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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신-
로메다 님에게
오늘 아침 메일박스를 열었더니
'로메다'라는 낯선 이름의 당신 편지가 떠올랐어요.
유난히 큰 눈을 가진 황갈색 점박이 어린 사슴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
아름다운 편지지가 우선 내 마음을 평화롭게 했습니다.
인터넷의 한 사이트에서 내 시를 읽고 관심을 갖게 되고,
내가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교수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내게 편지를 보내왔다고요?
로메다 님,
보잘 것 없는 내 작품을 관심 있게 읽어주었다니
우선 고맙다는 인사부터 해야겠군요.
시를 좋아한다니 반갑습니다.
가능하다면 시를 써 보고도 싶은데
아무나 시를 쓸 수 있느냐고 물었지요?
그와 유사한 질문을 나는 학생들로부터 자주 듣습니다.
아니, 나도 시가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던 청소년 시절
스승이나 시의 선배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그 질문에 대한 대답부터 하고
그 다음의 얘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당신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더 적극적인 답변을 요구한다면
당신도 좋은 시를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로메다 님,
시를 쓰는 일은 마치 그림을 그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에 제한이 없듯이
시를 쓰는 사람 역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유아들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즐기며 삽니다.
그러나 로메다 님,
그림을 즐기는 모든 사람들을 우리는 화가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림을 좋아하는 많은 이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림을 잘 그리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만이 화가가 될 수 있습니다.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지만
훌륭한 시인이 되는 것은 타고난 재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타고난 재능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의 중요함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물론 노력이 중요하지요.
세상에는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노력하지 않고 성공한 사람들은 이 지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남다른 재능은 타고났더라도
노력하지 않는 게으름뱅이의 머리 위엔
눈부신 승리의 월계관은 씌워지지 않습니다.
비록 타고난 재능은 보잘것없더라도 열심히 정진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주위가 부러워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지 않던가요?
시의 재능을 비록 적게 타고났더라도
심혈을 기울여 시의 길을 간다면 좋은 시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적인 시인이 되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어려운 일입니다.
스포츠를 좋아하나요?
세계적인 농구 선수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아무리 농구를 좋아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세계적인 농구 선수가 되려면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합니다.
즉 긴 신장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농구라는 운동에서는 신장의 조건이
슛이나 리바운드 등 모든 경우에 절대적으로 작용합니다.
물론 키 작은 사람도 열심히 연습하여 농구 선수가 될 수 없는 바는 아닙니다.
단신(短身)으로도 학교나 지역의 대표선수쯤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신의 벽을 넘고 세계적인 선수로 올라서기는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장을 위시해서 육신의 여러 기능들은 대체로 선천적으로 타고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의 기능들도 선천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시를 만드는 기능에 있어서도 타고난 시적 재능이 없을 수 없습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감각, 상상력, 그리고 언어 구사의 능력 등
그런 탁월한 시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을 때
세계적인 시인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로메다 님, 실망하셨나요?
그러나 만일 당신이 세계적인 위대한 시인이 되겠다는 너무 큰 꿈을 갖지 않는다면
조금도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비록 시적 재능을 많이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당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당신의 친구와 이웃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시들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시를 좋아하는 것이 어쩌면
시를 잘 쓸 수 있는 소질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가 압니까?
바로 당신이 탁월한 시적 재능을 타고났는지―
바로 당신이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미래의 위대한 한 시인인지―
아직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이만 씁니다.
좋은 꿈 많이 꾸세요. 로메다 님!
-제 2신-
도대체 시란 어떤 글인가?
로메다 님, 내가 보낸 글을 읽고
시를 쓰고 싶다는 신념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니 반갑기는 합니다만
내가 괜히 조용한 사람의 가슴속에 바람을 불어넣어
'시의 병'을 앓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이번엔 '도대체 시가 어떤 글인가' 일러달라고 청하셨지요?
평범한 질문 같기는 합니다만 답변이 쉽지 않군요.
한평생 시에 매달려 살아온 나인데도
로메다님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줄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갑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유구한 세월을 놓고 보면 태산준령도 놀랍도록 변화합니다.
아메리카 대륙의 등뼈라고 불리는 거대한 로키산맥은
수억 년 전에는 바다 속에 묻혀있던 흙덩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구한 세월을 두고 천천히 솟아올라
지금 우리가 보는 수천 미터의 웅장한 바위산들이 된 것입니다.
산천이 우리 눈에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 것은
그 변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그렇게 느낄 뿐입니다.
거대한 바위는 부서져 작은 모래알들이 되고
푸른 강물은 메말라 거친 사막이 되기도 합니다.
자연의 변화가 이렇거늘 하물며
인간들의 손으로 빚어 만든 문명의 족적들은 얼마나 덧없이 변하겠습니까?
한 세기를 버티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10년, 아니 1년이 멀다하고 바뀌고 혹은 사라지고 말기도 합니다.
너무 서두가 길어졌나요?
그럼 이제 다시 시의 얘기로 되돌아가도록 합시다.
그동안 시라는 글도 많은 변모의 길을 걸었습니다.
언제부터 인간들이 시라는 형식의 글을 쓰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BC 2000년경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유적으로
점토판에 설형문자로 새겨진 「Gilgamesh Epoth」라는 기록입니다.
길가메쉬라는 한 영웅의 모험을 찬양하는 내용의 서사시라고 합니다.
동양에서는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시경(詩經)』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서주(西周) 초기(BC 11세기)로부터 동주(東周) 중기(BC 6세기)에 이르는
약 500년 동안의 노래들을 모은 것이므로
오래된 것은 BC 1000년경의 것도 있겠습니다.
우리의 시가(詩歌)로 오래된 것은
고구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를 드는데
제작 년대를 겨우 BC 17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우리 시가의 역사가 그렇게 늦은 것은
우리 민족이 시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였다기보다는
우리의 고유한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다만 기록에서 뒤진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만큼 노래를 즐기는 민족도 드뭅니다.
우리의 번창한 <노래방> 문화가 좋은 증거가 되지 않습니까?)
기록은 이렇게들 남아 있지만
문자를 사용하기 전의 노래들까지를 시의 남상(濫觴)이라고 본다면
시의 역사는 어쩌면 만년을 헤아리게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 유구한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시라고 불릴 수 있는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변해왔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경우를 한번 간략히 살펴볼까요?
나는 우리시의 출발을 샤먼[무격(巫覡)]의 주사(呪詞) 곧
'천지신명께 기원하는 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고자 합니다만
이 자리에서는 일단 접어두고라도
「황조가(黃鳥歌)」나 「구지가(龜旨歌)」와 같은 고대시가로부터 시작하여
신라의 향가(鄕歌)를 거쳐 고려의 가요(歌謠)
그리고 조선조를 지내면서 시조(時調)와 가사(歌辭) 문학 등으로 발전합니다.
한편 고려 이후부터 구한국 말에 이르기까지
시 장르의 본령은 한시(漢詩)가 점령해 왔습니다.
우리 고유의 시는 거의 노래와 함께 공존해 온 상태입니다.
우리 시가 노래로부터 독립된 것은 겨우 20C에 들어와서부터입니다.
20C 초에 싹이 텄던 소위 신체시가
자유시로 자리 잡은 것은 1920년대에 이르러서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대적 특성을 지닌 자유시로 크게 발전하게 됩니다.
한 지역에서의 시의 변천하는 모습도 이렇거늘
세계의 모든 지역들에서 변모해온 시의 양상을 살펴본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하겠습니까?
천 년 전 당나라의 이백(李白)이 생각했던 시와
백 년 전 독일의 릴케가 생각했던 시는 얼마나 거리가 멀겠습니까?
그야말로 천양지차(天壤之差)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시대의 시라고 해도 지역에 따라 다 다릅니다.
서양의 시와 동양의 시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서구라도 프랑스의 시와 영국의 시가 같지 않고
같은 동양이라도 중국의 시와 한국의 시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동일한 시대 동일한 지역이라고 해도
개인에 따라 얼마나 차이가 있던가요?
비슷한 시대에 살았던 소월(素月)과 이상(李箱)의 시가
얼마나 다른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동안 역대의 수많은 시인들과 시 이론가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에 대한 정의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정의들 가운데 보편타당한 정의는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내린 정의는 다만 그가 살았던 당대의
그가 체험한 시에 대해 주관적인 견해를 피력했을 뿐입니다.
앞으로의 어느 누구도 시공을 초월한 금과옥조(金科玉條)의
시에 대한 불변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시는 계속 변해갈 것이니까요.
로메다님,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내 얘기를 듣고 실망하셨나요?
그러나 로메다님, 너무 실망할 것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절대 불변의 정의는 불가능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람직한 시'에 관해서는 들려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오늘의 얘기가 너무 번거롭게 길어졌으므로
'바람직한 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들려주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되겠군요.
7월의 장마가 지루합니다. 즐거운 나날 지내세요. 임 보.
P. S. : 역대의 저명한 사람들이 내린 시에 대한 정의들 가운데에서 몇 개 골라 첨부 파일로 보냅니다. 내가 <시론>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보여준 참고 자료입니다. 귀찮으면 읽지 않아도 무방합니다. 읽고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을 만나더라도 당황해 할 것 없습니다. 그러나 버리지는 마시고 간직해 두시기 요바랍니다. 언제 필한 경우 들추어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혹 있을지 모르니까요.
[첨부 파일]
시에 대한 정의들
"시는 운율적인 언어에 의한 모방" ―Aristotle『Poetics』
"좋은 시는 힘찬 감정의 자연적 발로" ―W. Wordsworth『Lyrical Ballads』서문
(For all, good poetry is the spontaneous overflow of powerful feelings)
"시는 영원한 진실 속에 표현된 삶의 이미지" ―P. B. Shelly『Defence of Poetry』
(A poem is the very image of life expressed in it`s eternal truth)
"시는 상상과 정렬의 언어" ―W. Hazlitt『Lecture on the English Poets』
(Poetry is the language of the imagination and the passions)
"시는 미의 운율적 창조" ―E. A. Poe『The Poetic Principle』
(Poetry is the rhythmic creation of beauty)
"시는 유익함이나 기쁨을 주는 일 곧 교훈과 함께 즐거움을 줄 수 있도록 결합하는 일을 목적으로 한다" ―Horace『The Art of Poetry』
(Poets aim at giving either profit or delight, or at combing the giving of pleasure with some useful percepts)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 思無邪" ―공자『論語』
(시경에 수록된 삼백 수의 작품들은 한 마디로 말해 시 속의 생각들이 다 바르고 정직하다)
"시는 언어의 건축이다" ―김기림『시론』
"시는 생소한 소재들로 이루어진 논리성이 약한 구조물이다" ―J. C. Ransom『The New Criticism』
(The poem is a loose logical structure with an irrelevant local texture)
"詩言志 歌永言" ―『書經; 舜典』
(시는 우리들의 의지(소망)를 말에 담은 것이고 노래는 그 말을 길게 늘여서 표현한 것이다)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 ―『詩經;大序』
(시란 뜻(소망)에서 빚어진 것, 마음속에 있을 땐 뜻,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된다)
"시는 우주의 생명적 본질이 인간의 감성적 작용을 통하여 표현되는 통일한 구상(具象)이다" ―조지훈『시의 원리』
-제 3신-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
로메다 님,
보내주신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지금 이 글을 씁니다.
지난번 편지는 시가 무엇인가를 묻는 물음에 답하는 글이었는데
막상 써 놓고 보니 시를 이해하고자 하는 로메다님을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만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읽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면서 보내드린 첨부자료
<시에 대한 정의들>까지도 다 읽었다고요?
건실한 모범생이군요.
이해가 잘 되던가요?
아마 시를 이해하는데 별로 큰 도움이 되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리 그런 글을 읽어둔 것도 언젠가는 혹 도움이 될지 모르니
잘 하셨습니다.
나는 지난번 편지에서 시라는 글은
너무 변화무쌍한 것이어서 절대불변의 정의를 내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시에 대해 한꺼번에 다 알려고 하지 말고
욕심을 줄여, <오늘의 우리시>에 관해서만 관심을 갖도록 해 봅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오늘의 한국 현대시처럼 쓰기 쉬운 글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납득이 안 가겠지요?
시는 원래 일정한 형식을 요구하는 정형시였습니다.
말하자면 시가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이 있어서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 글은 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한시(漢詩)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절구(絶句)의 경우를 생각해 볼까요?
① 우선 4행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② 각 행의 글자 수를 5자이거나 혹은 7자로 통일해야 하며
③ 짝수 행의 끝에 같은 종류의 소리[韻]를 달아야 하는 등
그밖에도 복잡한 평층법(平仄法)에 의해 글자 배열을 통제했습니다.
서구의 대표적인 정형시인 소네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① 전 14행으로 각 연들이 4, 4, 3, 3행의 4연으로 구분되고
② 각 행의 음절수가 나라에 따라서 10∼12음절로 제한되며
③ 각 행의 끝에 규칙적인 압운(押韻)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로메다님,
이런 번잡한 내용들을 염두에 둘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정형시가 매우 복잡한 조건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됩니다.
정형시가 주도하던 당시에는
언어에 대단한 재능을 따고난 사람이 아니고는 시인이 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시는 평민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귀족문학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형시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우리의 대표적인 정형시는 시조인데 정해진 규칙이 별로 엄격하지 않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평시조의 형식은
① 전 3행으로 되어 있고
② 각 행은 4음보(4어절, 4마디)이며
③ 다만 제3행(종장)의 처음 두 음보가 3음절과 5음절이라는
제약이 있을 뿐입니다.
행의 끝에 동류의 음을 달아야 한다는 압운의 규제도 없고
한 음보를 이루는 음절의 수효도 고정되지 않고 유연합니다.
숫자를 헤아리는 데 있어서도 '서넛' '대여섯' 같은 용어들을 즐겨 사용하는 걸 보면
애초부터 우리 민족은 융통성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정형시는 구속의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풍조가 변하다 보니
즉 군주주의가 허물어지기 시작하고
개인의 주권과 자유를 옹호하는 풍조가 일어나면서
구속과 통제의 문화들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런 자유의 물결 속에서 시도 속박의 틀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래서 자유시가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자유시는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습니다.
행도 마음대로 나누고
나누고 싶지 않으면 산문처럼 이어 쓰기도 합니다.
소재의 제한도 없고
운율에 대한 배려도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아무렇게나 써도 상관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쓰기 쉬운 글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로메다님,
시를 쓰기는 쉽지만
좋은 시를 쓰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치 누구든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좋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시란 어떤 글일까?
어떻게 쓴 시가 좋은 글, 바람직한 글이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입니다.
즉 감동을 주는 글이지요.
무엇을 어떻게 쓰든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만 있다면
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심오하고 훌륭한 내용을 담았더라도
독자를 감동시킬 수 없는 글이라면
나는 좋은 글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감동적인 글' 만들기가 쉽지 않군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요인들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만
나는 그 요인들 가운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잡습니다.
바람직한 시 곧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즉 시란 '아름다운 언어들의 결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에 대해 정의하기를
'영롱한 언어의 사리(舍利)'라고 합니다.
절에서 스님들이 세상을 떠날 때 다비(茶毘, 화장)를 하지 않습니까?
육신이 다 타고 남은 재속에서 영롱한 결정체(結晶體)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를 사리(舍利)라고 부릅니다.
고승의 경우일수록 많은 사리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불타는 육신 속에서 만들어진 영롱한 결정체
사리는 참 신비로운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그 사리는 고승의 육신과 정신과 불과 그 밖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요소들이 협동하여 빚어낸 아름다움입니다.
사리는 고승의 육신으로 빚어낸 시(詩)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수십만 어휘의 숲 속에서 작업을 합니다.
그들은 마치 직녀(織女)가 필요한 색실을 하나씩 뽑아
비단에 아름다운 수(繡)를 놓아가듯이
필요한 언어를 하나씩 선택하여 아름다운 언어의 결정체를
만들어 갑니다.
선택된 언어와 언어들이 잘 결합하여 해조(諧調)를 이루면
영롱한 빛이 납니다.
시는 수만 개의 어휘들 가운데서 선택된 몇 개의 언어들이
아름답게 결합된 영롱한 결정체― 곧 언어의 사리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영롱한 언어의 사리를 빚을 것인지
그것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로메다님,
오늘도 얘기가 길어졌군요.
그러나 시에 대해 어리둥절하기는 아직도 마찬가지지요?
하지만 너무 조급히 생각지 마세요.
시는 이미 당신 곁에 한 걸음 가까이 와 있을 것입니다.
장마가 그치려나
드리운 능소화 줄기 사이로 햇살이 환합니다.
주황빛 꽃이 시보다 더 아름답습니다.
짤막한 시 한 편 보냅니다.
-능소화 임보.-
지가 무슨 화냥년 이라고
분홍 속살 다 드러내 놓고
남의 집 담장에 기어올라
한여름을 흔들며 가네.
-제 4신-
옛날의 금잔디 동산에
로메다님,
어제는 친구들과 함께 산엘 올랐다고요?
신록이 우거진 싱그러운 자연 속에서
즐거운 한때를 지냈다니 잘 하셨습니다.
지난번에 시를 일러 영롱한 언어로 빚은 사리라고 했더니
그 사리를 어떻게 빚어내는가 알고 싶다고 조급히 물어왔군요.
네 좀 기다리세요. 차차 말씀드릴 겁니다.
오늘은 그 '사리'를 찾아 헤맸던 내 유년의 얘기를
들려주고 싶은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내가 처음 시를 만났던 어린 시절의 얘기 말입니다.
나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산간벽지에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내 고향 마을 앞으로도 고속도로가 뚫리어
많은 차들이 바삐 지나다니게 되었습니다만
내가 중학을 다니던 당시만 해도 세상과의 내왕이 쉽지 않은
깊은 두메산골이었답니다.
나는 우리 집에서 한 시오리(6km)쯤 떨어진 곳에
새로 설립된 중학교의 두 번째 학년에 입학하게 됩니다.
한 학년이 한 클라스, 전교생이라고 해봐야 200명이 채 안 된
보잘 것 없는 아주 작은 가난한 학교였습니다.
내가 2학년으로 올라가던 이른 봄에
한 젊은 멋쟁이 선생님이 그 학교에 부임해 오셨습니다.
이마가 시원스럽게 열린,
검은 베레모에 짙은 갈색 선글라스를 즐겨 쓰신
키가 훤칠한 체육 선생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선생님의 체육 수업은
운동장이 아닌 교실에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칠판의 상단에 체육 이론에 관한 제목은 커다랗게 써놓았지만
진행되는 수업의 내용은 체육과는 상관없는
세계 명작 소설들을 들려주는 '이야기 시간'입니다.
혹 교장 선생님의 복도 순시가 있을지 모르니까
교실 출입구 곁에 한 학생을 보초로 세워놓고
우리들은 숨을 죽여 가며 선생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에 빠져들곤 했지요.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를 들으며 얼마나 아쉬워했던지
지금도 그때의 정경이 눈앞에 선합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선생님의 전공은
체육이 아니라 국어였습니다.
우리 학교의 빈 체육교사 자리를 채우기 위해 그분이 오셨다고 하니
6·25전란을 겪고 난 뒤, 당시의 행정이 얼마나 엉성했던가를
단적으로 엿보게 하는 일화이기도 합니다.
국어교사가 체육 수업을 하려니 얼마나 곤혹스러웠겠습니까?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세익스피어의 『햄릿』
토마스 하디의 『테스』
토스터에프스키의 『죄와 벌』
톨스토이의 『부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등
세계명작들의 아름다운 문학 세계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그 선생님께 홀딱 빠진 나는
방과 후 선생님의 하숙방엘 자주 찾아갔습니다.
그러면
어떤 때는 누군가가 보낸 아름다운 편지를 읽게도 하고
어떤 때는 당신이 쓰신 시를 낭독하게도 했습니다.
내가 낭랑한 목소리로 읽으면
선생님께서는 목침을 베고 아랫목에 누워서
눈을 지그시 감고 들으시곤 했습니다.
당시의 어린 나는 그때 읽었던 편지와 시의 내용들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도 편지는 선생님을 사모하는 어떤 여인이 보낸 것 같았고
시는 선생님의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것 같았습니다.
저도 그처럼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을까요?
묻는 어린 제자에게 스승은
매일 일기를 열심히 쓰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소장하고 있던 문학서적들을 빌려주셨습니다.
김동인과 김유정의 소설들
소월과 영랑 그리고 청록파의 시들을 처음 만나게 됩니다.
그 뒤부터 나는 날마다 일기를 열심히 썼습니다.
아니, 일기뿐 아니라 일기의 끝에 매일 시를 썼습니다.
시도 아닌 유치한 글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열심히 썼습니다.
전기도 없었던 시절 어두운 등잔불 밑에서
펜촉에 푸른 잉크를 묻혀가며
검은 딱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질이 낮은 마분지 노트에
매일 밤이 깊도록 열심히 썼습니다.
그 시절의 기록들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데
가끔 꺼내보면 참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도 아마 그보다는 더 잘 쓸 것 같은
그런 아주 형편없는 유치한 것들이었으니까요.
아마 나도 선천적인 글재주는 별로 타고난 것 같지 않습니다.
로메다님, 일기를 쓰십니까?
일기를 쓰느냐고 학생들에게 물으면,
비밀스런 내용들이 혹 탄로날까 두려워
쓰다가 중단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감추고 싶은 것은 쓰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글을 쓰는 행위와 친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에 익숙해 있듯이
글도 자주 쓰면 말하는 것처럼 능숙해질 수 있습니다.
글과 친숙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매일 일기를 쓰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좋은 방법은
편지를 자주 쓰는 것입니다.
나에게 시의 바람을 불어넣었던 그 스승은
1년 뒤에 다른 학교의 국어 교사가 되어 떠나셨습니다.
그 뒤로 스승과 어린 제자 사이에
사흘이 멀다 하고 수많은 편지들이 오고갔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아름다운 문장과 멋스러운 필체를 따라가려고
밤을 새워가며 편지를 고쳐 쓰곤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버린 편지지가 머리맡에 수북했습니다.
지금의 내 필체 속에는 그 선생님의 것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내가 오늘날 이만큼의 문장력이라도 지니게 된 것은 아마도
유년시절의 일기와 그 편지들 덕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시 쓰기에 앞서
산문 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바른 산문을 쓸 수 있는 문장력을 갖춘 다음
시에 들어가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바른 문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처음부터 시의 욕심을 부리는 것은
마치 데생(dessin)의 실력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처음부터 추상화에 달려드는 경우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로메다 님,
귀찮더라도 매일 일기를 쓰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글의 친구가 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그리고 좋은 글벗을 만나 그분과 자주 글을 주고받기 바랍니다.
남에게 보이는 글에는 더 정성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일기는 당신을 글과 친숙하게 만들 것이고
편지는 당신의 문장을 정련(精鍊)시킬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름다운 동산에서 처음 만났던 시 얘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시의 꿈 소중히 간직하시기를 바라며 임 보.
-제 5신-
로메다님,
내 글을 읽고 일기 쓰기를 다시 시작하셨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가능하면 마음에 맞는 친구에게 긴 편지도 자주 써 보시기 바랍니다.
글을 잘 쓸 수 있는 길은
옛날 중국 송나라의 문인 구양수(歐陽修)가 일찍이 간파했던
삼다(三多)의 교훈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삼다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그리고 다상량(多商量)이 아닙니까?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자신이 손수 글을 많이 써 보고,
그리고 생각을 늘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좋은 글을 우선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좋은 글을 어떻게 고를 것인가에 대해 오늘은 말씀드리겠습니다.
마침 내가 이미 써놓은 「시의 한 독자에게」라는 서간체의 수필이 있군요.
그것을 먼저 보여드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詩의 한 독자에게
시를 좋아한다고요? 그래서 시를 즐겨 읽는다고요?
시의 무엇이 그렇게 좋던가요? 시를 읽고 나면 마음이 평온해지던가요?
어떤 시들을 즐겨 읽나요? 달콤한 사랑의 시가 좋던가요?
날카로운 풍자시가 마음에 들던가요? 아니면 깊은 사색의 시에 매력을 느끼나요?
아무튼 현대와 같은 각박한 시대에 아직도 시라는 것에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당신을 보니
꽤나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남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돈이 되는 일에 매달려 아귀다툼인데,
당신은 생계에 하등의 보탬도 되지 못한 그 시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니 그렇지 않습니까?
그거야 평생 시에 매달려 살아가는 시인들도 있는데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딴은 그렇군요.
당신을 보면 가난한 자선가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렵게 행상을 해서 모은 전 재산을 양로원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 희사하는 분들 말입니다.
또한 외로운 낙도를 전전하면서 어려운 섬사람들의 질병을 치료해 주며 살아가는 선량한 의료인들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아마도 당신은 실리에 무척 밝거나 세상살이에 너무 영악스럽지도 못하지요?
어딘가 수더분하고 인정이 넘치는 그런 사람일 것 같군요.
남의 말을 잘 믿고 슬픈 영화를 보면 눈물도 쉬 흘리지요? 네 틀림없습니다.
당신이야말로 이 세상을 보다 평화롭고 아름답게 가꿀 수 있는 꽤나 괜찮은 분입니다.
신이 만일 내게 이상적인 공화국을 하나 만들도록 허락해 준다면
그 나라의 일등 시민으로 당신을 가장 먼저 초대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보면 '딱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처음의 내 발언은 본심과는 전혀 다른 역설임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시들이 어렵다고요?
잘 이해할 수도 없는 골치 아픈 시들이 적지 않다고요?
그런 시들은 읽지 마세요. 당신을 괴롭히는 그런 글들은 그냥 팽개치세요.
그래도 차마 그럴 수 없다고요? 역시 무척 착하시군요.
그러나 당신처럼 그렇게 선량한 독자를 괴롭힌다면 이는 고약한 시인임에 틀림없습니다.
남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기만의 아집에 사로잡힌 고집스런 자임에 틀림없을 테니까요.
그들은 당신의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시들을 읽는 게 바람직하냐고요?
글쎄요. 추천하기가 쉽지 않군요.
감미롭게 속삭이는 출판사의 화려한 광고에 현혹되지 마세요.
그럴듯한 신문기사나 비평가의 서평에도 넘어가지 마세요.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지만 그들은 어쩌면 당신의 편이 아니라 출판사의 편일 수도 있습니다.
베스트셀러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지 마세요.
지나치게 달콤한 맛이 나는 작품들도 경계하세요.
조미료와 설탕의 힘을 빌어 만든 음식에 잘못 길들면
우리의 미각을 잃고 드디어는 건강까지도 해를 입게 되지 않습니까?
작품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지불할 인세에 마음이 팔려 사탕발림의 글을 쓰는 자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유명한 시인의 작품을 골라 읽는다고요?
그 방법도 별로 권장하고 싶지 않군요.
세상 사람들을 보세요. 유명한 사람치고 훌륭한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특히 살아생전에 이름을 얻은 사람 가운데 믿을 만한 사람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유명한 시인 가운데는
차라리 정치가가 되었더라면 더 어울리겠다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수상(受賞) 경력이 많은 시인의 작품을 골라 읽는다고요?
글쎄요. 그 방법도 별로 찬성하고 싶질 않군요.
그것은 상(賞)이 공정하게 시행되는 사회에서나 기대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시와 시인에 대해 너무 부정적으로만 얘기해서 혼란스럽지요?
아무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요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읽지 마세요.
그들의 작품을 읽어 주기엔 우리들의 생애가 너무 짧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당신이 아니더라도 눈먼 독자들이 많이 읽어 줄 테니까 미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마치 흙 속에 묻혀 빛을 보지 못하는 보석처럼 소중한 작품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한 작품들은 당신 같은 현명한 독자들이 찾아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차라리 선배나 친구가 읽고 권하는 시집을 읽으세요.
가능하면 책방에 들러 스스로 읽어보고 믿을 만한 시인이 누군가를 찾으세요.
예술은 결코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입니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천 명의 잡다한 작곡가보다는 하나의 모차르트입니다.
저질의 예술품들은 세계를 정화하기는커녕 지상을 어지럽히는 공해 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양질의 시를 찾아 읽으세요.
그런 시의 주인공― 당신이 존경할 만한 시인은 아직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지금 묻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를 찾아보세요. 그는 그늘진 곳에서 혼자 외롭게 유서를 쓰듯 시를 쓰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시인을 하나 찾아 그의 후원자가 되세요.
물질적으로 돕는 후원자가 아니라, 그가 용기를 잃지 않고 계속 시를 쓸 수 있도록 격려를 보내주고,
때로는 그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후견인이 되세요.
그의 아름다운 시를 주위 사람들에게 소개도 하고
혹 그가 모처럼 소중한 시집을 만들어냈다면
그의 시집을 몇 권사서 가까운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세요.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이 별로 대단한 도움이 못된다고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좋은 시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간절할 때 당신은 불행한 한 시인의 생명을 건질 수도 있습니다.
어떤 비관적인 한 시인이 세상을 떠나려고 독배를 들려는 순간 그대가 보낸 한 통의 편지를 읽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독자로부터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들었다면 그의 죽음은 잠시 유예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경우에 따라서는 잠시가 아니라 평생 유예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시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지상에 시인다운 시인은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시가 사라지지 않고 존속될 수 있기를 원하십니까?
시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곧 시의 생명입니다.
당신이 좋은 시들을 찾아 읽는 한, 이 지상에서 훌륭한 시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시의 수호자입니다.
로메다님,
읽기가 좀 지루했나요?
시를 좋아하는 한 독자에게 보내는 글이었습니다.
좋은 책 고르기가 힘들면 우선 고전부터 읽으시기 바랍니다.
좀 낡았더라도 이미 정평이 나 있는 책들을 고르십시오.
이 책들은 긴 세월을 두고 많은 사람들에게 검증된 것이니까
비교적 안심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집이나 소설 등 문학서적들뿐만 아니라, 역사나 철학 그리고 과학에 이르기까지
다른 분야의 고전들도 소홀히 하지 말고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읽은 좋은 책들이 언젠가는
당신이 좋은 글을 쓰는데 보이지 않은 자양분이 될 터이니까요.
오늘도 즐거운 하루 지내시길 바랍니다. 임 보.
-제 6신-
로메다님,
그동안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어서 시를 써 보고 싶은데 막상 시 쓰는 방법은 일러주지 않고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생각을 했겠지요?
좋은 집을 지으려면 먼저 튼튼한 기소를 다지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처럼
그동안의 이야기들은 글을 쓰기 위한 기소 작업이었다고 생각하십시오.
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자, 그럼 이제부터 시작해 봅시다.
우선 시라는 글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맙시다.
그리고 처음부터 좋은 글을 쓰겠다고 너무 욕심 부리지도 맙시다.
나는 전에 시를 '영롱한 언어의 사리'라고
신비로운 정의를 내린 바 있기는 합니다만
이는 좋은 시를 두고 이르는 말입니다.
우선은 좋은 시에 대한 욕심은 잠시 접어두고 쉽게 생각하십시다.
간략히 말하면
시는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을 짧게 기록한 글일 뿐입니다.
'어떤 것'이란 바로 학교 작문시간에 '소재'라고 일컫는 것들입니다.
바로 그 소재―'글 쓸 거리'부터 생각해 봅시다.
시의 소재는 제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이 다 소재가 됩니다.
산과 강, 나무와 동물 그리고 하찮은 곤충들에 이르기까지
소재의 대상이 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사물을 바라다보는 우리 자신도,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의 내면속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들도
다 글의 좋은 소재들이 됩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논의의 편의상 소재를 양분해 본다면
우리의 몸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객체적 소재'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정황들을 '주체적 소재'
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객체적 소재들부터 생각해 봅시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다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다 그림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화가들이 모든 사물을 다 그리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그리고 싶은 것만 선택해서 그립니다.
그 선택의 기준은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嗜好)와 무관하지 않습니다만
대체로 '아름답거나 이채(異彩)로운 사물'들을 선택하게 됩니다.
시의 소재도 그림의 경우와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선택된 시의 소재가 만일 아름답다거나 혹은 이채롭다거나 하는
어떤 특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독자들의 환심을 살 수가 없습니다.
시라는 글도 하나의 발언(發言)입니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기를 전제로 해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까?
로메다님,
우리가 매일 친구들과 주고받는 일상적인 대화도
만일 재미가 없으면 상대방이 귀를 돌리고 맙니다.
하물며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쓰여진 시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글에 지나지 않다면
누가 관심을 갖고 그 시를 읽으려 하겠습니까?
나는 앞에서 아름답거나 이채로운 것이라고 했는데
좀더 포괄적으로 말한다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을
선택하여 쓰라는 충고를 드리고 싶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로메다 님,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신기한 소재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그런 소재를 찾아 낯선 먼 이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의 길에 오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처지라면 남들의 부러움을 살만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필요로 한 그러한 방법을
나는 별로 권장하고 싶진 않습니다.
로메다 님,
이채로운 대상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상에서 이채로운 생각이나 느낌을 얻는 일입니다.
아무리 이채로운 대상을 만났더라도 그 대상 속에서 얻은 생각이나 느낌이
평범한 것에 지나지 않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와는 달리 비록 평범한 사물을 대했을 경우라도
평소와는 달리 이채로운 생각이나 느낌이 떠오르는 체험을 했다면
이것이 소중한 글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소재 자체가 아니라
소재로부터 얻어낸 이채로운― 다시 말해 감동적인 생각과 느낌입니다.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부터 얻어낸 생각이나 느낌― 이것을
서양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용어로 부르고
동양에서는 '시상(詩想)'이라는 말로 즐겨 사용해 왔습니다.
특히 기발한 시상을 '영감(靈感)'이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영감이라는 말은 어딘가 좀 신비로운 느낌이 없지 않으므로
요즈음 즐겨 쓰고 있는 이미지라는 용어를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는 우리가 어떤 대상(사물)을 접했을 때
그 '대상이 우리의 심리(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체험 내용'이라고
심리학에서는 정의하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지요.
누가 이제 막 떠오르는 등근 보름달을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과 느낌들이 떠올랐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본 바 있던
① 둥근 쟁반
② 환하게 웃는 아가의 얼굴
③ 이제 막 구워낸 따끈한 호떡
등이 떠올랐다면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이미지입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시의 싹이 됩니다.
그런데 앞의 세 가지 중 ①과 ②는 보통 사람들도 흔히 떠올리는
범상한 이미지들입니다.
그런데 ③은 좀 색다른 느낌이 들지요?
이런 색다른 이미지가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 개의 이미지만으로 한 작품을 만들기도 합니다.
하모니카
불고
싶다 -----― 황순원 「빌딩」전문
잇몸
드러내고
웃는다 -----― 황순원 「옥수수」전문
소설가 황순원씨는 『골동품』이라는 시집을 낸 바 있는데
그 시집 속에 수록되어 있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앞의 두 인용 작품처럼
한 개의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단시(短詩)들입니다.
빌딩에 달려있는 수많은 창문들을 보자 하모니카 구멍이 생각났고
잘 익은 옥수수를 보자 웃을 때 드러난 이빨들이 떠올랐겠지요.
네, 시는 이렇게 별로 대단한 글이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가 예로 들었던 '보름달'을
'막 구워낸 따끈한 호떡' 쯤으로 써 놓고 시라 불러도
크게 흠될 것이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시에 자신이 좀 생기지요?
그러면 이제 직접 한번 시도해 보기로 할까요?
다음의 소재들에서 이채로운 이미지들을 붙잡아 보시기 바랍니다.
<우산> <항아리> <안경>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임보.
-제 7신-
로메다님,
며칠 여행을 다녀오느라 답장이 늦어졌습니다.
아주 훌륭하게 숙제를 잘 하셨군요.
이미지를 찾아내는 솜씨가 아주 놀랍습니다.
<우산>에서 '외다리 박쥐'의 이미지를 찾았군요.
펼쳐진 우산은 박쥐의 날개처럼 보이지요.
하나의 손잡이를 '외다리'로 느낀 것도 그럴 듯합니다.
<항아리>에서는 '만삭의 곰',
둥글게 부풀어 있는 항아리의 몸뚱이가 마치 임신부처럼 느껴지던가요?
그것도 사람이 아닌 곰으로 말입니다.
<안경>으로부터는 '코에 걸린 자전거'라는 재미있는 이미지를 끌어냈군요.
네, 안경의 두 테가 마치 자전거의 두 바퀴처럼 생각되기도 하지요.
로메다님이 끌어낸 이미지들은 이채롭습니다.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는 개성적인 이미지들입니다.
이제 시적인 이미지들을 잡아내는데 자신을 가질 만하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한 이미지들은
어떤 대상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 다른 사물들이었습니다.
길다란 허리띠를 보자 뱀이 떠올랐다면
두 사물이 지닌 유사한 특징은 '길다란'입니다.
이처럼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해서 떠오르는 이미지를
시론에서는 유추적(類推的) 이미지라고 부릅니다.
이런 유추적 이미지와는 달리 연상적(聯想的) 이미지가 있습니다.
꽃을 보자 벌이 생각나고,
벌을 생각하자 꿀이 떠올랐다면 이것이 곧 연상적 이미지입니다.
연상적 이미지는 두 사물의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합니다.
그래서 시를 읽다보면
'바다'를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물고기'를 끌어들이고
'숲'을 말하면서 지저귀는 '새'를 등장시키기도 하지 않던가요?
그런데 오늘의 현대시는 사물과 이미지 사이에 동일성이나 인접성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추적 이미지나 연상적 이미지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 내고자 합니다.
이러한 낯선 이미지를 상상적(想像的) 이미지 혹은 창조적 이미지라고 하는데
바로 이것이 현대시를 난해하게 하는 요인의 하나입니다.
다음은 내 시론집 『엄살의 시학』(2000, 태학사)에 수록된 「시의 씨앗」이란 글입니다.
내 홈(www.rimpoet.pe.kr)에 가서도 찾아 읽을 수 있기는 합니다만,
번거로움을 덜어 들이고자 직접 인용합니다.
이미 설명한 앞부분보다 뒷부분의 창조적 이미지에 유념해 읽어주기 바랍니다.
詩의 씨앗 ―이미지
한 편의 시가 태어나려면 우선 시가 될 수 있는 근거 곧 씨앗이 있어야 한다.
시의 씨앗을 동양에서는 시상(詩想)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고
서양에서는 이미지라는 용어로 즐겨 사용해 오고 있다.
시상 가운데 특출한 시상을 특히 영감(靈感)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인위적인 한계를 넘어선, 자연 발생적으로 주어진 천혜의 신비한 정신적 체험인 것처럼 여기고들 있다.
이러한 동양적인 견해와는 달리 서양인의 이미지 관(觀)은 보다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략)―
주지하다시피 이미지는 대체로 유추(類推)와 연상(聯想)에 의해 형성된다.
달을 보자 머릿속에 둥근 쟁반이 떠올랐다면 이는 유추이고
꽃을 보자 벌이 생각났다면 이는 연상이다. 유추는 두 사물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하고 연상은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유추적 이미지는 동일성이 클수록,
그리고 연상적 이미지는 인접성이 클수록 독자의 공감을 능률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이나 인접성에 근거한 친근한 이미지들과는 달리,
아주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을 끌어내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독자를 낯설게 만드는 개성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상상적 이미지라고 일컫는데
이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개비처럼
―김종삼 「북 치는 소년」전문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 '크리스마스 카드' 그리고 '진눈개비' 등 세 개의 단순한 이미지들의 병치로 구성된 작품이다.
'북 치는 소년'에게서 앞의 세 이미지들을 동일성이나 인접성에 근거하여 설명하기란 곤란하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과거의 누구에게서도 제기되지 않았던,
비로소 김종삼에 의해 처음으로 들춰진 낯선 것들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지만 우선 신선하고 신기하게 와 닿는다.
뿐만 아니라 유추적 이미지와 연상적 이미지는 동일성과 인접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대상과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의미망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적 이미지인 경우는 대상과 이미지가 동일성이나 인접성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두 관계는 무한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독자들은 자기들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인이 제시한 이미지에 끝없는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다.
소위 수용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창조적 독서가 능률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된다.
현대시에서 상상적 이미지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상상적 이미지는 대상이 시인에게 스스로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대상 속에 파고들어 발굴해 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광부가 하나의 광맥을 찾기 위해서 수백 미터의 지하를 뚫고 들어가듯이,
창조적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예지와 인내와 노역을 동반하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은 사물과의 피나는 투쟁이며,
세계를 처단하는 폭력이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독재다.
시인이 그러한 고뇌를 감수하면서도 시의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이 독재적인 창조를 통해 맛보는 환희로 보상받기 때문이리라.
시의 눈부신 씨앗―영감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찾는 자의 몫이다.
로메다 님,
창조적 이미지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지요?
네, 그러면 잠시 보류해 둡시다. 골치 아프면 밀쳐 두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깊은 생각입니다.
전에 거론한 바 있는 구양수의 삼다(三多) 중 다상량(多商量)의 중요성입니다.
한 사물을 두고 계속해서 깊이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깨달음의 어떤 경지에 이르게도 됩니다.
유학(儒學)에서는 이를 격물(格物)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늘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생각을 얻게 된다는 의미쯤으로 이해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진가요?
그럼 이것도 그만 접어둡시다.
그것 아니라도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건 아니니까요.
잘 지내세요.
장마 뒤의 불볕더위가 괴롭습니다. 임보.
-제 8신-
가치 있는 삶
로메다님,
오늘은 좀 덜 골치 아픈 얘기를 해 볼까요?
시에 국한된 것만이 아닌, 말하자면 인생론적인 담론 말입니다.
나는 새 학기가 시작되어 새로운 학생들을 맞게 될 때면
'너희들의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가끔 물어봅니다.
좀 막연함이 없지 않지만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옵니다.
'출세'라든가. '돈'이라든가. '행복'이라든가…
예상했던 답변들입니다.
소위 출세를 해서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도 좋겠지요.
돈을 많이 벌어 떵떵거리면서 사는 즐거움도 대단하겠지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근심걱정 없이 정겹게 살아가는
행복한 삶도 얼마나 값진 것입니까?
그러나 로메다 님,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한 시대의 선망의 대상이었던 역대의 왕후장상들이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억만 금을 쥐고 세상을 흔들던 백만장자들이 이 지상에 남겨 놓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일생을 투자했지만
그들의 삶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볼 수 있습니까?
로메다 님, 당신의 삶의 목표는 무엇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이 우리의 의사와는 무관합니다만
그렇다고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빈둥대며 살아간다면
이는 소중한 한 생애를 낭비하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출세나 돈, 행복 등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제시한다면
이런 생각에 나는 동의하고 싶지 않군요.
출세, 돈, 행복― 물론 소중하지만 그것들 자체는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삶의 목표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분야에서 출세를 해서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든지,
돈을 어떻게 벌어 그 돈을 무엇을 위해 어떻게 쓰겠다든지,
어떤 가치 있는 삶을 통해서 행복을 어떻게 성취하겠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출세해서 돈 많이 벌어 멋진 배우자를 얻어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럽게 살겠다는
그러한 행복의 추구가 삶의 목표여서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삶의 의미를 '행복'에 두지 않고 '가치'에 둡니다.
때로는 세상이 평가하는 출세에 남보다 뒤늦고
경제적인 궁핍을 겪으며 세속적인 행복을 덜 누리며 살아갈지라도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는 그런 자기만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러한 삶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봅니다.
로메다 님,
가치 있는 삶을 자기만의 삶이란 말로 표현한 것이 좀 막연한가요?
그렇다면 '창조적이 삶'이란 말로 바꾸는 것이 좋겠군요.
좋은 축사와 충분한 사료가 제공되는 가축의 삶은
근심 걱정은 없을지 몰라도 가치 있는 삶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창조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적 삶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그런데
인간으로서 그러한 특권을 만일 포기한다면
그것은 동물들의 삶이나 다름이 없는 암흑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적 삶이란 모방과 답습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가는 삶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 내는 발명가,
새로운 이론을 창안해 내는 학자,
새로운 상품을 생산해 내는 실업가,
새로운 작품을 창작해 내는 예술가들입니다.
그러나 창조적 삶이란 이런 특수한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한 주부가 된장찌개를 끓인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는 자기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 대로가 아닌
색다른 재료들을 첨가해서 더 맛있는 된장국을 만들어 냈다면
이것이 바로 창조적 삶입니다.
어떤 어머니가 그의 아이에게 기성복을 사다 그냥 입히지 않고
천을 떠다 자기 나름대로 남다른 의상을 만들어 입혔다면
이것이 바로 창조적 삶입니다.
남의 흉내만 내면서
남의 뒤만 열심히 따라가는 모방과 답습의 삶은
자기의 삶이 아니라 꼭두각시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그러한 삶은 살지 않아도 무방한 무가치한 허비적인 삶일 뿐입니다.
로메다 님,
당신이 글을 써 보겠다고 결심한 것은 아주 훌륭한 생각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 역시 아름다운 창조적 삶입니다.
그런데 로메다 님, 당신의 '글 쓰기'가 창조적 삶이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쓴 글 속에 '새로운 것'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만일 남들이 이미 생각하고 느낀 것을 다시 쓴 것이라면
그 글은 모방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는 길은
창조 곧 새로움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로메다 님,
당신의 생애가 과거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지 못했고
또 앞으로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은 이미 그러한 삶의 문턱에 할 걸음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임 보.
-제 9신-
당신의 무뎌진 손끝
로메다 님,
어느 분야이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을 경주하지 않고서는 어렵습니다.
피아니스트가 하나의 곡을 익히기 위해서는 수십만 번의 건반을 두드려야 합니다.
학자들이 한 편의 논문을 쓰기 위해 수많은 밤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소설을 공부하는 문학도들도 얼마나 고된 수련을 감행한지 아십니까?
어휘력을 풍부히 쌓기 위해 거대한 사전을 몇 번씩 독파하기도 하고
문장력을 기르기 위해 세계적인 명작 소설들을 수십 번씩 옮겨 쓰기도 합니다.
오늘은 한국의 한 저명한 소설가가
소설 공부를 할 때의 일화를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그는 <돌>이라는 하나의 소재를 설정하고
내용이 같지 않은 100가지의 산문 쓰기에 도전했다고 합니다.
'돌'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니까
한 20가지쯤 쓸 때까지만 해도 별 어려움을 못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부터서는 점점 쓸거리가 고갈되어 여간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상력의 도움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이란 '만들어 낸 생각' 아닙니까?
상상력을 동원하여 없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는 드디어 <돌>에 대한 100가지 산문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놀랍게도 큰 변화가 왔다고 합니다.
그의 앞에 어떠한 소재가 주어져도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무슨 소재를 가지고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엮어낼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마치 데생의 실력을 갖춘 화가에겐 어떠한 대상이 주어져도
두렵지 않은 것과 같은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지금부터 우리도 그러한 훈련에 돌입하기로 합니다.
하나의 사물을 설정하고 100개의 이미지를 추출해 봅시다.
우리도 <돌>을 놓고 연습을 해볼까요?
처음엔 유추적 이미지를
다음엔 연상적 이미지를 찾아내 봅시다.
몇 개쯤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몇 십 개쯤은 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점점 새로운 이미지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머리를 더 짜보세요. 골똘히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생각이 잘 안 나면 유추와 연상의 고리에 얽매이지 말고
자연스럽게 생각의 폭을 넓혀 보세요.
김종삼이 '북 치는 소년' 속에서 '크리스마스 카드'를 생각해 내듯이
아주 낯선 생소한 것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당신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그런 것으로 말입니다.
무언가 그럴 듯한 이미지가 떠오르면,
네, 그것을 붙잡으세요.
그것이 바로 저번에 우리가 골치 아프다고 잠시 유보해 두었던
창조적 이미지입니다.
그런 창조적 이미지를 계속 찾아내어 100개를 채우세요.
로메다 님,
당신이 만일 하나의 사물을 놓고 100가지 이미지를 찾아내는 훈련을
몇 번만 되풀이한다면
어떠한 사물이 당신 앞에 주어진다 하더라도 주저하지 않고
아름답고 독창적인 이미지를 찾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다상량(多商量)의 힘이고 격물(格物)의 이치입니다.
명 요리사란 주어진 재료가 별것 아니더라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냅니다.
명 목수는 어떠한 목재가 주어져도 그 목재에 맞는 좋은 가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훌륭한 시인은 어떠한 소재가 주어져도 감동적인 시를 만들어 냅니다.
시인도 일종의 기능인입니다.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자입니다.
무슨 분야이든 기능인이 되기 위해선 피나는 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수많은 상처들로 얼룩진 명장(名匠)들의 손을 보십시오.
마치 명장(名將)들의 가슴에 매달린 훈장처럼 반짝이지 않습니까?
로메다 님,
당신의 손가락 끝 고운 지문들이 다 무디어지도록 자판기의 활자들을 두드리십시오.
당신의 부드러운 중지(中指)의 목이 단단한 볼펜에 눌려 굳은살이 박히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고운 손끝으로도 시를 빚어낼 수 없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이 기억해 주는 '좋은 시'는 굳은살이 박힌 무딘 손끝에서 태어나기 마련입니다.
시는 아무나 쓸 수 있지만
좋은 시는 아무나 쓸 수 없습니다.
로메다 님,
당신이 좋은 시를 쓸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임보.
-제 10신-
관념의 사물화
로메다 님,
이미지 찾는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미지도 열심히 찾는 이에게 머리를 내밉니다.
나는 전에 소재를 양분하여
우리의 몸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객체적 소재'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정황들을 '주체적 소재'
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미지를 찾았던 것은 객체적 소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한 편인 주체적 소재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부의 세상 못지 않게 복잡다단합니다.
얼마나 많은 욕망과 감정이 뒤얽혀 있습니까?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소위 7정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부침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감정과 욕망들이 또한 시의 중요한 소재입니다.
아니, 어쩌면 객체적 소재들 못지 않게 이러한 주체적 소재들―
곧 감정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경우가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시의 주류가 서정시인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무척 화가 난 상태라고 가정합시다.
분기충천(憤氣衝天)이란 말이 있는데
분한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오르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그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독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두 가지 표현을 비교해 봅시다.
가) "나는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무척 분하다!"
나) "나의 가슴은 분노의 용암이 넘쳐흐르고 있다!"
어느 표현이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가)보다는 나)이겠지요.
가)는 관념적인 설명이지만, 나)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적인 정황을
화산이 폭발할 때 흐르는 '용암'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끌어다 표현했습니다.
관념보다는 이미지가 우리의 가슴에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시론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 '관념의 사물화(事物化)'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미지 찾기 연습을 다시 시작해 봅시다.
우선 <기쁨[喜]>의 감정을 적절히 표출해 낼 수 있는 이미지를 찾아봅시다.
기쁨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요.
'이제 막 벙그는 백합'
'환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
'그리운 이가 보내온 편지'
'…………'
당신이 과거에 체험했던 것 가운데서 기쁨의 감정을 유발했던 사물들을
하나씩 붙잡아내 보십시오.
당신의 체험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
이제는 당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쁨의 사물'들을 만들어 보십시오.
머리를 짜고 짜서 당신의 상상력으로 100개를 채우는 데 도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어떠한 감정도
당신의 상상력에 의해 효율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J. C. Ransom이라고 하는 문학이론가는 시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가) 관념시(platonic poetry)
나) 사물시(physical poetry)
다) 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
가)는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읊은 시입니다. 주체적 소재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
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노래한 작품입니다. 객체적 소재가 대상이 됩니다.
Ransom은 주관에 기우는 가)나, 객관에 치우치는 나)의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를 이상적인 시로 설정했습니다.
다)는 가)와 나)의 통합입니다.
즉 관념의 사물화가 구현된 작품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미지)을 빌어서 비유의 구조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념시라고 다 부정만 할 것은 아닙니다.
교훈적인 시들 가운데는 관념시가 적지 않습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떠나간 후면 애닲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옛 시조들은 대개 관념시들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물시 가운데서도 황홀한 이미지들이 표상된 수작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호수 2」라는 작품입니다.
호수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의 동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리가 목이 간지러워 호수를 목에 감고 마치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있다는 기발한 이미지입니다.
전에 보내드린 바 있는 「능소화」라는 내 졸시도
<화냥년>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랜섬의 말처럼 모든 시가 관념의 사물화를 지향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나 소재의 성격에 따라 관념시가 효율적인 경우도 있고
또한 사물시가 더 적절할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다음 편지에는
잡아낸 이미지를 어떻게 시로 전개해 갈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물 속에서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열심히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뒤에 첨부한 몇 장의 사진들은 지난 여행길에 내가 붙잡은 중국 태산의 경관입니다.
구름 속에 싸인 그윽한 운산(雲山)을 보면서 잠시 더위를 달래십시오. 임보.
[제11신]
이미지를 어떻게 펼칠 것인가?
―병치의 시법
로메다 님,
아주 짧은 시인 경우는 하나의 단순한 이미지만으로
한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앞에서 예로 들었던 황순원의 「빌딩」이나 「옥수수」
그리고 정지용의 「호수 2」같은 작품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작품들은 한 개의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들이 결합하여
이미저리(imagery, 이미지의 무리)로 발전하면서 시행(詩行)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시행들이 불어나 연(聯)으로 확대되고,
다시 그 연들이 불어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이해하기 복잡한가요?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싶은 말이 적으면 짧아지고, 하고 싶은 말이 많으면 길어진다고―.
오늘은 이미지의 전개 가운데 가장 단순한 구조라고 할 수 있는
병치구조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등한 이미지나 생각들을 나란히 늘어놓는 구조입니다.
다음에 예로 보인 작품은 대등한 이미지 혹은 생각들을
행 단위로 병치해서 만든 것입니다.
나는 왜 너를 보면 망명(亡命)을 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맨발로 파도를 달리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백조왕자가 되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유서를 쓰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이 세상 모두를 뒤집어엎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장미꽃 현란한 꽃비를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하늘로 하늘로 금사다리를 놓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천국과 지옥의 합창을 듣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물구나무가 서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또 하나 태양의 부활을 보고 싶니?
나는 왜 너를 보면 길길이 길길이 뛰고 싶니?
―박두진「해비명(海碑銘)」전문
너무 도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구조입니다.
'바다'를 보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상념과 이미지들을
11개의 행에 각각 담아 대등하게 배열하고 있습니다.
행과 행의 연결에 어떠한 관련성이나 인접성(隣接性)도 없습니다.
작품의 길이도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 속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낼 수만 있다면
이런 유형의 시를 우리도 얼마든지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메다 님, 시에 자신감이 좀 생기지 않았나요?
다음에 예로 보인 작품은 연 단위의 병치입니다.
우리의 창이 되어
고요히 닫힌
그러한 눈.
보석보다
별을 아끼는
그러한 손― 왼 손.
우리의 뜻을
밝게도 장미빛으로 태우는
그러한 가슴― 둥근 가슴.
목소리―우리의 노래인
맑은 목소리.
우리의 기도를 다소곳이
눈물에 올리는
깨끗한 무릎.
그러한 여인을
아내로 어미로 맞는
남자의 기쁨.
남자로 태어난 기쁨.
―김현승「사랑하는 女人에게」전문
제1연에서부터 제5연까지는 '사랑하는 여인'이 지닌 아름다운 것들 가운데
다섯 가지를 들어 연 단위로 병치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인이 가진 눈, 손, 가슴, 목소리, 그리고 무릎에 대한 이미지들을
그저 늘어놓고 있을 뿐입니다.
다만 마지막 제6연에 가서 그러한 여인을 가진 것이
남자의 기쁨이라고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로메다 님, 어떻습니까?
이러한 전개 구조라면 시 만드는 일이 크게 어려울 것도 없지요?
대상들 속에서 영롱한 이미지들만 끌어낼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도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봅시다.
「사계(四季)」라는 제목을 걸겠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 지닌 이미지들을 하나씩 붙잡아 내서
4행 혹은 4연의 병치구조로 된 작품을 만들어 보기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의 과제입니다.
말복이 지나자 매미 소리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군요.
남도는 지금 자미화(紫薇花)가 한창이라고 합니다.
끝에 담아보낸 그림은
며칠 전, 어느 독자로부터 받은 명옥헌(鳴玉軒)의 자미화입니다.
세상에 자연처럼 황홀한 것은 없습니다.
음미하면서 마지막 더위를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임보.
[주] 자미화(紫薇花) : 목백일홍, 배롱나무꽃
[주] 명옥헌(鳴玉軒) : 당양 고서에 있는 정자. 광해조 때 은사(隱士)였던 오희도(吳熙道, 1583∼1623)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넷째 아들 이정(以井) 오명중(吳明中)이 세운 것으로, 연못 주변의 오래된 배롱나무들이 운치를 돋구고 있음. 개울물이 옥구슬 부딪는 소리를 낸다고 하여 명옥헌이라 했다고 함
[제12신]
대우의 시법
로메다 님, 과제를 아주 썩 잘 하셨습니다.
네 계절에 대한 이미지를 붙잡아 병치구조의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했는데,
그럴듯한 작품을 만들어 냈군요.
따스한 양지밭에 돋은 제비꽃
삼복 염천에 타는 자미화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과일
천지를 희게 덮은 백설
이른 봄에 피어나는 앙증스런 제비꽃, 한여름의 요염한 목백일홍
그리고 가을의 풍성한 과일과 겨울의 눈을 지적하셨군요.
붙들어낸 이미지들이 특별히 경이로운 것들은 아니지만
크게 문제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욕심을 부린다면
봄(제비꽃)과 여름(자미화)이 둘 다 꽃으로 겹치니까
어느 하나를 꽃이 아닌 다른 사물로 바꾸면 좀더 다양한 느낌이 들겠지요?
여름은 꽃보다는 잎의 계절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자미화' 대신 '포플러'쯤으로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한편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까요.
봄과 여름이 꽃이니까 이에 맞추어 가을과 겨울도 꽃으로 통일해 보는 것입니다.
가을은 '국화'가 쉽게 떠오르지요?
제3연을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런 국화'로 하면 어색한가요?
그렇다면 좀 상투적이긴 합니다만
'노랗게 피어나는 탐스런 국화'쯤으로 해 두지요.
그리고 겨울은 '눈' 대신 '눈꽃'이나 '설화(雪花)'로 표기만 바꾸면 되겠군요.
이렇게 고치려는 것은 일관된 통일의 조화를 지향코자 해서입니다.
모든 사물의 아름다움은 조화와 균형에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율격 구조에 관한 것입니다.
제1연과 제3연은 소위 7·5조라고 하는 율격의 틀에 맞는 구조입니다.
제2연은 5·5입니다만 읽기에 큰 불편이 없으므로 7·5조의 변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러나 제4연의 율격구조는 7·2가 되어 읽기에 좀 어색하지요?
7·5조의 율격구조에 맞추려면 한 어절(음보)쯤 늘려야 합니다.
'눈꽃' 앞에 한 어절을 넣어 '삼동의 눈꽃'으로 하면 7·5조에 맞게 떨어집니다.
시의 운율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따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세계는 사물들의 병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많은 식물과 동물들을 위시해서 삼라만상의 자연물들이
대등하게 공존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에서의 병치구조는 가장 자연스런 세계 구조의 모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엔
시에서 즐겨 구사되고 있는 대우(對偶)의 구조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우는 '짝 이룸'입니다. 두 개의 사물이나 정황을 나란히 늘어놓는 기법인데
대구(對句)라고도 합니다.
가)
산은 높고
물은 맑다
나)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가)는 산의 높음과 물의 맑음이, 나)는 인생의 짧음과 예술의 긺이
나란한 대우의 관계로 놓여 있습니다.
특히 '짧'고 '긺'의 상반의 관계에 있는 나)와 같은 경우를 대조(對照)라 이르기도 합니다.
대우의 원리에 대해서 기술해 놓은 다음의 글을 우선 읽어보도록 하지요.
삼라만상의 형상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다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얼굴이나 식물의 잎을 보라.
얼마나 균형이 잘 잡힌 대칭을 이루고 있는가.
조류와 어류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곤충과 같은 하찮은 미물들 역시 경이로운 대칭의 몸매를 지니고 있다.
생명체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자나 분자의 구조도 그렇고 천체의 형상도 또한 그렇다.
가장 완전한 대칭의 구조는 구(球)인데, 원자나 별들은 바로 그 균형의 이상적인 형상인 구형으로 되어 있다.
대개의 과일들 역시 구형을 지향하는데,
이는 가장 조화로운 상태를 추구하려는 생명의 자연스런 욕구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물건들 거의가 균형과 조화를 지향하는 대칭의 구조를 지닌 것들이다.
모든 그릇이며 도구들이 다 그렇지 않던가. 그러니 시에 있어서도 그것이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려면 대우의 구조를 거부할 수 없으리라.
아니 대우는 만상의 존재 원리이기도 하다.
만상은 다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천지, 상하, 좌우, 주야, 남녀 등 다 짝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서로 같이 있음으로 서로를 함께 드러낸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존재 의미가 없다.
대우는 그러한 세계의 구조적 원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대우는 만상의 구조 원리를 단순히 답습하는 것으로 끝나는 기법만은 아니다.
시인은 대우의 구조를 통해서 창조적인 세계를 창출해 낸다.
대우 곧 짝을 짓게 하는 일은 세계를 정돈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잡다한 사상(事象)들이 혼재해 있는 부조리한 세계를 정리 정돈한다.
불필요한 것들은 삭제해 버리고 시인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선택하여
나란히 배열함으로 해서 새로운 질서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
―『엄살의 시학』(태학사,2000) p.63-64
로메다 님, 인용한 글의 요지는 사물이 대칭의 구조를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도 대우의 구조를 지녔을 때 우리의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물들 가운데서 어떤 특정한 대상들만 선택해서
나란히 늘어놓는 대우의 작업이야말로 시인의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세계를 개편하는 창조의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시의 절구(絶句)에서는 압운(押韻)과 함께 이 대우가 시를 엮는 중요한 기법으로 요구됩니다.
江碧鳥逾白 (강물이 퍼러니 물새는 더욱 희고)
山靑花欲然 (산빛이 푸르니 봄꽃은 불붙듯 붉네)
今春看又過 (어느 덧 이 봄도 또한 지나가나니)
何日是歸年 (어느 제나 고향에 돌아갈 수 있으리)
두보(杜甫,712∼770)의 유명한 절구입니다.
앞의 두 행이 절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습니다.
강(江)과 산(山)의 자연, 새[鳥]와 꽃[花]의 사물,
그리고 퍼러다[碧]와 푸르다[靑], 흰 색[白]과 붉은 색[然=燃]의 색채적 대조가 놀랍습니다.
생동감이 넘치는 화사한 봄의 정경을 조화롭게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뒤의 두 행에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안타까운 심회를 읊습니다.
앞의 화사한 정경과는 사뭇 다릅니다.
흔히 말하는 한시의 전경(前景)[1,2행]과 후정(後情)[3,4행]의 정황이
또한 대조적으로 엮어지면서 서로를 두드러지게 드러내 보입니다.
하늘에는 달이 없고 땅에는 바람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소리도 없고 나는 마음이 없습니다.
宇宙(우주)는 죽음인가요
人生(인생)은 잠인가요
한 가닥은 눈썹에 걸치고 한 가닥은 작은 별에 걸쳤던 님 생각의 金(금)실은 살살살 걷힙니다.
한 손에는 黃金(황금)의 칼을 들고 한 손으로 天國(천국)의 꽃을 꺾던 幻想(환상)의 女王(여왕)도 그림자를 감추었습니다.
아아 님 생각의 金(금)실과 幻想(환상)의 女王(여왕)이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의 속에서 情死(정사)한 줄이야 누가 알아요.
宇宙(우주)는 죽음인가요
人生(인생)은 눈물인가요
인생이 눈물이면
죽음은 사랑인가요
―한용운 「고적한 밤」 전문
전체가 빈틈없는 대우의 구조로 엮어진 작품입니다.
첫 두 행만 보더라고 각 행내(行內)에 대칭[하늘과 땅, 남과 나]을 이루고 있고,
다시 행간(行間)의 대칭[자연과 인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복합대칭의 구조가 작품 전편을 지배하며 전개됩니다.
이와 같은 대칭구조의 반복은 의미의 리듬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나는 이러한 의미율을 내재율의 한 유형으로 다룬 바도 있습니다.(졸저『현대시운율구조론』(태학사, 1999.)pp.92∼114)
로메다 님,
시뿐만이 아니라 산문에서도 대우의 기법을 즐겨 씁니다.
좋은 산문치고 대우의 기법을 구사하지 않은 글은 없습니다.
훌륭한 문필가는 대우의 기법을 잘 부릴 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로메다 님,
대우의 기법을 익히는 데 게을리 하지 말기 바랍니다.
정진을 기대합니다. 임보
[제13신]
배경과 대상과 정황의 구조
로메다 님, 지난번에는 병치와 대우의 시법에 대해서 얘기했었지요?
오늘은 '배경과 대상과 정황'의 구조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물을 노래한 시는 대개
어디에 무엇이 어찌한다(혹은 어떠하다)의 구조를 지닙니다.
예를 들자면
가)산에 나무가 푸르다든지
나)강물에 물고기가 논다라는 구조입니다.
가)는 상태에 대한 서술인 '어떠하다'이고, 나)는 동작에 대한 진술인 '어찌한다'입니다.
모든 문장은 이러한 골격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여기에 수식어가 붙기도 하고 혹은 자리바꿈을 하면서 변화로운 문장으로 발전합니다.
시적 진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익히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인 박목월의 「산도화·1」을 볼까요?
두 개의 <배경과 대상과 정황>이 병치된 아주 단순한 구조의 작품입니다.
산은
九江山
보랏빛 石山
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박목월 「山桃花(산도화)·1」전문
박목월의 첫 시집 『山桃花(산도화)』(영웅출판사, 1954)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산도화'와 '사슴'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다는 설명입니다.
즉 산에는 산도화가 벙글고, 물에는 사슴이 발을 씻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배경+대상+동작'의 두 정황이 나란히 병치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의미 그 자체만으로 따지면 별로 신기할 것도, 감동적일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작품을 실제로 읽고 난 뒤의 정감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아주 흥겹고 신선하고 맑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작품의 어떤 요소들이 그러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지
다음의 글을 읽어가면서 따져보도록 합시다.
―(전략)―우선 이 작품은 조화로운 율격을 지니고 있어서 리드미컬하게 읽힌다. 각 연이 7·5조류의 율격에 담겨 있다.(필자는 7·5조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6·5, 5·5 혹은 8·5 등의 율격 형태들을 '7·5조류'라고 명명한다.) 각 연은 3행씩으로 이루어졌는데 행의 음절수를 점점 불려 배치하고 있는 점층 구조로 되어 있다. 다만 제3연만이 정반대인 점강 구조인데, 이는 전(轉)에서 의도적인 파격을 즐겨 시도하는 절구(絶句)적 양식의 구현으로 생각된다. 간결한 점층적 배행의 반복에서 시각적인 리듬을 살리고도 있다. 한편 ㅅ과 ㄴ의 자음들이 많이 반복되는 압운적 장치를 통해서 청신감과 유연감을 느끼게도 한다.
의미 구조를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다음의 도표처럼 정리된다.
1연(기) 배경------------산(구강산)--------------보라색(석산)
2연(승) 대상+정황-------산도화+피어남-----------홍색(산도화)
3연(전) 배경------------물(눈 녹은 물)-----------백색(옥 같은 물)
4연(결) 대상+정황-------사슴+발을 씻음-----------갈색(사슴)
'산'과 '물'의 대조적인 배경에 '식물(산도화)'과 '동물(사슴)'이라는 대립적인 대상의 배치도 조화롭다. 또한 각 연이 다채로운 색채적 이미지를 고루 담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제1연에서 제2연에 이르는 진술은 점강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즉 '산→구강산→석산→산도화→두어 송이→송이'로 대상의 범주를 점점 축소해 가면서 특정한 부분을 선명히 노출시킨다. 이러한 전개 방식은 제3, 4연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즉 '물(개울)→사슴→암사슴→발'로 점점 축소 제시되고 있다. 영상예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경으로부터 시작하여 근경에 이르는 클로즈업의 기법이다. 대상을 단도직입적으로 일시에 제시하지 않고 주변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은근히 접근하여 마침내 독자들의 시선을 요처에 집중시키는 기법이다.
한편 이 작품의 내포적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자. 배경으로 제시된 '九江山(구강산)'은 고유명사지만 '九江'이 불러일으키는 이미지가 산을 감돌아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을 연상케 한다. 그러니 그 산은 맑은 강물이 감돌아 싸고 있는 속세로부터 멀리 격리된 자연처럼 느껴진다. 또한 그 산은 보통의 산이 아니라 보랏빛 돌로 이루어진 석산(石山)이다. 보통의 초목들은 범접도 할 수 없는 강직(剛直) 청정(淸淨)의 신성한 산이다. 그 산의 돌 틈에 산도화가 한 그루 초연하게 자라 몇 송이의 꽃을 이제 막 터뜨리고 있다. 봄철에 흔히 볼 수 있는 진달래나 철쭉 같은 그런 꽃이 아니라, 비범하게 붉은 산도화다. 산도화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을 연상케도 한다. 그러고 보니 앞의 '九江'이나 '보랏빛 석산' 등도 다 은근히 비일상적인 세계―선경(仙境) 곧 이상적 공간을 암시하는 몫으로 설정된 것 같다.
사슴은 동물 가운데서 가장 선량하고 깨끗한 짐승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사슴 가운데서도 암사슴이니 얼마나 유순하고 정갈하겠는가? 그런데 그 암사슴의 발을 차고 맑은 얼음물에 씻기어 정화시키고 있다. 결벽을 지향하는 작자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속인부재(俗人不在)의 정결한 자연만이 제시된 작품이다.
어느 시대이거나 시인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불만스럽기만 하다.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질시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 세태는 증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거부 정신이 이상향을 꿈꾸게 한다. 「山桃花·1」은 목월이 꿈꾸는 이상 세계다. 그것은 전통적인 선(仙)의 세계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적인 경향은 「청노루」「모란여정」등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두 개의 생명체 '산도화'와 '사슴'은 자연물이면서 한편으론 시적 자아가 전이(轉移)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산도화나 사슴처럼 초연·정결한 생명체로서 자연과 합일코자 하는 시인의 선망이 두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월은 자아의 사물화(산도화·사슴)로 세속적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시가 복잡해야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비록 단순할지라도 조화롭고 율동적인 구조를 통해서 격조 높은 시정을 아름답게 구축하지 못할 것도 없다. ―『牛耳詩』제155호(2001.5.)
로메다 님,
해설이 너무 장황해서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나요?
그러면 이렇게 기억하세요.
'어디에 무엇이 어떠하다'라는 단순한 구조도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다고―.
다만 어떤 이채로운 사물과 배경을 어떻게 선택해서 배치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이 역시 수많은 선택과 배치의 시행착오를 거쳐 터득하는 수밖에
다른 지름길은 없습니다.
로메다 님,
청록파의 초기시들을 즐겨 읽으십시오.
청록파 중에서도 목월의 초기시를 나는 권하고 싶습니다.
임보.
[제14신]
기승전결의 사단 구조
로메다 님,
세상의 모든 일은 시작과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작과 끝의 중간이 그 일의 진행 과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일은 시작, 중간, 끝의 3단 구조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글의 진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논문의 구조를 얘기할 때 서론 본론 결론 하는 것이 바로 이 3단 구조입니다.
그런데 글이란 것도 세상의 일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그 진행 과정에 우여곡절을 많이 겪게 됩니다.
그래서 그 '중간' 부분이 다시 2단계, 3단계 혹은 4단계로 나누어지기도 합니다.
장편 소설이나 희곡의 전개 과정을 놓고
발단(시작)→ 전개→ 갈등→ 위기→ 절정→ 종말(끝) 등으로 논하지 않습니까?
이 경우는 중간 부분을 4단계(전개, 갈등, 위기, 절정)로 다시 나눈 것이 됩니다.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하나의 이미지만을 제시하는 단단(單段, 1단) 구조로부터
시작과 끝만을 지닌 2단 구조 그리고 3, 4, 5단 등 다양한 구조를 지닙니다.
그런데 우리 시에서 압도적으로 선호되고 있는 구조는 4단 구조입니다.
그렇게 된 것은 기(起) 승(承) 전(轉) 결(結)의 4단계를 지닌
한시(漢詩) 절구(絶句)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절구의 영향을 받기 이전인 우리의 고대시가
「구지가(龜旨歌)」나 「황조가(黃鳥歌)」같은 노래들이
4단 구조로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다른 이유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나는 그 요인을 사계(四季)의 변화가 뚜렷한 온대의 기후풍토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즉 4계의 변화에 오래 적응하다 보니 4단계의 전환 구조에 친숙하게 된 것도 같습니다.
로메다 님,
이유야 어떻든,
홀수보다는 짝수가 그리고 3각형보다는 4각형이 안정감을 줍니다.
시에서의 4단 전개가 선호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안정적으로
정서를 담아낼 수 있는 형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인가 싶습니다.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박목월의「閏四月」입니다.
외딴 산봉우리에(배경) 꾀꼬리가 울면(대상),
외딴 집(배경)의 눈먼 처녀가 엿듣는다(대상)는 내용입니다.
제1, 2연에서는 배경과 대상이 각각 분할되어 있는 데 반해
제3연에서는 전후 행에 배경과 대상을 함께 담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어디에 무엇이 어찌하면, 어디에 무엇이 어찌한다'의
배경과 대상이 두 개 병치되어 있는 4단 구조입니다.
지난번에 예로 보였던 박목월의 「산도화·1」도
배경과 대상이 두 번 병치되어 있는 4단 구조였습니다.
이처럼 4단계의 전개가 '짝을 이룬 대우'들로 이루어질 수도 있고
4개의 대등한 정황을 늘어놓는 병치의 구조일 수도 있고
단계의 앞뒤가 서로 이어지는 연쇄 구조일 수도 있고
각 단계가 정도를 점점 고조시켜 가는 점층 구조일 수도 있고
순서를 좇아 진행되는 순차(順次) 구조일 수도 있습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이육사의 「정정」,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등
4단 구조로 이루어진 좋은 작품들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비록 외형은 4연으로 되어 있지 않은 작품이라 할지라도
의미 구조상 4단계로 볼 수 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습니다.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小室宅
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 너머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映山紅」전문
이 작품의 외형적 배열은 5연으로 되어 있지만 의미 전개는 4단 구조로 볼 수 있습니다.
제3연까지 각 연의 제1행과 제2행이 배경과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는 달리 제4연과 제5연에서는 연 단위로 배경과 대상이 나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의미 구조로 본다면 제4, 5연은 한 부분으로 묶일 수 있어서
전체 작품은 기승전결의 4단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3연까지는 앞말의 꼬리를 이어받는 연쇄 구조인 것도 재미있습니다.
행 단위로 ㅅ, ㄴ, ㅈ 등이 빚어낸 압운적인 효과도 조화롭습니다.
한 여성의 애잔한 삶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품입니다.
미당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유수한 수작의 하나로 평가할 만합니다.
로메다 님,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 감상은 첨부자료로 덧붙이겠습니다.
4단 전개가 시인들이 선호하는 보편적인 구조인 것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임보.
[참고 자료]
시「영산홍」은『文學』(1966.11.)에 발표된 뒤, 시집『冬天』(1968.11.)에 수록되어 전한다.
미당이 1915년 생이니 지천명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쓴 작품이다.
전 5연으로 이루어진 2행시인데 7·5조의 율격에 담긴 아름다운 소품이다.
얼른 보기엔 별로 대단한 작품 같지 않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서정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 아니다.
제1연 시작부터 잘 풀리지 않는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의 정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작은 영산홍 꽃잎에 어떻게 산이 어린다는 것인가?
산 그림자가 영산홍 꽃잎에 드리운다는 표현인가?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별로 흡족하지가 못하다.
그러면 어떤 정황을 그렇게 그리고 있단 말인가.
영산홍의 한자 표기 '映山紅'의 '映'은 '비추다, 비치다, 덮어 가리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映山紅'이라는 말은 '산이 어른거리며 비치는 빨간(紅) 꽃'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이 구절이 이런 단순한 이미지만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
이 구절은 제2연으로 이어지면서 복합적인 의미망을 새로이 형성하게 된다.
우선 제2연을 살펴본 다음 그 복합적인 의미망을 따져보도록 하자.
제2연은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을 제시하고 있다.
'슬픈'으로 미루어 보아 그 소실댁은 아마도 님의 사랑을 이젠 제대로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으로 짐작된다.
간밤에 이제나저제나 혹 님이 찾아올까 잠 못 이루며 전전반측 기다리다 지샜을 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지금도 님 생각에 젖어 있다가 낮잠 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산자락'의 그 '산'은 님의 상징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제1연에서의 산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선다.
이 역시 님의 상징어로 본다면 영산홍은 여인 곧 소실댁이 된다.
영산홍처럼 아름답고 젊은 소실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제1연은 겉으로는 영산홍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님 생각에 젖어 있는 아름다운 한 여인을 거기에 포개어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의 은근한 감춤의 멋이 있다.
제3연에서는 대상을 바꾸어 툇마루에 놓인 요강을 등장시킨다.
원래 요강이 놓일 장소는 은밀한 방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요강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마루에 나와 있다.
그것도 원마루에 잇대어 달아낸 툇마루다. 툇마루는 잉여적 공간이다.
마치 본부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어 둘째 아내로 살고 있는 소실댁과 흡사한 처지다.
잉여적 공간에 방치된 요강은 다름 아닌 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소실댁을 상징한다.
여기서의 요강은 T. S. 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제4연부터서는 이제까지 전개해 오던 소실댁 주변의 정경과는 달리
시선을 180도 돌려 엉뚱하게 바다를 끌어들이고 있다.
보름사리는 보름 무렵의 조수 곧 가장 충만한 만조(滿潮)를 이루는 시기다.
제5연은 소금 발이 쓰려 우는 갈매기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당황하게 된다.
도대체 갈매기 얘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 온 의미구조로 본다면 갈매기도 분명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 것 같다.
우선 갈매기가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소금 발이 쓰리다'는 것은 발이 소금기에 절여서 아프다는 뜻이리라.
왜 소금기에 절였을까. 바닷물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리라.
밀물을 타고 몰려오는 고기떼들을 잡아먹기 위해 정신없이 바다에 발을 담그다 보니 절었으리라.
그러니 여기서의 갈매기의 울음은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즐거운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갈매기의 정체가 떠오른다.
갈매기는 곧 님이 아니겠는가.
소실댁은 돌아본 척도 않고 외지에 나가 여성편력에 여념이 없는 님을
물고기 사냥에 빠져있는 갈매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 *
미당은 산문 「영산홍 이야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재미있다.
그는 이 작품을 쓸 무렵까지도 영산홍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소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한때 승지의 소실이었다.
그 집 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기에 그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영산홍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꽃은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山丹)이었던 것을 쉰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 아는 것이 때로는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변명한다.
사실 미당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빨간 산단꽃과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만일 그 꽃의 이름이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작품의 첫 연과 같은 구절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작품 「영산홍」은 아예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牛耳詩』제150호(2000.12.)
[제15신]
「안면도 바다」에 관하여
로메다 님,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와 연관된 또 다른 이미지들이 발생하여
이미저리로 발전해 간다는 얘기를 전에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 경험을 통해서 하나의 이미지가 어떻게 발전해 가는가를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작품을 먼저 읽어본 다음 얘기를 시작할까요?
四月 봄 바다가
몸살하는 걸
잠든 섬
갯가에서
처음 보았지
갯마루 언덕마다
타는 진달래
진달래 불꽃에 눈이 멀어
쓰러져 혀로 걷는
바달 보았지
봄마다
몸살하는
매운 꽃바람
그 바람이 어디서
이는지를
잠든 섬
갯가에서
보고
왔었지. ―「안면도(安眠島) 바다」전문
로메다 님,
어떤 정황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만 이해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안면도(安眠島)라는 평화로운 이름을 가진 섬이 있지 않습니까?
서산 앞 서해안에 자리한 길다란 섬인데 지금은 연육교가 놓이고
개발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관광지로 이름을 얻었지요.
그러나 15, 6년 전만 해도 아주 한적한 섬이었습니다.
나는 그 '안면도(安眠島:편안하게 잠자는 섬)'라는 섬의 이름에 끌려
지도를 펴놓고 자주 들여다보다가 드디어 그 섬을 찾아 차를 몰았습니다.
송림이 우거진 어느 한 해변에 닿았는데,
4월이었으니까 바다를 찾는 사람들도 없었고
모래사장에 부드럽고 잔잔한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동해와는 달리 서해의 바다 물결은 얼마나 부드럽습니까?
그 부드러운 물결의 이미지가 마치 '혀'처럼 느껴졌습니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혀로 계속 핥고 있는 바다,
물결이 혀라는 느낌이 들자 바다가 엎드려 있다는 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쓰러진 바다'라는 두 번째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왜 바다가 쓰러졌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때 갯가의 언덕에는 진달래꽃이 불붙듯이 환하게 타고 있었습니다.
옳지, 저 꽃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 꽃이 너무 눈부셔 그만 쓰려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로메다 님, 어떻습니까? 내 상상력이 그럴 듯합니까?
그런데 쓰러진 바다가 멈추지 않고 계속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혀로 걷는 바다'라는 세 번째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한 발견에 도달합니다.
진달래꽃 해안과 움직이는 바다 사이에 바람이 일어난다고
그 바람이 바로 '꽃샘바람'이라고―.
해마다 이른봄 꽃필 무렵 불어오는 차가운 꽃샘바람이
어디서 오는 지를 몰랐는데 바로 여기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로메다 님,
내 얘기를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바다 물결의 리듬을 생각하면서 7·5조의 율격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각 연의 분량은 자유스럽게 배치했습니다.
제1연은 두 개의 7·5
제2연은 세 개의 7·5
제3연은 다시 두 개의 7·5
마지막 제4연은 한 개의 7·5입니다.
각 연의 행의 배열도 7·5의 율격과는 상관없이 자유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물결들에 어울리게 비교적 짧게 배열했습니다.
마지막 연은 분량이 적으니까 행의 길이들이 더욱 짧게 되었습니다.
작품 전제의 구성은 기승전결의 4단 구성입니다.
로메다 님,
지난 몇 차례에 걸쳐 작품의 전개 유형들에 관해 말씀 드렸습니다만
내가 제시한 것들은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도식적인 전개 구조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지의 발전을 좇아 자연스럽게 펼쳐나가십시오.
그러면서 어떤 형태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가장 적절한가를
모색하여 결정하면 됩니다.
이것이 정형시와는 다른 자유시의 특권입니다.
정형시는 지켜야 할 이미 정해진 틀이 있지만
자유시는 내 마음대로 작품의 형태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만들어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내용에 가장 합당한 형식을 찾아내야 하는 책임이 따르니까요.
그래서 자유시는 작품마다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유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가 정형시보다 쉽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입니다.
또 부담스러운 얘기를 했나요?
그렇다면 이것도 쉽게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따라 그냥 자연스럽게 전개해 가면 된다고―.
그렇게 많이 쓰다보면 언젠가는 자연히 최선의 방법이 터득될 것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임보.
[제16신]
시의 길
로메다 님,
보내온 편지를 읽고 나는 지금 상당한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습니다.
로메다 님에게 계속 시를 가르쳐야 할 것인지
아니면, 시의 길을 가지 말라고 말려야 할 것인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군요.
대학입시에 두 번씩이나 고배를 마신, 그러니까 3수생이군요.
시를 쓰기 위해 대학 입시 공부를 포기하고 싶다고요?
실로 조언하기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도 청소년기에 그와 유사한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겪었던 일을 말씀드리면 결단하는 데 혹 도움이 될 수도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시골 중학교에 다니면서
멋쟁이 체육 선생님을 만나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었지요?
그 시골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때문이었든지
도의 행정 도시에 자리한 지방의 한 명문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자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학교의 도서관이었습니다.
시골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수만 권의 책들이 꽂혀 있는 도서관
나는 매일 방과 후 그 책들에 묻혀 살았습니다.
배고픈 누에가 정신 없이 뽕잎을 갉아먹듯이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고2에 접어들면서 내 일생의 진로를 문학으로 결정했습니다.
전에는 세상 사람들이 선호하는 법과대학을 나도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고3이 되자 학교에서는 입시 공부를 철저히 시켰습니다.
매월 모의 고사를 치르고
100등 이내의 학생들의 명단을 학교 본관의 현관 위 벽에 게시했습니다.
마치 과거시험에 합격한 인재들을 세상에 알리는 방문처럼 크게 걸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와 두 선생님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한 분은 교장 선생님이고 다른 한 분은 국어 선생님이었지요.
교장 선생님을 좋아하다니 잘 이해가 안 갈지 모르지만
나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이 그 교장 선생님을 흠모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매주 월요일 아침 운동장에서 갖는 전체조회 시간에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는 아름다운 말씀들을 자주 하셨습니다.
만일 비라도 내려 운동장 조회를 못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훈화의 말씀을 못 듣는 것이 얼마나 아쉬웠는지 모릅니다.
방학 때면 교장 선생님께 긴 편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굵은 뿔테안경을 쓰신 국어 선생님은 항상 위트와 유머가 넘쳤습니다.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예술과 철학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습니다.
보들레르를 위시해서 랭보나 말라르메 발레리 같은 상징파 시인들
고흐나 고갱 같은 인상파 화가들
사르트르나 까뮈 같은 실존주의 철학자들
그리고 생의 철학자 린위탕(林語堂)의 『생활의 발견』이라든지
일본의 구라다하쿠조(倉田百三)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같은
사색적인 책들을 소개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내가 당대의 유한한 삶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을 꿈꾸며
문학을 선택하게 된 것도 아마 국어 선생님의 영향이 컷을 것입니다.
3학년 1학기 6월경이나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방과후에 국어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몇 개월 동안 모의고사 100등 안에 내가 끼지 못한 것을 보시고
요즈음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궁금해 하셨습니다.
문학의 길로 가겠다고 결심한 후
나는 학교 공부에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글을 쓰는 것은 학벌과는 상관없는 일이 아닌가.
많이 읽고 많이 써 보는 일이 최선이다.
비싼 등록금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가느니보다는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원하는 책을 사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등바등 입시공부에 매달린 친구들을 보며 냉소를 지었습니다.
모의고사 답안지에도 장난스레 시 비슷한 잡문을 적어 넣곤 했습니다.
국어 선생님께 사실대로 말씀드렸지요.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대학에 들어가 봐야 특별히 배울 것도 없지.
교수들의 이론이야 그들이 써놓은 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알 수 있고…."
하시며 내 말에 맞장구를 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끝에 가서
"그런데 말이야,
대학에는 대학 생활이라는 것이 있어.
학우와 학우들 사이 혹은 스승과 제자 사이의 낭만적인 삶이 있거든.
그건 대학에 가지 않고는 맛볼 수가 없지.
그 낭만적인 대학 생활까지도 별 흥미를 못 느낀다면 가지 않아도 상관없지."
라고 덧붙이셨습니다.
로메다 님,
나는 그 '낭만적인 대학 생활'을 놓고 며칠 동안 전전반측하며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래 그 낭만적인 생활이 어떤 것인지 후회되지 않도록 한번 맛보기로 하자.
들어가서 재미없으면 그때 그만 둬도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다시 입시공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의 괜찮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고(아마 운도 따랐을 것입니다)
그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시 얘기를 하면서 밥벌이도 할 수 있는
대학의 직장도 얻게 될 수 있었습니다.
로메다 님,
나는 늘 그 국어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만일 그 분이 그때 분별력이 없는 건방진 나를 보고
"이놈아, 너는 아직 몰라. 대학 가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문학은 대학에 들어가고 난 뒤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잔말말고 입시 공부나 열심히 해!"
라고 나무라셨다면 나는 오히려 반발심으로
대학에 가지 않겠다는 나의 결심을 더욱 굳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는 아마도 반거들충이가 되어
지금까지 떠돌이 인생을 살고 있을 지 누가 압니까?
로메다 님.
인생의 어느 시절이 가장 아름다웠던가 회고해 보면
역시 학창 시절입니다.
곤궁과 시대적인 고통으로 어려움을 적지 않게 겪었지만
인생의 황금시대는 역시 젊음의 학창시절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메다 님,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다시 그 학창시절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이것이 로메다 님의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입니다.
졸문 「시의 길」을 덧붙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고 시의 길이 얼마나 고된 길인가를 다시 생각하면서
마음의 결단을 내리기 바랍니다.
임보.
[첨부자료]
시의 길
시는 한 톨의 쌀도 생산해 내지 못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시는 하등의 물질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
아니, 도움을 주기는커녕 시를 열심히 읽으면 읽을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생산의 효율성은 줄어들는지 모른다.
시를 쓰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경우에 따라서는 인세(印稅)나 고료(稿料)의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다른 소득행위를 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수입은 시작(詩作)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시인의 시 쓰기의 의도는 경제적인 효용성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물질적인 척도에 따라 평가되고 있는 사회에서
시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딱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도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한평생을 시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시인들을 보면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
도대체 그 시라는 것이 무엇이기에
시인들은 시의 고삐에 코가 꿰인 채 소처럼 끌려가고 있단 말인가.
시도 하나의 발언(發言)이다.
하고 싶은 말을 세상을 향해 내쏟는 일종의 발언이다.
다만 일상적인 언술(言述)과는 달리 기술적으로 압축 미화(美化)된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기술적'이라고 하는 것이 시의 특성을 형성하는 시적 장치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기술적으로 표현된 그 발언 곧 시라고 하는 글이
경우에 따라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도 한다.
아니 몇 세기를 두고두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상을 울리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훌륭한 시는 긴 생명을 지닌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들은 생명이 긴 발언 곧 훌륭한 시를 만들어 보겠다는 욕망 속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몽상인(夢想人)들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세상을 움직이는 막강한 힘을 가진 사람들로
우리는 흔히 권력을 잡고 있는 정치가나 막대한 금력을 쥐고 있는 실업가들을 든다.
그들은 산을 헐어 길을 만들 수도 있고 바다를 막아 평야를 일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것은 물리적인 힘이다.
물리적인 힘은 물리적인 세계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물리적인 충족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인 면 못지않게 정서적인 충족을 또한 요구하고 있다.
그 정서적 욕구는 정치가나 실업가들이 지닌 물리적 힘만으로는 성취되기 어렵다.
정서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
더 나아가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예술가들의 몫이다.
한 사람의 위대한 소월(素月)이
열 사람의 위대한 재상들보다 세상을 더욱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유구한 역사를 다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단 몇 십 년의 과거만 돌이켜보기로 하자.
이 땅에 얼마나 많은 기라성 같은 명재상들이 명멸(明滅)하며 지나갔던가.
그러나 몇 십 년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그들의 흔적은 거의 찾을 길이 없다.
천지를 흔들던 그들의 사자후는 어디로 갔는가.
아니 그들의 이름조차 이제 우리에겐 생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시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소월(素月)이나 만해(萬海) 그리고 육사(陸史)나 백석(白石) 들을 보라.
그들이 살아있던 당대에는 세상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한 하찮은 인물들이었지만
이들은 날이 갈수록 세상 사람들의 가슴속에 더욱 형형히 빛나고 있다.
무엇이 그들에게 구원의 생명을 부여했는가.
그들이 남긴 몇 편의 시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림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모든 시인들의 시가 긴 생명을 지닌 것은 아니다.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의 시인들 가운데
후세의 사람들이 기억해 줄 사람은 몇 십 명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만큼 세상을 울리는 작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시인들은 기적과도 같은 한 편의 명품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한평생을 내걸고 있는 무모하고 외로운 도박자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세상의 평판을 기다리기 조급한 시인들 가운데는
비평가들을 동원해서 자신의 작품을 선전하기도 하고,
향리(鄕里)에 손수 시비(詩碑)를 세워
자신의 작품을 돌 속에 담아 오래 남기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소중한 내 작품이 눈먼 세상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그냥 묻혀 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솔한 시인이라면 보통의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속적인 욕망에 초연할 수 있어야 하리라.
시업(詩業)이란 애초부터 세상의 보상을 기대하고 출발한 것이 아니니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평가에 너무 연연해하는 것은
시인의 체통에 걸맞지 않아 보인다.
세상에 드러나 반짝이는 보석들은 몇 개 되지 않는다.
9할이 넘는 대다수의 보석들은 땅 속에 아직 묻혀 있다.
그중 혹 어떤 것들은 광부의 손에 닿아 운 좋게 세상에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 것들은 영원한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는다.
진정한 시인은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땅속에 깊이 묻혀 있는 보석들처럼
불평하지 않고 의연히 살아가는 그런 초연한 사람인 지도 모른다.
―졸저 『엄살의 시학』pp.188∼189
[제17신]
시적 장치의 특성
로메다 님,
지난번의 내 글을 읽고 진학의 결심을 새롭게 했다니 반가운 일입니다.
그런데 나의 시 강론은 계속 듣고 싶다니 공부에 지장이 없을지 염려되는군요.
당분간 시에 대한 내 담론 시간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무슨 글이든 글을 쓸 때 핵심이 되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 입니다.
이를 내용과 형식이라고 구분해서 논하기도 하는데
구조주의 문학자들은 이렇게 구분한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기도 합니다.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수박의 겉과 속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분명히 겉과 속이 있는 것처럼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서로 겹쳐서 그 구분이 명료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내용과 형식 즉 주제와 표현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바는 아닙니다.
나는 서로 겹치는 모호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용과 형식이라는 말 대신
'편내용', '편형식'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내용과 형식에 관한 논의는 첨부자료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맨 처음 거론했던 이미지는 편내용적인 것이고
앞에서 소개했던 대우나 기승전결의 구조 같은 것은
편형식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시에서 즐겨 사용하는 표현 기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고
또한 그것들이 지닌 특성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의 산문과는 달리 시에서 즐겨 구사되는 표현 형식 즉
시라는 글이 되게 하는 형식을 나는 '시적 장치'라고 부릅니다.
시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표현 기법으로
비유(은유), 상징, 전이(轉移), 우의(寓意), 의인(擬人), 역설, 과장, 운율, 대우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이들 표현 기법들을 나는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 감춤의 성질(은폐지향성)---상징, 은유, 우의, 전이
둘째, 불림의 성질(과장지향성)---역설, 과장, 비유, 의인
셋째, 꾸밈의 성질(심미지향성)---운율, 대우, 아어(雅語)
첫째, 감춤의 성질은 은폐지향성입니다.
시에서는 산문에서처럼 직설적으로 명료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히 숨겨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어떤 추상적 정황을 구체적인 다른 사물을 끌어다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의 기법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비유 가운데 은유의 경우도 그 원관념(본의)을 숨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의 일을 동·식물의 입장을 빌어 표현하는 우의(寓意)도 그렇고,
자신의 이야기를 타자에 의탁해서 서술하는 전이(轉移)도 감춤의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불림의 성질은 과장지향성입니다.
시에서는 사실대로 기술하기보다는 사실보다 불려서 표현하고자 합니다.
시는 정보가 아닌 정서 전달의 글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백발이 삼천 발' 같은 과장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고,
논리적인 모순을 담고 있는 역설적인 진술도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구사된 비유도 과장적인 요소를 담고 있을 때 능률적으로 작용합니다.
비인물을 인물로 표현하는 의인법이나 무생물을 생물로 표현하는 활유법 역시
과장에 근거한 기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셋째, 꾸밈의 성질은 심미지향성입니다. 즉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경향이지요.
시가 예술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에 운율을 실어 율동적으로 표현하려는 것은 미의식의 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대우의 구조 역시 심미성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요즈음 현대시 이론에서는 시어(詩語)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보편적인 시에 보다 적합한 시어들이 없는 바가 아닙니다.
딱딱한 것보다는 부드러운 것이, 추한 것보다는 고운 것이,
속된 것보다는 우아한 것들이 선호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시어들을 만들기 위해서 시인들은 시어의 조탁(彫琢)을 게을리 하지 않는데
이 또한 심미지향성 때문이라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감춤>과 <불림>과 <꾸밈>
이 세 가지가 시다운 표현 곧 시적 장치의 특성인데
나는 이들을 아울러 <엄살스럽게>라는 말로 즐겨 표현합니다.
시는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엄살스럽게 표현한 짧은 글입니다.
각 장치들에 대한 개별적인 논의는 다음 기회에 할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임보.
[참고 자료]
내용(內容)과 형식(形式)
예술 작품을 논할 때 자주 내용과 형식이라는 말이 거론됨을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을 내용과 형식으로 양분해서 설명하려는 태도는
멀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까지 이어지는 오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흔히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음식과 그릇에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품에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가
음식과 그릇의 관계처럼 분명한 한계를 지닌 것이 아니므로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는 일은 무의미한 것이라고 구조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작품을 이루는 어떤 요소가 내용이면서 형식일 수 있고,
또한 형식이면서 내용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무용 속에서 동작과 육체를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내용과 형식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럴듯한 지론으로 보인다.
그러나 좀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양분론(兩分論)과 불가분론(不可分論)에는 각기 어떤 문제성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을 이루고 있는 구성 요소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요소들 가운데 어떤 것은 불가분론자의 주장처럼 내용과 형식의 한계가 모호한 것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어떤 요소들은 내용에만 관여하는가 하면 또 어떤 요소들은 형식에만 관여하는 것도 없지 않다.
말하자면 작품에서의 주제는 전자의 대표적인 예가 되고
정형시에서의 그 틀은 후자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양분론의 결함은 양면 걸침의 경우를 도외시하고 모든 요소들을 양분할 수 있다고 믿는 데 있고,
불가분론의 문제점은 모든 요소를 걸침의 관계로만 보려는 데 있다.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구분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한다면 문제는 풀리지 못할 것도 없다.
걸침의 관계에 있는 요소들도 편내용적인 것과 편형식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도 있으리라.
시에서의 소재는 편내용적인 것이고,
운율은 편형식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스크림을 담고 있는 깔때기 과자는 먹을 수도 있는 그릇이니까 편형식적이라고 할 수 있고,
아이스크림 위에 얹힌 고명 땅콩은 편내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아예 모든 요소들을 내용과 형식으로 나누는 일이 거북하고 곤란하다면
편내용적, 편형식적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써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불가분론자들도 구분의 어려움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내용이나 형식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요사이 작품의 분석에서 내용과 형식을 거론하면
보수적인 낡은 문학이론에 젖어 있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내용과 형식에 상관되는 걸침의 요소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회피해 갈 것이 아니라
더욱 문제삼아 분별해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즉 그 요소가 지닌 어떠한 기능은 그 작품의 내용에 어떻게 관여하고 있고,
또 다른 어떤 기능은 형식의 구조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는가를
보다 치밀하게 따져 보는 일이야말로 보다 가깝게 작품의 구조에 접근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분별하기 어려우므로 뭉뚱그려 함께 생각하자는 것은
일을 처리하는 현명한 방법일 수 없다.
무용가의 한 동작에서도 춤의 내용과 형식을 분별해 낼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이겠는가.
---<엄살의 시학>pp.146-148
[제18신]
시적 비유의 속성
로메다 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수사 곧 시적 장치가 무엇인가 묻는다면
'비유(比喩)'라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신선한 비유를 구사할 수 있느냐에 따라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비유의 비중은 큽니다.
그렇다면 비유란 어떤 형식의 표현법인가 알아보도록 합시다.
이 강의의 서두에 이미지가 시의 싹이라고 단정하면서
대상 속에서 어떤 신선한 이미지를 찾아내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한 것 기억하시지요?
시에서의 이미지는, 특히 유추적 이미지일 경우
비유의 형식으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우선 비유에 관하여 논급한 내 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합시다.
시적 비유의 속성
시에서의 이미지를 시의 씨앗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이 환기시키는 이미지는 대개 추상적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사물과 함께 감각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시적 이미지는 비유의 형태로 형성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비유는 이미지와 공존하는 시의 중요한 표현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는 곧 비유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시에서의 비유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흔히 비유를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소위 이미 잘 알려진 기지(旣知)의 것(補助觀念, 媒體, vehicle)으로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미지(未知)의 것(元觀念, 主旨, tenor)을 설명하는 방법쯤으로 생각한다.
철학이나 논리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학 특히 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유는 사물 인식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사물을 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수단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만약 전자가 비유의 본질이라면 적확성(的確性)이 최상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시에서의 비유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다음의 두 비유를 예로 보도록 하자.
(가) 돼지처럼 뚱뚱한 철수
(나) 하마처럼 뚱뚱한 철수
철수의 뚱뚱함을 (가)에서는 돼지에 (나)에서는 하마에 비유하고 있다.
(가)와 (나) 중 어느 쪽이 능률적인 비유인가는 금방 판별이 된다.
물론 (나)다.
설령 철수의 실제 뚱뚱함을 물리적으로 측정해 볼 경우 돼지에 더 가깝다 할지라도
사실에 근접한 (가)보다는 과장이 담긴 (나)가 보다 효율적이다.
비유는 사실을 사실대로 드러내기 위한 기법이라기보다는
사실을 사실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다.
비유는 논리에 근거한 설명이 아니라 정서에 근거한 설득이다.
비유는 시적 표현 장치의 하나인 불림(과장지향성)에 근거하고 있다.
과장성이 없는 비유는 맥빠진 진술에 그치고 만다.
한편 능률적인 비유는 이질적인 대상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다) 장미처럼 예쁜 국화
(라) 곰처럼 미련한 개
(마) 장미처럼 예쁜 소녀
(바) 곰처럼 미련한 사내
(다)와 (라)는 능률적인 비유가 못 된다.
(다)에서는 같은 식물 사이 (라)에서는 같은 동물 사이에서의 동질성을 따지고 있다.
동질적인 것들 가운데서의 동질성은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국화'도 원래 아름다운 식물이고 '개'도 원래 미련한 동물이니까
여기에는 과장성이 능률적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비유보다는 오히려 비교의 기능이 살아난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마)에서는 식물과 인간,
(바)에서는 동물과 인간이라는 이질적인 대상들 사이에서의 동질성을 말하고 있다.
(마)와 (바)에서는 효율적인 비유가 이루어진다.
'소녀'가 아무리 예쁘기로서니 '장미'와 같으며
'사람'이 아무리 미련키로서니 '곰'과 같겠는가.
여기에는 과장이 개입되어 있다. 과장이 곧 비유의 속성임을 알 수 있다.
한편 비유는 은폐성을 지향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은폐성은 특히 은유의 구조를 통해 적극적으로 실현된다.
직유는 두 대상 즉 주지와 매체 사이의 동일성이 명시된 구조다.
(나)에서의 '뚱뚱한'이나 (마)에서의 '예쁜' 그리고 (바)에서의 '미련한' 등이
동일성이나 유사성[이를 공유소(共有素)라 부르기로 하자]이다.
이처럼 직유에서는 두 대상을 연결하는 공유소가 명료하게 표출되는데 비해
은유는 공유소가 생략되어 있는 구조다.
(사) 내 마음은 호수다
'주지(主旨)=매체(媒體)'의 구조다. 공유소는 감추어져 있다.
주지와 매체가 폭력적으로 결합된다.
직유는 제시된 공유소에 의해 두 대상을 묶는 수동적 사고가 강요되는 형식이지만
은유는 두 대상 사이에 수많은 공유소를 추출해 내야만 하는 능동적 사고가 요구되는 형식이다.
독자는 (사)에서 다양한 공유소를 추출해 낼 수 있다.
'넓다' '잔잔하다' '깊다' '맑다' '흔들린다' 등의 수많은 공유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직유는 단선적인 비유지만 은유는 입체적인 비유다.
은유는 숨기는 가운데 보다 많은 것을 말하는 역설적인 구조다.
보다 많은 공유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수록 능률적인 은유가 된다.
소위 시의 특성으로 지적되는 애매성(ambiguity)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바로 이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은유는 시적 장치인 불림(과장)과 숨김(은폐)의
두 가지 속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는 표현 양식이다.
―졸저 『엄살의 시학』pp.27∼30
로메다 님,
시에서의 비유가 어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지 짐작이 가지요?
이미지나 비유나 두 사물의 결합양식이란 면에서 동일합니다.
시에서의 능률적인 비유는 과장의 속성을 지닌다는 것과
이질적이 사물들 사이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정진을 빕니다. 임보.
[제19신]
은유 구사의 세 유형
로메다 님,
시의 대표적인 표현 기법이 비유라는 것은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비유는 하나의 사물(主旨, tenor)을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물(媒體, vehicle)을 끌어들이는 방법입니다.
말하자면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물은 서로 공통적인 요소 곧 공유소(共有素)를 지닙니다.
예를 들어 '이 호수는 거울처럼 맑다'라는 비유가 있다고 칩시다.
주지(T)인 '호수'는 '맑다'라는 공유소(S)에 의해 매체(V)인 '거울'과 연결됩니다.
(공유소란 주지와 매체가 공통으로 지닌 동일성 내지는 유사성이라고 했지요?)
공유소가 크면 클수록 두 사물의 결합은 설득력이 강합니다.
직유는 앞의 예문에서처럼 공유소가 분명히 드러나 있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 공유소가 생략된 구조가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유소 없이 주지와 매체가 바로 결합합니다.
앞의 예문을 은유로 바꾸면 '이 호수는 거울이다'가 됩니다.
공유소 '맑다'가 생략되고 주지인 '호수'와 매체인 '거울'이 바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지와 매체가 결합하는 양식에 따라 은유의 구조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등가(等價)의 구조(T=V)
등가의 구조란 주지(T)와 매체(V)의 관계가 주어와 서술어로 연결된 구조입니다.
즉 '내 마음은 마른 나뭇가지'라는 비유에서 보면
주지인 '내 마음'은 주어이고 매체인 '마른 나뭇가지'는 서술어입니다.
생략된 공유소는 유추에 의해 추측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딱딱함' '황량함' '메마름' 등의 공유소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작품은 하나의 주지에 여러 개의 매체가 병치된,
많은 등가 은유들의 나열로 이루어진 특이한 작품입니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나의 본적」 전문
'나의 본적'이라는 하나의 주지를 놓고 다양한 매체들이 은유의 구조로 엮어진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둘째, 결속(結束)의 구조(T의 V, TV, 혹은 V의 T, VT)
주지와 매체, 혹은 매체와 주지의 결합이 수식어와 피수식어(관형어+체언)의 관계를 이룹니다.
가) T의 V인 경우-- ①명상의 호수, ②추억의 오솔길, ③별들의 잔치
주지가 매체의 수식어가 되어 있습니다.
①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깊은 명상,
②는 오솔길처럼 그윽한 추억,
③은 잔치 마당처럼 풍성한 밤하늘의 별들을 뜻합니다.
공유소가 생략된 상태에서 주지와 매체가 관형격조사 '의'로 직결되고 있습니다.
나) TV인 경우--①교통 지옥, ②입시 전쟁
이 경우는 관형격조사 '의'마저도 생략된 상태로 주지와 매체가 바로 결속되고 있는 경우입니다. 즉
①지옥처럼 견디기 괴로운 교통 사정,
②전쟁처럼 치열한 입시 경쟁을 표현하는 말이다.
다) V의 T인 경우--①한 오라기의 희망, ②한 톨의 양심, ③철의 재상(宰相)
이 경우는 가)와는 반대로 주지와 매체의 위치가 바뀌어 매체가 수식어의 역할을 하고 있는 구조입니다. 즉
①한 오라기의 실처럼 가느다란 희망,
②한 톨의 알갱이처럼 작은 양심,
③쇠붙이처럼 굳고 냉철한 재상입니다.
라) VT인 경우--①무지개 사랑, ②놀부 사내
매체가 바로 주지에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①무지개처럼 환상적인 사랑,
②놀부처럼 인색한 사내의 뜻입니다.
셋째, 생략(省略)의 구조(T가 생략된 구조)
①밤하늘의 눈들이 지상을 지켜보고 있다. (T:별, V:눈)
②천사들의 합창 (T:어린이, V:천사)
이 구조는 주지조차도 생략되고 매체만으로 표현되는 경우입니다.
①에서의 '눈'의 주지는 '별'이고 ②에서의 '천사'의 주지는 '어린이'인데
주지는 생략되고 매체만 드러납니다.
겉으로 보기엔 상징의 구조와 비슷하나 주지가 명백히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상징의 경우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대유(代喩)도 주지가 생략된 구조이므로 은유의 셋째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대유는 흔히 환유(換喩)와 제유(提喩)로 구분해서 설명하기도 합니다.
가) 환유
특징이나 속성으로 그 사물을 대신함
왕관→임금, 감투→벼슬아치, 별→장군, 백의→한민족, 왕눈→눈 큰 사람
나) 제유
a) 일부로 전체를 대신하는 경우
빵→식품 전체(밥, 빵, 떡, 과자, 과일…) [예문]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약주→술 전체(소주, 양주, 막걸리, 약주, 포도주…) [예문] 약주 잘 하시나요?
칼→무기 전체(창, 칼, 총, 활…) [예문]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
붓→필기도구 전체(연필, 펜, 붓, 만년필…) [예문] 붓이 창보다 강하다.
b) 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경우
돛→배 [예문] 두 개의 돛이 경주를 하고 있다.
입→사람 [예문] 입이 열이다. 손→사람 [예문] 손이 모자란다.
눈→사람 [예문] 여러 눈이 지키고 있다.
주지는 숨고 매체만 드러나는 것이 은유의 셋째 유형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대유에서의 주지와 매체의 관계는 공유소(동일성)가 아니라 주로 인접성(隣接性)에 근거하게 됩니다.
공유소와 인접성이 희박한 비유는 주지와 매체의 결합이 폭력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될 때 이 비유는 역설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현대시에서는 의도적으로 낯선 사물들과의 결합을 통해 신선한 충격을 생산해 내고자 합니다.
이는 비동일성을 지향하려는 현대 은유의 역설적 구조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비유 가운데 특히 은유가 시에서 즐겨 사용된 것은
시의 중요한 표현 장치인 숨김(은폐지향성)과 불림(과장지향성)의 역설적 특성을 아울러 지니고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은유는 단순한 수사적 기능을 넘어서 두 사물을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즉 시에서의 은유는 매체에 의해 주지를 설명하려는 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이질적인 사물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데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학업에 여전히 정진하시지요?
건투를 빕니다.
[제20신]
'나'란 무엇인가
로메다 님,
인간이란 숙명적으로 고독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이 세상에 내던져졌다'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말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을 인간은 이방인처럼 서먹서먹하게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소외감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이 세상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이 존재의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아주 정상적인 것입니다.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존재의 외로움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오히려 무딘 감각을 지닌 비정상적인 사람일 지도 모릅니다.
두렵게 생각지 말고 충분히 괴로워하십시오.
그러한 고뇌를 통해 로메다 님은 한 단계 높은 성숙한 영혼에 도달할 것입니다.
어쩌면 시를 생각하는 마음도 이러한 숙명적인 외로움과 무관하지 않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로메다 님,
우리의 존재가 실존주의자들이 회의한 것처럼 그렇게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는 시에 대한 담론은 잠시 접어두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로메다 님,
'나'가 어떤 존재인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겠지요?
'나'는 물론 부모로부터 왔습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두 생명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명의 뿌리는 부모님 이전으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2분의 부모→4분의 조부모→8분의 증조부모→16분의 고조부모→……
이처럼 한 세대를 거슬러 올라갈 때마다 2배수로 불어나면서
조상의 갈래는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됩니다.
오늘의 '나'를 이 땅에 오게 하기 위해 600년 전쯤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이 지상에 대기하고 있었는지 계산해 볼까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으면 20세대 전이 되니까, 2의 20승입니다.
2의 20승이면 100만 명이 넘은 숫자입니다.
'나'의 혈관 속에는 600년 전 100만이 넘은 조상들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습니다.
그 100만 명 가운데 어느 한 분만 안 계셨더라도 오늘의 이러한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의 끈은 수 백만 년을 거슬러올라가 태초의 조상,
아니 창조주에까지 닿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혈관 속 DNA는 과거 전 조상의 통합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과거 전 조상의 결집으로 응결된 하나의 집합체입니다.
결코 어쩌다가 우연히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창조주의 놀라운 섭리로 말미암아 기적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배우자를 맞이하여 아들과 딸 둘씩을 낳는다고 가정합시다.
그리고 그 아들과 딸들이 결혼하여 둘씩의 자녀를 갖게 되고
다시 그 자손들이 그렇게 둘씩의 자손들을 계속 얻게 된다면
600년 뒤 '나'의 피를 가진 후손들이 이 지상에 얼마나 존재하게 될까요?
100만 명이 넘습니다.
이 지상에 인류 역사가 얼마나 지속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내 피를 지닌 후손들은 점점 불어나
언젠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미래 인류들의 조상입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의 출발점입니다.
내가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가 어떤 자녀를 얼마만큼 생산하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집니다.
나는 미래 인류들을 좌우할 수 있는 막중한 존재입니다.
내 존재가 무의미하다고요?
과거 전 인류들이 나에게 귀결되었고
미래 전 인류들이 나로부터 비롯되는
나는 전 인류의 한 교차점―인류의 한중심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공간적으로 우리 생명체 곧 '나의 몸'의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의 몸, 육신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물론 우리의 몸은 처음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았지만
오늘의 이러한 육신이 되도록 길러준 것은 삼라만상의 협동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그동안 섭취했던 모든 음식물이며
내가 그동안 한순간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호흡했던 모든 공기며
그동안 햇빛을 위시해서 내가 무의식중에 받아들인 우주 공간 속에 존재한
모든 요소들의 총체적인 작용에 의해 이 몸뚱이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로메다 님,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한 생명체가 얼마나 다양한 우주적 요소들을 끌어 모으며 살아가는가 짐작이 갑니다.
뿌리로는 물을 비롯해서 땅속에 들어있는 많은 영양분들을 빨아들이고
잎과 가지로는 필요한 햇빛과 공기들을 얼마나 열심히 모읍니까?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실로 헤아릴 수 없는 방대한 우주적 요소들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의 식탁 위에 놓인
한 개의 달걀,
한 마리의 물고기,
한 점의 육류(肉類)…
이러한 음식들 속에 서려 있는 우주적 요소들은 실로 아득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조그만 부엌에서 조리된 단순한 음식물에 의해 형성된 것 같지만
사실은 전 우주적 요소들이 총 동원되어 빚어낸 신비로운 결정체입니다.
한 생명체의 몸뚱이는 전 우주의 축약·수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을 지칭하는 순 우리말 '몸'의 어원이 '모으다' 아닙니까?
실로 우리 조상의 슬기로운 생명관을 엿보게 하는 말입니다.
로메다 님,
이제는 우리의 목숨이 끊긴 뒤, 사후(死後)를 한번 생각해 볼까요?
생명이 멈춘 뒤 우리의 육신은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육신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은 흩어지고 흩어져서
그것들이 왔었던 애초의 우주 공간 속으로 스며들게 됩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육신의 요소들로 이 우주는 가득 차게 됩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죽음'을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도 이해가 되지요?
로메다 님,
우리의 '몸' 역시 하나의 응결체며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전 우주적 요소들이 응집(凝集)되어 잠시 내 몸을 이루었다가
다시 그 요소들이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져 가는 하나의 교차점입니다.
앞에서 '나'는 전 과거 조상들의 응결이며 전 미래 인류의 출발점으로
전 인류의 교차점이며, 중심점이 된다고 했지요?
그러니 나라는 생명체는 역사적(혈연적)으로도 공간적(육체적)으로도
이 세상의 축약이면서 한중심입니다.
'나'는 축소된 우주― 소우주입니다.
'나'는 이 우주 전체에 버금갈 만큼 소중합니다.
이러한 '나'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을
유일무이한 절대적 존재입니다.
로메다 님,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비하(卑下)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나는 왜 아무개처럼 좋은 기억력을 못 가졌을까?
나는 왜 아무개처럼 얼굴이 예쁘지 않을까?
그러나 로메다 님,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도 적지 않습니다.
아무개보다 기억력은 뒤질지라도 상상력은 더 앞설 수 있고
아무개보다 얼굴은 덜 예쁠지라도 종아리는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습니까?
내 생명체는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한 절대적 가치를 지졌습니다.
로메다 님, 자신에 대한 긍지를 가지십시오.
당신은 창조주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이 세상의 주인으로 선택된 것입니다.
로메다 님, '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이처럼 소중합니다.
생명체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 소중합니다.
하나하나 그것들의 내력을 깊이 생각하면 신비롭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의 내 얘기를 통해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야가 달라졌으면 합니다.
밝고도 아름다운 세상이 그대 앞에 펼쳐져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창조주가 마련한 그대의 정원이요.
당신은 그 정원의 주인입니다.
건투를 빕니다. 임보.
[제21신]
생명 시학 서설
로메다 님,
지난번에 '나'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장황하게 말씀드렸지요?
'나'는 전 과거적(혈연적) 요소와 전 공간적(우주적) 요소가 결집된 '소우주'라고 말했습니다.
내 생명관에 공감하신다니 반갑습니다.
나는
'삶'― 곧 '생명 작용'을 '객체의 주체화', 혹은 '세계의 자아화' 현상이라고 정의합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는 다음의 내 글 「생명시학(生命詩學) 서설(序說)」을 읽어보면 짐작이 갈 것입니다.
인용한 글의 내용 가운데는 지난번에 이미 얘기한 바와 중복되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만
이해의 편의를 위해 생략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면 중복되는 부분은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합니다.
생명시학서설(生命詩學序說)
생명 작용, 즉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는 자아확대(自我擴大)의 움직임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객체(客體)의 주체화(主體化) 활동,
곧 생명체 속에 세계성을 끌어 모아 축적해 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생명체의 원초적 본능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 금방 수긍이 갈 것이다.
가장 원초적 본능은 식욕(食慾)과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이다.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생명체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생명체 내부로 끌어들이는 행위다.
먹는다는 것은 객체의 주체화 작용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동작이다.
호흡(呼吸)도 주체화 작용의 하나다.
식물의 탄소동화작용처럼 동물들도 태양의 햇볕과 우주 공간의 여러 요소들을
체내로 끌어들여 자아화(自我化)한다.
이처럼 생명체는 세계가 지닌 요소들을 그의 몸 속에 집약시킨다.
곧 세계성의 축적을 꾀한다.
우리의 몸은 전 우주적 요소들의 총화에 의해 형성된 신비로운 존재다.
생명 작용의 정지―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명체의 몸, 곧 육신의 확산을 의미한다.
몸을 구성했던 모든 요소들이 이제는 몸을 떠나 그것들이 왔었던 우주 공간 속으로 흩어져 되돌아가는 환원을 뜻한다.
흩어지는 몸은 우주 속에 스미고 스며 장차 우주를 가득 채운다.
그러므로 한 생명체의 몸은 우주 공간의 모든 요소들이 집약되었다 흩어지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이성(異性)에 대한 욕망,
곧 양성(兩性)의 결합에서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키는 종족 번식의 이 방식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 역시 세계성 확장에 그 의미가 있다.
양성의 결합은 두 세계의 통합을 의미한다.
자식은 부모의 두 세계성을 통합하여 공유한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조상들의 세계성을 통합하여 내포하고 있는가 생각하면 신비스럽기 이를 데 없다.
우리는 두 부모의 세계성뿐만 아니라 네 조부모, 여덟 고조부모들의 세계성을 아울러 통합 공유하고 있다.
600년 전 그러니까 20세대 전만 거슬러 올라가 보자.
얼마나 많은 조상들이 나 하나를 만들기 위해 존재하고 있었는가?
2의 20승, 곧 100만 명이 넘는다.
이들 중 어느 한 분만 없었어도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생명체가 이 세상에 오게 된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놀라운 통합 속에서 가능하다.
그런데 생명의 역사, 생명의 끈은 몇 백 년이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창조주에까지 이른다.
따라서 한 생명 속에는 과거 전 조상의 세계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전 과거 조상들의 집약체며 수렴점이다.
또한 미래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두 자녀를 갖게 되고, 그 자녀들이 또한 두 자녀씩을 갖게 된다면
600년 후에 내 피를 이어받은 후손들의 수효가 100만 명이 넘게 된다.
인류의 미래가 얼마쯤 지속될는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지상의 모든 인류들의 혈관 속에
내 피가 흐르게 된다.
말하자면 미래 인류들은 '나'로부터 비롯된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미래 인류들의 모습은 달라진다.
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고 성스러운 것인가.
나는 전 과거 인류의 집합이면서 전미래 인류의 출발점에 있다.
나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하나의 교차점으로 세계의 중심이 된다.
생명체가 닌 모든 감각지 기관들(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 등)은
주체화의 대상인 객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먹이와 이성을 찾는데 필요한 탐색용 레이더들이다.
생명체의 모든 활동 역시 주체화, 곧 자기 확대의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모든 문화 활동도 이에 근거하고 있다.
정치 활동은 타인들에 대한 지배욕에서 비롯된 것이요,
경제 활동은 물질들에 대한 소유욕에서 출발한다.
자연과학도 자아 확대를 위한 객체들의 탐색 작업에 근거하고 있다.
종교도 자아를 내세(來世)에로까지 확대하고자 하는 의지에 뿌리하고 있다.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언술(言述) 행위 역시 궁극적으로는 자아 확대를 위한 욕망의 표현이다.
문학은 자아 확대, 곧 대상 성취의 욕망이 기술적으로 표현된 언술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더 간단히 말하면 문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서경(書經)의 저 유명한 <詩言志>의 '지(志)'도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얻고자 하는 소망'의 의미로 파악된다.
그런데 문제의 관건은 '기술적'이라는 데 있다.
바로 이것이 시, 소설, 희곡 등의 장르를 갈라놓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면 시가 되게 하는 기술적인 요인들, 곧 시적 장치란 어떤 것인가?
나는 시적 장치의 특성을 우선 '감춤'과 '불림'과 '꾸밈'이라고 지적해 본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은폐 지향성'과 '과장 지향성' 그리고 '심미 지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등의 기법으로 나타나고
중자는 비유(比喩), 의인(擬人), 역설(逆說) 등의 수사에서 드러나며,
후자는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대구(對句)나 대조(對照) 그리고 운율(韻律) 장치로 표현된다.
나는 이 세 가지 시적 장치의 특성을 포괄하여 '엄살'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시는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소망하는 내용의 품질과 엄살을 부리는 격조에 따라 시의 품격이 형성된다는 사실이다.
격이 있는 시가 어려운 것은 소망에 대한 단순한 기술적 언술이라는 한계를 넘어
구도자적 정신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픔을 꽃으로 피우나』(우이동 시인들, 제14집, 1993.)
『엄살의 시학』pp.20∼23에 재수록함
로메다 님,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아화(주체화)의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아니, 지상의 생명체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자아화의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단단하게 굳어 있는 한 덩이의 돌을 보십시오.
그 돌의 입자들이 얼마나 힘있게 서로 달라붙어 끌어안고 있습니까?
조수를 움직이는 달의 인력(引力)이 얼마나 대단한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상이 지니고 있는 자아화의 의지는
무생물보다는 생물에게서 더 강하게 느낄 수 있고,
생명체 중에서도 식물보다는 동물에게서 더 강렬하게 드러나며,
동물 가운데서도 인간들에게서 가장 적극적으로 실현됩니다.
자아화의 욕망 의지가 없는 인간 활동은 없습니다.
강도(强盜)나 정복(征服)처럼 그 욕망이 양성적으로 드러난 것도 있지만
대개는 음성적으로 감추어져 실현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숨어서 베푸는 자선(慈善)이나 보시(布施)도
성현(聖賢)들의 자비로운 종교적인 활동까지도
깊이 따지고 들어가 보면 세상을 자기의 품에 안겠다는
실로 놀라운 자아화의 욕망에서 발현됨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들이 쓴 글들도 다 그런 욕망의 소산입니다.
로메다 님,
백로를 넘어서자 날씨가 한결 시원해졌습니다.
머지 않아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풍요의 계절이 오겠군요.
이 계절과 함께 풍성한 수확 거두시길 기대합니다. 임보.
[제22신]
시정신에 관하여
로메다 님,
나는 지난번에 모든 사물은 자아화(自我化)의 의지를 지녔다고 주장하면서
사물 가운데서도 생명체가, 생명체 가운데서도 인간이 가장 적극적으로
자아화의 의지를 실현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가 자아화의 욕망에 근거한다고 했지요?
문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기술적으로 표현한 언어'라는 정의도 기억하시지요?
그 '기술적'이라고 하는 것이 문학의 장르를 갈라놓습니다.
쉽게 말해서 '이야기의 형식'이면 '소설'이 되고
'대화의 형식'이면 '희곡'이 되는 식이지요.
그렇다면 시의 '기술적'인 특성은 무엇인가?
나는 이를 시적 장치라고 명명하면서 '감춤(은폐지향성)'과 '불림(과장지향성)'과 '꾸밈(심미지향성)' 이 세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이 시적 장치를 우리의 고유어인 '엄살'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는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은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소망' 곧 '자아화의 욕망'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자아화의 욕망은 객체의 주체화 곧 대상 성취의 욕망이라고 했지요?
식욕이라든지 이성에 대한 욕망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욕망은 인간뿐만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공통적으로 지닌 본능적 욕망입니다.
한편 인간은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싶어하는 물욕(物慾)이라든지
유명해지고 싶어하는 출세욕(명예욕)과 같은 세속적 욕망을 갖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참 미묘한 존재여서 이러한 본능적 욕망이나 세속적 욕망을
넘어서고자 하는 욕망을 지향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를 초월적 욕망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진·선·미에 가치를 부여하고 친자연(親自然), 절조(絶調), 염결(廉潔)을 소중히 여기는 등
고차원적인 정신 세계를 지향하는 욕망입니다.
이 초월적 욕망은 물론 범인에게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승화된 욕망입니다.
로메다 님,
시 속에 담겨 있는 욕망들 역시 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소위 가작(佳作)이라는 평판을 얻은 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욕망은
거의 '초월적 욕망'에 닿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시인이란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본능적·세속적인 욕망을 초월하고자 하는 상급의 정신 영역을 소유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기공인(技工人)이기에 앞서
상급의 정신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수도자적 수련을 거쳐야 할 지도 모릅니다.
로메다 님,
시 속에 담겨 있는 시인의 초월적 욕망― 나는 이것을 '시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앞에서 초월적 욕망을 말하면서 진·선·미와 친자연, 절조, 염결 등을 거론했는데
이러한 정신은 일찍이 우리의 선조들이 높이샀던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들입니다.
나는 이 선비정신을 시정신과 동궤의 것으로 잡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의 바람직한 우리시의 시정신을 선비정신으로 삼고자 합니다.
지난번 [제13신]에서 우리가 감상한 바 있던 박목월의 「산도화·1」을
다시 한번 읽어볼까요?
산은/ 九江山/ 보랏빛 石山//
山桃花/ 두어 송이/ 송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그때 나는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했습니다.
어느 시대이거나 시인에게 있어서의 현실은 불만스럽기만 하다.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과 질시로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는 세태는 증오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거부 정신이 이상향을 꿈꾸게 한다.
「山桃花·1」은 목월이 꿈꾸는 이상 세계다.
그것은 전통적인 선(仙)의 세계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선적인 경향은 「청노루」「모란여정」등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한 두 개의 생명체 '산도화'와 '사슴'은 자연물이면서 한편으론 시적 자아가 전이(轉移)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산도화나 사슴처럼 초연·정결한 생명체로서
자연과 합일코자 하는 시인의 선망이 두 대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투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목월은 자아의 사물화(산도화·사슴)로 세속적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로메다 님,
「산도화·1」에 담겨 있는 시정신 곧 초월적 욕망은 청정 무구한 세계에 대한 동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능적이고 세속적인 욕망과는 거리가 멉니다. 거기에는 고고한 선비의 기상이 서려 있습니다.
로메다 님, 이제 '바람직한 시에 대한 정의'를 다시 시도해 볼까요?
좋은 시는 '시정신(선비정신)이 시적 장치(엄살스럽게)를 통해 표현된 짧은 글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참고로 '시정신'에 관해 내가 쓴 다른 글이 있어 첨부해 보냅니다.
추석이 가까워 왔군요.
즐거운 한가위 지내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시정신에 관하여
시정신이란 말이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자주 거론된다.
그런데 막상 무엇이 시정신인가를 따져 물으면 그 대답이 석연치만은 않다.
시정신이란 작게는 개별적인 시 작품들 속에 내재해 있는 정신을 가리키기도 하고,
크게는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문학의 정신적 특성을 이르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
편의상 전자를 협의의 시정신 그리고 후자를 광의의 시정신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모여 한 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시인들의 시정신이 그 시대의 시정신을 형성하게 되며,
시공을 초월해서 시인들이 지닌 보편적인 시정신이 시문학의 특성을 드러내는 광의의 시정신이 된다.
따라서 협의의 시정신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면
광의의 시정신은 보편적이며 종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시에서의 정신 같은 것을 아예 무시하려고도 한다.
즉 예술은 기술이 문제니까,
언어 예술인 시도 언어를 잘 다룰 수 있는 기교적인 것만 중요시하면 된다는 것이다.
마치 나무를 잘 다루는 목수처럼 언어를 잘 다루는 기술만 있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그러나 목수가 만든 가구 속에도 정신이 들어 있다.
속된 정신이든 고매한 정신이든 정신적인 요소가 배어 있게 마련이다.
보통의 목수가 만든 가구와 인간 문화재급의 장인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그것은 분명 풍격(風格)이 다르다.
기술의 수준에서 오는 차이뿐만이 아니라, 작가의 인품과 정신력이 크게 관여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의미를 지닌 언어 구조물인 시가 작자의 정신적 세계와 무관하다는 생각은 납득할 수 없는 견해다.
하찮은 잡문 속에도 글쓴이의 넋이 서려 있거늘
하물며 언어 예술의 정수라고 하는 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는가.
무릇 모든 발언은 발화자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인간은 무엇인가를 실현하고자 언어를 구사한다.
아무런 목적 의식이 없는 발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목적 의식을 욕망의 실현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시라는 형식의 언술도 분명 목적 의식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시는 시인의 욕망 실현의 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를 통해 실현코자 하는 시인들의 욕망은
보통 사람들이 언술을 통해 실현코자 하는 욕망과는 같지 않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흉금을 울려온 좋은 시들을 살펴보건대
그 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욕망은 세속적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맑고 깨끗한 승화된 욕망이다. 나는 이를 이상적인 시정신으로 삼고자 한다.
이 시정신은 진·선·미를 추구하고 염결(廉潔)과 절조(節操)를 중요시하는 선비정신과 상통한 것으로 나는 보고 있다.
나는 앞에서 개별적인 작품들 속에 담겨 있는 협의의 시정신들이 개인의 시정신을 형성하고,
개인의 시정신들이 모여 광의의 시정신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귀납적인 논리와는 달리 반대로 연역적인 논리도 가능하다.
즉 한 시대가 요구하는 시정신이 여러 시인들의 호응을 얻어서
그러한 시정신을 바탕으로 한 개별적인 작품들을 생산해 내게도 할 수 있다.
귀납적인 논리는 결과를 중요시하고, 연역적인 논리는 원인을 중요시한 사고다.
전자는 시에 대해 수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라면 후자는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다.
오늘의 한국시단을 나는 부정적으로 진단한다.
시에서 감동성이 사라져 가고 있다.
시가 읽는 이에게 흥겨움과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답답함과 괴로움을 안겨준다. 시가 욕설인가 하면 말장난이요,
잡배들의 장타령처럼 난삽한가 하면 술 취한 자의 주정처럼 거친 푸념 같기도 하다.
시가 이처럼 퇴락하게 된 요인은 무엇인가?
나는 그 원인을 자유시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무분별한 모방 행위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 첨가하자면 고매한 시정신의 상실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시에는 청렬한 시정신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흔치 않다.
고결한 선비정신을 지닌 시인들이 많지 않다.
오늘날 실추된 시의 위의(威儀)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급선무다.
양질의 상품 생산을 독려하는 운동이 있는 것처럼
오늘의 시단에 청렬한 시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운동이 절실히 필요하다.
어떤 이는 '자유'를 핑계삼아
청렬한 시정신으로 우리시의 정체성을 수립하자는 데 선뜻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시가 어디로 가든 오불관언 방관 방치한다면
이는 태만을 넘어 자신의 소임을 저버리는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시가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갈 수 있도록 모색하는 것이 어찌 우리의 소중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시는 언어의 정련 못지 않게 정신의 정련을 필요로 한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기술자이기 이전에 정신을 다스리는 수행자여야 한다.
―『우이시』제181호(2003. 6.)
[제23신]
시와 반시(半詩)와 비시(非詩)
로메다 님,
어떻게 추석은 잘 지내셨나요?
책에 매달려 지내느라고 둥근 달을 쳐다볼 겨를도 없었을지 모르겠군요.
어느 분이 내게 보내준 아름다운 달의 카드가 있어서 다시 보내니
잠시 그림 속의 달이나마 바라다보면서 마음의 평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어떻습니까?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잎들 위로 서서히 돋아나는 달의 모습이 얼마나 평온합니까?
좋은 시는 만월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교에서는 그 법을 일러 천의 강을 비추는 달[月印千江]에 비유하기도 합니다만
좋은 시 역시 만인의 가슴에 드리우는 만월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달은 태양처럼 강렬한 빛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은근하게 세상을 밝히는 밤의 등불입니다.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초연하게 천공에 떠서 묵묵히 그의 길을 갑니다.
시도 세상을 좌우할 만한 대단한 영향력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보다 부드럽고 맑게 교화하는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달이 그 기능을 충분히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그 '밝음'이요, 다른 하나는 그 '둥긂'입니다.
아무리 달이 밝더라도 만월이 채 못된 반달이면 세상을 충분히 밝힐 수 없습니다.
한편, 아무리 만월일지라도 구름이 가려 그 밝음이 흐리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달의 밝음은 그 내용이고, 달의 둥긂은 그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지난번에 시의 내용과 형식에 관해 얘기한 것 기억하시지요?
시의 내용에 해당하는 것을 '시정신'이라는 말로 표현했고
시의 형식에 해당하는 것을 '시적 장치'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이를 상기하면서 다음의 글을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략)―앞의 글에서 나는 시를 '인간의 소망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했다.
'소망'은 시의 내용이 되고 시적 장치인 '엄살스럽게'는 시의 형식이 된다.
그런데 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소망의 질(質)이다.
말하자면 일상적 언술에서의 소망과 시적 언술에서의 소망의 질을 달리 보고자 하는 것이다.
시인의 소망―시인이 구현코자 하는 것은 일상인들의 세속적인 욕망과는 격을 달리한다.
승화된 욕망이라고 할까.
어쩌면 세속적 욕망을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에의 소망에 가까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 소망이 '구도자적 정신 세계에 뿌리를 두고'있다고 보았다.
시를 만들어 내는 그런 승화된 욕망을 나는 '시정신'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러니까 그 시정신은 시인 정신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전적인 평가를 받아 온 양질의 작품들이 내포하고 있는 시정신은 건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진위(眞僞)와 시비(是非)를 가리고자 하는 비판 정신이며,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윤리 정신이며, 탐미적(眈美的)인 창조 정신으로 수렴된다.
말하자면 진(眞), 선(善), 미(美)를 추구하는 고결한 정신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러한 정신의 전범을 우리의 옛 선비들에게서 본다.
시정신은 곧 선비 정신이라 이르고 싶다.
거기에는 또한 염결(廉潔)과 지조(志操)가 따른다.
시인을 언어를 부리는 단순한 기능인만으로 보지 않고
구도자적 반열에 올려놓고자 하는 소이가 또한 여기에 있다.
시를 지향한 글들의 유형을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경우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가) 세속적 욕망이 일상적(비시적) 진술 형태로 표현된 글
(나) 세속적 욕망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
(다) 시정신(승화된 욕망)이 일상적 진술 형태로 표현된 글
(라)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
(가)의 경우는 내용과 형식 공히 시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글이므로 시라고 할 수 없다.
(나)는 형식만 시적 조건을 갖춘 경우이고 (다)는 내용만 시적 조건을 갖춘 경우가 된다.
나는 이와 같은 글들을 반시(半詩)라고 칭한다.
(라)의 경우가 내용과 형식 모두 시적 조건을 갖춘 것으로 바람직한 온전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한국 시단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량의 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비시(非詩)나 반시(半詩)가 아닌 온전한 시작품들이 얼마나 생산되고 있는 지는 모를 일이다.
―「시정신 그리고 비시와 반시」『엄살의 시학』pp.152∼154
로메다 님,
밝고 둥근 달이 온전한 만월인 것처럼
온전한 시란 내용과 형식이 다 갖춰진 즉 승화된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입니다.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한쪽만 갖춰진 시는 밝지 못한 달이거나 찌그러진 반달과 같습니다.
그래서 절반의 시 반시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내용도 형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글은 밝음도 형태도 잃어버린 그믐달과 같아서
시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메다 님,
처음부터 온전한 시를 쓰기는 어렵습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터득하여 개선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시정신은 우리가 쌓아 가는 인품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므로
하루아침에 고도의 시정신에 도달하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메다 님,
고도의 시정신에 이르는 일이 쉽지 않다는 말에 실망하셨나요?
그러나 너무 조급히 서두르지 말고 마음을 좀 느긋하게 가지십시오.
당신이 얻고자 하는 시는 긴 생명을 가진 글이 아닙니까?
응분의 공력도 드리지 않고 좋은 작품만 쉽게 얻고자 한다면
이는 과도한 욕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100년쯤 버틸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쯤은 공을 드려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로메다 님, 너무 낙망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예기치 않은 행운이 다가와 우리의 인생을 전복시키듯이
시의 행운도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찾아와 우리의 창문을 두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문운을 빕니다.
[제24신]
활유(活喩)와 의인(擬人)의 시법
로메다 님,
지난 몇 차례의 편지에서는 주로 시의 내용에 해당하는 '시정신'에 관해서 얘기했습니다.
이제는 다시 시의 형식, 시적 장치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시적 장치의 특성을 감춤(은폐지향성), 불림(과장지향성), 꾸밈(심미지향성)이라고 지적한 것 기억하시지요?
시에서의 비유의 속성은 불림 곧 과장성이라고 했고,
비유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은유는 불림과 감춤의 두 특성을 아울러 지녔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시에서 즐겨 구사되고 있는 활유법과 의인법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활유와 의인도 수사법에서는 비유의 범주 안에서 다루어집니다.
두 가지 표현법이 유사하지만 같지 않습니다.
다음의 내 글을 보면서 그 차이를 익히고, 의인법을 구사하는 방법도 터득하기 바랍니다.
활유(活喩)와 의인(擬人)
생명이 없는 무생물에게 생명성을 부여하여 생물처럼 그리는 것이 활유법이고,
인간이 아닌 비인물체에게 인격을 부여하여 사람처럼 표현하는 것이 의인법이다.
활유와 의인도 수사법상 비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가)
겨울 산은 눈 속에서/ 오소리처럼 웅크리고 잠들어 있다.//
산의 체온을 감싸고 돋아나 있는/ 빽빽한 빈 잡목의 모발(毛髮)들//
포르르르/ 장끼 한 마리/ 포탄처럼 솟았다 떨어지자//
산은 잠시 눈을 떴다/ 다시 감는다. ―임보「冬眠」전문
(나)
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
―김동명「파초」부분
(다)
감옥 속에는 죄인들이 가득하다/ 머리통만 커다랗고/
몸들이 형편없이 야위었다//
세계를 불태우려고/ 기회를 엿보는 어릿광대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일생을 감옥에서 보낸다.
―이세룡「성냥」전문
글 (가)는 겨울 산을 한 마리 짐승이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무생명체인 '산'이라는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한 마리 짐승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생물을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루는 기법을 두고 '활유(活喩)'라고 한다.
글 (나)에서의 화자는 '파초'라는 식물을 여인처럼 생각하고 있다.
사람이 아닌 비인물을 인격화해서 사람인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의인(擬人)'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생명체인 파초를 의인화한 것이니까 활유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글 (다)는 성냥갑을 감옥으로, 성냥개비를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죄수들로 다루고 있다.
생명이 없는 성냥개비를 죄수로 인격화해서 표현했으니 이는 활유이면서 또한 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활유와 의인은 유사하지만 같지 않다.
(가)와 (나)에서처럼 확연히 구분되기도 하고
(다)에서처럼 두 기법으로 다 설명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수사법상의 기교로 본다면 활유보다는 의인이 한 단계 위인 상급의 비유라고 할 수 있다.
의인법이 실현되는 경우를 다음의 몇 가지로 구분해 보기로 하자.
첫째, 비인물에게 인간적인 동작(動作)이나 사고(思考), 발언(發言) 등을 부여한다.
예를 들자면, '바다가 춤춘다(춤추는 바다)'는 표현은
인간적 동작인 춤추는 행위를 바다에 부여한 것이다.
'산은 사람들을 미워한다(사람들을 미워하는 산)'라는 문장은
산으로 하여금 인간처럼 미워하는 사고를 하도록 의도한 것이다.
'가까이 오지 말라/ 더구나 내 몸에 손대지는 말라/
어기면 경고 없이 해치워버리겠다(―이형기「고압선」부분)'라는 작품에서는
고압선에게 인간처럼 발언을 시켜 의인화하고 있다.
둘째, 비인물에게 인체적 조건을 부여한다.
'진달래 입술' '산의 허리' '바다의 가슴' '달의 얼굴'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인체의 부분을 끌어다 사물에 부여함으로 인격화를 꾀하는 것이다.
셋째, 비인물에게 문화적인 속성을 부여한다.
'파초의 치마가 푸르다'라는 표현에서 '치마'는 잎을 은유한 것이면서
한편 인간의 문화적 속성인 의상을 파초에게 부여한 것이므로 의인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고압선'을 '흉악범'이라고 했다면 이 역시 의인법적 은유다.
글 (다)에서 '성냥갑'을 '감옥'에 비유하고 '성냥개비'를 '어릿광대'와 '죄인'들에게 비유한 것
역시 문화적 속성을 사물에게 부여한 의인법적 은유인 것이다.
활유나 의인은 화자의 감정이 사물에 전이(轉移)된 표현이다.
예를 들어 엄동설한에 눈 속에 묻혀있는 바위를 보고
'얼마나 춥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은 바위가 아니라 화자다.
사실 생명체가 아닌 바위는 감각이 없으니 추위와 더위를 느낄 까닭이 없는데
이를 바라다본 인간이 자신의 감정으로 사물을 해석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사물에 대한 동류 의식의 발동이며 세계에 대한 시인의 애정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 정신은 휴머니즘에 자리한다.
그러나 그 표현의 기법―곧 무생명체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활유나
비인물에게 인격을 부여하는 의인은 과장 내지는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시 '불림의 기법'인 시인의 엄살로 설명이 가능하다.
―『엄살의 시학』pp.36∼39
로메다 님,
활유나 의인법은 정체된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기법이므로
활력을 느끼게 합니다.
다음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그 생동감을 맛보도록 하십시다.
흉악범 하나가 쫓기고 있다
인가(人家)를 피해 산 속으로 들어와선
혼자 등성이를 넘어가고 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모습은 아니다
뉘우치는 모습은 더욱 아니다
성큼성큼 앞만 보고 가는 거구장신(巨軀長身)
가까이 오지 말라
더구나 내 몸에 손대지는 말라
어기면 경고 없이 해치워 버리겠다
단숨에
그렇다 단숨에
쫓는 자가 모조리 숯검정이 되고 말
그것은 불이다
불꽃도 뜨거움도 없는
불꽃을 보기 전에
뜨거움을 느끼기 전에 이미
만사가 깨끗이 끝나 버리는
3상(相)3선식(線式) 33만 볼트의 고압 전류…
흉악범은 차라리 황제처럼 오만하다
그의 그 거절의 의지는
멀리 하늘 저쪽으로 뻗쳐 있다.
―이형기「고압선」전문
로메다 님,
호젓한 산 속에 세워져 있는 고압선의 철탑을 거구장신의 흉악범으로 보았습니다.
철탑은 생명이 없는 존재니까 활유면서 의인법이 되겠군요.
철탑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 정물이지만 듬성듬성 연이어 있는 모습에서
성큼성큼 산을 넘어가고 있는 무법자로 묘사한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까?
33만 볼트의 고압전류를 지니고 있는 가공의 철탑이므로 흉악범으로 설정한 것이지요.
얼마나 생동감이 넘친 작품입니까?
활유나 의인의 기법은 사물에 대한 친화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또한 사물을 자아화의 입장에서 주관적으로 해석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사물에 대한 화자의 따스한 체온이 담겨 있습니다.
이 역시 불림(과장)의 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즐겨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25신]
상징, 그 감춤의 시법
로메다 님,
한가위가 지나자 이젠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성급한 담쟁이 잎새들은 벌써 고운 빛깔로 물들기 시작하는군요.
지난번엔 불림[과장]의 한 기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활유와 의인에 관해서 얘기했지요.
오늘은 감춤[은폐]의 한 시법인 상징에 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다음의 내 글을 먼저 읽는 것이 좋겠군요.
시의 은폐(隱蔽) 지향성·1
―상징구조(象徵構造)
모든 언술(言述)은 욕망의 기록이다.
언술 속에는 화자의 소망 곧 의도한 바가 담겨 있게 마련이다.
대개의 경우는 그 의도가 양성적으로 드러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시의 대표적인 표현기법 가운데 하나는 감춤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의도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히 숨겨서 드러내고자 하는 은폐 지향적 경향이다.
직설보다는 암시가, 직유보다는 은유가 시에서 소중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에서도 그러한 경향을 느낄 수 있지만
감춤의 대표적인 장치는 역시 상징(象徵)이라고 할 수 있다.
막강한 군사력과 일사불란한 통치체재를 자랑하던 당국도 속수무책이었다. 소리없이 내습한 안개는 퇴치할 수도 없고, 해산시킬 수도 없고, 연행 구금할 수도 없었다. 교통이 일체 두절됨에 따라 생필품 공급이 중단되어 경제적 마비 상태가 발생했고, 불가시현상의 지속으로 인하여, 폭행·약탈·살상 등 사회적 혼란이 꼬리를 물었다. 그리고 천문기상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이 이상한 안개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나온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김광규 「마감 뉴스」 부분
이 작품은 안개의 내습 때문에 한 나라가 마비되어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안개는 현실적인 안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마지막 행에서 넌지시 암시한다.
여기서의 안개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대신하는 매체(vehicle)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주지(tenor)가 무엇인가를 추적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보아
백성들의 '저항' '불신' '증오' '태업(怠業)' 등 다양하게 추정할 수 있다.
말하자면 주지가 확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미확정적인 개방성을 지닌다.
이것이 상징의 구조다.
은유는 비록 주지가 숨어 있는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추정이 비교적 용이하지만,
상징의 경우는 주지를 다양하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모호성을 유발한다.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香氣가滿開한다. 나는거기墓血을판다.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내가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再처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박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李箱「절벽(絶壁)」전문
이 작품은 '꽃'과 '묘혈'에 대한 두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꽃이 향기롭지만 보이지 않고 묘혈을 파지만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 작품을 읽어보고 여기서 언술되고 있는 꽃과 묘혈이 사물 그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현실적 정황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꽃과 묘혈은 말하고자 하는 무엇인가를 숨기면서 그것을 대신하고 있다.
숨기고 있는 그것이 무엇일까?
이것을 풀어 보는 일이 곧 상징의 장치를 여는 재미이기도 하다.
묘혈이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묘혈을 파는 행위는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꽃은 무엇의 상징인가.
꽃은 생명체인 식물의 삶의 절정을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곧 꽃은 삶의 상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삶은 얼마나 매혹적[향기]으로 다가오겠는가.
그러나 불치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라면 때때로 삶의 매혹도 잊고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히기도 할 것이다.
삶과 죽음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도 없으면서[보이지 않는다]
상반된 두 세계에 반복적으로 경도(傾倒)되는 심리적 갈등을 표출하고 있다.
살고도 싶고 죽고도 싶은 이율배반의 모순 심리를 되풀이하여 맛보면서
화자는 진퇴양난의 절박함에 이른다. 그래서 '절벽'이라고 했으리라.
은유와 구별되는 상징구조의 또 다른 특징은
주지와 매체의 관계가 추상적인 것과 구상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즉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정황을 구체적인 사물로 바꾸어 드러낸다.
그런 면에서 생각하면 상징구조는 감춤의 성질과 아울러 들춤(과장성)의 의도도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시인들은 자신이 의도한 바를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은근히 감추어 표현하려는 것인가.
그런 은폐 지향적 성향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S. 프로이트의 견해에 의하면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욕망(id)을 검열 통제하는 도덕적 자아(super ego)가 있어서 욕망이 분출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고 한다.
그래서 욕망(id)은 감시자(super ego)의 눈을 피해 변장된(감추어진)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꿈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꿈은 욕망의 상징인 셈이다.
시인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가 상징의 구조를 갖게 된 것은 심층심리의 본능적 관습에서 연유된 자연스런 결과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감추고자 하는 성질을 선천적으로 강하게 타고난 것 같다.
인간의 사회에 고도의 거짓말이 횡행하고 의상과 화장술의 발달을 보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의 소치만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상징은 고급 위장술이다.
그러니까 시인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수준 높은 위장술사인 셈이다.
―졸저『엄살의 시학』pp.53∼56
로메다 님,
수사학에서는 상징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즉
정신이나 사상, 관념 같은 불가시(不可視)의 세계를
감각적인 사물 곧 물질과 같은 가시(可視)의 세계로 바꾸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가시의 세계(A)--------------→가시의 세계(B)
idea (관념, 사상)--------------→image(감각적 사물)
정신--------------------------→물질
예를 들자면 '평화'나 '구원' 같은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적인 정황을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비둘기'나 '십자가' 같은 사물을 끌어다 표현하는 기법입니다.
주지인 (A)대신 매체인 (B)로 나타냅니다.
이미 비유의 구조를 설명할 때 주지(원관념, tenor)와 매체(보조관념, vehicle)를 거론한 바 있지요?
상징도 두 사물의 결합 양식이니까 넓게 보면 비유의 범주 속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상징에서는 주지는 숨고 매체만 드러납니다.
전에 '은유의 세 유형'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생략의 구조'를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상징은 바로 그 주지가 생략된 은유 구조와 흡사합니다.
이 두 구조에서 우리는 감춰진 주지를 암시에 의해 추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은유와 상징은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은유에서의 주지는 하나로 고정되어 있는데
상징에서의 주지는 다양하게 상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① '밤하늘의 눈들이 지상을 지켜보고 있다.'
②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①에서의 '눈'은 '별'을 지칭하는 것임이 단순하게 드러납니다.
즉 주지와 매체의 관계가 1 : 1이므로 누구든 그 주지를 쉽게 추정할 수 있습니다.
'눈'은 '별'의 은유입니다.
그러나 ②의 글(한용운의「님의 침묵」)에서의 '님'의 주지는 단순하게 추정되지 않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 '조국, 불타, 애인, 진리, 自我…' 등 다양한 상정이 가능합니다.
이처럼 상징은 하나의 매체를 통해 다양한 주지를 상기시키는 모호한 구조입니다.
로메다 님
상징과 은유의 구분에 대한 이야기가 마음을 번거롭게 했나요?
그러나 너무 괘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 걸 잘 구분해야만 반드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글 쓰는 일을 논리적으로 따지다 보니까 그러한 이론들이 만들어졌는데,
그러한 이론을 알고 있는 것이 혹 도움이 될까 해서 얘기한 것뿐입니다.
로메다 님,
어떻습니까?
상징의 구조에 대해서 좀 이해가 가나요?
나는 앞에 인용한 내 글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에 의지하여
상징 구조의 배후를 설명해 보려고 시도했습니다만,
이해하기가 까다롭다면 그냥 쉽게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상징은 숨기면서 말하는 것으로 상대방을 전복시키는 한 전략입니다.
숨기는 가운데 상대방을 사로잡는(혹은 골려주는) 인간만이 구사할 수 있는 고급 술수지요.
이 청명한 가을 밤 좋은 꿈꾸시고
환한 내일을 맞으시기 바랍니다.
[제26신]
다시, 상징에 관해서
로메다 님,
지난번엔 시의 상징에 관해서 얘기했습니다.
관념이나 정신이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표현된 형식이 상징의 구조라고 설명했지요?
시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만든 이 지상의 모든 문화들은 상징의 구조에 담겨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가 안 가지요?
생각해 보십시다.
태극기는 대한민국의 상징이지요?
어떤 학교의 교표는 그 학교의 상징이고요.
횡단보도의 앞에 켜 있는 붉은 신호등은 '정지' 하라는 의미의 상징이 아닙니까?
더 넓게 생각하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음성으로 표현하는 '말'이나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글'도 역시 상징입니다.
수사학에서는 집단이 규정해 놓은 것을 제도적 상징,
그리고 특정 민족의 규약인 언어를 언어적 상징이라고 구분하기도 합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하면
한 건축가가 그의 이상을 담아 어떤 건물을 설계했다면 그 건물은 그 이상의 상징입니다.
한 디자이너가 그의 생각을 담아 만든 의상은 그 생각의 상징입니다.
그러니 어떤 의식을 가지고 만들어 낸 인간 활동의 결과물은 다 상징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만든 상징들의 숲에 갇혀 살아가는 복잡한 동물들입니다.
로메다 님,
지난 주말에는 지리산의 고운동(孤雲洞)을 찾아 나섰습니다.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머물던 길지(吉地)라는 곳이지요.
가는 길에 천은사(泉隱寺)라는 아늑한 절에 들렀습니다.
그 절에 걸려 있는 유명한 필적을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절에는 조선조 후대의 유명한 명필 이광사(李匡師, 1705∼1777)라는 분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나는 그분의 유적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는 글씨로 이름을 얻었던 분이다.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었고 인품 또한 대단했다고 전한다.
1755년 나주(羅州)에서 있었던 벽서(壁書)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부(伯父) 이진유(李眞儒)가 처형되고
그에 연유된 원교는 함경도 회령(會寧)으로 유배되는데
그때 30여 명의 제자들이 그를 따랐다고 하니 그의 인품을 짐작할 만하다.
조정에서는 이를 문제삼아 그를 다시 남해의 신지도(新智島)로 이배시켰다.
원교는 그 섬에서 22년 간 갇혀 살다 끝내 헤어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만다.
전라도의 여러 사찰들은 그의 글씨를 다투어 간직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해남 대둔사와 지리산 천은사의 것이 유명하다.
얼핏보면 원교의 글씨는 멋이 없다.
한편으로 기울어 넘어질 것 같기도 하고
어떤 획은 힘이 빠져 구부러질 것 같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제주도 귀양살이 가던 추사(秋史)가 초의(艸衣)를 만나러 대둔사에 들렀을 때
원교의 대웅전 현판을 떼고 자기의 것을 매달라 했겠는가?
그런데 그 추사가 8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대둔사에 다시 들러
원교의 현판을 거듭 보고는 자기의 것을 떼고 원교의 것을 다시 걸라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다.
천은사 일주문엔 「智異山 泉隱寺」라는 유수체(流水體 : 흐르는 물처럼 자유롭게 쓴 글씨)의 원교 현판이 걸려 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글씨로 하여
자주 일어났던 천은사의 화재(火災)가 멈췄다는 것이 아닌가.
로메다 님,
이 글을 여기에 끌어들인 것은 하나의 글씨 속에도 얼마나 무궁한 상징이 서려 있는가를 말하고자 해서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추사가 이광사의 현판을 다시 매달라고 했던 것은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그 글씨 속에 서려 있는 상징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지요.
천은사의 글씨가 화재(火災)를 막았다는 얘기는
그 글씨에 서린 주지(主旨)가 얼마나 강렬한 상징이었던가를 말하는 좋은 예라고 하겠습니다.
로메다 님,
시도 그 글씨처럼 강렬한 상징의 힘을 지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는 비유가 아니고는 말하지 않겠다고 비유의 기능을 역설했습니다만
시인은 상징에 기대지 않고는 그의 장광설을 다 담을 수 없을 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 쓴 「신발에 관한 동화」라는 내 졸시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장에 가서
신발을 사 오셨다
5남매의 신발
다섯 켤레 고무신이었다
성미 급한 형은
며칠 신다 굽이 터지자 엿 사 먹고 말았다
마음 착한 누나는
매일 깨끗이 닦아 조심 조심 신었다
개구쟁이 막내 동생은
개천이고 산이고 첨벙대며 신고 다녔다
소심한 누이동생은
댓돌 위에 얹어 놓고 바라다만 보았다
나도 돌밭길을 달릴 때는
두 손에 벗어 들고 맨발로 뛰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형제들을 불러 놓고
자신의 신발들을 가져 오라 이르셨다.
형은 없는 신발을 가져올 수 없었고
막내의 신발이 제일 엉망이었다
가장 양호한 신발은
누이와 누님의 것
새 신발이 필요한 자는 바꾸어 주리라
아버지가 이르셨다
그러자 손을 든 놈은 오직
막내뿐이었다
―「신발에 관한 동화」전문(『우이시』 제194호)
로메다 님,
당신은 이 작품에 등장한 여러 형제자매들 가운데 어떤 유형에 가까운 인물인가요?
성경에 이러한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주고간 달란트[돈]를 불리는 종들에겐 주인이 칭찬을 하고
불리지 못한 무능한 종을 꾸중한 이야기 말입니다.
이 글도 발상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신발을 둘러싼 한 가족의 얘기만을 한 것이 아닙니다.
신발은 하나의 상징물입니다.
신발은 우리에게 주어진 '재능'일 수도 있고 '재산'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혹은 '환경'이나 '도구'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여기에 등장한 형제자매들 역시 다양한 성품과 능력을 지닌 각계각층의 인물들을 상징합니다.
상징의 구조는 이처럼 숨기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말합니다.
시에서의 상징의 매력과 기능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앞의 작품에 등장한 '고무신'은 내가 처음으로 설정한 개인 상징입니다.
개인 상징은 생소해서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적인 발언은 참신한 개인의 입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이것이 시를 쓰는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
상징은 감추면서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말하는 기법입니다.
작품 속에 당신만의 상징법, 개인 상징을 끊임없이 모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환절기에 몸조심하십시오.
천은사 입구에서 내가 잡은 수홍교의 석양 풍경과
원교의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보내니 완상하시기 바랍니다
[제27신]
감춤의 또 다른 시법―전이(轉移)에 관하여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 「사슴」전문
로메다 님, 널리 알려진 노천명의 「사슴」입니다.
긴 목과 화려한 뿔을 가진 외모와 함께
향수에 젖어 먼 곳을 바라보는 외로운 사슴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사슴에 관한 정보나 정서라기보다는 사실은 시인 자신에 관한 얘기입니다.
자신의 얘기를 사슴을 통해 간접적으로 말하고자 한 것이지요.
자신이 지닌 과묵성, 고고성, 비극성 등을 사슴의 그것에 의탁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노천명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직설적인 자화상이 아니라 사슴의 형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려낸 자화상이지요.
이처럼 화자(話者)[시인]의 입장이 다른 사물이나 타자에게 옮겨서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감춤의 한 기법을 나는 전이(轉移)라고 부릅니다.
전이에 관한 다음의 글을 읽어보기 바랍니다.
시의 은폐(隱蔽) 지향성·2
―전이구조(轉移構造)
상징과 더불어 전이(轉移)는 시에서 대표적인 감춤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전이의 사전적 의미는 '옮김'이다. 즉 어떤 상황의 공간적 이동을 뜻한다.
그러나 내가 시학(詩學)에서 사용하는 이 용어의 의미는 다르다.
시인의 주체적 요소가 자신을 통해서 직접 표출되지 않고
사물이나 혹은 타자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감춤의 한 표현 기법을 의미한다.
사물을 통해 표현되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감정이입(感情移入)'이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인의 주체가 전이되는 경우는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박목월 「閏四月」전문
겉으로 보기에 이 작품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담담히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표현의 주된 대상은 깊은 산골에 사는 천한 산지기의 딸인 눈먼 처녀다.
불행의 극에 놓여 있는 한 인물을 화사한 봄을 배경으로 대조적으로 드러내 놓고 있다.
작자는 무슨 의도로 이러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인가.
가만히 따져보면 표현의 이면에 감추어져 있는 작자의 의도를 전혀 엿볼 수 없는 바도 아니다.
작자가 이 작품에 등장한 눈먼 처녀를 보다 비극적으로 그린 것은 바로 그 처녀에 대한 독자들의 동정심을 유발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처녀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허구적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설령 현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현실 그대로가 아니라 작품 속에서 극적 변화를 일으킨 변질된 것이다.
말하자면 화자 자신의 '외롭고 불행한 인생'이 극적 인물인 눈먼 처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표상된 것이다.
시인의 주체가 작품 속의 한 인물에 전이되어 감추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입을 가지고도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고 모든 자유와 권리가 박탈된 식민치하에서의 시인은 자신의 존재를 얼마나 암담하게 느꼈겠는가.
우리는 그 눈먼 처녀에게서 불행하고 암담한 시대를 살았던 시인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화구(畵具)를 메고 산을 첩첩(疊疊) 들어간 후 이내 종적이 묘연하다. 단풍이 이울고 봉(峰)마다 찡그리고 눈이 날고 영(嶺)우에 매점(賣店)은 덧문 속문이 닫히고 삼동(三冬)내― 열리지 않었다. 해를 넘어 봄이 짙도록 눈이 처마와 키가 같았다. 대폭(大幅) 캔바스 우에는 목화(木花)송이 같은 한떨기 지난해 흰 구름이 새로 미끄러지고 폭포(瀑布)소리 차츰 불고 푸른 하눌 되돌아서 오건만 구두와 안신이 나란히 노힌채 연애(戀愛)가 비린내를 풍기기 시작했다. 그날밤 집집 들창마다 석간(夕刊)에 비린내가 끼치였다. 박다(博多) 태생(胎生) 수수한 과부(寡婦) 흰얼골이사 회양(淮陽) 고성(高城)사람들 끼리에도 익었건만 매점(賣店) 바깥 주인(主人)된 화가(畵家)는 이름조차 없고 송화(松花)가루 노랗고 뻑 뻑국 고비 고사리 고부라지고 호랑나비 쌍을 지어 훨훨 청산(靑山)을 넘고.
―鄭芝溶 「호랑나비」
하나의 정사(情死)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이름없는 한 화가와 산장 매점의 주인이었던 한 과부가 한겨울 깊은 산 눈 속에서 사랑을 나누다 저 세상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들의 변사체가 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진다는 얘기다.
신문기사로나 보도됨직한 하나의 사건이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어쩌면 신문에 보도된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작자가 이 정사 사건에 대해 긍정적이고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릇 모든 문인들은 자연을 동경한다.
세속적인 욕망에 젖어 서로 헐뜯고 살아가는 소란하고 오염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조용하고 맑은 자연 속에 머물고 싶어한다.
더욱이 그 자연이 청정한 눈으로 가득 덮인 깊은 산골이고 보면 이 얼마나 아늑하고 정결한 공간이겠는가.
그런 성지(聖地)에 때묻지 않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그곳을 바로 낙원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러한 행복을 누리는 연인들은 그들의 그 지복(至福)한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 그들의 행복을 구원화(久遠化)한다.
정지용은 이 연인들의 죽음을 넘어선 구원한 사랑을 청산으로 날아가는 호랑나비 한 쌍을 통해 암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호랑나비」는 정지용의 청정무구한 자연회귀의 소망과 구원한 순애정신이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 등장한 화가는 곧 작자의 전이된 인물이다.
현실적으로 성취될 수 없는 작가의 욕망이 작품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상징에서보다도 전이는 보다 적극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모습을 대상 속에 감추는 변장술이라고 할 수 있다.
로메다 님,
사람이란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입니다.
어떤 욕망이 일어나도 체면이나 부끄러움 때문에 이를 억제하고 감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억제된 욕망이 꿈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된다고 프로이트는 설명합니다만
시인의 경우는 상징과 전이의 기법을 통해 간접적으로 실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징이나 전이 같은 감춤의 기법은 '숨어서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데
화자가 자신의 몸을 숨기고 말하는 즐거움도 적지 않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는 독자들을 보면서
화자는 세상을 농락하는 쾌감을 맛볼 수도 있으니까요.
로메다 님, 가을빛이 짙어갑니다.
어제는 시를 좋아하는 몇 친구들과 함께 가을산을 보기 위해 화양동을 찾았습니다.
화양동은 충북 괴산에 자리한 아름다운 계곡입니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잡목들의 고운 단풍과 밑바닥까지 환히 들여다보이는 계곡의 맑은 물이 자꾸만 걸음을 멈추게 했습니다.
자연처럼 아름다운 시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들의 손에 의해 빚어진 시가 아무리 빼어나기로 한 떨기 꽃이나 단풍의 신묘한 빛깔에 이르기에는 얼마나 먼가를 새삼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시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가능한 한 자주 자연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 청정과 겸허와 조화를 배우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제28신]
역설의 시법
로메다 님,
그동안 감춤의 시적 장치인 은유와 상징 그리고 전이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불림의 시적 장치 중의 하나인 역설(逆說)에 관해서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순수한 우리말의 '불림'은 과장(誇張) 지향성을 의미합니다.
사실에 가깝도록 표현하고자 하는 산문과는 달리
시에서의 표현은 사실보다 더 두드러지게 표현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시에서는 과장된 표현이 적지 않습니다.
白髮三千丈 흰 머리털 삼천 발
緣愁似個長 시름 때문에 이처럼 자랐구나.
不知明鏡裏 알 수 없구나, 거울 속 저 사람
何處得秋霜 어디서 그 가을 서리 얻었는가.
―이백(李白) 「秋浦歌」일부
늙음을 한탄하는 이백의 시인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긴 백발을 두고
삼천 발이라고 표현했으니 실로 대단한 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두고도 알 수 없다고 말한 것 역시 과장입니다.
시에서는 이처럼 과장이 능사로 구사됩니다.
물론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이지요.
이러한 직접적인 과장법 외에도 시에서 즐겨 구사되는 역설(逆說) 역시 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설은 논리적인 모순을 담고 있는 언술입니다.
그러나 시에서의 역설은 논리를 뛰어넘는 가운데 진실을 드러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설법입니다.
우선 시의 역설에 관한 다음의 글을 읽어보도록 하십시다.
역설(逆說)의 구조
역설은 논리적 모순을 지닌 진술이다.
말하자면 비합리적인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침묵의 함성'이니 '사랑의 증오'니 '군중 속의 고독'이니 하는 등의 소위 모순어법(oxymoron)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런데 이 역설은 겉으로 보기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모순을 지닌 언술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물의 핵심을 짚어 의표를 찌르는 함축된 발언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역설을 '모순되는 두 사실의 대응을 통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거나 깨달음을 계시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특히 시에서는 이 역설적 발언이 널리 원용되고 있다.
C. Brooks는 현대시의 구조를 아예 '역설(paradox)'로 파악기도 한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부분
이 시의 진술 내용을 요약하면 소쩍새 울음소리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했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소쩍새와 천둥이 국화꽃을 피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역설이다.
그러나 이 언술의 모순적인 표층 구조와는 달리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
한 생명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실로 얼마나 많은 사물들의 총체적인 협조를 필요로 하는가.
빛과 공기와 물과 그리고 여러 가지 영양소들―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유기물들의 섭취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래서 하나의 생명체는 전 우주적 요소들의 결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한 한 생명체(국화)의 원숙한 성취(꽃)는 긴 세월(봄, 여름) 동안의 많은 고뇌(소쩍새 울음)와 시련(천둥)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심오한 자연의 이치가 짧은 몇 마디의 역설적 진술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이 시의 묘미다. 만일 이를 산문으로 설명코자 한다면 수 천 개의 단어를 동원해도 만족스럽게 표현키 어려울 지 모른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 「알 수 없어요」 부분
기름이 타서 재가 된다. 그런데 그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이 역설은 화자의 치열한 심리를 절실하게 표현하는 기능을 지닌다.
즉 끝없이 불타는 가슴을 처절히 극대화하고 있다.
기름이 재가 되고 재가 다시 기름이 되어 타는 반복적 소진(燒盡)을 통해 생명의 완전 연소(燃燒)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애타는 가슴의 그 절박함을 이보다 어떻게 더 절실히 표현해낼 수 있겠는가.
이것이 역설의 기능이다.
고도(高度)의 은유(隱喩)도 역설의 기능을 지닌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부분
주지(겨울)와 매체(강철로 된 무지개)가 주술(主述) 관계 곧 등가(等價)의 구조로 이루어진 은유다.
그런데 주지와 매체의 공유소(동일성)는 추출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주지와 매체가 동일성이나 어떤 유사성에 의해 결합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의도적(폭력적)으로 결합시킨 고도의 비유다.
매체인 '강철로 된 무지개' 역시 '강철의 무지개'와 같은 의미 구조를 지닌 것이니까
수식어와 피수식어어의 관계로 맺어진 결속의 은유 구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시구는 이중으로 된 복합 은유 구조를 지닌 셈이다.
겨울이 무지개라든지, 그 무지개가 강철로 되었다는 진술이 다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지 않는 역설이 아닐 수 없다.
두 개의 역설을 이중으로 얽어 짠 문장이다.
또한 '겨울'은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당대의 괴로운 시대를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시적 화자가 살고 있는 시대(겨울)는 화자의 의지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강철)이긴 하지만, 생각하면 인생이란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무지개)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라는 체념으로 해석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와우(蝸牛)라는 자는/ 호리병 하나만 차고/ 산하(山河)를 흘러다니고 있다/
시장하면 병을 기울여/ 술로 목을 적시고/
졸리면 병 속에 기어들어/ 잠을 잔다/
그 작은 병 속에 어떻게 들어간단 말인가/
그런데 병 속엔 혼자만이 아니라는 소문도 있다/
허기사/ 마셔도 마셔도 바닥이 나지 않는 걸 보면/
그 속에 누가 들어앉아서/ 노상 술을 빚어대고 있는 모양이다.
―졸시 「병(甁)」 전문
내가 쓴 선시(仙詩) 중의 하나다.
차고 다닌 호리병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하는데, 그 속에는 누군가 들어앉아서 술을 빚어대고 있다는 얘기다.
그야말로 기상천외의 정황이다. 역설 중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의 시급한 과제는 의식주의 문제다.
그 가운데서도 먹을 것과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닌가.
그리고 또한 소중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다.
달팽이처럼 가벼운 집을 달고, 좋아하는 음식과 사랑을 데불고 유유자적 떠도는 삶을 상상해 보라.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스러운 삶인가.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것이 「병」이다.
선시(仙詩)는 실현시킬 수 없는 지상의 욕망을 역설적으로 실현시킨 꿈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가 우리들의 꿈의 기록이라면 그리고 그 꿈이 성취되기 어려운 것이라면
시가 당연히 역설일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엄살의 시학』pp.65-68
로메다 님,
세계는 당초부터 모순에 차 있는 역설적 구조를 지녔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우주의 구조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유한하다고 할 수도 없고, 무한하다고 할 수도 없는 모순 구조입니다.
인간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빛과 그늘, 삶과 죽음,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등 상반된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세상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진면목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가 역설의 어법에 기울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한편 언어 자체도 모순과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인간들이 만들어 낸 편리한 의사 전달의 도구이기는 합니다만
사물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지칭할 뿐 사물 자체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로메다 님,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나요?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사과'라는 말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과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언어입니다.
로메다 님, '사과'라고 했을 때 어떤 영상이 머리 속에 떠오릅니까?
달고 새큰한 맛을 지닌, 불그스레한 둥근 과일이 떠오르지요?
그런데 실제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사과들은 다 다릅니다.
붉지 않은 사과도 있고 달지 않은 사과도 있습니다.
지금 내 손에 들린 하나의 사과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이 유일한 사과가 지닌 특성을 '사과'라는 일상적 언어는 드러내지 못합니다.
여기에서 시인들은 언어의 한계를 느끼고 절망합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개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발버둥칩니다.
그것이 은유며 역설 등의 화법을 낳게 하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시는 언어이면서 언어이기를 거부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는 곧 시에서 구사하는 언어가 일상적인 관념어가 아니라
사물 자체를 드러내고자 하는 개별어(사물어)를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에서의 역설은 일상적 관념어의 껍질을 깨뜨리는 반란의 한 유형입니다.
로메다 님, 이해를 돕기 위한다는 설명이 오히려 더 모호하게 만들고 말았나요?
이해하기 까다로우면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습니다.
비록 역설의 원리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를 구사할 수만 있으면 되니까요.
역설은 비꼬면서 들이미는 강력한 말입니다.
마치 나선형의 나사못이 돌면서 들어가 박히는 것처럼―.
정진을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제29신]
시의 율동적 요소―율격에 관하여
로메다 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생명체는 말할 것도 없고
해와 달을 위시해서 광활한 우주공간에 널려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체들이
한순간도 쉼이 없이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운행합니까?
봄·여름·가을·겨울, 4계의 반복은 지구의 공전으로 말미암은 것이고,
낮과 밤의 무궁한 교체 반복 현상 역시 지구의 자전이라는 운동 때문이 아닙니까?
일정한 질서 속에서 움직이는 천체의 운행은 규칙적입니다.
춘하추동 그리고 주야의 규칙적인 반복은 리듬의 속성을 지닙니다.
리듬은 일정한 간격으로 되풀이되는 변별적 인지현상이 만들어낸 감각입니다.
세계의 모든 운동들은 등장성을 이상으로 하는 율동(律動, rhythm)을 지향합니다.
생명체들의 생리적인 운동을 보십시오.
맥박의 고동과 호흡의 양상이 그렇고 보행(步行)의 동작이 또한 그렇지 않습니까?
지난번에 얘기한 '대우의 구조'가 사물의 가장 보편적인 공간적 존재 양상이라고 한다면,
'율동(律動, rhythm)은 사물의 시간적인 존재 양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공간적인 거리의 측정을 잣대를 가지고 하는 것처럼
리듬은 시간적인 구조를 인식하는 척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초, 분, 시간 등 관념적인 단위를 설정하여 시간을 파악하지 않던가요?
아무튼 인간들은 리듬이라고 하는 율동적 구조에 길들어 있습니다.
태초로부터 되풀이되는 사계나 주야와 같은 천체의 율동적 환경 속에 살아오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인간들은 태어나기 전부터서 모체의 심장 박동을 들으며 자라난다고 합니다.
그러니 리듬이 우리의 몸에 얼마나 뿌리깊게 자리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리듬은 세계 구조의 중요한 배경이면서 생명체의 선험적 조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리듬은 우리에게 친근과 화평의 정서를 불러일으킵니다.
시의 언어가 리듬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은 시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아름다운 글이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의 리듬―율동적 요소를 운율(韻律)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운율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한 장치인 율격에 관하여 논의하고자 합니다.
우리 시의 율격(律格)
시에서의 주도적인 음악적 요소는 운율(韻律)이다.
주지하다시피 운율은 압운(押韻)과 율격(律格)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압운은 동일한 소리가 되풀이되면서 만들어낸 해조(諧調) 현상이고,
율격은 동일한 소리의 성질이 되풀이되면서 빚어낸 율동 현상이다.
말하자면 소리의 고저(高低)나 장단(長短) 혹은 강약(强弱) 등의 성질이 율격 형성의 요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시에서의 율격 구조는 어떤 것일까.
이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조윤제의 자수율론(1930)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뒤 정병욱의 강약률론(1954)이 대두되고 나아가서는 고저율, 장단율까지를 우리 시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은 우리 시의 율격을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시의 율격은 음수(音數)에 의해 측정될 수밖에 없다는 이론으로 귀착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시의 음수율은 정형시인 시조에서조차도 고정된 틀을 지닌 것이 아니어서
음수로 따지기보다는 낭독할 때 어우러지는 소리의 마디[音步]를 기준으로 율격을 논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시의 음보는 대개 어절 중심으로 분할이 이루어진다.
이는 우리 시의 음보가 단순히 음성적 요소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의미적 요소도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우리말의 한 어절은 4음절이 가장 많다.
따라서 가장 자연스런 한 음보의 음량은 4음절이 된다.
그래서 2음절미만의 어절들이 겹쳐 이어지면 두 어절이 합하여 하나의 음보를 만들기도 하고,
5음절이상의 긴 어절인 경우는 어절의 중간을 분할하여 두 음보로 읽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따져볼 때 우리의 전통적인 시조나 가사문학은 4음보의 율격을 지닌 것으로 판명된다.
그래서 4음보를 우리 시의 전통 율격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시에 전통적 율격이 어떻게 관여하고 있는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한 일일까?
현대시가 형식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운율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일언이폐지하여, 운율은 시와 산문을 변별하는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같은 내용의 것이라면 운율에 실려 표현되는 작품이 보다 감동적이다.
자신의 작품이 보다 감동적으로 독자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는 시인이라면 운율의 거부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시인이 형식의 자유를 빙자해서 안이하게 작품을 만들려 한다면 이는 게으름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감동적인 작품들은 거의 운율과 무관하지 않다.
소월이나 미당의 아름다운 작품들이 이러한 사실을 극명히 보여 주고 있다.
미당의 「부활(復活)」은 행의 구분이 없이 쓰여진 산문시다.
그러나 이 작품을 신중히 읽어보면 놀라운 율격적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1음보/· 2음보/· 3음보/· 4음보/· 5음보/· 6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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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너를/ 찾아왔다/ …臾那.//
2) 너참/ 내앞에/ 많이/ 있구나//
3) 내가/ 혼자서/ 鐘路를/ 걸어가면//
4)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5) 새벽닭이/ 울때마닥/ 보고/ 싶었다…//
6) 내/ 부르는소리/ 귓가에/ 들리드냐//
7) 臾那/ 이것이/ 멫萬時間/ 만이냐.//
8) 그날/ 꽃喪阜/ 山넘어서 간다음//
9) 내눈동자/ 속에는/ 빈하늘만/ 남드니,//
10) 매만저볼/ 머리카락/ 하나/ 머리카락/ 하나/ 없드니//
11) 비만/ 자꾸오고…//
12) 燭불밖에/ 부흥이/ 우는/ 돌門을/ 열고가면//
13) 江물은/ 또/ 멫천린지,//
14) 한번가선/ 소식없는/ 그어려운/ 住所에서//
15) 너/ 무슨/ 무지개로/ 내려왔느냐.//
16) 鐘路/ 네거리에/ 뿌우여니/ 흐터저서,//
17)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애들.//
18) 그중에도/ 열아홉살쯤/ 스무살쯤/ 되는애들.//
19) 그들의/ 눈망울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어//
20) 臾那!/ 臾那!/ 臾那!//
21) 너인제/ 모두다/ 내앞에/ 오는구나.//
음보의 한계를 어떻게 잡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개인에 따라 약간의 이견(異見)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위의 분석에서 보는 것처럼 4음보가 주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산문시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감동적으로 읽혀지는 것은 이러한 율격구조 때문이리라.
그렇다고 현대시에 전통적인 4음보만을 구사하자고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현대의 감각에 맞는 새로운 율격을 창출해 낼 수도 있다.
소위 7·5조류의 3음보(4음보로 보는 견해도 있음)는 전통적인 율격이 아닌데도
1910년대 육당(六堂)으로부터 시도되어 안서(岸曙)와 소월(素月) 그리고 미당(未堂)에 이르는 별로 길지 않은 과정을 거쳐
우리의 성정에 맞는 새로운 율격 형태로 자리잡지 않았던가.
예로부터 시는 산문과는 달리 다양한 규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인 언술이다.
그러한 규제들이 시를 상급문학으로서의 위상을 갖게 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는 아무런 규제도 없다.
시와 시 아닌 글의 경계가 무너져 가고 있다.
우리 시에서 시의 위상을 우선 율격의 회복에서부터라도 다시 찾을 수는 없는 것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자주 하는 얘기지만 자유시라고 해서 율격으로부터 해방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큰 잘못입니다.
자유시는 정형적인 율격의 틀로부터 벗어난 것이지 율격을 벗어난 것은 아니니까요.
말하자면 자유시는 동일한 작품 속에 다양한 율격 형태가 허용된 시일 뿐입니다.
긴 생명을 가진 작품들 가운데 운율의 힘을 빌지 않는 시란 없습니다.
시와 운율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러니 자유시와 운율의 관계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유시란 매 작품마다 그 내용에 가장 적절한 형식―곧 새로운 운율구조를 만들어 가는 시라고―.
자유시를 마치 자유방임의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큰 착각입니다.
자유시는 정형시에서보다 더 시인의 책임과 노역을 필요로 합니다.
자유시는 정형시에서는 요구되지 않는 새로운 형식의 창조를 매 작품마다 겪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로메다 님,
운율의 이론이 까다로우면 그냥 이렇게 이해하십시오.
자연스럽게 읽힐 수 있도록 쓰면 된다고.
우리의 몸은 이미 운율을 감지하고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읽힌다는 것은 이미 운율에 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30신]
우리시의 압운에 관하여
로메다 님, 지난번에는 운율의 한 유형인 율격에 관하여 소개했습니다.
내 설명이 미급했던 것 같아서 다시 간략하게 덧붙입니다.
율격은 강약·고저·장단 등 '소리의 성질'이 빚어내는 율동 현상입니다.
언어의 특성에 따라 율격 형태가 결정됩니다.
강약의 어세를 중요시하는 영어로 쓰인 영시(英詩)는 강약률을 지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시의 한 행이 '강약약 강약약 강약약…'의 어세를 지닐 경우
'강약약'이 하나의 단위가 되어 반복되면서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고저를 중요시하는 한시(漢詩)인 경우는 고저율을 갖게 되고,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기록된 시는 장단율이 지배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시에서의 율격은 그러한 소리의 성질(강약,고저,장단)에 의해서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소리의 양'의 반복으로 파악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굳이 우리 시의 율격 명칭을 붙이자면 '음량률'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시의 율격형태를 4·4조라든지, 7·5조라든지 하는 말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낭독할 때의 시간적인 등장성(等長性)을 고려하여 2음보, 3음보, 4음보와 같은 음보의 개념으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압운(押韻)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압운은 같은 소리나 혹은 유사한 소리들의 반복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소리의 어울림입니다.
압운에 관한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시의 압운(押韻)
압운은 율격과 함께 운율을 형성하는 대표적인 장치 중의 하나다.
압운은 동일한 소리의 반복이 빚어낸 해조(諧調) 현상인데,
이는 한시의 절구(絶句)나 율시(律詩)라든지 서구의 sonnet와 같은 정형시에서는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조건이다.
즉 이러한 정형시에서는 규정된 압운법이 있어서 그러한 압운법을 지키지 않는 글은 시가 되지 못한다. 말하자면 압운은 정형시를 이루는 한 형식―지켜야만 되는 규칙인 것이다.
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어인 일로 푸른 산 속에 사는가 그대가 묻는다면)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대답이 무슨 소용, 그저 웃고만 있으리)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떨어진 시냇물 아득히 흘러가는 곳)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속세와는 먼 특별한 이 세상을 어찌 모르시는가)
―이백(李白) 「山中問答(산중문답)」
① The year's at the spring, (일년 중에서도 봄철)
② And day's at the morn; (하루 중에서도 아침나절)
③ Morning's at seven; (아침 가운데서도 7시)
④ The hillside's dew-pearled; (언덕에는 진주 이슬)
⑤ The lark's on the wing; (하늘 나는 종달새)
⑥ The snail's on the thorn; (뿔 세운 달팽이)
⑦ God's in His Heaven-- (하느님도 평안하시고)
⑧ All's right with the world! (세상은 만사형통!)
―R. Browning 「Pippa's Song」
「산중문답」에서는 1, 2, 4행의 끝이 동일한 소리('ㄴ')로 압운되어 있고.
「Pippa's Song」에서는 ①행과 ⑤행, ②행과 ⑥행, ③행과 ⑦행 그리고 ④행과 ⑧행의 끝이 서로 호응하여 동일한 소리들을 매달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러한 즐거운 해조야말로 절제의 미학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시조(時調)와 같은 정형시에서도 압운의 규제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시에서는 압운법이 발달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시가 운율의 취약성을 지니게 된 요인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시인들이 압운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만 한다면 우리의 현대시에서도 압운적 효과를 성공적으로 실현시키지 못할 것도 없다.
말리지 못할 만치 몸부림치며
마치 천리 만리나 가고도 싶은
맘이라고나 하여 볼까.
―김소월 「千里萬里(천리만리)」부분
일자리 잃고
집에서 지내네
아내는 안에서
한숨이 한이 없고
나는 난감하여
낯빛이 납빛이네
돈은 돌고 돈다는데
돈에 돌아야 도는 걸까
―채희문 「우울한 日誌(일지)·15」 부분
목화밭 청무우 시린 다복솔
옥양목 달에 젖은 부신 저고리
시오리 가리맛길 잠든 산마을
시루봉 머리 위에 걸린 달무리
―졸시 「달밤」
소월의 작품에서는 'ㅁ'이 의도적으로 반복되면서 부드러운 율동감을 빚고 있다.
채희문의 작품에서는 행 단위로 동일한 음절들이 되풀이되면서 아이러니컬한 음조를 형성하고 있다.
졸시 「달밤」은 1, 2행과 3, 4행의 첫머리를 각각 동일한 소리로 배치했고
1, 3행과 2, 4행의 끝에 각각 동일한 소리를 달았다.
균제(均齊)의 구성미를 추구해 본 것인데 독자들에게 어떻게 가 닿는지 궁금하다.
압운되는 소리가 단순히 율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고,
반복되는 그 소리의 음색(音色)[음성상징]이 작품의 정조(情調)[시의 내용]와 잘 어울려 상승 작용을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학계에서는 압운의 범주를 문제삼기도 한다.
우리 시에서의 압운의 한계 즉 되풀이되는 소리의 단위를 어떻게 한정할 것인가의 문제다.
압운의 범주를 단음의 반복만으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는 영시(英詩)나 한시(漢詩)의 압운법에 근거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은 영어나 중국어와는 달리 의미를 나타내는 실사(實辭) 뒤에 문법적 관계를 나타내는 허사(虛辭)[조사,어미 등]가 질서정연하게 부착되어 이루어진 교착어다.
그런데 어절의 끝에 부착된 허사 즉 조사나 어미는 대개 한 음절 이상의 것들이어서 압운의 범주를 단음만으로 한정할 경우 우리 시에서의 압운의 실현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 구조가 다른 우리 시가 굳이 한시나 서구시의 압운법에 예속될 필요는 없다.
우리 시는 우리 언어 구조에 맞는 압운법을 설정하면 되는 것이다.
되풀이되는 소리의 단위가 단음을 넘어서서 음절이나 어절 단위가 되더라도 해조적 리듬감을 생산해 낸다면 압운의 범주로 다루지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되풀이되는 소리의 단위가 크고 작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소리가 효율적인 해조를 만들어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졸저『엄살의 시학』pp.77-80
로메다 님,
압운의 이론도 까다롭지요?
압운되는 위치에 따라 행내운(行內韻)과 행간운(行間韻)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행내운은 앞에 인용한 채희문의 「우울한 일지·15」에서처럼 동일한 행 속에서 같은 소리가 반복되는 구조이고,
행간운은 앞의 졸시 「달밤」에서처럼 행과 행들의 유사한 위치에 동일한 소리가 놓이면서 만들어집니다.
이는 다시 행의 앞에 놓인 행두운(行頭韻)과 행의 끝에 놓인 행말운(行末韻)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모밀꽃 보고
무얼 생각누
머언 산허리
멈춘 낙조(落照)에
목동(牧童)의 피리
머흘 머흘이
멍든 가슴을
만져만 주는
모색(暮色) 하늘은
물든 장미빛
―장호(章湖)「모밀꽃 보고」부분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젖는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 무리지던
연분홍빛 꽃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삼춘(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가구가락(可口可樂) 물냄새
구국구국 울어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민영(閔暎)「용인 가는 길」
장호의 작품은 행두운을 의도적으로 실현시키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겠지요?
각 행의 첫 소리가 'ㅁ'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민영의 작품에서는 각 연의 행말에 유사한 소리가 오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제1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에'로 2행과 4행의 끝이 'ㅏ'로
제2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던'으로 2행과 4행의 끝이 'ㄹ'로
제3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ㄴ'으로 2행과 4행의 끝이 'ㅣ'로
제4연의 1행과 3행의 끝이 '에'로 2행과 4행의 끝이 'ㅏ'로 압운되어 있습니다.
로메다 님,
작품 전체에 걸쳐 지나치게 의도적인 압운 설정을 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못합니다만
부분적으로 적절한 압운을 실현시킬 수 있다면 한결 부드러운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시에서 압운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은 아니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은 우리 시의 압운 개발에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역시 우리 시를 풍요롭게 하는 한 방법이 될 터이니까요.
시의 율격과 압운에 관해서 좀더 깊이 있는 이해를 원하신다면 졸저 『현대시 운율 구조론』(태학사,1999)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제31신]
내재율이란 무엇인가
로메다 님,
그 동안 준비해 온 수능시험은 잘 치렀는지 궁금하군요.
혹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못 거둔다 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작은 성취에 자만(自慢)한 사람은 큰 성취를 거두기 어렵고
작은 실패에 자성(自省)한 사람은 큰 성취를 거둘 수 있다.'
라는 말씀으로 조언을 드리고 싶군요.
결국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마음을 돈독히 지닌 사람의 앞길은 언젠가는 열리기 마련입니다.
로메다 님,
다시 우리가 해 오던 시의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울격과 압운, 시의 운율에 대한 얘기를 했었지요?
그 얘기들이 적잖이 딱딱하고 또한 재미도 없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시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운율'은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친김에 오늘도 운율의 세 번째 관문인 '내재율'에 관해서 얘기하고자 합니다.
로메다 님,
리듬 곧 율동은 청각적인 현상만은 아닙니다.
시각적인 리듬도 있습니다.
밤하늘에 일정한 간격으로 명멸하는 탐조등의 불빛에서 리듬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광야에 펼쳐지는 보리밭의 고랑과 이랑들이 반복되는 이어짐이라든지,
칠색의 무지개 빛깔이라든지, 색동저고리의 찬란한 무늬 등
이 세상에는 시각적인 리듬을 유발하는 현상들도 적지 않습니다.
활자로 인쇄된 시에서도 시각적인 리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크고 작은 활자들을 적절히 교체해서 배치한다든지
시행들을 들죽날죽 변화롭게 배열한다든지
혹은 활자 인쇄를 다양한 색채들을 이용하여 했을 경우 등을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시각적인 리듬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청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은 청각률이고
시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은 시각률이 됩니다.
이밖에도 만일 촉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이 있다면 촉각률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로메다 님, 그동안 시의 운율이라고 하면 율격과 압운 곧 청각률만 문제삼았습니다.
그런데 청각률이나 시각률 같은 감각에 의해 감지된 리듬만이 아니라
심리, 곧 내면에서도 느껴지는 율동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어의 의미라든지, 이미지라든지, 정서라든지 또는 문장의 구문구조라든지
이러한 것들에 의해 빚어지는 심리적인 리듬인데 이를 나는 내재율이라고 부릅니다.
『엄살의 시학』에 수록되어 있는 '내재율'에 관한 설명을 우선 읽어보도록 합시다.
내재율(內在律)
내재율이라는 용어는 현대시의 운율을 논하는 자리에 자주 오르내리곤 한다.
밖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시 속에 담겨 있는 운율쯤으로 해석들을 하고 있다.
내재율은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니까 구체적으로 그 운율의 형태를 지적해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내재율이라는 용어는 어떤 구체적인 운율의 구조를 설명하는 자리에 사용된다기보다는
현대시의 운율을 설명하기 곤란할 때 그 회피의 수단으로 끌어다 쓰는 도깨비방망이처럼 되고 말았다.
내재율은 정말 구체적으로 지적될 수 없는 그런 성질의 운율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내재율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느껴질 것이고,
느껴진다면 그 전체를 다 털어내기는 어려울지 몰라도 그 대략의 맥락을 붙잡아 내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나는 내재율의 상대 개념으로 외형률(外形律)을 상정한다.
외형률은 겉으로 드러난 운율이다. 곧 우리의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객관적인 리듬이다.
나는 이를 다시 청각률(聽覺律)과 시각률(視覺律)로 구분한다.
그동안 시의 대표적인 운율로 지적되어 온 율격(律格)과 압운(押韻)은 청각률의 범주에 든다.
한편 시를 활자 매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활자의 대소(大小) 배치, 행의 장단(長短) 배열,
다양한 색채 인쇄 등이 빚어 낸 시각적인 리듬의 구조도 예상이 된다.
이를 시각률이라 이르는데 이는 다시 형태율(形態律)과 색채율(色彩律)로 양분할 수 있다.
이처럼 청각이나 시각과 같은 감각에 의해 포착되는 외형률과는 달리
우리의 내면 세계 곧 심리에 파문을 일으키는 운율 구조를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이를 내재율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니까 내재율은 의미, 이미지, 정서, 구문 구조 등이 만들어 내는 심리적인 리듬이다.
우리가 시를 읽어 가는 동안 어떤 특정한 의미가 계속 되풀이된다든지,
유사한 사물이나 정황들이 계속 열거된다든지,
대조적인 정서가 교체 반복된다든지 할 경우 우리의 심리는 율동감에 젖게 된다.
봄은/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더니//
가을은/ 머나 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 온다.//
꽃잎을 이겨/ 살을 빚던 봄과는 달리/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가을은/ 내 마음의 寶石을 만든다.//
눈동자 먼 봄이라면/
입술을 다문 가을//
봄은 언어 가운데서/ 네 노래를 고르더니/
가을은 네 노래를 헤치고/ 내 언어의 뼈마디를/ 이 고요한 밤에 고른다.
김현승(金顯承)의 「가을」이라는 작품이다.
작품 전체가 봄에 대한 진술과 가을에 대한 진술이 섞바뀌면서 대조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조지훈(趙芝薰)의 「앵음설법(鶯吟說法)」(첨부자료 참고)은 서경과 서정의 교체 반복이고,
서정주(徐廷柱)의 「화사(花蛇)」(첨부자료 참고)는 뱀에 해한 화자의 애(愛)와 증(憎)의 상반된 정조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교체 반복이 율동감을 자아낸다.
이밖에도 연쇄(連鎖), 점층(漸層), 순환(循環), 순차(順次) 등의 구조들도 리듬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의미나 이미지 혹은 정서 등에 의해 빚어진 심리적 리듬을 의미율(意味律)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한편 구문 구조가 율동감을 생산해 내기도 한다.
흔히 문장을 이루고 있는 성분들을 크게 주성분과 부속성분으로 구분한다.
뼈대를 이루고 있는 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은 주성분이고
수식이나 한정의 직분을 지닌 관형어나 부사어는 부속성분에 속한다.
비교적 주성분은 강하게 부속성분은 약하게 우리의 심리에 와 닿는다고 할 수 있다.
'소년이 그림을 그린다'는 주성분만으로 이루어진 문장이다.(주어+목적어+서술어)
'작은 소년이 예쁜 그림을 열심히 그린다'는 부속성분과 주성분들이 어우러진 문장이다.
(수식어+주어)+(수식어+목적어)+(수식어+서술어)
전자의 구조는 '강강강'의 단순 구조라면 후자는 '약강 약강 약강'의 변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즉 전자보다는 후자가 보다 리드미컬하다.
나는 이를 구문율(構文律)이라 부른다.
얇은 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조지훈의 「승무(僧舞)」 앞 부분이다.
각 연의 구문 구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연 관형어+관형어+관형어+주어 / 부사어+부사어+서술어
제2연 ( ? )+부사어+관형어+목적어/ 관형어+부사어+서술어
제3연 관형어+부사어+관형어+주어 / 부사어+부사어+서술어
각 연의 구문 구조가 유사하다.
즉 각 연의 제1행은 세 개의 부속성분 다음에 주성분이 오고,
제2행은 두 개의 부속성분 다음에 주성분이 온다.
'약약약강 약약강'이 하나의 패턴이 되어 되풀이되고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예외는 제2연의 제1행에 수식어가 하나 부족한 것인데,
이는 '파르라니'라는 한 어절이 제1연의 '얇은 紗'나 제3연의 '두 볼에' 등의 짧은 두 어절을 능가하는 4음절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목월의 「가볍게 열리는 문」(첨부자료 참고)은 행 단위로 동일한 구문 구조가 되풀이되는 구문율을 지니고 있다.
내재율은 의미율과 구문율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본다.
그것은 숨어 있지만 붙들어낼 수 있는 것이고,
고정된 틀로 굳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작품마다에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창조적인 운율이라고 할 수 있다.
로메다 님,
내재율의 이론도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진가요?
내재율의 여러 경우를 들어 설명하자면 방대한 분량의 지면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을 그야말로 주마간산격으로 간략하게 변죽만 울리는 데 그쳤으니
설령 잘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너무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내재율은, 시가 우리의 심리 곧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리듬인데
그것은 시어의 의미나 이미지나 정서― 이러한 것들의 구성에 의해 빚어진다는 것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작품 속에 효율적인 내재율을 실현시키는 문제는 차차 나중에 생각하기로 합시다.
작품을 많이 쓰다가 보면 의도적으로 시도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몸이 스스로 알아서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내재율을 실현시키기도 합니다.
시중에 떠도는 어떤 시이론내서들 가운데는 재율을 불규칙적인 율격쯤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는 것을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문운을 빕니다.
[제32신]
적절한 시어(詩語)는 어떤 것인가
로메다 님,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 곧 시어가 따로 있는지 물어왔군요.
이 질문은 그림을 그리는 색채가 따로 있는가를 묻는 것과 흡사합니다.
로메다 님, 그림 그리는데 사용되는 색채가 따로 있습니까?
모든 색채는 그림 그리는 데 사용될 수 있습니다.
어떤 색채이거나 그 색채를 필요로 할 경우 당연히 사용되는 것이지요.
시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언어가 시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비록 평소에 잘 사용되지 않는 궁벽(窮僻)한 말이라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을 필요로 하는 시상(詩想)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화가들에게도 그들이 좋아하는 특별한 색채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초록색을 좋아하고, 또 어떤 이는 노란색을 선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시인의 경우도 개인의 취향에 따라 즐겨 사용하는 시어가 없지 않습니다.
어떤 시인은 정감 어린 섬세한 시어를 좋아하는가 하면,
또 어떤 시인은 활력 있는 웅장한 느낌의 시어를 편애하기도 합니다.
모든 소리가 음악을 만드는 훌륭한 재료가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시에서도 꺼리거나 선호하는 언어가 따로 없지 않습니다.
우선 다음의 글을 읽어볼까요?
시어(詩語)
균형과 조화를 지향했던 고전주의자들은 시에 구사된 말 곧 시어(詩語)를 일상어와는 달리 귀족적인 우아한 말[雅語]로 한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개성과 감정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거부된다.
시어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굳이 시어와 일상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근자에 와서 해체론자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아어(雅語)보다는 오히려 속어(俗語)나 비어(卑語)들을 즐겨 쓰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시어와 비시어를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시어와 비시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휘가 한 작품 속의 특정한 자리에서 적절하게 쓰이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즉 어떤 특정 어휘가 A라는 작품 속에서는 능률적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B라는 작품 속에서는 그렇지 못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잘못 받아들여 오늘의 시어(詩語)는 제한이 없는 것이니 아무 것이나 마음대로 갖다 써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모든 언어는 시 속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인들이 보다 즐겨 사용하는 시어들이 따로 없는 바가 아니며, 또한 보다 능률적인 시어를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아니다.
그렇다면 능률적인 시어란 어떤 특성을 가진 말들일까 생각해 보도록 하자.
첫째, 보다 다양한 내포적 의미를 지닌 말
C. B. Wheeler는 시적 언어의 특성을 한마디로 이중성(doubleness)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문은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글이므로 의미가 단순 명료할수록 효율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는 복잡다단한 정서를 전달하는 글이기 때문에 분명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은근한 울림을 담고 있는 것을 선호한다.
'내 마음은 고요하다'라는 표현보다는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시구가 더 은근하다.
'고요하다'에 담겨 있는 의미는 단순하지만 '호수'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는 다양하기 때문이다.
'호수'는 '고요함'뿐만 아니라, 넓음, 시원함, 맑음, 깊음 등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능률적인 시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딱딱한 말보다는 보다 부드러운 말
어떤 이는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저항적이고 투쟁적인 내용의 시를 쓰자면 오히려 부드러운 말보다는 딱딱한 말이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켜 보다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주장을 펼지도 모른다.
시인도 그릇된 세상을 비판하고 불의에 맞서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를 통해 행해질 때는 격정적인 선전문이나 자극적인 구호문에 그쳐서는 곤란하다.
시의 힘은 직설적인 독설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감화에 있다.
시는 용맹스런 장수의 포효보다는 인자한 어머니의 손길과 같아야 한다.
그것이 보다 큰 감동적인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시는 산문과는 달라서 운율이라는 신비로운 가락으로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글이다.
그 운율 형성에 효율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언어는 역시 부드러운 쪽이라 하겠다.
셋째, 거친 말보다는 아름다운 말
시는 언어 예술이다. 즉 말로 빚어낸 아름다운 작품이다.
만일 어떤 시가 아름다운 요소를 전혀 지니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리라.
시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아름다움이 전제되어야 한다.
요즘 해체론자들 가운데는 왜 아름다운 시만 고집하느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그러한 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류(自己流)의 언술(言述)에 대한 명칭을 시(詩)가 아닌 다른 것으로 새로이 명명하라고 권하고 싶다.
넷째, 저속한 말보다는 우아한 말
시는 단순히 아름다운 말의 기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시정신이 담긴 글이다.
시정신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은 간단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을 승화된 소망(세속적인 욕망의 정화) 곧 진(眞), 선(善), 미(美) 그리고 절조(節操)와 염결(廉潔)을 추구하는 선비정신과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말하자면 시인은 단순한 언어의 기능인만이 아니라 고고한 정신 세계를 추구하고 있는 수도자(修道者)로 보고자 한다.
그러한 시인의 생각을 담고 있는 시어가 어찌 정화된 우아한 말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시인이 상습적으로 저속한 시어들을 즐겨 구사한다면, 설령 언어를 부리는 재주가 인정 된다 손치더라도 그는 아직 시인의 자질을 원만히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리라.
다섯째, 가급적 표준어를 어법에 맞게
토속적인 정서를 실감나게 드러내기 위해서 사투리를 즐겨 사용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사투리가 때에 따라서는 구수하고 정감 어린 느낌을 자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시에 표준어와 사투리를 아무 제한없이 혼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가능하면 표준어를 사용할 일이고 어법에 맞도록 쓸 일이다.
시에서는 비문법적인 표현도 경우에 따라서는 허용된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마지못해 그렇게 된 것이지 그것이 시의 능사는 아니다.
시의 이상적인 문장이란 산문과 마찬가지로 표준어를 어법에 맞도록 쓴 것이다.
표기도 정확해야 한다.
그런데 적잖은 시인들이 표기법 같은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 예술가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표기법이나 문법부터 착실히 습득해야 할 일이다.
여섯째, 외래어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을
소위 글로벌 시대라고 해서 외래문화들이 거센 물결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이에 따라 시인들의 작품 속에도 외래어가 무분별하게 범람하고 있는 경우를 보게 된다.
물론 문화가 서로 섞이다 보면 외래어도 언젠가는 한자어들처럼 우리말화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마치 우리의 순수성이 유린당한 것처럼 느껴져서 개운치가 않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우리의 얼과 문화를 잘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얼과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를 가장 사랑하고 지키는 이가 곧 시인들이 아니겠는가.
위대한 한 시인의 탄생은 바로 그 민족어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고 역사는 일러주고 있다.
세익스피어가 그렇고 괴테가 그렇다고 하지 않던가.
시인은 민족어의 연금술사이며 또한 수호자들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일곱째, 언어 외적인 매체들
시가 언어 예술의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은 일찍부터 있어 왔다.
그 대표적인 경향이 꼴라쥬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그림, 도형, 사진 등의 문자외적 매체를 시에 끌어들이는 경우다.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는 절실한 정황을 시각 매체의 도움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그려냈다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시라는 이름으로 부르려면 어디까지나 언어 매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그 작품은 다른 장르의 명칭으로 불러야 하리라.
시는 언어 예술이므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미 시라고 할 수 없겠기 때문이다.
―『엄살의 시학』(태학사, 2000) pp.44-48
로메다 님,
모든 말은 시에 사용될 수 있지만, 시에서 보다 능률적으로 작용하는 말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시는 압축된 말이며, 운문이며, 심미성을 지향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다 내포적이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우아한 말을 선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시어의 일반적 경향을 지적하는 설명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마다, 아니 매 구절마다 그 시상(詩想)을 형상화하는 최선의 시어들이 있게 마련인데, 시인은 그것을 선별하는 안목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메다 님,
어떤 시인은 한 개의 적절한 시어를 찾기 위해 몇 년을 기다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 한 작품을 놓고 평생을 퇴고하는 시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시어에 제한이 없다는 것은 시어의 폭이 넓다는 뜻이지 아무런 말이나 시에 끌어다 써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제33신]
'무의미 시'란 무엇인가―김춘수 시인을 애도하며
로메다 님,
원로 김춘수 시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이 오늘 아침 매스컴을 통해 크게 보도되고 있군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향년 82세니 천수를 누렸다고 할 수 있고,
생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의 기림과 추앙을 얻었으니 천복을 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복된 한 생애를 살았던 분입니다.
오늘은 그의 서거를 애도하면서
그가 거의 한평생 심혈을 기울여 작업했던 소위 '무의미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무의미 시라고 하면 마치 의미가 없는 시인 것처럼 이해되기 쉬운데 그렇진 않습니다.
그림과 비교하면서 시를 설명하는 다음의 내 글을 우선 읽고 이해해 보도록 하십시다.
무의미(無意味)의 시
세상 만물이 다 그렇지만 시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모해 간다.
신라의 향가와 오늘의 현대시는 그야말로 천양의 차이가 있다.
아니 1920년대의 시와 1930년대의 시가 같지 않다.
동일한 시대에서도 또한 지역에 따라 한결 같지 않다.
동양의 시와 서양의 시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같은 서구라도 영국의 시와 독일의 시가 또한 다르다.
같은 종의 생명체도 풍토에 따라서 그 생김새와 성질이 서로 다르듯
시도 그것이 뿌리박고 자라난 역사적 사회적 여건에 따라 각기 다른 특색을 지니며
또한 끊임없는 변모를 계속하고 있다.
미술의 경우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애초 그림은 사물의 모방에서 출발한 것이다.
몇 세기 전까지만 해도 실물처럼 그럴 듯하게 그린 그림이 훌륭한 그림으로 평가받았다.
솔거(率居)의 「노송도(老松圖)」가 그렇고, 미켈란젤로나 L.다빈치의 그림들이 또한 그렇다.
그런데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예술성을 화가의 사생력(寫生力)에서가 아니라 작가의 감성과 개성에서 찾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인상파가 등장하고 세잔, 고흐, 고갱 등의 거장들을 낳게 된다.
그 뒤 미술은 대상을 극도로 단순화하려는 추상화,
평면 예술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입체화,
지상적(地上的) 질서와 일상적(日常的) 논리를 무너뜨리는 초현실주의 그림 등을 거쳐
드디어는 대상 자체를 거부하는 비구상화(非具象畵)에 이르게 된다.
비구상화는 대상으로부터 해방된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그리고 싶은 선을 그리고, 칠하고 싶은 색을 칠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무엇을 그린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그렸을 뿐이다.
거기에는 아무 의미도 담겨 있지 않다.
비구상화가들은 자기들의 작업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창조라고 말한다.
우리의 시문학도 미술과 비슷한 경로를 밟으면서 발전해 왔다.
이성(理性)이 주도한 고전주의로부터 감성(感性)과 개성(個性)을 존중한 낭만주의,
사물의 본질을 추구하고자 했던 상징주의 등을 거쳐 초현실주의에 이른다.
한 마디로 초현실주의란 심층심리를 대상으로 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는 과거 현재 미래의 복잡다단한 이미지들이 뒤엉켜 있는 심층심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한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시인 브르똥(A. Breton)은 시 쓰는 방법으로 '자동기술법'을 제시했다.
아무런 구상(構想)과 퇴고(推敲)도 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그대로 언어로 옮겨 놓는 기법이다.
그러니 거기에는 지상적 논리도 일상적 질서도, 어법도 무시된다.
현대시에서도 미술의 비구상화와 같은 시도를 해 본 적이 있다.
시도 비구상화처럼 대상을 떠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언어 구조를 만들어 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에서의 선이나 색채와는 달리 시의 매체인 언어는 원초적으로 의미를 달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의미를 벗어난 언어 구조를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독일의 구체시(具體詩, konkrete poesie)가 시도했던 것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얀들(E. Jandle)은 언어로부터 의미를 제거하기 위해서 알파벳을 무의미하게 흩어놓는다든지,
하나의 동일한 단어만을 반복해서 늘어놓는다든지,
의미가 없는 전치사들만을 이어놓는다든지 등등의 실험을 한 바 있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작품에서도 문자를 뒤집어 놓는 등 이와 유사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의 이러한 시도들은 비구상화와 같은 순수한 무의미 세계를 성공적으로 구축해낼 수는 없었다.
여기에 언어 예술의 한계가 있다.
시가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대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의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대상 깨뜨리기'를 시도한다.
그렇게 해서 시가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한다.
이것이 곧 '무의미의 시'라는 것이다.
무의미 시의 대부(代父)인 김춘수(金春洙)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자유연상의 기법을 원용한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들을 자연스럽게 늘어놓는데 그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여 일상적 의미를 형성하려고 하면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처단한다.
다음 「처용단장(處容斷章)」의 한 부분을 보도록 하자.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있던 자리에 軍艦(군함)이 한 척/ 닻을 내리고 있었다./
여름에 본 물새는 죽어 있었다./ 죽은 다음에도 물새는 울고 있었다./
눈보다도 먼저/ 겨울에 비가 오고 있었다./
바다는 가라앉고/ 바다가 없는 海岸線(해안선)을/ 한 사나이가 이리로 오고 있었다./
한쪽 손에/ 죽은 바다를 들고 있었다.
이 시에 나타난 시간적인 배경은 겨울이고 공간적인 배경은 바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품 속의 겨울은 눈이 내리는 일상적 겨울이 아니라 비가 오는 겨울로 설정되어 있다.
즉 '겨울+눈'이라는 일상성을 '겨울+비'라는 낯선 정황으로 바꾸어 놓는다.
바다 역시 물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사물인데 여기서의 바다는 물이 없는 바다다.
즉 일상적 바다에서 물을 제거한 낯선 공간이다.
거기 물 없는 바다에 주저앉은 군함과 죽은 물새를 등장시킨다.
그리고 죽은 물새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다시 살리고 있다.
죽음과 삶의 간격을 뭉개버린 즉 생사(生死)가 공존하는 곳이다.
더더욱 기상천외의 구조는 죽은 바다가 한 사나이의 한쪽 손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대상의 파괴와 대상들의 낯선 결합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이 지상의 어느 곳에도 있지 않은 이 작품 속에서만 존재한다.
순수한 창조적인 세계다.
그러니까 무의미의 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가 아니라 일상적인 논리와 의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다. 시를 무의미한 말놀이로 생각한다.
시는 계속 변모해 가고 있다.
전통적인 시의 틀을 거부하는 해체시 혹은 포스트모던의 시들이 여러 가지 실험들을 계속하고 있다.
어느 시대나 기존의 것을 거부하는 새로운 시도는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건실하고 긍정적인 것일 때 그것은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는 요소로 기여하게 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폐습을 조장하는 공해물(公害物)로 남게 되고 만다.
―『엄살의 시학』pp.105-108
로메다 님,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의미의 시란 '자유를 추구한 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상으로부터의 자유,
이념으로부터의 자유,
세계로부터의 자유…
내 개인적으로는 '무의미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지나쳐서 '방종'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사물과 세계를 만신창이로 파괴하기도 하고,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들을 폭력적으로 결합하여 낯선 세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 '자유'는 세계에 대한 부정―곧 허무정신에 닿아 있습니다.
내 개인적인 기호와는 상관없이
김춘수 시인이 시도했던 무의미 시의 작업은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국 시사(詩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무의미 시가 마치 시의 전범(典範)인 것처럼 잘못 생각하는 일입니다.
무의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김춘수 시인만을 맹종한 나머지
그의 시풍을 잘못 모방하는 아류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치 시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으로 써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상한 풍조가 우리 시단에 생겨난 것도 같습니다.
해체시의 시도는 이상(李箱) 한 사람으로 충분하듯이
무의미 시 역시 김춘수 한 사람만으로 족합니다.
그를 흉내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로메다 님,
누구의 모방이 아닌 자신만의 시풍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운을 빕니다.
[제34신]
시의 행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로메다 님,
오늘은 시의 행에 관해서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원래 운문에서 행을 나눈 것은 운율 때문이었습니다.
시행은 율동적으로 읽히게 하기 위한 소리의 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정형시는 행의 틀을 가지고 있어서 그 틀에 맞추어 행을 배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형시의 형태가 무너지고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작품마다 시행을 자의적으로 배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배열한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배열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행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나누어 배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 발표된 어떤 시들은 시행의 분할이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것도 같습니다.
말하자면 질서를 잃은 자유방임의 상태라고나 할까요?
시의 분행(分行)이 정말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시행에 관한 다음의 글을 먼저 읽어보도록 하지요.
시행(詩行)
산문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인 단위는 문장(sentence)이다.
곧 문장들이 하나 둘 쌓이고 쌓여 한 문단을 만들고 그 문단들이 발전하여 한 편의 글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시(詩)인 경우는 산문과는 달리 그 기본이 되는 단위가 시행(詩行)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시행이 모여 연(聯)을 이루고 연이 발전하여 한 편의 시를 만들게 된다.
정형시인 경우는 그 정형적인 틀에 좇아 규칙적으로 행이 설정된다.
한시(漢詩)의 절구(絶句)나 율시(律詩)인 경우는 한 행이 5자와 7자로 고정된 틀을 지니고 있고 평시조(平時調)인 경우는 한 행[章]이 4음보의 율격(律格)에 담기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정형시의 시행은 정해진 틀에 맞추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정형시에서 행을 결정하는 틀(형식)은 무엇이 주도를 하고 있는가?
그것은 압운(押韻)과 율격(律格) 곧 운율(韻律)이다.
이 근저에는 언어에 가락을 실어 흥겹고 조화롭게 만들고자 하는 심미지향적인 인간의 욕망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형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시가 등장하면서 시행의 설정에 큰 혼란이 야기되기 시작한다.
극단적인 형식의 자유를 추구한 나머지 자유시는 운율의 간섭으로부터도 해방되고자 했다.
그렇게 되면서 시행은 어떠한 규제도 받지 않는 자유방임의 말 토막처럼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현대 자유시에서의 시행은 어떤 개연성에 의해 분할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제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끊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난삽한 상황에 접어들고 만 것도 같다.
정말 시행은 그렇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일반적인 산문도 분행하여 배열하면 시적 효과가 발생한다.
다음 산문을 분행하여 보기로 한다.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가)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나)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다)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라)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마) 그는
산사(山寺)에 가서 낡은
석탑(石塔)을 보았다
(가)의 경우는 각 행이 3음보의 대등한 운율을 갖게 되며, '산사'와 '석탑'이라는 행중심의 의미 단위로 분할된다.
(나)에서는 각 행이 1, 2, 3음보의 점층적 구조가 형성되고, '그' '산사' '석탑'으로 의미의 3등 분할이 이루어진다.
(다)는 1음보와 2음보가 교체 반복되는 대조적 운율구조이다.
특히 1, 3행의 말음(末音)이 ㄴ이고 2, 4행의 두음(頭音)이 ㅅ이어서 압운적(押韻的) 효과를 자아내기도 한다.
(라)는 2음보와 1음보의 교체 반복이면서, 의미로 따져본다면 대상과 동작을 중심으로 각각 대등하게 분할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마)의 경우는 2행과 3행의 경계가 문제인데 수식어 '낡은'과 피수식어 '석탑'을 분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운율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다른 심리적인 어떤 갈등을 나타내는 경우에 이러한 분할이 가능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적절한 이유가 없다면 유기적 관계에 놓인 수식어과 피수식어 사이를 행의 경계로 설정한다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없다.(요사이 항간의 시들 속에 이러한 경향이 유행처럼 떠돌고 있다)
위의 예를 통해 우리는 행의 배치에 따라 운율의 형태가 부여되고 의미의 분할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앞에서 자유시는 운율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 운율은 정형시가 지니고 있는 틀에 박힌 정형률을 의미한다.
잘못 이해해서 자유시가 모든 운율로부터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이다.
분행(分行) 배열한 이상을 시는 운율에 실리게 된다.
시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율은 떨쳐 버릴 수 없는 그림자처럼 시행에 따라 붙는다.
그러니 시인이 행을 설정하는 일은 행마다에 개성적인 운율을 창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시는 형식으로부터는 자유스러워졌지만 정형시를 만들 때보다도 오히려 더 무겁고 어려운 창조정신과 성실성을 필요로 한다.
시행을 아무렇게나 나눈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만일 그런 시가 있다면 그것은 누더기 같은 운율을 달고 있는 괴담(怪談)에 불과할 것이다.
성실한 시인이라면 하나 하나의 시행 속에 최선의 운율과 최선의 의미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담아내느냐 하는 끝없는 고뇌로 시를 낳을 수밖에 없다.
―『엄살의 시학』(태학사)pp.49-52
로메다 님,
아무리 자유시라 하더라도 시행을 아무렇게나 나눌 수 없습니다.
행을 나누어 배열하게 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첫째, 운율의 형성----행 중심으로 운율이 형성됨
둘째, 의미의 분할----행 중심으로 의미가 나누어짐
셋째, 이미지의 분리----행 중심으로 이미지가 나누어짐
넷째, 활자의 시각적 분할----행 중심으로 활자들이 인식됨
그렇다면 행과 행의 분할― 곧 행의 경계를 어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앞의 네 가지 중 가급적 여러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이상적입니다.
적어도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행을 나눔으로 해서 효율적인 운율이 형성된다든지
그 행 속에 의미나 혹은 이미지가 능률적으로 분할된다든지
아니면, 활자의 시각적인 효과를 노릴 수 있다든지 해야 합니다.
만약,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충족시킬 수 없는 분행(分行)이라면
그것은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글을 만들게 되고 맙니다.
로메다 님,
한 개의 시어(詩語)를 골라 쓰는 것도 소홀히 할 수 없거늘
하물며 하나의 시행(詩行)을 아무렇게나 늘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정진을 기대합니다.
[제35신]
가장 능률적인 시의 제목은 어떤 것인가
로메다 님,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이름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상품만 보더라도 그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하지 않던가요?
그러니 사람의 이름을 짓는 데 성명 철학이 동원될 만도 합니다.
작품의 제목을 어떻게 달 것인가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어떤 인기 없는 소설책의 제목을 바꾸어 다시 출판했더니 잘 팔리더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는 제목을 선택했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그와는 다른 관점에서 시의 제목을 붙이는 일의 중요함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물론 시도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제목을 단다면 보다 많은 독자들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얘기하려는 시의 능률적인 제목이란 독자 반응과는 무관한,
작품의 완성도에 기여하는 제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동안 시의 제목에 대해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들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을 지칭하는 고유명사 이상의 역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 역동적 역할이 무엇인지 다음의 글을 읽노라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시와 제목
글에서의 제목은 독자의 시선을 맨 처음 붙들어 글 속으로 안내하는 간판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대개의 제목들은 독자로 하여금 글의 내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도록 붙이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다.
논리적인 내용의 글일수록 더욱 그렇다. 그런데 문학 작품인 경우는 사정이 좀 다르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다루고자 하는 주된 소재를 제목으로 삼거나 말하고자 하는 주된 생각을 제목으로 설정하여 글의 내용을 넌지시 짐작하게도 한다.
그렇지만 문학 작품의 제목들은 대체로 글의 내용을 직설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암시 혹은 상징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특히 시(詩)인 경우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에서의 제목은 점포의 간판처럼 선명한 것이 아니라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 드리워진 반투명의 장막과도 같다.
그것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빨리 풀어 주는 해소제의 역할을 하기보다는 궁금증을 오히려 심화시키면서 흥미로운 갈등을 맛보게 하는 미적 장치로 설정된다.
시는 정보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글이 아니라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시의 제목이 시를 읽어보기도 전에 내용을 짐작할 수 있도록 붙여졌다면 그것처럼 싱거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시에서의 제목은 내용을 설명하는 간판이어서는 곤란하다.
시의 제목은 시행(詩行)과 마찬가지로 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작용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의 제목도 시의 다른 요소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절대적인 부분으로 존재하도록 해야 한다.
그 제목이 아니면 그 작품의 그러한 구조는 무너지게 된다.
따라서 이상적인 제목은 독자가 그 시의 마지막 행을 읽을 때까지 독자의 의식 속에 계속 다양한 의미망을 형성하면서 탄력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음에 왕유(王維)의 「녹시(鹿柴)」라는 절구를 예로 보도록 하자.
空山不見人 맑은 산 속 사람은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두런두런 말소리만 들려 올 뿐
返景入深林 저녁볕은 깊은 숲에 스며들어
復照靑苔上 파란 이끼 위를 다시 비추고 있네
거금 천이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자가 처음부터 이 작품에 제목을 달았는지 아니면 후세의 어떤 이가 그렇게 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작품은 '鹿柴(녹시)'라는 그 제목으로 하여 의부진(意不盡)의 깊이를 간직하게 된다.
'鹿柴'를 '녹채'라는 고유명사[地名]로 해석하려는 이도 있기는 하나 그렇게 되면 이 시의 맛은 반감이 되고 만다.
'鹿柴'는 '녹시, 곧 글자 그대로 '사슴 울타리'의 의미로 보아야 멋이 살아난다.
도대체 이 시의 제목을 어찌해서 '사슴 울타리'로 붙였단 말인가.
겉으로 보기엔 깊은 숲 속의 맑고 조용한 저녁나절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사슴은커녕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웬 사슴 울타리란 말인가.
제목이 시의 내용을 설명한다고 기대하는 이들은 아마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을 것이다.
그러나 제목도 시의 한 행처럼 시의 내용을 형성하는 요소라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깊은 산 숲 속에 햇볕이 든 작은 공지를 상상할 수 있다.
그 빈터에 몇 이랑의 조그만 채마밭이 만들어져 있다.
아마 무나 배추 등속의 채소를 심었던 곳인가 보다.
그 채소밭가에 나뭇가지를 듬성듬성 엮어 만든 기울어진 울타리가 있다.
주인도 먹기 전에 사슴이 자주 찾아와 뜯어먹으니 이를 말려 보자는 것이었으리라.
저 밭의 주인은 누구일까, 아마 이 근처 산 속 어딘가에 움막이라도 치고 살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두런거리는 말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그다.
그는 지금 약초라도 캐면서 혼자 시를 읊조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목 '鹿柴(녹시)'는 바로 이러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鹿柴(녹시)'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 않다면 이 작품은 한갓 깊은 산 속의 자연을 노래한 작품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 제목으로 인하여 자연을 노래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은자(隱者)의 깨끗한 삶을 노래한 작품으로 크게 달라진다.
제목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지 알 일이다.
―(중략)―
그동안의 사정들을 살펴보건대 시에 제목을 붙이는 양상도 다양하다.
소재를, 배경을, 주제를 혹은 작품의 한 부분을 제목으로 삼기도 한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일 경우도 있으리라.
그러나 생각이 깊은 시인들은 그냥 쉽게 제목을 달지 않는다.
그 제목이 작품을 구성하는 기능적인 요소로 작용할 수 있도록 설정한다.
시에 제목을 붙이는 일은 상품에 꼬리표를 다는 일과는 다르다.
천편일률적으로 그냥 적당히 할 일이 아니다.
시는 가장 정제된 문학 양식이지 않는가.
―『엄살의 시학』(태학사)pp.40-43
로메다 님,
제목이 어떻게 작품 전체에 역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인지 아직 납득이 안 되나요?
그렇다면 김종삼의 다음 작품 하나를 더 보도록 할까요?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개비처럼
로메다 님,
이 작품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 크리스마스 카드, 진눈개비라는
세 개의 비유만을 나열해 놓고 있는 단순한 구조의 작품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렇다는 것인지 본문에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비유들의 원관념(주지)이 무엇인지 본문의 글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그 원관념―'북 치는 소년'을 제목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북 치는 소년'에게서 느낀 세 개의 이미지들을 병치해 놓고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이 작품에서의 제목은 작품의 뼈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시의 제목은 본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설정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제목도 작품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여야 합니다.
만일 어떤 제목이 그 작품의 내용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역할에 그친다면
그것은 없어도 무방한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가끔 '무제'라는 이름의 제목을 보기도 하는데 이것처럼 불성실·무책임한 제목은 없습니다.
로메다 님,
오늘도 내가 하는 시의 얘기가 너무 무거웠는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시의 길이 도(道)를 찾아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만한 공력도 쏟지 않고 좋은 시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지나친 욕심일 것입니다.
건필을 바랍니다.
[제36신]
산문과 산문시의 차이는 무엇인가
로메다 님,
질문하신 대로 최근에 발표된 어떤 산문시들을 보면 산문과의 한계가 모호한 것도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길이만 일반 산문에 비해 짧을 뿐이지 그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서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려면 분명 일반 산문과는 다른 변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하겠지요. 다음의 글이 산문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산문시(散文詩)
현대시를 외형률의 유무와 행의 표기 형태를 기준으로 따져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가)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나)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있는 시
다) 운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라) 산문형식이며 행 구분이 없는 시
가)와 다)는 운율적인 요소 곧 율격이나 압운 같은 외형률을 지닌 시이고
나)와 라)는 그런 외형률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가)는 우리가 흔히 만나는 일반적인 자유시다.
나)는 문체로 볼 때 산문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행 구분이 되어 있다.
김수영(金洙暎)의 「만용에게」라든지 서정주(徐廷柱)의 후기 기행시 같은 작품들이 이에 해당한다.
다)는 운율을 지닌 작품이지만 산문처럼 행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 경우다.
「장미·4」등 박두진(朴斗鎭)의 초기 작품들에서 쉽게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라)는 운율도 없으면서 행 구분도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이상(李箱)의 「지비(紙碑)」같은 작품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가)와 나)를 분행자유시(分行自由詩), 다)와 라)를 비분행자유시(非分行自由詩)라고 구분해 명명키로 한다.
산문시는 바로 이 비분행자유시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산문시는 자유시의 하위 개념이다.
운율의 유무 등 그 내적 구조로 따져 본다면
나)가 다)보다 더 산문성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만,
산문시를 분별하는 기준을 내적 특성으로 잡는다는 것은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산문성과 비산문성의 한계를 따지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그 외형적인 형태를 기준으로 규정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산문시는 분행 의식이 없이 산문처럼 잇대어 쓴 자유시'라고 정의한다.
한용운(韓龍雲)의 자유시들은 행이 산문처럼 길지만 산문시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왜냐하면 한용운의 시는 분행 의식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용운의 시처럼 그렇게 행이 긴 시들을 장행시(長行詩)라고 달리 부르고자 한다. 그런데 분행 의식을 기준으로 산문시를 규정해 놓고 보아도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라)의 산문시와 산문(짧은 길이의)을 어떻게 구분하느냐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즉 산문시와 산문의 한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그것이 산문이 아닌 시로 불릴 수 있는 변별성은 무엇인가.
산문시와 산문의 차이를 논하는 것은 결국 시(詩)와 비시(非詩)를 따지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나는 바람직한 시란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 시정신이란 무엇이며 시적 장치는 어떤 것인가가 또한 문제로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모든 글은 작자의 소망한 바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시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시 속에 담긴 시인의 소망은 보통인의 일상적인 것과는 다르다고 본다.
훌륭한 시작품들 속에 서려 있는 시인의 소망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격이 높은 것이다.
말하자면 승화된 소망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를 시정신이라고 부른다.
시정신은 진(眞), 선(善), 미(美), 염결(廉潔), 지조(志操)를 소중히 생각하는 초연한 선비정신과 뿌리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가 되도록 표현하는 기법 곧 시적 장치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어서 이를 몇 가지로 요약해서 제시하기란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굳이 지적을 해 보자면, 감춤[상징(象徵), 우의(寓意), 전이(轉移), persona(가화자)], 불림[과장(誇張), 역설(逆說), 비유(比喩)] 그리고 꾸밈[(운율(韻律), 대우(對偶), 아어(雅語)] 등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들을 한마디로 '엄살'이라는 말로 집약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시는 시인의 승화된 소망(시정신)이 엄살스럽게 표현된 짧은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산문시도 그것이 바람직한 시가 되기 위해서는 시정신이 시적 장치를 통해 표현된 글이어야만 한다.
伐木丁丁(벌목정정) 이랬거니 아람도리 큰솔이 베허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맹아리 소리 찌르릉 돌아옴즉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어 깊은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달려 흰 뜻은 한밤 이골을 걸음이랸다? 웃절 중이 여섯판에 여섯 번 지고 웃고 올라간 뒤 조찰히 늙은 사나히의 남긴 내음새를 줏는다? 시름은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에 심히 흔들리우노니 오오 견듸랸다 차고 兀然(올연)히 슬픔도 꿈도 없이 長壽山(장수산) 속 겨울 한밤내ㅡ ―정지용(鄭芝溶) 「장수산(長壽山)·1」전문
「장수산·1」에 담긴 정지용의 소망은 무엇인가.
무구적요(無垢寂寥)한 자연 속에 들어 세속적인 시름을 씻어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리라.
그러니 이 작품에 담긴 시정신은 '친자연(親自然) 구평정(求平靜)'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욕망을 넘어선 승화된 정신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또한 이 작품에서의 주된 시적 장치는 대구의 조화로운 구조라고 할 수 있다.
맨 앞의 '∼하이'로 종결되는 두 문장이 대우의 관계에 있고,
짐승인 '다람쥐'와 새인 '묏새'의 관계가 또한 그러하며,
'달'과 '중'을 서술하는 두 문장 역시 그러하다.
또한 의도적인 의고체(擬古體)의 구사로 우아하고 장중한 맛을 살리고 있다.
「장수산·1」은 일반적인 산문과는 달리 시정신과 그런 대로 시적 장치를 지닌,
시의 자격을 갖춘 글이라고 할 만하다.
산문시는 운율을 거부한 시로 잘못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산문시도 율격이나 압운 등을 얼마든지 담을 수 있고,
그런 외형률이 아니더라도 내재율에 실려 표현되는 것이 이상적이다.
여타의 시적 장치들 역시 산문시 속에 어떻게 적절히 구사되느냐에 따라
그 글을 시의 반열에 올려놓기고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산문시는 외형상 산문의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이지 결코 시에 미달한 글이어서는 곤란하다.―『엄살의 시학』(태학사)pp.85-88
로메다 님,
서구에서의 산문시는 정형시에 대한 반발로 19c 중엽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니 분행 자유시보다 먼저 출발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도 1910년대 분행 자유시와 거의 동시에 산문시가 출현합니다.
김억, 주요한에 이어 정지용, 백석, 서정주 등을 거치면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어떤 산문시는 시로서의 위상을 상실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은
첫째, 시와 산문의 경계를 허물려는 해체시의 의도적인 경향과
둘째, 시를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나태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의 경우는 의도적인 시도니까 어찌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둘째의 경우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산문시도 시로 불리기 원한다면 보통의 자유시와 마찬가지로 시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원초적인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로메다 님,
어떤 이는 형태만 보고 분행 자유시보다 산문시 쓰기가 더 쉬울 거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산문시를 쓰는 것이 더 까다롭습니다.
왜냐하면 분행하지 않고 산문 형태 속에 시적 요소들을 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건필을 빕니다.
[제37신]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요?
로메다 님,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요?
잘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기를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세상에 글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공인된 문인의 자격을 얻는 것이 유리하지요.
잘 아시겠지만 우리나라에서 문인으로 등단하는 길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문예지에 추천을 받는다든지, 문학단체나 신문사들이 주관하는 공모에서 당선된다든지,
개인 작품집을 간행한다든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화려하게 등단하는 길이 '신춘문예'인 것 같습니다.
매년 신년호 지상을 수놓은 자랑스런 당선자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흐뭇한 생각이 듭니다.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거늘 본인들이야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수천 대 일의 관문을 뚫고 당선의 영광을 안았으니 각광을 받을 만도 하지요.
글공부하는 사람치고 신춘문예를 꿈꾸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로메다 님,
투고하신 것은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설령 입선되지 못한다 해도 너무 실망해 하지 말기 바랍니다.
수천 명 가운데서 선택을 얻는다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뚫고 들어가는 일처럼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언젠가 내 중학시절 체육 선생님에 관해 얘기한 적이 있지요?
시골 중학교에서 어린 나에게 처음으로 시에의 눈을 뜨게 해 주신 그분 말입니다.
내가 매일 일기장에 열심히 시랍시고 글을 썼다는 얘기도 했던가요?
그 글들 가운데 괜찮다고 생각되는 몇 편을 골라 잡지사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학원』이라는 청소년 잡지의 독자문예란에 투고한 것입니다.
몇 달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 내가 보낸 작품이 영 실리지 않았습니다.
실망한 나는 그 체육 선생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제 작품을 보시고 칭찬을 해 주셨는데,
잡지에서는 실어주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헛 칭찬을 해주신 것 아닌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 웃으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기 쟁반에 여러 가지 종류의 과일이 놓여있다고 치자.
사과, 배, 감, 귤, 포도… 등 많이 있구나.
그 중에 하나만 골라 먹으라고 하면 너는 어떤 걸 집겠니?"
"그야 제가 좋아하는 사과를 집지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만을 골라야만 하는 경우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달콤한 감을 선택하고
신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새콤한 귤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택받는 것은 선택한 사람의 기호에 좌우되는 것이지
과일의 우열 문제와는 크게 상관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아무리 좋은 과일도 선택자의 기호에 맞지 않으면 선택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면서
마지막 하시는 말씀이
"내가 선자였다면 네 작품을 골랐을지도 모르지. 그러니
선택받는 일에 너무 연연해하지 말고 열심히 쓰도록 해라!"
로메다 님,
당선된 작품이 응모작품들 가운데 최상의 작품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선자가 바뀌면 당선작도 바뀔 것이 거의 틀림없습니다.
예술 작품에 대한 평가란 객관적 기준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상품의 가치처럼 차별화하여 평가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한두 사람의 선자들에 의해 평가된다는 것은 지극히 무모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을 놓고 우열을 따지는 공모 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고료를 내걸고 시행되는 신춘문예 제도는
문학을 지망하는 청년들에게 자극제로 작용하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로또가 부를 꿈꾸는 가난한 서민들의 마음에 위안이 되듯이 말입니다.
문예지를 통해 등단하는 것도 한결같지 않습니다.
권위 있는 문예지인 경우엔 그 제한된 등용의 관문을 뚫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싸구려 문예지들은 매번 신인들을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양산해 내기도 합니다.
등단하기 쉽다고 해서 그런 하류 잡지들에 선뜻 몸을 내미는 것도 신중해야 합니다.
등단한 뒤의 처신이 개운치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보통사람에게 출생지(出生地)가 따라붙듯이 문인에겐 늘 출신지(出身誌)가 달라붙습니다.
하기야 작품만 잘 쓴다면 별 문제될 일도 아니긴 합니다만―.
로메다 님,
신춘문예도, 권위 있는 문예지를 통한 데뷔도 여의치 않다면
개인 문집을 만들어 등단하기를 권하고 싶군요.
특정 잡지에 겨우 몇 편의 작품으로 인정받아 등단하는 것보다
수십 편의 작품이 실린 문집을 세상에 내놓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떳떳한 등단입니까?
물론 작품집을 엮는 데는 출판사 선정이며 출판비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언젠가는 치러야할 과제이니까
그것을 미리 치른다고 생각하면 크게 억울해 할 것도 없습니다.
로메다 님,
언젠가는 사람들이 품에 안고 싶어하는 예쁜 시집을 가지십시오.
가능하다면 그 시집의 표지를 당신이 손수 고안도 하고
당신이 존경하는 기성문인의 짧은 글을 얻어 책의 머리에 놓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날이 기대처럼 쉬 오지 않더라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말기 바랍니다.
더디 올수록 당신에겐 좋은 작품들이 쌓이게 될 것이니까요.
문운을 빕니다.
[제38신]
시의 네 단계
로메다 님,
신춘문예에 당선의 영예를 누리지 못했군요.
좀 실망이야 되겠지만 너무 애석해 할 것도 없습니다.
지난번에 내가 얘기한 것처럼 문예작품의 평가는 선자(選者)의 주관에 좌우됩니다.
그러니 당선은 운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바랍니다.
너무 일찍 등단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당신을 위한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약관의 나이로 화려하게 등단하는 문인들 치고 후세에 좋은 작품을 남긴 경우는 별로 흔치 않습니다.
조기 등단이 오히려 자만을 길러 글공부를 등한케 하기 때문인가 봅니다.
어떤 시인은 데뷔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형상은 등단 무렵 작품에 쏟았던 치열한 정성을 등단 후에는 쏟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등단의 시기가 늦어질수록 글에 대한 단련의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되고,
장차 큰 작품을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로메다 님,
등단에 관한 얘기는 이제 이만하고 오늘은 시의 네 단계에 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시를 평생의 과업으로 밀고 나가려면 보다 넓은 시야로 시를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시의 길을 더 깊고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시에 몸을 담고 살아가는 데도 다음의 네 단계가 있습니다.
시의 네 단계
시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한 작품의 생성은 그 시인이 지니고 있는 언어 운용의 능력뿐만 아니라
그 시인의 총체적인 정신 활동(미의식, 비평의식, 역사의식, 윤리의식, 탐구의식 등)의 결과인데 이러한 요인들의 우열을 객관적으로 가름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에 대한 모든 평가는 따지고 보면 평가자의 주관적인 기호에 근거하기 마련이다.
소위 J.C.랜섬이 내세운 ‘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나
(랜섬은 시를 대상을 노래한 사물시(physical poetry)와 생각과 감정을 노래한 관념시(platonic poetry)로 양분한 뒤, 이 둘을 통합하는 형이상의 시를 이상적으로 생각했음.)
I.A.리차즈가 제시한‘포괄의 시’(inclusive poetry)라는 것도 결국 그들의 개인적 가치관의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리차즈는 '포괄의 시'와 '배제의 시'로 구분하여 '포괄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에 관한 논의는 따로 할 것임.)
역대 동양적 시평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종영(鍾嶸)이나 사공도(司空圖) 등의 ‘시품설(詩品說)’들(이들은 시의 품격을 24시풍 등 다양하게 분류하고 있으나 객관성이 없는 것들임)
역시 인상주의 범주 내에서 시도된 것에 불과하다.
어떠한 경우라도 시의 평가에 대한 객관적 논의가 설득력을 얻기는 어렵다.
그러나 작품의 우열을 따지는 문제와는 달리,
한 시인의 생애를 통해서 변모해 가는 작품의 경향을 몇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의 식물들이 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을 떨구는 과정을 계절에 좇아 자연스럽게 밟아 가듯이
시인들 역시 그들 생명의 역정에 따라 세계[대상]를 보는 태도도 변모해 간다.
이 변모의 역정을 나는 다음의 네 단계로 설정해 보고자 한다.
제1기 모방(模倣)의 단계
주체[自我]의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 곧 세계와 현실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며 수용하는 단계다.
대상의 모방[描寫], 현실의 재현(再現)이 중요시된다.
따라서 감각의 기능 및 관찰력이 주도하고 수사법상 비유가 빛을 발한다.
리얼리즘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세계다.
제2기 탐색(探索)의 단계
현상에 대한 회의, 현세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한다.
감추어진 본질의 세계에 대한 탐색, 이상 세계의 추구, 나아가서는 피안(彼岸)에의 염원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대상 자체보다는 대상을 움직이는 어떤 원리(眞理)를 터득, 묘오(妙悟)에 이르고자 한다.
감각보다는 직관, 투시적 혜안이 주도한다.
수사상 상징법이 원용되고 사조상 상징주의에 닿아 있다.
제3기 창안(創案)의 단계
역시 기존의 세계에 대한 부정 정신에 근거한다.
그러나 강한 주체의식의 발동으로 새로운 세계를 모색한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자 하는 탈세계라는 입장에서 보면 파괴적인 것으로 보이나
대상들 간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면에서 보면 순수한 창조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회화에서의 추상 내지는 비구상의 단계에 해당된다.
대상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꿈꾼다.
환상적인 상상력이 주도한다. 폭력적 병치가 사물을 얽는다.
이른 바 무의미의 시라는 것이 이 단계에 속하는 대표적인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제4기 방치(放置)의 단계
자아와 세계에 대한 긍정으로 되돌아오는 단계다.
제1, 2단계는 자아보다는 세계가, 제3단계는 세계보다는 자아가 주도를 하지만
여기서는 자아와 세계가 조화를 이루는,
아니 세계 속에 자아가 스며들어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단계다.
달리 말하면 무욕청정(無慾淸淨), 귀의자연(歸依自然)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유유자적(悠悠自適), 무애불기(無碍不羈)하여 드디어는 탈기교(脫技巧), 치졸(稚拙), 무법(無法)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말하자면 시의 열반경(涅槃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이곳이 바로 선인(先人) 문사들이 선망했던 이상적인 경지다.
서두에서 나는 시 작품의 객관적인 평가의 불가함을 거론했다.
이 네 단계에 속한 작품들의 우열도 물론 일괄적으로 논의할 수 없다.
독자들과의 관계까지를 따지면 더더욱 그렇다.
대상을 생동감 있게 그린 사물시가 놀라운 감동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노래한 형이상학적인 시가 우리를 깊은 사색의 바다 속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혹은 기발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기이하고 낯선 시세계가 신선한 충격으로 와 닿기도 하고,
마치 어린이의 그림처럼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치졸한 작품이 혼탁한 우리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키기도 한다.
그러니 어느 한 단계의 작품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은 역시 설득력이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작품 아닌 시인의 문제는 논의의 대상으로 남는다.
시인의 역정(歷程)이라는 것 말이다.
앞에서 나는 시인의 역정을 설명하면서 그 예로 식물의 생태를 들춘 바 있다.
그런데 식물의 생태가 한결같지 않은 것처럼
(어떤 놈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기도 하고, 어떤 놈은 봄 아닌 가을에 꽃을 만들기도 한다)
시인들의 역정 역시 앞에 제시한 네 단계를 한결같이 밟아 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인은 제1의 단계에서 평생 안주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시인은 제2의 단계에 깊이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시인들은 제3 혹은 제4의 단계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4의 단계에 이른 시인들이 그렇게 흔치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제4의 단계가 시인의 연치(年齒)와 무관치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달관(達觀)에 이르는 수심(修心)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는 훌륭한 작품에 대한 기대 못지 않게 훌륭한 시인에 대한 기대도 크다.
어쩌면 전자보다 오히려 후자에 대한 비중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한 시인의 초연한 삶을 통해 우리들의 궁극적인 염원인 어떻게 살 것인가의 그 지난(至難)한 문제의 매듭이 혹 풀릴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리라.
시가 이 세상을 구원하기는 힘겨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시대의 사표로 시인을 설정한다.
그래도 아직은 그들이 순수하기 때문이다.
시인 중에서도 네 번째 방치의 단계에 이른 시인들을 이상으로 삼는다.
시인을 단순한 장인(匠人)으로 보지 않고 구도인(求道人)으로 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졸저『엄살의 시학』(태학사)pp.155-158
로메다 님,
오늘도 골치 아픈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군요.
이 얘기도 따지고 보면 내 주관적인 가치관에 근거한 것이니까
너무 마음에 두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시의 먼길을 내다보면서 앞날을 설계할 때 참고로 하시기 바랍니다.
건투를 빕니다.
[제39신]
'배제의 시'와 '포괄의 시'
로메다 님,
우리가 무엇을 만들 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재료를 놓고 그것을 깎아내며 만드는 방법과
이와는 달리 여러 재료들을 붙여가며 만드는 방법입니다.
앞의 것을 '배제'의 방식, 뒤의 것을 '포괄'의 방식이라고 부릅시다.
큰 얼음덩이를 쪼아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는 얼음 조각(彫刻)은 배제의 방식이고
눈덩이들을 모아 붙여가며 눈사람을 만드는 것은 포괄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메다 님,
시를 만드는 행위도 앞의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은 다 제거하고 꼭 필요한 부분만 남겨두는 배제의 방법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끌어 모아 종합하는 포괄의 방법입니다.
다음의 글을 읽으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배제(排除)의 시와 포괄(包括)의 시
리차즈(I.A.Richards)는 시의 구조적 특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곧 배제의 시(exclusive poetry)와 포괄의 시(inclusive poetry)의 이론이다.
전자는 시를 만들고 있는 이미지[체험 내용]들이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구조다.
따라서 조화와 통일에 기여할 수 없는 이미지들은 제외된다.
이지적인 고전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후자는 모순 충돌을 일으키는 복잡다단한 체험들을 포괄 수용하는 구조다.
용광로에 잡다한 광석들을 넣고 쇠붙이를 녹이는 행위와 유사하다.
논리와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낭만주의적 성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자는 삭제의 원리가 지배하는 조각(彫刻)에 비유된다면
후자는 종합의 원리가 지배하는 소조(塑造)에 비유될 수 있다.
전자는 구심적(求心的)인 폐쇄성을 지닌 데 반하여
후자는 원심적(遠心的)인 개방성에 기운다.
리차즈는 전자보다는 후자를 바람직한 시의 구조로 생각했다.
현대인의 잡다한 체험을 수용하기에 보다 적절한 방식이라고 판단했던 때문이리라.
실제의 작품을 놓고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仙桃山(선도산)
水晶(수정)그늘
어려 보랏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박목월 「牡丹餘情(모란여정)」
4연 6행으로 되어 있지만 전체가 16음보에 지나지 않는 네 마디의 짧은 시다.
이 작품의 의미 구조는 간결하다.
늦은 봄 어느 석양, 강을 건너 선도산 그늘 밑으로 사라져 가는 한 나그네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선택된 이미지[대상]들이 단순 간결하다.
만일 실제의 정경을 영상에 담는다면 얼마나 많은 사물들이 화면에 담길 것인가.
강과 산 주변에 있는 논밭이며 나무며 물새며 바위며…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물들이 화면을 메울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이런 잡다한 것들이 다 지워지고 없다.
하나의 인물을 그리는 데 있어서도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단순한 환유로 대신한다.
성별, 신장, 연령, 얼굴 생김새 등 그 인물의 특징에 관한 기술이 다 생략되고 없다.
계절적인 배경을 제시하면서도 봄의 많은 속성 가운데서 '모란꽃 이우는' 하나만으로 암시하고 만다.
이 작품을 엮고 있는 핵심적인 이미지는 모란꽃, 해으름, 선도산, 청모시 이 네 가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요체가 되는 것은 '청모시'다.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나그네(청모시)는 고결한 선비다.
그 고결함을 시인은 무명이나 명주가 아닌 모시에 담았다.
특히 모시에 '청'의 색채를 가함으로써 그 순결도를 높이고 있다.
그 모시옷 가운데서도 가장 하찮은 부분인 옷고름만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다 지웠다.
그러나 그 옷고름 속에 나그네의 품위와 유연한 동작까지를 담고 있지 않은가.
도포자락을 바람에 날리면서 유유히 걷고 있는 한 선비의 고고한 자태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 선비를 상실감에 젖은 비극적인 존재로 그리고자 한다.
그래서 낙화(落花)와 낙조(落照)라는 소멸의 시간을 배경으로 설정한 것이다.
석양을 등지고 떠나가는 나그네―그는 어쩌면 시대가 거부하는 에트랑제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를 불행한 방랑자로 방치하지 않고 시련을 거쳐서 이상향에 이르도록 한다.
강[시련]을 건너 仙桃山[이상향]에 접하는 구조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시인은 주인공[청모시]이 자연[수정그늘]과의 합일 속에서 화평[보라빛]에 이르는 정황을 색채로 암시해 보이고 있다.
몇 개의 단순한 이미지들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구조지만 얼마나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지 모른다.
또 다음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속에는
오갈피 상나무와
개가죽 방구와
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
노루야 암노루야 홰냥노루야
늬발톱의 상채기와
퉁숫소리와
서서 우는 눈먼 사람
자는 관세음.
서녁에서 불어오는 바람속에는
한바다의 정신병과
징역시간과
―서정주 「西風賦(서풍부)」
서풍 속에 들어있는 것들은 그야말로 다양하다.
식물[오갈피, 향나무]과 북[방구]과 춤[상모] 그리고 동물[화냥 노루]과 통소, 맹인과 관음, 정신병과 징역 시간 등 서로 모순 충돌하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다.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어두운 것과 밝은 것, 선과 악, 본능과 억제…
이러한 다양하고 잡다한 이미지들이 서로 결합하여 많은 의미망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망들은 어떤 조화나 통일성을 지향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의도하고 있는 구조는 단순이 아니라 혼잡이며, 균제(均齊)가 아니라 무질서다.
'서풍'은 외적인 어떤 정황이라기보다는 시인의 내면에서 회오리치는 '바람'인 것처럼 보인다.
본능적인 욕망(id)과 의지(ego)의 갈등 속에 사로잡혀 있는 심리적 혼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이 작품이 율격적인 가락에 실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난삽했겠는가.
포괄의 시는 복잡다단한 체험 내용을 보다 리얼하게 나타낼 수 있을 지는 모른다.
그러나 시의 기능은 결코 세계의 반영에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반영의 기능만을 문제삼는다면 시는 언제나 영상예술이나 산문문학의 아류에 머물고 말 것이 아닌가.
시는 사실에 대한 단순한 보고문이 아니다. 꿈 곧 소망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현실이 시인의 이상향이 아닌 한 시는 늘 현실과는 다르게 마련이다.
나는 내 꿈의 집을 짓는 데 '삭제(削除)의 보도(寶刀'를 즐겨 사용한다.
세상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보다는 그렇지 못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리적으로도 나는 불리는 것보다는 줄이는 쪽이 편하다.
그래서 나는 내 시의 본적을 배제의 편에 둔다.
―『엄살의 시학』(태학사) pp.121-124
로메다 님,
나는 앞의 글에서 포괄의 시를 지향하는 리차즈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고
배제의 시를 옹호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체질과 취향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삶도 그렇지 않던가요?
어떤 승려는 소유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워 가족도 가구도 다 버리고 한 벌의 승복과 바리만으로도 평온하게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수집가는 수만 가지를 모아놓고도 만족치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얻고자 하는 기대와 그 성취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기도 합니다.
로메다 님,
개성에 따라 한 시인의 시작(詩作) 태도가 '배제'와 '포괄' 중, 어느 한 편에 기울어질 수는 있겠지만 어느 하나에 고정될 필요는 없습니다.
다루고자 하는 소재의 성격에 따라, 또한 쓰고자 하는 시의 성향에 따라
효율적인 방법이 한결같을 수 없을 테니까요.
로메다 님,
두 가지 방법을 익히면서 어느 쪽이 체질에 더 맞는가 판단해 보십시오.
또한 특정한 소재를 놓고 두 방법을 함께 시험해 보면서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인가도 판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건필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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