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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끈질긴 과부의 비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와 어린이의 축복 및 한 부자 청년의 질문,
세 번째 수난 예고와 여리고 소경의 치유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9:51-19:27까지 이어지는, 갈릴리 사역 이후 그리고 고난 주간(Holy Passion Week) 이전의, A.D. 29년 여름에서 A.D. 30년 초까지의 대략 6개월 남짓 사이에 유대 지역을 중심으로 진행된 예수의 후기 사역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특히 17:11-19:27은 이제 주께서 다음 19:28에서 보듯이 마침내 당신의 구속사역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입성을 하시기 직전의 예루살렘을 향한 마지막 전도 여행 중에 있었던 교훈과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런 문맥하의 본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전반부 1-30절은 인자 예수는 우리의 절대적 구주이심으로 우리도 그분 앞에서 절대적 신앙과 절대적 헌신을 가져야 할 것을 여러 측면에서 강조하는 교훈들을 함께 모아놓고 있다.
이를 보다 세분하자면 절대적 확신과 인내로 기도할 것을 교훈하는 1-8절의 끈질긴 과부의 비유, 하나님 앞에서 근본적으로 죄인인 만인이 자신의 실체를 깨닫고 겸손해야만 할 당위성과 그것만이 참 회개 구원의 시작임을 보여 주는 9-14절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하나님께 대한 순진무구한 신앙을 가진 자만이 참 축복을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 15-17절의 어린이의 축복 사건,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그 무엇 이전에 여호와 제일주의를 확립해야함을 강조하는 18-30절의 한 부자 청년의 질문 사건 등으로 나누어진다.
한편 후반부 31-43절은 이제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십자가 구속 수난을 당하시러 올라가시는 도중에 주신 세 번째 수난 예고(31-34절) 그리고 여리고 거지 소경 바디매오의 치유 사건(35-43절) 등을 기록하고 있다.
끈기 있는 과부의 비유(1-8절), 각각 상반된 자세로 기도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9-14절)는 결국 우리가 우리의 유일한 구주이신 인자 예수 나아가 성부 하나님께 가져야 할 근본적인 태도와 그분들로부터 축복을 얻을 수 있는 기본적인 자세에 대한 교훈(instruction)을 전해 주고 있다.
그것은 먼저는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죄인인 자신을 발견하고 겸손할 것, 그리고 하나님은 절대적 사랑을 주시는 분임을 깨닫고 절대적 신뢰를 가지고 끈기 있게 영생과 축복을 간구할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근원적인 교훈이다. 왜냐하면 이 두 교훈은 단순한 것 같으나 자신과 하나님의 실체, 나아가 태초부터 종말(終末)까지 이어지는 구속사(救贖史)의 실체를 깨달은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신실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는 소극적으로는 죄인 된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인정하며 나아가 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영생과 축복을 간구하는 깨달음과 열정이 나에게 현재 있는가 돌아보아야 하겠다.
15-17절은 어린아이들에게 행한 안수 사건과 이를 기회로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영혼으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뢰하고 순종하는 자만이 천국(天國)에 들어 갈 수 있음을 교훈한 내 용이 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 (被造物)이요 죄인으로서 어린아이처럼 유약할 수밖에 얼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하고, 어린이가 부모를 사랑하여 믿고 따르듯이, 순수한 영혼으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의뢰하고 또 순종하는 자만이 결국 구속사의 은총인 천국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구속사적 교훈을 전해 주고 있다. 이는 결국 앞의 두 비유(parable)가 보여 주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신뢰와 겸손을 가진자의 실례를 어린이의 모습으로 제시하여 보다 쉬운 이해를 도모해 주신 것이라 하겠다.
한편 18-30절은 영생을 사모하던 한 진지한 부자 청년의 질문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및 이에 덧붙여 주신 교훈의 기록이다. 천국 영생을 얻을 자는 여호와 제일주의, 천국 제일주의에 근거한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고 또 가져야만 함을 보여 주는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이 부자 청년이 매우 상식적이고 진지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영적으로 볼 때 이 부자 청년은 성실하고 평범한 대다수 인간의 대표로서 예수께 질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부자 청년에게 주께서 그의 단 하나의 부족한 점이자 동시에 치명적 결함인 이 세상과 천국을 분명히 구분하여 천국 중심의 가치관을 갖지 못한 점을 지적하신 사실은 대다수의 평범한 우리가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다. 비단 재물 뿐 아니라 학식, 명예, 권력, 심지어 건강과 미모 등 이 세상의 세속적 가치를 하나님 나라보다 우위에 두는 것, 다시 말하면 당장 눈에 보이고 유익을 주나 일시적이고 죄로 소멸 될 이 세상의 것을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영원하고 순전한 하늘나라의 것보다 더 우위에 두는 타협적이고 주객 전도적(主客顯倒的)인 신앙은 결코 천국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인지하고 믿고 순종하며 이를 최우선에 두는 구속사적 가치관을 정립한 자만이 천국의 실체를 바로 볼 것이며, 또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교훈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이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혼동 내지 타협시키는 소위 중간자적 태도를 가진 대부분의 인간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준엄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동시에 너무도 많은 인간이 이 세속의 것에 집착하여 하늘 나라의 실체를 바로 보지 못하는 실로 어리석지만 너무도 흔한 구속사적 현실의 한 단면에 대하여 새삼 각성하게 된다.
한편 본문은 우리가 천국 구원의 실체를 깨닫고 믿음을 갖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을 얻는 것 그 모두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간섭으로만 가능함도 역설하고 있다. 즉 구원사역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독자적 절대 주권의 원리도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본문에서 예수께서 부연하셨듯이 우리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이 세속의 가치를 포기하였을 때에는 천국에서 그 몇 배의 상급(reward)이 있다는 사실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인간이 보기에는 이 세상의 일과 신앙생활에 있어서 잘나고 앞선 것처럼 보이는 자가 결국에는 천국 상급에서 뒤쳐질 수도 있음을 기억하면서, 지금 이 순간도 도도히 흐르는 구속사의 도상에서 오직 천국이 이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고귀하고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중에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을 얻기 위하여서라도 지금 이 세상에서의 삶 전체를 천국을 지향하게 하는 구속사적 자세를 가다듬어야 하겠다(골 3:1-4).
31-34절은 전 4회에 걸친 수난 예고(눅 9:19-21; 9:43b-45; 18:31-34; 마 26:2) 중 세 번째 예고이다. 이것이 다른 수난 예고들과 함께 갖는 전반적인 구속사적 교훈은 제 9장의 구속사적 개관을 보라.
35-43절은 주께서 여리고의 소경 바디매오를 고쳐 주신 치유 이적의 기록이다. 이는 먼저 죄로부터 완전하고 유일한 인자이신 예수는 죄에 휩싸여 그 결과로 고통 받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실 뿐만 아니라 마침내 전 우주적 주권을 동원하여 우리를 회개시키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실 능력까지 가지신 분임을 보여 준다. 또한 오직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에만 즉 믿음을 통해서만 육신의 눈뿐만 아니라 영혼의 눈까지 바로 떠서 눈에 보이는 역사 뒤에서 도도히 흐르고 있는 구속사의 진리까지 바로 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또 그런 자만이 천국으로 이르는 구속사의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고 온전히 천국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외울 말씀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1-8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15-17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18-30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31-34 세 번째 수난 예고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43 거지 소경의 치유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본문 & 자료노트
보감-18:1-8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 비유'를 통한 기도의 교훈
1. 인내함으로 오래 참으며 기도해야 함(애 3:25)
2. 목표를 세워 끝까지 끈기 있게 기도해야함(막 10:46-52)
3. 성도의 기도를 외면치 않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함(막 11:24)
4. 항상 기도하되 낙심치 말아야 함(눅 18:1)
5. 기도 응답이 더디다하여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됨(약 1:5-8)
주요 주제-18:1-5 예수의 비유 이해
마 13장 연구 자료 참조
주요 주제-18:31-34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
공관 복음서에는 각각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가 다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 본문은 제 3차 예수의 수난 예고 기록으로서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 수난의 구체적인 장면들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이처럼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으신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구속사적 의의는 실로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십자가 수난을 미리 예고하신 사실도 우리에게 매우 심오한 구속사적 의의를 준다. 이에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에 관한 전반적인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수난 예고의 시기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는 예수 공생애의 일대 전환점을 이룬 베드로의 신앙 고백 사건 직후부터 주어지기 시작했다. 이 때는 A.D. 29년 봄으로서 예수님의 신자가 구속 희생 사역을 약 1년 가량 남긴 때였다 또한 유대인들의 예수 배척이 점차 고조되고 있었으며 그런 와중에서도 예수께서 당신의 구속 사역의 최종 성취를 향해 그 사역을 활발히 전개하던 때였다. 이에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 시기와 장소 및 핵심 내용을 도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공생애 시기 | 장 소 | 내 용 | |
1차 | A.D. 29년 여름 | 가이사랴 빌립보 | 십자가 수난의 전반에 관해, 제자들의 동참 촉구 (눅 9:22-27; 마 16:21-28; 막 8:31-9:1) |
2차 | 29년 가을 | 갈릴리 | 예수의 체포와 부활에 관해 (눅 9:43-45; 마 17:22,23; 막 9:30-32) |
3차 | 30년 겨울 | 요단 근처 | 십자가 수난의 구제적 사실과 예수의 부활 예언 (눅 18:31-34; 마 20:17-15; 막 10:32-34) |
4차 | 30년 봄 | 감람산 | 유다의 배반과 유월절, 예수의 체포(마26:2) |
2.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필연성과 수난 예고의 목적
예수께서 이렇게 네 차례에 걸쳐 십자가 수난을 예고하신 사실은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한 구속주(the Saviour)로 오신 메시야로서 마땅히 받지 않으면 안될 십자가 수난의 필연성을 몸소 증거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십자가 수난을 받지 않으면 안되셨던가? 예수의 십자가 수난의 필연성에 관해서는 막 17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단 여기서는 네 번 다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인바 된 예수의 수난 예고의 목적에 관해서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십자가 구속 희생의 복음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위해: 수난 예고의 첫째 목적은 십자가 수난이 예수께서 스스로 전혀 예기하지 못한 가운데 우연히 급작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또한 십자가 수난이 예수 사후(死後)에 그의 추종자들이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 신화적 허구가 아니라 태초부터 있어 온 하나님의 뜻과 구속의 원리에 따라 그분의 섭리대로 작정된 것이며, 이에 예수께서 자발적 순종과 헌신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구속 사역을 성취하신 사건임을 십자가 수난 후 제자들과 미래의 모두 성도들로 하여금 확실히 믿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② 수난 후 낙심치 않고 복음 전파 사역을 감당케 하기 위해: 수난 예고의 두 번째 목적은 제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예수께서 십자가 수난을 받게 될 때 받을 충격을 완화하고, 그것이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필연적이었음을 깨달아 낙심치 않고 수난 이후 그리스도의 구속의 복음을 확신 가운데 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③ 제자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십자가 고난을 능히 감당케 하기 위해: 수난 예고의 세 번째 목적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될 때 공중 권세 잡은 자 사탄(엡 2:2)이 반드시 핍박을 가해 올 터인데 이 때에 제자들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능히 걸어가신 것을 본받아 자신들도 그 길을 인내로써 걸어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고난의 길을 당신의 제자들이 혼자서만 감당하도록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공급해 주셨다(요 14:25-28; 행 2:1-4).
3. 구속사적 교훈
예수님이 이처럼 자신의 수난에 관한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사실은 일차적으로 그분은 미래의 모든 것까지도 알고 계신 제 2위 성자 하나님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수난의 고통을 묵묵히 감당하신 사실에서 우리는 그분의 겸손의 크기(빌 2:6-8)와 죄인들을 향한 사랑의 깊이와 무게에 가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예수의 십 자가 수난이 우연히 갑작스럽게 이루어 졌거나 후대의 예수 추종자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신화적 허구가 아니라, 태초 이래 줄곧 예언되어 온 하나님의 구속의 뜻과 구속의 원리의 성취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십자가 구속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 죄를 용서받고 의인이 되어 장차 영생을 누리게 됨을 확신하게 된다.
보감-18:1-8 믿음으로만 얻는 것 10가지
마 17장 자료 노트 참조
보감-18:9-14 두 종류의 사람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 및 자신의 자범죄로 인하여 모두 다 죄인이다(롬 1:23).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느냐 아니냐인 것이다. 특히 평소에는 몰라도 죄인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이 사실을 시인하고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느냐 않느냐는 그야말로 영원한 축복과 저주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에 예수께서는 심지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죄인됨을 모르고 시인하지 않는 바리새인과 실로 자신의 죄의 실상을 깨달은 나머지 기도조차 제대로 못한 세리라는 가상의 인물들의 대조를 통해 비유하사 앞으로 올 세대에게 복음 앞에서 자신의 실상을 깨달을 것을 교훈하시고 있다. 특히 이 비유는 표면적 관점에서 보면 의인인 바리새인과 죄인인 세리가 실제 그 내면은 정반대였음을 밝힘으로써 구원에 유효한 것은 형식적 믿음이 아니라 내면적 믿음임을 보이는 데 그 신비성이 더해진다.
1. 바리새인
․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함
․ 하나님 앞에서 자만함
․ 부족함을 느끼지 못함
․ 자신을 의인으로 생각함
․ 의인으로 인정받지 못함
2. 세리
․ 자신의 실상을 바라봄
․ 하나님 앞에서 자복함
․ 불쌍히 여김을 간구함
․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함
․ 의인으로 인정받음
보감-18:15-17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그곳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셨다. 물론 어린 아이에게도 이기심과 질투심 같은 죄성이 있지만 특별히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의 특성 가운데 일부 신앙인들이 본받아야 할 특성이 있음을 암시하시면서 이같은 말씀을 하셨다.
한편 여기서 말하는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이란 반드시 어린이가 갖고 있는 신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갓 거듭난 신앙의 초보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에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특성들을 모아보았다.
1. 겸손한 신앙
2. 가식이 없는 신앙
3. 전적으로 의뢰하는 신앙
4.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앙
5.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는 신앙
6. 있는 그대로 자기를 나타내는 신앙
7. 하나님 안에서 마음껏 자유하는 신앙
원어 연구- 18:41 보기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히나 아나블렢소'이다. 여기서 '히나'는 관계 대명사로서 영어의 'that'에 해당된다. 그리고 '아나블렢소'는 전치사 '아나'와 동사 '블레포'의 합성어인 '아나블레포'의 미래형이다. 전치사 '아나'는 '~위에'(on)라는 의미를 기본적인 뜻으로 가지고 있으며, 함축적으로는 때때로 '반복'을 뜻하기도 한다. 그리고 '블레포'는 '보다'(see)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마 13:17; 요 1:29).
그러므로 '아나블레포'의 의미는 '우러러 보다'(막 6:41; 눅 9:16), 또는 '다시 보게 되다'(행 9:12,17; 22:13)가 된다. 따라서 '아나블레포'의 미래형 동사 '아나블렢소'는 '내가 우러러 보게 되기를' 또는 '내가 다시 보게 되기를'이라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소경이 예수께 대한 믿음과 경외심을 가지고 자신의 소원을 아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점은 그가 예수를 '주'라고 부르면서 나아간 것과 아울러 눈이 떠지게 될 경우 제일 먼저 '주'를 '우러러 보고 싶다'고 아뢴 것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본절의 소경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가 아니라 본래는 정상이던 자가 소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본 구절이 '내가 다시 보게 되기를 원하나이다'(I want to regain my sight)로 번역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주요 주제-18:24-30 하나님의 나라의 이해
눅 서론 특별 자료 참조
고고학-18:35 신약시대의 여리고
마 20장 자료 노트 참조
18:1-8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
전장 마지막 단락(눅 17:22-37)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와 관련한 교훈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장 1-15절 사이에서 예수께서는 두 비유를 통해 기도의 자세를 교훈하고 계신다. 그 가운데 본문은 소위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라 불리는 비유를 통해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도할 것을 교훈하신 내용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재관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자였다. 그러나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던 과부의 끈질긴 탄원에 굴복하여 결국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고 만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그처럼 악한 자일지라도 그 강청함에 못 이겨 소원을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의로우신 재판관되신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 이를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 비유는 인내하며 응답될 때까지 간절히 기도하라는 점에서 눅 11:5-8에 기록된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와 그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전장(눅 17:22-37)에 나오는 종말론적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때에는 종말의 시기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도의 자세를 제시
해준다. 즉 누가가 이것을 기록할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포기할 정도로 심한 환난과 핍박을 받는 상황에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누가는 주님께서 신자들의 부르짖음을 반드시 응답하시므로 낙심하지 말고 믿음을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상황에 있어서 재림의
지연은 생명의 문제와 연결되어 매우 절박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강조점은 주의 성도들에게 인자의 재림까지 낙심하거나 믿음을 잃지 말고 끝까지 기도하는 신실함을 가지라는 데에 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종말에 직면한 성도는 반드시 고난의 현실을 맞이하지만 하나님을 의뢰하며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이다(시 50:15; 렘 33:3).
둘째,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시기가 되면 신실한 성도가 드물고 진실한 믿음을 찾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역설하시는데(8절). 이것은 많은 성도들이 고난과 핍박이 닥쳐올 때에 믿음을 포기하게 될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언젠가 반드시 당신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므로 우리는 이래 줄곧 예언되어 온 하나님의 구속의 뜻과 구속 원리의 성취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십자가 구속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 죄를 용서함 받고 의인이 되어 장차 영생을 누리게 됨을 확신하게 된다. 낙심하지 말고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한다(약 5:7).
셋째, 일반적인 기도의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고 생각하여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확신 가운데 인내하며 기도할 것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하여 조바심을 갖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간구에 반드시 응답하시며 우리의 필요에 따라 가장 최선의 것으로 들어 주신다(신 19:14; 14:18; 요 15:7).
18: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 이 비유는 바로 앞장(눅 17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기에 일어날 무서운 환난에 대한 설명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그때에 대한 준비로서 계속적인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며 기도의 능력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서 '항상 기도하고'(판토테 프로슈케스다이)란 말은 끊임없이 기도의 행위를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기도의 습관을 계속 유지하며 항상 기도하는 마음 자세를 갖도록 힘쓰라는 권면이다. 그리고 '낙망치 말아야'(메 엥카케인)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악에게 굴복하지 않다', '겁장이가 되지 않다'는 뜻으로서 성도의 승리적 모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 말은 또한 신약 성경에서 성도의 담대한 생활을 강조할 때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고후 4:1,16).
18: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 그 당시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이란 말은 악한 사람으로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담적 표현이었다(Rlye).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사람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특히 사람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해결해야 할 재판관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백성을 무시하는 사람이 라면 그에 게서는 어떤 정의조차도 전혀 발견할 수 없을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재판관이 존재하는 도시나 사회는 당연히 부패하기 마련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절망적인 환경을 근거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기도의 능력을 사람들에게 더욱 구체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깊은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원한을 풀어 주소서. - 당시 과부는 사회적으로 비천하고 연약한 사람들로서 그들은 항상 동정의 대상이 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 성경은 과부를 배려하는 여러 규례들을 오래 전부터 명시하고 있었다(출 22:22; 신 10:18; 렘 22:3). 따라서 재판관들은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과부들을 보살펴 줄 의무가 있었으며, 본절에서 과부가 이 불의한 재판관을 자주 찾아 간 사실을 묘사하고 있는 것도 과부에 대한 재판관의 성실한 의무 수행을 요구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사 1:17). 한편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에크디케손 메 아포투 안티디쿠 무)라는 말의 정확한 표현은 '나의 대적으로부터 나를 변호하여 주소서' 또는 '나의 대적에 대하여 정의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하는 뜻으로서, 이는 부당한 손실이나 대우를 받은 과부가 자신의 정당한 귄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재판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부의 요청은 송사에 있어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것이 재판관의 당연한 의무임에도 불구하고 이 불의한 재판관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18: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 이 불의한 재판관은 과부의 요청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데 익숙한 그로서는 재판에 대한 대가로 과부에게서 어떤 물질적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가 듣지 아니하다가'(우크 에 델 렌)라는 표현은 미완료 시제로서 계속적인 거부 행위를 나타내는데, 이것은 재판관 못지않게 과부도 자신의 요구를 그에게 계속해서 탄원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 이 구절은 재판관이 과부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 배경을 잘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재판관은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과부의 요청을 수락하기까지는 어떤 정의감이나 자신의 직업적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그를 계속적으로 찾아와 자신의 요구를 주장한 과부의 숨은 노력이 뒷받침이 되었던 것이다.
18: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 과부의 끈질긴 노력은 마침내 자신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서라도 과부의 요청을 더 이상 거부할 수가 없다는 재판관의 고백을 통해 그 결실을 맺는다. 여기서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히나 메 에이스 텔로스 에르코메네 휘포피아제 메)는 말의 보다 정확한 표현은 '그 부탁을 들어 주지 않으면 그녀는 끝까지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는 의미로서, 이는 재판관이 과부의 끈질긴 간청에 몹시 지쳐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한편 '괴롭게 하리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눈 아래 부분을 계속해서 때린다'는 뜻으로서, 이것은 매일 같이 재판관을 찾아 와서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부의 열성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18:6 또 주께서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 여기서 '불의한 재판관'(호 크리테스 테스 아디키아스)은 문자적으로 '불공정한 그 재판관'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눅 16:8에 나타난 '옳지 않은 청지기'를 묘사하는 용어와 같은 형태이다(Robertson). 그리고 '들으라'(아쿠사테)는 구체적인 행동을 지시하는 명령형으로, 이는 여러 비유의 경우에서 잘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비유를 끝내고 그 결론적 말씀을 하시기 전에 비유를 들었던 청중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의미를 생각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권면이다(마 13:18; 21:33; 막 4:23 등).
18: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 하시겠느냐. - 이제 이 말씀을 통해서 비유의 목적은 뚜렷이 밝혀졌다. 즉 그것은 아무리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끈질기게 탄원하는 과부의 요청을 결국 받아들이고 말았는데, 하물며 인자하심과 거룩하신 능력으로 그의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께서 밤낮으로 끊임없이 당신에게 부르짖는 택한 자녀들의 요구를 들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 예수께서는 기도야말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밀접한 관계를 계속 유지시켜 주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 여기서 '저희'가 '성도'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적'들을 말하는 것인지, 또한 '오래 참으시겠느냐'는 말이 단순히 문자적 의미로 '오래 참는다'는 뜻인지 아니면 상징적 의미로 '원수를 갚는다'는 뜻인지에 대한 해석을 놓고 주석가들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데 다음 두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여기서 '저희'가 일반적인 성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오래 참지 않고 곧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Bengel, Bruce, Goodspeed). 둘째는 본절에서 '저희'는 성도들을 괴롭히는 대적들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그 대적들의 행동을 참으셨지만 이제 곧 그들을 징벌하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견해이다(Cobbin, Moffatt, Vincent). 이 가운데서 첫 번째 견해가 문맥의 흐름상 더 합당하나 두 번째 견해를 취해도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 여기서 '속히'(엔 타케이)란 말은 '갑작스럽게' 혹은 '예기치 않은 때에'라는 뜻으로서, 이것은 결정적인 시기가 임박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신적 작정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원한'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크디케신'은 단순히 개인적인 적대 감정이나 억울한 심리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로움을 입증하다' 또는 '하나님께서 변호하다'는 의미로서. 이러한 원어적 의미는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적극적 보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까지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과 말씀을 의지하면서 믿음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반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노아와 롯이 살았던 그 때의 경우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자기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끈질기게 재판관을 찾아간 과부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변함없이 신뢰하는 자만이 참된 성도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18:9-14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
앞 단락(1-8절)에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을 살펴보았다. 이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를 통하여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를 교훈하고 계신다.
본문을 보면 앞 단락에서 불의한 재판관과 가난한 과부가 대조를 이룬 것처럼 여기서도 바리새인과 세리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으로 소개된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고백이나 회개가 없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구함이 없는 기도를 했다. 따라서 그의 기도는 기도라고 할 수 없으며 단지 그의 행위에 대한 자랑이었다.
그의 자랑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11절). 둘째는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열심히 바친다는 것이었다. 즉, 그는 그 자신이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였고 의롭게 살았으므로 하나님께 회개를 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필요도 없다는 식의 자기 자랑을 늘어놓은 것이다. 이와 같이 자기 의를 확신하는 것은 구원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의를 힘입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리새인은 더구나 자기의 의로
움을 빗대어 타인, 곧 세리를 정죄하고 멸시하는 범죄까지 행하였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열납되지도 않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행위에 불과하다(마 23:25).
반면에 세리는 기도할 때에 하늘을 우러러 보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의 기도 자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세도 취하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과 긍휼히 여길 것을 간구할 뿐이었다(13절). 이러한 세리의 기도는 자기 죄악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찬 겸손한 태도를 보여 준다. 이런 세리의 모습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돌아왔던 탕자의 모습(눅 15:21)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이러한 세리의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응답을 가져왔다(14절; 롬 3:20).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스스로 의롭게 여기고 교만하여 남을 멸시하는 자는 멀리하시고, 오직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애통한 심정으로 회개하며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약 4:6).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응답되는 기도의 자세를 보여 주는데 오직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의 태도는 다음과 같다.
①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일대 일로 만나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한 기도를 해야 한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모든 일을 맡기고 그를 신뢰하는 태도를 가질 때에 진정한 기도를 하게 된다.
③ 솔직한 기도를 해야 한다. 미사여구를 사용한 공허한 기도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통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을 결코 멸시치 않으시기 때문이다(시 51:17).
18:9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 - 이 말은 자신의 행위로서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즉 바리새인을 가리키는 대표적 표현이다. 눅 16:15 주석 참조.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어떤 선한 행동이나 올바른 행실로서 선이나 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이나 관습에 의하여 규정된 율법적 의식이나 규례들을 지키는 것을 통해 의를 추구하였고. 이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죄인이라 부르며 그들을 무시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 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의인이라 부르는 것을 매우 만족하게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태도는 예수님의 잦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는데, 그들의 위선에 대한 예수님의 비판과 책망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마 12:34; 22:33).
18:10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그렇듯이 이 비유 또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활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비유를 듣는 청중들로 하여금 그 의미를 보다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는데, 그 시간은 오전 9시, 12시 그리고 오후 3시였다. 하지만 비유에 나타난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들어간 시간이 정해진 기도 시간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시간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성전'은 정확히 '성전 뜰'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 그 시대의 상황 속에서 바리새인과 세리는 정반대되는 부류의 사람들인데, 일반적으로 바리새인은 율법적으로 오류가 없는 사람들로 인정되어 사회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위치였다. 하지만 세리는 악하고 방탕하며 탐욕스런 사람들로 여겨져 많은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 불리우고 경멸을 받아오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리새인이 성전에 기도하러 갔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것이지만, 불경건한 사람으로 대표되는
세리가 기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전에 갔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18:11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 기도할 때에 서 있는 것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삼상 1:26; 막 11:25). 그러나 본절에서 '서서'(스타데이스)란 말은 자신의 행동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눈에 띠는 장소에서 가식적인 태도로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감사하나이다. - 외형상 경건의 모습으로 가득찬 바리새인의 기도는 그 기도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을 살펴보면 진실된 회개의 고백은 하나도 없고 시종 일관 자신의 생활을 자화자찬하는 자랑거리로 가득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이 바리새인은 자신과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세리를 의식하며 그와의 의도적인 비교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움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토색'(하르파게스)은 '약탈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불의'(아디코이)는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남기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세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표현들이다(Coalbin, Robertson).
18: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드리나이다. - 이제 바리새인의 기도는 율법에 충실한 자신의 의로움을 부각시킴으로써 더욱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는 것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유대인들이 개인적으로 행한 금식을 가리키는데, 이는 모세가 명한 율법의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 후에 만들어 낸 전통에 의한 것이었다. 또한 이 바리새인은 자신의 십일조 생활을 자랑하고 있는데, 본전에서 '소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판타 호사 크토마이'( )는 월급과 같은 '일정한 수입'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재산'을 맡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것은 그가 율법이 정한 십일조의 규례를 훨씬 능가하는 십일조를 행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깃이다. 결국 이와 같은 바리새인의 종교적 열성은 자신의 의로움을 여러 사람 앞에 입증하는 방편이었고, 이를 통해 바리새인은 경건의 내용이 없는 종교적 교만에 깊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18:13 세리는 멀리 서서. - 여기서 '멀리 서서'란 말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를 가리킨다. 흔히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에서 기도한다는 표현은 성전 안이 아니라 성전 뜰에서 기도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성전 뜰은 '여인의 뜰'이라 불리워지는 곳이다. 따라서 자신의 종교적 교만함에 가득차 있던 바리새인은 성전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전 뜰에서 기도하였던 것이지만 이 세리는 그 바리새인과 반대로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도하였던 것이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가슴을 치며. -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할 때에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일반적인 자세였다(시 40:12; 123:1; 요 11:41). 그러나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잘 알고 있던 이 세리는 감히 하늘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여기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우크 에델렌 우데 투스 오프달무스 에파라이)란 말의 정확한 표현은 '눈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이는 죄책감으로 인한 부끄러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는 세리의 심정을 잘 묘사하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가슴을 치는 세리의 행동에서 그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치며'(에튀프텐)란 말은 미완료형으로서 자신의 죄악을 통분해 하며 계속 가슴을 치고 있는 세리의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이다(Robertson).
하나님이어 불씽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바리새인과 상반된 모습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 이 세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는 고백을 통하여 용서를 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세리의 기도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자신의 생활을 관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낸 것으로서, 이를 통해 세리는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죄인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18:1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내려갔느니라. - 자신의 종교적 열성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마음껏 자랑했던 바리새인과 달리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감히 고개조차 들 수가 없는 불쌍한 죄인이라고 탄식한 세리가 의롭다 함을 받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고'(데디카이오메노스)란 말은 법정 용어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이는 세리는 용서를 많이 받고 바리새인은 적게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오로지 세리만이 하나님 앞에서 그의 모든 죄를 용서받고 의인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는 분이심을 나타내 준다(눅 14:11).
18:15-17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
본문은 앞 단락(9-14절)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의 비유에서와 마찬가지로 '겸손'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리고 눅 9:46-48에 이어 두 번째로 어린 아이를 통해 주시는 교훈이다. 이는 마태복음 및 마가복음과 병행을 이룬다(마 19:13-15; 막 10:17-16).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는 부모들이 어린 아이를 랍비에게 데리고 가서 축복을 받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들은 훌륭한 선생이신 예수님께 축복을 받기 위해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제자들은 이를 책망했다(15절). 그러나 실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환영하셨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자가 바로 어린 아이와 같은 성품을 가진 자라고 말씀하신다(16절). 즉 어린 아이들이 그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듯이 하나님을 겸손하게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어린아이를 통한 겸손의 교훈은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하는 변론을 벌였을 때 이미 주어진 적이 있다(눅 9:46-48). 여기서는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며 '의'를 자랑하는 사람에 관한 두 이야기(9-14절, 18-30절) 사이에 삽입되어 당시 유대 지도자들의 그릇된 태도와 교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롬 6:19; 고전 14:6-12).
18:15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꾸짖거늘. - 본절은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며,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에 많은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을 때 그들의 자녀들까지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누가는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와 마가(마 19:13-15; 막 10:13-16)가 일반적인 아이들을 가리키는 '파이디아'( )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과 달리 갓난아이를 지칭하는 '브레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올 때, 비교적 큰 아이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아들도 함께 데려왔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여튼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려온 목적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져주심을 바랬기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만져주심'(하프테타이)은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아이들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부모들의 행위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책망을 받았는데, 제자들은 흔히 그렇듯이 예수님께로 필요 이상의 많은 어린 아이들이 몰려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 선포 사역을 방해하고 예수님을 귀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에서 이와 같은 행동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Hendriksen).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금하지 말라. -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로 오는 것을 마땅히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막 10:14의 기록에 의하면 아이들의 부모를 꾸짖는 제자들의 행동을 목격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화를 내신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구원의 부수적인 존재들이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참된 기쁨을 소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여기서 '이런 자'(토이우톤)는 문자적으로 '이 자들의'란 뜻으로서 거기 있던 어린아이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과 같이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며 순결한 사람들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신앙적 권면이다(Ryle).
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들어가지 못하리라. 본절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마음의 상태를 강조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18:3,4 주석을 참조하라.
18:18-30 부자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
앞 단락(15-1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를 통한 교훈으로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시고, 본문에서는 대조적으로 부자 관원의 질문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없는 자의 모습을 알려 준다(마 19:16-30; 막 10:17-31). 이러한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부자 관원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인데(18-22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부자 관원의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통하여 인간의 율법적 행위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역설하신다. 부자 관원은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했지만 자기의 재산을 포기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하는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근심하고 돌아감으로써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부자 관원은 외적으로 악한 행위를 하지 않아 율법을 준수한 것처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동정을 적극적으로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율법을 완전하게 지킨 것이 아니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과 따라서 율법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음을 시사한다.
다음은 제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부자에 대한 전반적인 경계를 하는 모습이다(24-30절).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부자들의 재물에 대한 욕심을 경계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결단코 들어갈 수 없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며 철저한 자기 포기와 부인만이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근거임을 보여 준다. 이때 자기 포기나 부인의 대상은 재물만이 아니며 예수님의 삶을 따르려는 것보다 소중히 생각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될 수 있다.
한편 본문은 구원의 대강령을 보여 주는데(26,27절) 그것은 구원이 인간의 능력이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할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극적으로 죄악을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된 성도가 되어야 한다.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 이 '관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누가는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청년이었고 재물이 상당히 많은 부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마 19:22; 막 10:22).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 여기서 '선한 선생님'이란 명칭은 당시 종교적으로 뛰어난 지도자였던 랍비들에게 붙여지는 수식어로서, 그 관원이 예수님에 대하여 이러한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그가 예수님의 탁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음은 이 관원이 구원에 관한 문제로 고민해 왔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철저한 율법주의적인 사고 속에 젖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구원은 흔히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듯이 어떤 선이나 율법적 규례들을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원은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있던 율법적 의식을 가지고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이다. 마 19:16 주석 참조.
18:19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선한 이가 없느니라. -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성을 부인하거나 또는 그리스도로서 자신의 완전성을 부인하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그 관원의 잘못된 의도를 지적하는 것을 통해 예수님의 신적 속성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본절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다. 첫째,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신성을 알지 못하면서도 막연히 하나님께만 적용될 칭호를 사용하는 관원의 섣부른 행동을 경계하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실 이 관원이 자기가 말한대로 예수님의 신성을 믿었더라면 그는 결코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며, 예수님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Plunlmer). 둘째,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화려한 칭호를 사용하며 예수님께 접근하는 바리새인의 의도를 경계하셨다는 것이다. 그 당시 통상적인 바리새인들의 의식 속에는 율법 외에 선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선한 선생님'이란 명칭은 매우 뛰어난 랍비에게도 붙이기를 꺼려하는 존칭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바리새인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이는 한 관원이 당신에게 이러한 칭호를 가지고 접근함으로써 율법의 완전성과 아울러 율법적 생활에 충실한 바리새인의 의로움을 내세우고자 하는 의도를 충분히 간파하셨을 것이다(Farrar, Spence).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공경하라 하였느니라. - 이제 그 관원이 예수님께 찾아 온 의도, 즉 율법적인 사고 속에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그의 생각을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계명들에 대한 준수 문제를 말씀하셨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당시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는 방법으로 생각해 왔던 하나님과 직접 관련이 있는 계명들이 아닌 인간과의 관계를 규정짓고 있는 십계명의 두 번째 서판에 기록된 계명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만일 사람들이 이러한 계명들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를 규정하는 십계명의 첫 번째 서판의 계명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Hendriksen).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규정하고 있는 여러 계명들을 준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관원은 이 모든 계명들을 준수했다고 자신있게 대답하고 있다. 여기서 '어려서부터'(에크 네오테토스)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나의 소년 시절부터'라는 뜻으로서, 이는 종교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나이(만 13세)가 된 소년 시절부터, 즉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아들'(bar mitvah)이 되고 나서부터 이러한 계명들을 다 지켰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8:22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나를 좇으라. -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계명들을 자신 있게 다 지켰다고 말하는 관원에게 이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새로운 교훈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그 관원이 갖고 있는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자신을 좇으라는 것이었다. 분명히 재물을 나누어 주는 것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두 가지 일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한 가지'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예수님을 좇는데 있어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필수적인 선행 조건이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하여튼 관원에게 한 가지 남은 것은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그의 재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었다. 재물은 그에게 우상이었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었다. 결국 관원은 겉으로는 모든 율법을 준수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재물로 인하여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도,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돌비의 계명도 제대로 준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재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코 예수를 좇을 수도 영생을 얻을 수도 없음을 가르치신 것이다. 한편 여기서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에티 헨 소이 레이페이)라는 말의 정확한 번역은 '아직 한 가지가 너를 실패시킨다' 또는 '아직 한 가지가 너에게 남아 있다'는 뜻인데, 이는 부자로서 재물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관원의 생활을 시사하는 표현이다(Robertson).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인 고로…심히 근심하더라. - 율법을 준수하는 자신의 생활을 입증함으로써 예수님에게 어떤 칭찬이라도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그 관원은 도리어 자신이 아끼고 있는 재산을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 주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곧 안색이 변하여 침통한 기색을 띠었고 큰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관원은 이내 예수님을 떠났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데, 이러한 관원의 모습은 재물 때문에 결국 영생 얻기를 포기하고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입증하는 실례가 된다. 또한 이로 볼 때 그 관원은 율법의 형식적인 면은 중시했지만 그 내용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전형적인 유대인으로서, 이는 경건의 내용은 없고 형식적인 종교 생활의 규범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식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18:24,25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도입된 비유이다. 그런데 이 비유에 사용된 '바늘귀'와 '약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그 해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바늘귀가 예루살렘성의 '바늘 귀문'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다(Barclay). 이 견해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 성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이 중 작은 문은 주로 밤에 사용되는 문으로 사람이 허리를 숙이고야 겨우 지날 수 있어서 '바늘 귀문'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으로 약대가 지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듯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한다. 다음은 '약대'(카멜로스)가 '밧줄'(카멜로스)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있다(Calvin), 즉 약대가 아니라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다는 말이다. 결국 두 견해 모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면에서 동일하다. 따라서 본절은 문자 그대로 취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18:26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부자에 대한 예수님의 심판적 판결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두려움을 갖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든 사람들은 나름대로 재물을 아끼고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재물이 많은 사람만이 아니라 재물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도 부자의 범주 속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쉽다'는 예수님의 극적인 표현 양식은 결국 구원 앞에 인간이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교훈이었던 것이다. 한편 누가는 구원에 대한 염려로 예수님께 이러한 질문을 했던 사람들이 누군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마 19:25; 막 10:26).
18:27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이제 구원에 관한 문제는 명확해 졌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지금까지 어떤 율법적 행동이나 선한 행동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을 현혹했던 바리새인들의 전통적인 견해를 비판하시면서, 사람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죄인을 돌보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사실들은 구원을 예비하신 하나님과 구원의 중보자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올바른 행동 규범을 새롭게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 19:26 주석 참조.
18: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주를 좇았나이다. - 베드로의 이와 같은 발언은 부자 관원처럼 자신의 행동을 내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도리어 여기서 베드로의 행동은 '사람의 구원은 인간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자신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는데, 자신들은 과연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는 조심스런 확인을 예수께 요청했던 것이다(Robertson). 더우기 이러한 베드로의 질문은 베드로 한 개인 뿐만 아니라 그 곳에 있던 제자들의 공통된 생각을 베드로가 대변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증거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답변하실 때, '너'라는 단수가 아닌 '너희' (29절)라는 복수를 사용하여 전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Hendriksen).
18:29,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 베드로의 걱정스런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자들은 모두 구원을 얻게될 것이라는 교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고 계신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사역하실 때,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나 성도들에게만 국한되는 약속이 아니라 모든 시대를 통하여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고 따랐던 성도들에게 주어진 언약의 말씀이다.
18:31-34 세 번째 수난 예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눅 9:22-27), 두 번째 (눅 9:43-45) 수난 예고에 이어 세 번째로 수난을 예고하신 내용이다(마 20:17-19; 막 10:32-34). 그런데 이러한 세 번째 예고는 수난의 장소나 방법을 제시하는 등 이전의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수난 사건의 긴박성을 느끼게 한다. 즉 예수께서는 여기서 그가 수난을 당하시게 될 장소가 예루살렘이며, 이유는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라 밝히고(31절), 이어 그가 이방인, 즉 로마인에게 넘기워 모욕과 채찍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할 것과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32,33절).
그런데 이렇게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수난을 반복하여 예언하신 것은 예수의 구속 사역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또한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오해하고 있는 백성들의 그릇된 메시야 관을 깨우치기 위함이었다. 아울러 그의 수난 후에 제자들이 낙심하고 절망에 빠질 것을 대비하여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고 격려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하여 예수님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를 드러냈다. (34절).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십자가 수난이 어떤 것인가를 아시면서도 담대하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의연히 나아가시는데, 이것은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랑의 완성된 모습이었다. 예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노트,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이상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상고하게 된다.
첫째,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고난 받고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필요성과 목적을 확실히 아셨고 죄인된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셨기에 모든 수난을 담당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끝까지 헌신하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둘째,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항상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의 설교, 축사, 병 고침 등을 체험했던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생각이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사역, 죽음, 부활하신 사실 자체와 그 까닭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18: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 본절에서 누가는 그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이 때와 장소는 갈릴리를 출발하여 베레아 지방을 통과하는 예수님의 장기간 여행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가까왔던 지역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여기에서 '데리시고'(파랄라본)란 말은 '자신과 함께 거느리시고'라는 뜻으로서, 이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행동에 어떤 비범한 각오가 숨겨져 있는 것을 암시한다. 마가는 특별히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는 말씀을 부가시키고 있다(막 10:32).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인자에게 응하리라. -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고난과 관계된 말씀이었다. 아울러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고난을 받을 장소라는 것을 밝히시며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들, 즉 예수님이 당할 고난이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성취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다. 이러한 수난 예고는 눅 9:22,44에 이어 세 번째 행해진 것으로 예수께서는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그의 수난을 예고하신다. 전 4차에 걸친 예수의 수난 예고와 관련해서는 본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하여튼 이처럼 그의 수난을 또다시 예고하신 이유는 그의 구속 사역이 그의 수난이 없이는 성취될 수 없음을 가르침과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그의 수난에 대해 제자들로 하여금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마 20:17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여기서 '기록된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때부터 예수님의 부활 때까지의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당할 수난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하지만 특별히 '인자'란 명칭을 생각할 때, 이는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겪게 될 고난에 관한 예언, 즉 시 22편, 사 53장, 단 9:26등과 같은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Hendriksen, Ryle).
18:32,33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종종 예고하셨지만 본절의 말씀과 같이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말씀하신 적은 없었다(눅 9:22,44 주석 참조).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서 자신의 신적 사역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앞으로 맞이할 일들이 인간들이 계획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섭리 속에 계획된 일로서, 완전한 인간의 신분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성취할 사명이 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은 '희롱'과 '능욕', '채찍질'이란 말을 통하여 자신이 모진 고난을 당하며 죽을 것을 예고하지만, '다시 살아나리라'는 결론적 말씀을 통해 자신이 다시 부활하리라는 것과 이로써 자신에게 궁극적 승리와 영광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계신다. 한편 '삼 일만에'(테 헤메라 테 트리테)라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그날 그 세번째'라는 뜻으로서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 일어날 구체적 시간을 강조하는 표현인데 마 20:19에는 '제 삼 일에'로, 막 10:34에는 '삼 일 만에'로 번역되어 있다(Robertson).
18: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알지 못하였더라. -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의미들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나면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서로 누가 높은 지위를 차지할 것인가를 놓고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다(막 10:35-41). 그리고 이러한 증거들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역을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했다기보다는 다분히 정치적이고 현재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준다. 한편 여기서 '알지 못하였더라'(우크 에기노스콘)는 말은 미완료형으로, 이것은 '제자들이 계속하여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다.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들을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행동을 강조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누가만이 독특하게 사용하는 표현 양식이다(눅 9:45). 또한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 또는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라'는 말씀과 같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서, 이는 특히 세상에 대한 염려와 죄악에 물들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구약적 표현이다(사 6:9, 10).
18:35-43 거지 소경의 치유
앞 단락 (31-34절)에서는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가 이전보다 더욱더 구체화됨을 통해 그의 사역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았다. 이어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여리고 가까이 와서 구걸하던 소경이 간절히 구원을 호소하자 그 간구를 듣고 눈을 뜨게 하시는 장면을 소개한다(마 20:29-34; 막 10:46 -52).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거지 소경의 믿음이다(35-39절). 주위의 반대와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소망하는 거지 소경의 믿음은 결국 눈을 뜨고 구원을 얻게 하였다. 이런 그의 간절하고 끈질긴 믿음의 간구는 강청하는 친구의 비유'(눅 11:5-8)와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눅 18:1-8)에서의 믿음을 연상시킨다. 더욱이 소경은 예수님께 메시야의 칭호인 '다윗의 자손'(38절)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이는 앞 단락(31-34절)에서 예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무지한 상태와는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는데, 이는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바른 신앙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둘째는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모습이다(40-43절). 예수께서는 인류를 위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고(31-34절)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가는 도중에도 불쌍한 소경을 외면치 않으시고 돌아보시며 그의 구원 요청에 응답하셨는데, 이는 인간의 영적 해방은 물론 모든 질고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의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실로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인자로 오셔서 인간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삶이었으며 사랑과 봉사의 삶이었다.
한편 눈을 뜬 소경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좇았는데, 이것은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행해야할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18:35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 지금은 폐허가 되었으나 당시에는 헤롯 대왕이 건설하여 로마의 통치 하에 있었던 여리고는 구약에 나타난 여리고, 즉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지역보다 약간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구약에 나타난 여리고를 가리켜 '옛 여리고'라고 불렀으며, 헤롯이 세워 비교적 이방인이 많이 살았던 여리고를 '새 여리고' 라고 불렀다. 한편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는 마태와 마가는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마 20:29; 막 10:46), 누가는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라고 하여 기록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많은 주석가들은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옛 여리고'를 떠나시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누가는 예수님께서 '새 여리고'를 향해 오시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이 소경의 치유 사건은 '옛 여리고'와 '새 여리고'의 중간 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Free, Robertson). 이에 대해서는 마 20장 자료 노트, '신약시대의 여리고'를 보다 참조하라.
한 소경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 마가에 의하면 이 소경의 이름은 바디매오였다. 그런데 누가와 마가는 '한 소경'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반면 마태는 '소경 둘'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아마도 예수께서 고치신 소경은 본래 둘이었으나 마가와 누가는 더욱 현저하게 드러난 바디매오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여기서 '구걸하다가'(에파이톤)라는 말은 '무엇을 얻고자 하는'이란 뜻으로서 소경의 신분을 밝혀 주는데, 그는 당시 여리고 라는 지역이 요단 동편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그 길목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였던 것이다.
18:36 무리의 지남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 여기서 '무리'(오클루)라는 말은 단순히 길을 오가는 '몇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매우 많이 모여든 '군중'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사실 그 당시 예수님에 관한 소문은 이스라엘의 온 지역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나 많은 사람이 모이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본절에서 소경이 '무리의 지남을 들었다'는 것은 평소와는 달리 예수님 때문에 모여 든 많은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소동을 들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이 무슨 일이냐'(티 에이에 투토)고 묻는 말의 문자적 의미는 '도대체 이 일이 어떻게 된 것이냐'는 뜻으로서, 이는 무리의 심상치 않은 소동을 듣고 그 까닭을 알기 위해 애쓰는 소경의 적극적인 모습을 부각시키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8:37,38 저희가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신다 하니…불쌍히 여기소서. - 예수님 때문에 모여든 무리와 같이 이 소경 또한 예수님에 관한 여러 소문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가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불렀다는 사실을 통해 입증된다. 그런데 무리 가운데 몇몇이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반면, 이 소경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의 신적 지위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다윗의 자손' 이란 호칭은 일반적으로 메시야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주로서 인간을 구원할 예수님의 신적 사역을 나타내는 성경적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메시야로서의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확신했던 이 소경은 자신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것이다. 한편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은 흔히 멸시를 당하던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탄원으로서 '하나님이여 자비를 베풀어 나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 양식은 시편에서 자주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시 4:1; 6:2; 25:16; 30:10).
18:39 앞서 가는 자들이 저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 앞서 가던 자들이 소경을 꾸짖은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평소에 무시했던 존재에 불과한 한 소경이 예수님을 큰 소리로 부르는 것이 도리어 예수님 주변에 모인 무리들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사역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기서 '잠잠하라'(히나 시게세)는 말은 원어상 동작의 계속되는 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소경을 조용히 시키기 위하여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계속해서 잠잠하라고 책망하는 동작을 묘사하는 표현이다. 즉 비록 육의 눈은 떴으나 영적으로 소경이 되어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 무리들은, 비록 육의 눈으로는 볼 수 없었으나 영의 눈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본 소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그것이 비위에 거슬려 소경에게 잠잠하라고 돌아가며 윽박질렀던 것이다.
저가 더욱 심히 소리 질러…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책망으로 소경은 매우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소경은 그들의 책망에는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해서 예수님을 불렀는데, 여기서 '더욱 심히'(폴로말론)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사람들의 책망이 심할수록 그 소경은 더욱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소경의 적극적인 행동은 이번 기회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자신은 영영 그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위기감 속에서 간절하게 예수님을 불렀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8: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저가 가까이 오매. - 소경을 책망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그 소경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그를 자신에게 데려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그 소경의 형편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그의 육체적 상태뿐만 아니라 자신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소경의 마음 상태, 즉 자신을 의지하기를 원하는 그 소경의 믿음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18: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많은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고 심지어는 죄인으로 취급되었던 사람일지라도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들을 찾아가셔서 위로하시고 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본절의 말씀 또한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입증하고 있다. 한편 이 소경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던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굳이 물으신 것은 그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교훈이며, 또한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 사이에 항상 인격적인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신앙의 권면이라 할 수 있다(Hendriksen). 아울러 예수님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한 소경의 대답은 매우 솔직한 표현이며,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던 소경이 여기서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은 그가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신성을 확실히 믿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18:42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 그 소경이 갖고 있던 믿음의 진실성을 잘 알고 있었던 예수께서는 '보기를 원한다'는 소경의 요청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셨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이 인간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선물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실례가 된다. 한편 여기서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온전하게 되었다'는 뜻으로서, 이 말은 단지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이러한 표현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자기의 구주라고 고백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선포한 은혜의 말씀이었다(마 9:22; 눅 7:50; 17:19).
18: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 예수님의 말씀은 곧 능력이었다. 즉 '보아라'는 말씀 한 마디에 소경은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능력은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지으신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하여튼 지금까지 육체적인 어도에서 고통 받았던 그 소경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보게 되었을 때, 그의 기쁨은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그래서 그 소경은 자신의 기쁨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자기가 보게 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한편 '좋으니'(에콜루데이)라는 말은 미완료형으로서 동작의 시작을 알리는 표현인데, 이것은 이제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를 체험한 그 소경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가운데 한 일행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을 말하는 것이다. 이 소경이었던 자에 대해서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연구자료
바디매오-믿음으로 고침 받은 소경
1. 인적 사항
① 바디매오는 '디매오의 아들'이라는 뜻이며(막 10:46), 디매오는 '존경', '명예'라는 뜻.
② 소경이며 여리고의 거지(눅 18:35).
③ 예수께 고침 받아 눈을 뜬 자(눅 18:42).
2. 시대적 배경
A.D. 30년경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거의 마무리하실 무렵의 인물임,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히브리식 이름이 아닌 헬라식 이름이다. 이는 당시 유대 사회가 헬라의 영향을 얼마나 크게
받았는가를 보여 주는 한 증거이다.
3. 주요 생애
예수 대면 이전 | ||
출생 | - | - |
소경이 됨 | - | 눅 18:35 |
여리고에서 구걸 함 | - | 눅 18:35 |
예수님에 대해 들음 | A.D. 30년 | 눅 18:36,37 |
예수 대면 이후 | ||
소리를 질러 예수께 치유 요청 | A.D. 30년 | 눅 18:35-41 |
믿음으로 치유 받음 | A.D. 30년 | 눅 18:42 |
치유 후 곧 예수를 따름 | A.D. 30년 | 눅 18:43 |
죽음 | - | - |
4. 성품
① 자기를 꾸짖는 주위의 환경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기의 생각을 실천에 옮길 정도로 담대한자(눅 18:39).
② 예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으로 보아 치유 받으려는 굳은 의지와 강한 믿음을 소유한 자(눅 18:41,42).
③ 치유 받은 후 곧바로 예수님을 따른 것으로 보아 결단력이 있는 자(눅 18:43).
④ 예수께서 부르실 때 겉옷조차도 내어 버리고 뛰어 올 만큼 현실적 문제 타개에 대한 강한 소망과 적극적 행동을 소유한 자(막 10:50).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고백한 자(눅 18:38).
② 믿음으로 말미암아 육체적 질병을 고침 받고 구원받은 자(막 10:52; 눅 18:42).
6. 평가 및 교훈
① 바디매오는 자기의 소경됨을 업신여기고, 또 자기를 꾸짖는 주위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소리쳐 부름으로써 예수를 만났고, 또 치유를 받을 수 있었다(눅 18:35-43). 실로 구원을 받기위해 바디매오가 간절히, 그리고 담대히 주님의 도우심을 요청한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그리스도를 따를 때에 주위의 여러 요소들이 우리를 방해하고 넘어뜨리려 할지라도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간절히 주님만을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② 예수께서 바디매오의 소리를 들으시고 '저를 부르라'하실 때에 바디매오는 자기의 가장 귀한 재산인 겉옷까지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왔다(막 10:49,50). 이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28)는 예수님의 초청에 우리 성도들이 어떻게 응해야 할지에 대한 좋은 예가 된다.
③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데, 바디매오도 믿음으로 인하여 육체적, 영적 질병으로부터 구원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진정 바디매오가 소경의 상태에서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예수께서 자기를 치유하실 수 있다는 확실한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눅 18:42). 아울러 우리도 하나님께 구할 때에 의심하지 않는 확실한 믿음으로 구한 바들을 다 받는 축복을 누리도록 하자(막 11:24).
④ 예수께 치유 받은 바디매오는 자기 혼자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돌리도록 했다(눅 18:43).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함으로써(벧전 2:9)나 뿐만이 아닌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7. 핵심 성구
'예수께서 저에게 이르시되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좇으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눅 18: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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