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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및 사랑과 인내에 대한 교훈
많은 은헤 받으시고 하나님 좀 자랑해주세요.
하나님 영광을 받으시는것 좋아하세요.
구속사적 개관
본장은 제 13-17장까지 이어지는, 본래 성자 하나님이었으나 태초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법에 따라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제 곧 십자가 수난(crucifixion)을 통하여 구속사역을 최종 성취하시기 전날 밤인 고난주간 제 5일째인 목요일 날 밤에 최후의 만찬을 전후하여 고별설교와 기도로서 제자들에게 주신 여러 말씀들을 보도한 일련 기사의 연속 부분이다.
이와 같은 취지의 일련 기사인 제 13-17장은 제 13장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 유다의 배반 및 베드로의 예수 부인 등을 미리 아시고 예언까지 하셨음을, 그리고 제 14-16장이 당신의 십자가 수난 및 승천 이후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을 향한 위로의 약속 및 핍박에 대한 교훈을, 그리고 제 17장이 대속 희생을 위한 죽음을 앞두시고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그리스도로서 제사장적인 중보기도를 드린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이런 문맥 하의 본장은 성자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육체를 입은 모습으로는 당신의 제자들을 떠나 있지만 영(靈)으로는, 신학적으로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령을 통하여 과거 육체로 함께 있을 때 이상으로 제자들과 곧 모든 성도들과 연합된 관계에 있을 것임을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일단 보여주시고(1-11절),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위해 성도 상호 간에 지켜야 할 그리스도의 새 계명 준수 명령(12-17절)과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받게 될 세상으로부터의 핍박에 대한 인내의 교훈(18-27절)을 보도하고 있다.
먼저 1-11절에 나오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그리스도와 성도가 어떻게 연합(聯合)되어 있는가를 회화적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는 비유(parable)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성도와 그리스도가 연합되었다는 것은 이방 종교 또는 신비주의적 이단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존재론적으로 합일(合一)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죄인들이 받을 죄 값을 대신해 치러주심으로써 법적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법적 연합을 이룬 성도(the Saint)는 실상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의 부활에 함께 연합하여 동참함으로써 죄 값을 다 치루고 의인이 되었다는 법적 지위를 획득한 것이다(롬 6:3,5). 뿐만 아니라 본문의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는 이 같은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법적 연합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서 마치 포도나무 가지가 원줄기에서 양분과 수액을 공급받듯이 성도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랑이라는 양분과 수액을 공급받는 매우 생동적인 유기적 연합 관계에 있음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생동적인 유기적 연합관계는 육체는 비록 떠나있으나 그리스도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이 각 성도의 마음속에 내주(內住)하사 그리스도의 사랑을 공급하시고 그의 말씀을 점점 더 깊게 깨닫게 하심으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재림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유지되며 성도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삶을 살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은 인간이 이런 예수와의 연합 안에서만 인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본문에는 직접적으로 강조되어 있지 않지만 성도는 각자가 참 포도나무 줄기인 예수 안에 연합된 가지인 동시에 성도 전체가 한 포도나무 안에 함께 연합된 생명 공동체라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와 성도의 연합 관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롬 5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이어 12-17절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와 같은 생동적인 유기적 연합관계에 있는 성도라면 필연코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이 공급하시는 양분과 수액에 의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이며(갈 5:22) 또 맺기 위하여 힘쓰는 것이 마땅함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열매의 핵심은 다름 아닌 사랑(love)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은 피조물을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본성의 발현으로서 당신을 배반하고 범죄한 인간을 결국 당신 자신 곧 삼위 하나님 중 제 2위 성자 하나님을 희생시키시면서까지 구속해 주시고자 하시는 전 구속사의 원동력이다. 동시에 이는 이런 당신의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당신께 회개하여 구원 얻은 자의 자연스런 결과인 동시에 의무로서 하나님이 직접 내리신 명령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사랑의 종교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과연 살아있는 나무가지가 줄기에 굳게 붙어 있듯이 그리스도와 밀접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와 더불어 이러한 삶을 사는 자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형제 사랑의 과실을 맺고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한다. 만약 성도라 하면서도 이러한 사랑 열매를 맺지 못하면 열매 맺지 못하는 쓸모없는 나무가지가 불 속에 던져지듯이 멸망 가운데 처하게 될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18-27절은 먼저는 주의 사후 주의 복음을 최초로 전할 주의 사도들에게 나아가서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재림이 있을 때까지, 이 현 세상의 권세자(엡 2:2)인 사탄이 핍박할 것이나 성도는 이 모든 것이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도중에 있는 것이며,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개략적으로 보여 준다. 실로 태초 원시 복음의 계시(창 3:15)에서 예언한 바대로 태초부터 줄곧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방해해 오던 사탄(the Satan)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그것은 결국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무는 격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리스도는 이를 기회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짓밟는 승리의 역사를 이루셨다(눅 10:18; 요 12:31). 이에 사탄은 이미 작정된 멸망의 심판을 최대한으로 지연시키기 위하여 세상 종말까지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을 때로는 핍박으로, 때로는 미혹케 함으로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를 당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에게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기도의 신앙생활로 무장하여 그리스도께서 예비하신 천국을 바라보며 소망을 가짐으로 세상의 일시적인 유혹과 핍박에 넘어지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는 올바른 자세가 요청되는 것이다(엡 6:10-20).
외울 말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 15:13,14)
참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의 새 계명 준수와 명령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핍박에 대한 인내의 교훈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22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또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24 내가 아무도 못한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25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15:1-8
예수님과 성도의 12대 관계
1. 구주(마 1:21)
2. 의사(눅 5:31)
3. 랍비(선생, 요 6:25)
4. 생명의 떡(요 6:48)
5. 생명의 빛(요 8:12)
6. 목자(요 10:11)
7. 하나님(요 10:30)
8. 포도나무와 가지(요 15:1-8)
9. 친구(요 15:14)
10. 맏형(요 8:29)
11. 신랑(엡 5:22-33)
12. 중보자(딤전 2:5)
도표-15:1-27 참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의 10대 유익
1. 열매를 많이 맺음(5절)
2. 능력을 부여받음(5절)
3. 밖에 버려지지 않음(6절)
4.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8절)
5. 그리스도의 제자가 됨(8-10절)
6. 기쁨이 충만케 됨(11절)
7. 주와 교제하는 친구가 됨(15절)
8. 구하는 것마다 다 받게 됨(16절)
9. 주의 택함 입은 자가 됨(19절)
10. 그리스도의 증인이 됨(27절)
도표-15:1 예수에 대한 묘사와 칭호들
본서 14권 사복음서 개론 특별자료 '예수 시리즈' 참조
보감-15:1-5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의 10대 능력
1. 주님을 지혜롭게 전할 능력(눅 21:15; 행 6:10)
2. 믿음의 열매를 많이 맺을 능력(요 15:5)
3. 다른 사람을 권면하는 능력(롬 15:14)
4. 시험과 유혹을 물리칠 능력(고전 10:13)
5.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할 능력(고후 1:4)
6. 사단을 대적하여 이길 능력(엡 6:11,13)
7. 다른 사람을 가르칠 능력(딤후 2:2)
8.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능력(딛 1:9)
9. 연약한 가운데서도 능력을 발휘할 능력(히 11:34)
10. 혀를 제어해 말로 실수하지 않는 능력(약 3:2)
원어연구- 15:2 깨끗게 하시느니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은 '카다이레이'로서 동사 원형인 '카다이로'의 남성 3인칭단수가 쓰였다. 동사 '카다이로'는 마음이나 양심 따위가 '청결한'(마 5:8; 딤후 1:3), 물이나 유리 따위가 흠 없이 '맑음'(계 21:18; 22:1)을 뜻하는 형용사 '카다로스'에서 유래하여 주로 죄인을 '정결하게 하다'(히 10:2). 또는 본절과 같이 '깨끗하게 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특별히 본절에서는 나뭇가지를 자르는 것에 사용되어 그 뜻은 나뭇가지를 '그가 쳐서 다듬다'라는 의미에서 깨끗케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번역으로서 대부분의 영역본들(NIV, RSV, Living Bible)은 '전지'(剪枝)하다' 즉, '나뭇가지를 쳐서 없애다'라는 뜻으로 본절의 '카다이로'를 번역하고 있다.
한편 공동번역은 본절의 '카다이로'를 '잘 가꾸신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번역은 곁가지를 쳐서 잘 다듬는 정도로 약간의 손질만 가하여 과실의 수확을 더 풍성히 하려는 농부의 의 도를 잘 드러내주는 번역이라 하겠다.
한편 본절 전반부에 나오는 '제해 버리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이레이'로서 이는 완전히 베어내어 없애버리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본절의 '아이레이'는 과실을 맺지 못하는 나무 가지 곧 거짓 신자는 필연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됨을 암시하는 반면에, '깨끗케 하시느니라'의 '카다이레이'는 과실을 잘 맺는 가지, 곧 참 신자는 오히려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 속에 있게 됨을 보여준다.
주요 주제-15:12-17 계명 준수에 관한 예수 교훈의 특징
막 12장 자료 노트 참조
도표-15:22 신약 원어로 살펴본 죄의 개념 의미
1. 하마르티아: 원뜻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상태를 가르키며, 죄, 과오, 범죄로 해석함
2. 파라바시스: 원뜻은 건너가다로서 선함에서 악함으로 건너가는 상태,
범법, 파괴, 범죄로 해석함
3. 파라프토마: 원뜻은 미끄러져 넘어가다로서 부주의, 과실로 인한 범죄를 가리킴,
불법, 빗나간 타락으로 해석됨
4. 아노미아: 올바른 법규를 알면서도 의지적으로 그것을 어기는 것을 가리키며
불법, 불의로 해석됨
5. 오페일레마: 도덕적으로 하나님께 빚지는 행위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
의무를 이행치 않음을 가리킴, 빚, 실수로 해석됨
6. 아디키아: 도덕적으로 불의한 성향을 띤 생활을 하는 상태, 나쁜 행위 등을 가리킴,
불의, 불공평, 사악함으로 해석됨
7. 아이티온: 법적인 의미에서의 범죄를 가리키며, 보통 죄, 고소 등으로 해석됨
8. 프로스콤마: ‘사람을 넘어지게 하고 그 발에 걸리게 하는 것이다’라는 뜻으로서
범죄, 실수, 거침돌로 해석됨
9. 스칸달론: 원뜻은 함정에 빠뜨리다. 장애물에 걸리다라는 뜻으로 덫, 올가미로 해석됨
보감-15:18-21 이 세상에 대한 성도의 10대 특징
1.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함(마 5:13,14)
2. 성도는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요 15:19; 17:14,16)
3. 성도이기에 세상에서 미움과 환난을 받음(요 16:33)
4. 성도는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으로 보냄 받음(요 17:8)
5. 성도는 이 세상의 것들을 본받지 않아야 함(롬 12:2)
6. 성도는 장차 세상을 판단할 것임(고전 6:2,3)
7. 성도는 세상 정욕을 버려야 함(딛 2:12)
8. 성도가 세상과 벗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임(약 4:4)
9. 성도는 세상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됨(요일 2:15)
10. 성도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인해 세상을 이김(요일 5:4,5)
보감-15:16 성도가 예수의 이름으로 힘쓸 것들
막 9장 자료 노트 참조
신학용어- 15:26 보혜사
요 14장 자료 노트 참조.
15:1-11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본장과 16장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다락방 강화(요 13:31-14:31)를 마치신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서 최후 기도를 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는 도중에(마 26:30,36) 제자들에게 주신 교훈을 소개하고 있다. 이 역시 예수의 수난 주간 중 목요일 밤에 있은 것으로 공관복음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본서만의 기사이다. 즉 예수의 '고별 설교'라고 할 수 있는 요 13:31-16:33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가르침과 교훈을 부각시켜 주는 본서 고유의 기사이다.
이 중 '내가 참 포도나무요'라는 예수의 자기 선언(1절)으로 시작되는 본장은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1-11절), 성도들 상호 간의 관계(12-17절), 그리고 성도들과 세상의 관계(18-27절)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차례대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하여 강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야말로 풍성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또한 서로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그 어떤 핍박에 대해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는 본문은 포도나무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그리고 성도들을 포도나무의 가지에 비유함과 동시에 성부 하나님을 포도원 농부에 비유하심으로써 상호 간의 연합 관계에 대하여 교훈하신 것이다(1,2절). 아마도 예수께서는 당시의 팔레스틴 지방에서 많이 재배되고 있던 포도나무와 관련된 비유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좀 더 명화하고 실감 있게 전달하려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농부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는 표현들은 구약 성경에도 종종 등장한다(시 80:8-13; 사 5:1-7; 렘 2:21; 겔 15:1-8; 호 10:1).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와는 달리 좋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량한 '들포도나무'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에 반해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비유하심으로써, 불순종과 타락의 모습을 보인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하나님께 바칠 새 이스라엘의 모범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요 2장 연구 자료,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선언' 참조).
그리하여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되는 성도들은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영적 열매들을 삶 속에서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그리고 아울러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영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가능하다는 교훈도 함께 가르치고 있다(3-8절).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그분과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야 할 것이다.
15:1 14장 마지막 절(31절)에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는 말씀으로 인해 본장과 16장(혹은 17장까지)의 말씀과 기도를 하신 장소가 어디인지에 대해 많은 추측이 있어 왔다(요 14:31 주석 참조). 그러나 우리는 예수께서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로 가시면서 주위에 있는 포도원을 보시고 이 교훈을 주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Lange, Godet). 그러나 혹자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도중에 있는 성전 문에 새겨진 포도나무 문양을 보고 이 교훈을 주신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Westcott). 그러나 14-16장을 '다락방 강화(講話)'로 묶어서 보는 전래의 입장을 따르는 것이 그중 가장 좋을 것이다(A.T.Robertson).
내가 참 포도나무요. - 본서에 나타나는 표적(sign)들은 단순한 이적(miracle)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나 구속사적 지위에 관한 보다 더 많은 계시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표적은 거의 매번 그 표적에 관한 담화(narrative)로 이어지고. 그 담화의 핵심은 '나는 ~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독특한 선언체 문장을 통해 그 의미를 보다 분명히 한다. 본서에서 이러한 전형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것은? ① 오천 명을 먹이신 표적(요 6:4-13), 생명의 떡에 관한 담화(요 6:26-71), '나는 생명의 떡이라'(요 6:35)란 선언 ②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요 9:1-7), 생명의 빛에 관한 담화(요 8:12-20), '나는 세상의 빛이라'(요 8:12)란 선언, ③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1-44), 양을 위해 생명을 주는 목자에 관한 담화(요 10:1-38),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란 선언 등이다. 위의 세 가지는 표적과 담화, 선언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는 경우이고 그 외에 본서에 나오는 나머지 네 개의 표적은(요 2:1-11; 14:46-54; 5:1-16; 6:16-21) 직접적으로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본서 전체에서 이와 같은 구조를 간접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그중 본절의 '나는 포도나무라'는 본서에 마지막으로 나오는 선언은 아마도 요 2:1-11에 기록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예수의 첫 표적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최초의 표적에서 나타났던 예수의 영광은(요 2:11) 그의 신성(神性)을 드러냄이요, 그 자신 안에서 참 포도나무인 이스라엘(시 80:8; 사 5:1-7)의 생명이 새롭게 탄생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이 표적 후에는 니고데모와 더불어 영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신 요 3:1-21의 담화가 곧바로 등장하는 것이다(S. Smalley).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포도나무로 비유한 것은 전형적인 유대 사상이다. 아울러 그 포도나무와 포도주는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의해 죄와 분리되는 새로운 세대(new age)를 상징하기도 했다(창 49:11; 민 13:23; 암 9:13 J.Jeremias).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마지막 '에고‥‥에이미' 선언을 통해 새로운 이스라엘로서 구속사의 주역의 역할을 맡게 될 제자 공동체의 생명력의 근원이 바로 자신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재인식시키는 것이다. 한편 '에고 에이미'의 형식 및 의미에 대해서는 요 6:35; 8:12; 10:7,11; 11:25; 14:6 등의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본문에 나오는 '참'(알레디네)은 '진실된'이란 뜻으로서 당시 백성들을 미혹하던 도적이며 삯군과 같던(요 10:10-12) 지도자들과는 구분되는 그리스도의 진실된 속성을 보여 준다. '요한복음의 7대 표적과 7대 선언'에 대하여는 요 2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삼위일체(Trinity)의 제 2위(位)되신 성자께서 제 1위이신 성부를 호칭하시는 고유의 명칭으로 엄격한 의미에서는 우리 인간들과 더불어 사용될 수는 없는 것이다(요 20:17 주석 참조). 한편 '농부'라는 단어는 '게오르고스'로서 본래 '땅을 경작하는 자'란 의미로 쓰이며 특히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포도나무를 손질하는 부지런한 일꾼을 뜻하게 되었다(Lagrange). 여기서는 포도나무되신 그리스도와 그 가지인 성도를 주관하시는 주인이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으로(요 5:17 참조) 하나님께서 좋은 가지를 북돋우어주시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쁜 가지를 없애버리는 심판자가 되심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이다.
15:2 이렇게 '나무'와 '열매', '가지' 등으로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비유는 후에 바울에 의한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도 사용되었다(롬 11:16-24). 즉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감람나무에 비유되었고 족장들(Patriarchs)은 그 뿌리이고 가지는 그 후손들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 가지에 접붙임 받은 돌감람나무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말한다. 이제부터 전개되는 예수의 포도나무 비유는 바울이 다루는 이러한 비유보다 더 심오하고 원초적인 그리스도와 그 자녀들의 관계를 묘사해 줄 것이다(Bernard). '예수의 비유의 이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마 13장 연구 자료를 참조하라.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 본절은 예수께서 자신을 포도나무로,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일차적으로 육신적 이스라엘 민족을 겨냥하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런데 본장에서는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며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라고 하는 사상이 특징적이므로,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란 원천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문제인 듯하다. 즉 '내게 있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에모이'는 '~ 안에'란 장소 개념의 전치사 '엔'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를 맺지 못할 수도 있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 문제 해결의 열쇠는 4절 이하에서 계속 나타나는 '거한다'(메노)는 동사가 가지고 있다(4절 주석 참조). 여하튼 본문의 중심 사상은 육신적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자랑만을 가지고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그 자체로서 쓸모 없을 뿐 아니라 뿌리에서 빨아 올리는 영양분을 쓸데 없이 소모함으로 열매를 맺는 가지에 있어서도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좋은 열매를 더욱 풍성케 하기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나 죽어 나무를 병들게 할 수 있는 가지를 잘라버려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영적인 열매를 맺지 않는 육적 이스라엘은 영적 농부되시는 하나님께서 가차 없이 그 모두를(판) 제거해 버리신다(롬 11:20,21). 한편 '제해 버리시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레이'는 본절 끝의 '깨끗케 하시느니라'(To Clean)의 '카다이레이'와 비슷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이러한 비슷한 발음의 두 단어를 사용해 언어 유회(word play)를 하는 것은 헬라어에 있어서 뿐 아니라 히브리어에 있어서도 더욱 효과적으로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즐겨 사용되는 수사법이다. 또한 후자의 '카다이레이' 동사는 이어지는 3절의 '깨끗하였으니'란 동일한 어근에서 유래한 낱말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단어를 미리 사용한 기법이기도 하다(Chain of ideas라고 함).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리라. - '카다이레이'는 신약에서 히 10:2의 종교적 청결을 의미하는 표현에서도 사용되며 70인역에도 간혹 나타난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필로(Philo of Alexandria)의 글에 본절을 연상케 하는 글이 나타나는데 즉 필로는 이 단어를 '가지 치다'(To prune)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순교자 저스틴(Jaustin Martyr)이 부연하는 대로 진정한 제자도(discipleship)를 위한 '고통스러운 훈련'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께서 20,21절에서 다루시는 제자들에게 닥쳐올 핍박을 미리 암시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Bernard). 하지만 이 '깨끗케 한다'는 뜻은 3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더욱 열매를 많이 맺게하기 위해 '깨끗이 손질하여 주신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현대어 성경, 천주교 200 주년 기념 신약성서, 현대인의 성경, 공동번역 등). 다드(C.H.Dodd)는 예수께서 사용하신 이와 관련된 용어들을('아이레이', '카다이레이') 반드시 포도원과 관련된 의미로 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지만 비유를 사용하셔서 말씀하시는 예수의 말씀이 대중의 쉬운 이해를 의도하는 것을 고려할 때 이곳에 나타나는 말씀도 위의 번역 성경들이 바라보는 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 포도나무를 깨끗케 함으로써 많은 수확을 거두려는 시도로 봄이 좋을 것이다.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 '너희는'(휘메이스)은 1,2절의 포도나무의 비유가 제자들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보여 준다. 또한 '내가 일러준 말'이란 몇몇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2절에서 '예수가 선언하신 말씀'만을 의미하는 것은(Cyril of Alexandria, Augustine, Schlatter)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말'이 비록 단수(로고스)로 표현되었지만 한번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 오신 주님의 모든 말씀 사역을 표현하는 대표 단수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서(요 3:34; 5:47; 12:48) 이미 제자들은 깨끗하여 질 수 있었던 것이다(Hendriksen. Brown, Bemard, Morris). 한편 바울도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서 디모데에게 보낸 첫째 서신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고(딤전 4:5) 말한다.
한편 '이미 깨끗하였으니'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완전한 성화(Sanstification)에 이르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justfication by faith)로서 거룩하다 인정함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다(롬 5:1). 즉 제자들은 '무릇 내게 있어도 과실을 맺지 않는 가지'(2절)들과는 다르게 이미 깨끗함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점차적인 깨끗하여짐( )의 과정을 거처야 한다. '칭의'와 '성화'에 대해서는 그랜드 종합 교리의 구원론을 참조하라.
15:4 내 안에 거하라. - '거한다'(메노)는 단어는 본장의 핵심적인 단어로 그리스도와 그의 자녀 들 간의 연결되어짐이 필연적으로 생명에 이르는 유일한 길임을 묘사하는 용어이다. 육적 이스라엘인 속에 그리스도가 머물지 않음으로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제함 받는(2절) 이유도 바로 이 '영적 거함'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요한은 이 표현을 그리스도와 신자와의 관계에 자주 사용하고 있으며(요 6:56; 요일 3:24; 4:13,15,16) 본장에서도 참 성도의 필수 조건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10절까지 계속해서 거의 매절에 이 단어를 쓰고 있다(5,6,7,9,10절; 5절에서 개역성경이 '있으면'이라고 번역하는 원어도 역시 '메노' 동사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 말에 이어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구원 과정에서 하나님다 인간의 행동이나 결심이 더 우선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죄인의 마음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하는 분은 늘 성령이시다(요 3:3,5-8). 성령으로 난 사람이라야 그리스도 안에 거할 능력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역사 이전에 사람이 이루어야 할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Hendriksen).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원문에는 이 구절도 '내 안에 거하라'에 연결되어 부정과거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즉 '또한 나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가 직접적인 문자적 번역이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의미를 캐기 위해 '내 안에‥‥거하리라'에 대해 다양한 번역이 시도된다. ① '내가 너희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는 내 안에 거하라'(C.K.Barrett). ②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보리라' 즉 '내 안에 거하라 그러면 내가 너희 안에 거할 것이라'는 뜻으로 대부분의 번역 성경들이 취하는 해석이다(L.Morris). 여기서 ①의 해석이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것이라면 ②는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할 인간의 책임에 의미를 부여한 해석이다. 한편 그저 문법적인 직역을 살려 '내 안에 거하라. 그리고 나는 너희 안에 거한다'고 번역하는 것도 이어지는 5절에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라는 표현과 요 6:56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리라'라는 구절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요 14:20 참조).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도 그러하리라. - 그리스도 안에 거함이 없이 삶의 열매를 맺으려 하는 자는 포도나무에서 잘라져 영양을 공급 받지 못해 생명이 다한 가지가 포도 열매를 맺으려는 것과 같이 무모한 것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이야 말로 온전한 성도의 삶이고(롬 3:24; 갈 2:20; 3:28; 골 1:19)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 입어야만 온전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갈 5:22,23).
15:5 본절에서 예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라는 '에고 에이미' 선언체 형식을 다시 한번 반복하시며 4절까지의 언급을 정리하고 계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 여기서 예수께서는 1절과 다르게 '너희는 가지니'라는 보완적 언급을 첨가 하신다. 주님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실 때 그 안에 거해야 할 제자들은 당연히 '가지'(클레마)임을 밝힘으로써 성도들이 예수께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내 안에 거하는 자 그리고 나도 그 안에'이며 개역 성경 번역은 이를 의역한 것이다. 한편 4절 주석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요한에게 있어 '거한'(abiding)이란 단어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고 폭넓은 것으로 그가 쓴 서신서와 연관해서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교훈을 준다. 즉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람의 외적 표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의 여부로 나타나고(요일 3:24) 아울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는지의 여부로도 확인된다(요일 4:16),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하는 것'이다(요일 2:6). 즉 본장에서 예수가 말씀하시는 대로는 '열매를 맺는 것'이다(2절). 결국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완전히 이룬 자의 삶은 '습관적인 범죄를 계속하지 않는 것'(요일 3:6)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러한 자야말로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므로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담대함을 얻어 부끄러워하지 않는 자인 것이다(요일 2:28; 4:17). 한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상호교차적인 언급은 요한의 특징적인 표현으로 이 신비한 연합의 관념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있고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요 14:10,11) 말씀하신 성부와 성자의 연합에 근원적으로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예수께서 하나님 안에 계시듯이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주권과 섭리 아래 거해야 하고 하나님이 예수 안에 계시듯이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계 3:20)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모셔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한 연합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그의 자녀들인 우리가 하나되는 영광으로까지 확대된다(요 14:20; 17:21,22). 초대 교회는 이러한 하나됨을 성부와 성자와 지체(肢體)된 모든 성도들 간의 친밀한 교제의 개념으로 확대 적응하였다(고전 1:9; 요일 1:3).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의 도덕적 부패함과 영적 무능력은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선행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선한 삶의 열매를 맺을 능력을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뿐이며(빌 4:13) 구원받은 이후의 모든 바람직한 육체적인 삶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갈 2:20). 이런 맥락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행위가 죄라고 말한 것이다(롬 14:23). 하지만 원죄(原罪)의 교리를 부인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강조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신학적 입장이 있었다. 그것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로 A.D. 5세기 초 영국 수도사였던 펠라기우스(Pelagius)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엇을 할 수 없다고 명령하시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선이나 악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자유는 범죄한 아담에 의해서도 상실되지 않았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거스틴(Augustinus)은 인간이 자기를 구원할 수 있고 은혜는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이며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에 배치된다고 신랄히 비판하였다. 이러한 펠라기우스주의는 412년과 418년의 에베소 제 2차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한편 427년에 발간된 어거스턴의 저서에 나타나는 예정론에 반발해서 예정론이 전도의 목적을 포기하고 신자들의 도덕적 수준을 저하시킨다고 주장한 자들이 있는데, 이들의 주장은 반(半) 펠라기우스주의(semi-Pelagianism)라고 한다. 이들 중 탁월한 대변자였던 파우스투스(Paustus)는 죽음이 타락의 결과이고 자유 의지는 소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자유의지는 완전 소멸된 것이 아니라 다만 약화된 것이고 인간은 그 남아 있는 자유 의지를 힘입어 구원에의 첫 발을 내디딘다고 주장했다. 이들도 역시 예전론은 단호히 거부하고 펠라기우스주의와 거의 유사한 입장을 가진 것이며 529년에 열린 오렌지 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 라'고 선언하시는 본절 또한 펠라기우스주의나 그 유사 주장들을 철저히 반박한다.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 농사를 지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적으로 말라진 가지가 잘려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버리워진 가지가 마른다고 도치된 순서로 말씀하신다. 이렇게 도치된 상징 구조(the inversion of the symbolic pattern)가 등장하는 것은 예수께서 비유를 말씀하실 때 자주 사용하시던 '충격적 전환점'을 이곳에 설정하셨기 때문이다. '충격적 전환점'이란 청중들에게 진리를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시면 서도 기존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포인트'를 설정하셔서 그 비유의 핵심으로 삼는 예수님의 독특한 '어법'이다. 예를 들면 '포도원 품꾼'의 비유에서(마 20:1-16) 나중 온 자에게 '먼저'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의 행위는(똑같은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보다 더욱) 당시 청중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충격을 주는 전환점이었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이러한 충격을 통하여 그 비유의 핵심인 '이와 같이 나중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리라'(마 20:16)는 교훈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도(눅 10:30-37) 앞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났던 자를 지나쳤으므로 당시 유대인들과는 상종도 않던 사마리아인은 당연히 지나가야 할 것이라고 청중들은 이해했으나 예수께서는 그 사마리아인이 선행을 했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충격적 전환점을 삼으셨다. 그리고 그 포인트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사마리아인도 하는 것같이) 하라'(눅 10:37)는 교훈을 도출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관점에서 이 포도나무 비유의(1-11절) 핵심은 바로 본절의 '충격적 전환점'에서 찾을 수 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그 안에 이미 거하는 자들로서 밖에 버리워 말라진 자들이 아니다. 단지 '말라진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으므로 열매를 맺지 못하여서 '밖에 버리웠기 때문에' 그렇게 말라져 그리스도와는 관계 없이 된 것이다. 한편 이 포도나무 비유는 그렇게 버리워진 자들이 아닌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그러나 '거하라'고 계속해서 명령형의 말씀이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어진 삶에서 가져야 할 제자들의 책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4,7,9,17절).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 '버리워'와 '말라지나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는 각각 '에블레데'와 '엑세란데'로서 모두 부정과거 시제로 되어 있으며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들이 있다. ① 부정과거 시제는 심판의 즉각성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주장(W.Bauer). 즉 예수 안에 거하지 않는 그 순간에 이미 그 사람은 밖에 버리워져서 말라지는 결과에 이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의미. ② 예기적(豫期的) 빈사법(賓辭法); (결과를 나타내는 말을 미리 쓰는 기법)으로 사용된 부정과거(proleptic aorist)로서 버리워 말라진 불신자들의 미래가 참담할 것임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주장(Lagrange; 이런 견해를 반영해서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역 성경 벌게이트[Vulgate]는 이 동사의 시제를 미래로 표현함). ③ 격언적인 부정과거(gnomic aorist)로 어떤 시대에나 진리인 사실을 표현했다는 견해(Debrunner). ④ 포도원의 정경을 묘사했다는 단순성에 착안해 '이미 떨어져 말라진' 가지를 예수께서 길을 걸으시며 목격하시고 부정과거로 표현했다는 견해(R.Brown), 이 모든 해석이 가능하나 ③의 견해가 보다 타당한 듯하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 심판을 묘사하는 듯한 동사가 나온다는 점에 착안하여('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이 부분과 공관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에서(마 21:33-46; 막 12:1-12; 눅 20:9-18) 소산(所産)을 받으려고 주인이 보냈던 '종들'을 학대하는 악한 농부를 멸절시키는 비유를 연상하는 학자도 있으나(Bernard) 이는 역사적 종말에 있을 심판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교제가 단절된 자들이 현재에도 심판 가운데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로 보는 것이 좋다.
불. - 마 3:10과 다르게 정관사가 붙은 것은 예수의 비유에서 흔히 나타나는 한정적 관사(definite article)의 사용일 수도 있고 유대 묵시 문학에서 잘 알려진 종말론적인 심판 때 등장할 불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한편 이 불에 대해 예수의 일행이 다락방에서 감람산으로 가는 도중에 있었던 포도원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난 후 그것들을 모아 사르는 장면을 보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Westcott, Lange).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 이제까지 계속되었던 직접적인 포도나무에 대한 비유 대신에 지금부터는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보다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문제를 교훈하시려는 예수의 의도가 보인다.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제자들 속에 예수 자신이 거해야 한다고 거듭 말씀하셨다(4,5절; 요 6:56; 14:20). 그러나 여기서는 예수께서 자신의 '말씀'이 제자들 속에 거해야 한다고 하신다. 이처럼 예수 자신과 그의 말씀이 상호 교차적으로 언급된 것도(요 6:35,63; 14:23) 예수가 성육신 한 계시(the incarnated revelation)이심을 보다 분명히 보여 준다(요 14:13 주석을 보면 예수 자신과 그의 '이름'에 관한 상관성을 참고 할 수 있다). 한편 말씀으로 이 땅에 임하신 바로 그 예수께서는 지금까지도 그의 성도들 속에 인격적인 말씀으로 현존해 계신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이 구절을 포함하여 마 7:7,8의 '구하라‥‥찾으라‥‥두드리라'는 말씀과 막 11:24의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그대로 되리라'는 말씀들은(그 외에도 마 18:19; 눅 11:5-13; 16절; 요 14:13; 15:23, 24에 유사한 말씀이 나옴) 문자적으로만 이해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본절에서 가르치신 대로 구했으나 응답되지 않는 많은 경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해답으로 약 4:3의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를 제시하는 해결책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약 4:3은 예수께서 교훈하신 기도에 대한 하나의 '조건'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러한 조건이 붙은 것으로서 본절에 나오는 예수의 기도에 대한 교훈이 해석 가능하다면 이 교훈은 그의 말씀 가운데서 자주 나타나는 '과장법적 표현'(Overstatement)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러한 과장법적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아마도 어떤 사실을 절대적으로 표현하고 그것에 '내포된 조건'은 청중들의 것으로 남겨두는 셈족어 고유의 어법(語法)으로 설명될 수 있다(G.Caird). 즉 예수께서는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이미 아는 것을 전제하고 '잘못된 기도의 방법'이나 '기도해서는 안될 목록'은 생략하신 것이다. 즉 당시 제자들은 이러한 생략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과장법적 표현 양식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하라. - 16절을 참조하라.
15: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 열매를 맺는 삶의 결과가 묘사되어 있다. 즉 성도의 열매 맺는 삶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한편 '영광을 받으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독사스테'( )는 부정과거로서 개역성경과 같이 '영광을 받으실'으로 번역하며 미래에 있을 결과를 미리 표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Bernard). 또한 열매 맺는 삶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에 귀결된다는 객관적 진리를 나타내기 위해 부정과거를 사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6절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주석 참조). 따라서 성도는 계속적으로 열매 맺는 삶을 살아야 하고 이는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한편 본문에 '영광을 돌리다'(독사조)라는 단어는 본서에서 요 7:39에 처음 언급된 이래 23회나 나타나는 본서의 특징적인 단어로(누가복음에 9회 외에는 신약에 더 이상 없음) 요한은 이 단어를 궁극적으로 예수의 십자가 사역에로 귀속시키고 있다(요 17:1, L.Morris). 즉 요한은 본서에서 이 단어의 빈번한 사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성도의 모든 삶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 돌림에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헬라어 사본들에는 '되리라'에 해당하는 '기노마이' 동사가 다르게 나타난다. 즉 '거네스데'라고 하여 부정과거로 된 사본(B, D, L, X, θ, p66) 등이 있는 반면에 '게네세스데'라고 미래로 된 사본(H, A, K)도 있다. 한편 후자의 입장을 취한다면 본문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이라는 가정법 구문과 잘 어울리는 미래의 의미 즉, '내 제자가 될 것이라'가 되기 때문에 이를 취하는 것이보다 자연스러울 듯하다(Bernard). 그런데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과 제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행동이 아니다. 순서가 있다면 다만 전자가 후자에 논리적으로 앞설 뿐이다. 따라서 열매를 많이 맺으면 제자가 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은 이미 자신이 제자가 되었음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러 후자의 의미를 강조하여 제자가 되어질 일이 중요하다는 주장도 있으나(W.Hendriksen) 제자가 되는(becoming) 것과 제자인(being)것은 예수 안에 머무는(remaining) 것과 존재하는(being) 것이 차이 없듯이 거의 같은 의미이다(Brown).
15: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 '것같이'로 번역된 헬라어 접속사는 '카도스'인데, 이것은 요한에게 있어서는 단순히 비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표시하는 성격을 지녀 '~인 까닭에'(in as much as)라고 번역될 수 있다(Blass and Debrunner). 예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예수가 그 제자들을 사랑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신적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여기서 사용된 '사랑'이 신적 사랑을 나타내는 헬라어인 '아가페'란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9,10,13,17).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 시제가 부정과거로 표현된 것은 예수께서 인간들을 위해 그 자신을 주신 사랑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부정과거는 그리스도의 절대적이며 지속적인 사랑의 행위를 표현하기에 합당한 시제이다(R.Brown).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나의 사랑'이란 '테 아가페 테 에메'로서 직역하면 '내 것인(소유인) 사랑'이 되는데, 이것은 소유의 주체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요 3:29; 8:16; 14:15). 비록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사랑이 배제되지는 않지만(요 14:15)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제자들에 대한 '신적인 아가페 사랑'이 예수에 의해 행해짐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거하라'는 부정과거 명령형이 쓰여진 것은 제자들이 예수 안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는 당위성을 전제한 것으로서 윤리적이고 영적인 교훈에 철저히 순종하라는 권위적인 명령이다(Abbott).
15:10 앞절에서 그리스도 안에 '거함'을 그의 '사랑' 안에 거함으로 부연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본절에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지적하신다. 즉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을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구상적(具象的, 구체적 형체를 갖춘) 개념으로 확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구상성(具象性)은 히브리적 사유(恩惟)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이다(Boman).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 요한은 예수께서 아버지의 말씀을 완전히 순종하신 것을 여러 차례 기록했다(요 8:29; 10:17,18; 12:49,50; 14:31; 17:4). 여기에서도 예수께서는 그가 이 땅에서 살아오신 완전한 순종의 일생을 회고하시며 '지금까지 그 모든 것들을 지켜왔다'는 의미로 '테테레카'라는 완료시제를 사용하여 말씀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최후의 순종인 십자가에로 자발적으로(요 18:8) 나가시는 일을 남겨 놓으신 상태에서 자신의 과거를 요약하여 보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을 제시하신 것이다(요 14:15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 제자들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계명, 즉 사랑에 대한 가르침을 지킴으로 그들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증거할 수 있다(요 14:15). 이렇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과의 밀접한 관련은 요한이 일관되게 강조되는 중요한 사상이다(요 14:15,21,23,24; 요일 2:5;5:3).
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 문자적으로는 '이것들을'이지만 바로 전에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10절)을 말한다고 보는 것이(Bernard) 이후 나오는 예수의 언급과 비교하여 자연스럽다(12절 이하). 하지만 9절에서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하시는 말씀이 본절의 '기쁨'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므로 9절을 포함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Brown).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 '내 기쁨'이라는 표현에 대해 예수께서 자주 사용하신 히브리 인사 '샬롬'과 연관해 이해하기도 한다(요 14:27).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 '샬롬'을 말하심으로 그들로 하여금 기쁨에 넘치게 하셨던 것이다(요 20:19-21). 또한 '내 기쁨'이란 '헤 카라 헤 에메'로서 직역하면 '내 것인 그 기쁨'이라는 강조적 의미를 가지는데(9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주석 참조). 그리스도 자신의 고유하고 절대적인 신적인 기쁨을 표현하는 듯하다. 이 기쁨이 예수의 가르침과 계명을 좇아 사랑 안에 거하면(9,10절) 제자들에게도 충만한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다.
15:12-17 사랑의 새 계명
앞 단락(1-11절)에서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예수님 자신과 성도들의 연합관계에 대해 언급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본문에서는 성도들 상호 간의 마땅한 관계와 책임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다. 그런데 이러한 성도들 상호간의 관계는 이미 요 13:34,35에서 소개된바 있는 예수님의 새 계명,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는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예수님의 사랑을 근거로 하고 있다(12,13절). 이는 곧 진정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여 그분과 생명적 연합을 이룬 자들은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즉, 만약 스스로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로 여기면서도, 주님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모본을 보이신 사랑을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 예수님 안에 거한 자가 아니라는 의미이다(요일 4:12).
한편 예수께서는 성도들이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함을 교훈하셨을 뿐 아니라 그러한 자들이 누리게 될 축복까지 약속하셨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어 하나님의 영적인 비밀들을 깨달을 수 있는 축복을 가리킨다(14,15절). 진실된 사랑은 이처럼 위대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심지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친구'의 신분으로 연합시키는 일조차 가능하게 만든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던 우리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국의 상속자들이 될 수 있도록 만든 것도 실상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롬 8:15-17; 엡 2:3,4).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함으로 성도들이 거하는 곳곳마다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다(엡 5:1,2). 바로 이것이 우리를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바른 길이다(16,17절; 엡 4:1).
15:12 그리스도와 제자 간의 관계가 포도나무의 비유로 설명된 후(1-11절) 이제는 제자들 간의 사랑의 관계가 다루어진다(12-17절). 놀랍게도 친구 간의 사랑이 언급되는 이 부분에서는 예수께서 자신과 제자들 간의 관계를 친구 관계로 규정하신다(13,14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니라. - '내 계명'이란 역시 요한이 독특하게 표현하는 계명의 원소유자인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적 용법으로 두개의 정관사를 사용하고 있다(9,11절 주석 참조). 또한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이 계명은 요 13:34에서 말씀하시는 새 계명을 말한다. 옛 계명의 요약 두 가지 중 하나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 19:18)이라면 이 새 계명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3:34)는 것이다. 즉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들 간의 헌신적이고 신적인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의 모습은 결국 그리스도의 제자들임을 알려주는 표지(mark)가 되는데(요 13:35), 놀랍게도 이 사랑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극단적이고 초월적인 사랑을 말한다(13절; 요 15:13; 요일 3:16). '계명 준수에 관한 예수 교훈의 특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막 12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사랑이 모든 친구 관계에서 우정의 모형이 될 수는 없다. 즉 본문은 단순히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것만을 통해 완전히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랑은 그리스도로부터 기원해야만 한다. 즉 무한하신 사랑으로 인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해서만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자기희생적 사랑이 진정한 가치를 발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원수 관계였던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과 우리 인간 간의 화목의 다리(橋)를 놓으시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셨기 때문이다(롬 5:10). 따라서 이 사랑을 전파하며 실천하는 것만이 이 친구를 영적으로 구원하는 결과로 이끈다. 한편 '위하여'라는 전치사 '휘페르'는 공관복음서에서는 성찬의 문맥에서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 흘리는 언약의 피'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도 사용되었다(막 14:24; 눅 22:20).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공관복음을 염두에 두고서 예수의 최후의 만찬 장면을 생략하는 요한은 이곳에서 그에 상응하는 예수의 말씀을 통해 예수께서 죽으셨고, 그 죽음이 언약적 대속의 제사임을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15:14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 본절에서 밝히는 그리스도의 친구가 되는 자격은 단순히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 19절에서는 신적인 선택이 강조되어 ‘너희가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라고 표현되어 있다(W.Hendriksen). 이런 측면에서 요한은 본장을 통해 인간의 책임과 신적 선택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인 공동사역, 혹은 신인 협동설(Synerprism)적인 논리는 어거스틴(Augustinus), 칼빈(J. Calvin) 등의 신학자들에 의해 꾸준히 주장되어온 인간의 전적 부패와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위배되는 듯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 하나님의 인격적인 행위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응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롬 10:10,17) 이해할 때 이러한 논리는 쉽게 수긍할 수 있다(삿 6:34; 대상 28:10; 느 4:9). 한편 '친구'라는 헬라어는 본절 뿐만 아니라 13-15절에서 모두 '필로스'가 사용되고 있다. 약 2:23에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친구라고 칭찬할 때에도 이 용어가 사용되었으며 요한에 의해서는 요한삼서 1:15에서 '사랑받는 자'라는 의미로 이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친구 관계의 우정을 말할 때 '필로스'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지만 모든 경우 그렇게 확연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죽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예수의 친구('필로스')라고 언급되지만(요 11:11) 예수께서는 그를 사랑함을 나타낼 때 '필레인'으로 (요 11:3), 또한 '아가판'으로도 표현하심으로써 (요 11:5) '필로스'와 '아가페'를 혼용하셨던 것이다. 또한 사 41:8에서 '나의 벗 아브라함'이라고 언급된 '벗'이 칠십인역(LXX)에서 '필로스' 대신에 '아가페'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필로스'와 '아가페'를 경직되게 구분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한편 이 두 용어의 미묘한 구별에 대해서는 21:15-17의 주석을 참조하라). 따라서 본절에서의 친구란 말은 우정을 나누는 사이뿐만 아니라 신적 사랑을 베푸는 대상이란 의미도 지닌다.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 '둘로스'( )라는 헬라어는 사실상 두 가지 개념을 가진다. 하나는 자유를 완전히 상실한 '노예'(Slave)의 뜻이 있는 반면, 다른 하나는 주인의 집에서 대물림하며 보다 자유로운 여건에서 청지기 노릇을 하는 '종' 혹은 '하인'(servant)의 개념이 있다. 어떠한 의미를 취하던 본절은 과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처지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예수께서 '종'을 '친구'와 비교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이 친구와 다른 점은 주인이 시킨 일에 대해 두려운 마음으로 무조건 열심히 이를 행할 뿐이지, 그 자세한 계획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친구는 주인의 좋은 의논 대상임과 동시에 맡겨진 일에 대해 친구를 도운다는 심정으로 기쁨을 가지고 행한다.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 '알게하였음이니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그노리사' 는 부정과거 시제로 되어 있는데, 아직 예수께서 모든 사건을 다 알려주지 않으셨음에도 이처럼 부정 과거 시제가 사용된 것은 예수의 말씀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말씀 사역의 완전성은 요 16:12에 의하면 그 양에 있어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즉 예수께서는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며 그 미완성의 말씀 사역을 진리의 성령의 활동이 있을 때까지 유보하고 계신 것이다(요 16:13).
15:16 너희가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우크 훼메이스 메 엨셀렠사스데'인데, 이는 '나를 택한 것은 너희가 아니요'라고 번역되어 선택의 주체나 대상을 강조하는 좋은 강조형 구문이다(Morris). 또한 개역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알'('그러나'에 해당하는 '알라'의 단축형) 또한 강조적인 반의(反意) 접속사로서 상반되는 중요한 사실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을때 '강조구문-알다('알라')+ 강조 구문'의 형식을 사용한 것은 요한에게 있어 특징적인 문체이다(요 1:8). 이렇게 선택에 있어 그리스도의 주권이 강조된 것은 14절에서 제자들의 자발적인 행동이 강조된 것과 더불어 하나님 편의 신적 선택이 중요함을 가르쳐 준다. 인간 사회에서의 친구는 일반적으로 서로 선택하는 것이 특징이지만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선택의 일방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근거가 결코 인간편에 있을 수 없고 항상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19절; 엡 1:4; 요일 4:10,19 참조).
이는 너희로 하여금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 ‘가서’에 해당하는 '휘파게테'라는 헬라어 단어가 셈족어에 있어서 흔히 나타나는 중복어 법적 표현(pleonastic expression)을 도입한 것으로 뒤에 나오는 '열매를 맺게 하고'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별다른 의미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R.Bultmann), 세계 선교를 향한 사도직 위임(apostolic commission)이란 큰 의미를 지니므로 그 중요성을 결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눅 10:3에서 이 단어는 70인의 전도인을 파송하는 기사에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Barrett, Lagrange, Brown). 한편 본절에 '세웠다'로 번역된 '에데카'라는 주동사 이후에 ①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와 ②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란 두개의 절(節)이 뒤따라 와서 동일하게 주절의 원인절이 된다. 하지만 그 의미를 고찰해 볼 때 ②절은 ①절에 논리적으로 종속되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주시는 조건이 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 예수의 마지막 강화(Last Discourse)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 매우 강조되며 그 양상이 다양하다. 그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② 아버지께 예수 이름으로 구하면 예수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주시리라(본절; 16:23). ③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라(7절; 요 16:24). ④ 자유스러운 형태로 위의 틀을 벗어난 것들(요 16:26; 요일 3:21,22; 5:14,15). 여기서 ①,②는 '무엇이든지', '만일' 같은 조건을 붙이고 있으며 ④도 넓은 의미로 그렇게 볼 수 있고 ③은 명령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응답에 있어서는 '주시리라', '시행하리라', '받으리라'등 다양한 단어의 형태가 사용되고 있다. 또한 공관복음서에서도 이러한 요한의 표현과 유사한 구절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마 7:7,8; 18:19; 21:22; 막 11:24; 눅 11:9,10). 기도에 대해 이렇게 다양한 표현들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 성도들은 고난에 직면해 있었고 이의 극복으로 기도가 필요함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5: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 본절은 1-12절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결론짓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Meyer). 그러나 동시에 이는 이어 등장할 성도가 당할 고난을 염두에 두고 비록 고난 가운데서도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함을 서론적으로 강조하는 기능도 지녔다고 볼 수 있다(Brown).
15:18-27 세상의 핍박 예고
앞단락(12-17절)에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자들인 성도들 상호 간의 마땅한 관계 및 책임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이제 그에 이은 본문은 예수께서 세상이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을 미워하리라는, 즉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리라고 예고하시는 부분이다. 이는 곧 어두움이 및을 싫어하여 대적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요 1:5,9-11). 먼저 예수께서는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핍박당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다(18-25절). 즉, 세상이 성도들을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기 때문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다. 사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아니라면 결코 세상은 성도들을 미워하거나 핍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러한 예고를 하시는 것은 성도들이 때때로 무고한 핍박을 세상으로부터 당하게 될지라도 결코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도록 미리 일러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핍박을 당하게 될 때 오히려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다(마 5:10-12; 고후 12:10).
한편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받을 때, 보혜사 곧 진리의 성령으로 하여금 성도들을 도우며 보호하게 만드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26,27절). 즉, 비록 온 세상이 성도들을 에워싸고 대적할지라도, 장차 보혜사 성령께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면서 도와주실 터이니 아무 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대적들의 손에 체포당하여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때 뿔뿔이 흩어져 도망쳐 버렸던 제자들(마 26:56; 막 14:50)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완전히 변화되어, 그 어떤 위협과 박해 앞에서도 담대한 자세를 잃지 않았던 것으로써 분명히 입증되었다(행 2:1-4; 4:13-22). 여기서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에 대해서는 요 14장 자료노트를 참조 하라.
이상에서 보듯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증인으로서 언제나 담대한 삶을 영위하느냐 아니면 세상의 핍박을 두려워하여 그저 형식적이고 무기력한 생활을 이어 가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성령의 능력을 힘입느냐 아니냐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성령꼭 권능을 힘입음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고 선언하신 것처럼 세상의 어떤 핍박과 조롱에도 굴하지 않고 십자가의 파수꾼으로 더 높이 주의 이름을 세상에 외치는 증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15:18 공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감람산 강화에서도 이 부분(18-27절)과 유사한 내용의 말씀이 나타난다(마 24:9; 막 13 9-13; 눅 21:12-19). 이러한 사실은 성도가 세상에서 핍박받는 것은 이미 예언된 바이며 이를 죽음의 권세까지 극복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이겨야 함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 '세상'이란 단어의 헬라어 '코스모스'는 호머(Homer)나 플라톤
(Pluton)에 의해 고대 헬라어에서 본래 '질서'란 뜻으로 사용되었으며 본서에서는 우주(요 17:5), 인류(요 3:19; 16:21), 무리(요 7:4; 14:22) 등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하지만 본절에서는 '악의 영역' 혹은 '악한 무리들'이란 뜻으로 하나님에 대해 공공연하게 대적하는 세력, 특히 요한의 시대에는(1세기 말)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폭력적인 유대인들을(요 16:2 주석 참조) 말하는 듯하다(요 7:6; 8:23; 17:9).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 대한 악의 세력의 증오는 요한의 시대 뿐만 아니라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될 것이며 특히 악의 세력이 득세할 종말의 때에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벧전 5:8).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 '너희보다 먼저'(프로톤 휘몬)에 대해 많은 주장이 있다. ① 시간성을 말하기 보다는 순위에 있어 우선성을 강조하는 표현(Calvin). 즉 제자들이 미워함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악의 세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미이다. ② 시간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표현(Moulton, Milligan). 즉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께서 그날 밤 체포되며 다음 날 죽게됨으로 후에 고난을 받게 될 제자들보다 먼저 미워함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다. ③ 시내사본은 '휘몬'을 빠뜨리고 있는데, 이것은 '처음에'라는 뜻을 나타내기 위한 서기관들의 문법적 개선(Scribal grammatical improvement)으로 보임(Brown). ④ 단순한 시간의 우선성뿐만 아니라 본질적 특성에 있어서도 우선함을 강조하는 표현(C.H.Dodd). 즉 성도에 대한 모든 고난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받은 고난의 연장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정확히 무엇이 옳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워한'이란 동사(메미세켄)는 완료시제가 사용되는데, 이것은 제자들에 대한 세상의 미움(현재시제)보다 더 앞선 시간성을 말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예수에 대한 세상의 미움이 지속적임을 반영한다(Morris, Brown). 또한 '나를'(에메)이란 표현도 형태에 있어서나 그 위치에 있어서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을 강조하는 표현이다(Morris).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 제자들의 영적 근원이 세상이 아님을 강조하는 본절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하는(엡 2:2,3) 사도 바울의 인간관과는 조화되기 어려운 듯하다. 그러나 바울은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은 마귀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음을 밝히는 것이며,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에 참여하도록 선택된 그의 자녀들은 비록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세상에 속한 것은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다(요 17:14-16), 한편 '속하였으면', '속한'이란 표현에는 '엨크'란 전치사가 결합되어 사용되었는데, 이 전치사는 어떤 집단의 구성원을 의미하거나 근본적 관계를 가졌음을 나타내는 기능을 지닌다(M.Zerwick). 즉 본문은 세상에 소속되었을 뿐 아니라 그 근본 뿌리도 세상에 두고 있음을 부정하는 의미로 이 전치사가 사용되었다.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된 이유를 보여준다. 그 이유는 제자들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어두운 세상에서 그들을 택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세상에서'라고 번역된 부사구의 헬라어는 '엘크 투 코스무'로서 이것은 '세상으로부터'(from the world)라고 번역해도 좋다. 이런 경우 '엨크'는 전치사가 아닌 부분(部分)을 나타내는 말(partitive)인 것이다(D.Heinz).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는 순교 당하기 위해 잡혀 가던 중 틈틈이 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세 번째 서신 3절)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세상을 설득하는 때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미움 받을 때에 위대한 것이다." 그의 진술은 아마도 주님의 이 말씀을 염두에 둔 듯하다. 세상이 이렇게 제자들을 미워하는 이유는 기독교인들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은혜가 불신 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Ryle), 세상보다는 훨씬 높은 삶의 표준을 실천하기 때문이다(Barclay).
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 이 구절은 요 13:16의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라는 말씀을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조금 전에 말씀하신 15절도 염두에 두고한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요 13:16은 종이 아닌 주인이 취해야 할 겸손의 행동을 강조함에 있으나 본절은 주인의 고난 받는 운명에 종이 동참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사실을 표현한다. 내용은 그렇게 차이가 있을지라도 주인을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종의 역할을 표현하는 형식은 동일하다.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 원문은 '에이 에메 에디옥산'으로 나와 있는데 이는 동일한 철자 '엡실론'(ε)으로 시작하는 언어유회(word play)로 볼 수 있으며 문장의 형태는 18절과 같은 조건문이다. 예수께서는 이미 안식일 문제로 인해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으셨다(요 5:16). 하지만 이곳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보다 더 일반적인 의미로서 예수를 핍박하는 주체는 악이 지배하는 '세상'(헬, 코스모스)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에디옥산'이 복수인 것은 요 5:19에서와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불특정 다수를 나타내기 때문이다(Bernard). 따라서 이 부분은 '세상이 나를 핍박하였은즉'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좋다.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 예수에 대한 세상의 핍박은 동일하게 그의 제자들에게도 행해질 것이다. 이를 나타내기 위하여 이곳에 미래 시제가 사용되지만 이 부분에서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예수께서 당하셨고 또한 당하실 핍박과 제자들이 당할 핍박이 근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다. 행 9:4에서 예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핍박이 예수가 당한 핍박의 패턴을 답습한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던 그 핍박이 곧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핍박이라는 사실을 예수께서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지, 그리스도를 직접 핍박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티 메 디오케이스'( )라고 말씀하시는 데, 그것은 '지금 나를 핍박하느냐'는 뜻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현재적 고통에 동참하신다는 은혜로운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이다.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 본절에는 종이 주인과 같은 대우를 받을 것이 두 가지로 예견되었다. 그 가운데 '핍박'이 부정적인 측면이라면 이 구절은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Morris. Hendriksen). 한편 18-20절에 나타나는 세 개의 조건문들이 모두 다 부정적인 측면을 설명했고 21절의 상황도 부정적인데, 이 구절만 긍정적인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그들은 단순히 논리적인 추론으로 부정사(negative)를 첨가하여 '내 말을 지키지 않았은즉 너희 말도 지키지 않으리라'로 본문을 변조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부정사를 추가하는 것은 20절에 포함된 두 개의 조건절이 가지는 문법적인 평행법(Strutural parallellism)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구절은 앞 뒤 문맥을 볼 때 그 내용상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다고 보는 것은 좋을 듯하다(Brown). 즉 '그들이 내 말을 지킨 만큼만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Langrange, Dodd). 요한이 그의 서신체서 말하는 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란 내용과 같은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요일 4:6).
15:21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 - 히브리적 관념에 있어서 이름이란 사람이나 사물의 존새성(存在性) 그 자체를 나타낸다. 이러한 히브리적 관념을 이어받아 여기서 요한 역시 예수의 이름에 대한 신학적인 주제를 펼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해'라는 구절은 구약에서도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삼상 12:22; 대하 6:32; 렘 14:21), 그 문맥은 항상 하나님의 존재, 즉 그의 선(goodness)이나 능력, 신실성(fidelity) 등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약의 개념을 요한은 이곳에서 예수의 신적인 이름에 적용하므로써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를 암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적 통찰은 요한에게 있어 일관된 것으로 요일 2:12이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나 계 2:3의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할 것' 등에서도 등장한다.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 27절의 '내 말을‥‥지킬 터이라'는 구절을 긍정적인 측면으로 해석한다면 이 '모든 일'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다. 심지어 버나드(Bernard)는 21절이 요 16:3과 거의 같은 내용이므로 빼버리는 것이 더 문맥상 바람직하다는 추론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 모든 일'은 앞에서 언급된 대로 세상이 제자들을 미워하고(18절) 사랑하지 않으며(19절) 핍박하는(20절) 것과 같은 부정적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다(Hendriksen).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 본서에서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고 하는 것이다(요 3:17,34,; 5:36,37; 8:18,26,29; 17:3,8,21). 이렇게 예수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으신 것을 근거로 예수께서는 또다시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신다(요 17:18; 20:21 주석 참조). 이 제자 파송은 구체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을 영원히 발출(發出)하시는 삼위일체의 관계에 근거하는 것이다(행 2:33 참조).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문맥 (요 20:21-23)에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그것이며 본 강화에서도 성령께서 오셔선 하실 일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는 근거도 그것이다(26절; 요 14:16,17,25,26; 16:3). '보혜사의 이해'에 대해서는 요 14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한편 본절은 성도에 대한 박해의 근본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기인함을 밝힌다. 즉 그리스도는 인류를 죄악에서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따라 이 땅에 오셨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구원 섭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는 물론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선포하는 자들까지 박해하는 것이다.
15:22 본절은 24절과 그 문장 구조에 있어서 유사한 면이 있다. 한편 본절의 조건절 '내가‥‥없었으려니와'는 부정과거 시제인 반면 귀결절 '지금은‥‥없느니라'는 미완료과거 시제이다. 이는 예수의 오심은 단회적 사건임을 강조하고 유대인의 무지는 그 이후에도 계속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법이다.
내가 와서 저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 '와서'의 헬라어 '엘돈'은 본절의 문장에서 빼버려도 의미상 차이가 없는 단순한 중복적 표현이란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 단어는 메시야로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다(Bernard). 즉 이 표현은 본문의 문맥에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복음 전파사역의 유기적 관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부인하며 그리스도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동일한 뿌리에 근거를 둔 죄인 것이다.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 그들의 가장 근본적인 죄는 예수께서 구원의 진리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는 일을 거절한 것이다(요 16:9). 이러한 거절은 그리스도에 대한 미움(23절)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 문제와 연관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예수 배척 행위를 정당화할 구실은 전혀 없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예수를 받아들일 것인지 배척할 것인지의 양자택일을 반드시 해야 하며 이는 구원과 영원한 형벌의 갈림길이 된다.
15:23 나를 미워하는 자는 도 내 아버지를 미워하느니라. - '나'와 '내 아버지'가 원문에서는 모두 강조형으로 표현되고 있다. 유대인의 관념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계승하고 결국 같은 존재라는 사상이 있다. 또한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므로(요 10:30) 아들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아들은 보이는 존재요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분이신데, 보이는 성자는 거부하고 보이지 않는 성부만을 사랑한다는 말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러한 논리를 그의 서신에서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거짓임을 말하는 데에도 적용하고 있다(요일 4:20).
15:24 내가 아무 일도 못할 일을 저희 중에서 하지 아니하였더면 저희가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저희가 나와 및 내 아버지를 보았고 또 미워하였도다. - 22,23절에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받지 않은 세상을 언급한 후에 여기서는 거의 유사한 문장 구조로 예수께서 행한 '표적'조차 거부한 사실을 말씀하신다. 본서에 나오는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표적은 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심 (요 2:1-11), ②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요 4:46-54), ③ 38년 된 병자를 고치심(요 4:2-9), ④ 5천명의 군중을 먹이심(요 6:4-13), ⑤ 물 위로 걸어가심(요 6:16-21), ⑥ 소경을 고치심 (요 9:1-7),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요 11:1-44) 등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이미 보고도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은 아버지를 보고도 믿지 않는 것과 같은 심각한 범죄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초자연적인 표적들을 보고서도 그들은 오히려 예수에 대한 미움을 가졌는데(완료 시제로 표현) 이는 고의적이고 지속적인 것이므로(Brown) 더욱 죄가 무거운 것이다. 더구나 예수의 표적들은 '아무도 못한 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처음 보는 일'(마 9:33)이었으므로 그것을 통해서는 충분히 예수 안에 아버지께서 계심을 알 수 있었음에도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요 10:37,38; 14:10).
15:25 그러나 이는 율법에 기록된 바. - 여기서 예수께서 '율법'(노모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모세오경 (Pentateuch)만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서(나빔)와 성문서(케투빔)를 포함한 구약 전체를 가리킨다(요 10:34; 12:34). 물론 예수 자신이 모세 오경과 구분되는 선지서를 언급하기도 했으나(눅 24:25) 구약 전체를 통칭하여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당시의 관례적 표현이다. 본절 역시 모세 오경이 아니라 성문서인 시 35:19과 69:4에서의 인용이다.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로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연고 없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레안'은 요한문서에 있어서 이곳에 유일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지불 없이'라는 원래의 문자적 뜻에서 발전하여 '정당한 이유 없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Morris). 물론 유대인들에게 있어 예수를 미워하는 것은 잘못된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었겠지만, 그들의 그러한 종교적 열심도 결국은 정당한 이유는 없는 것이다. A.D. 110년 경에 살았던 랍비 요하나 벤 토르타(Johanan ben Torta)는 바빌로니아판 탈무드(the Babylonian Talmud)에서 성전이 멸망당한 이유가 바로 본절에 나오는 바와 같은 '이유 없는 미움' 때문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이러한 단어가 쓰여진 것은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전의 파괴는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거절하고 미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Brown).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 성령에 관한 이전의 말씀들(요 14:16,17,26)과는 달리 본절에서는 보혜사를 보내는 주체가 예수 자신이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 구절은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간의 성령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동방교회는 '아버지께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 투 파트로스'라는 표현을 근거로 성령은 성부께로서만 나온다고 주장했다. 즉 성부는 영원한 근원이시며 성자인 로고스도 성부께로서 나오며 성령 또한 성부에게서만 나온다는 영원 발출설(eternal procession)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한편 서방교회는 본절의 '내가‥‥너희에게 보낼'이란 표현을 근거로 성령이 성부뿐 아니라 성자에게도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유명한 니케아 신조에 이것이 반영되어 '그리고 성자로부터'(and from the son)라는 뜻의 라틴어인 '필리오크' (Filioque)가 첨가되었다. 그리고 A.D. 589년에 있은 톨레도 교회 회의에서도 이 견해는 반영되었고 서방교회의 확정적 교리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동방교회 신학자들은 반발하였고 그 교리를 결정한 공의회들을 공식 인정하지 않게 하였다. 한편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시리라'(요 14:16)는 말씀이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요 14:26)이라는 표현에서도 성령을 보내시는데 있어 아들의 역할이 강조되었지만 본절은 특히 아들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요한의 신학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아들이 참여하는 것은 하등 이상한 것이 아닌 것은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이기(요 10:30) 때문이다(요 17:11 참조). 한편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성령을 보낸다는 내용의 말씀에서 그 형식(formular)은 다양할지라도 그 사상(ideas)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Loisy). 본절에서 특별히 예수의 사역이 강조된 것은 본절이 속한 문맥이 '예수와 세상'에 관한 것이므로 어쩌면 당연하다. '보혜사'에 대해서는 요 14:26의 주석을 참조하고 '진리의 성령'에 관해서는 요 14:17의 주석을 보라.
그가 나를 증거할 것이요. -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은 ① 교회와의 관계속의 사역과 ②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18-25절) 제자들을 돕는 사역이다. 이 가운데 전자는 교회로 하여금 성령의 전이 되게 하는 것이고 본절과 관계된 후자는 세상 가운데서 보혜사 성령이 예수에 관해 증거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주요 사역들'에 대해서 눅 4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이것은 특히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을 때에 더욱 두드러진다. 보혜사는 세상으로 하여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확증하는 사역을 수행하시는 것이다(요 16:8-11 참조).
15: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 '너희도'에 해당하는 '카이 휘메이스'가 '성령의 증거를 보충하는 제자들의 증거'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Hoskyns) 이러한 표현이 성령의 증거 자체가 부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령의 증거에 따라오는 제자들의 증거는 요한에게 있어 매우 당연한 제자로서의 의무와도 같다(요일 4:13,14; 요삼 1:12). 이러한 사실은 '증거하느니라'에 해당하는 '마르튀레이테'가 현재형으로 나타나서 제자들의 계속적인 증거의 당위성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한편 이 현재형에 대해 버나드(Bernard)는 오순절 이후에 활동할 성령의 증거가 미래적인(26절) 반면 제자들의 증거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것은 제자들의 증거가 성령의 증거를 앞설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잘못된 주장이다(Brown). 누가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예수의 메시야되심을 본격적으로 증거하는 것은 예수의 부활 후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눅 24:48,49; 요 20:21-23; 행 1:8). 한편 '처음부터'란 단어는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된 때부터'를 가리킨다(요 16:4). 이 단어는 누가의 저술에서도 발견되는데(눅 1:2; 행 1:21), 이것은 복음서 기자들(evangelists)의 관점에서는 '제자의 자격'을 논하는 관용어로 쓰인 듯하다(Hoskyns). 또한 '함께 있었으므로'는 문법적으로는 현재시제가 쓰였는데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떠나시더라도 예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으로 늘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요 14:17-19) 이 현재형은 영원한 진리를 나타내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한편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한 자들로 예수의 말씀을 직접 듣고 그가 행하신 신적 사역들을 목격한 자들이었으므로 그들의 증거는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할 것을 명령한 대 위임명령(The Great Commission, 마 28:18-20)과도 관계를 갖는다. 즉 그 명령에서도 예수께서는 성령의 '증거하시는 사역'을 제자들의 복음 전파 사역과 결부시킴으로써 본문과의 사상적 일체감을 갖게 하였다(행 1:8). 마 28장 자료 노트, '예수 지상 대명 4대 강령과 그 의미'를 참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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