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죄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
누구든지 증인이 될 수 있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을 수 있다. 그럴지라도 증인이 되지 않으면 죄가 있다고 한다. 증인의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은 증언하여서 드러내야 할 그 죄를 자신이 범한 것과 같다고 한다.
죄를 짓지 않아도 증언을 하지 않음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어쩌면 죄를 실제로 행동에 옮겨 범하지는 않았지만, 죄를 마음으로 지은 것만으로도 죄가 성립되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 같다.
이렇게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우리에게 삶의 표준은 분명하다. 이 땅 곧 죄가 만연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기는 불가능하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표준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예수님의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를 철저하게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지만, 또한 이것은 우리로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인임을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되어서 하나님께 나아오지 않음을 인하여 슬퍼하신다.
오늘도 내가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고 또한 그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되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은혜를 베푸신 그 사랑을 더불어 깨달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하루 되기를 소망한다.
적용 : 에베소서 1장 암송과 묵상.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이들에게 기도문 쓰기 또는 전화하기. 마음의 죄도 짓지 않도록 기도하고 혹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 속죄의 기도하기.
예동 일기
오늘은 이모님과 외삼촌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다. 이모님은 딸이 경산에 아들이 대구에 살고 있지만 홀로 원룸을 얻어서 살고 계신다. 일 년에 세, 네 번 초청하여 함께 식사한다. 어머님, 아버님을 떠나보내고 부모님 모시듯이 용돈도 드리고 식사도 한다.
두유 나눔을 하면서도 느끼는 것이지만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이 너무 사라져서 마음이 아프다. 이모님도 자식이 있지만 자녀들이 이모님을 모시려고 하지도 않지만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조차 부족한 것같아 마음이 착찹하다. 물론 이모님도 자녀들이 모시기에 쉬운 분은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러나 부모님이 아닌가? 내가 너무 구시대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 세상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어른들에 대한 이 세상의 태도를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에 차 있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을 잘 키워라는 계명은 두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두셨는지 알 것 같다. 마지막 시대에 일어날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미리 경고하신 것이다.
성동격서라는 격언처럼 자녀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이 아닐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에게 무언가를 해주기 전에 먼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사랑하는 자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2월 5일)
첫댓글 우리의 표준은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예수님의 삶이 되어야 한다.아멘 아멘
내리싸랑이라 자녀에 대한 사랑은 자연스러운데 부모에 대한 사랑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장로님 말씀처럼 내가 부모에게 잘하는 모습을 통해서 내 자녀가 또 닮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증인의 책임, 특별히 하나님의 증인의 책임이 막중해 지네요. 어르신들을 대접하시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