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1998. 12. 9. 삶과꿈)
* 해설 / 이시연 「고독의 내면화, 허무 초극의 진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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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말
시간에 대한 화두(話頭)
나에게 배당된 시간은 얼마일까
남아 있는 나의 시간은 어림잡아 알만큼의 길이일까
지금쯤에서 돌아본 시간은 과연 적절함과 최선으로 함축한 창조의 행보(行步)였던가
어쩐 일인지 시간에 대한 사유의 집착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불투명한 변주곡이기에 무엇을 속단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속 어느 날 내가 홀로 서 있음을 알았다
시간은 빛깔이 없다 동시에 향기도 없었다
그러나 시간은 인간이 소비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는 교훈을 새겼다
시간은 자아 성찰과 희망을 제공하는 마력에 공감한다
옛말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니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不可經)’도 시간의 허비를 경계하고 있다
존재의 확인을 통해 진실의 향방을 유추하는 일은 시간과 비례한다
불감증 시대에서 이러한 시간의 화두는 약간 어눌하지만 진지하다
소멸과 재생과 창조가 진정한 시적 구도로서 시간이 제시하는 무한으로 합일되어야 한다
이 제시하는 무한으로 합일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눈물겹게 갈망하는 구원과 화해가 성취되어야 한다
일곱 번째 허약한 내 몰골을 그렸다
참으로 부끄러울 뿐이다
시는 순간의 형이상학임을 지금도 믿는다.
1998년 동짓달
聽松詩苑에서
김 송 배
시간에 대하여 • 1
그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섬광으로 분해된 우주의 한 켠에서 스스로 사그라지고 혹은 새로운 변신으로 생성되는 태초의 어둠에서부터 그는 몸짓으로 또박도박 걸음마를 시작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유추로 아아, 그렇게 조화스런 신비 그 측면에서 불투명한 그물막을 드리운 채 사람들은 어지럽게 생사고락의 굴레를 씌워, 아, 그래그래
그는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갈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꽁꽁 얼어붙은 대지에 천동 번개에 놀란 미물들이 어스스 꽃잎을 피워내고 저마다 교감된 사랑의 밀어가 풋과일 영글쯤해서 천천히 시 한 편 마지막으로 정리하여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는 순환의 섭리를 순응하는 성스러운 침묵이 어둠과 섞이는 그런, 아무렴, 그래
그는 먼 길을 왔지만 잠시의 휴식도 잊은 채 또 갈 길 멀어 재촉하는 우둔함으로
그나마 영원한, 하모, 그래
그가 남기고 간 귀중한 유품은 모두 바람뿐이었다. 암, 그래.
시간에 대하여 • 2
새벽, 그 어둠을 걷어내면서
심호흡 한 번으로 생명의 신비를 확인하고
창문에 희움한 빛의 반사에 눈 뜸으로
지속된 존재를 희미하게 의식한다
─이런 일은 매일 반복 된다
그러나 쫓기면서 살아가는 시간의 마력 앞에
준비되지 못한 그 길을 힘겹게 나서고
다시 제 집을 찾아 돌아가는 무거운 발걸음만
이 세상 어디에나 질펀하다
─그런 일이 비록 나에게만 짐 지워졌나
하루 종일 안개비 내리는 날
햇살은 떠오르지 않는다는 불길한 예감은
어쩌면 젖은 채 헤매는 영원한 나그네
옷자락에 감춰진 역모의 시 한 소절뿐인데
─오, 탄생과 소멸의 공존 그 모순이여
어느덧 생채기진 육신을 챙기고
바람과 함께 주렁주렁 매달린 언어들
瞬, 秒, 分, 時, 朝, 書, 夜, 日, 週, 旬, 望, 月, 季, 年, 生……
그동안 어김없이 박살난 정신을 꿰매고 있다
─섬뜩, 섬뜩한 순리여라
늦은 밤, 참으로 섭세(涉世)의 아픔이다
어제는 고희(古稀)였다가 오늘은 팔질(八耋)일지라도
지금, 누군가 이렇게 일러준 만큼
시간의 무게는 지독히도 주름살로만 쌓였다
─형체 없는 그림자, 우리는 부재를 향한 우수에 떨고 있다.
시간에 대하여 • 3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려야 한다
오늘 오후 6시에 서울을 벗어난 OZ 551편
오늘밤 0시에 도착하던 이스탄불에서
비로소 감소된 시간의 신비를 알았다
하루에 줄여진 여섯 시간
구름 위에 둥실둥실 마냥 떠가고 있을까
여기 아타튀르크 국제공항 밤 기온은
시간을 동여맨 채 아침 해를 기다린다
이곳은 0시, 서울은 오전 여섯 시
줄여진 시간만큼 삶은 길어지지도 않는데
혼자 어둠을 자맥질하는 시계는
새롭게 출발 신호음을 띄운다
그렇게 하루 한 시간씩만이라도 줄여서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래그래
벌써 수척해진 이방인의 여백엔
흑해의 바람 한 점 푸르게 손짓하고 있었다.
시간에 대하여 • 4
벽시계가 갑자기 멈춰섰다
생명의 원년
미지의 동굴 속 어둠은
천둥 번개로 무너지고
사랑의 샘물줄기 가득 넘친다
황막한 세상이 열리면서
미물들의 함성이 일제히 들리고
한 줄기 빛과 어둠을 풀어 마신
오, 천지 창조의 환희가 넘친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너는
몇 억 겁의 허허로운 발걸음만 재촉하였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예측할 수 없는
현재와 미래의 사이에서
그렇게 신음 같은 위기의 노래를 띄운다
더러는 발걸음 휘청이며
삼백 예순 닷새
기다림의 기억을 삼키고 내뱉지만
육신보다 먼저 지워지는 아픈 흔적들
1998년 7월 29일 새벽
가슴 철렁한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고
시간은 먼동으로 둥둥 떠 있었다
죽음의 순간
그래도 시간은
멈춘 시계를 멀리 피해가고 있었다.
시간에 대하여 • 5
빗방울이 점점 굵어진다
창 밖에서 낮게 부서지는 영혼
방 안 가득 아스라하다
살아 있음과 죽음이
고향 싸늘한 들길 빗물 속에 젹셔지고
상도꾼들 구성진 회심곡 가락은
나의 내장도 절절하게 적신다
오호통재라
짧은 한 생명의 끝자락은 향촉의 불꽃인가
밤비 속 어두운 시간 저 너머로
하마 지친 시침(時針)이 무겁다
순한 짐승 울음 같은 곡성(哭聲)이
어린 조카들의 존재를 아직도 알리는데
진주 의료원 영안실 그 공간
장대비는 지금도 쏟아 붓는다
이제 흙으로 묻어버린 형
찌든 영정 앞 하얀 향내음에 취해
날밤 새워 퍼마신 음복술에 취해
시간의 무게에 한없이 짓눌리고 있었다
실타래로 담긴 혼백과의 마지막 대화
사고팔고(四苦八苦)의 굴레를 벗어남이여
그러나 그 시각
지리산 폭우는 또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데.
시간에 대하여 • 6
시간의 침묵은 공포인가
아침 뉴스는 온 천지가 물바다로 변해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눈물바다에서 허우적인다
지리산에서 이후 중랑천에서 파주에서 동두천에서
다시 당진에서 보은에서 상주에서……
시간의 그물은 또 어디에서
허약한 인간들을 물속으로 떼밀 것인가
어둠과 함께 쏟아지는 빗줄기는 무섭다
아침 밥상 앞에 덮쳐진 흙더미 돌더미
예비 되지 못한 대피 통지 전화벨은
파랗게 젖은 채로 흙탕물에 휩쓸린다
아, 남의 일인 양 낯설던 그 기원
아아, 무너진 축대에 박살난 뒷 베란다
시간의 한 끝 지점은 파괴뿐이었다
실종된 생명의 그 빈자리
아픈 흔적들 구름으로 바람으로 지워지고 있었다
시간의 눈금 위에서
저리도 약해져버린 영혼을 볼 수 있었다
재촉하는 멸망의 계산된 시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이젠 먹구름 없이 간간이 내리는 비에도
어쩐 일인지 육신에 이는 그 파문은 길다.
시간에 대하여 • 7
시간이 소유한 비방(秘方)은 사랑이다
‘세월이 약’이던 관념은 눈물나게 꿈만 꾸고
사랑의 아픈 여운은 선명한 시야를 약속하지 않는다
시간이 아름다운 이유도 있었다
만남과 사랑함과 행복함과
또 그 무엇이 내밀한 교감으로 오, 그때 그 사랑이여
시간의 자유, 그것은 헤어진 아픔을 도지게 하는가
이제 멀어진 유성의 잔영(殘影) 긴 눈물로
떠나지 못한 고도(孤島)에서 혼자 절망하나니
그대 맑은 시간의 영혼을 기다린다
문득 어느 계절쯤 사뿐히 밀려올 속삭임
순한 햇살 한 줌 되비칠 그런 오늘 이 시간에사.
시간에 대하여 • 8
1.
오경(五更) 장닭 홰치는 소리에 동녘 하늘 붉다
잠깬 자들의 시간 연장하기
어둠 가르며 앞산 오르는 땀방울 뜨겁다
2.
창틈 기어든 햇살 어느 새 눈부시다
바쁘게 문 나서는 자
시야 가득 자오록한 담배 연기 속 걸음 또한 무겁다
3.
오늘 일기예보는 흐렸다 개었다
언제나 그러하듯 불투명한 일상의 연속
정오(正午), 그래도 아직 살아 있음에 환호하거늘
4.
저물녘 허위적 돌아가는 자 불빛 무섭다
오늘보다 내일은 언제나 흔들림
쳐진 어깨 위 내려앉는 시간은 더욱 비겁함이여
5.
밤은 아늑한가, 그래 사랑의 휴식은 어떠한가
가물거리는 형광등 저 신음
죽음 같은 긴 잠만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시간에 대하여 • 9
경부선 대구행 기차표 한 장을 샀다
떠날 사람은 이미 제 시간에 출발하고
떠나지 못한 나는 대합실을 서성인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다
얼빠진 시계만 자꾸 쳐다보지만
어찌 된 일일까 글쎄……
아마도 시간은 모든 것을 허락하지 않았나보다
그 시각, 시간 위에 버려지는 바람 한 점
표정 없이 역사(驛舍)를 나서는데
그렇지, 시계바늘에 매달고 다녀야 할 약속들
오오라, 잊어버린 시간보다 지켜야 할 시간이 많아서 이리
동대구역에서 아무렴
도착 시간을 기다려줄 누군가를 위해서
나는 가끔
놓쳐버린 기차표의 쓴 웃음을 경험할 수 있다.
시간에 대하여 • 10
그대는 물이다 아니 조용히 흐르다가
휙휙 흔적 없이 사라지는 한낱 바람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지워진 빈자리
가끔은 아아로운 추억더미 아픔으로 메워지고
그대 남긴 굴레의 끝자락에는
나의 작은 뜰 안으로 뒹구는 낙화가 안쓰럽다
지금은 솔 소리 우는 어디메쯤에서
오롱오롱 조요하게 묻어온 사랑이 우련하고
저기 아물아물 잠 설치는 어둠만큼이나
내 영혼이 예리한 칼날에 소모되는 아, 그러나
모두들 애절스럽게 그대를 불러보노니
사랑은 떠나보낸 채 눈물을 예비하는가
허허벌판 아직껏 웅성이는 시든 잡동사니들
생채기 한 아름 외면하는 그대여
잰걸음으로 그냥 온 길 다시 떠나고 있는데
이미 물소리, 바람소리, 솔소리, 소리소리
그 화음에 희석된 그대의 노래는
한낱 생명을 저당 잡힌 인간의 신음일 뿐
그대는 물이었다가 바람이었다가
종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이었다.
시간에 대하여 • 11
흔적은 남기지 않았다 반거충이들
위험한 물장난으로 튀긴 물방울 자국마다
그때 그 심한 균열, 아물지 못한 상처는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 무표정의 선율 위에서
이미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몇 개만
무거운 의미로 남아 있을 뿐
방목(放牧)된 물보라 저리도 무서운데
여짜오니 죽음 곁에 에돌다 잠깐 멈칫하는
눈길엔 눈물만 가랑가랑 하더냐
참 빠르기도 하여라 이승에서 저승
아린 불빛의 마지막 절규 같은
저주가 조금씩 흩어지고 있을 뿐
그러하와 지천명(知天命) 넘겨버린 흔적들
주렁주렁 인연의 끝으로 하얗게
년년(年年)이 거두어들일 뿐
아, 그러하듯 갈 길만 재촉할 뿐
뒤돌아보지 않는 속성일 뿐
들릴 듯 말 듯 가벼운 무채색의 바람일 뿐.
시간에 대하여 • 12
저리 곱던 햇살
어둠으로 지워지고
달무리 속에 감춰진 별빛
또다시 동녘 하늘에서 모습을 잃었다
─나는 보고 있었다
칠흑 육계(六界)에서 잉태한 생명
비가 내리고
해무(海霧) 짙은 어느 무인도에서
유형(流刑)을 잘도 참아내는 아아
─나는 알고 있었다
환희와 고통 사이
영혼과 육신 사이
천계(天界)와 지계(地界)와 인계(人界) 사이
순종과 반항 사이
전쟁과 평화 사이
신의와 배신 사이
사랑과 별리 사이
혼돈과 정돈 사이
과거, 현재, 미래 그 사이에서 그렇게
─나는 비로소 말문을 닫았다.
시간에 대하여 • 13
가거라 멀리 날아가거라
한 땀의 비굴하지 않는 자국으로
한 줄의 연보(年譜)를 쓸 것이니라
어실어실한 육신이 구조 조정된 채
어둠 속에서 아사사 떨고 있는데
살아남기 위한 눈물이 방울방울 진다
톡톡 Enter
그에게 부여된 화면을 바꾸지 말라
저장되지 못한 파일 속
일그러진 얼굴로 깔리는 섬뜩함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요즘 기상도
그러나 아무래도
그냥 묻어 두어라
불투명한 글꼴, 자간, 크기……
지울 수 없는 것은 한(恨)뿐이니라
어디선가 간간이 새어나오는 붉은 한숨소리
관 뚜껑 덮는 마지막 못질 소리
지금쯤 우리 모두
천천히 Alt O. 파일 확인, Delete, Alt X, PARK.
시간에 대하여 • 14
흔들리지 않는 나무 위
때가 되면
새들 모두 떠나다
구름 가르며
길게, 높게 날아가는 영혼
허공 속 하얗다
누군가 어설픈 몸짓으로
잠시 지나간 공터에서
아직 떠도는 울음 섧다
비록 잠 못 드는 밤이 아니어도
떠남과 머뭄 그 사이
단절의 상처 무섭다
때가 되지 않아도
떠날 사람은 이미 청산이 좋아
잠든 긴 꿈 푸르다
흔적 깊은 허행(虛行)은
살아있는 혼돈
문득 비바람에 허물까지 지워지다.
시간에 대하여 • 15
썰물진 제부도 그 개펄엔
함께 떠나지 못한 미물들
무수한 생명의 흡입구가 어지럽다
뻘흙 뒤집으며 조개 캐는 호미날 끝엔
생존의 아늑한 사유가 질퍽하지만
투명한 한 오큼의 짠물이 필요할 뿐
하마 지친 기다림이 싫어
자폐증을 앓는 간만(干滿)의 사이
알몸 중증 생채기 스스롭다
칠흑 어둠 내 안으로 죽이며
시간만 재촉하는 뜨거운 숨결
아직 밀물은 서해 어디쯤 보이지도 않는데
어쩐지 온 몸이 스멀스멀하다
망망한 뻘밭을 배회하는 비감의 언어
밀려올 사랑의 분명한 예비는 있는 것인가.
시간에 대하여 • 16
여보게 지금쯤 우리는
물감을 준비해야 하지 않겠나
암갈색 저 넓은 대지 위에
한 색깔씩 순리대로 뿌려지는
그런 신비의 세계를 창조해야 하지 않겠나
삼원색 아니 이 세상 모든 물감으로
정갈하게 찾아오는 산 너머
가장 아름답게 깊이 스며드는 내 사랑
그 날개 그 몸짓 그 눈망울로
이 세상을 색칠해야 하지 않겠나
그래, 지나가는 누군가 봄이 왔다고 한다
노란 웃음 하얀 손짓 볼 붉은 수줍음
어느덧 청청해지는 내 모습
그렇게 봄은 왔다고 전해줄 뿐이다
그러나 여보게, 우리 지금쯤
춥고 암울한 시절을 지우기 위해
낡은 헌옷가지 훌훌 벗어던지고
색색의 새로운 사랑을 맞이해야 않겠나
그 빛깔
그 향기
그 생명
그 사랑
그래 지금쯤 일만 가지의 물감
새롭게 내 얼굴에도 뿌려야 하지 않겠나
시간에 대하여 • 17
시간은 빛깔이 없다
늦여름인지
초가을인지
정말 분간하기 어려운 아침
청승스레 비가 내린다
비 맞은 나뭇잎 하나 둘 까맣게 지고
열매 한 톨 영글지 못하는 부끄러움
무엇인가 우리 스스로 껴안은 업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우들우들 산성비 두렵지만
이 모두가 눈 먼 아아 우둔이어라
어디선가 지금도
물인지
독인지
어둠으로 쏟아지는 저 개울의 눈물
눈물 마신 피라미 하나 둘 온 몸 휘어지고
무수한 생명 비틀거리는 폐허
어쩌면 우리가
어지럽게 밟고 지나간 자국이었다
시간의 무게 그토록 무거웁다.
시간에 대하여 • 18
글씨라, 지끔 와서 이야기하모 사람 추접어진데이
그 날은 억시기 깜감한 밤이었재
세규지름이 없어서 관솔불로 제우 방을 밝혔재
어북 밤이 이슥해서 꺼시름이 베름박에 붙었재
질삼한다고 여편네들 좍 둘러앉아
장밭아지매 어랑타령 한 곡조 뽑았구마
각중에 디리민 머시기, 아이고 머리까댕이가 쭈빗하두마
따발총이라나 뭐라나 엄청시리 놀랬재
문 앞에 앉아 있던 음실띠기는 자물싯다 아이가
그넘들 되게 무섭데, 나도 찔끔 속곳이 젖었빘다이
그런데 고방에 쌀이 있나, 뭐 줄게 있어야재
총부리 들이대고 내놓으라는 기라, 참 환장하것데
국방색 그너마들은 빨갱이었던기라, 아이코 그마
우짜노, 우리 집 재산인 암소만 끌고 가데
사람 안 다친 것만도 천만다행이재
그래 희움하게 날이 새는데
말카 산으로 도망갔던 남정네들이 어설렁 어설렁
그래 배액지 성만 안내나, 쇠뺐깄다고, 참, 내,
엥간이도 썽질은 급했데이, 꿉벅 아부지한테 절하고
그 날로 그너마들 잡으로 간다고 군에 가삐맀지
후─ 그러고는 오늘이라, 오데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때꺼정 일자 소식 한 장 없다카이
유복자 저거만 쳐다보고 살았재, 벌새로 50년 세월이구마
가심 찢어지는 날 많았재, 그러나 우짜겠노 응이
6 • 25가 무어 말라죽은 귀신인지 인자는 다 잊어삤다
생각하모 할수록 평생 눈물나는 한이재
아직도 절마들은 철망 쳐놓고 눈이 시뻘게져 있다매?
시간에 대하여 • 19
지금은 몇 시인가
잠 설친 야광시계
빛 잃은 바늘이 흐느끼고 있다
그럼 사랑은 갔는가
고적하게 뒤척이는 이 밤
돌고 돌아가는 아픔만 함께 눕는다
아니지, 이럴 때일수록
언제나 서둘러 깊은 꿈 깨고
비망의 촌음(寸陰)을 불러야지
아직 불을 켜지 말라
자명종은 예비된 울음을 멈춘 채
충혈된 눈으로 떠나버린 사랑을 찾고 있다.
시간에 대하여 • 20
아직도 그 곳에서 피는 꽃들
문득
잔물결로 일렁이다가 끝내 한 자락 바람으로
달려가 보는 세월의 한스러움
하지만
이방인이 되찾은 두뫼 옛 집터
비켜선 산 기슭 싸리꽃마저 서글픈데
학생의성김공지묘(學生義城金公之墓)
유인김령김씨지묘(孺人金寜金氏之墓)
허물어지는 봉분에 꾸벅 절만 하고 돌아선다
잊어진 오솔길에 이슬은 젖어
가난이 묻힌 그 흔적들
그 길은 시간의 향기가 없다
그 곳에는 무심(無心)의 꽃들만 지금도 피어있다.
겨울 詩 몇 편 (1)
─ 첫눈
이렇게 온 세상이
첫눈으로 하얗게 지워지는 날이면
소중하게 간직했던 추억
잊지 못할 첫사랑이 생각날 듯도 하지만
어쩐 일인지 창 밖에서
차갑게 차갑게 흩날리고 있다
외투깃 치켜세운 채
젖은 마음으로 눈길 걸어보면
까닭 없이 흐르는 눈물
눈발 속 누군가의 밀어가 들릴 듯도 하다만
아마도 지금쯤
내 가슴 깊이 식어가고 있을까
겨울 詩 몇 편 (2)
─겨울달(冬月)
억겁의 어둠을 꿈꿀거나
내 초라한 눈빛으로
싸늘해진 이 대지를 밝힐 수가 없구나
차츰 밀려오는 불길한 동원(冬雲)이지만
지독한 오염의 바람 속
내 희미한 사랑 한 줌으로는
실낱같은 빛줄기로 숨죽일 수밖에
언제나 눈부심을 우르러
가슴 열고 속삭이는 뜨거운 포옹
밤을 심고 비로소 나를 응시하는 연인들이여
그대 내 곁에 있음으로
내 사랑을 만나는 신비여
무한 허공 손짓하는
가녀린 한 줄기 생명
늘 깨어 있어 그대 초췌한 얼굴
힘겹게 그 어둠을 걷어내고 있구나.
겨울 詩 몇 편 (3)
─소한(小寒)의 추위
올 겨울은 춥더이다
소한 추위는 대한 추위에 꾸어서라도 한다는
옛말이 두터운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날
참으로 얼어붙은 새로운 언어들이
강풍으로 불어와
더욱 춥게, 나를 떨게 하더이다
아이엠에프……
정리해고……
구조조정……
설령 그것들이 내 몸까지 담보하는
무서운 일은 아닐지라도
저 겨울나무가 온 몸으로 흔들리는 두려움은
지금 이 땅을 아프게 혹은 눈물나게
뿌리마저 삭아내린 분노뿐이더이다
그런 날 아아 우리 모두는 춥더이다
막막한 긴 그림자를 스스로 밟고 가는
한 무리 침묵의 혼령들이
흐느끼는 옆집 창문의 불빛 틈새로
연일 기습하는 그 한파(寒波)로
그냥 앉은 채로 기력마저 잃어가고 있더이다.
겨울 詩 몇 편 (4)
─간이역에서
역사(驛舍)의 불빛은 지워지고 있었다
누군가 쉬엄쉬엄 거쳐 간 한때
아쉽던 사랑의 밀어가 눈발로 흩어지고
이제는 기다리는 사람도
떠나보내는 그대의 그림자도 없다
그냥 존재 이유를 체념한 듯
매우 찬 밤바람에
별빛 하나 으스러지고 있었다.
겨울 詩 몇 편 (5)
─까치밥
아쉽다
그렇게 아쉬운 듯
마지막 낯선 얼굴로
붉게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네
그립다
모두 떠나고 그 빈자리
환상 길게 흘린 눈물
밤새 잊혀진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네
문득
시공의 침묵을 느낀 듯
추락하는 사랑의 그림자
누군가 순간의 광기를 퍼 올리고 있었네.
겨울 詩 몇 편 (6)
─겨울바다에서
부서져라
그토록 싸늘한 가슴 후비면서
하얗게 무너뜨려라, 처얼썩
저렇게 분노로 가득 찬
사랑 한 아름
마침내 투명한 눈빛으로
네 사무친 투정을 쏟아내는
가뭇없는 메아리
아, 눈물나게 초롱한 눈망울
손에 잡힐 듯 다시 돌아서서
뭍바람에 몸을 섞는
그래, 부서진 모래알이어라
아직도 얼어붙지 못한
마지막 아리아 몇 소절만
스스로 제 몸을 부수고 있다.
겨울 詩 몇 편 (7)
─청둥오리에게
영하 몇 십도의 물 밑
네 생애에 짐 지워진 아픔
붉은 물갈퀴에 모두어
오늘도 삭여내고 있느냐
강 머리 들불연기가 피어오를 때
그 불꽃으로 너울너울
하늘 날고 싶은 욕망
그러나
네 가슴 속 고인 사랑의 언어
그 체온으로만 저어가는 진한 순정
물결 더욱 차가워질수록
영그는 사랑이여
영하 몇 십도의 그 아픔은
바로 꿈 젖은 너의 혼불이로니
아아, 한낱 그리움 같은 것은
수심 저 아래 묻어두고 사노니
그러하듯
따수운 불꽃은 네게 없어도 좋겠다
여린 햇살에 안겨오는 그대 있으므로.
겨울 詩 몇 편 (8)
─겨울밤
이미 내게서 떠나버린 영혼
멀리 사무친 한 점 눈빛으로
싸늘하게 응시하고 있을 뿐
사랑한다 아득히 우리는 그 밀어 뿌려두고
너는 인습의 이별을 어둠에 사룬 채
나는 다시 허공 헤매는 푸른 눈물
모두 다 인연일 수 없는 환상의 화석이노니
어쩌면 사랑은 무서움일 뿐
따수운 손길 이 자상에 온전히 녹아
그래, 은하의 강줄기 오늘 밤이사
마냥 띄워 보낼 한 묶음 병든 그리움
그대 창가에 어리도록
마지막 켤 수 있는 여린 촛불일 뿐
아아, 북풍마저 숨 막히도록
내 목숨 죄어드는 무슨 신열이 온 몸을 휘감고
유성(流星) 빗겨가는 기원만 남아있을 뿐.
겨울 詩 몇 편 (9)
─고드름
참으로 투명하더군요
추녀 끝에서 누군가 절규하는 영혼
그 떨림은 사랑으로 남을 만하더군요
뜨겁게 혹은 차갑게
시간을 메우고
때로는 공간을 채웠던 밀어(密語)
그러나, 엄동(嚴冬)
밤새 눈 쌓인 만큼만 온 몸으로 익어갔던
너와 나의 무지개빛 교감이려니
하, 어쩐지 햇살 따수울수록
무너져 내릴 예감도 영롱하더군요
길게 더러는 짧게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져 갈
그대 눈빛 너즈러지고
그 자리엔, 비어있는 그 자리엔
서 푼어치 배반의 언어가 스며있더군요
숯된 누군가의 가슴, 그 응어리
지금 막 녹아내리는 물방울처럼
오오, 비릿한 절망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지는 날
참으로 그런 이별은
아프도록 불투명하더군요.
겨울 詩 몇 편 (10)
─얼음낚시
잠시 동안이지만
기원의 좌판을 차갑게 펼친다
얼음장 밑으로만 둥둥 떠가는 미지의 기대
한 올 여린 낚싯줄에 매달아
햇살과 함께 시간을 삼킨다
사위(四圍)를 접고 오로지 응시된 집념
희열인 양 쏟아보는 찌가 흔들리는데
힘껏 당겨 올려보지만
매양 건지는 것은 보잘것없는 씨알
그러나 망중한(忙中閑)일 수 없는
사랑의 기다림이여
내게서 떠나버린 아아, 나의 조사(釣士)여
낚싯대에서 파닥이는 마지막 조복(調伏)
또다시 수면은 얼어붙고
잠시 동안이나마
시린 내 가슴 다독이며
미끼를 던지는 손끝은 떨린다
몇 마리의 작은 씨알을 구하기 위한
얼음 구멍 공간에 어신(魚信)은 희미하고
절망의 숨소리만 저리도 들린다.
겨울 詩 몇 편 (11)
─한행(寒行)
어둡다
저문 산사(山寺)
풍경(風磬)소리 까맣게 차가웁다
낙엽더미
부서지는 발길 따라
어리석음 또한 미로에 나뒹굴고
이미 끝나버린 독경
지금 잠들 수 없는 새 한 마리
저리도 가슴 시리다
우듬지에 내려앉은 별빛
딩그렁딩그렁 그렇게 울려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아, 언제쯤 지혜의 영원을 찾을 것인가
산문(山門) 밖 개울물 속
야윈 육신 다 녹아 흘러 버린 채
어인 까닭이냐, 제 영혼만 건져 다시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비하
내 걸어야 할 겨울 길 아직도 멀다.
겨울 詩 몇 편 (12)
─동토(凍土)를 바라보며
철책선 너머
얼어붙은 땅에는 지금도
한풍(寒風)이 불어 넘고
단절된 폐허의 지평선엔
탄흔(彈痕)도 지워졌지만
반세기 지나도록 피눈물의 수수께끼
오, 해동(解凍)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옭아맨
붉은 의식의 깃발은
고성능 스피커에서 두렵기만 한데
산야가 얼룩진 한으로 남았느니
북녘의 겨울은 언제나 깊다
전망 렌즈 속 다가오는 능선 저 멀리
아직도 들풀들 발갛게 얼어있다.
겨울 詩 몇 편 (13)
─겨울비
오늘은
레인코트 깃 치켜세우고
젖은 대학로 겨울 길을 걷는다
오싹한 온 몸 추스르지 못한 채
그냥 빨려 들어간 포장술집
펑 뚫린 가슴팍에
독주 한 모금 뿌려보지만
어디서 떨다가 날아온 나뭇잎 하나
빗줄기 따라 멎어버린 심장박동
아무래도 오늘은
열리지 않는 마음의 빗장 속에서
갈갈이 얼어버린 눈물일레라.
겨울 詩 몇 편 (14)
─설경(雪景), 서정적
눈 덮인 들판에 서 있다
누군가 황망하게 던지고 가버린
허기진 낙엽 하나 뒹굴면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봄날 여름날 그 파아란 희망들이
어느 가을날 한 아름 풍요로운 사랑
이젠 눈 더미에 잠재운 채
눈송이 무게만큼 풀어지는 일상들
겨울새 한 마리 퇴색된 노래 부르는 날
그대여, 하얀 마음 물감으로 풀어
사랑과 희망과 풍요들을 가지런히
하얀 화폭에 담을거나
잠시 명상하는 계절의 들판에서
저기 한 점 초록을 꿈꾸는 바람
그렇게 살아 볼만한 노래 한 소절을
온 천지에 하얗게 전해주고 싶다.
겨울 詩 몇 편 (15)
─입춘대길(立春大吉), 1988
아직, 영하 몇 십도의 한파가
대지를 한 덩이 얼음으로 얼리고 있다
계절의 순리가 어김없이
예비하는 생명의 질서 위에
아직도 버들강아지의 겨울잠은
차가운 흔적으로 흔들리고 있는데
모두가 옷깃을 움츠려 세운 채
아아, 봄 날씨가 몹시도 추운지고
왜 이리도 어눌한 봄바람만 부는가
그렇게 슬픈 예감이 불현듯
내 온 몸이 전율할 불길한
이 거리에는 생소한 한 무리의 언어가
먼 발치에서 다가오는 꽃향기를 지우고
아프도록 우리들의 순정을 아니 사랑을
쓸어가는 혼돈의 봄내음
그리하여 무지개를 잃어버린 입춘절에
IMF, 그 찬바람 무섭게 몰아치는
오, 이 땅에서 찌부러진 은빛 햇살
저리도 불투명하다
언 가슴 녹일 따수운 봄은 정녕
오고 있는가, 오고 있는 것인가.
새벽산을 오르며
날 샐 무렵
아직 풀리지 못한 무슨 응어리들
가슴 속 깊이 시커멓게 누워 있다
후후후 어떤 찌꺼기를 토해내듯
두 팔 들어 어둠 가르는 저 편 어디쯤
하나 둘 창문에 마침내
이 세상 숨결이 다시 살아나는데
참으로 고요로워라, 미명(未明)의 향기
밤 내내 풀어 녹인 우리들의 사랑
상쾌한 찬바람으로 떠돈다
이것이 나와 함께 헉헉 오르고 있는
뒷산 어느 지점 정지된 무심의 메아리일지라도
저기 막 솟으려는 태양, 그 환희의 신비
그 뜨거운 사랑으로 옹찬
어제의 피멍을 모두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있으므로 또한 젖어있는
차라리 촘촘한 인간들의 감춰진 그 욕망이
이슬 받은 길섶 풀잎의 고즈넉함 그 품으로
날 샐 무렵 이 모두를 들을 수 있는
지상의 영원한 사랑의 화음이리
오늘을 예비하는 장공(長空)의 황홀한
그 새벽 가득 찬 그 사랑이리.
빈자(貧者)의 노래
늘 짓궂게 찌푸린 하늘은
비만 하루 종일 쏟아부었다
참으로 을씨년스럽다
가진 것도 가질 것도 없는 그의 가슴
한 가닥 가녀린 신음이 들리는데
막소주 한 잔도 아니 물 한 모금도
이젠 갈수록 쌓이는 낙엽 같은 것일러니
아아, 그대여 이 밤마다
나를 깨우는 저 바람 같은 것일러니
그래 모진 생명의 불씨
거칠고 무딘 먼 꿈의 유랑 같은 것일러니
그대 발길에 늘 머무는 어지러움
아무리 털어내도 볼 수 없는 별빛일러니
오늘도 비 내리는 저물녘
암흑, 그 넓은 대지 위 모두를 비워둔 채
가볍게 그러나 더러는 무겁게
어디론가 바쁜 걸음으로 그대는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어둠의 노래
어둠 깔리고
불면의 순수가 그대 창문을 두드리면
어느덧 창틈으로 새어드는
한 줄기 은유의 노래를 듣는다
그대 가슴
빈 한켠에서 들리는
어떤 비곡(悲曲)의 드높은 운율이
내 온몸을 한 다발 들꽃으로 묶어두는데
그 깊이 그 무게
그것을 사랑하는 그대여
은밀히 감춰둔 고별의 눈짓
투명해져야 할 기다림은 눈물로 녹아
빈방 흘러흘러 그윽하다
어둠 짙게 깔릴수록
너의 눈동자 더욱 빛나고`
우리 하나쯤 간직해야만 하는
저렇게 모순으로 누워있는 그리움
언제나 멀어진 별빛 속에 잠긴 채
아, 그렇게 약속이듯 어둠 깔리면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나의 순수.
확인되는 사랑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고이 묻어둔 서로의 수수를 하나씩
확인하는 일일 것입니다
꽃이 피었다가 차츰 시들어가는
그 아쉬움을
진한 듯 연한 화장으로
가려보는 그런 마음처럼
따수운 눈길로, 데워진 가슴으로
잃어버린 말 한마디의 촉감은
더욱 간절한 또 무엇이기에
지친 꿈 대신 사랑으로
이 허전함을 가득 채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젖어버린 가슴 사이사이
너와 나의 영롱한 무지개를
영원히 뜨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일 것입니다.
산책길에 한 생명을 본다
이 아침
모든 나뭇잎 풀잎 짙게
제 몫의 숨소리까지
숨죽이며 아주 낮게 손짓하는 길섶
먼 그리움
맑게 이슬로 녹아
내 가슴 깊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날
문득 한 송이 곱게 피어난 꽃을 볼 수 있다
엷게 다시 가녀리게 떨리는
어쩔 수 없는 사랑의 아픈 메아리
이제사 감싸이는
무지개빛 은은한 그대의 눈시울
지금 막 싸목싸목 번지는 저 향내처럼
붉게 혹은 또 다른 유채색으로
작게 그러나 모질게
사바(娑婆)에 마악 나와 함께 젖었음을 알 수 있다.
장마철엔 젖은 언어만 떠 가는가
장마철이다
어디서 떠내려 온 것인지
한강에는 젖은 언어들만 일렁일렁
위험수위를 넘어
이젠 홍수주의보를 알린다
개었는가 했더니 또 비가 쏟아진다
내 가슴 한쪽 말릴 틈도 없이
황토물에 질척질척
불현듯 어떤 여인의 애잔스런
아, 환상의 한 촉 화살
비는 잠시 멎었지만
그렇게 쏘아보낸 사랑의 의미
저 혼탁한 부유물에 섞여진 채
지난 날 얼룩 같은 상처를 감아안고
어디론가 마냥 떠내려가고 있는가
장마철 이맘때면 문득 도지는
사랑과 환상 사이
그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언어
젖고 또 젖어 어지러울 뿐
차라리 말문을 닫고 재촉하는 흐느낌
비가 되다 눈물이 되다
강물이 되다 쓰라린 아픔이 되다
저렇게 멀리서만 들어야하는
노래가 되다 밤이면 토해내는 그래
목메인 한 연인의 불면이 되다.
떠나고 싶은 배
떠나고 싶은 배 한 척
하염없이 정박해있다
상처 씻어 내린 여울목에서
시간의 흐름을 비켜설 수 없는 나
또한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모두 돌아간 항구 어디쯤
동질의 꿈 나래 펴는 물새처럼
내 사랑하는 이의 그 초롱한 눈망울
가슴 가득 감싸 안은 채
……
떠나고 싶다
QQ QQ QQ QQ……
낮달을 보며
낮달이 눈을 비비고 있다
어둠으로만 들려주던 신비의 노래
아직도 끝내지 못한 채
체념한 듯 떠 있는 수줍음
그 밤이 다시 그리움을 삼킨다
태양빛은 싫어
밤이슬로 온 천지를 다독이는 창가
그대 곁 한 올 불면인 듯 어리운 눈물
낮과 밤사이를 방황하는 부조화였던가
눈부시게 퇴화하는 무형체의 혼돈
어느 황량한 바람 따라
하얗게 풀이 죽어버린
내 안 끝지점에서 기원으로 남아있다
불투명한 항해의 닻은 이미 올려지고
온몸에 스민 경련인 듯
마냥 흐려지는 눈동자
어인 일인지 오늘 무겁다.
응보(應報)
빛깔
좋은 단풍잎
아무데도
없고
내장 앓는
나뭇잎
비루(悲淚)의 낙엽으로
겨울 길목을
지키고
있다.
야맹증(夜盲症)
이른 아침, 비틀거리는 10월이 온 강산에 춤춘다.
온몸 매연으로 주눅이 든 가로수들 헤픈 햇살로 지난봄부터 기 펴지 못한 우수 한 아름 떨군다.
지금 막 헛소리처럼 열병으로 음츠러든 노숙자 무리들이 헐어버린 마음 어설프게 가누며 지하도를 찾고 있다.
서울시청 앞 분수대는 하루 종일 퇴보하는 역사를 바쁘게 뿜어댄다.
시간과 공간이 이미 무너져 내린 도시 어디쯤에는 얼나간 떼거리들이 ‘이대로’를 외치는 이 밤, 술잔에 가득 고인 비극의 시말을 알 수 없다.
누가 쓰러지고 또 누가 도진 상처를 밤새도록 눈물로 씻어내는 고통의 어둠 속
아, 10월은 그렇게 찌그러져있다.
으스스한 서울역 지하도에는 지금 바람이 만든 역설의 미학으로 흔들린다.
남아있던 몇 모금의 희망마저 이제 분골로 바람에 희석되는 최악의 기상도, 저기압 곡선은 언제나 투명한 피사체로 나를 취하게 하고 등골로 스며든 신음 또한 질박하다.
웬일인지 초롱했던 별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봄 詩
─잔설을 보며
이월 그믐께
태양이 지열과 만나고 있다
창문 짙은 어둠 걷히듯
겨울을 이겨낸 미물들이 눈뜨고
먼발치에서
아직도 녹지 못한 초췌한 너의 모습
움츠린 내 마음 자락에 안긴다
간간이 귀띔하는 봄내음
섭리의 가교를 막 지나가는데
내 엷은 기다림 한 올
저 대지 위에 차차 번지면
어느 공간 문득 흔들리는 훈풍을 따라
서툴기만 한 기지개 아아,
새 생명의 환희, 그 예비된 순수
먼발치, 하얀 네 옷자락에 묻은 사랑
지워지는 이월 그믐께
그것은 내 가슴 적신 뜨거운 눈물이었다
살아있으므로 더욱 황홀한
신비의 울음이었다.
봄 詩
─화신(花信)
새색시의 가벼운 발걸음이었네
먼산에서 들리는 투명한 기지개
비로소 개울물 잠 깨우고
버들강아지 설레임으로 흔들리고 있었네
누군가 잔잔한 손짓으로 나를 부르고
산수유 화사한 웃음, 벌써
한 점 바람으로 내 가슴 젖게 하네
아아, 사랑하는 사람이여
이런 날 푸르게 혹은 노랗게
무심코 울려 퍼지는 한 아름 사랑 노래
때로는 연한 그리움 사무쳐
꽃샘 아픔으로 내 숨결 쓰다듬고 있었네
이맘때쯤 너의 향기에 취해
온몸 느끼는 사랑 담뿍담뿍
어김없이 나를 껴안는 그대를 보겠네
이 세상 미물 하나라도 어쩌면
뒤늦게 들리는 담녹색 저 메아리
사뿐사뿐 새색시 걸음으로 반기고 있었네
아, 그대가 오는 어느 날 그 산길로
수줍은 내 마음 가녀리게 꽃망울로 서 있었네.
봄 詩
─어쩌지 봄을 느낄 수 없는
꽃샘바람 춥다
어쩐지
봄이 와도 봄같지 않는 날
되는 일도 없는 몽롱
그렇다고 안 되는 일도 없는
그저 적당한 바람만 온몸 감싸고
울어라
우리 모두 이 봄을 슬프게 울어야하리
화사한 생명
겨울을 빠져나가는 편법을 꿈꾸고
버들강아지 숨소리 거칠다
저기 파헤쳐진 산등성이
아파라
아픔이 봄기운을 밀어낸 채
홀로
떨고 있는 무명의 나무 한 그루
어쩐지 아직도 춥다
추워서 터뜨리는 꽃망울
될 일이 안 되고 오히려
안 되어야 할 일이 쉽게 풀리는
그 어느 날 우리들
갑자기.
봄 詩
─봄볕 뜨락에 내려
한 자락 봄볕 뜨락에
앉거나
서서
겨우내 감춰둔 비밀 한 갈피씩만
모락모락
피워 올려
풀꽃은 풀꽃으로 피어나는
벌레는 벌레로 태어나는
따수움
저 넓은 대지 위
넘치는 산들바람
눈 뜨라
푸르게 하늘을 보아라
움츠린 가슴
기지개 켜는 저 언덕으로
서거나
앉아서
색색의 소망 뜨겁다
봄볕 한 자락
너와 함께.
봄 詩
─저런, 이 봄날 어쩌나
평정되지 못한 바위가 있다
어쩌나, 저런
바람 따라 떠 간
잘 영근 씨앗 하나
작년 늦가을 만찬을 잊은 채
암울한 제 한 몸
벼랑에 붙박혀 이젠 어쩌나
거역할 수 없는 발아(發芽)
정조로 지켜야 할 푸르름
생명으로 피워야 할 꽃송이
아아, 질박한 바위틈에서
또다시 몰아칠 풍우를 예감하면서도
그 아픔, 마지막 기도들은
이 땅의 고통이려니
이 시대의 수난이려니
저런, 어쩌나
구름이다가 바람이다가
종내 퇴락하는 허깨비 무리
내면 어디엔가 스스로 곪아버린
씨앗 하나, 저걸 어쩌나
평정을 기다리는 이 봄날.
봄 詩
─창 밖에 봄비 내리고
보잘 것 없는 것 아니 큰 허물도
굳이 감추면서 살아가는 그런 공간
그 시대의 역사마저 감추려는 청문회
가당찮은 말씨름으로 청문회가 열리는 날
창 밖에는 소리 없이 비가 내린다
빗방울 흙 속에 스미는 순간
새싹 움트는 소리 대지를 울리는데
그 소리 그 신비함도 느낄 수 없는
아아, 무섭도록 경직된 저 하늘에서
그렇다, 우수(憂愁)의 빗줄기
1997년 4월이여
벌써 목련이 지고 개나리가 지고 그렇게
떨어진 꽃잎처럼 짓뭉개진 이 땅의 봄날
어디선가 들릴 듯 한 옛 4월의 노래
그러나 어쩐지 추접지근한 빗방울이
이제는 굵게 떨어진다, 이 봄날 창 밖에는.
응시(凝視) • 1
무심코
바라보았던 그 눈동자
불현듯
내게 으스러지도록 안겨
이 세상 가장 향기 짙은 꽃이 되고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이 되고
그러다가 밤 이슬길로
다시 찾아와
내 가슴 어느 곳에 가득 머물렀다
결 고운 선율
영혼의 교감이
더러는
아픔이 무엇인지도 귀띔해주고
요즘 같은 이상기온에도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지금까지 그냥 바라보았던 너
이만큼 낡아버린 내 심연
어디쯤
그래도 소록소록 숨소리 더욱 정겨운데
온 천지 가득 영롱한 무지개
그가 일러준 詩 한 구절
결코 지울 수 없는 사랑의 노래.
응시(凝視) • 2
어느 날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무엇일까
황량한 서울 어느 골목길을 접어들며
무엇일까, 비웃는 바람바람 사이
몰골 사나운 나를 보고 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삶의 잔해들
그것이 무엇일까, 아직도 해법이 없는
우울한 그 지점에서
아마도 지금쯤 먼 길 떠났거나
영원히 증발되고 없을지도 모르는
그런 무엇을 아름다움이라고 하는가
스스로의 사유가 높게 혹은 낮게
내 발자국 따라 흩어지고
언제나 비틀거리는 허깨비 하나
비 젖은 골목길을
무엇일까, 이젠 초점이 흐려진 동공
화려한 울음 하나씩을 위하여
항상 되뇌이는 그 처절한 모습
어느 날 그대여
과연 그것이 나에게서 무엇일까.
응시(凝視) • 3
………경춘가도
끝없이 차창에 부딪치는 오월 햇살
그 햇살을 웃음으로 맞는
사랑의 대화가 기일게 깔린다
나의 영과 너의 육은
이미 합쳐진 시간의 타오름
우리는 영원한 우리의 노래를 불렀고
또다시 풋풋한 향기를 꿈꾸면서
그 눈빛과 그 미소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
어쩌면 어리석은 그림자 하나 지우지 못한
아아 그래서 분노의 잉태를 삭이지 못한
환상이 지금까지 귓전을 때리는데
이젠 악몽의 껍질을 벗겨야한다
밤마다 억류당한 너의 영혼은
너의 사랑을 위한 꿈을 만나야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사랑을 찾아야하리
경춘가도……, 허황한 바람줄기
가득 함몰된 그 영혼의 무게
어쩔꺼나, 나 너 또한 어찌할꺼나
내 마음 침몰된 그 무게만큼
우리 온전했던 사랑이 유실(流失)되고 있는데.
응시(凝視) • 4
오직 스스로를 위하여
사랑을 증언할 수 없는 사람의
환상은 참으로 아름다운가
낯선 홍천 계곡 어디쯤에서
저리도 섧게 흐느끼는 산새 한 마리
그 이유가 사랑인지
그렇게도 아픈 사랑인지 알 수 없는 나
마냥 떨리는 사랑의 흔적을 더듬고
그것이 풀어낼 수 없는 나의 미로이거나
나를 포박(捕縛)하는 섬뜩한 빛발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몇 개의 착각, 그러나
저 산새들은 소유하지 않았다
비록 네가 너를 잊은 채
나를 찾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쩐지 낯설기만 한 사랑의 계곡엔
오직 확인되지 않는 눈물만
오늘도 가득가득 고여있다
그 이유가 사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산새 울음 저만치 멀어지는데
스스로 분별할 수 없는 환상 조각
아직도 홀로 구름 속을 떠가고 있다.
응시(凝視) • 5
가랑비
저물도록 내리는 날은
어쩐지 혼자 젖다가
그냥 탁류(濁流)에 휩쓸리고 만다
그대 둔탁(鈍濁)한 기억의 확인 속에
현기증만 다스리는 나
시간이 묶이고
영혼이 소진되는
그렇게 예비된 분노를 적신다
멀쩡한 음률이 창문에 부딪치고
한 음절씩 구겨지는 노래를 듣고
그래도 물러설 수 없는
사랑의 징표를 변론하는데
그래, 처음부터 잘못 세워진
사랑의 푯말이 예감되는 날
아아, 가랑비 밤새 치욕을 부리는데
뜨겁게 치솟던 불빛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응시(凝視) • 6
모든 관념은 바라볼 뿐이다
이완된 은빛 언어
허물어져버린 그리움
이미 퇴색되어 쓸모없는 순수
모두 짓밟아버린 채
오늘은 그냥 두고 바라볼 뿐이다
어느 날 사람들은
모든 관념은 오로지 부유물(浮遊物)일 뿐이라고 했다
한 생명이 좌표를 잃고
어차피 옥죄는 영혼의 행방
영글 수 없는 사랑의 구도 앞에서
웅크린 채 반문하는 그 시각에는
마치 죽어있는 것들도
그렇게 기도하듯 바라볼 뿐이다.
응시(凝視) • 7
무성한 나무는 잎이 진 뒤에
많은 사유를 나에게 들려준다
그러하듯이
사물은 사물로서 새겨진 뒤에
새로운 관념을 던져준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도
영혼을 말할 수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사랑은 사랑으로
눈물은 눈물로
아, 또한 그러하듯이
영혼은 영혼으로
육신은 육신으로
모두 떠나간 뒤에
사물과 관념의 순수를 알게 한다.
응시(凝視) • 8
사랑이 없는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공한지(空閑地)
무화과(無花果)
상사화(相思花)
……
별이 뜨지 않는 하늘에는
사랑의 속삭임을 듣지 못하리라.
응시(凝視) • 9
불안하다 어쩐 일인지
시 한 줄에 삭아내리는 징한 눈물 같은 거
그저 자질구레한 잡사에 매달리는 관념
오존경보가 발령되어도 나는 모른 채
심상찮은 일들이 이 땅에 휩쓴다
어쩐지 내 몸에 번지는 핏빛 노을 같은 거
그냥 붉게 취해버린 죽음 같은 거
뒤틀리고 썩고 드디어 멸망하는 거
하, 불안하다 아마도 이 세상은
아픔 없인 쓸 수 없는 시 한 줄뿐이다.
응시(凝視) • 10
시야는 넓다
그러나 보이는 물체는 흐리다
저마다 생명의 몸짓
뜨거운 사랑의 몸짓
분명한 형체로 노래하지만
오관(五官)에 점지된 언어는 좁다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시야 밖으로 빗겨가는 화사한 기원
소망이며
행복이며 그리고
갑자기 근심진 너의 얼굴을 쳐다보지만
창공 저 높게 구름 한 점만 까맣다.
늦가을 산책 • 1
─단풍과 함께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화염에 휩싸인
그 자리
빨갛게 혹은 노랗게
진물로 녹아내린
무한의 조화
그것이 순명이고
또한 그것이 황홀한 꿈일지라도
어쩔 수 없이
내 여린 마음자락
그 자리 함께 불타는 신비
온몸으로 선혈을 감싸안고
아아, 그러하듯
진한 수액 한 모금에 젖어
저리도 눈부신 영혼
그 영혼을 위해 익어버린 육신
다시 예비하는 내생의 기원으로
이렇게 천지를 불태우고 있느니.
늦가을 산책 • 2
─낙엽길 걸으며
너의 푸석한 표정 속에
뜨거운 마음 한 조각 묻어본다
독한 술기운이 내 몸에 번지는 만큼
너의 온기 또한 그만큼만 식어가는데
밟히는 은행잎 노오란 웃음에서
푸른 윤회가 질펀하게 깔리고
허탈의 길섶에 켜켜이 쌓인 사랑은
또 다른 이별을 예감하나니
어디선가 매운바람 소리 한 점
가을나무에 운치 있게 걸려있구나
이제 아무 표정 벗는 무한으로
뜨겁게 삭아내릴 내 가슴처럼.
늦가을 산책 • 3
─억새꽃 따라
사랑을 잊지 못하는 누구의
넋이었나
지천으로 하얗게 흔들리는
지울 수 없는 영혼이었나
가슴 가득 안겨오는 향기 속으로
지나간 사랑의 선율이 흐르고
빛바랜 시간만
이곳에서 일렁이는 은색 물결
오, 시인이여
머물 줄 모르는 바람이여
언제까지
하얀 눈물 그대 품에 쏟으며
사랑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한 아름 말씀으로 회답하는
어느 시인의 독백
어떤 사랑의 고백.
늦가을 산책 • 4
─입동 무렵
무서리 저리 내린 채마밭 언저리
이맘때쯤 도지는 동통(凍痛)이 번진다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고춧잎 따라
마냥 움츠러드는 내 온몸의 한기(寒氣)
볏짚으로 감싸는 여린 나무들은
이제사 생명을 실감하는데
내면으로만 흐르는 진묽은 수액(樹液)
노을빛 절망으로 더욱 선연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겨울바람 소리
결핍된 긴 울음으로 지친 영혼들
무엇인가 간직해야만 할 기억 한 올
늦가을 산 그림자에 말리면서
그래, 헐벗은 자의 감춰둔 한으로
그 아픔을 예비하는 명상에 잠긴다.
늦가을 산책 • 5
─겨울 철새들 오다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벌써 저 흰 구름 사이로
한 무리의 새들이 비상하고
나의 보금자리는 어디일까 어디일까
양지쪽 둥지에서 졸고 있던 물새 몇 마리
문득 저 허공을 응시한다
갈대꽃 향기가 햇살을 멈추게 한다
강물이 얼기 시작하고
모두들 한가로운 동면을 기원하지만
훌쩍훌쩍 어디선가 찾아오는 새떼들
무채색의 물결을 투망하며
시방 긴 합창을 준비한다
영원한 섭리, 비로소 안식을 헹구는 낙원
(웬일일까, 후조(候鳥)들의 철 이른 귀로에서
옛날 무작정 상경한 내 모습이 얼비치고 있다.)
늦가을 산책 • 6
─들국화의 냉소(冷笑)
처음엔 자연의 섭리라고 여겼습니다
맹목으로 순종해야하는 이 땅의 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내가 웃을 수 있는 환한 모습으로
만유의 사랑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상강(霜降) 한로(寒露)의 절기가 저만치 멀었는데
서리는 그렇게 밤새도록 내렸습니다
서릿발이 그토록 무서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갑자기 나는 웃음을 잃었다는 자각증세가 왔습니다
얼굴 할켜 피멍이 들고 손발은 마비가 되어
이제는 꽃다운 자태가 아니었습니다
싸늘하게 굳어버린 들판 어디쯤에서
예비된 죽음을 떠올리는 시간만 길어졌습니다
그래, 나를 피해가는 인간들의 발자국 소리도
차츰 멀어지고 그래 그래 밤이면
초롱한 별빛 한 아름만 깊이 안겨오고 있었습니다
그저 이성을 잃은 내 곁에서 누군가 가볍게 흘린 말로
우리 사는 일들이 지나고 보면
그냥 쓴웃음일 뿐이라 일러주고
그 자리엔 윙윙 바람줄기가 세차게 맴돌고 있었습니다.
각인(刻印)
아버지─이 세상에 가녀린 생명으로 존재했다는 것과 피흐름의 세 줄기를 두었다는 것과 이제는 그에 대한 기억이 차츰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영원히 각인된 한 올의 숨소리를 엿듣는 것뿐이다.
그는 하늘, 늘푸른 하늘이었다
태양 눈부시게 언제나
한 울타리를 감싼 나팔꽃 언어로
지엄(至嚴)과 책무(責務)가 공존하는 사랑방
장죽 터는 소리소리
언젠가 그는 바람, 유유한 바람이었다
현해탄 문득 건너 해풍 속
히로시마 원자탄도 날려보낸 풍운아
그러나 낯선 어느 부둣가 노동판에서
순간에 휘감긴 팔뚝, 짧아진 그 핏줄
아아, 그러나
형은 일제 소학교 운동장에서
세살박이 나는 엄마 등에서
동생은 아직 미지의 생명에서
어렴풋이 들어본 해방의 저 함성, 아아
어느 날 그는 조용한 별빛이었다
겨우 부지한 산골 초가의 생명
─쟁기 써레 괭이 수군포 호미 낫 쇠스랑 삼태기 지게
한 떼의 구름을 갈아엎는 한 소절
밤이면 한으로 풀어지는 농군의 타령조
결국 그는 한 점 바람이었다가
밤하늘 홀로 몸서리치는 작은 별빛이었다.
그 비상, 그 혼불
─백파(伯坡) 홍성유(洪性裕) 선생 고희에
웅비의 나래 활짝 펴고
창공 저 햇살로 빛나리
거기에
지혜가 넘치고
슬기가 충만한 거기에서
우리는 불타는 청운을 보았느니
아아, 찬연한 필봉
불꽃으로 일렁이는 혼이여
이 산하 가득
뜨거운 가슴 속에 무르녹아
흐르는 정감
그 물결 따라
─맛있게 즐겁게, 즐겁게 맛있게
거대한 옥토가 무성하리
한 점 이슬
옥구슬로 영롱하리
우리 모두 영원히
그 비상, 그 혼불을 닮으리
천 년을 예감하는 우리의 학이여.
떠돌이 詩 1
─구이린(桂林) 서정
선녀들이 여기서 잠잤을까
신이 하사한
신비의 풍경화 한 폭
문득 나룻배에 앉아
신선이 되는 내 영혼
떠나고 싶지 않은 천상의 요람
그들과 함께 잠들고 싶다
오오, 구이린 천 년의 풍광(風光)이여.
떠돌이 詩 2
─도나우 강 야경
부다의 언덕에 올라
유유한 도나우 강 불빛을 보노라면
페스트에 건너가지 않아도
헝가리의 음악이 향기롭다
강물에 여장을 풀어놓고
적포도주 한 잔 나누면
베르헤지에는 황궁에서 불어오는
휘황한 춤의 선율
그렇다
억압의 역사 부다페스트는
도나우강물에 씻겨가고
이젠 밤으로 밤으로만 아름다운지고.
떠돌이 詩 3
─보스포러스 해협의 바람
어디로 갈까
이스탄불 심장부에서 유람선을 타고 흑해로 빠져나갈까
아니면 마르마라 해를 지나 아예 에게해로 멀리 갈꺼나
─위스퀴다르 가는 길에 부슬비를 맞았다네……
아직도 흑해쪽 바람살은 차갑고
골든 혼 어디선가 귀 익은 ‘위스퀴다르’ 가락이 들린다
옛 비단길의 종착지
아시아와 유럽, 적절하게 어우른
탈색된 그 신비, 여기저기 코발트빛 강물로 흐르는데
강 건너 언덕바지에는 석양에 잠겨버린 블루 모스크의 첨탑
그렇게 비잔티움의 영화는 전설로 남아
모슬렘의 여인이여, 외르튀(베일)만큼이나 신기롭다
멀리 콘스탄티누스도 이젠 떠나고
오스만제국의 술탄 마흐멧 황제도 고도(古都)에 묻혀
성 소피아 사원, 코란 독경 소리에 잠 깨는가
돌마바체 궁전, 상들리에 불빛은 지금 꺼졌지만
아, 이스탄불의 화려한 광채
이러하듯 동서양을 함께 밝히고 있나니.
떠돌이 詩 4
─쯔시마 섬(對馬島)에 가서
놀랍다
멀게 그들의 숨소리 우리와 닮아있다
해마다 거리를 누비는 ‘아리랑 축제’ 속 조선통신사 행령의 재현이 놀랍다
그들은 왜 한국의 역사를 기리고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비석으로 세웠을까
옛 이즈하라 성문인 고려문, 조선통신사의 표석, 조선통신사 행렬도 두루마리,
동제보살좌상, 신라 사신 순국비, 조선국 역관사조난 위령비, 조선 담당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의 성신교린비(誠信交隣之碑)……
그러나
수센지(修善寺) 절 옆에 외롭게 서 있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앞에는 누군가 꽂은 꽃송이 붉게 숙연하다
그날 저녁
토속주 한 잔으로 마음을 데우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을 그들과 합창하고 부산이 육안으로 보이는 듯 한국 전망대에서 그들은 우리를 향하고 있었다
밤 깊어
대한해협 쪽 환하게 출렁이는 어화(漁火), 이 초가을 가슴에 싱그럽다
아마도 그들의 체온은 우리 것인가 보다
바다 건너 떠나온 집 그리듯 그들이 더욱 놀랍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