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얀마 불교 역사
1. 미얀마
미얀마(Myanmar)는 북서로는 인도, 북동으로는 중국의 운남성, 동으로는 라오스와 태국사이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국토 총면적은 67만6552㎢이며, 지리적으로 남부의 해안 지방(하부미얀마)과 북부의 내륙 지방(상부 미얀마)으로 구분된다.
기후는 열대성 몬순 기후로, 연평균 기온은 27℃를 넘으며, 계절은 여름(2월 하순~5월 중순), 우기(5월 하순~10월 중순), 겨울(10월 하순~2월 중순)로 나뉜다.
평균기온은 여름에 30℃이며, 우기에 29℃, 겨울에 25℃ 정도이며, 만달레이를 중심으로 하는 상부 미얀마는 평균 3~5℃ 정도 기온이 낮다.
미얀마는 1989년 5월 27일 국가 명을 구 영국식민지 시대에 명명된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었다. 미얀마라는 명칭은 17세기경부터 이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1995년의 총인구는 약 4천 500만이고 수도는 양곤이다. 미얀마족이 전체인구의 69%를 차지하며 미얀마의 중․남부 지역과 이라와디강 유역에 살고 있다.
그 외 카렌족(6.2%), 샨족(8.5%), 카친족(1.4%), 친족(2.2%), 몬족(2.4%), 라킨족(4.5%), 그리고 기타 60여 소수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미얀마 불교의 성립
현재 미얀마 인구의 69%를 차지하는 버마족은 A. D. 9세기 중반, 티베트 동쪽 산악 지역에서 남하하여, 고대 민족인 퓨족의 거주지인 이라와디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11세기 중엽 상부 미얀마의 파간(Pagan)을 중심으로 버마족에 의한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립한
아노야타(Anawrahta, Anuruddha, 1044~1077년 재위) 왕은 하부 미얀마 몬족의 나라 타톤을 공격하여, 그곳으로부터 500명의 테라와다 승려를 빨리어 삼장과 함께 파간으로 데려와서 미얀마 테라와다 불교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 후 아노야타왕은 스리랑카의 마하위하라(대사,Mahāvihāra)로 승려를 보내어 대사(大寺) 전승의 테라와다 불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파간 왕국은 13세기말(1287년) 몽고(元)의 쿠빌라이 칸(Kublai Khan)에 의해 왕국이 멸망하기까지 5천여 불탑과 사원을 건설하면서 테라와다 불교를 발전시켰다.
3. 미얀마 불교의 확립
파간 왕국 멸망 후 200여 년간의 혼란 시기를 거쳐서 15세기 후반에 몬족 출신의 담마체디(Dhammacedi, 1472~1492 재위) 왕은 남부 미얀마의 페구(Pegu)를 중심으로 페구 왕조를 일으킨다. 담마체디 왕은1475년에 스리랑카로 대규모의 사절단을 보내 다시 스리랑카 대사(大寺)의 테라와다 불교의 맥을 도입하여, 당시 분열되어 있던 미얀마의 상가를 통일한다. 이로써 미얀마는 파간 왕조의 아노야타 왕에 이어 두 번째로 테라와다 불교의 부흥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미얀마 불교는 16세기의 법난을 거치고 승려가 마을에 들어갈 때의 가사 착용법(두 어깨를 모두 가려야 하는가, 한 쪽만 가려야 하는가)에 대한문제가 18세기에 정점에 달했다.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왕은 보도빠야(Bodawpaya, 1782~1819) 왕이다. 그는 승려가 마을에 들어갈때 가사로 두 어깨를 가려야 하는 것을 정통으로 인정하고 종교 정화 위원회의 설치와 아짜리야(스승) 전통을 중심으로 상가를 정비하였다. 또한 스리랑카의 낮은 카스트의 사미를 당시의 수도 아마라푸라에 불러 비구계를 받게 한다. 이들은 스리랑카에 돌아가서 아마라푸라파를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4. 미얀마 불교의 발전
보도빠야 왕에 의해 시도된 승단의 조직 체제 정비는 19세기 후반에 즉위한 민돈(Mindon, 1852~1877) 왕에 의해서 한층 강화된다. 민돈 왕은 8명의 학식 있는 장로로 형성된 종교 회의소를 수도 만달레이에 두고 테라와다 승려와 사원을 지도하도록 뒷받침 하였다. 1871년에 민돈왕은 테라와다 제5차 결집을 개최해서 2,400명의 승려가 만달레이에 모여 빨리삼장과 주석서를 정비, 편찬하여 대리석 729개에 새겨서 만달레이의 쿠토도(Kuthodaw) 탑에 세워 놓았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식민지 등의 영향으로 승단의 질서가 흐트러지자, 승단 내에서 자체 정화를위해서 몇몇 종단이 생겨난다. 그 대표적인 종단이 쉐진(Shwegyin), 드와라(Dwara), 겟트윈(Hngettwin)이다.
제5차 결집(Thudhamma)에 기인하는 수담마(Sudhammā, Thudhamma) 종단은 이 세 종단을 인정하지않았다. 이로 인한 승단 내부의 문제가 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자 민돈 왕이 중재에 나서서 위의 세 종단을 인정하게 되었다. 세 종단은 하부 미얀마에서 계율 엄수, 스승 제자간의 유대관계에서 유사점이 많았으며 상부 미얀마 종단에도 영향을 주어 정화시켰다. 영국 식민지 시대에는 고승들이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5. 불교진흥의 노력
불교 시험 제도는 왕조 시대부터 성행하여 빨리 국가시험인 빠타마비양(Pathamabyan) 시험은 17세기부터 시작되어 보도빠야 왕과 민돈 왕시대에 더욱 성행하였으며, 영국 식민지 시대에도 1895년부터 46년간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민간의 사설 빨리 시험은 만달레이의 빠리얏띠 사사나히따(Pariyatti sāsanahita) 협회가 1891년부터 시작하여, 양곤, 몰민, 헨사다(Henzada), 페구와 하부 미얀마의 각지에서 유사한 조직이 발족했다. 1948년 미얀마는 독립하였고 독립 초대 수상인 우 누(U Nu)는 승단 및 불교 진흥을 위해서 많은 개혁을 하였다. 1954년~56년까지 거행했던 제6차 결집은 불멸 2500년 기념사업으로 진행된 불교 진흥 사업의 하나였다. 1962년 네윈이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정교(政敎) 분리 정책을 취하였지만 빨리 국가시험의 실시, 불탑의 보수등의 불교 진흥을 위한 사업은 계속되어 왔다. 1980년 5월 24일부터 27일까지 미얀마 전 종단의 합동 회의가 개최되어 종교-정치적 문제, 종교-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의 전 9개 종단을 통괄하는 조직의 설치, 종교적 분규의 해결, 출가등록제와 신분의 확립이라는 세 가지 사항을 입법화하였다.
6. 미얀마 불교 현황 (1995년 기준)
미얀마의 종교 인구의 분포를 보면, 인구의 89.4%가 테라와다 불교도이며, 이슬람이 3.9%, 힌두교도가 0.5%, 기독교도가 4.9%, 미얀마 고유의 정령(精靈, nat) 신앙이 1.2% 이다. 미얀마는 스리랑카,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과 더불어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 속한다. 전체 승려의 약 87%를 차지하는 수담마(투담마) 종단과 8%를 차지하는 쉐진종단(파욱)을 포함해서 9개의 공인된 테라와다 종단이 있다. (이들 종단은 종파와는 성격이 다르며 같은 빨리 삼장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포살에 한 자리에 모여 비구 227계를 같이 합송할 수 있는 하나의 테라와다 불교 상가이다. 역주.) 승려는 비구가 약 16만 명, 사미가 약23만 명으로 총 40만 명 정도이다. 여성 출가자인 띨라신(Thilashin,사얄레이)의 수는 대략 3만에서 많게는 9만 정도에 이른다. 남자는 일생에 한 번은 승려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7. 미얀마 테라와다 9개 종단 현황 (1995년 기준)
① 수담마(Sudhammā, Thudhamma) : 약 14만명
② 쉐진(Shwegyin) : 약 13,500명, 파욱은 쉐진종단에 속해있다.(역주)
③ 담마누담마 마하드와라 니까야 : 2,302명
④ 웰루완니까야 : 1,434명
⑤ 담마위나야눌로마 물라드와라 니까야 : 1,199명
⑥ 짜뚜붐미까 마하사띠빳탄 겟트윈(Hngettwin) : 527명
⑦ 담마윳띠니까야 마하인 : 398명
⑧ 가나위뭇띠까또 : 351명
⑨ 아나욱 차웅 드와라 : 156명
◆ 인용․편집 원서
正圓 (김재성), 2. 태국과 미얀마 불교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세계 승가공동체의 교학체계와 수행체계,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사단법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圖書出版 伽山文庫, 1997.)
첫댓글 미얀마는 다시 가보고 싶은 불교나라
나무관세음보살 🙏
미얀마에 자비의 손길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