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 개관
2017. 5. 안산지청 신우회
1. 들어가면서
성경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결코 쉬운 책이 아닙니다, 또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평생을 다 봐도 소화할 수 없는 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경 전체를 개략적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볼 필요는 분명히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전체를 개략적으로 알고 나면 부분적으로 성경을 보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고, 또한 성경을 보면서 어떤 부분을 좀 더 중점적으로 봐야할 부분인가를 나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이야기를 제일 먼저 모세에게 말씀 하시고, 모세는 그것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온 인류에게 다시 전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오경입니다.
토라라고도 불리는 구약성경 최초로 모세가 기록한 책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이 5권 안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세오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내었느냐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오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핵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성경을 기록하셨을까요? 왜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일까요?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정말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런 의문점을 성경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성경을 기록한 이유
먼저 성경을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요한복음 20:31절에 나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이유는, 다시 말해서 성경을 기록하신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이 말씀은 당시 유대 사회 지도층인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의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였습니다. 지금도 정통 유대인들은 하루에 6-7시간씩 성경을 연구합니다. 읽고 토론하고 외우고 하는 그런 일들을 매일 6-7시간씩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서 말을 배우기 시작해서부터 성경을 보기 시작해서 평생을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유대인들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셨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성경을 이렇게 열심히 연구하는데, 정작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는 목적을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 너무 안타까움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요한복음 5장 39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여기서 ‘상고한다’는 말은 ‘찾다, 발견하다, 자세히 살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성경을 열심히 연구한 이유가 바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영생을 얻으려고 열심히 성경을 상고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사실 이 성경은 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가 정말 영생을 얻길 원한다면 나에게로 와야 하는데 정작 너희들은 나에게 오지 않는구나”
즉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으려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정작 그 영생을 주는 예수님께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간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예수님과 유대인과의 대화에서 유대인들이 지금 열심히 보고 있는 이 성경이 어떤 성경이냐는 것입니다.
2천 년전 예수님 당시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신약성경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이라고 말한 성경은 구약성경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의 사람들은 이 성경을 구약 성경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라고 말했을까요?
누가복음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여기에서 보시듯이 당시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모세와 모든 선지자’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즉 모세와 모든 선지자라는 말은 그때 당시에 구약성경을 지칭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서를 말하고 선지자는 예언서를 말합니다.
이것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것이 누가복음 24:44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과 시편이 바로 구약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 구약성경은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을 이야기 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도 바로 구약성경을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해서 얻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고자 하시는가?에 대해 이제는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10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성경은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영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
또한 요한일서 5:11-12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결국,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주신 이유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요!
결국,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고 공부하는 이유도 우리가 그 생명을 얻기 위함이요!
결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요!
결국, 예수님은 생명이시다!! 라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얻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우리는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그 생명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은!! 우리가 성경을 연구해서 결국 얻고자하는 것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오직 생명이신 예수님을 찾고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예수님은 곧 생명이시고,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빌립보서 3:8-9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탁월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은 그동안 사도 바울이 유익하게 여겼던 모든 것, 그동안 사도 바울의 인생을 지탱해 왔던 모든 것을 말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최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유익을 기꺼이 버려버리고, 그것도 그냥 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배설물로 여길 정도로 아주 더럽게 여기면서 버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것을 다 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다 라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을 얻는 것이 최고였던 것입니다.
당시에 헬라인들은 지혜를 추구했습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기적, 표적 이런 것들을 구했었습니다. 그리고 당대의 최고의 학자들은 지식을 추구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였던 것을 다 갖추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태생으로는 유대인 중에 유대인인 베냐민 지파이자 바리새인이었으며, 당대 최고의 나라였던 로마의 시민권자였으며, 학문적으로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적으로도 완벽하게 성공하였던 사도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로새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다”, “모든 지혜와 지식과 생명과 능력의 보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춰져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얻고자 하는 모든 지혜, 모든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분을 얻으면 다 얻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을 얻으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얻으면 능력을 얻는 것입니다. 즉,예수님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봐도 예수님을 얻지 못하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책에는 저자가 있습니다. 저자가 그 책을 기록할 때에는 왜 그 책을 기록했고(기록한 이유), 무엇을 기록하고, 왜 기록했는지(기록한 의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책을 읽는 독자는 그런 저자의 의도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지만 저자의 의도를 놓치고 읽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그 책 저자의 의도를 알고 본다면 그 책을 읽는데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실 때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런 하나님의 의도(관점)를 따라서 성경을 보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성경을 봐야 불필요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되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그것에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성경을 바라보는 관점
이렇게 하나님의 의도와 관점을 이해하며 성경을 볼 수 있는 4가지 키워드가 있습니다.
창조와 새창조 / 타락과 회복 / 생명과 사망 / 하나님 나라와 세상나라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타락하게 됨으로,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들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이를 전문적인 용어로는 구속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타락한 인간을 회복하실 것인가? 라는 이야기를 하시면서 먼저 우리에게 먼 훗날 만물을 새롭게 하실 것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주십니다. 그런 다음에 결국 요한계시록에서는 정말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간이 타락하였는데, 타락한 인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복시키시고, 결국에는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때 영광의 몸을 얻게 되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창조와 새창조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회복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아담의 원죄로 타락한 이후, 후손들인 인간이 지속적으로 타락하고,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 이후 또 타락하고 회복시키고 이런 반복을 통해서 결국에는 에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만물과 인간을 회복시키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것을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창조와 타락과 회복과 새창조’라는 키워드로 성경은 진행이 되는데, 이 4가지 키워드를 모두 포함할 수 있는 한 가지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흐름’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생명의 강, ‘생명의 맥’이 흐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맥과 동등하게 같이 흐르는 것이 바로! ‘사망의 맥’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의 맥과 사망의 맥으로 성경 전체를 다 관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생명의 줄기와 사망의 줄기를 추적해가면서 성경을 보면 성경 66권이 전체가 다 꿰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키워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경의 가장 큰 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관점에서 성경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4가지 키워드는 하나로 연결되는데, 이 4가지 키워드를 전부 하나로 통합하면서 성경 전체를 꿰주는 것이 바로! 생명의 맥과 사망의 맥인 것입니다. 즉 생명과 사망의 흐름으로 성경을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생명의 흐름과 사망의 흐름에 관한 책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처럼 생명의 맥과 사망의 맥을 따라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4. 생명의 기원 VS 사망의 기원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진화론자들은 단세포인 아메바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생명의 기원을 하나님 그 자신이라고, 하나님의 숨! 그것이 생명의 기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생기가 바로 ‘생명의 기운, 생명의 숨(Breath of Life)’인데 하나님이 그 기운을 아담의 코에 불어 넣었을 때, 그때 서야 아담이 생령(Living Being)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흙과 먼지 조각인 아담을 생령으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숨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아담에게 불어 넣어지니까 아담이 생령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의 숨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명백하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에덴동산 중앙에 이 생명나무를 두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같이 두셨습니다.
종종 우리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은 생명나무만 두시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같이 두셔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게 하여 죄를 짓게 하셨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아담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으로 아담을 생령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에게 있어서 자신은 창조주가 아니고, 자신은 피조물이고 나를 지으신 창조주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두 나무를 볼 때마다 아담이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내가 하나님이 아니지”라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피조물의 의무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생명의 기원뿐 아니라, 사망의 기원도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반드시 죽으리라”라는 말처럼 본문에서 사망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전까지는 죽음이라는 개념이 없었다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는 순간 죽음의 개념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말은 생명의 기원은 하나님이시고 사망의 기원은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망의 출발은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순종이 곧 생명이고, 불순종이 곧 사망인 것입니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순종하지 않은 아담으로 인해, 즉 불순종한 아담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순종한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불순종은 죄인을 낳고, 순종은 의인을 낳는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한 사람의 범죄로” 즉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사망이 왕 노릇” 즉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망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불순종이 곧 사망을 가져오고 순종은 생명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좀 더 구체적으로 아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그것은)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여기서 오실 자는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의 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결국 성경은 생명의 근원, 생명주는 영,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열망하고 기다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 분이 바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를 살려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생명의 근원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기록된 것이며, 바로! 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인 것입니다.
그럼 신약성경은 무엇일까요? 신약성경의 처음은 구약성경에서 그토록 기다렸던 예수님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마태복음 1:1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또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늘 생각해야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서 무엇을 얻어야 할 것인가? 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되신 예수님이십니다.
5. 생명의 맥 VS 사망의 맥
이제 성경 전체에 흐르는 생명의 맥과 사망의 맥에 대해 살펴볼까 합니다. 먼저 생명의 맥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창조 이야기, 3-4장은 타락 이야기, 5장은 족보 이야기, 6-9장은 홍수심판 이야기, 10장 족보 이야기, 11장 바벨탑 이야기, 11장 후반부 족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갑자기 5장, 10장, 11장 후반부에서 이야기 전개와 전혀 상관이 없는 족보이야기가 갑자기 나옵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지하게 성경을 읽어 보았더라면 우리는 이야기 중간에 족보 이야기가 왜 나왔을까에 대한 궁금점과 의문점이 분명히 생겼을 것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을 등장시키기 위한 오랜 세월의 기다림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등장시키기 위해서 구약의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오기까지 그 생명을 이어준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전부 족보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생명의 맥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의 맥이 가인과 아벨에게 이어질 줄 알았는데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가인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생명의 맥이 끊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다시 생명의 맥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누구를 통해서일까요? 바로! 셋을 통해서입니다. 이처럼 족보이야기는 바로! 생명의 맥을 이어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생명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5:1-3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백 삼십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그리고 창세기 5:4-31절에는 이처럼 생명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름이 족보로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창세기 6-9장에서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뒤 10장에 또 족보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0: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창세기 10:32 “이들은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그 세계와 나라대로라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그 후에 노아의 세 아들 셈, 함, 야벳의 족보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족보 이야기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바로 이 사람들을 통해지금 생명의 맥이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아담에서 셋으로, 셋에서 노아로, 노아에서 셈으로 계속해서 생명의 맥이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11장부터는 이런 셈으로부터 다시 생명의 맥이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1:10 “셈의 후예는 이러하니라 셈은 일백세 곧 홍수 후 이년에 아르박삿을 낳았고” 그런 다음에 생명의 맥을 이어간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그런 다음 창세기 11:26절에 “데라는 70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누가 등장합니까? 드디어 아브람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성경은 모든 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중요한 것만 기록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언제나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의 맥을 이어가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아담에서 셋으로 노아로 셈으로 아브라함으로 생명의 맥이 이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 이야기를 족보로 처리한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족보를 신약인 마태복음에서 다시 이어갑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창세기 11장에서 아브라함을 등장시키고 그 아브라함의 계보를 다시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여러 사람이 등장해서 계속 족보를 이어나가다가,
드디어 마태복음 1:16 예수님이 등장 하십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렇게 해서 구약과 신약을 쭉 이어주는 것이 바로! 족보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족보일까요? 그것이 바로 생명의 맥을 이어가는 줄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생명의 맥을 통해서 결국 누가 등장합니까?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바로! 이것을 보여주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역대상 1장을 보면 에스라가 처음부터 족보 이야기만 합니다 역대상 1:1-4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셈, 함과 야벳이 나오고, 역대상 1:5-23 야벳, 함, 셈의 계보가 나오고, 역대상 1:24-27 셈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계보가 나옵니다. 이미 창세기에 나왔던 것을 족보로 다 정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누가가 이 족보를 다시 한번 자세하게 정리하는데 방법이 거꾸로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담에서 노아로 셋으로 아브라함으로 다윗으로 예수님까지 갔다면, 노아는 이것을 예수님에서부터 하나님까지 거꾸로 올라갑니다.
누가복음 3: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대로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다”
왜 누가는 족보를 이렇게 거꾸로 정리 했을까요? 다른 기자들은 아담에서부터 예수님까지 정리하였는데, 누가는 왜 거꾸로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까지로 정리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이 오신 출발점은 아담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생명의 시작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성경은 제일 중요한 생명의 맥을 이야기할 때 족보로 처리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족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왜! 하나님께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를 우리에게 주셨는가? 그것은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는가? 바로 우리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그런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은 바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돈, 명예, 능력, 권력 이런 것이 아닌, 왜! 하필 생명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다른 것은 노력해서 얻을 수 있을 수 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한 가지가 바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오래 살기 위해서 별짓을 다해도 죽습니다. 인간이 한 가지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인데 이것은 바로! 죄의 결과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죽음이라고 하는 형벌을 얻기 원하시지 않으시고, 죽음이라고 하는 형벌을 우리에게서 제거해주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에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생명의 본체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의 모양으로 와서 우리 대신 그 죄의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우리에게 그 생명을 주시는 것인데, 바로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그 분이 죽음을 경험해야 했던 것입니다. 죄의 형벌인 사망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스토리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자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 이 성경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얼마나 하나님 마음이 아프실까요? 슬픈 사실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아도 정작 성경을 통해 얻어야 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6. 생명나무 VS 지식나무
에덴동산에 있었던 두 그루의 나무를 통해, 한번 더 생명의 맥과 사망의 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3:22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은 아담에게 생명나무를 통해서 영생을 주시기 원하셨지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아담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약에 아담이 이 생명나무를 따먹어 버리면 영생하게 되니까 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하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담이 죄인인 채로 영원히 사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를 지키게 하시니라” 생명나무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이같이 차단하고 난 뒤에는 어느 누구도 생명나무로 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생명나무로 가는 차단된 길이 다시 회복됩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내가 생명이니 나를 통해서 생명을 얻고 아버지께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먹어라! 그러면 영원히 산다! 그러나 너희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래서 이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들과 그 후손인 우리들까지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럼 왜! 우리까지 죽게 된 것일까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말 다행인 것은, 아담의 죄로 인해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은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예수님이 오시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7. 나가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모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셔야 될 말씀을 모세에게 다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그 말씀을 기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모세오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드디어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향해 갑니다. 그런데 순종은 커녕 불순종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둘만 남게 됩니다. 이렇게 1세대가 다 죽는 사이 태어난 2세대가 다시 출애굽 당시 1세대 인구만큼인 60만 명으로 늘어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2세대는 지금가지 단 한번도 하나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출애굽 당시 시내산에서 받아서 1세대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40년 후에 다시 2세대에게 요약, 정리하여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명기입니다.
그러니까 신명기를 알면 사실은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바빠서 성경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성도들에게 신명기만 읽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런데 신명기를 다 읽을 시간도 없다고 하면 신명기 30장만이라도 읽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0장은 구약성경의 결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을 통해서 정말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신명기 30:19절 인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선택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증거까지 내세우시고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을 증거로 삼고 하신 말씀이 내가 너희들 앞에 두 가지를 두었다. 하나는 생명이고 하나는 사망이다. 그리고 혹 이것을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까봐 우리의 관점에서 두 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복과 저주입니다. 즉 생명이 복이고, 사망이 저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데 하나님은 우리가 생명을 선택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야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생명을 선택해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즉, 모세오경의 결론은 우리가 생명을 선택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신 예수님을 선택해야만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에생명이 흐르는 통로가 있고, 사망이 흐르는 통로가 있는데, 이 두 가지 맥 모두를 흘러가게 하는 주체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명의 통로가 될 것인가? 사망의 통로가 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생명이 흘러가기도 하지만, 우리를 통해서 사망이 흘러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어느 누가 자기를 통해서 사망이 흘러가기를 원하겠습니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바로 생명의 통로가 되고, 생명의 맥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바로!생명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약도 구약과 결론이 똑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랍비가 있었는데 성경에 대해서는 박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을 염두해두고 그 사람들에게 쓰신 것이 마태복음 5,6,7장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6,7장은 그때 당시에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씩 지적해 가시면서, “내가 바로 성경의 저자인데, 내 뜻은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바로! 마태복음 5,6,7장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6,7장은 구약의 요약 중에 요약 중에 요약인 것입니다. 저자 직강인데, 저자 특강인데, 그 저자인 하나님께서 3장으로 요약해 주신 것입니다. 그 3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마태복음 7:13-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예수님이 간단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생명을 얻으려면 생명의 문으로 들어가야 되지 않겠냐? 그런데 그 생명의 문은 좁은 문이다. 넓은 문으로 가면 안된다. 만약에 넓은 문으로 가면 반드시 사망으로 들어가게 된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3장에서 “그렇기 때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냥 있는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힘써야 한다 라고 한번 더 강조하십니다. 힘써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최선을 다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해야 한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좁은 문을 행해 나아가야 한다”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우리에게 힘쓰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7번이나 저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아!”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생명까지도 주신 분인데, 왜 예수님은 전혀 예수님답지 않은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들이 천국 열쇠를 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 유대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고, 천국으로 인도해야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도 천국에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못 들어가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문을 열고 그냥 들어오는 것처럼, 예수님은 그냥 들어올 수 있는 문을 노력해야만 들어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누군가가 그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정작 천국 문으로 들어가도록 백성들을 인도 해야할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인 지도자들이 자기들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려는 사람도 막았기 때문에, 백성들은 이런 사람들을 피해서 들어가기를 애써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맡은 자이고 목회자이지만, 정말 두려운 것은,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을 생명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 천국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는 것이 아닌지 늘 두려운 마음으로 돌아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지옥의 판결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느냐” 라는 너무 충격적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한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분이신데, 천하보다 그 귀한 영혼을 영원한 지옥으로 보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런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성도 하나를 얻기 위해서 온 세상을 헤매다가, 겨우 어렵게 하나 얻으면 너희보다 두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드는구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렇게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성경을 가르쳤는데, 예수님의 뜻을 벗어나 잘못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성경을 읽을 때, 바로! 예수님의 의도를 놓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자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성경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20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맺는 두 가지 열매가 있습니다. 그 열매 중 부끄러운 열매가 있는데,바로! 죄의 열매입니다. 이 열매의 마지막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열매의 마지막은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거룩함의 열매를 맺고 있으면 그 마지막이 영생인 것을 알지만, 내가 부끄러운 열매를 맺고 있으면, 성경은 그 마지막은 사망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장 중요한 것은 끝까지 잘 가는 것입니다. 내가 가는 길의 마지막이 무엇이냐? 사망이냐? 생명이냐? 이것을 분명히 하고 가야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을 선택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 신약은 오신 예수님, 그리고 또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성경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생명을 얻을 것인가? 사망을 얻을 것인가? 예수님을 얻을 것인가? 지식을 얻을 것인가?”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배설물처럼 던져 버리겠다고 한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안에 모든 것이 다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분 안에 모든 지혜, 모든 지식, 모든 것이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