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는 다른 운동과 달리 그 창시자나 기원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현재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골프기원설은 크게 네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로마시대 시이저(BC100~44) 때 파카니카(Pila Paganica) 스코틀랜드성을 정복한 병사들이 야영지에서 쉬던 중 한쪽 끝이 구부러진 막대기로 새털로 된 공을 치며 즐겼던 놀이가 오늘날 스코틀랜드에 남아 골프가 됐다는 설이다.
둘째로 기원전 네델란드 지방의 어린아이들이 실내에서 즐겨하던 코르프(kolf)라는 경기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13세기 무렵, 네덜란드에서 즐기고 있던 코르(chole)라는 빙상경기가 당시 양모를 중심으로 교역이 활발했던 스코틀랜드에 건너가서 그것이 골프(golf)로 발전됐다는 설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골프가 발전한 지역을 역추적해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당시 네델란드는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남쪽에서부터 북쪽에 걸친 광범위한 지역과 빈번한 교역이 이뤄졌다. 그 대표적인 항구로는 던바, 노스베리크, 매셀버러, 리스, 세인트앤드류스, 도너크, 에든버러, 뮤어필드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 해당도시들에는 공통적으로 전통 깊은 골프장이나 컨트리클럽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해상무역을 통해 스코틀랜드로 건너간 네덜란드의 골프가 어째서 그 발상지인 네델란드에선 쇠퇴하고 오히려 스코틀랜드에서 번창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다음에 나올 스코틀랜드 기원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모래언덕, 산토끼, 양, 갈매기 등과 같이 골프장을 만들어가는데 필요한 자연조건을 풍부히 갖추고 있었으며 골프채(롱노이즈)의 원재료가 되는 나무도 스코틀랜드에 풍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네덜란드에서는 15세기에 모습이 사라져 버린 골프가 스코틀랜드에서는 크게 발전했던 것이다.
한편 1296년 네덜란드의 런넨이라는 도시에서는 코르를 빙상이 아닌 교회의 뒤뜰이나 수확이 끝난 도로 등에 4홀 규모로 경기장을 마련해 놓고 행하기도 했다.
위에서 말하는 코르는 롱노이즈라는 나무로 만든 스틱으로 코르크 모양의 볼을 치며 승부를 겨루던 경기이다. 경기방식은 빙상에서 할 경우 얼음구멍에 볼을 넣거나 볼을 말뚝에 맞히든가 해서 승부를 겨루던 것이다. 그러나 빙상이 아닌 육지에서 겨룰 때는 구멍을 파고 거기에 볼을 쳐넣는 비교적으로 단순한 게임이었다. 이는 당시의 교회 그림에도 남아있다.
셋째로 스코틀랜드의 양치기 소년들이 양떼를 돌보면서 스틱으로 돌을 쳐서 들토끼의 구멍에 넣으며 즐기던 것이 골프의 시초됐다는 설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사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든다. 하지만 이 스코틀랜드 양치기 소년들의 골프설도 그 정확한 근거를 찾아 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현재로선 유럽대륙에 있던 골프와 유사한 놀이가 스코틀랜드에서 독자적으로 육성되었다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여하튼 골프의 기원은 확실히 어느 나라인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골프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꾸준히 발전돼 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스코틀랜드 골프 융성설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골프(Golf)'란 스코틀랜드의 오래된 언어로 '치다'인 '고프(Gouft)'가 그 어원이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지방의 지형이 골프장으로는 적격이었다. 스코틀랜드 북방쪽 해안에는 링크스(Links)라고 불리는 기복이 많은 초원이 있었다. 멋진 잔디와 잡목이 우거진 작은 언덕으로 이어진 지형은 골프코스로 하기에 적합했다. 더우기 이곳은 공유지여서 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한편 이 당시 들토끼가 많이 서식해 그들이 잔디를 깎아 먹어 평탄하게 된 곳을 그린(Green)이라고 불렀고, 그린과 그린을 연결하는, 양떼들이 밟아 평탄해진 넓은 길을 페어웨이(Fair way)라고 불렀다. 이 때의 그린이 바로 오늘날 퍼팅그린이 됐고, 양떼의 길은 페어웨이가 됐다.
'페어웨이'란 항해용어로 '바다의 안전한 길', 즉 '바위 사이의 안전한 항로'라는 뜻이다. 이처럼 골프의 안전한 플레이 지대에 항해용어를 인용한 사실로 미뤄보아 해상무역과 골프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클럽, 즉 롱노이즈 등을 만드는데 쓰이는 재료인 나목들이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생산되었다는 점도 스코틀랜드 골프 융성설의 증거가 되고 있다. 스코틀랜드에 러시아나 캐나다에서 히코리목이 수입돼 클럽의 샤프트로 쓰였으며 높은 가공기술을 보유한 클럽제조 직공들도 많이 나왔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교전상태에 있어 활 등 무기를 만드는 직공들이 골프클럽도 만들어 많은 부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한편 이들은 클럽의 헤드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납을 넣는 기술을 개발했다. 또 볼을 맞히는 클럽헤드의 페이스면을 보호하기 위해 양의 뿔을 깎아 만든 인서트를 끼웠다고 한다.
이러한 목동들의 놀이는 처음에는 서민들의 놀이로 성행했다가 골프금지령이 내려진 후로는 서민들이 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특권층인 왕족만이 할 수 있게 돼 오히려 나중에는 아예 궁중안으로 들어가 왕족들의 경기로 바뀌게 됐다. 여러 차례 금지령과 해제의 과정을 거듭하다가 국민의 권리가 점차 인정되면서 서민도 골프를 즐길 수 있게 됐는데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4세로서 1520년에 퍼스(perth)에 활 제작자에게 골프채 한세트와 공을 구입해 골프를 하게 된 것이다.
한편 1567년에는 스코틀랜드 메리여왕이 그녀의 남편인 찰리경이 죽자마자 시튼하우스에서 골프를 해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리고 1592년 당시 리스(leith)에서는 일요일에 골프를 하는 것이 금지됐슴에도 불구하고 세인트앤드류스의 대주교는 지역주민에게 일요일에 골프를 하는 것을 허락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17세기에 스코틀랜드 왕인 제임스 6세가 영국의 왕 제임스 1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런던 근교인 블랙 히스(black heath)로 그의 신하들과 같이 갈 때까지는 골프에 대한 기록이 없었다. 그 후 빈센트 광장의 웨스트민스터 학교의 운동장이 된 터틀 필드(tuttle field)에서 골프경기가 열렸다고 한다. 이 터틀 필드는 학생들에게 업 필드(up field)라고 불려졌다. 이곳은 정규코스와 다르고 경기방식도 현재와 달랐다.
넷째로 골프기원설에는 중국설이 있다. 본래 중국에서는 골프를 '츠이완'이라 불렀는데, 이미 943년에 간행된 남당(南唐)의 사서(史書)에 이 사실이 쓰여 있다는 주장이다. 환경(丸經)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골프경기자들은 서로 예의를 존중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플레이를 생각할 정도로 예전부터 신사의 경기였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 1991년 중국 감숙성(甘肅省)의 한 사범대학 체육학부 교수인 링홍링(凌弘嶸)은 호주의 한 학회지에 "골프의 원조는 중국" 이라는 글을 발표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편 근거로는 지금까지 공인된 골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457년에 스코틀랜드의 왕이었던 제임스2세가 국민들이 골프에 너무 몰두해 영국과의 전쟁에서 국가방위에 필요한 무예연습과 신앙생활을 게을리했기 때문에 '12세 이상 50세까지의 모든 국민들에게 골프를 금지한다' 는 국회기록인데 비해 현재 중국에 남아 있는 골프에 대한 기록은 이보다 무려 514년이나 앞선다는 사실이다. 한편 원(元)나라 때 그려진 '추환도벽화(推丸圖壁畵)'에도 오늘날 골프 형태의 경기를 하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들판에 그다지 높지 않은 작은 언덕이 있고, 그 사이로 해저드에 해당하는 냇물이 흐르는 가운데 네 명의 사나이가 경기를 펼치고 있는 장면의 그림이라고 한다.
일찍이 고대 로마에서 행해진 골프의 사촌격인 '파가니카'는 목표까지 가장 적은 타수를 기록한 사람이 이기는 경기였는데, 기원 10세기 중국에서도 볼을 땅구멍에 집어넣는 시합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명대(明代)에 그려진 '선종행락도(宣宗行樂圖)'라는 그림에는 이와 같은 사실을 더욱 확실하게 입증한다. 건장한 체구의 선종(宣宗)이 양손에 클럽을 쥔 채 몇번채로 샷을 할까 망설이며 전방을 응시하고 있다. 길 한복판에 심어진 나무들은 줄기의 중간에서 인위적으로 굽혀져 마치 창문처럼 둥근 공간을 이루는데 그 높이는 지상 10미터 가량에 위치한다. 한 타로써 그 공간으로 공을 날릴 모양이다. 이 그림의 한 쪽 구석에는 클럽을 들고 달려 오는 캐디, 구동(球童)의 모습도 보인다. '추환'은 본래 중국대륙에서 행해진 '보타구(步打球)'라는 경기가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는 분명하지 않지만, 943년까지는 문헌으로 고증되고 있다.
12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중국에서는 당시 성행하던 추환을 위해 '환경(丸經)'이라는 골프규정집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볼은 단단한 나무의 공이를 깎아 '권(權)'이라 불렀으며, 클럽은 '구봉(毬棒)'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1타는 '초봉(初棒)' 제2타는 '이봉(二棒)'이라고 했다. 그 룰에 의하면, 초봉은 오늘날 티 위에 볼을 올려놓고 칠 수 있는 것처럼 볼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이봉 이후는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샷해야 되고, 홀아웃할 때까지 절대로 공에 손을 댈 수 없도록 했다.
한편 '환경(丸經)'에는 공이 놓여진 상태를 10가지로 분류했다. 그 중 '평(平)'은 평지, '요(凹)' '철(凸)'은 글자 모양 그대로이고, '앙(仰)'은 어게인스트, '준(峻)'은 다운 힐, '외'는 아마 OB로 짐작된다.
한 홀의 기준타수는 홀 공히 파 3인데, 한 타 적게 쳐서 홀아웃할 경우 일주(一籌)를 얻게 된다. 말하자면 버디를 해야만 이길 수 있고 홀인원은 이주(二籌)인 것이다. 한편 경기가 백중해 그 날 해가 저물도록 승부가 나지 않을 때는 다음 날 재경기를 했다고 한다.
'환경'에 쓰여 있기를, 플레이어가 서로 장시간에 걸쳐 한 타의 승패를 겨루는지라 선수들은 예의를 존중하였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플레이를 생각해야 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유리한 룰 해석은 엄격히 금했다고 한다.
골프의 기원은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행해진 목동들의 민속놀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동들은 넓은 초원에서 무료할 때 초원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양몰이 지팡이로 쳐서 토끼 굴속에 집어넣은 게임을 하였는데, 이것이 많은 목동들로부터 좋은 호응을 얻어 점차 목동들의 고유놀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18세기에 들어 최초의 골프 클럽과 협회가 생겼고 골프의 규칙과 전문적인 골프 용구 제작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기록에 나와 있는 최초의 골프 경기는 1766년에 영국의 블랙히스 (Black Heath)에서 열렸다고 한다. 이 당시의 클럽 회원들은 빨간 색의 긴 코트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여러 개의 골프채를 팔에 낀 캐디를 동반하고 플레이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홀의 깊이는 30∼40cm나 되었으며 티 업(Tee Up)하는 장소도 일정하지 않았고 오 늘날과 같은 그린도 없었다고 한다.
스코틀랜드 지방에서 성행하기 시작한 골프 경기는 그후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최초의 골프 경기 규칙은 1744년에 세인트 앤드루즈 클럽에서 공식 경기를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13개 조항으로 되어있다. 이 규칙은 오늘날의 규칙을 만드는데 원전이 되었으 며 오늘날의 경기 규칙도 거의 이 13개 조항에 준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공식적인 골프 경기는 1860년에 스코틀랜드의 프레스트 윅(Prest Wick)클럽 주최로 열린 제1회 영국골프선수권대회였다. 그후 골프는 19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골프장이 탄생한 것은 1888년이다. 1894년에 미국골프협회가 창립되었고 1895년에 는 제1회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었으며, 같은 해에 전미오픈선수권대회도 시작되었다.
골프의 기원과 발상지는 과연 어디일까? 명쾌한 정답은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동서를 불문하고 골프라는 것이 신사의 스포츠였던 것 만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골프의 역사
우리나라 골프의 시초는 지금부터 80여년 전 원산의 세관 안에 있던 영국인들이 6홀을 만들어 경기한 것이 처음이며, 일제 시대에 일인 관리와 사업가들을 통하여 한국인들에게 전파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조선은 일본 골프의 발상지이다]라고 되어있으며 원산 코스의 건설 연대도 1900년이라는 통설을 뒤집어 1897년이라고 적혀있다. 일본에서 처음 골프 코스가 만들어진 것이 1903년인데 반하여 한국에는 그보다 6년 앞선 1897년에 원산항의 한국정부 세관관리로 고용된 영국인들이 세관 구내에 6홀의 코스를 만들어 골프를 즐겼다고 되어있다. 그 자료에는 1913년 원산 근처 갈문 반도의 외인촌, 그리고 황해도의 구미포에도 외국인들의 코스가 있었는데, 목책으로 엄중히 막아 한국인은 물론 일인의 출입도 금지하였기 때문에 그 규모는 알 수 없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우리나라 골프사에 빼놓을 수 없는 중요인물은 영친왕이다. 영친왕 부처는 1924년경부터 일본에서 골프를 즐겼고, 가끔 서울에 와서 경기를 하였는데 일본 골프 협회가 27년부터 시작한 [아마 동서대항경기]에 트로피를 하사하기도 했다. 1924년 조선 철도국에 의하여 서울 효창공원 안에 9홀의 코스가 세워졌는데 이때에 우리나라 골프 사상 처음으로 [경성 구락부]라는 골프 클럽이 탄생하였다. 그 후 청량리를 비롯한 대구, 평양, 부산, 원산 등지에 골프 코스가 잇달아 생겨 보급되었지만, 골프를 가르칠 사람이 없어 33년 경성 클럽은 일본에서 천칭수이, 나카무라 켄키치 등을 서울에 초청하여 레슨도 받고 시범경기도 가졌다. 이 때 한국인으로는 박용균, 장병량 외에 약 50여명의 선수가 있었다.
우리나라 프로 골프의 역사는 연덕춘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군자리 코스 (후일 서울 컨트리 클럽이며, 현재는 어린이 대공원이다.)에서 17세 때부터 골프를 배우고 뛰어난 재질을 보여 일본인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서 골프를 배워 3년 만에 일본 오픈에 출전, 8위에 올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41년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오픈에서 패권을 잡았으며 그가 배출한 수많은 프로 선수 중에서 한장상이 72년 일본오픈에서 두 번째로 우승하였다. 그 해는 연덕춘이 한국 프로 골프(PGA)회장에 뽑히기도 한 해였다. 71년 한장상, 김승학 조는 미국에서 열렸던 월드컵 골프에서 선전을 하여 단체 5위에 드는 기염을 토했다. 같은 해에 한 장상은 또 일본 오픈과 한국 오픈을 모두 제패하였고, 이에 더하여 74년 조태운이 한국 오픈에서 우승을 차지함으로써 한국 프로 선수들은 큰 타이틀 5개를 획득하는 사상 초유의 황금의 3년을 맞이하였다. 현재에도 구옥희, 고우순, 한희원 등이 일본프로골프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특히 박세리, 김미현은 세계적으로 이름을 빛내고 있다.
아래 골프 다이제스트에서 발췌한 연도별 역사를 적어 놓았다..
연도별 골프게임의 역사
발명과 업적, 그리고 골프의 기원을 열었던 한명인가 두명인가의 양치기를 뒤로 한채 골프의 역사가
미래로 향하고 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 모아놓은 골프의 문화 유물들을
통하여 살펴보면 우리들이 제대로 길을 가고 있으며, 어두웠던 구석은 서너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초창기엔 골프가 콜븐으로 불리웠다고 알고 있지만 종종 얼음위에서 플레이했던 그 게임
은 아마도 이상한 윈터 룰이 탄생한 지역에서 있었던 게임이었을 것이다. 여기 우리가 알고 있는 골프에
관한 사실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보았다.
1457년: 골프에 대한 언급이 기록으로 처음 나타난 것은 스코틀랜드의 법령속에서였다. 제임스왕은
기사들이 골프를 치느라 전시에 대비한 활쏘기를 등한시한다는 이유로 골프 게임을 금지시켰다.
1637 : 한 소년이 골프볼을 훔쳤다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끔찍한 일이긴 하지만 볼이 비쌌던 관계로 교수
형이란 엄벌이 내려졌다.
1743 : 골프클럽과 볼이 미국으로 가는 배에 선적되었다는 첫 기록이 나타났다( 스코틀랜드의 리스항에서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톤으로 향하는 배였음).
1744 : 명예로운 에딘버러 골퍼들의 모임이란 집단에서 처음으로 규칙을 제정했다. 13개 규칙중 한가지는
"액체성 오물"로 부터의 구제 규정이었다.
1764 : 세인트 앤드류스의 코스를 개정하여 22홀을 18홀로 줄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골프가 18홀 게임이
된 이유이다.
1829 : 대영제국이 가는 곳이면 어디나 골프가 함께 따라갔다. 인도에서 로열 캘커타 골프클럽이 문을 열
었다. 이는 현존하는 골프클럽중 영국 제도 외에선 가장 오래된 클럽이다.
1848 : 깃털로 만들어졌던 볼이 거터퍼처로 만들어진 원 피스 볼로 대체되었다. 거터퍼처는 고무와 비슷한
물질로 지금도 이빨 치료에 이용되고 있다.
1860 : 최초의 브리티시 오픈이 8명의 프로가 참가한 가운데 열렸으며 이들은 프레스트윅의 12홀 코스를
하루에 세번 도는 것으로 대회를 치렀다. 윌리 파크가 종합 1백 74타를 기록하며 톰 모리스 1세를
2타 차이로 누르고 우승했다.
1872 : 톰 모리스 2세가 자신의 아버지를 꺾고 그의 네번째 브리티시 오픈 우승을 기록했다.
1888 : 뉴욕주 용커스에서 세인트 앤드류스 클럽이 결성되었다. 이는 미국에서 지금까지 운영되어온 골프
클럽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1894 : 다섯 개의 미국 골프 클럽중 두 곳이 각각 "전국 선수권전" 이라 불린 대회의 무대가 되고 난 후 이들을
중심으로 USGA가 결성되었다.
1898 : 가운데의 중심핵에 고무줄을 감아준 헤스켈 볼이 발명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하룻밤 새에 15야드를
더 멀리 날릴수 있게 되었다.
1900 : 여섯번 브리티시 오픈에서 우승한 해리 바든이 오랫동안 미국을 돌며 미국 골프의 부흥 계기를 마련했다.
그때 그는 US 오픈에서도 우승을 거두었다.
1902 : 동부의 아리조나 주립대로 통했던 하바드가 대학팀간 상호 교환 선수권전에서 5연승을 구가했다.
1903 : 오크몬트가 서부 펜실베니아에서 문을 열었다. 바람많은 영국의 링크스 코스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지만
어쨌든 미국의 원조가 되었다.
42세의 월터 트래비스가 시거를 물고는 이상하게 생긴 셰넥터디 퍼터를 사용하여 브리티시 아마추어에서
우승했으나 큰 돈은 만지지 못했다. 7년뒤 R & A 는 (1952년 까지)중앙 연결형 샤프트 클럽의 사용을 금지
시켰다.
1905 : 라이튼 코킨스가 처음으로 핸디캡 체계를 개발하여 USGA의 승인을 받았다. 코킨스는 뒤에 은퇴하여
나체촌으로 들어가 버렸다.
1909 : USGA에서 보수를 받고 캐디일을 했거나 15세 이상된 사람은 아마추어 지위를 상실한다고 발표했다.
신중하지 못한 일이었다.
1910 : US 오픈등 4승 선수였던 윌리 앤더슨이 동맥경화 때문에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는데 당시 이는 알콜 중독의
완곡어법이었다.
1911 : 찰스 블레어 맥도널드가 롱 아일랜드에 화려한 내셔널 골프 링크스 오브 아메리카를 개장했는데 대부분의
홀이 영국 최고의 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파"에 대하여 홀당 2퍼트만 허용하는 완벽한 플레이라는 정의가 내려졌다.
1912 : 메리언의 회원이었던 휴 윌슨이 필라델피아 외곽에 메리언의 동코스를 설계했다. 이는 고전적 코스가 되었다.
1913 : 20살의 지방 아마추어 프란시시 위멧이 영국의 최고봉 해리 바든과 테드 레이를 연장 결승에서 꺾고 매사추
세츠주 브룩크린의 더 컨트리 클럽에서 US 오픈의 우승을 차지했다. 이는 역사상 가장 의미있는 골프 라운드
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멧은 주먹을 불끈쥐고 흔들지 않았다.
1916 : 시카고의 아마추어 칙 에번스가 한해에 US아마추어와 US오픈을 모두 휩쓴 첫 선수가 되었다. 에번스는
뒤에 자기 명의로 캐디 장학제도를 만들었으며, 이는 지금도 여전히 골프계 최고의 자선 활동으로 남아있다.
그의 덕택에 7천명의 캐디가 대학에 갈 수 있었다.
.PGA 오브 아메리카가 설립되었으며, 첫 PGA 선수권전이 개최되었다. 첫 대회후 우승은 짐 반스가 차지했다.
1918 : 파인 밸리의 발견자이자 설립자이며 자금원이었던 조지 클럼프가 그의 걸작을 일부분만 완성한 채 죽고나서
몇 년이 지난 이때 드디어 코스가 문을 열었다. 이는 놀랍도록 독특한 몇몇 홀로 인하여 즉각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너무 어려웠다. (이 코스는 여전히 뛰어난 코스로 남아있지만 까다롭던 가장자리 지역을 제거하여
훨씬 쉬워졌다.)
1919 : 개발업자 사뮤엘 모스가 몬터레이 반도를 따라 펼쳐져 있던 자신의 값진 땅중 최고의 부분을 주택 건설지가
아니라 골프 홀에 배분했다. 그것이 바로 페블 비치였다.
1920 : US오픈이 개최된 인버니스의 그린이 지독할 정도로 형편없었다. USGA는 아마도 사상 최고의 대책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한 "그린 담당국"을 설립했다. 이 부서의 과학자들은 즉각 골프의 잔디를 개선하기 위하여 효과가
증명된 재배법을 채택했다.
. 조지 그랜트 박사가 나무티로 첫 특허를 받고 나서 22년이 지난 이때 "레디 티"가 현대적인 티펙으로 자리를
잡았다.
1921 : 무게는 1.62 온스보다 무거워선 안되며, 직경은 1.62인치 보다 작아선 안된다는 골프 볼의 표준이 처음 채택
되었다. 예전엔 볼의 크기와 무게가 다양했었다.
1922 : 골프가 상업적으로 폭발적으로 성장을 하면서 처음으로 US오픈의 입장권이 발매되었다. 그전에는 입장이
무료였다.
.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국제 대결 시리즈인 워커 컵이 처음으로 열려 미국팀이 영국과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아마추어 군단을 손쉽게 누르고 우승했다. 아무도 주먹을 불끈쥐고 흔들지 않았다.
1923 : 21세의 보비 존스가 메이저 대회인 US오픈에서 우승의 돌파구를 열며 1916년 이래 처음 나타난 골프 귀재로
찬사를 받았다.
1925 : 10년간의 긴 논쟁끝에 USGA가 스틸 샤프트를 허용했다. 이유는 오랫동안 선택되어 왔던 히코리 샤프트가
공급부족현상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7 : 월터 헤이건이 자신의 다섯번째 PGA 선수권전을 거머쥐며 4연승을 치달았다. 당시의 대회는 6일동안 12라운
드 일정으로 치러졌다.
. 첫 라이더 컵 시합에서 미국팀이 영국을 참패시켰다.
. PGA 오브 아메리카에 의해 비공식적 겨울 대회 몇 개가 "투어"란 이름으로 구성되었다. 그뒤로 41년 동안
이 골프투어는 플로리다에 있는 PGA본부에서 후원해준 사무실에서 운영이 되었다.
1928 : "단 한 코스에서만 플레이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 플레이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최고의 답변이 될 수 있는
코스가 문을 열었다. 그것은 바로 페블 비치의 옆에 들어선 사이프리스 포인트였다.
1930 : 보비 존스가 드디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으며, 28세의 나이에 그것을 끝으로 대회출전을 그만두었다.
1931 : 보비 존스가 책을 쓰고 일련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나서면서 많은 돈을 받고는 자신의 아마추어 지위를 포기
했다. "단편"이라 불리웠던 그 영화들은 영화관에서 본 영화 사이에 틀어주는 것이었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 타격거리를 제한하기 위하여 USGA에서 볼의 직경을 1.68인치로 높이고, 무게는 1.55 온스로 낮추었다.
좋은 소식은 새로운 볼도 공중으로 잘 떴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바람이 불면 제어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1932 : 여성판 워커 컵인 커티스 컵이 시작되어 미국이 승리를 거두었다. 이 컵은 보스톤 태생으로 모두 전 US 아마
추어 대회 우승자였던 해리언과 매거리트 커티스 자매가 기증한 것이었다.
. 진 사라젠이 샌드웨지를 사용하여 US오픈과 브리티시 오픈 모두 우승으로 이끌면서 이 클럽을 크게 유행
시켰다. 그것은 골프 상점에서 "샷을 구입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 USGA에서 볼의 무게를 다시 1.62 온스로 환원했다. 그뒤로 볼의 크기와 무게 제한선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 앨리스터 매캔지가 보비 존스로부터 끊임없이 조언을 받아가며 설계한 오거크타 내셔널 골프클럽이 문을
열었다. 이 코스엔 아직 매켄지가 설계한 명작 홀이 서너개 남아있긴 하지만 그뒤로 여러사람의 손을 거치며
유명한 잡종코스로 진화해 갔다.
1934 : 보비 존스의 후원으로 오거스터 내셔널 초빙 대회가 시작되었으며, 이는 뒤에 곧 마스터즈 대회로 발전했다.
1935 : 진 사라젠이 존스와 헤이건, 그리고 그밖의 참석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거스터의 15번 홀을 2타에 정복하여
더블 이글을 잡았다.
. 올림픽의 여자 영웅 베이브 디드릭슨이 최고의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플레이하기로 결정하고 텍사스 오픈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나 실격당하고 말았다. 이유는 다른 스포츠에서 돈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규칙은
1944년에 가서야 바뀌었다.)
. 글레너 콜레트 베어가 자신의 여섯번째 US여자 아마추어 대회의 우승을 기록했다.
1936 : 미시건의 변호사 조니 피셔가 US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는 미국의 전국 선수권전에서 나무로된 샤프
트의 클럽을 사용하여 우승을 거둔 마지막 선수이다.
. 대공황이 일어났다. 곳곳의 골프 코스가 문을 닫았다. 1932년 1천 1백 48개로 최고를 기록했던 USGA의 회원
클럽이 7백 62개로 격감했다.
1938 : 샘 스니드가 투어에서 8승을 올리며 1만 9천 5백 34달러의 믿기지 않는 상금을 벌어들였다.
. USGA에서 클럽의 최대 소지한도를 14개로 정한 규칙을 채택했다.
1939 : 바이런 넬슨이 36홀 연장끝에 US오픈에서 우승했다. 6라운드 동안 넬슨은 1번 아이언으로 하나의 홀인원을
기록했고, 다섯번의 샷이 깃대를 때리는 기록을 남겼다.
1940 : 투어 생활 10년만에 마침내 벤 호건이 파인허스트에서 열린 남북 오픈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1941 : 진주만이 폭격당했다. USGA에선 1차 대전때와 마찬가지로 2차 대전동안 US오픈을 중지한다고 발표했다.
(1942년에는 헤일 아메리카 오픈이라 불린 대회가 열렸지만 그것은 US오픈이 아니다.)
1943 : 2차 대전동안 플레이를 중지한 오거스터 내셔널 골프 클럽의 페이웨이를 소와 칠면조들이 거닐었다.
1945 : 바이런 넬슨이 연속 11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그해 그가 울퉁불퉁한 그린에서 세워놓은 평균 점수 68.3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고 있는 신기록이다.
1946 : 농경학자 글렌 버튼이 USGA로부터 무더위에 강한 다양한 잔디를 개발하기 위한 지원을 받았다. 미국 남부의
온난지대에서는 골프가 점점더 인기를 높여갔다.
1947 : 파를 대신하여 핸디캡 계산의 핵심적 원리로 사용할 수 있는 "코스 난이도"계산법이 개발되었다.
. 미국에서 처음으로 골프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었다. 세인트 루이스 지방 방송국이 한 대의 카메라로 US오
픈을 중계한 것이었다. 오늘날엔 NBC 가 지속적 중계를 위하여 40대 이상의 카메라를 동원하고 있다.
. 전 PGA투어 감독인 봅 할로우가 노스캐롤라이나주 파인허스트에서 <골프 월드> 잡지를 창간했다.
1948 : 골프 카트가 처음으로 특허를 받았다. 가장 초창기의 모델은 클러치와 기본적인 기어 변환장치만 갖춘 거의
원시적인 제품이었다.
1950 : 노스웨스턴 대학의 졸업생이었던 데이비스, 하워드 질, 잭 바네트가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잡지, 바로 다름아닌 <골프다이제스트>를 창간했다.
. 12명의 설립 위원이 한자리에 모여 LPGA를 창립했다.
1951 : 벤 호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태양을 쫓아가다"가 포트 워스에서 상영되었다. 출연 배우인 앤 박스터는
멋졌으나 글렌 포드의 플레이는 엉망이었다.
. USGA와 R&A가 성공적인 정상 회담을 가졌다. 세계공통의 플레이 규칙안이 채택되었다. 그 과정에서
양 단체는 옛날의 매치 플레이때 적용되던 방해구 (스티미) 조항을 삭제했다.
1952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와 그의 친구 아놀드 파머는 골프 게임의 대중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으로 재임한 8년동안 45차례나 오거스타 내셔널을 방문했다.
덕분에 골프 회의론자들도 골프를 좋게 생각하게 되었다.
1953 : 호건의 가장 위대했던 해. 그는 마스터즈와 US오픈, 브리티시 오픈의 3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했다.
1954 : 베이브 디드릭슨 자하리어스가 위암 수술을 받고 난 뒤 US여자 오픈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그녀는 암으로
2년뒤 사망했다.
. 발투스롤에서 열린 US오픈 기간동안 처음으로 골프대회가 미국 전역에 중계되었다.
1957 : 폭발적 골프 대중화를 이룩한 일본이 골프 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오늘날 일본보다 코스가 많은
나라는 미국뿐이다.
.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젊은이가 아이언 세트를 구입한 뒤, 롱 아일랜드의 고급 클럽 두 곳에 가입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 젊은이는 드라이버 하나를 사는데 1957년에 들어갔던 그 모든 골프비용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1958 : 아놀드 파머가 마스터즈에서 처음으로 우승을 거두었다. 그뒤로 그는 3번의 우승을 더 챙겼다. 허버트 워렌
윈드 기자는 오거스터의 11번 홀에서 13번 홀을 일컫는 "아멘 코너"란 말을 만들어 냈다.
1960 : 아놀드 파머가 그랜드 슬램의 개념을 새로이 정립해 놓았다. 그는 마스터즈와 US오픈에서 우승한 뒤 브리
티시 오픈과 PGA선수권전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브리티시 오픈에서는 2위에 그쳤지만 그의 존재는 그 선
수권전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었다.
. "퍼팅 그린 건축을 위한 표준안"이 USGA에서 발행되었다. 토양보다는 모래의 이용에 강조점을 두었던 관계
로 논란이 많았던 방법이었으나 비용이 많이 들긴 했어도 사실상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것이 증명되었다.
1961 : PGA오브 아메리카 회원을 백인으로만 제한하는 규정을 철폐하라는 공격에 부딪쳐 결국 이를 수용했다.
. ABC 스포츠의 이사 룬 알레지가 브리티시 오픈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는 기회를 얻었다. 사실 그는 대회
를 촬영한 뒤, 이를 곧장 뉴욕으로 갖고 와서는 그 다음주에 방영한 것이었다.
1962 : 투어의 첫 10만달러 대회에서 마무리가 불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놀드 파머가 우승을 거두었다. 아놀드
파머는 "나는 드디어 목이 메는 상금 액수를 경험했다. 그것은 2만 5천 달러였다."라고 말했다.
. 천재 신인 잭 니클러스가 오크몬트의 US오픈에서 파머와 짝을 이루었다. 중압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천만에. 니클러스는 버디 - 버디 - 버디로 포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결국 연장 결승에서 파머를 꺾었다.
1965 : 혼란스럽게 스윙을 구사하는 게리 플레이어가 US오픈 우승을 이룩했다. 이에 앞서 그는 브리티시 오픈과
마스터즈, PGA선수권전에서 이미 우승을 해놓고 있었다. 이로써 그는 4대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을
거둔 네명의 선수중 한명이 되었다.
1966 : 느린 플레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 스트로크 플레이에서 "연속 퍼팅"이 도입되었다. 프로 투어에서는
USGA와 R & A 가 주도한 이런 정책을 거부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1967 : 수십년에 걸친 내부 부서 사이의 논쟁끝에 USGA에서 모든 견해를 일축하고 최근의 20개 라운드 성적중
가장 좋은 10개를 기반으로 계산하는 핸디캡 체계를 채택했다.
. 스팔딩의 연구원 봅 몰리터가 현대적인 투피스 볼을 발명했다. 이는 시장을 휩쓸어 버렸다.
1968 : 오랜 기간의 내부적 논란끝에 투어 선수들이 PGA 오브 아메리카로부터 떨어져 나와 PGA 투어라는 독립
적 단체를 결성했다. USGA에서 오랫동안 전무이사를 지낸 조 데이가 커미셔너(최고책임자) 자리를 받아
들였으며 기대에 걸맞게 즉각 새로운 수익을 창출해 냈다.
1971 : 우주인 앨런 셰퍼드가 다용도 샤프트를 장착한 6번 아이언 헤드로 달에서 볼을 때렸다. 셰퍼드는 그 클럽
을 USGA에 기증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엔 그 클럽의 복제품이 보관되어 있지만 USGA는 원본을 소장하고
있다.
. 솔직한 천재 리 트레비노가 US오픈과 브리티시 오픈을 모두 우승으로 이끌었다.
1975 : USGA의 장비 기술 부문 국장 프랭크 토마스가 로봇 골퍼를 이용한 야외 타격거리 테스트를 고안해냈다. 그때
까지는 장비 표준이 볼 제조업자들에게 지나치게 폭넓은 혁신의 여지를 주고 있었지만 이 테스트 덕택에 20
년 동안 타격거리를 안정적으로 규제할 수 있었다.
. 리 엘더가 마스터즈에서 플레이한 첫 흑인 선수가 되었다.
1976 : 투어에서 일부 대회에만 참가했지만 잭 니클러스가 여덟번째로 상금 순위의 정상에 올랐다.
1978 : 그린의 속도를 재는 스팀메터가 USGA에서 배포되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생기면서 이 도구는
주어진 코스의 그린 균일도를 비교하는 수단이 아니라 코스의 속도를 자랑하는 수단이 되었다.
. 낸시 로페즈가 신인으로 데뷔하여 LPGA 투어에서 5연승을 구가하며 모두 9승을 거두어 들이자 미국이
그녀와의 사랑에 빠졌다.
1979 : 유명 노장 선수들이 출전하는 골프의 전설 대회가 TV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노장 골프에 대한 시청자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낸 사람이 과연 누구였을까? 이를 계기로 한해뒤 시니어 투어가 공식출범했다.
. 게리 에덤즈가 처음으로 현대적인 메탈-헤드의 드라이버를 시장에 내놓았다. 곧 이들 제품은 골프계를 휩쓸었
고 , 설명이 안되는 용어상의 난문제를 일으켰다. 메탈 우드, 즉 금속으로 된 나무라니?
. 뛰어난 젊은 선수 세베 발레스테로스의 출현과 플레이 선수층의 저변 확대가 필요했기 때문에 라이더 컵이 영국
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을 대표하는 팀과 미국의 대결로 바뀌었다.
1981 : PGA오브 아메리카의 임원들이 핸디캡 계산 수수료 수입을 지역 아마추어 골프협회로부터 회수할 것을 조언하
거나 협박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USGA는 이들 협회들을 지원할 수 있는 전국 전산망 처리체계, 바로 GHIN
을 구축했다.
1983 : 톰 왓슨이 자신의 다섯번째 브리티시 오픈 우승을 달성했으며, 평균 점수가 아슬아슬하게 못미쳐 바든 트로피는
놓치고 말았다.
1985 : 가벼운 무게의 페어웨이 깎는 기계가 나와 옛날의 무거운 제품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미국 북부 지역의 페어웨이
가 획기적으로 개선되었지만 아무도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랐다.
1986 : 골프게임의 역사상 대적할 선수가 없을 정도로 오랫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켰던 니클러스가 후반 9홀에서 30타를
치며 자신의 여섯번째 마스터즈 우승을 일구어 냈다. 그의 18번째이자 프로로서의 마지막 메이저 우승이었다.
1989 : 칼스텐 솔하임이 핑 아이언의 U자형 홈문제로 각각 PGA투어와 USGA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투어측은 항복했고, USGA는 비긴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로 인하여 게임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훨씬
더 안좋은 쪽으로...
1992 : 하비 페닉의 <작은 빨간책> 이 발행되어 골프 교습서로는 사상 최고의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당시 88세이던
페닉과 그의 대필자였던 버드 쉬레이크는 모두 큰 부자가 되었다.
1993 : 미끄럼방지 무늬를 넣은 플라스틱 원판을 바닥면에 부착시킨 골프화가 전통적 스파이크화에 도전장을 냈다.
1999년의 조사 결과 골프 다이제스트 선정 미국 100대 골프코스중 80퍼센트가 금속제 스파이크화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었다.
1995 : 얇은 금속 페이스와 탄성효과를 지닌 드라이버가 개발되었다. 투어의 평균 타격거리가 5년동안 2백 70야드
까지 10야드나 급상승했다. 제조업체들에 앞서 USGA가 위협을 느끼기 시작.
1997 : US아마추어 대회에서 3년 연속 우승을 챙긴 타이거 우스가 12타 차이로 마스터즈에서 우승을 기록했다.
1999 : PGA투어의 상금 총액이 1억 3천만 달러까지 치솟으며 10년동안 거의 1억달러에 달하는 가파른 상승세를
과시했다. 투어 선수들과 그들이 대리인을 제외하곤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 치욕의 3일 ! 황동으로 만든 1m 크기의 프란시스 위멧 조각상이 6천 5백 달러의 헐값에 팔려가기라도 할 것
처럼 미국이 더 컨트리클럽의 분위기를 교묘히 부추기며 라이더컵을 우승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