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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언 1. 신라 미타신앙과 정토신앙의 배경 2. 남백월이성의 연지화장신앙 3. 화엄의 관음과 화엄정토 4. 미타신앙과 보현행원사상 결 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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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상: 강록사 그림, 아미타팔대보살내영도
<논문 요약>
"삼국유사"에 실린 「남백월이성」 설화는 뛰어난 문학적 향취에 매료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설화의 초점은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두 성인이 관음의 지진指津을 입어 각각 미륵존彌勒尊과 무량수존無量壽尊이 된다는 관음응신 및 미타신앙에 맞추어져 있다. 그 배경에 신라의 미타정토 극락왕생의 신앙이 "삼국유사"전편에 깔려 있다.
그러나 이 설화는 이성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이 미타신앙과 정토왕생신앙이 아니라 화장세계, 즉 "화엄경"의 본사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있음이 "삼국유사"에서 명시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찬과 주를 통하여 관음이 "법화경"의 33응신의 하나로서 이성에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재동자善財童子가 친견한 관음보살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아가 관음이 해산함은 선재동자가 마야부인摩耶婦人 선지식善知識의 계위를 지나 등각위等覺位로 오르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화엄사상이 「남백월이성」설화의 주축임을 밝힌다.
이렇게 화엄에 입각한 미타정토왕생신앙은 근본적으로 "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이 화엄사상과 미타신앙을 이어줄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53선지식 역참의 마지막에 보현보살을 만나 보현10대행원를 듣게 된다.
그 행원을 닦고 지킨 과보로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자리행과, 정토에 왕생했으면 다시 중생에게 보현행을 권면하는 이타행을 서원함으로써 부처님의 무진설법을 몸소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백월이성」은 표면적으로는 미타신앙에 의한 왕생설화, 혹은 관음응신이나 성불담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사상적, 도상적, 문화사회적 관점에서 화엄사상을 설화화한 것임을 알게된다.
서 언
「남백월이성南白月이성二聖」은 "삼국유사" 중에서 문학적 향취가 높으면서도 세속적인 관음응신의 묘사로 인하여 많은 분야에서 즐겨 인용되어왔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해석이 그러했듯이 대부분의 인용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최남선본 해석판 등에 힘입어 한문을 재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점은 분명 "삼국유사"연구의 강점이겠지만 축자해석逐字解釋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면을 보여주는 것이 종교요, 특히 불교이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한계는 사상성의 파악이다.
이성二聖은 각각 미륵과 미타를 예념하되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의 비중이 크다. 당연히 미타사상 뿐 아니라 미타사상의 원류라 할 수 있을 화엄사상에 대해서는 대부분 스쳐지나가고 만다.
더욱이 정토사상과 화엄사상을 이어주는 보현행원품에 대한 논의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기본원류로 자리잡은 화엄사상과 무관히 논의되므로써 그 본질이 호도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존상尊像에 대한 관습적 해석이다. 불보살의 도상이나 조상彫像 등을 일컬어 존상이라 한다. 그러므로 존상을 불이나 보살로 해석하면 남백월이성의 성격규정이 불가능하게 된다. 나아가 영험이라는 불교 혹은 종교의 위광암시에 빠져 본말을 헤아리지 못하게 될 우려도 있다.
세 번째는 종교의 문화적, 지역적 변용가능성이다. 오랜 세월동안 많은 지역에서 전파되어 신앙된 종교일수록 그 종교는 표면적으로 엄정한 교리와 도상을 고집하므로써 그 배경에 숨어 있는 민중의 힘을 교묘하게 은닉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 숨어있는 문화와 지역성의 단서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의당 세간적世間的 실지悉地, 즉 세속적인 이익이라는 시각에서 교리를 보게 된다.
이러한 사상, 관습, 변용의 가능성을 떨치고 불교의 교리와 불교문화를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남백월이성설화에서 찾아내야하는 교훈일 것이다.
그러므로 남백월이성의 일화를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미타사상과 정토사상의 화엄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경률논에 요해와 아울러 깨달음의 시각으로 불교를 보아야할 필요가 있다.
그런 시각이 아니라면 남백월이성은 성불담成佛譚이거나 관음응신담으로 해석된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삼국유사 다시 읽기, 불교 다시보기를 통해 불교, 나아가 종교에 대한 사고의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역설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1. 신라 미타신앙과 정토신앙의 배경
남백월이성의 정토사상은 신라 미타신앙에서도 불국정토사상을 대변한다. 이 땅이 부처님의 나라요, 정토라는 사상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소개되는 염불공덕, 미타신앙, 정토왕생과는 방향이 다르되 그 목표는 같다. 즉 정토왕생이다.
먼저 염불사와 제망매가는 서방정토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에 대한 깊은 신심을 보여준다. 이 설화들에는 서방정토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수행과 공덕조성 등이 소개된다. 또한 일찍부터 염불공덕에 대한 신앙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 배경의 사상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아니한다.
염불사의 옛 이름은 피리사이다. 경주 남산 동쪽 자락의 피리촌避里村의 이름을 따서 피리사라 부르는 절이 있었다. 그 절에 남다른 스님이 있어 이름을 알려주지 않고 늘 미타를 염불하였다.
염불소리는 성안의 360방 17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염불소리는 높낮이도 없고 어느 곳에서나 낭랑하게 들렸다. 이렇게 비상하니 모두가 공경하여 스님을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다고 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에 생전의 모습대로 소상을 빚어 민장사敏藏寺에 봉안했다. 아울러 본시 거주하던 피리사는 염불사念佛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망매가齊亡妹歌」 혹은 「도솔가兜率歌」는 월명이 지은 향가이다. 월명月明은 일찍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를 올렸다. 여기서는 서방정토 미타찰과 도솔천이 같은 개념으로 신앙되고 있다.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내자 갑자기 광풍이 불어 종이로 만든 돈이 서쪽으로 사라졌다. 그 향가는 이러하다. 최남선 번역본을 인용했다.
생사의 길은 이에 있으매 저허하여 나는 가노라는 말도 못다 이르고 갔는가.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곳 저곳에 떨어지는 잎 같이 한 가지에 났는데도 가는 곳 모르는가. 아아 미타찰彌陀刹에 만나볼 내 도닦아 기다리고다.
그리고 미타신앙이 매우 보편적이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발견된다. 미타도량과 무장사의 미타상 및 도성암은 미타영험이 서린 곳이다.
미타도량은 김인문의 극락왕생을 비는 도량이다. 김인문이 당에 있을 때 신라에서는 당의 遊兵이 고구려를 멸한 후 신라를 장악하려 했다. 문호왕文虎王 즉 문무왕 법민이 이를 진압하려 군병을 일으켰다.
당 고종은 분노하여 당시 당에 있던 김인문을 투옥하였다. 동시에 설방薛邦이 이끄는 50만 대군을 신라로 보냈다. 인문에게서 파병사실을 들은 의상법사가 신라로 귀국하여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라의 명랑스님은 채백彩帛으로 절 모양을 꾸미고 풀로 만든 오방신장을 세우고. 유가승 12명과 더불어 문두루文豆累비법을 지었다. 문두루란 잡밀계통의 다라니주술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배는 신라군과 싸움도 하기 전에 풍랑에 침몰하였다. 나중에 절을 제대로 짓고 이름을 사천왕사四天王寺라 불렀다. 그 후 신미년에 당이 조헌趙憲으로 장수를 삼아 오만병으로 내침하였으나 다시 문두루법으로 물리쳤다.
신라에서는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정보를 준 인문의 귀환을 빌어 관음도량 인용사仁容寺를 지었다. 한편으로 당 고종의 환심을 사면서 대문장가인 강수 선생의 표문表文을 올려 고종을 감동시켜 인문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귀로에 인문이 해상에서 죽었다. 그리하여 관음도량을 미타도량으로 고쳤다. 관음도량을 지음은 재난에서 구해달라는 뜻이었다. 미타도량으로 고침은 극락왕생을 기원함이다.
무장사鍪藏寺의 미타상은 구제를 위한 공덕조성용이었다. 무장사는 경주 동북 20리에 있다. 절의 윗쪽에 위치한 옛 미타전에는 미타상이 봉안되어 있다.
미타상은 소성昭聖 대왕의 비인 주화왕후柱花王后가 조성했다. 대왕이 붕어하자 슬픔에 겨운 왕후에게 누군가가 “서방의 미타대성에게 지성으로 귀의하면 구제하고 정토에 내영할 것입니다.” 고 말했다.
왕후는 “이렇게 진실된 말이 어찌 나를 속이리오.” 하고 반색하여 여섯 가지 성복盛服을 희사하고 구부九府에 비축해둔 재물을 내어 명장을 불러 조성했다는 것이 미타상이다. 아울러 신중神衆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이렇게 미타신앙이 간절했으니 그 영험이 없을 리 없었다. 도성암은 미타영험이 서린 곳이다. 태평흥국 7년 임오에 성범成梵 스님이 처음으로 이 절에 와서 만일 미타도량을 열었다. 50여 년 정근에 여러 번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고 한다.
미타신앙의 궁극적 영험은 극락왕생이다. "삼국유사"에 실린 서방정토 왕생기록만도 욱면․광덕과 엄장․포천산 비구 등을 들 수 있다.
욱면郁面은 경덕왕 때 아간阿干 귀진貴珍 가문家門의 비자婢子 즉 여종이었다. 선사들이 미타사를 창건하고 만일계회萬日契會를 열었다. 욱면은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 미타염불을 하곤 했다. 뜰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새끼로 꿰고 합장하여 좌우로 흔들며 염불을 했다.
공중에서 “욱면랑은 당에 들어가 염불하라.”는 소리가 들렸다. 정진 중에 하늘의 음악이 서쪽에서 들려왔다. 욱면은 지붕을 뚫고 올라가 서행하였다. 교외에 이르러 육신을 버리고 진신眞身으로 변하였다.
연대에 앉아 대광명을 발하면서 천천히 가는데 음악이 공중에서 그치지 않았다. "삼국유사"가 집필되었던 당시까지 욱면이 뚫고 올라간 구멍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광덕廣德과 엄장嚴莊의 수행 역시 서방정토 왕생의 예로 기록된다. 문무왕대에 두 사문이 절친했다. 서로 약속하되 ‘먼저 安養으로 돌아가는 자는 반드시 알리자’고 하였다. 안양은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말한다.
광덕은 분황사에 은거하였다. 왕골 신발을 삼으며 처자와 함께 살았다.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나무를 베어 화전을 하였다. 해 그림자가 붉은 빛을 길게 드리우고 소나무 그늘이 고요히 저문 어느 날이었다. 창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서방정토로 갔으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라.”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보니 구름 밖에서 천악天樂소리가 나고 광명이 땅으로 뻗쳤다. 다음날 엄장이 광덕의 집을 찾아갔더니 과연 광덕이 죽은 후였다.
이에 광덕의 처와 함께 유해를 거두고 호리蒿里를 만들었다. 엄장이 광덕의 처에게 말하였다.
“남편이 죽었으니 같이 사는 것이 어떠하오.”
광덕의 처가 좋다고 하였다. 함께 살게 되어 밤에 자면서 엄장이 남녀의 정을 통하려 했다. 광덕의 처가 부끄러워하면서 말했다.
“그러고서도 정토를 구하시다니 緣木求魚라 하지 않겠습니까.”
엄장이 놀라 물었다.
“광덕은 그래도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말이오?”
광덕의 처가 말했다.
“남편은 나와 10여 년 동거했지만 하루 저녁도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더러운 짓을 했겠습니까?”
그리고 덧붙였다.
“오직 밤마다 단정하게 정좌하여 한 소리로 아미타불을 염불하며 혹 16관을 짓기도 했지요. 관에 숙달하여 명월이 창에 비치면 달빛아래 가부좌를 하지요時昇其光, 加趺於上. 그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서방정토로 가지 않고자 한들 어디로 가리요.”
이어 호된 질책이 따른다.
“대개 천 리를 가는 자는 그 첫걸음을 보면 안다 했느니, 지금 당신이 관하는 것을 보니 동으로는 갈지언정 서방정토로 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엄장이 부끄러워 물러갔다. 곧 원효법사에게로 가서 진요津要를 간절히 구하였다. 원효가 삽관법揷觀法을 지어 엄장을 이끌었다. 삽관법은 근기가 뛰어나지 못한 중생을 위한 관법이다. 일종의 쪽집게 과외인 셈이다.
체계적인 16관 대신 근기에 맞는 관법을 중심으로 수도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엄장이 그제야 몸을 깨끗이 하고 뉘우쳐 자책하며 일심으로 관觀을 닦아 광덕처럼 서방정토로 갔다. 삽관법은 「원효본전元曉本傳」과 「해동승전海東僧傳」에 실려 있다.
광덕의 부인은 분황사의 종이었다. 관음 19응신 중의 하나라 했다. 광덕과 엄장을 왕생토록 도와준 광덕의 부인이 왕생했다는 기사가 삼국유사에 실리지 않은 이유를 알만하다.
광덕은 일찍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정토왕생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다분히 관음이 아닌 한 아녀자의 왕생기원이라 할 수 있다. 법장비구의 48원 혹은 48대원은 아미타경에 실려 있다.
달아 이제 서방으로 가시나이까. 무량수불전에 말씀 아뢰소서. 맹서깊으신 무량수불전에 우러러 두 손 모아 원왕생願往生 원왕생이라고 사뢰옵니다. 무량수불전에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고 사뢰고 사뢰어주소서. 이 몸 버려두고 48대원을 모두 성취하셨다 하시렵니까.
포천산 석굴에서 다섯 비구가 미타염불 수행을 하고 있었다. 포천산은 삽량주 동북쪽 20리 가량 되는 곳에 있다. 석굴은 기이하고 빼어난 것이 마치 일부러 사람이 깎은 듯하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다섯 비구가 이곳에 와서 미타불을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간구한 지 몇 십 년이 지났다.
갑자기 아미타 성중이 오더니 서방정토로 내영해갔다. 다섯 비구는 각자 자기 연대에 앉아 공중을 날아갔다. 통도사 문 밖에 머물러 하늘나라의 음악, 즉 천악天樂을 가끔 연주하였다.
절의 스님들이 나와 보니 다섯 비구는 무상고공無常苦空의 이치를 설하였다. 이어 유해를 벗어버리고 대광명을 발하며 서쪽으로 가버렸다. 다섯 비구가 유해를 버리고 간 곳에 사승寺僧이 정사亭榭를 지어 이름을 치루置樓라 했다.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당시에도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그렇게 신라의 미타신앙은 신라인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정토왕생이 주제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러한 설화들이 미타정토 혹은 극락왕생의 사상에서 논의되고 있는 것이 이상한 일도 이니다.
2. 남백월이성의 연지화장신앙
서방정토 극락왕생은 많은 부분 신비화되어 있다. 그러나 남백월이성의 설화는 상대적으로 신비화의 거품을 벗고 보면 화엄사상에 의한 정토신앙이 보이도록 구성되어 있다.
가상설加上說이라 할 수 있는 신앙적 오류도 보인다. 가상설이란 후세에서 소급하여 만들어낸 전설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설은 앞뒤를 살피면 그 오류의 근원이 쉽게 간파된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오류와 경과를 지적한 일이 없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정독하면서 화엄정토사상을 천착해보자.
백월산은 당 황제의 못에 그림자가 비쳤다는 전설의 산이다. 산의 동남쪽 신선촌에 노힐부득努肹夫得과 달달박박怛怛朴朴이 살았다. 둘 다 젊은 시절에 법적방法積房에서 중이 되었다.
곧 대불전大佛田과 소불전小佛田의 두 동리에서 살면서 노힐부득은 회진암懷眞庵에서 정진했다. 달달박박은 유리광사琉璃光寺에서 수행했다.
가족과 함께 살며 살림을 꾸려나가면서도 서로 오가며 정신만은 안양에 살자棲神安養는 뜻을 세워 잠시도 헛 눈을 팔지 않았다. 안양은 서방정토를 말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목표는 극락왕생이었다.
두 사람은 세속적인 삶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했다.
기름진 밭과 풍년 든 세월이 좋다고 하나 자연히 배부르고 따뜻함만 같지 않다腴田美歲良利也, 不如衣食之應念而至, 自然得飽煖也
이 말은 서방정토에서 누릴 수 있는 복락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다. "무량수경"에는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면 금은유리차거마노산호명월진주의 칠보그릇이 앞에 놓인다. 이와 같이 여러 발우가 다가온다. 온갖 음식이 자연히 가득차서 비록 이 음식보배를 먹는자가 없다 하더라도 단지 색을 보고 향기를 듣기만 하고 먹겠다는 생각만 하면 자연히 배가 불러진다若欲食時. 七寶應器自然在前. 金銀琉璃車磲瑪瑙珊瑚虎珀明月眞珠. 如是衆缽隨意而至. 百味飮食自然盈滿. 雖有此食實無食者. 但見色聞香. 意以爲食. 自然飽足..
라고 했다.
"삼국유사"에서 두 사람은 또 말한다.
여인과 함께 집에서 사는 것이 좋다고 하나 연지화장蓮池華藏에서 뭇 성인들과 함께 노닐며 앵무 공작과 서로 즐김만 못하다. 하물며 불법을 배우면 마땅히 성불해야 하고 적실한 뜻을 닦으면 그 적실함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婦女屋宅情好也, 不如蓮池華藏千聖共遊, 鸚鵡孔雀以相娛也. 况學佛當成佛, 修眞必得眞! 今我等旣落彩爲僧, 當脫略纏結, 成無上道, 豈宜汨沒風塵, 與俗輩無異也!
이어 화엄사상에 입각한 출가가 묘사된다. 연지蓮池는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연못이다. 칠보로 된 연못에 청정한 물이 금모래위에 가득한 곳에 수레바퀴만한 연꽃이 수없이 피어 있다는 곳이다.
연화생하는 왕생자들의 못이다. 뭇 성현이란 "무량수경"에서 극락에 왕생하는 불퇴전의 보살 류의 성인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앵무 공작이란 극락세계를 노니는 새들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다분히 정토적인 사고방식이지만, 화장華藏이란 비로화장세계毘盧華藏世界를 일컫는다. 비로자나불의 행원에 의하여 장엄된 세계라는 뜻이다.
화엄의 배경에서 본 정토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불이란 화엄에 의한 성불이요, 적실한 뜻이란 화엄사상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리는 미타정토사상이 화엄에 근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화장세계는 비로자나불의 중중무진重重無盡 화장세계華藏世界를 일컫는다. 중중무진이란 세계의 밑에서부터 수직 중첩된 세계를 말한다. 풍륜風輪과 향수해香水海 및 일대연화一代蓮花가 화장세계에 차곡차곡 함장된다는 뜻이다.
화장세계란 부처가 출현하여 수평 확산되는 세계를 일컫는다. 불타가 출현하고 중생이 충만한 세계는 20종이 중첩되어 있다. 그 세계에는 111만 세계종이 포함된다. 그렇게 화장세계가 설명된다.
그리하여 이성은 화엄에 바탕한 미타신앙에 의해 출가를 결심한다.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묶인 것을 벗고 무상의 도를 이루어야 한다. 세상 풍진에 골몰하면 속인들의 무리와 다른 바가 있겠는가.”
하고 인간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에 은거하여 해탈을 구하려 하였다.
이어 박박과 부득에게 백호광이 나타난다. 백호광은 대승경전, 특히 "화엄경"과 "법화경"에서 비로자나불 혹은 세존의 미간백호에서 나온 빛이 일만 팔천 리를 비춘다는 대목에서 설명되어 있다. 부처님의 위의, 또는 불법이 태양처럼 세상에 비침을 상징한다.
하루는 꿈을 꾸니 백호광이 서쪽에서부터 비쳤다. 그 빛 가운데에 황금색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정수리를 쓸어주었다. 즉 마정摩頂하였다. 부처님이 육법六法을 위촉하거나 수기授記하기 위해 제자의 정수리를 만지는 것이 마정이다.
내 법을 이어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공표하는 의식이다. 두 사람은 꿈 이야기를 하면서 같은 꿈을 꾸었다는 것을 알고 오래 감탄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백월산 무등곡無等谷으로 들어갔다.
박박은 북진에 사자암을 짓고 8척 판옥에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 했다. 부득은 동령의 뇌석磊石, 즉 돌무더기 아래 물이 흐르는 곳에 방장을 지어 뇌방이라 했다. 여기서 두 사람의 방향이 제시된다. 즉 부득은 미륵을 부지런히 추구하고勤求彌勒, 박박은 미타를 예념禮念彌陀하였다.
그렇게 3년이 채 못 되었을 때 낭자가 나타난다. 당의 경룡景龍 3년, 성덕왕 즉위 8년710이었다. 그리고 낭자의 행적은 정해진 각본에 따라 움직인다. 먼저 박박과 부득에게 건네는 사설이 다르다. 그리고 박박에게는 당연히 거절당할 부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초점은 부득에게로 맞추어져 있다.
해질 무렵 낭자는 난향蘭香과 사향麝香, 즉 여자냄새를 풍기며 북암의 박박에게 재워주기를 청한다. 칠언절귀에 이르되,
나그네 가는 길에 해가 지니 천산은 저물었구려. 길은 막히고 성은 먼데 사방이 두절되었구나. 오늘 암자에서 하룻밤 자려 하오니 자비한 화상은 화내지 마소行逢日落千山暮, 路隔城遙絶四隣. 今日欲投庵下宿, 慈悲和尙莫生嗔.
했다. 박박은 거절했다.
“수행처는 청정을 지키는 것이 도리이니 네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다. 가라, 여기 머뭇거리지 말고.” 하고는 문을 걸고 들어가 버렸다.
낭자가 다시 남암을 찾았다. 박박에게 청했던 것처럼 청하였다. 부득이 말하였다.
“네가 어디로부터 이 늦은 밤에 왔느냐?”
낭자가 대답했다.
“담담하기가 태허太虛와 동체인데 어찌 오고 감이 있겠는가湛然與太虛同體, 何有往來!. 단지 현사賢師가 뜻이 깊고 발원이 가볍지 않으며 덕행이 높고 튼실하다 하여 보리를 이루도록 도와드리려 왔을 따름이니라”
하고 게송을 읊었다.
해는 천산의 길에 저물었으니 가도 가도 사방이 막혔구나. 송죽의 청정한 그늘 더욱 그윽한데 계곡의 시냇물소리 오히려 새롭다. 길 잃어 하룻밤 숙박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존사를 지진指津코자 함이니, 원컨대 내 부탁만 들어주시고 어떤 사람인지는 묻지 마소日暮千山路, 行行絶四隣. 竹松陰轉邃, 溪洞響猶新. 乞宿非迷路, 尊師欲指津. 願惟從我請, 且莫問何人.
부득에게 던진 말은 다분히 수행자에게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그러자 부득은 "화엄경", 특히 「보현행원품」의 수순중생隨順衆生을 떠올린다.
‘여기는 부녀와 함께 더럽힐 곳은 아니다. 그러나 수순중생이야 보살행의 하나이다. 하물며 궁벽한 골짜기에 밤이 어두우니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하고 읍하고 암자에 맞아들였다.
고대국가에서 불교를 수용한 것은 호국 및 기복의 목적이 강했다. 불교의 대중적 전파를 통한 호국이념의 진작은 지배계급의 숙원사업이었다. 불교의 입장에서도 수순중생隨順衆生의 실천이었다. 즉 대중의 근기와 믿음에 따르는 것은 보현행원의 하나이기도 했다.
부득은 밤이 깊도록 마음을 맑히고 지조를 가다듬었다. 등불을 희미하게 하고 염증을 내지 않고 염불했다. 낭자가 불렀다.
“내가 불행히 출산을 하려 하니, 화상은 이엉笘草-짚자리을 준비해주오.”
부득은 긍휼히 여겨 거역하지 못하고 촛불을 은근히 밝혔다. 낭자는 목욕을 시켜달라고 했다. 부득은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교차했다. 그러나 애연한 마음에 목욕통을 마련하여 낭자를 통 안에 앉히고 더운 물로 목욕시켰다. 통 속에 여인의 향기가 드높던 물은 금액으로 변하였다.
부득은 크게 놀랐다. 낭자가 말했다.
“스님도 여기에 목욕하시지요.”
부득이 마지못해 이에 따랐다. 홀연 정신이 맑고 상쾌해지면서 피부가 금색으로 바뀌었다. 옆을 보니 연대가 생겨났다. 낭자가 자리를 권하면서 말했다.
“나는 관음보살이며, 대사가 큰 보리를 이루도록 도우러 왔소.”
그리고 사라져버렸다.
이렇게 시험에 통과한 부득은 미륵존상彌勒尊像이 된다. 그것이 지진指津의 의미였다. 관음응신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으며 바로 예참을 하던 대상이었던 미륵의 존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존상尊像이란 불佛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미륵존상은 미륵불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량수존은 무량수불이 아니다.
박박은 부득이 분명 계율을 깨고 염계染戒를 했을 터이니 돌아가서 웃어주리라 했다. 가보니 부득이 연대에 앉아 있는데 미륵존상이 되어 광명을 발하였으며 몸은 단금색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리며 예를 갖추어 여쭈었다.
“어떻게 미륵존이 되셨소?”
부득은 사연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박박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내가 업장이 무거워 요행 관음대성을 마주쳤으나 대덕의 인자한 뜻을 얻지 못했구나. 먼저 나를 꾸짖어 주시오. 그러나 옛날에 맺은 약속을 잊지 말고 모름지기 함께 굳건히 지켜나갑시다.”
부득이 말했다.
“목욕통 안에 아직 물이 남아 있으니 목욕을 하시지요.”
박박이 목욕을 하자 부득의 경우처럼 무량수존이 되었다. 그래서 미륵존과 무량수존이 엄숙하게 상대하였다. 산아래 촌민들이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 받들면서
“희귀한 일이로고, 희귀한 일이야!”
하고 감탄해마지 않았다.
두 성인은 구름에 올라타고 가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염원하던 서방정토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연설명이 없다. 그것은 촌민들이 ‘설법을 원하자 두 성인은 전신이 구름에 올라타고 가버렸다’ 고 했기 때문이다.
즉 설법을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문맥으로 보아 두 성인은 앉은 채로 존상이 되면서 열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백월산 남사가 창건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백월산의 부득과 노힐 이성二聖을 다루면서 빠트린 대목이 바로 이어진다. 갑진甲辰 7월 5일에 절이 완공되어 다시 미륵존상을 소성하여 금당에 안치하고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미타상 즉 무량수상을 강당에 봉안했는데 금물이 모자라 충분히 칠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타상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었다. 액호는 현신성도무량수전이라 했다.
다시 말하자면 부득이 먼저 미륵존이 되고 박박이 나중에 무량수존이 되었다는 설화의 순서와 존상이름이 같다. 아울러 금물을 바른 순서 역시 같다. 나중에 바르려니 모자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우연의 일치에 주목한다.
이것은 신화나 전설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오류이다. 이를테면 가상설에 의한 오류가 그것이다. 가상설이란 후대에 어떤 범주를 정해 놓고서 상고시대의 신화나 전설을 덧붙이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는 순서대로 사건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 역순으로 해석되고 설화화했다는 것이다.
순서를 뒤집어보면 등신불이거나 좌탈이거나 먼저 부득과 박박의 열반성도가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부득과 박박을 기려 조상을 만들었다. 먼저 미륵존상을 만들고 금액을 바른다.
이어 미타존상을 만들었으나 금액이 모자라 미타존상에는 얼룩이 졌다. 그 이유를 미타를 염했던 박박의 지성이 모자랐기 때문이라 둘러댄다. 그래서 관음을 친견하고도 먼저 미타존이 되지 못했으며, 부득이 바르고 남은 목욕물로 바르다보니 금물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설화화가 아닌가.
이 설화의 초점은 미타정토 왕생에 맞추어져 있다. 그런데 왜 부득이 먼저 미륵존이 되었을까. 두 성인이 간구하는 곳이 서방정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박박이 먼저 미타존이 되었다면 부득은 연지화장으로 이르는 경로를 찾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당시 이미 민간신앙화하여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미륵이 미타를 도와 미타정토를 통한 화장세계로 나간다는 상황을 설정하는 것이 보다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사건 자체보다 당시 미륵과 미타사상이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미륵과 미타를 한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는 소의경전으로서 화엄사상이 그 배경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3. 화엄의 관음과 화엄정토
일연은 남백월이성의 설화 말미에 찬을 덧붙여 화엄사상을 예찬하고 있다. 관음의 화신인 낭자가 해산함은 불모인 마야부인 선지식의 계위를 지나서 등각위로 오르게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법화사상의 관음보문품 혹은 응신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이 대목을 굳이 화엄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연의 사상적 근저에 화엄사상이 굳건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줄 것이다.
마야부인은 여러 보살의 어머니이자 선지식이다. 선재동자가 마야부인을 만났을 때, 마야부인이 연화대에 앉아서 중생들의 즐기는 마음에 따라 한량없는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선재 역시 마야부인과 같은 수효의 몸을 나타내면서 예배하고 보살도를 여쭈었다. 마야부인은 보살의 대원大願과 지환智幻의 해탈문을 성취하여 보살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한다.
청량淸凉 징관澄觀은 이 대목을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로 해석한다. 즉 마야부인이 중생들의 마음에 즐김을 따라 육신을 드러냄은 多이다. 선재는 마야부인처럼 몸을 나타내면서도 하나이니까 一이 된다.
다시 청량은 마야부인이 여러 중생들로 나타남은 異體라 했다. 선재동자는 한 몸이 나타남이니 동체同體이다. 이렇게 동체와 이체, 일즉다와 다즉일이 법계연기의 법칙에 따라 현현한다는 것이다.
결국 화엄사상이 다시 적용된다. 그것이 신라의 화엄이기도 했다. 일연이 관음을 화엄경의 관음으로 해석하는 까닭이 거기 있었다.
여기서 등각이란 부처님의 깨달음과 같다는 뜻이다. 그러나 깨닫는다고 부처님과 같을 수는 없기 때문에 등각위라 하여 부처님 바로 아래 단계에 자리를 잡아준다.
등각위는 보살수행을 52계위로 보아 그 중에서 51위를 일컫는다. 그러므로 부득과 박박이 미륵존과 무량수존이 되어 부처님의 바로 아래 자리잡게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다시 일연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미륵과 무량수는 부득과 박박이 노닐고자 하는 연지화장 세계의 부처님임을 강조한다. 그것이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라는 것도 빠뜨리지 않는다. 바로 화엄세계이다.
그렇게 보면 이 설화는 수행의 단계적 위치, 즉 계위를 이야기로 꾸민 것처럼 들린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53선지식을 순방하는 선재동자의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화엄경"의 이러한 해석은 세 권의 경전에 의존한다. 즉 60화엄․80화엄․그리고 40화엄이다. 그런데 "화엄경"은 오랜 시간 비슷한 성격의 경전이 집성된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십지경十地經"으로 알려져 있다. 보살의 수행계위를 설한 것이다. 그리고 선재동자의 53선지식 순방으로 알려져 있는 「입법계품立法界品」이 있다.
그러므로 화엄사상이란 많은 단행경들에게서 추출된 사상들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백월산이성에 대한 해석 역시 화엄의 엄정한 교리를 비집고 관음과 연결될 수 있었다.
이렇게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남백월이성의 설화를 해석했다. 그러나 관음이 부녀의 몸으로 중생에게 나타나 방편으로 교화한다는 이른바 섭화攝化를 몸소 보인 것은 「관세음보문품」의 이른바 응신사상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응신사상은 보문품의 세간적인 해석, 이를테면 “경건한 신앙적 오역”에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연이 굳이 보문품의 응신으로 남백월이성의 설화를 해석하지 않음은 그 뜻이 세간적 실지悉地 즉 영험이나 이익이 아니라, 초월적 실지 즉 해탈에 있음을 알게된다.
보문품의 사상은 “국토에 부녀의 몸으로 득도한 중생이 있다면 관세음보살은 부녀의 몸으로 나타나 설법한다”는 표현에서 그 성격이 잘 들어난다. 이 구절에서 초점은 ‘부녀의 몸으로 득도한 중생이 있다면’의 전제절에 맞추어져 있다.
즉 부녀의 몸으로 득도한 중생이 없다면 관음이 부녀의 몸으로 응신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응신에 관한 한, 법화경에서는 33응신이지만 천광안관자재보살비밀경千光眼觀自在菩薩秘密經에는 25화신과 40관음으로, 수능엄경首楞嚴經에는 32응신으로, 서장경전에는 38응신으로 다를 뿐 아니라 순서나 이름조차 다르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법화경에서 응신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경에서 공포를 여의는 깨달음을 설했듯이 보문품 역시 공포를 여의고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의 요체는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행할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비추어 보아 요해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은 인연에 의해 일시적으로 취합된 것이다. 그러므로 집착할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공空의 요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관觀하면 무상의 지혜인 혜관을 얻는다. 지혜롭게 관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지혜롭게 관하여 얻어진 결과를 과원果圓이라 한다.
그 과원이란 열 개의 자재로움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관자재의 뜻이다. 공을 요해하고 내 속에 있는 자성이 바로 관세음보살이 갖춘 위없는 반야행과 하나가 될 때 자재로움을 얻는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경전마다 이 과원은 다른 말로 표현된다. 법화에서는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 한다. 중생의 근기와 능력에 맞는 설법을 한다는 뜻이다. 화엄에서는 수순중생隨順衆生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중생의 뜻을 따른다는 뜻이다.
능엄에서는 원통무애圓通無礙이다. 지혜로 진리를 널리 깨닫고 두루 통하여 거리낌이 없다는 말이다. 정토사상에서는 보처행補處行이다.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성불하여 그 빈자리를 채운다는 뜻이다. 만다라에서는 교화방편의 장엄을 성취하게 된다고 본다.
이 중에서 화엄의 수순중생이 "삼국유사"에서 운위되고 있다. 다시 화엄에 의한 해석이 중요한 착안점이 되고 있음을 알려주려니와 수순중생은 보현행원 중의 하나이다.
보현행원은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역참하면서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나 듣게되는 보현십대광대행원의 하나이다. 그 행원의 결과 정토왕생을 기원하므로써 미타신앙과 연결된다.
4. 미타신앙과 보현행원사상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큰 기둥의 하나가 선재동자의 역참이다. 보현행원은 또 다른 기둥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집성경으로 구심적 회귀를 한 것이 「입법계품」이라 할 수 있다.
"화엄경"은 단행경들이 모인 집성경이기 때문이다. 그 집성경이 다시 단행경으로 원심적 확산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이 「보현행원품」이 된다.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는 자신의 깨달음을 향하여 53선지식을 순방한 끝에 보현보살을 만나 이른바 보현행원을 듣게 된다. 그 행원의 결과 극락에 왕생할 것을 기원한다.
왕생한 후에는 다시 중생을 제도할 것을 서원한다. 그러므로 자리행에서 시작하여 이타행으로 다시 자리행으로 회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무진설법이 이루어진다.
「입법계품」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예 중의 하나에 고려불화가 있다. 현존 수월관음도의 대부분에 선재동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보현이 화엄의 중심이요, 보현행원은 "화엄경"의 중심사상이라 일컬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보현행원이 중요하다는 뜻일 것이다.
신라불교에서도 선재동자가 등장하는 수월관음도가 그려졌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 유물을 확인할 수는 없다.
화엄의 보현행원사상은 이를테면 아미타정토로 향하는 맞쇠라 할 수 있다. 그 배경에 많은 화엄사상가들이 있다. 징관澄觀738-839과 종밀宗密780-841은 화엄의 입장에서 아미타불을 재정의한다. 극락정토 역시 화엄으로 편입된다.
징관은 "대방광불화엄경소"에서 염불문 다섯을 들고 있다. 연경염불문․섭억유심염불문․심경구민염불문․심경무애염불문․중중무진염불문이다. 유심 唯心, 즉 오로지 마음이 그 염불의 주체임을 밝힌다.
특히 징관은 "관무량수경"을 인용하면서 시심시불是心是佛 시심작불是心作佛을 주장했다. 이 마음이 바로 부처요, 이 마음이 부처를 만든다는 말이다. 염불문의 유심․심경 등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화엄사상가로서 정토경전을 화엄사상에 비추어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종밀은 "화엄경보현행원품소초"에서 칭명稱名․관상觀想․관상觀相․실상實相 염불의 사종염불이 있다고 했다. 종전의 마음을 닦는 수행방법이 구체화한 것이다.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상호를 관하고 명호를 부르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하는 염불수행으로 대체된다.
종밀은 화엄경전에서 보현이 아미타정토왕생을 강조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먼저 아미타여래는 화엄의 본사本師 비로자나불의 덕을 갖추었다고 본다.
그 아미타여래가 중생을 비로화장세계로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 극락정토를 내세운다. 보현은 화장세계의 미진수 국토로 인도하는 보살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 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 「보현행원품」이다.
「보현행원품」은 아미타친견사상이다. 보현의 십종행원을 닦은 후에 그 행원의 결과로 극락왕생한다는 사상이다. 이때 아미타불과 문수․보현․관자재․미륵보살 등을 친견하게 된다. 그 사상은 산문체의 본문에 칠언사구 64게송이 첨부된다.
보현행원의 사상은 보현보살이 선재동자에게 설한 내용에 집약되어 있다. "화엄경"에서 문수보살은 선재동자에게 보리심을 일깨운다. 문수보살의 권유에 따라 53선지식을 역참한 후에 마지막으로 보현보살을 만난다.
보현보살은 부처님의 공덕을 예찬하면서 10대 행원을 설한다. 그것을 십종광대행원이라고 한다. 그 행원의 말미에는 서원이 붙어 있다.
40화엄에 수록된 십종행원은 이러하다.
먼저 자리행에 속하는 깨달음에로의 정진이 있다. 모든 부처님께 예를 갖추어 공경한다. 여래의 공덕을 칭송한다. 모든 부처님께 널리 닦으며 공양한다. 죄업과 업장을 부처님 앞에서 참회한다. 육취와 사생의 공덕을 함께 기꺼이 기뻐한다. 모든 부처님께 설법을 구한다. 모든 부처님이 이 세상에 머물러 주시기를 청한다. 언제나 불법을 배우고 따른다.
그리고 이타행이라 할 수 있는 수순중생隨順衆生과 공덕행공덕행이 있다. 모든 중생의 근기에 따라 공양한다. 온갖 공덕을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리행自利行은 스스로 내면에 사무쳐 깨달은 空의 미묘한 세계를 성취하는 수행이다. 그리고 이타행利他行이 있다. 법계의 죽은 자와 산자가 모두 깨달음을 얻고 극락왕생하도록 보현행원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 이타행의 보살도를 통해 다시 자리행인 깨달음의 완성에 이른다. 이렇게 자리행에서 이타행으로, 다시 자리행으로 이른다는 무진無盡설법사상이 화엄경의 요체가 된다.
그러니까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여기 있다. 대승불교의 진수가 여기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개인적인 발원과 동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80화엄과 40화엄에서는 이 행원의 결과로
일 찰라 중에 즉시 극락세계에 왕생하나니 극락에 도달하자마자 아미타불과 문수사리보살과 보현보살과 관자재보살과 미륵보살 등이 맞아주신다. 모든 보살은 색상이 단엄하며 공덕이 구족하다. 모든 보살들에 에워싸인 왕생자는 연화 속에 태어나서 부처에게서 수기를 받는 장면을 스스로 볼 수 있다一刹那中. 卽得往生極樂世界. 到已卽見阿彌陀佛. 文殊師利菩薩. 普賢菩薩. 觀自在菩薩. 彌勒菩薩等. 此諸菩薩色相端嚴. 功德具足. 所共圍遶. 其人自見. 生蓮華中. 蒙佛授記.
고 했다.
이것은 자리행의 결과로 수행자가 얻을 수 있는 과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발원과 함께 모든 중생과 공덕을 나누리라는 서원이 따른다.
원하노니, 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모든 장애를 남김없이 떨어내고, 저 아미타불을 뵙고 즉시 안락찰에 왕생하고자 하노라願我臨欲命終時 盡除一切諸障礙 面見彼佛阿彌陀 卽得往生安樂刹.
이렇게 자신이 왕생을 얻었으면, 중생에게 회향하는 발원이 있다.
내가 이미 안락찰에 왕생하였으면 이 모든 서원이 성취되어 나타나도록 하시고, 모든 중생계에 하나도 남김없이 원만하게 이롭고 즐겁게 베풀어지게 하리로다我旣往生彼國已 現前成就此大願 一切圓滿盡無餘 利樂一切衆生界.
했다. 그렇게 자리행은 이타행으로 회향한다.
「보현행원품」만이 아니라 「보현행원찬」 역시 보현행원의 이상을 구현한다. 「보현행원품」과 함께 정토삼부경의 뼈대가 되는 것이 보현행원찬의 사상이다. 보현행원이 화엄경의 사상이므로 크게 보면 화엄사상이 정토사상의 큰 틀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1334년 조성된 호림미술관 소장의 감지은니보현행원품 사경이 있다. 「보현행원품」을 사경하고서 끝 부분에 「속질만보현행원다라니」라고 썼다. 그리곤 다라니를 덧붙였다. 보현의 행원이 다라니를 만나 주술적인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현행원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 「팔대보살찬」은 원래 「보현보살행원찬」에 실려 있었다. 「보현보살행원찬」은 "40화엄경"의 마지막에 실린 「보현행원품」 중에서도 게송으로 읊은 부분만 불타발타라가 따로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서 "문수사리발원경"이라 이름을 붙였다. "화엄경"을 보는 편자의 관점에 따라 보현과 문수의 비중이 다르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팔대보살찬」은 이름은 다르지만 「보현행원품」과 다를 바 없다. 약간씩 표현은 다르다.
내가 목숨이 다할 때 모든 장애를 제멸除滅하고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안락국에 왕생하고자 하노라. 이미 부처의 나라에 태어났으면 아미타여래가 수기를 내려주시어 엄정한 보현행과 만족스런 문수의 발원으로 미래겁이 다할 때 보살행의 구경에 도달하리라는 큰 발원이 만족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노라.
했다. 역시 극락왕생과 보살행원의 성취를 목표로 하고 있다. 보현행원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팔대보살찬」은 「보현행원찬」 혹은 「문수사리발원경」이다. 그런데 「보현행원찬」은 「보현행원품」에서 나왔다. 그리고 「보현행원품」은 "40화엄경"에 실려 있다. 결국 모든 사상은 "화엄경"으로 귀착된다.
다시 말하자면 아미타불과 아미타팔대보살, 그리고 아미타정토가 화엄사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림에서는 화엄사상이 어떻게 표현될까. 사실 "화엄경"에서는 그러한 주문이 없다.
그러나 고려불화에서 보듯 엄정한 도상적 해석과 극채색의 세밀화는 분명 화엄의 영향력에 의해 극대화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그리고 그 전통이 조선조 승병의 활약에 힘입은 조계종의 부흥과 함께 오늘날 이른바 화엄선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불교의 기본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결 어
남백월이성의 성도기는 화엄사상에 근거하여 아미타의 서방정토를 염원하는 신라인의 왕생사상을 담고 있다. 이를테면 화엄정토사상이라 할 수 있을 이러한 사상의 효시는 의상대사였다.
해동화엄초조라 불리우는 만큼 그 경전적 배경은 정통화엄학을 지향한다. 그러면서 정토신앙에 대한 실천의지가 뒤따른다. 오죽하면 불배서향不背西向이라 했다.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방정토를 향하여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는 말이다.
의상은 신라 문무왕 16년 2월에 왕명으로 부석사를 창건했다. 그런데 화엄종찰인 부석사의 주불전이 무량수전이었다. 당연히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을 모셨다. 무량수전은 남향으로 앉혔다.
그런데 전각안의 아미타불은 서쪽에 모셔 동쪽으로 향하게 했다. 원래 화엄종찰이면 비로전에 비로자나불을 모셔야 한다. 전각이 남향이면 상식적으로 본존도 남면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서방정토의 아미타불을 서방에 봉안했다.
무엇보다 정토사상을 내세운 의상의 해석이었다. 「보현행원품」으로 화엄사상과 정토신앙이 연결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80화엄경에서 「보현행원품」을 따로 떼어낸 별행경인 "40화엄경"은 당 정원貞元 14년798 반야삼장이 번역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신라말이었다. 최치원은 「화엄경사회원문」을 찬하면서 결사와 사경을 언급하고 있다.
화엄결사는 광계光啓 2년886 7월 5일, 조신종친들의 헌강왕 추모 모임이다. 이 결사에서 "화엄경" 「세간정안품」 제1과 80화엄경 및 40화엄경의 사경이 행해졌다고 했다.
그 중에서 40화엄경의 「보현행원품」은 특히 아미타 극락왕생사상이었다. 결사에서는 아미타성중․문수․보현․관음․미륵보살 등이 권속으로서 신앙되었다. 이 사경과 함께 지리산 화엄사의 석경石經이 조성되었다.
그 중에서 80화엄의 단편과 함께 40화엄의 단편이 발견되었다. 석경은 물론이어니와 사경과 불상․불화 조성은 복을 구하고 극락왕생하려는 중생들의 정성이 집결된 것이다.
그 화엄정토의 신앙은 선종과 결합하여 화엄선이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보현행원품」은 또 고려불화의 정토사상과 연결된다. 보현보살이 행원의 결과로 서방정토 왕생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아미타불도에 명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약 150점을 헤아리는 고려불화 중에서도 가장 많이 남아있는 정토관계도상의 중심사상이 화엄이라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고려불화의 대부분이 지금까지 정토사상을 반영하는 아미타․극락․관음․지장 등 불 보살과 정토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토사상뿐이 아니다. 화엄은 교리적으로나 대중적으로나 원융무애한 포용력으로 불교의 주도적 사상이 된다. 또한 국가적 염원을 화엄은 원만히 포용한다.
이렇게 남백월이성 설화를 화엄사상에 의해 재해석했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재해석을 위한 작은 하나의 단초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삼국유사"를 위시한 많은 해석본들의 재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다는 가정이기도 하다.
Abstract
One of the most famous legends of 'Nambaekwol Isung-Two saints of Mt. Nambaekwol, ' in "Samkukyusa-Episodes of Three Kingdoms" by Il-yon the Buddhist monk, used to be regarded as nirmanakaya of Kwan-in, i.e., Avalokiteshvara in Korean designation, and Amitabha belief which was common belief prevailed in the Shilla Dynasty, one of the three kingdoms.
However, against most of the citations and interpretations, the most crucial thought of the legend is Hwa-om, ie. Avatamsaka thought clarified by the auther, none other than Il-yon. First of all, the author made it clear that the two saints aims to get rebirth after death in the Yonhwajang world of the Virocana, not sukhavati, i.e., the pure land of Amitabha buddha.
Secondly, the author suggests that the Kwan-in give birth to a child in the legend is nothing but steps toward the Buddhahood which was well illustrated in the context of Avatamsaka sutra.
In addition to the Il-yon's interpretation for the legend, what should be considered in the discussion of the Pureland of Amitabha, the concept of the Pureland comes from 'Bohyunhaengwonpum,'i.e., Samanthabadra boddhisattva's relief and practice in the Avatamsaka Sutra.
So, in conclusion, in the case of reinterpretaion of Amitabha thought in "Samkukyusa," the most important check point is that the sukabhavati thought of the Silla Dynasty simply based on Avatamsaka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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