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안에서 문안 합니다.
매월 첫째주 화요일과 셋째주 화요일은 구조분석 방법론을
함께 연구 할수 있도록 하신 성령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목사님들께서 동참하시여 성서의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 하겠습니다.
많은 은혜 받으시고 하나님만 자랑해 주세요.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아주 좋아 하세요.
주제절: 외울 말씀 10장 10절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1-4절 【하나님의 진노와 자비】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10:1 형제자매 여러분, 내 마음의 간절한 소원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내 동족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10:1 형제들아, 내 마음의 소원과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직역: 형제들아 나의 마음과 진실의 소원이 하나님을 위하여 향한 기도는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받게한다.
10:1 Ἀδελφοί, ἡ μὲν εὐδοκία τῆς ἐμῆς καρδίας
형제들아 그 실로 소원 그 나의 마음 과
καὶ ἡ δέησις πρὸς τὸν θεὸν ὑπὲρ αὐτῶν εἰς σωτηρίαν.
그리고 그 기도 향한 그 하나님을 위하여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받게한다.
주해
▣ 형제들아. - 아직 대면한 적도 없는 로마 교회 교인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혈통이 같은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울은 그들과 혈통적인 유대감을 갖고 있음은 물론 머리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가 됨을 생각하고 이러한 표현을 하는바 여기에는 깊은 바울의 애정이 담겨 있다.
▣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좋은 뜻'이란 일차적 의미를 가지며 주로 '기쁨', '소원' 등의 뜻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기쁨을 얻기 위해 어떤 부족한 것을 충족시키려고 갈망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다, 한편 '구하는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는 '기도'라는 일반적인 뜻의 헬라어 '프로슈케'와 구분되어 특별히 특정한 제목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일반적인 기도와 더불어 특정한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기도의 구분은 신약 뿐 아니라 구약에서도 이미 발견되는 것으로 전형적인 히브리적 용법이다. 이와 더불어 유사한 언어인 '유도키아'와 '데에시스'를 이중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심정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반복적 어휘 구사이다.
▣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 바울이 자신의 민족 이스라엘에 대해 가진 고통에 찬 근심은(롬 9:1) 결코 절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스라엘 속에도 아직 구원 얻을 자가 남아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속성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본절에서 바울은 그러한 자신의 논거에 의거해 다시 한 번 자기의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개역 성경이 작은 글씨로 표기하는 '이스라엘을'(투 이스라엘 에스틴)이라는 독법을 취하는 사본은 모스코 사본(K) 등 소수에 불과하다. 프리얼 사본(W), 알렉산드리아 사본(A), 바티칸 사본(B), 베자 사본(D), 보엘네리안 사본(G) 등 대부분의 유력한 사본들은 단지 '아우톤'이라는 단어만을 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아마도 본래 헬라어 성경에는 '아우톤'밖에 없었으나 후대의 서기관들이 이를 보다 알기 쉽게 설명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첨가한 서기관적 개선이 분명하다. 또한 '구원을 얻게 함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스 소테리안'이라는 표현은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구원의 원리를 밝히고 있는 롬 1:16,17의 사상에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는 롬 9 :30-10:13의 단락의 핵심이 롬 1:16,17의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사상을 그 배경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사도 바울이 본절에서도 이스라엘의 구원을 희구하는 것이 이스라엘만의 배타적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강조점은 남은 자로 표현되는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 속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포함된다는 사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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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10:2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10:2 내가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는데,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그것은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다.
직역: 왜냐하면 내가 계속해서 그들에게 증거한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을 가진다. 그러나 온전한 지식을 따라 것이 아니다.
10:2 μαρτυρῶ γὰρ αὐτοῖς
내가(계속해서)증거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ὅτι ζῆλον θεοῦ ἔχουσιν
것을 열심을 하나님의 그들이-가지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복)
ἀλλ᾽ οὐ κατ᾽ ἐπίγνωσιν·
그러나 아니다 따라 온전한 지식을 (온전함 야고보서 3:2 요한복음 17:23)
주해
▣ 내가 증거하노니. - 이에 대한 헬라어 원문은 '그들에게'(아우토이스)란 여격이 수반되는 구조를 지니는 전형적인 헬라어 용법이다. 이는 공개적인 법정에서의 법적 책임감과 엄격성을 내포하는 문장이다. 여기서도 이러한 표현은 바울이 이하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가 결코 자신의 사사로운 감정의 토로가 아니라 엄숙한 공적 증언임을 보여주고 있다.
▣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하나님께 열심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젤론 데우'의 문자적 번역은 '하나님의 열심'이나 여기서 사용된 소유격은 목적 소유격으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심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에 하나는 바로 사도 바울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분적으로 팔 일만에 할례를 받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며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 없는 자라고 자부할 수 있었던 개인적 삶의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구원의 방법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부합하지 않는 일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란 표현 속에 잘 드러난다. 한편 여기서 '지식'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그노시스'는 이를 나타내는 더욱 일반적인 단어인 '그노시스'와는 미묘한 차이가 나는 표현으로 신성과 결부된 철저한 지식을 의미한다. 즉 인간적인 지식과 비교할 수 없이 완전하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이러한 신성한 지식의 결여로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위한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를 함에 있어 방해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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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0: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10: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그들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다.
직역: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며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고 추구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의에게 복종하지 아니한다.
10:3 ἀγνοοῦντες γὰρ τὴν τοῦ θεοῦ δικαιοσύνην
알지 못하며 왜냐하면 그 그 하나님의 의를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καὶ τὴν ἰδίαν [δικαιοσύνην] ζητοῦντες στῆσαι, (부정사: 과거 능동태)
또한 그 자신의 의를 추구하면서 세우려고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복수)
τῇ δικαιοσύνῃ τοῦ θεοῦ οὐχ ὑπετάγησαν.
그 의에게 그 하나님의 아니다 그들이 복종케되지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3복)
주해
▣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 본문의 서두에는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왜냐하면'(가르)이란 말이 첨부되어 본절이 2절을 부연하여 바울이 유대인들의 지식 결여의 까닭을 설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유대인들이 알지 못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의를 말한다. 즉 이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그의 신성의 한 측면으로 가지고 계신 보편적 속성으로의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이라는 구체적 사실에서 나타나는 인간 구원을 구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극히 제한적인 자신들의 행위의 의를 중시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의에 순종하지 않았다. 한편 본절에서 '세우려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테사이'는 '위로 세우다'라는 뜻의 '히스테미' 동사의 부정과거 부정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기념물을 세우는 것을 표현한다. 이와 더불어 '힘써'(제툰테스)의 현재형 또한 그들의 자기 이름 세우는 과정이 집요하게 계속되는 것을 표현해 주는 말이다. 그리고 '자기'(이디오스)라는 단어는 그 자체가 강조적인 의미로서 인간 스스로의 힘을 의지하는 '자신'(自身)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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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0:4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사람을 의롭게 해주시려고 율법에 끝마침이 되셨습니다.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이 의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
직역: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의를 위하여 율법의 완성이다.
10:4 τέλος γὰρ νόμου Χριστὸς
완성 왜냐하면 율법의 그리스도는
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 παντὶ τῷ πιστεύοντι.
위하여 의를 모두 그 믿는(확신) (분사: 현재 능동태 여격 단수)
주해
▣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본절에서 바울은 3절의 '하나님의 의'를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즉 하나님의 의에 있어서 주체 혹은 근원은 바로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가 행하신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구분 없이 모든 믿는 자(새로운 이스라엘 혹은 남은 자로 자주 표현됨)들을 위한 것이었다. 한편 '마침'의 헬라어 '텔로스'가 '끝' 혹은 '목표'라는 이중적인 어의(語義)를 내포하고 있어 본절이 두 가지로 해석되었다. ① 그리스도는 율법이 의도하는 목적이요 의미라는 견해이다. ②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구속 사역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으며 율법을 종결지었다는 견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인간을 구원하는데 필요한 하나님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것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권능을 힘입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율법의 요구에 충실하려는 노력이나 율법의 정죄가 있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후자가 보다 타당한 견해인 듯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의와 유대인들의 자기의 혹은 율법의 의는 명백한 대조가 있다. 그 대조를 다음 절 이하에서 비교할 수 있다.
로마서 10장 6-8절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대조】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5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h)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h. 레18:5)
10:5 모세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으나
직역: 왜냐하면 모세가 율법에 의한 의를 기록한다. 그 율법을 행하는 그사람은 그가 그 율법으로 살것이다.
10:5 Μωϋσῆς γὰρ γράφει τὴν δικαιοσύνην τὴν ἐκ [τοῦ] νόμου
모세가 왜냐하면 기록한다 그 의를 그 의한 그 율법에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ὅτι ὁ ποιήσας αὐτὰ ἄνθρωπος ζήσεται ἐν αὐτοῖς.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 3단)
것을 그(분) 행하는 그것(율법)을 사람은 그가 살 것이다 으로 그것들(율법) (분사: 과거 능동태 주격 단수)
주해
▣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수여자 혹은 대표자로 인식되고 있는 모세의 율법의 성격을 한 마디로 요약한 표현으로서 레 18:5의 인용이다. 그러나 레 18:5 이외에도 구약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율법에 대해 규정하는 이러한 표현은 결국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부여하신 율법의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에 관해 바울이 자주 취하는 부정적 이미지는 이곳에서 발견할 수 없다. 즉 여기서는 율법 그 자체는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의로운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부패한 본성을 타고난 인간은 율법을 완전히 행하여 의를 얻을 수는 없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바벨론 포로 후 시대부터 그러했던 대로 규정을 임의로 정해 놓고 그것을 지키기만 하면 율법을 다 준수했다고 간주하는 것으로는 지킬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 인간의 심령의 상태까지도 규정하는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육신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약은 이미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외치면서 믿음의 의를 암시하였고(신약의 많은 구절들도 더욱 명백하게 율법의 의가 믿음의 의와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 '행하는 사람'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사스 안드로포스'에서 '행하는'에 해당하는 '포이에사스'는 '행하다'란 의미의 동사 '포이에오'의 부정 과거분사로서 이를 직역하면 '행한 자'가 된다. 이 시제는 그 자체가 지금까지 율법을 완전히 지켰던 자가 없었다는 암시를 해준다. 이러한 율법의 의가 믿음의 의와 구별된다는 진술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율법을 지키면 의에 이르도록 주신 것이지만 그들이 지키지 못했으므로 신약 시대에 이르러 믿음의 의를 또 다시 주었다는 세대 간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점진적인 계시의 한 방편으로 주어졌고 이미 믿음의 의의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되어야 하므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아직 믿음의 의를 알지 못하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의 본질을 밝혀 믿음의 의를 소개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법을 약속하신 대로 그것이 성취되었고, 이제 구원의 방편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말미암는 믿음인 것을 그들이 이해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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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6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i)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 말아라.(그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i. 신30:12)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한다. "너는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마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 것이다.
직역: 그러나 믿음에 의한 의는 그가 이같이 말한다. 네 마음 안에서 말하게 된다면 하지 말라. 누가 하늘 위로 어떻게 올라갈것이냐? 이것은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것이다.
10:6 ἡ δὲ ἐκ πίστεως δικαιοσύνη οὕτως λέγει·
그 그러나 의한 믿음(확신) 의는 이같이 그가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μὴ εἴπῃς ἐν τῇ καρδίᾳ σου·
말라 말하게 되면 안에 그 마음에 네 (동사: 명령법/가정법 과거 능동태 2단)
τίς ἀν αβήσεται εἰς τὸν οὐρανόν;
누가 어떻게 올라 갈 것이냐 위로 그 하늘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τοῦτ᾽ ἔστιν Χριστὸν καταγαγεῖν·(부정사: 과거 능동태)
이것은 이다 그리스도를 끌어내리려는 것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 5절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와 전적으로 대조되는 표현이다. 여기서 '말미암는'에 해당하는 전치사 '에크'는 '~로부터', '~로서 나온'(이라는 뜻으로 '기원' 혹은 '유래'를 뜻한다. 진정한 의는 바로 '믿음에 기원하는 것'인데, 이는 이미 4장에서 아브라함이 율법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증명한 대로 신약이나 구약의 '믿음을 통한 구원의 길'은 동일하다. 한편 5절에서 모세를 율법의 대표자로 등장시킨 것에 병행시키기 위해 본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의인화시켜 '이같이 말하되'(후토스 레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결국 이 구절은 '성경이 믿음의 의에 관하여 말씀하시되'라는 의미를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이다.
▣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 본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모세의 말을 자유롭게 인용해서 자기의 주장을 입증한다는 견해도 있지만 5절에서 인용한 레 18:5에 대한 대조 구절로서 신 30:11-14에서 인용된 것이다. 특이한 것은 신명기에서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의 백성은 그 율법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서 레 18:5의 의미와 별로 다르지 않은데도 바울은 이 말씀을 믿음의 의로 설명한다는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신의 논지를 보다 분명히 전달하기 위하여 구약 본문에서 '행하게 할 것'이라는 표현들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여 '율법의 의'라는 요소를 배제하는 기교적 인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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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7 또 j) 누가 k) 지옥에 내려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이다.)"
10:7 또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라고 말하지 마라.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직역: 혹 누가 무저갱으로 내려 갈것인가? 이것은 그리스도를 죽은사람들 중에 모셔 올리려는 것이다.
10:7 ἤ· τίς καταβήσεται εἰς τὴν ἄβυσσον;
혹 누가 내려갈것인가? 으로 그 무저갱 (동사: 직설법 미래 중간태/디 3단)
τοῦτ᾽ ἔστιν Χριστὸν ἐκ νεκρῶν ἀναγαγεῖν. (부정사: 과거 능동태)
이것은 이다 그리스도를 중에서 죽은사람들 모셔 올리려는 것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 사도 바울이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믿음의 길을 밝혀주는 계시가 보다 가까이에 있다는 진술로 구원을 위해, 즉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메시야의 개인적인(구원을 확인하려는 사람에게) 임재를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의 길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훨씬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음의 의를 위해서는 메시야를 찾아 하늘로 올라가거나 음부로 내려가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구원을 위한 참으로 어려운 그 일은 연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이 성취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미 성육신 하시어 이 땅에서 사셨으며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음부의 고통을 체험하셨고 또한 승천하셔서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이를 완성하셨다. 즉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인간들 가운데 거하시며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상태임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위해 다시 내려오실 필요는 없으며, 인간 역시 구원을 위해 하늘에 올라갈 것도 음부에 내려갈 것도 없다. 구원의 길은 어떠한 행위도 아닌 믿음만으로 가능한 것이다. 한편 '모셔 올리려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가게인'은 '끌어올리다' 라는 의미로 예수의 부활에 적용된 단어이다. 특히 부정사가 사용된 것은 '목적'(目的)의 의미이고 예수께서는 이미 부활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다시 일어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절대로 일어날 수도 없다는 완전한 불가능성이 강조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한편 신 30:13에 는 '바다 밖'이라고 표현된 단어가 본절에는 '음부'(아뷧소스)라고 표현되었는데, 이 표현은 죽은 자의 영이 머무는 곳으로 여겨졌던 히브리어 '스올'과 거의 동의어적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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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0:8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 a)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a. 신30:14)
10:8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 가까이에 있으니,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직역: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네게 말씀이 가까이 있다. 그리고 너 입 안과 너의 마음 안에 있다. 이것은 우리가전파하여 온 바 믿음의 말씀이다.
10:8 ἀλλὰ τί λέγει;
그러면 무엇을 그것은-말하는가?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ἐγγύς σου τὸ ῥῆμά ἐστιν ἐν τῷ στόματί σου
가까이 네게 그 말씀이 있다 안에 그 입 너의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αὶ ἐν τῇ καρδίᾳ σου,
그리고 안에 그 마음 너의
τοῦτ᾽ ἔστιν τὸ ῥῆμα τῆς πίστεως ὃ κηρύσσομεν.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복)
이것은 이다 그 말씀이 그 믿음(확신)의 바 우리가전파하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주해
▣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바울의 상용구로서 앞에서 언급한 부정적인 접근 방법에서 벗어나 지금까지 논의한 문제의 결론적 요약을 제시하기 위한 도입부이다.
▣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신 30:14을 인용해 온 것이 거의 확실한 이 구절은 바로 6절부터 거론되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의미를 결론적으로 확증해 주며, 신 30:12-14의 진정한 의미도 반영해 준다. 그러나 신명기 뿐 아니라 구약 전체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과 교훈들은 멀리 있어 지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입으로 말하며 마음에 간직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이 믿음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받아들여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한편 바울이 신명기 본문에 추가시켜 본문의 결론으로 삼은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는 구절은 매우 많은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먼저 '믿음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테스 피스테오스'의 소유격은 단순히 소유의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목적 소유격으로서 단순히 믿음이 언급되는 말씀이란 의미가 아닌 '믿음과 직결된, 믿음에 관한'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말씀'의 헬라어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며 때로는 그리스도 인격 자체를 의미하기도하는 '로고스'가 아닌 순수한 말씀 자체를 가리키 는 '레마'인데, 이로 보아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인격 그 자체 보다는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에 관해 전파하는 말씀을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말씀'의 특징은 '전파하는'이라는 뜻의 '케륏소멘'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이 용어는 초대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사용된 전문 용어 '케뤼그마'에서 차용해 온 것으로 곧 바울 자신을 비롯한 사도들과 복음 전파자들이 전하는 바로 그 말씀을 가리킨다.
로마서 10장 9-13절 【믿음이 어떻게 역사하는가?】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9 입으로 예수는 주님이라고 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직역: 네가 만일 너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죽은자들 가운데 예수를 살아나게 하신 것을 너의 마음으로 네가 믿게된다면, 너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10:9 ὅτι ἐὰν ὁμολογήσῃς ἐν τῷ στόματί σου κύριον Ἰησοῦν
때문이다 만일 네가 고백하면 으로 그 입 너의 주 예수님을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2단)
καὶ πιστεύσῃς ἐν τῇ καρδίᾳ σου
그리고 네가 믿으면 으로 그 마음 너의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2단)
ὅτι ὁ θεὸς αὐτὸν ἤγειρεν ἐκ νεκρῶν,
것을 그 하나님이 그를 살아나게하셨다 부터 죽은자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σωθήσῃ·
너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2단)
주해: 본절은 6-8절의 내용을 받아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그 방법이 요약적으로 10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 외적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이 믿음을 통한 구원의 필요 요소임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는 이미 고대 신비종교의 신들인 오시리스나 이시스에게 적용되었던 점을 들어 예수에 대한 '주'라는 칭호가 헬라종교의 영향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주로 종교사학파에 속하는데, 이들은 세례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롭다 여기시는 '칭의'의 개념보다는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결합한다는 헬라주의적 신비사상을 성경에 접목시키려 한다. 하지만 슈바이쩌에 의해 증명된 대로 초대 교회의 모습은 헬라적 사상이 아닌 유대주의적 사상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주장은 수용하기 어렵다. 예수에 대한 '주'라는 칭호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을 '주'(아돈)로 호칭하던 것과 연관하여 예수 역시 하나님으로서 선재(先在)하시며 초월(超越)하신 동시에 내재(內在)하신 성육신(成肉身)하여 이 땅에 임하신 하나님으로 보고 그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의 호칭을 붙임과 동시에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칭호인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주되심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 죽음, 부활에 이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까지 통칭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따른 단계적 인용, 이러한 여러 증거로 볼 때 예수에 대한 '주'라는 호칭은 초대 교회의 세례문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그들의 신앙 고백을 반영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한편 '시인한다'는 표현은 '호몰로게오'로서 '같은'이란 의미의 '호모스'와 '말하다'란 의미의 '레고'의 합성어이다. 즉 '같은 것을 말하며 동의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 표현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심문하는 관리들 앞에서 성도들이 신앙을 고백하는 곧 공적 의미가 강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렇게 특수한 의미로 한정할 필요는 없고 굳이 한정한다면 오히려 세례 시에 행하여지는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고백이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 복음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내적 믿음이 구원의 필수 조건임이 제시되고 있다. 즉 여기서 제시되고 있는 이 구속의 사건은 이미 이루어진 일이므로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떤 행동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이 일을 이루신 예수에 대한 신뢰, 즉 이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에 이 를 수 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한편 '마음에'라는 표현은 본절 초두에 '입으로'와 더불어 앞절(9절)에서 인용된 말씀과 평행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것을 굳이 각각 내면적 인 믿음과 외향적인 시인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으며 단지 중언법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 구원을 얻으리니. - 신앙 고백의 결과는 구원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구원이 입으로 한 외적 시인에 전적으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시인은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수의 중요한 가르침을 사도 바울도 본절에서 염두에 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신실한 신앙 고백 없는 믿음 역시 의심스럽기는 매 한가지다.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내적 믿음과 아울러 외적 시인이 결부된 전인적(全人的) 신앙의 상태이어야 한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0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릅니다.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
직역: 왜냐하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지게된다. 의를 위하여 그리고 입으로 고백하게 된다. 구원을 위하여
◐ (동사: 현재 수동태) 지금 마음으로 믿으면, '수동태' 의롭게됨, 지금 입으로 고백하면, '수동태' 구원받음 ◐
10:10 καρδίᾳ γὰρ πιστεύεται εἰς δικαιοσύνην,
마음으로 왜냐하면 그가믿어지게된다 위하여 의를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στόματι δὲ ὁμολογεῖται εἰς σωτηρίαν.
입으로 그리고 고백하게 된다 위하여 구원을 (동사: 직설법 현재 수동태 3단)
주해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병행을 이룬다. 또한 본절에서 믿음과 시인의 결과로 언급된 '의'(디카이오쉬네)와 '구원'(소테리아)도 병행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한 가지 사실의 강조를 나타낼 뿐 그 의미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의'의 결과가 '구원'이며 구원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의롭다 함을 얻은 자만이 이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마음'(카르디아)은 바울에게 있어 지성과 분리된 감정의 자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되는 인격의 중심지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절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 또한 인격적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함을 보여 준다. 따라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므로 본절은 9절과 그 순서가 바뀌어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의 양측면적 언급에는 어떠한 우선 순위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논리적인 순서로는 입으로 시인하기에 앞서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한편 '믿어'(피스튜에타이)와 '시인하여'(호몰로게이타이) 동사가 수동태인 것은 믿음의 근본적 동인(動因)이 바로 하나님임을 시사해 준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1 성경은 b)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말합니다. (b. 사28:16(70인역))
10:11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그분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직역: 왜냐하면 그 성경이 말씀하신다. 그에 대하여 믿는 사람마다 조금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한다.
10:11 λέγει γὰρ ἡ γραφή·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그 성경이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πᾶς ὁ πιστεύων ἐπ᾽ αὐτῷ οὐ καταισχυνθήσεται.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마다 사람 믿는(확신) 대하여 그에 아니다 조금도부끄러움을당하지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주해
▣ 성경에 이르되. - 롬 9:13. 17 주석 참조.
▣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 롬 9:33에도 인용된바 있는 사 28:16의 인용이다. 다만 '누구든지'(파스)라는 단어가추가되어 믿음의 보편성이 한층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강조는 4-10절까지에서 이미 유대인에게 한정되지 않은 믿음의 보편성을 밝힌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고 12,13절에서 더욱더 확실히 부연하기 위한 준비로도 볼 수 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2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꼭 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시고, 그분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부요함이 되신다.
직역: 왜냐하면 유대사람이나 헬라사람이나 둘다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주님이 같고, 그를 간절히 부르는 그 사람들을 향하여 모두에게 부유함이 되신다.
10:12 οὐ γάρ ἐστιν διαστολὴ Ἰουδαίου τε καὶ Ἕλληνος,
아니다 왜냐하면 이다 차별이 유대사람 둘다 그리고 헬라사람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ὁ γὰρ αὐτὸς κύριος πάντων,
그 왜냐하면 같고 주님이 모든사람의
πλουτῶν εἰς πάντας τοὺς ἐπικαλουμένους αὐτόν· (분사: 현재 능동태 주격 단수)
모두에게 향하여 부유하며 그(사람들) 간절히 부르는 그를 (분사: 현재 능동태 대격 복수)
주해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11절에서 바울 사도가 강조적으로 표현한 믿음의 보편성에 대한 이유를 본절이 제시한다. 이러한 사실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원문에는 '왜냐하면'으로 번역되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 '가르'가 문두에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본서는 일관되게 구원의 기회에서 유대인 외의 이방인들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롬 11장 연구자료, '이스라엘에서 세계 만민에로의 구속사의 확장'을 참조하라. 유대인들은 이방사람들 중 유대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였고 할례를 행함으로써 그들 공동체에 소속될 수 있게 했지만 여전히 순수 유대인들만이 율법의 특별한 은혜를 얻고 있다는 우월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믿음의 도(道)에 있어서는 유대인들이 우월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막힌 담을 헐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솰롬)를 가져오는 분이시다.
▣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 바울은 3:29,30에서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며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데 있어서도 할례자나 무할례자가 구별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똑같은 원리로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 주(主)가 되신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함이라고 증거한다. 한편 루터는 이 '주'가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나 9절에서 예수가 '주'로 불리는 것과 이어 나오는 13절의 요약적 진술을 볼 때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한편 '부요하시도다'가 구원의 특징으로 묘사된 것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부요를 동시에 가지신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부함을 구원에 동참하는 자들이 은혜로 누리게 됨을 가리킨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게된 결핍과 부족함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풍요를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상태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0:13 c)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c. 욜2:32)
10:13 "누구든지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직역: 왜냐하면 누구든지 모두가 예수를 간절히 부르게 된다면, 그사람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10:13 πᾶς γὰρ ὃς ἂν ἐπικαλέσηται
모두가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가 간절히부르다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 3단)
τὸ ὄνομα κυρίου σωθήσεται.
그 이름으로 주님의 그는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동사: 직설법 미래 수동태 3단)
주해
▣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 10절이 전절의 반복임과 동시에 강조적인 요약이듯 본절도 11,12절의 요약적 진술이다. 즉 바울은 구약의 욜 2:32을 인용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공식적 문구로서 원래 요엘서의 이 구절에서도 이 표현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나, 사도 바울은 이를 보다 확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 받을 분으로 묘사하며 본절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고 그에게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을 드릴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신약 성경이 기록된 초대 교회 시대에도 이미 이스라엘과 맺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어 더욱 풍성한 양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는 구원사적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즉 초대 교회 시대 때부터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대속자로 보내신 예수를 자신의 주로 삼아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신앙 고백이기도 하며 특히 공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서 10장 14-21절 【만민을 위한 구원은 어떻게 역사하는가?】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4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
10:14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느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느냐?
직역: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였던 그분을 향하여 어떻게 간절히 부르리요. 또 그들이 그분을 듣지 못한 바 믿으리요. 또 그들이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들으리요.
10:14 Πῶς οὖν ἐπικαλέσωνται
어떻게 그런즉 그들이-간절히부르리요 (동사: 가정법 과거 중간태 3복)
εἰς ὃν οὐκ ἐπίστευσαν;
향하여 바 그분 아니하였던 믿지 않는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πῶς δὲ πιστεύσωσιν
어떻게 또 그들이 믿으리요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οὗ οὐκ ἤκουσαν;
바 그분을 듣지 못한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πῶς δὲ ἀκούσωσιν χωρὶς κηρύσσοντος;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단수)
어떻게 또 그들이 들으리요 자가 없이 전파 하는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주해 구원이 오직 믿음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한 사도 바울은 이제 본절과 15절에서 선교의 문제로 논의를 전환하며 그 선교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 교회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자신의 서바나 선교를 지원해 줄 것을 로마 교회에 요청하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방인에 대한 선교가 정당하며 자신이 바로 그 일을 맡은 자임을 역설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도를 말한 후의 적절한 문맥에 이르자 이러한 선교 정신을 로마 교회교인들에게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마음으로 믿는 것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의 관계를 언급한 10절을 고려하며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부름에 앞서는 믿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부르고 예배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분이며 자신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한편 '저희가'라고 개역 성경이 번역하는 이 문장의 주어가 원문에서는 불분명하다는 사실이 해석상의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많은 학자들은 '저희가' 바로 이스라엘 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도 하며, 어떤 번역 성경은 '사람들'이라고 주어를 임의로 삽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19-21절에 이르러서 이스라엘 이라는 단어를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이는 사도바울이 임의의 독자들 각자를 대상으로 하여 믿고 예배하며 선교할 것을 요구하는 수사학적 기법이라고 볼 수도 있다.
▣ 듣지도 못한 바를 어찌 믿으리요. -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 지식을 얻어야 한다. 복음에 대한 지식이 반드시 듣는 방법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초대 교회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즉 당시에는 신약 성경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단편으로 된 서신들만이 교회의 회람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또한 구약의 사본 또한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에 말씀을 듣는 방법이 가장 보편적인 복음의 진리를 전수받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말씀의 선포 혹은 가르침을 통한 방법이 믿음의 첩경임을 밝히는 것이다.
▣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 이 구절을 가리켜 로마 카톨릭 교회 학자들은 바울이 자신이 가진 사도직의 권위를 로마에 사는 교인들에게 천명하기 위해 본 단락을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부름-믿음-들음'으로 연결되는 일반적인 구원의 과정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이 부분에 이르러 특별히 자신이 아니더라도, 말씀을 전파하는 자를 언급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또한 이곳에 기록된 '전파하는 자'가 전후 문맥에 있어서 바울 자신을 한정하는 것이 아님을 보아도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일반적인 구원의 순서와 선교의 과정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전파하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케륏손토스'가 관사가 없는 분사형으로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실제로 초대 교회 당시 사도들만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집사들이나 혹은 이름 없는 수많은 전도자들이자신들의 생업을 따라 주거지를 이동하거나, 여행 할 때에도 복음을 전파했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0:15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 성경에 기록된 바 d)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d. 사52:7)
10:15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파하겠느냐? 기록된 것과 같으니,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하였다.
직역: 또 그들이 만일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면 어떻게 전파하리요. 이와 같이 기록되어져 왔다. "좋은 일들을 전하는 발들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고
10:15 πῶς δὲ κηρύξωσιν ἐὰν μὴ ἀποσταλῶσιν; (동사: 가정법 과거 수동태 3복)
어떻게 또 그들이전파하리요 만일 아니하면 보내심을받지 (동사: 가정법 과거 능동태 3복)
καθὼς γέγραπται·
같이 그것이 기록되어져왔다 (동사: 직설법 완료 수동태 3단)
ὡς ὡραῖοι οἱ πόδες τῶν εὐαγγελιζομένων [τὰ] ἀγαθά.
얼마나 아름다운 그 발들이 그(들의) (복음을)전하는 그 좋은일들을 (분사: 현재 능동태 속격 복수)
주해
▣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선교의 마지막 단계요 근본적인 점이 소개되고 있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들은 스스로 그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보내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스탈로신'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증거하면서 특징적으로 강조하는 용어로서, 바울이 자신의 의견을 임의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낸 자의 메시지를 그대로 충실하게 전달하는 대리자란 사실을 반영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 보내심이 예수의 12사도의 특별한 직분에만 한정된다고 볼 필요는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이 표현은 하나님에 의해 보내어진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적용되고, 바나바, 주의 형제 야고보, 실루아노와 디모데등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앞절과 마찬가지로 바울 자신의 사도직만을 한정하여 암시하는 것으로볼 필요는 없다. 즉 본 문맥에서 다루는 선교의 과정은 보다 일반적인 언급인 것이 분명하다.
▣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거의 그렇듯이 자신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구약의 인용구로 단락을 맺는다. 한편 이 말씀은 사 52:7의 인용으로 본래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이스라엘의 회복이 가까왔음을 선포하는 내용인데, 이러한 구약의 문맥을 바울이 그리스도에 관한 자신의 복음 전파 내용과 접합시키기 위해 헬라어 역인 70인역 대신 히브리 본문을 직접 요약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역사적인 이스라엘 회복의 예언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관련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과 해방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가능하게 되었다는 구속사적 해석이 역시 여기에도 반영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사야서의 본문에서 밝히는 원래의 의미인 적으로부터 해방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빨리 달려 산을 넘기도 하는 이러한 묘사는 복음 전파자의 열정이 실제적인 선교를 가능하게 함을 보여 준다. 이처럼 본문은 이러한 전도자들의 뜨거운 복음에의 정열이 생동할 매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급속히 전파될 것이고 궁극적으로 유대인들에게도 파급될 수 있다는 바울의 소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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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0:16 그러나 모든 사람이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님, 우리에게서 들은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10:16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아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였다.
직역: 그러나 그들이 모두 복음에 손종하지 아니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말한다. 주여 누가 우리가 전한 소식을 믿었습니까?
10:16 Ἀλλ᾽ οὐ πάντες ὑπήκουσαν τῷ εὐαγγελίῳ.
그러나 아니다 모두가 그들이순종하였다 그 복음에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Ἠσαΐας γὰρ λέγει·
이사야가 왜냐하면 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κύριε, τίς ἐπίστευσεν τῇ ἀκοῇ ἡμῶν;
주여 누가 믿었습니까?(확신) 그 소식(교훈) 우리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주해
▣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 여기서 '저희'는 유대인을 가리킨다. 한편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는(A.D. 57년경) 이미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지방에 대한 1,2,3차 선교 여행을 마친 후였다. 따라서 복음의 전 세계적 전파의(유대인과 이방인을 포괄하는) 기틀이 이미 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나타난 현실로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불신앙하였던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 '다'(판테스)라고 표현한 것은 강조법으로 볼 수 있다. 즉 바울이 이렇게 표현한 것은 대다수의 유대인이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실제적인 면과 더불어 이것이 너무나 안타까왔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 사 53:1의 70 인역의 인용이며 여기서 '주여'(퀴리에)라는 말은 히브리 본문에는 없는 70인역이 첨가한 단어이다. 원래 사 53장은 52장부터 시작된 주의 종의 노래가 진전되면서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묘사로 도입되는 부분이다. 또한 그 서두를 여는 1절에 나오는 이 표현은 그 고난의 종에 대한 메시지를 과연 누가 믿을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구절이다. 즉 이 질문 속에는 이스라엘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신 메시야를 이해하지 못하고 거부하리라는 의미를 짙게 함축하고 있다. 예수의 공생애 사역 기간 동안 그가 유대인들에게 배척된 사실이 이러한 예언이 사실로 성취되었음을 증명해 준다. 특히 요 12:38이 예수께서 예루살렘 사역 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를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은 것을 설명하기 위해 본절과 동일하게 사 53:1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점을 명확히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전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코에'는 '듣다'라는 뜻의 '아쿠오' 동사의 명사형으로 '들려진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메시지' 혹은 '보고'의 의미로 쓰였으며 특징적인 것은 17절에서 두 번 사용된 '들음'이란 단어와 같은 형태라는 사실이다. 즉 바울은 계속 들음의 중요성 곧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를 중복적으로 표현한다. 본 절에서는 특히 이러한 복음 전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불순종함을 안타깝게 생각함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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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g)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직역: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으로 부터 그리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하여 된다.
10:17 ἄρα ἡ πίστις ἐξ ἀκοῆς,
그러므로 그 믿음(신뢰)은 부터 들음
ἡ δὲ ἀκοὴ διὰ ῥήματος Χριστοῦ.
그 그리고 들음 통하여 말씀들 그리스도
주해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바울은 본 장에서 계속 거론되고 있는 믿음을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에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불순종을 추궁하는 유일한 근거도 바로 이 '복음을 들음'에 당연히 뒤따라야 할 반응이 없다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관성이 16절에서 '전하는바'에 사용된 단어가 본절의 '들음'과 동일하게 사용된다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한편 이때 사용된 헬라어 동사 '아코에'는 절에서는 수동적인 의미로 쓰였으며, 본절에서는 능동적 의미로 쓰였다고 구분하는 학자도 있으나 추측일 뿐 문법상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포된 의미로 따진다면 16절이 능동적인 것으로 사역적 의미를 포함하는 '듣게 한 것', 즉 전한 것이고 본절은 '선포되어 들린다'는 수동적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이 두 구절은 모두 믿음은 전파하여 듣게 된 메시지로부터 생겨난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강조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리고 본절에서 들음의 대상이 되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레마토스 크리스투'는 사본상의 문제와 아울러 '크리스투'라는 속격을 해석하는 문제에 있어 다른 견해가 있다. 먼저 사본상의 문제에 있어 알렉산드리아 사본(A), 모스코 사본(K), 풀피리안 사본(P), 아도스 사본(A)등 비교적 권위가 적은 사본들은 '하나님의'란 뜻이 있는 '데우'라는 독법을 취하고 시내산 사본(H), 바티칸 사본(B), 에브라임 사본(C), 베자 사본(D)등 보다 권위가 있는 사본들은 개역 성경과 마찬가지로 '크리스투'라는 독법을 취한다. 그러나 9,11,12절 등에서 '주'를 그리스도로 묘사하는 문맥을 고려해 볼 때, 그리고 이 부분의 주된 내용이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대한 복음이란 점에 있어서도 후자의 독법이 바람직한 듯하다. 그리고 속격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를 목적 속격으로 보면 '레마토스 크리스투'는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는 의미가 되어 '들음의 내용'을 가리키게 된다. 그리고 이를 단순 속격으로 보면 '그리스도의 말씀'이 되어 복음의 출처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지적해 준다. 즉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전파해야만 믿음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 준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양 견해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지나 14절의 내용과 논리적으로 부합한다는 면에서 후자가 보다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절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은 믿음을 가능케 하는 복음의 도구(디아)의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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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8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10:18 그러면 내가 묻습니다. 그들은 들은 일이 없습니까 ?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에 h)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지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퍼졌다" 하였습니다. (h. 시19:4(70인역))
10:18 그러면 내가 묻겠다.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의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들의 말이 땅 끝까지 이르렀다." 하였다.
직역: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말한다. 그들이 도무지 듣지 아니하였으냐? 그렇지 않다. 그들의 소리가 모든 땅 안으로 그리고 그들의 말씀들이 세계의 끝 안으로 퍼져나갔다.
10:18 ἀλλὰ λέγω,
그러나 나는(계속해서)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μὴ οὐκ ἤκουσαν; μενοῦνγε·
도무지아니하였느냐 그들이 듣지 그렇지않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복)
εἰς πᾶσαν τὴν γῆν ἐξῆλθεν ὁ φθόγγος αὐτῶν
안으로 모든 그 땅 펴져나갔다 그 소리가 그들의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καὶ εἰς τὰ πέρατα τῆς οἰκουμένης τὰ ῥήματα αὐτῶν.
그리고 안으로 그 끝들 이 세계의 그 말씀들이 그들의
주해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 17절에서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데서 비롯된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한 후에 바울의 논지는 이스라엘이 그 가장 기본적인 행위도 하지 않았음을 통박하는 질문으로 나아간다. 즉 바울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불순종에 대한 책임을 변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이 부분에서 명시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메 우크 에쿠산)에서 부정사 '메'와 '우크' 2개를 사용하여 이중 부정을 나타내어 유대인들이 듣지 못했을 리가 결코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점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따라서 17절과 달리 본절의 '들음'은 반드시 '주의 깊게 듣는 경청'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주의 깊게 듣는다면 그 사람은 믿음에 이를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 바울이 유대인들의 핑계를 봉쇄하고 복음 선포의 보편성을 증거하기 위해 인용한 이 구절은 시 19:4의 인용이다. 하지만 엄격히 따지자면 시편 19편에 있어서 이 구절은 본절의 인용에 있어 적합한 '구원에 관한 특별 계시의 보편적 전파'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시편 19편의 구조는 '창조의 섭리를 찬양'하는 데 있어서 일반 계시와 특별계시를 들어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들은 말씀은 일반 계시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유대인의 책임을 추궁하는 바울의 논증은 한없이 빈약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시편 기자의 의도나 성경 전체의 사상에 있어서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아니며 바울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에 착안해야 할 것이다. 이 두 계시는 상호보족적(相互補足的)이라는 견지에서 바울은 그가 늘 그러하듯이 구약을 엄격히 인용하기 보다는 종말론적인 구원사의 전개 과정을 보다 명확히 밝히기 위해 복음 전파의 보편성으로의 의미 전도를 신도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바울이 복음의 편만함을 증거하는 것은 그가 바라보는 선교의 관점으로도 이해해야 한다. 그는 소아시아와 마게도냐 지경의 큰 간선도로를 따라 큰 도시들을 중심으로 선교했다. 그리고 그의 선교 역사에 있어 빌립보가 중요한 것은 빌립보가 로마로 이르는 군사도로에 위치했다는 점에 있다. 곧 바울 사도의 빌립보 당도는 선교 전략상 로마로 향할 수 있었던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까지 복음을 '편만하게'(퀴클로, '둥그렇게 가득채웠다'라는 뉘앙스) 했다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자신의 선교적 관점에서도 복음은 온 땅에 퍼졌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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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9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10:19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i)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 (i. 신32:21)
10:19 내가 또 묻겠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말하기를 "내가 백성 아닌 자를 통하여 너희가 시기하도록 하고, 미련한 백성을 통하여 너희가 분노하게 하겠다." 하였고,
직역: 그러나 나는 계속해서 말한다. 도무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느냐? 모세가 먼저 항상 말한다. 내가 백성 아니 자를 의하여 너희를 시기나게 할 것이다. 내가 미련한 백성을 의하여 너희를 노엽게 할 것이다.
10:19 ἀλλὰ λέγω,
그러나 나는(계속해서)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μὴ Ἰσραὴλ οὐκ ἔγνω;
도무지 이스라엘이 못하느냐 알지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3단)
πρῶτος Μωϋσῆς λέγει·
먼저 모세가 (항상)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1단)
ἐγὼ παραζηλώσω ὑμᾶς ἐπ᾽ οὐκ ἔθνει,
내가 시기나게할 것이다 너희를 의하여 아닌 백성이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ἐπ᾽ ἔθνει ἀσυνέτῳ παροργιῶ ὑμᾶς.
의하여 백성에 미련한 내가노엽게할것이다 너희를 (동사: 직설법 미래 능동태 1단)
주해
▣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 첫 번째 질문과 유사한 구조의 두 번째 질문으로 '들음' 대신 '아는 것'을 지적한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복음을 듣기는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했기에 믿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있었으므로 그 변명을 봉쇄하기 위해 두 번째의 질문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 질문 또한 이중 부정 문으로 되어 있어서 매우 강한 긍정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여기서 이스라엘이 알고 있었던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느냐 란 문제가 제기된다. 혹자는 이를 복음을. 그리고 혹자는 이를 복음의 세계적 전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여기서 전자로 이해한다면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들었고 그 내용을 알고 있었으나 이를 거부한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후자로 이해한다면 구약 시대부터 이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온 나라의 백성들을 구하는 종말론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자신들만의 배타적인 것으로 이해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역시 결국에는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 것이 아니라 알고도 믿지 않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된다. 한편 본절은 계속되던 '저희'라는 익명 대신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 대상을 제시하여 유대인의 각성을 보다 촉구하는 점이 특이하다.
▣ 먼저 모세가 이르되. - '먼저'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토스'는 이스라엘이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구약의 구절로 인증하면서 모세의 것이 그 첫 번째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첫째로'라고 번역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한편 모세를 처음으로 거론하는 것은 유대인에게 있어 최고의 권위를 갖는 모세오경의 전수자 모세의 말이 갖는 위력을 바울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 이는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후에 있게 될 이스라엘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한 '모세의 노래'에 나오는 신 32:21의 인용이다. 실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세만큼 존경을 받는 사람이 없었으며 따라서 모세의 증거만큼 권위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잘못이 바로 이러한 모세로부터 결정적으로 반박된다는 점은 상당히 반어적이다. 또한 바울은 구약 본문에서는 '그들'로서 삼인칭 복수형으로 나오는 것을 본문에서는 '너희'(휘마스)로 바꾸어서 반박의 효과를 한층 더 높이고 있다. 이렇게 모세의 노래는 본절에서 뿐 아니라 신약에서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반박하는 증거로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즉 신 32:16,17을 인용하는 고전 10:20,22과 신 32:5을 인용하는 빌 2:15, 그리고 신 32:43을 인용하는 히 1:6 등이다. 한편 구약 본문의 뜻은 이스라엘이 '신 아닌 것'(로엘)을 섬겨서 하나님을 시기 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그의 백성이 아닌 백성'(로암)을 통해 이스라엘을 투기 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본절은 구약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시기 나게 했다는 구절은 생략한 채 하반절 만을 강조적으로 인용하는 것이다. 한편 여기서 '백성 아닌 자'나 '미련한 백성'은 모두 영적 지식이 없으므로 원래 우상을 숭배하였던 이방인을 가리키는데, 이 표현들은 선민으로써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소유한 이스라엘이 이방을 멸시적으로 부르며 자신들에 대해서는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사도 바울에 의해 유대인들의 이러한 자만심은 여지없이 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롬 9:25,26에서 호세아의 '로암미'를 인용하는 것도 참조하라. 이렇게 모세 때부터 이미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미칠 것이 예언되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행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한 지식을 애써 부인한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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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10:20 또한 이사야는 담대하게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j) "나를 찾지 않던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던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j. 사65:1(70인역))
10:20 또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게 말하기를 "나를 찾지 않는 자들에게 내가 발견되고, 내게 구하지 않는 자들에게 나를 나타내었다." 라고 하였다.
직역: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게 말한다. 나를 찾지 않는 그사람들에 내가 발견되고, 나에게 캐묻지 않는 그사람들에 내가 나타나게 되었다.
10:20 Ἠσαΐας δὲ ἀποτολμᾷ καὶ λέγει·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이사야가 또한 매우담대하여 이에 그가말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εὑρέθην [ἐν] τοῖς ἐμὲ μὴ ζητοῦσιν, (분사: 현재 능동태 여격 복수)
내가발견되었다 의하여 그(사람들) 나를 않는 찾지 (동사: 직설법 과거 수동태 1단)
ἐμφανὴς ἐγενόμην τοῖς ἐμὲ μὴ ἐπερωτῶσιν. (분사: 현재 능동태 여격 복수)
나타나게 내가되었다 그(사람들) 나를 않는 캐묻지 (동사: 직설법 과거 중간태/디 1단)
주해
▣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권위 있는 모세의 증거에 이어지는 선지자의 대표자격인 이사야의 증거는 유대인의 과오를 더욱 신랄하게 지적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여기서 '담대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포톨마'는 '스스로를 담대히 하다'라는 뜻으로 본절에서는 완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이 구절에서는 '끝까지 담대하게 하다'라는 매우 강한 의미로 쓰인 것이다.
▣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 구약 본문과는 두 구절의 순서가 바뀌었긴 하지만 사 65:1을 인용한 것이다. 본래 구약에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역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이다. 바울이 신 32:21 이후에 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또다시 인용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신명기 말씀을 더욱 확증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구원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보고도 하나님께 계속 불순종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처우에서 명백히 드러난 교훈도 놓쳐버린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질투를 하여서라도 믿음으로 인한 의를 수납해야만 했었으나 이를 거절함으로써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불행에 처하고 만 것이다.
◆ 개역개정 번역본 ◆표준 새번역본 ◆ 바른성경 번역본 ◆ 직역
10:21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10:21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k)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k. 사65:2(70인역))
10:21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말씀하기를 "순종하지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내가 온종일 내 손을 벌렸다." 라고 하셨다.
직역: 그러나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가 말한다. 그리고 "나를 향하여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백성에게 내가 온 종일 두 손을 내밀었다."라고 하였다.
10:21 πρὸς δὲ τὸν Ἰσραὴλ λέγει·
향하여 그러나 그 이스라엘을 그가한다 (동사: 직설법 현재 능동태 3단)
ὅλην τὴν ἡμέραν ἐξεπέτασα
온 그 날 내가내밀었다 (동사: 직설법 과거 능동태 1단)
τὰς χεῖράς μου πρὸς λαὸν ἀπειθοῦντα
그 두손을 나의 항햐여 백성 불 순종하는 (분사: 현재 능동태 목격 단수)
καὶ ἀντιλέγοντα.
그리고 거역하는 (분사: 현재 능동태 목격 단수)
주해
▣ 이스라엘에 대해 가라사대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 계속하여 사도 바울은 사 65:2을 인용해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인용에 의하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심판의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속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 복음을 거절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거스려 말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안티레곤타'는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스스로 자신의 독립을 선언하며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뜻한다. 또한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베풀어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신인동형 동성론(神人同型同性論)적 표현으로 보여 준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의 비유 중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결국 이러한 묘사로 마무리되는 본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의 철저한 실패를 다루고 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발은 이스라엘이 이에 조금도 항변할 수 없을 정도로 논증이 치밀하며 특히 18절 이하의 구약 인용은 완벽하다. 하지만 이렇게 이스라엘의 철저한 불순종과 그로 인해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되었음이 강조되고 있지만 아직 완전한 끝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유대인의 구원을 언급한 대로 이스라엘에게도 남은 자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과거와 조금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탈선'은 최종적이 아니며 종내 이스라엘은 회복될 것이다.
첫댓글 유대인으로 신앙의 실패와 성공을 설명함 9:1-11:36
로마서 10:1-4
이 복음은 의롭다함을 얻고 거룩함에 이르고 영광스러움에 이르는 완전한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 도달한다. 롬1:16-17
1. 내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과 이스라엘을 위한 나의 간구는 동족이 구원받는 것이다. 1-3
바울은 이스라엘이 이 칭의 거룩 영광의 완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열정은 있으나 온전한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자신들의 의를 세우려 하나님의 의를 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1:17 복음이 하나님의 의이다.
복음은 [이복음은 죽음과 부활의 예수그리스도시니라] 1:2 4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의로우심을 나타내신 하나님은[자기가 의로우시기에 이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라] 3:26
오직 이 믿음으로 만 의를 얻게하심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4-
오직 율법의 마침 [완성 이룸 성취= 충족 종결] 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만 의를 얻기 때문이다.
5-8
2.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의 의를 이루려 율법의 마침이 되심에 관하여 설명이다.
모세는 율법에서 난 의에 관하여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율법으로 살리라고 규정하였다.
믿음에서 난 의는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이 말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것이다
누가 무저갱으로 내려가겠느냐 그리스도를 모셔 올리겠다는 뜻이 된다.
이 뜻은 그리스도가 육체가 되셔서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로 성취하신 것이다.
말씀이 가까이있다 전파하는 말씀을 통해 마음과 입을에 있기에 전파되는 말씀을믿으면 된다.
우리가 무엇을 한다고 하여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의 표현이다.
의를 위하여 메시야를 찾아 하늘로 올라가거나 음부로 내려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길은 가장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쉽고 은혜로운 방법으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길을 주셨다.
그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말씀에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얻음이 말씀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파하는 말씀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아멘 입니다.
9-13
3. 선포된 말씀을 마음과 입으로 믿는 믿음의 중요성.
이 의는 말씀이 너의 입에 있으며 마음에 있다 선포하는 믿음의 말씀이다.
입으로 주님을 시인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유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는 이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누구나 차별이 없는 것은 주께서는 모든 믿는 자의 주가 되시며 주를 부르는 자에게 풍성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만일 예수를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의 방법이다
아멘
좋은 말씀자료 늘 수고하여 올려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
큰 도움과 유익을 얻습니다.
오늘도 큰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
넵
14-21
4. 믿음의 시작과 진행과 완성에 관하여 설명 함.
믿지 않는 분을 부를 수가 없기에 반드시 누군가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
전파자가 있어야 들을 수 있고 들어야 믿어지기에 듣지 않은 분을 믿을 수가 없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고는 선포 할 수 없기에 선포하는 사람이 있어야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가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
그러나 들었다고하여 들은 모두가 다 순종한 것이아니다.
주여 우리의 전한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는 순종하였나이까와 같다.
그러므로 믿음의 참 됨은 순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순종]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듣지 못하지 아니한것은 전파자에 의하여 온 땅에 퍼지고 세계에 퍼지게 된것이다.
모세는 내 백성이 아닌자로 시기나게 하시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사야도 묻지도 않는 자들에게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에게 두 손을 내밀어 온 종일 기다리지만 너희가 거절하였다
문제는 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특권이 많으나 믿음은 은혜의 선물로 [신뢰]에서 [확신]이르고 [순종]함으로 온전케 되는 것이다.
아멘
보충
로마서 10:16-21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믿음에 실패하는 것이다.
복음을 모든 사람이 믿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복음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음.
이사야는 우리가 전하여 들은 말을 누가 믿고 순종합니까하였다.
믿음은 듣는데서 생깁니다.
복음은 듣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듣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2. 말을 듣는다는 것과 안 듣는 다는 것이 순종으로도 해석 됨.
그러나 그들이 듣지 못했습니까? 그들이 알지 못했습니까?
성경은 그들의 목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세상 끝까지 이르렀다 말합니다.
또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지 못했습니까?
먼저 모세가 말했습니다.
나는 내백성이 아닌 사람을 통하여 시기 나도록 하겠고 무지한 민족을 통하여 화가 나도록 하겠다.
이사야가 매우 담대히 말했습니다.
나는 나를 차지 않는 사람에게 발견되었고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나타났다.
순종하지 않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온 종일 나의 손을 내밀었다.
3. 믿음은 순종으로 난다는 것이 증명 됨
귀 구멍으로 소리를 듣는다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순종하는 것에서 믿음이 난다는 것이 본문으로 증명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듣지 못했습니까?
그들이 알지 못했습니까?
문제는 누가 순종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듣고 알아도 순종하지 많으면 믿음이 나지 아니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1:17절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다는 말씀으로 해석 가능 한 진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