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한철의 고전으로 읽는 우리역사 7
7. 이중환(淸潭 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
- 중국 춘추시대 최고 미인 서시가 군산 출신이다?
"서해에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서시포(西施浦·전북 군산시 나포면 서포리)라는 큰 마을이 펼쳐지는데 배가 머무는 곳이다. 충청도 강경의 황산촌과 더불어 금강에서 이름난 마을로 불린다. 서시포라는 이름은 옛날 중국 월나라의 미인인 서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붙여졌다."
실학자 이중환이 저술한 '택리지' 전주부의 한 구절이다. 월나라 미인 서시는 전한 왕소군, 후한 초선, 당나라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꼽힌다. 널리 알려진 대로 서시는 춘추시대(기원전 770~기원전 403) 말기 양쯔강 하류에 존재했던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두 나라의 전쟁사에 등장한다.
오나라에 패망한 월나라 왕 구천의 충신인 범려가 서시를 데려다가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의 주인공 오나라왕 부차에게 바친다. 부차가 그녀의 미색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하게 되자 마침내 범려는 오나라를 공격해 멸망시킨다. 서시는 그 후 부차에 대한 죄책감으로 강에 투신해 자살했다고 한다.
택리지의 기록 대로 중국 고대사의 한 장면을 장식하고 있는 서시가 과연 한반도 남부 태생이었을까. 서시가 살던 기원전 5세기 한반도 남부 지역은 역사의 여명이 밝아오기 전의 상태였다. 북부와 요동, 요서 일대의 고조선 영향권에 있기는 했지만 부족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만일 한반도 출신이라면 어린 나이에 어떤 연유로 황해 맞은편 중국 양쯔강 일대까지 흘러 들어갔던 것일까.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택리지는 이중환이 전국을 답사하면서 각 지역의 인심과 풍속, 물화의 생산지 및 집산지 등을 낱낱이 파악해 1751년(영조 27) 쓴 지리서이다.
책은 사농공상의 유래와 사대부의 사명 등을 논한 사민총론(四民總論), 팔도의 역사 요약과 함께 지역성과 출신 인물을 결부시킨 팔도총론(八道總論), 지리·생리·인심·산수의 4가지 관점에서 입지조건을 설명한 복거총론(卜居總論)으로 구성돼 있다.
책은 당시의 정치와 경제 및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주목할 만한 많은 견해를 피력한다. 지배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인간은 스스로의 생산 활동을 통해 의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했다. 상업적 농업을 중시했으며 상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발전과 교역의 증대를 가져온다고 봤다. 그의 주장은 박지원, 박제가 등의 북학파 학자들에게 계승됐다.
이중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름진 땅으로 전라도의 남원, 구례와 경상도의 성주, 진주를 꼽았다. 오늘날 이들 지역은 주요 교통로에서 비켜나 있어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땅의 기름진 정도가 고을 발전의 척도였다.
이들 지역은 논에 볍씨를 한 말 뿌려서 최상은 140말을 거두고 그다음은 100말을 거두며 최하 80말을 거둔다고 택리지는 소개한다. 기름진 땅에는 인걸이 몰리게 마련이다.
사드 배치 결정으로 논란이 일었던 경북 성주를 언급하면서 "영남에서 땅이 가장 기름져 적게 뿌리고도 많이 거둔다. 그러므로 토박이들은 모두 부유해서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며 "고려 때부터 이름난 사람이 많았고 조선왕조에 이르러서는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가 모두 이 고을 사람"이라고 했다.
이중환은 설총(경산 출신), 최치원(경주), 안향(풍기), 정몽주(영천), 길재(구미) 등 조선 사대부의 출발점이 경상도였다는 점을 들어 경상도의 풍속을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조선왕조에 와서 선조 이전에는 국정을 맡은 자들이 모두 경상도 사람이었고 문묘에 모신 4현(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일두 정여창)이 이 도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조 이후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백사 이항복의 문하생들이 정국을 평정하면서부터는 서울에 대대로 사는 집안의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등용했다. 경상도에서 최근 100년 동안 정2품의 정경(正卿)이 된 자가 두 사람, 종2품의 아경(亞卿)이 네댓 사람이고 정승이 된 사람은 없었다.
지금은 공업도시가 된 구미에 대해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구미)에 있다"며 "그래서 예부터 문학을 하는 선비가 많다"고 소개했다. 조선 사림파의 종주인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학문이 그의 부친 김숙자(1389~1456)와 김숙자의 스승 야은 길재(1353∼1419)에서 비롯된 것을 이르는 말이다. 길재와 김숙자가 모두 구미에서 출생했다.
▲ 후백제 견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차령이남 사람들을 차별했던 고려태조 왕건 동상. 이 동상은 그의 아들이자 고려 4대 임금인 광종이 만들었다. 북한소재.
전라도는 신라 말엽에 이 지역을 차지한 후 백제 견훤이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 자주 위태한 지경에 빠트려 고려시대에 차별대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는 견훤을 평정한 뒤 "차령 이남의 강물은 모두 엇갈려 흐른다"며 "차령 남쪽의 사람은 쓰지 말라"고 유언한 뒤로 벼슬한 자가 드물었다.
하지만 조선왕조에 들어와 드디어 금령이 느슨해졌다고 강조했다. 전라도에는 땅의 신령스런 기운을 타고난 인걸이 적지 않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 사람이고 일재 이항은 부안 사람이며 하서 김인후는 장성 사람인데 모두 도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은 모두 광주 사람이며 절의로 이름났다. 고산 윤선도는 해남 사람이고 묵재 이상형은 남원 사람인데 함께 문학의 대가였다. 장군 정지와 금난 정충신은 모두 광주 사람으로서 장수로 명성을 떨쳤다.
▲ 태조 이성계는 고려를 배신하고 자신의 옹위한 평안도와 함경도 사람들에 대해 두 번 배신할 수 있다며 차별했다. 전주 경기전 소장.
평안도, 함경도 등 서북인들은 조선사회에서 크게 따돌림을 당했다. 태조 이성계는 왕씨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를 옹위한 공신들 가운데에서는 서북 출신의 맹장이 많았다. 태조는 나라를 세운 뒤 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날 것을 경계해 "서북 사람을 쓰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평안도, 함경도에는 300년 동안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다. 혹 과거에 오른 자가 있다 해도 종5품 현령 정도였고 서울의 사대부들은 서북 사람과 혼인하거나 벗으로 사귀지 않았다. 차츰 서북 양도에는 사대부들이 없게 되었고 사대부들도 그곳에 가서 살지 않았다.
책에는 각 지방에서 전래되는 다양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다. 정유재란 때 적의 예봉을 꺾은 인물은 명나라 장수인 경리(經理) 양호(楊鎬)이다. 적이 남원에서 전주를 거쳐 북쪽으로 올라오자 양호가 평양에서 한양까지 700리를 이틀 만에 달려왔고 다시 천안까지 내려와 왜군과 맞붙었다.
원숭이를 태운 말을 적진에 풀어 혼란해진 틈에 철갑기병으로 적을 크게 무찔렀고 들판은 시체들로 뒤덮였다. 왜적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뒤부터 그때까지 그와 같은 승리는 없었으며 들에서 밭을 갈 때 지금까지도 창이나 칼 따위를 줍는다고 책은 논평한다. 전투 이후 양호는 무고를 당해 본국으로 소환되면서 우리의 기억에서 잊힌다.
인조는 반정 이듬해인 1624년 일어난 반란(이괄의 난)으로 충청도 공주까지 피난 간다. 도망가다가 나무 두그루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서울에서 달려온 군사가 관군의 승리를 아뢰자 나무를 기특하게 여겨 두 나무 모두에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린다. 책은 "그 뒤 관아에서 나무 옆에 정자를 지었는데 나무는 말라죽고 정자만 남아 있다"고 적었다. 원나라 지배기에 우리나라가 중국인들의 귀향지로 활용되기도 했다.
원나라 문종(1304~1332)은 순제(1320~1370·원나라 마지막 임금)를 대청도로 귀향 보냈다. 순제는 집을 짓고 살면서 순금으로 만든 부처를 모시고 매일 해가 돋을 때마다 고국에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는 후일 귀국해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순제는 장인 100명을 보내 해주 수양산에 큰 절을 짓게 했는데 이것이 신광사(神光寺)이다. 웅장하고 화려하기가 우리나라의 으뜸이었으나 화재로 불타버렸다.
대마도에 대한 언급도 이채롭다. 대마도는 왜국에 딸린 것이 아닌데 두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왜국을 빙자해 우리에게 요구하고 우리나라를 빙자해 왜국에게 중하게 보였으니 박쥐노릇을 하면서 이로움을 취했다. 이들을 토벌해 우리에게 복속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책은 제시한다.
▶이중환(1690~1756)=서울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청담(淸潭)이다. 성호 이익(1681∼1763)과는 친척이었다. 24세가 되던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벼슬이 정5품 병조정랑에 이르렀다. 그의 집안은 남인이었으며 경종 재위 시 국왕 시해사건을 고변해 다수의 노론 인사를 숙청시켰던 목호룡과 친분이 있었다.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게 되면서 그는 목호룡과 함께 처벌받았다. 목효룡은 옥중에서 죽어 효수됐고 이중환은 유배형을 받았다. 유배형에 풀려난 뒤 30년 동안 전국을 정처없이 떠돈다. 그의 대표 저서 '택리지'는 이런 방랑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그는 영조 29년(1753) 통정대부(문반 당상관 품계), 절충장군(무반 당상관)을 동시에 받음으로써 명예를 회복했다. 죽기 겨우 3년 전이었다.
[출처] : 배한철 매일경제신문 영남본부장 : <고전으로 읽는 우리 역사> / 매경프리미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