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높은 문학 수필을 위한 도전
기다림의 문예 공간, 누정(樓亭)
이종범
조선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한국사 박사
1. 머리말
필자는 문외한이지만 수필(隨筆)을 ‘수처작주(隨處作主)의 글쓰기’라고 생각해 왔다. 주인 되자면 독지(篤志)의 대기(待機) 즉 기다림이 필요하다. 이것은 꾸밈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온고(溫故), 절문(切問), 근사(近思), 지신(知新)’이라야 한다.
그간 우리나라 사상문화를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누정의 글과 마주하면서 늘상 옛사람의 놀랄 만한 기다림의 미학에 젖어들곤 하였다. 이러한 기다림은 기계 속에서 살고 바이러스와도 같이 살아야 하는 오늘날 인공지능과 동행하며 생태자연과 어울리는 여유로움의 자양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흔히 누정, 누각(樓閣)과 정자(亭⼦)라고 하면 고즈넉한 안일(安逸)과 유거(幽居)를 연상한다. 민간 누정의 글이 그러한 서사를 거듭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깔린 세상을 향한 진실과 진동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 민간 누정은 휴식과 풍류의 공간이기 전에 교류와 담론, 교육과 학문 나아가 향약, 나아가 마을 서고의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그간 우리 학계가 관심을 덜 가졌던 사찰과 관청의 누각에 새겨진 안온(安穩)과 상심(傷⼼), 회고(懷古)와 공감(共感)의 서사에 나타난 성찰과 소망의 여정을 따라가 보고자 한다. 특히 전라도 천년고도 나주라는 장소의 의미를 새기며 장성 백양사의 쌍계루 그리고 나주 객관 동쪽에 있었던 그러나 지금은 없어진 무이루를 조명하고 싶다. 이번 소중한 기회에 감사 한다.
2. 쌍계루의 회고와 관광(觀光); 정도전(鄭道傳)과 무열(無說)
고려 우왕 원년(1475) 5월 전라도 회진으로 유배를 왔던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용진사 무열의 극복루(克復樓)의 기문을 보았다. 여황에 살던 후학 조박(趙璞, 1356∼1408)이 가져왔다. 여황(艅艎)은 당시 나주의 속현으로 극락강과 황룡강이 만나는 송정 일대이다. 조박은 충선왕의 권신 조인규(趙仁規)의 4세손으로 증조가 나주 도서로 귀향형을 받으며 여황의 토성(⼟姓)이 되었다. 조박이 물었다.1)
1) 鄭道傳, 「無說⼭⼈克復樓記後說」, 『三峯集』 권3, 이때 정도전에게 배운 조박은 우왕 8년 과거에 들고 ‘혁명파’에 가담하였는데 민제(閔霽)이 첫 번째 사위가 되며 이방원(李芳遠) 편에 섰고 정사공신(定社功⾂)이 되었다.
“기문은 무열(無說) 스님이 지었는데 누각은 용진사에 있습니다. 무릇 사람이 누관을 귀히 여기는 바는 높은 데 올라 먼 데를 보며 마음과 눈을 놀리고 산천과 풍월을 한껏 끌어와 유관의 즐거움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것일 뿐, 학문과는 관계가 없거늘 누각을 극복이라 이름 지은 것은 무엇을 취하고자 함입니까?”
극복은 극기복례(克⼰復禮)의 줄임으로 『논어』에 나온다.2) 정도전이 대답하였다.
2) 『논어 안연』 “顔淵問仁하니 ⼦⽈ 克⼰復禮爲仁이니 ⼀⽇克⼰復禮면 天下歸仁焉이라. 爲仁由⼰니 ⽽由⼈乎哉아. 顔淵⽈ 請問其⽬이라 ⼦⽈ ⾮禮勿視며 ⾮禮勿聽이며 ⾮禮勿⾔이며 ⾮禮勿動이라.”
“아니다, 사람의 우락은 마음에 매어있으니, 그경지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마음이 걱정에 매이면 뛰어난 산천과 아름다운 풍월에도 쓰라린 느낌이 드는 법이다. 영릉산은 남방에서 가장 빼어난 산이지만 쫓겨난 신하에겐 뇌수(牢囚)요, 악양루는 천하 장관이지만 좌천된 관료는 서글프게 여길 것이다. 실로 마음을 잃으면 가는 곳마다 서러울 것이니 비록 누관(樓觀)을 가진들 어찌 즐거움을 얻겠는가? 정녕 사사로운 이끗을 이겨내고 천리로 회복하면 마음이 확 트여서 그 크기는 천지 같고 만물과 더불어 어울릴 것이니, 호호탕탕 만나는 것마다 모두 즐거울 것이다. 그래서 단사표음 누항에서 즐거움을 고치지 않았으니 바로 안자의 극기복례라. 요컨대 오직 어질고 나서야 즐거움을 즐길 수있으니 누각의 이름을 극복이라 함은 근본을 얻었다고 하겠다.”
영릉(零陵)은 호남성 영주(永州)에 당의 유종원(柳宗元)이 ‘풍치림’을 조성하였던 명산이고, 악양루는 천하제일의 호수라는 동정호의 정자이다. 단사표음은 『논어』3)에 나온다. 정도전은 무열의 사람 사는 이치 인(仁)에 대한 조예에 감탄한 것이다. 무열의 법호는 굉연(宏演), 당호는 연서당(演西堂)이며, 원나라의 당대 학자 구양현(歐陽⽞)과 위소(危素)를 종유하고 두 사람의 서문을 받아 『죽간집』을 간행하였던 시승이었다.4) 지금 무열의 시가 『동문선』에 여러 편 전한다.
3)『論語 雍也』, “⼦⽈ 賢哉라 回也여, ⼀簞⾷⼀瓢飮으로 在陋巷은 ⼈不堪其憂어늘 回也不改其 樂하니 賢哉라 回也여.”
4)『太古3)和尙語錄』 下, 『한국불교전서』 6. “無說은 演西堂이니 以⾃號無說⼆字로 敬奉御筆하고 求讃하다.”; 成俔, 『慵齋叢話』 권8, “⽵磵集⼀帙은 懶翁弟⼦僧宏演이 與歐陽⽞危素遊하고 兩學⼠作序한데 ⽽詩最健이라.”
당대 학자 이색(李穡, 1328∼1396) 또한 무열을 ‘한림’ 스님으로 존중하였다. 남쪽에 있던 무열에게 그리움을 전한 시가 있다.5)
5) 李穡, 「正⽉下澣 得南來書 因憶諸公」 『牧隱詩藁』 권7.
無說⼭⼈釋翰林(무열산인석한림) - 무열 산인은 문장 좋은 한림스님,
相望海⾓歲年深(상망해각세연심) - 바다 끝에서 서로 만났으니 세월이 이미 깊었구려.
梅花欲落春寒甚(매화욕락춘한심) - 매화 떨어지려니 꽃샘추위 심하여,
應向南窓盡⽇吟(응향남창진일음) - 응당 남쪽 창보고 온종일 읊으리라.
2구의 바다 끝, 해각(海⾓)은 1355년 늦봄 원나라에 갔을 때의 절강 임해의 수안사에서 무열을 만났었다.6)
6) 이색, 「壽安⽅丈 演無說 聶伯敬在坐」 『목은시고』 권3,
극복루 기문을 읽은 정도전은 무열을 만나고자 용진사를 찾았다.7)
7) 정도전, 「登湧珍寺克復樓」 『삼봉집』 권2,
曾讀⼭⼈記(증독산인기) - 일찍이 스님의 기문을 읽고,
思登克復樓(사등극복루) - 극복루에 오르리라 생각했다오.
試尋苔徑細(시심태경세) - 이끼 낀 오솔길을 더듬어가며,
來⼊洞⾨幽(내입동문유) - 깊숙한 동문에 들어왔네.
古⽊千章秀(고목천장수) - 천 길 고목은 빼어나고,
深溪⼋⽉秋(심계팔월추) - 깊은 계곡은 팔월 가을이로세.
灑然滌煩慮(쇄연척번려) - 번거로운 생각 씻은 듯하니,
聊可此淹留(요가차엄류) - 여기서 오래오래 머물렀으면.
가을 8월, 이때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유배 3년째 2월 백암사 정토사에서 만났다. 無說이 먼저 와 있었고 정토사 주지 청수(淸叟)가 마중을 나왔다. 세 사람은 교루(橋樓)에 좌정하였다.8) 교루는 계곡 다리 위에 올린 누각이다. 무열이 자신의 명산거찰 순례를 실마리 삼았다.
8) 정도전, 「⽩巖⼭淨⼟寺橋樓記」, 『朝鮮寺刹史料』 上(1911). 『삼봉집』에는 제목만 있다.
“오래전 일찍이 북쪽 燕都에 노닐고 남쪽 江浙을 떠돌고 서쪽으로 泗川에 닿았다오. 그간 천하 명산거찰을 실컷 보았는데, 명승이 주석하고서야 불사 경영도 계승되고 추락하지 않으니 ‘苟⾮其⼈이면 道不虛⾏이라’ 함이 아니겠소?”
『주역 계사전』을 인용하며 ‘명산(名⼭)에 명승(名僧) 있음이 아니라 명승(名僧)이 있어 명산이라’ 한 것이다. 공자 또한 “⼈能弘道요 ⾮道弘⼈이라”이라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로 돌아와 백암산 정토사에서 ‘⼈境相稱 사람과 경지가 걸맞음’을 보았다며 절의 내력을 설명하였다.
“신라 때에 이승(異僧)이 처음 세우고 지내며 백암사(⽩巖寺)라 했는데, ‘송경평(宋景平)’ 연간에 정토선원(淨⼟禪院)으로 바꿨다오. 그 문도에 중연선사(中延禪師)가 전당(殿堂)ㆍ문무(⾨廡)ㆍ장실(丈室)ㆍ빈료(賓寮) 등 무려 80여 칸을 다시 짓고, 이후 중연의 문도가 갑을전차(甲⼄傳次)하다가 일린(⼀麟)에 이르기까지 처음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왕사(王師) 각엄존자(覺儼尊者)에 이르렀지요.”
백암사는 「극락전불량계(極樂殿佛糧稧序)」에 따르면 ‘정관(貞觀) 7년’ 즉 633년 백제 무왕 34년에 창건되었다. 그렇다면 송경평(宋景平)’은 남조(南朝)의 유송(劉宋) 소제(少帝)가 423년과 424년에 사용한 연호일 수 없다. ‘송경평(宋景平)’은 북송(北宋) 인종(仁宗)이 1034년부터 1037년까지 사용한 경우(景祐)의 오기이다. 고려의 덕종(德宗)ㆍ정종(靖宗) 치세인데, 훗날 사적에도 경우(景祐) 원년, 목종 3년(1034)에 정토사로 바꾸었다고 하였다. 중연(中延)은 해동 천태종의 대각의천(⼤覺義天, 1055∼1101)과 시기가 겹치는 듯싶고, 이후 정토사를 맡았던 일린은 이로부터 근 1세기 후 선사이다. 그리고 각엄존자(覺儼尊者, 1270∼1355)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각엄존자의 법명은 복구(復丘), 시호는 각진(覺眞)이다.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ㆍ지공거(知貢擧)를 지낸 이존비(李尊庇,1233∼1287)의 둘째 아들 이정(李精)이었다. 무열은 이후 각진복구의 법력을 설명하였다.
“각엄존자는 8세에 인공(麟公)을 따라 지내다가 그 후 송광사 원오국사(圓悟國師)에게서 현지(⽞旨)를 연구하고 법기(法器)가 대성하였소. 처음에 월남사(⽉南寺)에 주석하더니 얼마 후 스승의 뜻을 받들고 송광사로 옮겨 20여 년을 지내며 도를 크게 떨쳤습니다. ‘경인(庚寅) 시월 보름’에 왕사로 나아가 불법으로 임금의 덕화를 도왔으니, 양조(兩朝)에서 이에 불교를 홍양(弘揚)하고 왕실의 복을 비는 원찰(願刹)이라 하였습니다.”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이 창설한 수선사(修禪社)의 본사로 조계산에 있다. 원오국사(1215∼1286)는 수선사의 5대 사주 천영(天英)으로 속성은 양씨로 남원사람이었다. 법기는 깨달음을 얻을 재목이며, 각엄복구에게 송광사로 옮기라고 하였던 스승은 수선사 8세 사주 자각국사(慈覺國師) 도영(道英)이다. 이달충(李達衷, 1309∼1384)의 비문 또한 적었다.9)
9) 이달충, 「覺儼尊者贈諡覺眞國師碑銘」 『霽亭集』 권3. 탑비는 영광 불갑사에 있다.
“10세에 원오국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얼마 후 국사가 입적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도영(道英)을 따라 공부하였으니 도영은 두 번째 스승이다.”
『동문선』에 이존비가 둘째 아들 즉 각엄복구가 송광사로 갈 때 원오국사에게 보낸 「조계산 회당화상에게 보내다」란 시가 있다. 회당(晦堂)은 원오의 당호이다.
物無美惡終歸⽤(물무미악종귀용) - 사람은 좋건 궂건 끝내 쓰일 데가 있으니
苦李誰嫌着⼦多(고리수혐착자다) - 누가 맛없는 자두에 열매가 많음을 탓하리.
⾧息久朝天⼦所(장식구조천자소) - 큰애는 천자의 처소에 오래 있고,
次兒新付法王家(차아신부법왕가) - 둘째 아이는 새로 부처님 집에 부쳤구나.
移忠固是爲⾂分(이충고시위신분) - 충성을 옮김도 신하된 사람의 분수인지라
割愛其如出世何(할애기여출세하) - 아까워도 나눠야 하니 출세간을 어찌하리.
還笑⽼翁猶滯念(환소노옹유체념) - 우습구나, 늙은이가 오히려 마음에 걸려
有時魂夢杳天涯(유시혼몽묘천애) - 이따금 꿈에서 아득한 하늘가를 헤매다니.
‘물(物)’은 사람 혹은 세상일이다, 고리(苦李)는 ‘도방고리(道傍苦李) 길가의 맛없는 자두’의 줄임으로 작자인 ‘李⽒’가 여러 아들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충(移忠)과 할애(割愛)는 군주에 대한 충성은 자식의 부모 효심을 옮긴 것이니, 부모에 대한 효성으로 부처를 신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실 각엄복구의 모부인 익산 이씨는 항상 대승불경(⼤乘佛經)을 몸에 지니고 암송하였을 만큼 독실하였다. 결련(結聯)은 이존비 자신이 아들을 그리워함을 말하고 있다. 이 시의 세주가 다음과 같다. “이때 장남이 궁궐의 숙위(宿衛)로 들어가고 차남은 新投晦堂剃度 새로 회당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다.” 새로 갔다고 함은 정토사 일린에게 먼저 갔었기 때문이다.
이달충의 탑비에 따르면 각엄복구는 21세에 승과에 장원하고 영암의 월남사를 거쳐 정토사로 갔고 자각도영의 뜻을 받들어 송광사로 옮겼다. ‘경인 10월’은 1350년 충정왕 2년, 이때 국사가 되고 영광 불갑사에 주석하였다가 이듬해 즉위한 공민왕이 왕사로 초빙하였다. 이어서 무열은 각엄이 정토사를 중창한 사실을 전해주었다.
“각엄존자는 또한 인공(麟公)의 뜻을 잊지 않고 옛 것을 모두 허물고 갱신하였으니, 비용은 모두 발낭(鉢囊)의 재물이고 문인 또한 많이 도왔습니다. 불사가 완공하니 대장경 1질을 봉안하고 상주하는 승려를 위한 재물과 곡식 그리고 여러 집기와 비품들을 모두 갖추었답니다.”
신라 이승이 창건하고 중연이 중창하였으니 각엄의 중수는 삼창(三創)이다. 이때의 사실이 훗날 수습한 「백암산 정토사사적」에 자세하다. 이때 각엄존자의 어록을 줄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백암산은 삼남의 소금강(⼩⾦剛)이니 혹 천한지고(天旱地枯)하면 이 산에서 기도하면 천성강우(天成降⾬)하리라. 청룡곡두(⾭⿓曲頭)에 있으니 혹 맥을 끊고 대로를 뚫으면 만민이 피해를 당하고 도인은 살 수 없으리니 이런 일이 있다면 어찌 한탄하지 않으리. 또한 절이 이미 퇴락하고 불상ㆍ법보(法寶)ㆍ 천인상(天⼈像)이 낡고 헐었으니 중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 부자는 곡백(穀帛)으로 빈자는 노역(勞役)으로 동심육력(同⼼戮⼒), 몇 년 지나지 않아 정토사는 면모를 일신하였다. 그리고 바다 건너 남중국에 가서 대장경을 가져와서 봉안하고 ‘전장법회(轉藏法會)’를 열었다. 충혜왕 복위 2년(1341)이었다. 앞서 본대로 각엄복구가 수선사주로서 국사가 되고 공민왕 때 왕사에 오른 것은 이 다음이었다. 그간 왕명으로 영광 불갑사에도 주석하였다. 각엄은 공민왕 4년(1355) 정토사로 와서 열반하였다. 다음은 임종게(臨終偈)이다.
卽⼼卽佛江西⽼(즉심즉불강서로) - 곧 심이고 곧 불인 강서의 늙은이며
⾮佛⾮⼼物外翁(비불비심물외옹) - 불도 아니고 심도 아닌 물외의 늙은이로다
鼯⿏聲中吾獨往(오서성중오독왕) - 날다람쥐의 소리 속에 나 홀로 가노니
涅槃⽣死本來空(열반생사본래공) - 열반에는 죽고 사는 것이 본래부터 공이로다.
무열은 각엄존자가 청수(淸叟)에게 정토사를 맡겼음을 설명하였다.
“각엄존자는 삼한의 명가이고 청수는 친질이며 일국 종사(宗師)로서 학자가 구름처럼 몰렸으니, 은애로 보나 의리로 보나 존자를 모시기론 청수보다 나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청수에게 절을 맡기고 후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다오. 청수는 존자의 뜻과 일을 밝게 잇고 제대로 해냈습니다. 청수는 절에 와서 얼마 되지 않아 불보살(佛菩薩)과 천인상(天⼈像)과 경패(經唄)와 종경(鍾磬)은 마땅하고, 곳간 수입은 전보다 배로 늘었으니 모두들 존자에게 맡긴 것을 득인(得⼈)이었다고 합니다.”
청수(淸叟)는 각엄존자의 친형 즉 앞서 이존비가 궁궐 숙위를 서고 있다는 이우(李瑀)의 셋째 아들이었다. 각엄의 위촉을 받든 청수는 그의 뜻에 따르며 재정을 한층 튼실히 갖추었다. 그러다가 큰물이 지며 누각이 허물어졌는데, 청수는 어렵잖게 다시 올렸다. 무열을 이런 사실까지 알려주며 정도전을 초대한 연유를 말하였다.
“지난 경술 여름, 비가 심하게 와서 계곡물이 불고 쏟아져서 누각이 소용돌이 여울물에 휩쓸려 부서졌소이다만, 청수는 다시 재와(材⽡)를 모으고 날을 잡아 마쳤으니, 법도에 맞게 갈고 깎고 단청을 알맞게 올려 검소하지도 않고 사치하지도 않아 한가한 날이면 누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산은 더욱 뛰어나니 이 누각을 올린 것이 우연만은 아니외다. 나와 그대가 다행히 누각에 모여 직접 눈으로 보았으니 말없이 갈 수 있겠소? 기문을 청하외다.”
경술년은 공민왕 19년(1370)이다. 지금까지 무열이 자신의 순력과 정토사의 내력 그리고 각엄존자와 청수의 정토사 사연을 풀어놓은 것은 정도전에게 기문(記⽂)을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기문을 짓자면 누각의 이름도 넣어야 했다. 정도전은 난감하였다. 선지식이 없는데 어찌하나, 하였을까? 아니 이보다는 그간 무열의 행로, 그 소상한 설명에 빠져들면서 정토사의 유구한 연원도 연원이지만 우선 한 사찰의 수호가 쉬운 일이 아님에 새삼 골몰하였을지 모른다. 이렇게 적었다.
“내 생각하건대 누각과 관사에 기문이 있음을 오래되었으나, 산천 승경과 풍경 미관을 서술하여 유관(遊觀)을 돕는 데 불과하다. 그러니 세월은 변해도 산천은 바뀌지 않고 풍경도 달라지지 않으니 정녕 이 땅에 올라 눈 있는 사람이면 보는 것은 같으니 새삼 말을 보태지 않아도 되지만, 오직 명인(名⼈) 운사(韻⼠)와 고풍(⾼⾵) 의열(義烈)에게 기문을 맡겨 불후를 도모함이 마땅하리라. 하물며 관적(官籍)에 매어있는 사원은 주지를 때도 없이 결정 임면하여 주지가 마땅하지 않은 사람이 되면 점차 허물어져 무너지고 없어지는 그런 사원이 혹 있는데, 그 동아리에서 스스로 사람을 얻어 오래 주고받고도 정토사와 같이 폐단이 없다면 어찌 가상하지 않겠는가. 도전(道傳)은 서생이라 선지식을 알지 못한데 어찌하리오. 그러나 무열께서 절의 전말을 매우 상세히 말씀하셨으니 이로 인하여 그 말씀을 줄기 삼아 적으니, 후에 이 누각에 오르는 사람은 산수풍경의 빼어남만을 취할 것이 아니라 앞 사람의 공을 알았으면 한다.”
누각의 기문이라면 명명(命名)이 필요한데 정도전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교루의 연혁’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뜻은 분명하다. 풍광을 보더라도 그에 새겨진 ‘사람의 땀 그리고 빛 그리고 뜻’을 보라 한 것이다. 이때가 유배 3년째 우왕 3년(1377) 2월이었다. 다시 누각을 올리고 7년만이었다. 정도전은 이해 7월 유배가 풀리자 삼각산으로 올라갔다.
3. 쌍계루의 기문(記文)과 제영(題詠) : 이색ㆍ정몽주ㆍ김인후ㆍ 노수신
청수는 절간(絶磵)을 통하여 이색에게 기문을 당부하였다. 이색은 기문을 짓게 된 사연을 먼저 적었다.
“삼중대광(三重⼤匡) 복리군(福利君)인 운암(雲菴) 징공(澄公) 청수(淸叟)가 절간(絶磵) 윤공(倫公)을 통하여 누각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봉 정씨의 기문을 보였는데 사찰 내력은 상세하나, 계곡이 어떠하며 누각은 어떠한가를 모두 적지 않았다. 아마 자신이 손수 명명하기가 난처하였던 듯싶다.”
삼중대광(三重⼤匡)은 문반 종1품 관계이며, 복리군(福利君)은 청수의 봉호이다. 앞서 보았듯이 삼한명가에게 주어진 것이다. 운암(雲菴)은 별호, 징공(澄公)은 법호이며 청수(淸叟)는 법명이다. 절간(絶磵)은 법명, 윤공(倫公)은 법호 즉 익륜(益倫)이며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의 수문이었다.
이색이 절간에게 계곡과 누각의 형세를 물으니 승경이었다. “두 물길이 모이는 곳에 누각이 있는데, 왼쪽 물 위에 걸터앉아 오른쪽 물을 굽어보면 누각의 모습과 물 빛깔이 위아래로 서로 흠뻑 젖어 비춰주니 실로 훌륭한 경관이외다.”
또한 절간이 전하는 청수의 당부가 절실하였다. “누각은 우리 스님이 세운 것인데 이대로 둘 수 있으리. 우리 스님의 스님과 스님이 무릇 5대에 걸쳐 전한지라 산문에 두신 뜻이 지극하셨는데, 누각이 지금 없어지면 그 꾸지람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가겠는가. 이에 날을 잡아 누각을 복구하여 부식한 데가 견고하고 퇴색한 데는 선명하니 스스로 위안이 되었다오. 그러나 우리 스님의 마음을 털끝이라도 혹 실추하지 않겠다는 나의 마음을 우리 문도가 반드시 안다고는 할수없을 것이라, 그래서 누각 하나를 다시 세운 것쯤이야 글로 남길만하지 않더라도, 굳이 능언(能⾔), 글 잘하는 사람에게 기문을 지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후(不朽)를 도모하는 한편 우리 문도를 경계하려 함이니 사양하지 않으면 다행이겠소.”
이색은 기문을 사양할 수 없었다. 이색은 청수와 자신의 오래된 인연을 밝혔다. “나는 일찍이 행촌(杏村) 시중공(侍中公)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그 자질과 어울려 노닐었는데, 스님은 그 계씨(季⽒)가 되어 요청을 어기기 어렵다.”
‘행촌 시중공’은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된 이암(李嵒, 1297∼1364)으로 앞서 살핀 각엄복구가 송광사로 갈 때 그 부친 이존비가 ‘궁궐에서 시위하고 있다는 장식(⾧息)’ 이우(李瑀)의 장남이었다. 청수가 그 셋째이니 ‘시중공의 계씨’라 한 것이다. 비록 짧게 적었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는 길고 깊었다. 이색의 회상 두 구절을 본다.10)
10) 이색, 「⽩⽒傳」 『목은문고』 권20, 및 「贈休上⼈序」 상동 권8.
“지금 천태종의 나잔자(懶殘⼦)는 일찍이 유생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고 동파시(東坡時)를 곧잘 강독하였으므로, 유생들이 무리지어 나아가 그들의 들은지라 매일 자리를 가득 매웠다.” ‘나잔자’는 청수의 자호이며, 백암산 정토사 맡기 이전 천태종을 지휘하던 직함 천태판사(天台判事)를 지냈다. 청수는 젊은 유생에게 동파 소식(蘇軾)을 가르쳤을 만큼 문학에 밝았다. 『논어』 『맹자』를 배운 유생도 있었다. 또한 청수는 술을 좋아하였다.
“내가 열예닐곱 때 여러 유생과 노닐며 시구의 짝을 맞추고 술 마시고 있으면 지금 천태판사 나잔자가 우리를 좋아하여 모두 초청하고 함께 시를 읊조리다가 해가 떨어지면 밤까지 이어 갔는데 술이 얼큰해지면 고담준론과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색과 청수는 이후에도 서로 자주 찾았으니 실로 ‘망년지교(忘年之交)’였다. 「나잔자의 방문에 감사하며(謝懶殘⼦⾒訪)」 세 수가 있는데, 다음은 두 번째이다.
結社詩魔與酒顚(결사시마여주전) - 시와 술에 미친 이들이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懶殘當⽇號無錢(나잔당일호무전) - 나잔자는 그때 빈털터리로 이름이 났지요.
諸⽣雲⾬皆離散(제생운우개이산) - 모두 비처럼 구름처럼 뿔뿔이 흩어진 지금
⽩髮寧饒美少年(백발영요미소년) - 백발 되어 무슨 수로 미소년 때보다 넉넉하리오.
이색은 누각의 이름을 ‘쌍계(雙溪)’라 짓고 적었다. “나는 지금 늙어서 누각에 밝은 달빛이 가득할 때 그속에서 한번이라도 묵을 길이 없으니, 젊은 시절 객이 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이때가 우왕 7년(1381) 5월, 54세이었다.11)
11) 이색, 「⾧城縣⽩巖寺雙溪樓記」 『牧隱⽂藁』 권3. ‘정토사사적’ 중의 「쌍계루기」에서 보충. 이때 이색의 관함은 ‘推忠保節 同德贊化功⾂ 三重⼤匡 韓⼭府院君 領藝⽂春秋館事’이다.
이색에게 청수의 쌍계루의 기문을 요청을 전한 절간은 누구일까? 절간(絶磵)은 ‘송풍헌(松⾵軒)’을 당호로 삼을 만큼 시문에 밝고 시작을 즐겨하였다. 당대 문사 한수(韓脩)ㆍ이숭인(李崇仁)ㆍ정몽주(鄭夢周) 등과 교유가 깊었는데 특히 이색을 평소 자주 찾았다. 다음은 「윤절간(倫絶磵)의 방문」이다.12)
12) 이색, 「倫絶磵來過」 『목은시고』 권19,
天磨嶺北⽔潺潺(천마령북수잔잔) - 천마산 북쪽 고개에서 나온 물이 잔잔하게 흘러,
西岸觀⾳⽯窟間(서안관음석굴간) - 서쪽 언덕 관음석굴 사이로 내려갔지.
記得沿流曾上下(기득연류증상하) - 예전에 물길 따라 오르락내리락 했던 생각나니,
朴淵瀑布似廬⼭(박연폭포사여산) - 박연폭포가 흡사 여산인 듯싶더군.
절간이 한때 개성 천마산 박연폭포가 가까운 지족암(知⾜菴)에 머물렀을 때를 자주 만났음을 들추며 반가워한 것이다. 이즈음 절간은 회암사(檜巖寺) 주지로서 나옹혜근이 못다 한 불사를 마감할 때였을 것이다. 중국 강서의 여산은 삼천 척 내리쏟아지는 폭포로 유명하다.
절간(絶磵)은 기문을 받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게 제시(題詩)까지 받았다. 이른바 ‘쌍계루 원운(元韻)’이다.
求詩今⾒⽩巖僧(구시금견백암승) - 시를 요구하는 백암사 승려를 만나고서,
把筆沉吟愧未能(파필침음괴미능) - 붓잡고 쩔쩔매며 어찌 못해 부끄러워라.
淸叟起樓名始重(청수기루명시중) - 청수가 누각을 세워 그 이름 처음 소중한데,
牧翁作記價還增(목옹작기가환증) - 목은 어른 기문 지어 그 값을 더해주었네.
烟光縹緲暮⼭紫(연광표묘모산자) - 붉은 저문 산에 노을빛 아스라하고,
⽉影徘徊秋⽔澄(월영배회추수징) - 달그림자는 맑은 가을 물을 배회하리라.
久向⼈間煩熱惱(구향인간번열뇌) - 오래도록 사람 세상에서 번뇌가 괴롭나니,
拂⾐何⽇共君登(불의하일공군등) - 어느 날 훌훌 떠나 그대와 함께 오를까?
이렇듯 쌍계루는 무열과 청수와 정도전이 만나고, 절간과 이색과 정몽주가 어울린 생각 나눔, 그리움과 기다림의 서사 공간이었다. 그리고 십여 년, 이들의 행로는 갈렸다. 절간은 하나의 권력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도 나눌 수 없는 엄혹한 상황에서 태상왕을 모시는 ‘차사’로 이름을 남겼다. 13)
13) 『태종실록』 권1, 태종 1년(1401) 4월 28일 및 4권, 2년(1402) 11월 15일
쌍계루 기문과 원운은 환암이 필사하여 정토사로 보냈고 정토사를 이를 소중하게 간직하였다. 이런 사실은 김인후의 차운(次韻)에 나온다.14)
14) 김인후, 「雙溪樓敬次圃隱韻」 『하서전집』 속편.
樓頭識⾯兩三僧(누두식면양삼승) - 누각 위에 안면이 익은 몇몇 승려들,
持守前規喜爾能(지수전규희이능) - 기꺼이 예전 법규를 지키니 기쁘구려.
絶磵⾔因淸叟懇(절간언인청수간) - ‘절간’이 ‘청수’의 청을 은근히 전하니,
烏川句爲牧翁增(오천구위목옹증) - ‘오천’이 ‘목옹’을 위해 시구를 보탰다네.
曾聞寫記庵爲幻(증문사기암위환) - 접때 들으니 기문을 베낀 이는 ‘환암’이고,
今⾒隨⾏號偶澄(금견수행호우징) - 지금 보니 수행자의 법호가 우연찮게 ‘징’이로군.
扶病懶經頑⽯路(부병라경완석로) - 아픈 몸 이끌고 느릿느릿 돌길을 지나다보니,
春⾵不負少年登(춘풍불부소년등) - 춘풍은 소싯적 올랐던 때를 저버리지 않는군.
오천(烏川)은 정몽주, 목옹(牧翁)은 이색이다. 춘풍은 소싯적 올랐을 때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환암은 누구일까? 자는 무작(無作), 법명은 혼수(混脩)였다. 일찍이 나옹혜근에게 신표를 받고 한때 ‘조계종대종사’가 되어 송광사에도 머물렀다. 공민왕이 극진히 우왕ㆍ창왕ㆍ공양왕이 왕사ㆍ국사로 초빙하였으나 한곳에 머물지 않고 주지를 맡지 않았다. 청주 서운사에서 대장경을 봉안할 때, 왕위에 오르기 전 이성계가 법회를 주관하였을 만큼 각별하였는데, 1392년 7월 ‘감록국사(監錄國事)’로 국왕에 오르고 두어 달 후 세상을 떠났다. 법랍(法臘) 환갑, 세수 일흔셋이었다. 태조가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고 권근(權近)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여 그 탑비가 지금 옛 자취를 거의 잃어버린 충주 청룡사에 있다.15) 이에 따르면 “글짓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붓을 들면 사어(辭語)가 정미하고 특히 편지를 잘 써서 식자들이 칭송하였다.”
15) 권근, 「有明朝鮮國普覺國師碑銘」, 『양촌집』 권37,
그런 만큼 당대 유자와 친분이 두터웠는데 특히 이숭인이 “幻菴吾所畏 환암은 내가 경외하는 분, 妙處世猶知 묘한 경지는 세상에서도 알고 있지” 하였고, 그의 시권을 보고 감회가 남달랐다.16)
16) 李崇仁, 「偶唫錄 奉千峯⽅外契」 『陶隱集』 권2 및 「題幻菴卷」, 상동 권3,
⼤地浮漚上(대지부구상) - 대지는 물거품 위에
多⽣閃電中(다생섬전중) - 뭇 생명은 번갯불 속에
安⾝定何處(안신정하처) - 안신처는 어디일까,
敢問幻菴翁(감문환암옹) - 감히 환암 어른께 물을까 하노라.
물론 이색과도 절친하였다. 다음은 「환암기」 중의 한 구절이다.17)
17) 이색, 「幻菴記」 『목은문고』 권4,
“나는 약관 이전에 산중에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장년이 가까울 때 열여덟 유생과 동아리를 맺고 서로 좋아하였는데 지금 천태 원공(圓公)과 조계 수공(修公)도 참여하였으니 서로 사귐이 깊고 서로 기다림이 두터웠음을 다시 무슨 말을 하리.”
‘천태 원공’은 자세하지 않고, ‘조계 수공’이 바로 혼수(混修) 즉 환암이다. ‘절간이 환암의 법회가 간다며 남으로 갈 때’도 적었다.18)
18) 이색, 「絶磵南赴幻菴法會 過⾨告別」 『목은시고』 권31
幻菴詩酒少同遊(환암시주소동유) - 환암은 소싯적 시와 술로 어울렸던 벗님
中歲參禪⽼歇休(중세참선노헐휴) - 중년 참선이라 이젠 늙어 쉬어야해.
俯爲世⼈弘⼤法(부위세인홍대법) - 굽어 세상을 살피며 불법을 크게 펼치니,
寶⼭應⾒衆來求(보산응견중래구) - 보배 가득한 산에 응당 중생도 찾아보리라.
이러한 환암(幻庵)이 기문을 베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녕 김인후는 정도전에 대해서는 침묵하였다. 그만큼 부르기 힘든 이름이 된 것인지? 하여튼 김인후는 정몽주의 쌍계루 제시를 맨 처음 따랐던 학인이었다. 호남 유일의 문묘에 오른 선현이다.
김인후는 벼슬할 때 노수신과 절친하였다. 그런데 을사사화가 일어날 때 김인후는 옥과현감으로 내려와 있어 화를 당하지 않았지만, 노수신은 순천 거쳐 진도에서 유배를 살았다. 두 사람은 소식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그런 중에 1560년 1월 16일 김인후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노수신은 오열하였다. 200자 장편 만사를 보냈는데, “往昔河西遇 지난 날 하서를 만나 來遊泮上偕 태학에서 함께 어울렸지”로 시작하여 “庚申歲三⽉ 경신년 삼월, 天地⼀穌齋 천지간에 소재는 외톨이”로 마쳤다.19) 1월에 떠났는데 3월이라고 함은 이때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2년 후, 진도 유배 15년째이던 1562년 2월, “승려 성진(性眞)이 백암사적(⽩巖事蹟)을 가져오며 포은(圃隱)과 하서(河西)의 시를 보여주었다.” 아스라하였다.
19)노수신, 「哭河西」 및 「次韻寄題雙溪樓, 壬戌⼆⽉ 僧性眞袖⽩巖事蹟來謁 ⾒圃隱河西詩」, 『穌齋集』 권4.
不煩灰刦問胡僧(불번회겁문호승) - 겁화의 잿더미를 번거롭게 호승에게 묻지 않아도,
記蹟重新攷可能(기적중신고가능) - 문적에서 새롭게 올린 자취를 상고할 수있네.
海左宗儒餘事⾸(해좌종유여사수) - 동국 유종이 시가 첫머리에 있는데,
河西後學嗣⾳增(하서후학사음증) - 후학 하서가 차운시를 보탰구려.
百年孤嶼衰容槁(백년고서쇠용고) - 백년 외론 섬에서 야윈 몰골 야위고 시들어가도
⼀夢雙溪爽氣澄(일몽쌍계상기징) - 쌍계루 한바탕 꿈에 상쾌한 기분 맑기도 해라.
吾道應爲曠世感(오도응위광세감) - 우리 도가 응당 다른 세상에서 감응하니,
此樓曾有幾⼈登(차루증유기인등) - 이 누각에 일찍이 몇사람이나 올랐던고?
바다 왼쪽 해좌(海左)는 우리나라. ‘종유’는 동방 유학의 마루인 포은, ‘하서후학’은 하서가 포은의 학문을 계승하였다는 것이다. 사음(嗣⾳)은 이어지는 소식이니 포은의 시에 차운함을 말한다. 광세(曠世)는 다른 세월이거나 너른 혹은 밝은 세계로, 광세지감(曠世之感)이라고 하면 다른 세상에 태어난 아쉬움, 광세상감(曠世相感)이라고 하면 세월은 달라도 깨달음은 같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유학의 글이 불가의 누각에 걸려있어 감응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읽으면 좋겠다. 좋은 생각이 퍼져나가고 착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4. 관청누각, 나주 무이루의 서사: 신숙주ㆍ성임ㆍ김종직ㆍ임억령
나주의 동헌은 벽오헌(碧梧軒)이며 객관은 금성관이다. 금성관 동쪽 성문 가까운 곳에 무이루(撫夷樓)가 있었다. 세조 7년(1461) 4월 좌의정 신숙주(申叔⾈, 1417∼1475)가 성묘 왔다가 무이루에서 감사를 비롯하여 인근 수령, 사족과 만나 사연(射宴)을 가졌다.20)
20) 『세조실록』 24권, 세조 7년 4월 3일; 『保閑齋集』 권8, 「次撫夷樓詩韻」.
登樓集舊友(등루집구우) - 누각에 올라 지난 친구 불러놓고
置酒且張候(치주차장후) - 술상 차리고 과녁을 펼쳐놓았네.
故國千⼭暮(고국천산모) - 고향 온 산 저무니
歸⼼兩鬢秋(귀심양빈추) - 돌아가고픈 마음에 귀밑머리 희끗하네.
杯樽歌舞簇(배준가무족) - 술잔 드니 족두리 노래하고 춤추니
軒冕⾬雲浮(헌면우운부) - 벼슬살이 시름이 비구름에 떠가네.
聚散憐萍⽔(취산연평수) - 모였다 흩어지는 가여운 부평초 가여워서
淸懽夜未休(청환야미휴) - 맑은 놀이를 밤까지 그치질 못하네.
족두리(簇頭⾥)는 여자의 머리 장식으로 기생이며, 헌면(軒冕)은 수레와 면복으로 높은 관직이다. 우운(⾬雲)은 환해(宦海)의 시름이다. 이때 감사는 이해 3월 병든 처 때문에 잠시 한양에 왔다가 귀임한 이효장(李孝⾧)이다.21)
21)『세조실록』 23권, 세조 7년 3월 9일, “全羅道都觀察使李孝⾧이 來⾒하여 病妻辭還하다.…”
얼마 후 세조 10년 감사 성임(成任, 1421∼1484)이 나주를 순행하다가 무이루를 올랐는데 그 감회가 신숙주와는 사뭇 달랐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있다.
⾬餘⼭⾊傷⼼麗(우여산색상심려) - 비갠 후 산 빛에 걱정을 붙잡아매고,
酒後春光滿⾯浮(주후춘광만면부) - 취한 후 봄 햇빛이 가득 얼굴에 뜨누나.
⾵景雖佳⾮我⼟(풍경수가비아토) - 풍경은 아름다우나 내 고장이 아니니
故園從此可歸休(고원종차가귀휴) -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 쉴까 하노라.
신숙주는 무이루에서 시름을 잊었는데 성임은 고단함을 돋았던 것이다. 성임의 이러한 심리를 능주 봉서루(鳳棲樓)에서도 같았다.22)
22) 『속동문선』 권7, 「綾城鳳棲樓」;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 「綾城縣」 鳳棲樓
⽇⽇驅馳不暫閑(일일구치부잠한) - 날마다 달리고 달려 잠시 쉴 틈 없다가
登臨聊復解愁顔(등림요부해수안) - 누각에 올라 겨우 시름 젖은 얼굴 다시 펴네.
閭閻近海春常早(여염근해춘상조) - 여염이 바다에 가까우매 항상 봄이 빠르고,
松⽵當簷夏亦寒(송죽당첨하역한) - 송죽이 처마에 닿으매 여름도 선선하구나.
簾捲⼭光侵畫棟(염권산광침화동) - 발을 걷으니 산 빛이 마룻대 그림에 스미고,
⽇斜花影上雕欄(일사화영상조난) - 해가 비끼니 꽃 그림자는 난간 조각에 오르네.
客中無限思鄕意(객중무한사향의) - 나그네 끝없는 고향 생각,
憑仗詩篇强⾃寬(빙장시편강자관) - 시편에 기대며 애써 스스로 위안하노라
성임에게 전라감사라는 외직은 고단할 따름이고 이때 누각은 공무를 벗어나는 도피처와 같았다. 그러나 ‘사림의 종장’ 김종직(⾦宗直, 1431∼1492)은 달랐다.
김종직은 성종 18년(1487) 전라감사로 왔는데 마침 금성관을 신축한 나주목사 이유인(李有仁,?∼1492)이 망화루(望華樓)를 새로 올리고 감사에게 제시(題詩)를 의뢰하였다.23)
23)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5. 「나주목」 ‘망화루’ ; 김종직, 「나주 이대사가 새로 남루를 짓고 편액을 망화라 하고 시를 청하다 羅州李⼤使諱有仁 新作南樓扁以望華索賦」 『佔畢齋集』 권22.
芝栱鱗簷拂紫霞(지공인첨불자하) - 연꽃 두공 비늘처마에 자줏빛 노을 걸쳐드는데
使君⽇⽇望京華(사군일일망경화) - 사또는 날마다 한양 생각이 가득하네.
碧梧千乳宜棲鳳(벽오천유의서봉) - 벽오동 천 가지는 깃드는 봉황 먹일 만하고,
畫⾓三聲已暝鴉(화각삼성이명아) - 색칠한 뿔피리 세 번에 까마귀 어둠에 드는구나.
蝦菜喧喧通⽔市(하채훤훤통수시) - 어물젓갈 파는 소리 물가 장터에 시끄럽고
⽜⾞轆轆返村家(우차녹록반촌가) - 소 수레 덜그덩덜그덩 마을로 돌아가네.
⼀⽅⾛集樓臺勝(일방주집누대승) - 한 지방 모두 달려오는 도회에 누대가 훌륭하니,
莫恨⾦章滯海涯(막한금장체해애) - 높은 관복 입고 바닷가에 막혔다고 한 하지 마시길.
芝栱(지공)은 연꽃을 그린 두공 즉 지붕받침대, 인첨(鱗簷)은 고기비늘 같은 처마이다. 경화(京華)는 본디 주나라가 도읍한 기산 아래 번화한 큰 언덕으로 서울의 의미로 쓰이지만, 망화로 편액한 심사가 한양을 생각해서인가, 한 것이다. 봉황은 벽오동을 먹고, 화각(畫⾓)은 색칠한 뿔피리이다. 새우 하(蝦), 나물 채(蝦菜)는 어물젓갈 반찬, 수시(⽔市)는 강시(江市) 혹은 해시(海市), 轆轆(녹록)은 우마차 소리이며, 금장(⾦章)은 적초의(⾚綃⾐) 소금대(素⾦帶)와 같은 가선대부 복장이다. 이렇게 누대가 훌륭하고 번화하니 한양이 남부럽지 않다고 한 것이다. 또한 사람 사는 정경이 보이는 듯드러냈다. 성임과는 서사가 판연하다.
김종직은 능주 봉서루에서도 고단한 심사를 토로한 성임과는 결이 다른 소회를 밝힌 바 있다.24)
24)『신증동국여지승람』 권40, 「능성현」 ‘봉서루’; 김종직 「능성 봉서루에 오르다. 바쁜 중에 동봉에 달 오르니 그제야 중추임을 깨닫고 都事 李承福,同年 崔哲錫과조금 마시다 登綾城鳳棲樓 倥傯中⽉上東峯 始悟今⽇爲中秋 與李都事承福 崔同年哲錫⼩飮」『佔畢齋集』 권 21. 도사는 감사의 부관이며 최철석은 자세하지 않다.
連珠⼭上⽉如盤(연주산상월여반) -연주산 위로 쟁반같이 둥근 달이라,
草樹無⾵露氣寒(초수무풍노기한) - 초목은 바람 없어 차가운 이슬을 뿜네.
千陣瑞雲渾欲盡(천진서운혼욕진) - 천 겹 좋은 구름 온통 걷히려하니
⼀堆鈴牒不須看(일퇴영첩불수간) - 한 무더기 바쁜 공문서 볼 틈이 없네.
年華更覺中秋勝(연화갱각중추승) - 시절이 다시금 좋은 중추인 줄 깨달았건만
客況誰知此夜寬(객황수지차야관) - 나그네 형편에 누가 이 밤이 느긋한 줄 알리?
旌旆⼜遵西海轉(정패우준서해전) - 깃발 세우고 또 서해 따라 옮겨 갈 터이니
指尖將擘蟹臍團(지첨장벽해제단) - 손가락으로 둥근 게 배딱지를 쪼개야겠네.
연주산은 능성현의 주봉으로 그 앞으로 지석천이 흐른다. 鈴牒(영첩)은 빨리 전달하라는 표시로 방울을 달았던 공문서, 旌旆(정패)는 감사의 순행을 알리는 깃발, 개 해(蟹), 배꼽 제(臍), 덩어리 단(團)은 둥근 게 배딱지인데, 게는 추석 즈음에 까끄라기 같은 터럭을 빼고 먹는다. 하찮은 안주로 술을 조금만 마셨던 것인데 이 자리에 감사의 부관인 도사와 동년이 있었을 따름이다. 그만큼 감사의 순행에 충실하였음이다.
지금까지 신숙주, 성임, 김종직의 무이루를 중심으로 관청누각에서의 감회를 살펴보았다. 신숙주는 분황 묘제를 마친 연회에 많은 지인이 왔던지라 새삼 심사가 편안했지만, 성임과 김종직은 결이 달랐다.
여기에는 당시 시대 상황에서 그들의 처지와 관련이 있었다. 성임은 훈구, 김종직은 사림의 입장에 있었다. 이후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 격화하며 사화가 일어나지만 결과는 사림이 정치 사회를 주도하게 된다. 그러한 과정의 막바지에 왜구가 전라도 연안을 휩쓸었으니 명종 10년(1555) 여름을 묘왜변이었다. 이때 나주에 도순찰사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이 내려왔고 전라감사를 비롯한 인근 여러 수령이 무이루에 모였다. 당시 왜변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물의를 빚었던 감사 김주(⾦澍, 1512∼1563)가 소회를 피력하였다.25)
25) 김주, 「次羅州撫夷樓韻」, 『寓庵遺集』 권4,
⿈昏獨坐庾公樓(황혼독좌유공루) - 황혼에 혼자 유공루에서 즐기다가
⽻扇論兵愧武侯(우선논병괴무후) - 깃털 부채 들고 병법을 말하자니 무후한테 부끄럽네.
⼩醜陸梁⽅猾夏(소추육량방활하) - 하찮고 추악한 놈이 마구 날뛰며 중하를 짓밟는데,
腐儒疏懶敢防秋(부유소라감방추) - 일 모르는 쓸모없는 선비가 감히 오랑캐를 막겠는가?
調軍到處冤聲動(조군도처원성동) - 군사를 징발하니 도처에서 원성이 진동하니
凱舞何時喜氣浮(개무하시희기부) - 개선의 춤 언제 추며 즐거운 기분 띄우리?
卽⾒王師來破賊(즉견왕사래파적) - 바로 지금 왕사가 적을 깨부쉈으니
病骸收拾合歸休(병해수습합귀휴) - 병든 몸수습하여 함께 돌아가 쉬어야겠네.
庾公樓(유공루)는 동진(東晉) 때 관원들과 밤새 주연을 즐긴 무창(武昌) 태수인 유량(庚亮)의 누각이며, 무후(武侯)는 제갈량(諸葛亮)이다. 육량(陸梁)은 어지러이 날뜀, 활하(猾夏)는 중화를 짓밟음이니 왜구를 이적으로 여겼음이다. 소라(疏懶)는 일을 모르고 게으름, 방추(防秋)는 추수가 되면 쳐들어오는 오랑캐를 막음이다. 안이하고 무책임하였다. 이때 담양부사 임억령(林億齡, 1496∼1568)도 참견하였다.26)
26) 임억령, 「次撫夷樓韻」 『⽯川詩集』 권6,
淸曉悠悠獨上樓(청효유유독상루) - 맑은 새벽 유유히 홀로 누각에 올라,
狂詩到處傲王侯(광시도처오왕후) - 광망한 시구로 도처에서 왕후를 업신여기네.
虛名誤我客多病(허명오아객다병) - 헛된 명성이 날 그르쳐 나그네 병치레 잦고
積潦呑郊農不秋(적료탄교농불추) - 오랜 장마 변두리를 삼켜 농가는 거둘 게 없네.
苦待⾭天⽩⽇出(고대청천백일출) - 푸른 하늘 밝은 해 보기를 고대하는데
如何荒野濕雲浮(여하황야습운부) - 어이하여 거친 들판 습한 구름만 떠있나.
⾮無湖海陳登興(비무호해진등흥) - 호해에 진등 같은 흥취가 없지 않지만
⼈事悤悤那得休(인사총총나득휴) - 인사가 급하고 바쁜데 어찌 쉴 수 있겠나?
왕후는 왕후장상의 준말, 광시(狂詩)는 분별없고 광망한 시구, 김주가 시에서 인근 수령을 낡고 완고한 쓸모없는 부유(腐儒)로 간주함에 대한 힐난이다. 적료(積潦)는 오랜 장마, 탐교(呑郊)의 교(郊)는 성 밖 변두리, 호해(湖海)는 강호와 같은데 여기선 호남이다. 진등(陳登)은 여포를 제거한 기개가 대단한 호걸이나 오만하였다. 김주의 안이함과 남 탓하는 자세가 못마땅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국난(國難)과 피민(疲民)의 세월 무이루에서 같은 문인관료라도 그 서사는 달랐던 것이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태도, 내일을 향한 자세의 다름이다.
젊은 시절 나주 무이루에 오르곤 하였던 젊은 기대승은 친구 정자에서 여러 벗을 만났는데 약속한 벗이 아파 오지 않았을 때의 서정으로 마감하고자 한다.27)
.27) 기대승 「訪仲幹亭⼦ ⼤均以病不來 詩以傳意」 『고봉집』 권1.
南⼭雲起初藏峀(남산운기초장수) - 남산에 구름 일어 봉우리 감추고
西浦潮⽣欲沒洲(서포조생욕몰주) - 서쪽 갯벌에 조수 밀어 모래톱을 덮누나.
佳景不窮⼈獨遠(가경불궁인독원) - 경관은 가없이 아름다운데 사람이 유독 멀다하니
暮堂環坐更牽愁(모당환좌경견수) - 저문 당에 둘러앉아 새삼 시름을 짓노라.
모임에 오지 않던 병든 친구 생각이 담백하고 진솔하다. 경관과 친구, 친구가 컸던 것이다. 기다림은 그리움이며 함께 함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