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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 유대의 지도자들과 변론하심
1-14절,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 비유
[1-3절]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앞장의 포도원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분으로 묘사되었으나, 이 비유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무엇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앞의 비유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바는 구원에 합당한 행위이지만, 여기에서 그가 주시는 바는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혼인잔치는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다. 이 비유에서 하나님은 왕으로, 예수님은 왕자로, 천국은 왕자의 혼인잔치로 묘사되었다. 왕은 종들을 보내어 그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들을 오라고 하였다. 종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가리키며, 먼저 초청된 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왕의 초청을 받은 그들은 그 혼인잔치에 참여하기를 싫어했다.
[4-5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왕은 한번 더 다른 종들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이것은 왕의 인내요 친절이었다. 이번에는 잔치의 풍성함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며 초청하였다.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그러나 저들은 세상의 일들에만 관심을 두고 왕의 초청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갔다. 이것은 단순히 무관심이 아니고 왕의 초청에 대한 멸시이었다. 사람들은 세상일 때문에 하나님의 복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그것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6-7절]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초청을 받은 자들이 그 초청을 멸시하며 자기 일들을 보러 가버렸을 뿐 아니라, 그 남은 자들은 그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였다. 이것은 더 악한 일이었다. 이와 같이, 복음의 초청을 먼저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그 초청을 싫어하고 경멸하였고 심지어 그것을 전한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종들을 핍박하고 죽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였다. 마침내 왕은 진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악한 자들을 죽이고 그 동네를 불사를 것이다. 이것은 주후 70년경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의 사건을 가리킬 것이다. 그 이방나라의 군대는 하나님의 징벌의 몽둥이였다.
[8-10절]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손님]이 가득한지라.
기쁘고 즐거운 메시아의 혼인잔치가 준비되었으나 처음 청함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잔치에 합당치 않았다. 사거리 길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이번에는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초청을 받았다. 드러난 악인이든지 비교적 선한 자이든지 구별 없이 많은 사람이 초청을 받아 교회로 나아온다. 혼인잔치에 사람들이 가득하듯이, 하나님의 교회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11:25).
[11-14절] 임금이 손[손님]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아무 말이 없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그런데 예복을 입지 않고 참여한 자가 있었다. 이 예복은 잔치에 참여하는 자가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왕이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예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은 의를 상징한다. 이사야 61:10이 말한 ‘의의 겉옷’이다. 신약성경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표현하였다(롬 13:14; 갈 3:27). “나의 의는 이것뿐, 예수의 피밖에 없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는 믿음으로 얻는 의이다. 사람들은 누가 예복을 입었는지, 누가 입지 않고 교회에 들어와 앉아 있는지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의 눈에는 그것이 금방 드러난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예복은 자기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단지 교만과 불신앙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거절하고 자기의 행위의 의를 의지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 잘못은 주님께 있지 않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 그러므로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정죄될 것이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기쁨과 영광으로부터 추방되어 지옥에서 슬피 울며 고통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원의 복음으로 청함을 받은 자들은 많지만, 참으로 구원받는 자들은 적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천국은 기쁘고 즐거운 잔치와 같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천국은 의와 평안과 희락의 세계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천국 초청에 무관심하거나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구원, 천국, 내세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천국 잔치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예복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으로 이루신 의를 믿어야 한다.
15-33절, 세금 문제와 부활 문제에 대한 질문
[15-17절]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서로 의논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한대.
하나님의 원수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활동한다. 바리새인들과 헤롯 당원들은 종교적, 정치적 견해가 서로 다른 자들이었으나, 예수님을 핍박하는 데는 힘을 합했다. 오늘날도 다양한 사상들과 입장들을 가진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데는 힘을 합한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존경하듯이 그가 참되시며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신다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의로우시고 진실하심은 저들도 부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참되셨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셨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셨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는 로마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한다는 친(親)로마파요, 또 하나는 가이사에게 세를 바칠 필요가 없다는 반(反)로마파, 즉 민족주의파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변론이 있었을 것이며, 이것은 당시의 중요한 사회 문제이며 예수께 질문해 그를 곤란케 할 만한 문제이었다.
[18-22절]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들의 질문 뒤에는 예수님을 올무에 넘어지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예수님의 대답은 ‘예’ 아니면 ‘아니오’일 것이요 그러면 그를 친(親)로마파나 반(反)로마파로 몰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 백성과 이간을 붙일 빌미가 되든지, 아니면 로마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비난할 거리가 될 것이다.
주께서는 그 시험하는 질문에 지혜롭게 대답하셨다. 그는 “셋돈을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자, 그는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고 물으셨다. 그것은 가이사의 형상과 글이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 아래 살고 있었고 유대 땅에서는 로마의 화폐가 사용되고 있었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가이사의 것을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 즉 세금 내는 것이 정당한 일이라는 뜻이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두 영역에서 살고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요 다른 하나는 세상 나라이다. 우선,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므로 그 나라의 규범들을 지켜야 한다. 헌금도 그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므로 세상에서 우리의 소유 중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지만, 성경은 특히 소득의 십일조와 첫열매와 헌물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레위기 27:30,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聖物)이라.” 잠언 3: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말라기 3:8-10,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 . .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러나 성도는 또한 세상에 사는 동안 세상 나라의 규범도 지켜야 한다. 베드로전서 2: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 그것은 나라가 정한 납세의 의무를 포함한다. 로마서 13:7,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라.”
[23-28절]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에 예수께 와서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두고 그 둘째와 세째[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사두개인들은 당시 합리주의자, 자유주의자이었다. 사도행전 23:8은,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고 말한다. 합리주의, 자유주의는 곧 불신앙이요 이단이다. 그들이 언급한 형수와의 결혼 규정은 신명기 25:5-6에 기록된 법이었다. 거기에 보면, “형제가 동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의 낳은 첫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한 독특한 경우를 들어 부활의 불합리성을 증거하려 했다. 이것은 기발한 착안이었다. 그들은 부활의 관념이 이 율법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부활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29-3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전통본문)42) 천사들과 같으니라.
예수께서는 격한 책망의 어조로 하지는 않으셨으나 육체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이 비성경적 오류임을 분명히 지적하셨다. ‘오해하다’는 말(플라나오)은 ‘잘못되다’는 뜻이다. 오류에 대한 그의 지적은 조용할지라도 힘이 있으시고 분명하셨다.
부활의 부정은 무엇보다 성경 진리에 반대되었다. 구약성경은 몸의 부활에 대해 분명히 증거하였다. 이사야 26:19는,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놓으리로다”라고 말했고, 다니엘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라고 말했다.
또 부활의 부정은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생명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에게는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이 있으시다. 부활이 사람 보기에 불가능하지 하나님께는 결코 어렵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다.
또 결혼관계는 이 세상에 국한된다.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다. 이 점에서 부활한 사람은 천사와 같다. 천사의 세계에는 결혼이 없기 때문이다. 부활 때에는 사람에게 더 이상 자녀의 출산도 필요 없고, 육체의 정욕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인들의 사상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아니었다.
[31-33절]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사실상, 죽은 자의 부활은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라는 말씀에서 증명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죽고 만 존재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은 옛날을 기억하시는 일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사람을 불멸적 존재로 만드셨다. 범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으나, 구원은 당연히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생을 내포했다. 사람이 죽고 만다면, 창조와 구원은 무의미할 것이다. 부활은 창조와 구원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아브라함이라는 존재가 결코 죽고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아브라함뿐 아니라, 모든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불멸적 영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현재 살아 있다. 그러나 이런 정도가 아니다. 사람은 영육의 결합체이다. 의인 아브라함은 지금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지만, 장차 다시 몸과 결합하여 영광스런 사람이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요 성도의 소망인 것이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죽어도 장차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요 11:25-26).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 나라에 살면서 정당하게 세금을 내어야 한다. 우리는 국민의 의무를 다 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사두개인들처럼 사람의 몸의 부활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구약성경도 부활을 증거하고(사 26:19; 단 12:2)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다. 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안다면 몸의 부활은 믿지 못할 일이 아니다.
셋째로, 우리의 몸의 부활 후, 천국에서는 결혼이 없을 것이다. 결혼 제도와 결혼 관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제도이다. 천국의 백성들은 죄성과 죄악된 욕망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34-46절, 큰 계명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
[34-35절]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율법사는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가르치는 사람이다. 마가복음에는 ‘서기관’이라고 표현했다(막 12:28). 모세오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율법들은 그 수가 많다. 그 많은 법들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인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고 관심 있는 문제이었을 것이다.
[37-38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예수께서는 신명기 6:5의 말씀을 가장 큰 계명이라고 말씀하셨다. 마가복음은 주께서 신명기 6:4부터 인용하셨다고 증거한다. 신명기 6:4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여호와]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여호와]시라”는 말씀이다. ‘목숨’이라는 말은 신명기 본문에 ‘영혼’(네페쉬)이라고 되어 있다. 또 신명기에는 ‘네 힘을 다하여’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의 첫째 의무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 혹은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 의무요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다(잠 1:7; 9:10). 사람의 모든 도덕적 생활은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39절]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법은 레위기 19:18의 말씀이다. 이웃 사랑은 모든 인간 관계의 법들의 완성이다. 로마서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40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온 율법과 선지자들은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느니라].
‘율법과 선지자들’이라는 말은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모든 교훈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요약될 수 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도덕적 율법의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도덕법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 율법은 의로운 표준이며 규범이지만, 사람은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지키지 못한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그리고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율법은 단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요구인가, 우리가 얼마나 죄악되며 무능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이 왜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41-42절]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아들]이니이다.
바리새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는 예언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에 대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시라는 것은 믿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43-44절]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주께서는 구약성경 중 시편의 영감성을 증거하셨다. 시편은 성도들의 기도의 글들, 즉 찬양, 감사, 고백, 간구의 글들이지만, 주께서 이런 시편까지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증거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 당시의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이었다. 예수께서는 유대교의 성경관을 그대로 받으셨다. 사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도 기록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시험을 물리치셨다(마 4:4, 7, 10). 그의 사도들도 동일한 성경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16,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베드로).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바울).
오늘날같이 성경에 대한 믿음이 없는 불신앙과 회의주의의 시대에 우리는 예수님 자신과 그의 사도들이 가졌던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행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우리 인격을 온전케 한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는 시편 110:1의 말씀은 메시아의 승천과 그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것을 예언하고 있다. 메시아께는 원수가 있다. 그 원수는 사탄이다. 그를 발아래 두는 것은 사탄을 최종적으로 영원한 지옥 불못에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마 25:41). 이것이 사탄에 대한 최종적 형벌이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께서는 사탄의 최종 멸망 때까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이다. 그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부터 다시 오실 때는 마귀와 그의 사자들을 심판하여 영원한 멸망에 던져 넣으실 때이다.
[45-46절]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예수님의 질문은 메시아의 인성(人性)만 아는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메시아의 신성(神性)도 알아야 했다. 메시아께서는 다윗의 자손이실 뿐 아니라, 또한 다윗의 주이시다. 다윗 왕도 메시아 왕국에서는 한 신민(臣民)에 불과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빌립에게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다(요 14:9).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6에서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말하였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의 신적 명칭, 그의 신적 속성, 그의 신적 사역, 그의 신적 영예를 통해 그가 신적 인격이심을 밝히 증거하였다. 구약의 예언도 그렇고(사 9:6), 신약성경은 더욱 그렇다. 믿는 자들은 복되다. 메시아께서는 참 사람이실 뿐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요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놀라운 구주 예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믿음은 정통 유대교의 성경관이며 예수님과 사도들의 성경관이다. 우리는 불신앙과 회의주의가 많은 시대에 바른 성경관을 가져야 한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참 사람이실 뿐 아니라, 또한 참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참된 신성(神性)을 가진 구주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함은 지혜과 지식의 시작이다. 경건은 인생의 삶의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의무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모든 도덕적인 삶과 헌신과 봉사는 참된 경건에서 나온다.
넷째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또 그를 믿음으로만 받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이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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