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시(PHOTO LOAD POEM)
시(詩 ; poem)와 사진(寫眞 ; photo)은 다른 듯 한 그루터기다. 석양아래 시인은 시구(詩句)를 떠올리고 사진작가는 카메라를 꺼내든다. 그래서 시(詩)는 글자로 새기는 사진이고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시가 된다. 카메라를 조금 다룰 줄 안다고 작가가 될 수는 없다. 당연히 평생 일기를 썼다고 시인이 될 수도 없다. 회화(繪畫) 또한 다를 바 없어서 일찍이 시화(詩畵)분야가 발달하고 시화전이 성황리에 전개되기도 한다. 디카시가 시화와 발상근거는 동일할지라도 과정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시화는 화가가 시에서 느낀 감성을 그림으로 표현한 바탕에 시를 적은 결과라면 디카시는 사진작가가 직접 배경을 펼치고 시를 올린다는 점이다. 시심과 촬영 본능이 그 뿌리를 같이 한다 해도 솜씨차원에서는 다른 테크닉을 구사한다. 시는 문자의 나열이고 촬영은 카메라 라고 하는 메카니즘에 감성을 입히는 일이다. 하여 글의 위력에 대해 먼저 피력할 필요가 있다.
뉴욕 지하철 출입구 인근에 어떤 맹인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육면체 종이상자 겉면에 「I'm blind help me」라고 쓰여 있었으나 바쁜 출근길에 그의 동냥통에 돈을 투척하는 사람은 없었다. 때마침 그 앞을 지나가던 말쑥한 차림의 숙녀가 물끄러미 들여다 보는가 싶더니 역시 무심히 지나쳤다. 몇 발을 가던 숙녀는 그 걸인 앞으로 다시 돌아와 종이상자에 「It's beautiful day and I can't see it」 이라 고쳐 써주곤 휑하니 가던 길을 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돈통에는 지폐가 쌓였다.
숙녀의 문학적 표현이 퇴고효과(推敲效果)를 보았다. 이렇듯 문자는 나열하는 방식에 따라 같은 내용일지라도 읽는 이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고 동정심을 유발할 수도 있다. 말이 나온김에 퇴고(推敲)에 대해 간략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다. 흔히 퇴고란 글을 바꾸어 고치는 문학행위라 생각한다. 틀리지 않다. 그러나 작가가 의도한 본모습을 흐트리지 않아야 한다는 불문율을 지켜야 한다. 자칫 퇴고를 한답시고 엉뚱한 글을 만들면 퇴고가 아니라 개작(改作)이 된다.
당나라에 무본(無本)이라는 승려가 있었다. 가정이 궁핍하여 소년시절에 절에 들어왔으나 불교공부보다 시작(詩作)에 관심이 많아 당대의 유명학자인 한유(韓愈)와 문학적 교류를 하였다. 절 생활을 계속 하기 어렵다 여긴 무본이 시를 지었는데 그 결미에 「승퇴월하문(僧推月下門)」이라 썼다. 말인즉 야밤에 절로부터 도망하고 싶다는 욕구가 배어있는 시구였다. 이에 한유가 도망을 하지 말고 은사스님께 심정을 고하고 하산할 것을 권하면서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이라고 고쳐주었다.
글 쓰는 사람에게 퇴고는 아침에 기상하여 기지개를 켜는 일과도 같다. 세수도 하고 옷매무새도 고치고 화장도 한 후 외출을 한다. 기지개와 화장이 퇴고다. 소설가가 「그는 오로지 잡곡밥만을 고집하였다」라고 쓴다면, 수필가는 「그는 잡곡밥으로 건강을 챙긴다」로 쓸것이고, 시인은「잡곡들의 합창」이라 쓸 것이다. 디카시는 잘차려진 잡곡밥 한 그릇을 사진으로 찍어 「건강한 만찬」이라 할법하다. 엄밀히 디카시는 카메라로 쓰는 시다. 그렇다고 해서 시를 붓으로 쓰는 사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카메라를 드는 순간 누구나 시인이 된다. 다만 결과물이 의도와 달리 나와서 실망한다. 그래서 찍고 찍고 또 찍는다. 그러다 사진으로 못다한 심상을 몇자 글로 보충한 것이 디카시다.
눈덮인 매화, 뜬금없이 마주친 석양, 이슬맺힌 강아지풀, 안개낀 오솔길, 그 속엔 싯귀가 주렁주렁 달렸건만 마땅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아 아쉬울 때면 손에든 폰카로 한커트 쌀칵 해 둔다. 그러나 사진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셔팅속도가 한 박자 늦기도 하고 눈에 보이는 장면과 화면이라는 프레임에 들어온 장면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치어리더 박기량의 춤 동작을 디카시로 표현한다면 어떤 동작과 시어로 제목을 붙일까. 우선 그토록 빠른 춤동작을 순간포착으로 잡고자 한다면 속사기능이 있는 카메라가 필요하다. 그리고 촬영위치가 관중석이 될터이니 배경은 야구장이 된다. 이 때 클로즈업으로 춤사위만 뚜렷하게 살리고 야구장을 흐리게 잡아 주인공을 강조하고 싶을 때 어떤 기법으로 촬영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작가정신을 낳는다.
사진이란 있는 그대로 찍는 작업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조화에 작가의 영혼을 입히는 창작이다. 그래서 디카시는 글이 사진을 빛내기도 하지만 사진이 글을 빛내기도 한다. 때로는 사진이 시를 시가 사진을 제어하기도 하여 감상하는 사람의 상상력을 제한하기도 한다. 그 또한 작가의 의도라면 성공한 디카시다.
좋은 사진이란 작가가 의도한 대로 표현된 사진이다. 그리고 작가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멋진 감상을 했다 할 수 있다. 작가의 의도를 사진에 담자면 몇 가지 테크닉이 필요하다. 우선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모습도 주인공을 흘려찍고 배경을 고정하는 방법이 있고 배경을 흘려찍고 주인공을 고정시키는 방법이 있다. 주제는 뚜렷이 부제는 흐리게 찍을 줄 알아야 작가라 할 수 있다.
역광촬영을 기본으로 한다. 빛을 등지고 찍으면 결과물이 밝은 반면 윤곽이 흐려진다. 짧은 순간을 포착하고 싶다면 속사기능이 있는 카메라가 좋다. 상업사진을 흉내 내고자하면 실패확률이 높다. 그리고 다작(多作)이 수작(秀作)을 만든다. 사진에도 뽀샵이라고 하는 퇴고가 있다. 컬러로 촬영한 장면을 흑백으로 바꾼다든지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다든지. 하늘색을 보다 진하게 나타낸다든지 하는 기본적인 손질도 필요하고 때로는 이미지를 완전 전복시키는 뽀샵도 필요하다. 구도상 뽀샵이 필요한 경우도 허다하다.
좋은 카메라란 어떤 카메라일까. 작가의 의도를 충분히 담아내는 카메라가 좋은 카메라다. 작가로서는 당연히 로(RAW)기능이 있는 카메라를 추천한다. 쥼업은 기본이고 속사, JPG전환기능이 있는 카메라가 출하되고 있다. 촬영기법을 손쉽게 익히는 왕도가 있다면 그룹에 가담하여 현장경험을 쌓는 일이다. 그리고 온라인 카페를 개설하거나 가입하여 활동하기를 권한다. 폰으로는 화면과 글을 전달하는데 힌계가 있다. 끝으로 디카시는 여니사진과 달리 고도의 압축을 필요로 한다. 디카시가 줄이 많아지면 잡시가 되기쉽다. 우리말글을 압축하는 요령을 알고 싶다면 한시(漢詩)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한시는 소리와 뜻을 동시에 문자로 표현하는 수단이기에 소리글자의 장황함을 뜻글자로 함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