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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없는
훌쩍 커버린 외손자 녀석들의 사진첩을 넘겨보고 있었다. 아이들 사진첩이라기보다 가족 사진첩이 맞는 말일 듯싶었다. 사진첩에 묶어놓은 아이들과의 행복한 시간들이 보석처럼 빛을 발하였다. 딸아이가 옆에 와 앉으면서 한마디 툭 던졌다.
“아버지! 우리 어릴 적 사진첩에 아버지 없는 것 아세요?”라고.
살아오면서 소홀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던 터였지만, ‘있어도 없었던’ 아버지의 부재가 여린 마음자락에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쌓여 있었다. 무늬만 아버지였던 죄인 아닌 죄인이었다. 그로부터 가끔 어린자녀와 놀이를 즐기는 아버지 모습을 볼 때면 스멀스멀 딸아이의 그 한마디가 떠오르곤 했다.
직장에 들어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나에게 신앙만큼이나 흔들리지 않았던 믿음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직장에서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이자 가정의 성공’이라는 것. 그 당시 사회적 환경이나 여건, 공인된 가치관에서 그러한 믿음을 같이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필시 나 하나만의 경우는 아닐 것이지만, 그 믿음의 완성을 향한 집념의 오체투지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여겼다.
여차하면 시간외근무였고, 그것도 모자라서 일보따리를 싸들고 가정으로 들어왔다. 휴일은 회사에 반납하기 일쑤였고, 가정의 계획들은 회사의 일 때문에 밀려났다. 원뿔꼴 조직에 오금과 사태가 닳도록 오르고 오르기를 수십 년, 변별력을 잣대로 경쟁자 중에서 뽑는다는 승진은 떨거지 따리꾼이 점령을 노리는 경쟁 아닌 전쟁터. 수직 사고, 직선 몸짓, 줄잡은, 줄선, 줄 지킨 회사인간이었다. 학력과 경력, 품성과 평판, 업무실적과 상위직의 수행능력 등의 변별력은 기본이고, 게다가 상사의 주관적인 정성적 평가를 잘 받기 위한 플러스알파(plus alpha)는 더 분명한 회사인간으로의 유인이었다.
과욕의 바람을 뺀 채 되돌아보면 분명 이룰 만큼 뜻을 이뤘다. 하지만 저절로 따르리라고 믿었던 가정의 성공인 행복은 꿰찰 수 없었다. 효의 자리에는 빈자리가 많았고, 아내와는 사랑의 추억이 빈약하고, 자녀들의 어린 시절엔 아버지가 있어도 없었다. 인정받기와 승진에 매달렸던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자연인으로서의 나의 희생,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희생, 가족공동체로서의 가정의 희생이었다는 사실에 때늦은 자괴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제 자유인의 입장에서 날로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인간의 삶이란 것이 현재라는 일상의 모음들이라는 사실이다. 사소한 것들의 모임이 우리들 삶 안의 일상이고, 우리들은 그 삶 안의 일상에서 행복을 향유한다는 것이다. 행복은 쟁취하기 위해 화살로 맞추어야하는 과녁이거나 승부로 뺏고 빼앗기는 점유물이 아니라는 반성이다.
대체로 사소한 것들을 보잘 것 없다고, 하찮다고, 자디잘다고 시시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에서 실수가 유인되고, 걷잡을 수 없는 그 실수로 하여금 낭패를 당하지 않던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개선으로부터 몰락까지의 거리는 단 한걸음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사소한 일이 가장 큰 일을 결정함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사소한 일상의 진면목이다.
‘무엇을 보느냐?’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들이 ‘어떻게 보느냐?’에서는 사소하게 보이기도 하고, 거꾸로 ‘무엇을 보느냐?’의 관점에서 사소한 것들이 ‘어떻게 보느냐?’에서는 중요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유의 눈이 아닌 존재의 눈으로 보면 삶의 의미와 행복을 보다 쉽게 찾고, 더 크게 느끼지 않겠는가.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느끼게 되리라.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인생은 사소함으로 채워진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삶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 세상은 나날이 새롭다. 가정이라는 둥지에서 가족과 함께 사랑으로 살아가고, 이웃과 오순도순 정을 나누고, 벗들과 더불어 우정의 길을 닦고, 세상의 지인들과 친교를 나누고, 주어진 봉사직분에 헌신하는 이 모든 것들이. 심지어 걷고, 뛰고, 오르고, 게다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까지 축복이라고 여겨진다. 삶 안의 사소한 것들이 때때로 기적으로 다가온다. 그러한 기적들이 일상의 삶을 이뤄가고 존재의 희열을 맛보게 한다고 말이다.
행복은 빵 터지는 대박이 아니라 일상의 삶 안에서 하나하나 꿰차는 마일리지라는 것을. 아버지가 있어도 없었던 아들딸 어릴 적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 온다. 되돌릴 수도, 되찾을 수도 없는 뚝뚝 떨어져나간 숱한 행복 도사리. 대박을 겨누었던 헛방 총대를 썩 물린다.
의심은 덕목이다
삼십여 년 전, 직장교육현장에서 인용됐던 실패담 하나이다.
수출의 날 수출탑을 수상한 기업에서 해외 주요고객을 초청해서 가든파티를 열기로 되어 있었다. 하루 전, 준비사항 점검회의에서 완벽하게 준비된 것을 확인하고 회의를 파할 무렵이었다. 그때 말단 신입사원이 옆자리 간부에게 “혹시 비가 오면?”하고, 뚱딴지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청명한 늦가을 날씨에 주간 일기예보조차 확인한 터라 “재 뿌리는 소리하고 자빠졌네.”라는 핀잔이 준비회의를 마친다는 신호가 되었다.
그런데 당일 소나기가 내려서 행사가 엉망진창이 되었다. 신입사원의 ‘의심’이 우천에 대비할 기회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실패를 했지만 경영진이 이를 알고서 신입사원의 ‘의심의 자세’를 높이 치하하고 그를 중용했다고 한다.
의심은 불신과 같이 부정적이지만 불신은 아니다. 소개한 실패담에서처럼 신뢰와 연결되어 있지만 긍정적인 신뢰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고 보면 신뢰와 불신은 상반되게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의심이 들어서 붙들고 있는 모양새다. 신뢰와 불신의 가운데가 의심의 영역이다. 의심은 신뢰와 불신의 의미를 함께 포용하고 있다. 불신과 의심과 신뢰는 각자도생이 아니라 의심의 한쪽에는 불신이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신뢰가 자리하는 일통삼체(一統三體)의 모습이라고 여겨진다.
역사적인 사건을 대할 때마다 불신과 의심과 신뢰가 힘겨루기를 하면서 단속적으로 주도와 반전을 거듭해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불신의 끝에는 처절한 투쟁과 혁명이, 의심의 끝에선 개선과 개혁이, 신뢰의 끝에선 안정과 평화가 이어졌다. 그래서 대다수가 신뢰라는 덕목만이 만사형통으로 드는 열쇠이자 만병통치의 비방쯤으로 믿는다.
신뢰, 의심, 불신 가운데 과연 신뢰만이 인간사회의 덕목일까라는 의문은 왜일까. 의심이야말로 맹목적인 신뢰와 불신을 함께 제어하는 의미 있는 덕목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만약 ‘의심’이라는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틀린 것에 대한 신뢰와 옳은 것에 대한 불신을 어떻게 예방하고 차단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공동체의 의사결정과 일의 추진에 있어서 의심의 기능과 역할은 목표에로의 방향과 방법과 속도를 감시하는 감독관의 임무와 흡사하다. 다만 의심이 의미 있는 덕목이기 위해서는 그 의심이 분명한 이유와 합리적인 이치를 내포하고 있는 건강한 의심이어야 함은 불문가지이다.
‘한국의 정치는 삼류다’라는 어느 대기업 총수의 힐난이 뉴스가 된 적이 있었다. 기업이 정치권을 향해 에둘러 보낸 ‘의심’의 신호였지만, 정작 정치권은 이를 ‘불신’의 펀치라며 격한 반응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념과 정파에 매몰되어 반대를 위한 반대, 투쟁을 위한 투쟁만을 일삼던 정치행태는 그로부터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뀔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도 구태를 빼닮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빼앗긴 ‘신뢰’를 되찾겠다는 개혁의 몸부림이 보이지 않아서이다.
민주주의 정체에서 야당은 정부와 여당의 정책에 대하여 의심의 잣대로 재고, 의심의 저울로 달고, 의심의 화살로 쏘아댄다. 과학적인 논리나 선험자의 학설도 의심의 눈으로 살피는 후배에 의해 무너지고, 수정되고, 창설된다. 이렇게 국가 발전의 동력인 정치와 과학이라는 양축에도 의심이라는 도구와 시스템을 들여서 방향타의 역할을 하게끔 해 놓았다. 이러한 의심을 두고 프랜시스 베이컨은 “확신의 끝은 의심, 의심의 끝은 확신”이라고 했고, 괴테는 “의심은 지식과 함께 성장한다.”며 의심에 무게를 실었다.
어떤 사회, 어떤 조직에도 의심이 덕목으로 자리 잡지 못하고, 통일이나 일치에서 일탈하는 것쯤으로 대접받는다면 그 사회, 그 조직에는 장래가 없다. 일당 독재자의 말로는 예외 없이 비극이다. 왜냐하면 발전으로의 길라잡이인 ‘의심’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찬성을 위한 찬성, 반대를 위한 반대만 있기 때문에 ‘맹목적인 신뢰’라는 함정에 매몰되기 마련이어서이다. 의심은 그 자체로써 존재가치가 있지만 ‘건강한 의심’으로 신뢰를 얻을 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의심은 더 큰 신뢰나 더 큰 확신에 이르는 디딤돌과 같다.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의심을 위한 의심’으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정치사회를 보면서 ‘건강한 의심’이 신뢰사회를 여는데 얼마나 소중한지, 의심이 덕목으로 자리 잡힌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 사회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칩거(蟄居)
“얘야, 저기 너희 담임 선생님 오신다. 어서 숨어라. 너 오늘 학교 땡땡이 쳤다며….”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숨으셔야 돼요. 선생님께 할아버지 돌아가셨다고 했어요.”
요사이 우스개로 회자되고 있는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까마득하게 먼 유년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옥죄는 죄스러움이란 것이 맞는 말일 듯싶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가정방문을 나오신 담임 선생님과 아랫마을 동급생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외길에서 할아버지와 맞닥뜨렸다. 피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따뜻한 봄날에 온몸에 누더기 같은 옷을 칭칭 감은 채로 더딘 발걸음을 옮기시던 할아버지가
“도이야! 도이야!” 겨우 내지르는 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저 노인께서 너를 부르는 것이냐?”고 선생님께서 물으셨다.
“미친 할배라요.” 마치 미리 준비된 것처럼 얼버무렸다. 그러고는 눈길을 돌려 지나쳐버렸다.
할아버지는 4남1녀의 장남으로 일꾼 들여 감농을 하시면서 군위, 도리원, 안계, 선산, 해평, 장천 등 육방의 지인들과 통교를 하셨던 건강하고 활달하신 분이셨다. 효성스런 슬하의 3남1여가 자랑거리셨고 대소가의 우애가 내세우셨던 최우선 덕목이셨다. 그러한 할아버지에게 당신께서 감내하기 어려운 불행이 들이닥쳤다. 그것도 연이어서.
일본군에 징집되어 남양군도로 갔다던 둘째 아들이 해방된 지 일 년이 지나도록 무소식이었다. 게다가 일본에 살던 장남이 귀국길에 괴질 호열자(콜레라)에 감염되어 목숨을 잃었다. 집안의 희망이었던 스물아홉 살 생때같은 장남을 잃었으니 그 절망감을 어디에 비할 수 있었겠는가.
할아버지는 당신 자신을 죄인이라고 여기셨다. 부끄러워 하늘을 볼 수 없다며 두문불출하셨다. 사랑방 칩거에도 불행은 그치지 않았다. 설상가상이었다. 외동딸이 서방을 잃고 친정으로 돌아왔고, 막내아들조차 6.25전쟁 백마고지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자랑거리 1남3여가 하나같이 비운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십여 년의 유폐의 삶은 득병으로 이어졌다. 여름에도 군불을 지폈고, 봄가을에도 겨울처럼 두꺼운 옷을 껴입으셨으며, 식사도 까다로워지셨다. 3과부가 받드는 할아버지 봉양은 농사만큼이나 힘겨웠다.
어느 날 어머니의 계책이 장손인 나에게 떨어졌다.
“할배요, 힘들어도 큰 논에도 가보고 감농(監農)도 해줘요.”라고 진언하게 이르렀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만개한 화창한 봄날에 두꺼운 옷을 칭칭 동여입고 불편하신 몸을 끌다시피 보리밭에 가셨을 것이다. 다녀오시는 길에 마을 입구에서 장손을 만났으니 한 마디 나누고 싶은 마음이 오죽하셨을 것인가. 당신의 안색도 행색도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셨을 것이리라.
이제 어릴 적에 이해하지 못했던 할아버지의 칩거를 차츰차츰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세월의 지문이었던가. 필시 자식, 손자 거느린 옛날의 할아버지 나이에 이른 역지사지의 이해일 듯싶다. 일본군에 끌려간 자식의 행방불명도, 자식이 전염병에 걸려 목숨을 잃은 것도, 자식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것 까지도, 심지어 사위가 병사하여 딸이 되돌아온 것까지도 당신의 업보로 받아들이신 것이라고. 두 세대 앞의 유불관적(儒佛觀的) 정신세계의 긍정이 18년 칩거를 이해하는 통로였다.
‘도이야! 도이야!’
‘예 할배요! 큰 논에 다녀오시니껴?’
‘할배요! 우리 선생님 왔어요.’
‘선생님! 우리 할배세요.’
나누지 못한 그 때의 대화를 혼자 읊어본다.
은종일 약력
《한국수필》 수필 등단, 《창작에세이》 평론 등단, 《문학시대》 시 등단.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장(역), 대구광역시문인협회 부회장(역), 군위문인협회 회장(역). 저서: 수상집 『거리』, 수필집 『재미와 의미 사이』 『춘화의 춘화』, 시집 『사소한 자각』. 수상: 한국수필작가회 문학상, 한전전우회 대경예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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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직전회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