전투 이경주(순절), 석현 · 함안 · 진주성 전투 민여운(순절), 용인전투 이광군대 전덕린(순절), 입암산성 전투 이경국(순절), 솔치전투 류경인(순절), 정유재란 거주지 인근 한마교 전투 류준필(순절), 이순신 수군 정유재란 몰고개/사현 전투 이환(순절), 정유재란 사현/몰고개 전투 이허량(순절), 진주성2차전투 권극평, 왕조실록 및 어진 보존 안의, 김제민 부대 선봉장 허상징(순절), 웅치전투 김진태(순절), 금산전투 고경명 부대 김신문(순절), 민여운 부대 부장 정윤근(순절), 웅치전투 및 권률 행주산성 싸움 김흔, 웅치전투 김안(순절), 류윤근, 승부리 전투 전사 류희사(순절). 정유재란 입암산성전투 이안국(순절), 정유재란 내장산전투 희묵(순절), 경기도 양성전투 손승경(순절), 금산전투 하광수(순절), 변사정 부선봉장 정유재란 교룡산성 전투 최준(순절), 정유재란 문경새재전투 김명(순절), 정유재란 문경새전투 김의립(순절), 정유재란 부안 호벌치전투 이시화(순절), 임란 부자창의 송인신(순절), 임란 조헌부대 금산전투 손오상(순절), 정유재란 마을 인근 남라령전투 유희문(순절), 정유재란 노령전투 임희건(순절), 임란 진안 사랑목전투 안량우(순절), 실록 및 어진 보존 손홍록, 임란 남문창의 가담 김대립, 임란 남문창의 가담 김후진, 임란 남문차의 가담 이수일, 임란 군량 조달 김복억, 임란 군량조달 송지순, 임란 김제민군 군량조달 김엽, 정유재란 유극인, 임란 군량 조달 김지백, 정유재란 군량 조달 최안, 군량 조달 최경행, 군량조달 송창, 군량조달 정염, 정유재란 입암산성 전투 이영국, 임란 전공 이원신 최현식, 앞의 책, 30~104쪽.
이상을 종합 검토해 보면, 이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 당시에 활동한 정읍의 순절 벼슬아치 및 의병들의 업적들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오봉 김제민 등과 같이 여러 전투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운 분도 계신다.
둘째, 대부분은 어떤 하나의 전투에 참여하여 순절한 분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셋째, 의병 전투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고 의병 모집 및 군량 조달에 힘쓴 분들도 다수 있다.
넷째,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일정한 숫자의 의병 부대를 존속시키면서 전투 현장에서 전투를 계속한 의병 부대는 극히 드물다.
이상의 분석 결과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정읍 의병장 민여운 선생의 정읍 의병사적 의의와 가치를 다음과 같이 부여할 수 있다.
첫째, 정읍 의병장 민여운 선생은 정읍지역 주민들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임진왜란에 출정하였다.
둘째, 정읍 출신 의병부대 중에서 가장 많은 대원들, 적어도 200여 명 이상의 의병 부대 군사들을 2년에 걸쳐도 일정하게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전쟁을 치러 나아갔다. 이것은 그만큼 이 의병 부대의 단합 능력과 전투 능력 등이 탁월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셋째, 정읍 출신은 물론이고 임란 의병사 전체를 놓고 볼 때에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장기간[적어도 2년 정도]에 걸쳐서 전투를 지속적으로 계속해 나아갔다.
넷째, 그 확인되는 전공 면에서도 정읍지역 임난 의병 부대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서(김천 석현 · 함안 · 진주성 등) 다양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파악된다.
다섯째, 이러한 여러 긍정적인 측면들을 종합해 볼 때, 앞으로 정읍 의병장 민여운 선생과 그의 의병부대의 의병활동은 우리나라 의병사적으로 좀 더 비중 있는 가치평가와 의미 부여가 이루어져야만 할 것으로 판단된다.
*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복남지伏南志』, 『월파집月坡集』, 『호남절의록』, 『태인삼강록』, 『김천시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디지털향토문화대전』(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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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두 · 허정주(2019), 『샘고을[井邑] 원정元貞 마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을 갖춘 생태 민속 마을』, 서울: 광대와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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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득기 제공, 민여운 관련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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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 · 손홍록(1592~1593), 『임계기사』, 필사본.
이항 지음, 권오영 옮김(2002), 『일재선생문집』, 정읍: 일재선생문집국역추진위원회.
최현식(2006), 『정읍의병사』, 정읍: 정읍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