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는 데 보태 준 거 있나/ 조이섭
부부 동반 술자리에서 친구가 하는 말이다. - 젊은이는 노인을 싫어한다. 특히, 백발노인을 싫어한다. 그러니 머리 염색을 해서 젊게 보이도록 꾸미고 다녀야 한다. 나아가 얼굴 마사지나 팩도 하고, 얼굴에 점도 빼면 금상첨화다. - 힐끔 쳐다보는 게 머리 허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인지, 애써 단장한 자기를 봐 달라는 건지 아리송하다.
아닌 게 아니라, 친구는 외모에 부쩍 신경을 쓴 태가 군데군데 난다. 새치 하나 없이 까맣게 염색한 머리에 무스를 발라 모양 나게 빗어 넘겼다. 까만 구두에 물광을 낸 듯 얼굴이 반들거린다. 검버섯은 언제 적부터 정리했고, 문신한 눈썹은 이제 적당히 탈색되어 보기에 좋다. 아내가 자꾸 부추기는 바람에 못 이기는 척 따르는 데, 해보니 나쁘지 않다면서 으쓱 어깨를 편다. 친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웃음을 배시시 머금은 그의 아내 수저질이 곱다.
나는 나이가 반백半百에 접어들면서 머리가 세기 시작해 반백半白을 거쳐 백발이 되는데 십 년이 채 안 걸렸다. 이즈음에는 얼굴에 반점이 하나둘 생기고, 주름도 깊어졌다. 친구 말마따나 바깥에 드러나는 머리털이나 얼굴은 돈을 들여 감추고 정돈한다 해도, 굽은 등은 어찌할 것이며 손등의 쪼글쪼글한 주름은 또 어떻게 감출 것인가. 그보다 총기 잃은 눈동자와 느릿해지는 발걸음이 더 걱정이다.
거울을 보면, 달마다 다르고 계절마다 다르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걱정하지는 않는다. 세월이 나한테만 달려드는 것이 아니고, 붙들어 매려 애쓴다고 가능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늙고 노화하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거야 당연지사인지라 친구의 말을 막무가내로 반박할 수 없다. 그렇다고 수굿하게 받아들이기는 손에 든 사과를 힘센 녀석에게 빼앗기는 것처럼 뭔가 손해를 보는 것 같다.
나도 외모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목석은 아니다. 등이 굽으니 키도 작아 보여 되도록 허리를 펴려고 노력한다. 이발을 단정히 하고, 노취老臭가 걱정되면 깨끗이 씻어 청결하면 그만일 테다. 입성도 취향이 분명하다. 알록달록하거나 빨갛고 노란 원색보다 남들 눈에 튀지 않는 파스칼 톤이 좋다. 비싼 옷보다 깔끔하게 손질한 옷에다 발이 편한 신발이면 더 바랄 게 없다.
나 같은 필부는 좋은 옷 입고, 보여 줄 데가 그리 많지 않다. 늘 보던 친구끼리 술 한잔, 밥 한 끼 먹는 자리가 대부분 아닌가. 그들조차 내가 새 옷을 입었는지, 무얼 신었는지 개의치 않는다. 혼자서 공연히 자기를 쳐다보리라는 착각에 빠져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물론, 행사나 잔치 같은 데야 격식에 맞게 입고 매고 참석한다.
간혹 늦바람이 나거나, 새 사랑을 찾는 사람은 물론 예외다. 그분들은 바르고, 빼고, 치장하기를 밤을 낮 삼아서 한들 누가 뭐라 할 것인가. 노년에 어렵사리 잡은 귀한 기회를 사소한 소홀함 때문에 놓치면 큰일일 테니까.
나이 든 것이 자랑은 아니나, 부끄러워하거나 감출 게 아니다. 의기소침할 필요는 더욱 없다. 내가 가진 능력이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맞추어 살면 그만이다. 아니할 말로, 늙기도 서러운데 젊은이 눈치까지 볼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노인을 함부로 폄훼하는 철없는 젊은이를 보고 “야, 이 젊은 놈아, 너는 늙어 봤니? 나는 젊어도 보고 늙어도 봤다. 늙어 보지도 않은 놈이 까불고 있어!”라고 호통쳤다고 한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한편으로 “너희들이 내 늙는 데 보태 준 거 있냐?”면서 발끈할 일만은 아니다. 지하철을 타보면, 아직 예의 바르고 경로하는 젊은이가 훨씬 많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근무했던 때가 생각난다. 대학 행정직은 교수와 학생을 민원인으로 상대하는데 어느 부분도 만만하지 않다. 특히, 군대 갓 제대한 복학생들은 이제 어른이라는 자부심으로 어깨가 잔뜩 부풀어 있다. 예비군복 상의 단추를 몇 개 풀어 제치고 창구의 또래 여직원에게 함부로 말하기 일쑤다. 그럴 때, 머리가 허연 내가 앞으로 나서면 금방 수굿해졌다. 은발은 젊은이의 기를 가라앉히는 데 특효약이었다.
젊어서는 생각이 주관적이다. 세상사 모두가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다. 그중 일부는 중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못 견뎌 하고 세상 탓으로 돌린다. 흉악범이 칼을 들고 날뛰는 세상이다. 입만 가진 사람들은 또 사회 탓,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마구 쏟아 낸다. 그게 누구 탓이고, 누가 책임질 일이던가. 오롯이 그 사람 본인의 잘못이다. 그런 사람은 진창 같지도 않은 흙탕물에 빠질 때마다, 고개 같지도 않은 야트막한 언덕이 막아설 때마다 칼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오는 인내 부족증 환자다.
노인은 그런 부류의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한평생 살아온 사람들이다. 헤어날 길 없는 진창에 빠지고, 아스라한 절벽에 가로막힐 때마다 자신을 어디엔가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가끔은 무리에서 벗어나 혼자 있고 싶은 한여름 땡볕, 뭍에 내팽개쳐진 해삼처럼 풀어지려는 마음을 골백번도 더 다잡았다. 내 날이다 싶은 날보다 고개 숙인 날이 더 많았지만, 견디고 돌봐야 하는 삶이었기에 이를 악물었다.
나이가 들면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개성이 무뎌져 두리뭉실해진다. 오뚝하던 콧날이 그렇고, 파르르한 면도 자국이 멋있던 턱선도 마모되어 조약돌처럼 둥글어진다. 세월의 물살에 마음과 몸이 저도 모르게 깎여 나간 게다. 어쩌면 욕심처럼 삐져나오는 내 삶의 모서리를 스스로 모질게 갈아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세상이 시시해 보이고 나도 덩달아 볼품없어 보인다.
시시하고 볼품이 없다고 쓸모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쓸모라는 게 무언가. ‘쓸 모서리’를 말한다. 노인이 가진 쓸 모서리가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흔적 없이 녹아버렸을까. 은연중에 드러나는 예의 바른 행동 하나, 품위 있는 온화한 말 한마디라도 좋다. 출입문을 드나들 때 뒷사람을 위해 잠시 잠깐 잡아 주거나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을 때 고맙다고 묵례하는 일, 마트에서 계산하는 분께 수고했다고 인사하는 것을 주머니에 든 용돈 아끼듯 하면 안 된다. 내가 먼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거름이다.
노인은 누가 보태주지 않아도,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지는 늘그막을 만끽하며 산다. 백발에다 얼굴에 주름이 지면 누가 누구인지 분간조차 하기 어렵지만, 저마다 감추고 있던 각진 모서리를 송두리째 내던진 것은 아니다. 수양이 모자란 탓도 있거니와 마음으로는 아직 가을이 다 지나가지 않았음이다.
봄이 되면 고목에도 아담한 꽃 한두 숭어리 달린다. 피는 꽃을 번거롭게 여기는 고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난해 미처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파리 하나도 사랑스럽고 귀한 줄 알아야 한다. 쓸모는 줄고, 시간은 는다. 외모에 몰입하는 친구는 친구대로, 머리가 하얗게 센 나는 나대로 글짓기가 좋으면 그만이다.
“그래, 이 사람아. 그 까만 머리, 잘난 얼굴 갖고 나가서 예쁜 여자 친구 사귀면 소주나 한잔 사시게!”
내 말을 들은 친구 부인의 수저질이 멈칫하더니, 그러잖아도 시원한 눈을 화등잔보다 크게 뜬다.
* 이현승 님의 시 <따뜻한 비>에서 빌려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