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극복 조건중 산소(O2)에 대한 이해.. | | | 면역,대사,물질 |
| 카페매니저 ![]() |
Biochemical Oxygen Demand.
물 속에 있는 유기물의 오염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로, 물속에 들어 있는 유기오염물질을 미생물이 분해하는데 필요한 산소의 양을 말한다.
COD(화학적 산소요구량)과 함께 물의 오염정도를 나타내는 기준으로 많이 사용된다.
BOD란 생존에 산소를 필요로 하는 세균(산소성 또는 호기성(好氣性) 미생물이나 박테리아라고도 한다)이 일정기간(보통 20도에서 5일간) 수중의 유기물을 산화 분해시켜 정화하는 데 소비되는 산소량이다.
호기성 미생물은 유기물을 분해할 때 산소를 소모한다. 물이 많이 오염될수록 유기물이 많으므로 그만큼 미생물이 이를 분해하는데 필요한 산소량도 증가한다. 따라서 BOD가 높을수록 오염이 심한 물이다.
1ℓ의 물에 1mg의 산소가 필요한 경우가 1ppm인데 보통 하천의 경우 5ppm이 되면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10ppm을 넘으면 악취를 풍긴다.
수질 환경 기준에서는 상수원수 1급수는 1ppm 이하, 상수원수 2급수에는 3ppm 이하를 유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박문각
[네이버 지식백과] 생물 화학적 산소요구량 [BOD]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프리스틀리는 리즈에 있는 동안 공기가 단일한 성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쥐를 가지고 한 실험에서, 생명을 유지해주는 공기의 능력은 호흡으로 일정하게 '소진될' 수 있고, 소진되고 나면 더 이상 호흡에 적합하지 않지만 식물이 있으면 공기의 능력이 다시 복원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이산화탄소의 분해를 통해 산소가 방출되는 광합성 작용에 대한 최초의 암시였다. 그러나 호흡 과정에서 소모되는 산소의 발견은 1774년 8월 1일에 이루어졌다. 그는 지름이 12인치(약 30센티미터)인 렌즈로 햇빛을 모아 유리 용기 속의 시료에 초점을 맞추는 방법으로 붉은색의 수은 금속회(산화수은)를 가열했다.
금속회가 금속 형태의 수은으로 전환하자 기체(프리스틀리와 그의 동료들이 '공기'라고 불렀던 것)가 방출되었다. 프리스틀리가 자신이 만든 새 '공기'가 보통공기보다 호흡을 더 원활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긴 실험과정에서, 그는 먼저 불을 붙인 촛불을 그 기체 속에 넣으면 좀처럼 보기 힘든 밝은 섬광을 내며 타오른다는 것을 발견했고, 마침내 1775년 3월 8일, 그는 새로운 기체로 채워 밀봉한 용기 속에 다 자란 생쥐를 넣었다. 다른 실험을 통해 그 정도 크기의 생쥐라면 보통공기에서는 15분 가량 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생쥐는 30분을 완전히 채울 때까지 살아 있었으며, 용기에서 꺼냈을 때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따뜻하게 보온을 해주자 다시 살아났다.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튼튼한 실험용 생쥐를 골랐을 가능성을 신중하게 생각하면서, 실험 노트에 새로운 공기가 "적어도 보통공기만큼은 좋다"라고 써넣었다. 그러나 몇 차례 더 실험한 결과, 호흡과 관련하여 새로운 공기가 보통공기보다 네 배 또는 다섯 배 더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우리가 숨쉬는 공기의 약 20퍼센트만이 산소라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스웨덴 화학자 카를 셸레(Carl Scheele, 1742~86)는 프리스틀리보다 산소를 일찍 발견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실험 노트에 따르면, 공기가 두 성분의 혼합물이라는 알게 된 것은 1772년의 일로, 그중 하나는 연소를 방해하는 데 비해 다른 하나는 연소를 촉진했다. 그는 산화수은을 가열하는 등의 여러 방법으로 연소를 촉진하는 그 기체의 샘플을 준비했지만, 그 발견 결과를 즉시 발표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는 1773년에 준비했지만 1777년에 출판한 책에서 비로소 그런 사실들을 밝혔다. 그 성과에 대한 소식은 1774년 8월, 프리스틀리가 실험을 행하기 직전 과학자 사회에 퍼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때까지 프리스틀리는 셸레의 작업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 같지만, 프리스틀리가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던 1774년 9월, 셸레는 라부아지에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실험에 대해 썼다. 셸레는 화학에서 무척 중요한 발견들도 많이 이뤄냈지만, 약제사로 일했던 까닭에 오직 한 권의 책을 출판했을 뿐이며 여러 차례에 걸친 학계의 자리도 모두 거절했다. 게다가 그는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사정들을 종합보건대, 18세기 화학의 역사에서 이따금씩 셸레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셸레와 프리스틀리가 거의 동시에 이룬 산소 발견이 진정으로 뜻하는 것은 누가 먼저냐가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과학은 이미 발견된 것과 그 당시 활용할 수 있는 기술에 기초하여 점진적으로 발전해왔음을 우리에게 새삼 되새기게 해준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어떤 개인이 그 발견을 먼저 했느냐, 즉 누가 역사책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놓았느냐 하는 것은 대체로 행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좋든 싫든, 셸레가 산소를 먼저 발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그리고 프리스틀리가 자신의 발견을 계속 플로지스톤 모형으로 무모하게 설명하려고 시도했음에도 결국 산소의 발견과 결합된 것은 프리스틀리의 이름이다.
그러나 아주 이따금씩 발견자는 역사책에서 자신의 이름을 특정 발견, 법칙 등에 붙이는 것에 실패한다(이런 표현이 과연 적절할지 모르겠다). 이는 발견자가 자신의 연구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호기심을 달래려고 스스로 실험하는 것에서 과학적 만족을 구하든 둘 중의 하나이다. 이런 보기드문 유형을 대표하는 과학자로는 헨리 캐번디시를 들 수 있다. 그는 프리스틀리와 동시대인으로, 18세기 후반에 화학의 발전에서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보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발표했지만, 미처 발표하지 않은 엄청난 연구결과들(특히 물리학에서)을 묻어두었기 때문에 그 다음 세기의 사람들(당연히 그들의 이름은 역사책에 발견자로 올라 있다)이 독자적으로 재발견하는 일이 빚어졌다. 그러나 캐번디시에게는 자신의 성향과는 별도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남다른 사정(기본적으로는 막대한 재산)이 있었다.
캐번디시는 일가가 아니라 양가 모두 당시 영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큰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 캐번디시(William Cavendish)는 제2대 데번셔(Devonshire) 공작이었고, 그의 어머니 앤 그레이(Anne Grey)는 켄트(Kent) 공작(제12대 백작이었으나 1710년에 공작 작위를 받았다)인 헨리 그레이(Henry Grey)의 딸이었다.
다섯 명의 형제들 중 넷째(여섯 명의 딸들이 더 있었다)인 아버지 찰스 캐번디시(Charles Cavendish, 1704∼83)는 자신이 직접 획득한 칭호는 없었지만, 캐번디시 가문의 사회적 지위로 그는 평생 동안 찰스 캐번디시 경(Lord)으로 알려져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경이었다면, 그의 아들 헨리는, 백작의 아들 로버트 보일이 '명예로운 로버트 보일 님'이었던 것처럼, '명예로운 헨리 캐번디시 님'이 되었을 것이다. 헨리 캐번디시는 실제로 아버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런 식으로 불렸지만, 아버지가 죽자마자 곧바로 평범한 헨리 캐번디시 님을 더 좋아한다고 사람들에게 알렸다.
양쪽 집안 모두 과학에 관심을 보였다. 1738년부터 줄곧 10여 년 동안, 켄트 공작과 그의 가문은 물리학과 천문학 연구에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특히 천문학자 토머스 라이트(Thomas Wright. 그의 활동은 라이트 : 은하수에 대한 추론 / 윌리엄과 캐롤린 허셜의 발견들 / 미첼에서 펼쳐진다)를 공작 부인과 두 명의 공작 딸인 소피아와 메리(그러나 1733년에 백혈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앤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의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라이트는 사유지에 대한 측량작업을 했으며, 그곳에서 천문학 관찰을 수행하여 그 결과를 1730년대에 왕립학회에 보고했다. 가르치는 일은 1740년에 있었던 공작의 죽음 후에도 계속되었다. 두 가문의 교류로, 찰스 캐번디시 '경'과 그의 아들 헨리는 라이트가 그곳에 머물고 있는 동안(그는 헨리가 적어도 15세가 될 때까지는 확실히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켄트 공작의 사유지를 방문했는데, 분명 그곳에서 라이트를 만나 천문학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이는 그 즈음에 찰스 캐번디시가 과학에 매우 큰 관심을 보인 나머지, 인생의 중반에 접어들면서 귀족 젊은이가 거쳐야 할 전통적 역할, 즉 정치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하다. 그런 그에게 약간 이례적으로, 찰스는 1725년에 하원(설령 있었다 해도 그 시대에는 잘못 붙여진 이름)의원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곳에서 그는 형제 한 명, 숙부, 두 명의 처남, 큰조카와 함께 활동했다. 찰스 캐번디시는 근면했고, 능력 있는 의원이며 실력 있는 행정가임이 밝혀졌는데,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첫 번째 다리(런던 브리지(London bridge)가 자장가에 오르내릴 정도로 칭송받은 이래로 런던의 템스 강에 새롭게 놓인 최초의 다리)를 놓는 작업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16년 후(이 기간 내내 로버트 월폴이 수상으로 있었다)1) 그는 국가를 위해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의 나이 37세, 아들 헨리는 단지 열 살에 불과했던 1741년, 과학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펼치려고 결심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과학자로서 그는 열정적인 아마추어였고, 왕립학회 초창기 회원들의 전통을 따랐으며, 실험 작업에 매우 능숙했다(그는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실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다).
그가 이룬 가장 흥미로운 연구 성과는 1757년에 있었던, 관찰자가 없는 동안 가장 높은 온도와 가장 낮은 온도를 기록하여 보여주는 온도계(현재 우리가 '최대-최소' 온도계라고 알고 있는 것)의 발명을 들 수 있다. 비록 첫손가락에 꼽히는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찰스 캐번디시는 아들 헨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뛰어난 행정적 수완을 왕립학회(그는 뉴턴이 죽은 지 3개월 후에 특별회원으로 선출되었다)와 왕립 그리니치천문대 모두를 위해 유용하게 활용했다.
찰스 캐번디시는 1729년에 앤 그레이와 결혼했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5세가 채 안 되었을 때였고, 그녀는 그보다 두 살이 어렸다. 그와 그녀의 아버지들은 여러 해 동안 친구로 지내왔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이 그 결혼은 축복받았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 낭만적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없다(다만 사랑이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은 충분한데, 그 시대에는 귀족의 젊은 아들은 30세까지는 결혼하지 않는 것이 통상적 관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젊은 부부가 얼마나 부유한가인데, 구체적인 것은 결혼 지참금에 모두 나타나 있다.
찰스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땅과 수입이 있었고, 앤은 수입, 유가증권, 상당 정도의 상속에 대한 지분 등을 지참했다. 크리스타 정니클(Christa Jungnickel)과 러셀 맥코머츠(Russell McCormmach)2)는 찰스 캐번디시가 결혼할 때, 상당한 재산은 물론 그에게 처분권이 있던 연간 수입이 최소한 2천 파운드는 되었으며, 그 수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늘어났다는 계산 결과를 내놓았다. 그 당시는 연간 50파운드면 풍족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고, 5백 파운드면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보통은 앤 부인으로 불렸지만 앤 캐번디시가 된 헨리의 어머니는 치명적 질병의 조짐을 일찍부터 보이고 있었는데, 독감의 형태로 주로 나타났지만 그 속에 불길하게도 각혈이 섞여 있었다. 1730/31년의 몹시 추운 겨울, 부부는 대륙으로 여행을 떠났다. 먼저 파리를 방문한 다음 니스로 향했는데, 밝은 태양과 맑은 공기가 있는 그곳은 폐병환자가 회복하는 데 적격인 장소로 알려져 있었다. 앤은 첫 번째 아들 헨리를 바로 그곳에서 낳았는데, 1731년 10월 31일의 일이었다(헨리의 이름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앤의 상태에 대한 의학적 조언을 구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대륙의 여러 곳을 더 여행한 뒤, 가족이 영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1733년 6월 24일에 헨리의 남동생 프레더릭(당시 웨일스 왕자의 이름을 땄다)이 태어났다.3)
그로부터 3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1733년 9월 20일, 앤이 세상을 떠났다. 찰스 캐번디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재혼을 하지 않았고, 헨리 캐번디시에게는 정말 어머니가 없었다. 아마 이 점이 그가 어른이 되었을 때 그의 기행을 밝히는 단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5년 후인 1738년, 찰스 캐번디시는 공적·과학적 후원 작업의 편리성을 도모하기 위해 시골에 있는 재산을 처분하고 어린 두 아들과 함께 런던의 그레이트 말버러 가(Great Marlborough Street)에 위치한 저택에 정착했다.
찰스 캐번디시는 이튼을 졸업했지만, 그의 두 아들은 해크니(Hackney)에 있는 사립학교를 나온 다음 케임브리지의 피터하우스로 진학했다. 프레더릭은 항상 형이 거쳐간 길을 밟았고, 가는 곳마다 형의 명성을 확인하곤 했다. 헨리는 1749년 11월에 케임브리지에 입학했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18세였다. 그곳에서 3년 3개월 동안 머물렀으나 아무런 학위도 받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났는데, 그것은 귀족의 젊은 자제에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그래도 케임브리지 교육과정에서 모든 장점을 받아들였다(1760년대조차 교육이 그렇게 본격화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1754년 여름 어느 날, 프레더릭이 자신의 방 창문에서 떨어져서 뇌 손상을 입은 것은 헨리가 피터하우스를 떠난 후였다. 가문의 재산 덕분으로(이는 그를 보호해줄 믿을 만한 하인이나 동료를 거느릴 수 있음을 뜻했다) 프레더릭의 독립적 생활은 보장될 수 있었지만, 평생 걸머지고 살아야 할 뇌 손상 때문에 그는 결코 정치나 과학의 무대 어느 곳에서든 아버지의 발자취를 뒤따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헨리 캐번디시는 정치에는 전혀 뜻이 없었지만, 과학에는 대단한 의욕을 보였다. 두 형제가 함께 유럽 대여행을 끝마친 후, 헨리는 그레이트 말버러 가에 있는 그 집에 정착해서 평생을 과학에 매진했는데, 처음에는 아버지와 협동연구를 했다. 가족 중 일부는 그런 생활이 방종이라는 이유로 반대했고, 또한 헨리가 실험실에 매달리는 것이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지만, 찰스는 아들이 과학에 대한 열정을 내뿜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헨리에 대한 찰스의 재정적 인색함을 둘러싼 몇 가지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이런 이야기들에 만약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돈에 대한 신중함으로 유명한 아버지 캐번디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찰스는 언제나 재산을 증식하는 방식에 관심이 있었고, 필요 이상의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필요'에 대한 그의 판단은 공작의 아들에게는 적당한 액수였다. 일부 논자들은 아버지 생전에 헨리가 받은 돈이 연간 120파운드에 불과했다고 말한다(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집에서 산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액수는 적정 수준 이상이다). 다른 논자들은 좀더 후하게, 헨리의 용돈이 연간 5백 파운드였다고 말하는데, 이 금액은 찰스가 결혼할 때 그의 아버지에게 받았던 것과 같은 액수였다. 이 모든 이야기의 진위야 어떻든 분명한 사실은 (오로지 너무너무 부유한 사람들만이 돈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처럼) 헨리가 돈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에게는 한 벌의 옷이 전부였는데, 그는 해어질 때까지 매일 그 옷만 입고, 옷이 해어지면 낡은 스타일의 똑같은 옷을 한 벌 더 구입하곤 했다. 또한 그의 식사습관도 매우 고정되어 있었는데, 집에 있을 때는 거의 양고기의 다리 부위만 먹는다. 어느 날, 여러 명의 과학자 친구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그의 집을 방문했는데, 집사가 무엇을 준비하면 좋을지 물었다. "양고기 다리", 헨리가 간단히 말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이란 말을 듣고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면 다리 두 개."
돈에 대한 헨리의 태도는, 찰스가 세상을 뜬 지 한참 후에 은행가의 방문을 기록한 일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 은행가는 그의 당좌에 8만 파운드나 쌓여 있음을 주지하고, 그 돈으로 뭔가에 투자하라고 강력하게 권했다. 헨리는 '성가신' 심문을 당하자 화를 내면서, "돈을 관리하는 것은 당신의 일이며 만약 당신이 그런 사소한 일로 나를 괴롭힌다면 내 계좌를 다른 데로 옮길 것"이라고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그 은행가는 약간은 진드기처럼 계속해서 그 돈의 절반은 투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헨리는 마지못해 승낙하면서, 그 은행가에게 알아서 가장 좋은 곳에 투자하되 그 일로 더 이상 자신을 '성가시게' 하는 일이 있을 시에는 계좌를 폐쇄해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다행히 그 은행가는 정직했고, 그의 돈은 평생 동안 안전하게 투자되었다. 죽음을 맞이했을 즈음, 헨리 캐번디시가 투자한 돈은 명목가치로 1백만 파운드가 넘었다(그 당시 시장에서의 실제가격은 1백만 파운드에 조금 못 미쳤지만).
헨리의 재산이 이처럼 막대하게 불어난 데는 부분적으로 재산 축적에 성공한 찰스의 덕도 있었지만, 죽기 직전 찰스가 상속받은 유산의 덕이 컸고, 그 유산이 다시 헨리에게 상속되어 그의 재산 일부가 되었다(프레더릭에게도 신사로서 편안한 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한 지원이 있었지만, 차남이라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뇌 손상을 당한 그가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찰스의 숙부 제임스에게 엘리자베스라는 딸이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리처드 챈들러(Richard Chandler)와 결혼했는데, 리처드는 더럼(Durham) 주교의 아들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녀의 유일한 형제자매인 윌리엄은 챈들러 가문의 일원인 바바라와 결혼을 했다. 1751년 제임스와 윌리엄 캐번디시 부자(父子)가 모두 죽었다.
윌리엄에게는 상속인이 없었기 때문에 엘리자베스와 리처드(캐번디시 성을 따서 캐번디시 가문의 일원이 되었다) 부부는 가문의 혈통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고, 그에 따라 당연히 상속을 받았다. 그러나 리처드와 엘리자베스 부부 또한 아이가 없었고, 리처드가 엘리자베스보다 먼저 죽자 엘리자베스는 엄청난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1779년, 그녀가 죽으면서 생존해 있는 캐번디시 가의 유일한 남성이자 사촌으로, 캐번디시 가문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인 찰스에게 바로 이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주었다. 찰스 캐번디시가 79세의 나이로 1783년에 세상을 떴을 때, 그동안 쌓인 재산들이 모두 헨리에게 넘어갔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그가 '학식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부자인 동시에 부자들 중에서 가장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불린 것은 이런 일이 있고 난 뒤였다. 가문의 전통에 따라 1810년, 헨리는 죽음을 맞아 자신의 재산을 가까운 친척들에게 물려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사람은 조지 캐번디시로, 그는 제4대 데본셔 공작(역시 헨리 캐번디시의 조카)의 아들이자 제5대 공작과는 형제 사이였다(조지의 어머니는 샬럿 보일(Charlotte Boyle)이며, 제3대 벌링턴(Burlington) 백작의 딸이었다). 그후 제6대 공작이 결혼하지 않고 1858년에 죽자 조지의 자손들 중에서 윌리엄이 제7대 데본셔 공작이 되었다. 철강 투자로 가문의 재산을 더욱 키워놓았고, (수많은 직책 중에서) 9년 동안 케임브리지 대학교 명예총장을 역임한 후, 1870년대에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 건립에 기부금을 낸 것은 바로 이 윌리엄 캐번디시였다. 윌리엄 캐번디시가 선조를 기리기 위해 그 연구소 설립에 앞장섰는지에 대해서는 공식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캐번디시라는 이름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전 시기에 걸쳐 벌어졌던 급격한 발전 기간 동안 물리학 연구의 최전선에 자리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헨리 캐번디시는 가문 재산의 일부를 어떻게 하면 가문 밖으로 돌리는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을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는 돈을 헤프게 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당한 이유가 있을 때는 돈을 쓰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과학 작업을 도와줄 조수들을 고용했고, 당연히 그는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따라서 이 모든 정황을 종합해볼 때, 그가 1870년대에 살았다면 그 역시 캐번디시 연구소와 같은 연구소의 필요성을 파악했을 것이며, 따라서 그 지출을 당연히 승인했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죽기 직전, 헨리는 햄스테드(Hampstead)에 있는 집을 빌려 약 3년 동안 그곳을 이용했다. 1784년 이후, 그는 그레이트 말버러 가에 있는 집을 세주고, 베드퍼드 스퀘어(Bedford Square) 근처에 있는 또 다른 저택을 사들였고(아직도 남아 있다), 햄스테드를 떠난 후에 템스 강 남쪽에 있는 크랩엄 커먼(Crapham Common)에 있는 집을 샀다. 이 모든 곳에서 과학 작업을 삶의 중심에 두고 그는 그 주위를 맴돌았으며, 과학자들과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회생활과는 거의 담을 쌓고 있었다.
헨리는 대단히 수줍음을 많이 탔고, 과학 모임 외에는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드물었다. 모임에 나가는 경우에도 그는 문밖에 서성거리며 모임 장소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이따금씩 보이곤 했고, 자신의 힘으로 존경받는 과학자가 된 한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능한 한 하인들과 필답으로 의사소통을 했으며, 뜻하지 않게 모르는 여인을 처음 만났을 때 벌어졌던 일을 비롯하여 그의 수줍은 성격에 대해 많은 일화가 있다. 모르는 여인을 만났을 때의 일화를 소개하자면,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말 그대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그래도 그는 종종 사륜마차를 타고 여름 몇 달 동안 영국을 돌아다녔는데, 조수 한 명을 데리고 과학 탐구를 수행했으며(그는 지질학에 관심이 있었다) 여러 과학자들을 방문했다.
과학에 관련된 헨리의 사회생활은 1758년 아버지가 주관한 왕립학회 모임의 참석에서 시작되었다. 1760년, 그는 자신의 힘으로 특별회원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왕립학회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 그 클럽은 왕립학회 회원으로 구성된 정찬 모임이지만 왕립학회와는 별도의 기구였다. 그는 그후 50년 동안 클럽의 정찬(일주일 간격으로 거의 일년 내내 열렸다)에 매년 한 번 정도는 참석했다.4) 그 당시 돈 가치를 어림잡자면, 3실링(현재 15펜스)으로 고기 아홉 접시, 닭고기나 생선, 과일 파이 두 개, 건포도와 설탕 조림의 과일을 넣은 연한 과자, 버터와 치즈, 와인 또는 흑맥주나 레모네이드를 선택해 식사할 수 있다.5)
캐번디시에게 '부자 중에서 가장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던 출판된 연구 결과는 그의 연구 활동에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의 활동에서 얻은 대부분의 성과를 평생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다룬 연구의 범위는 대단히 넓었고, 그의 연구 결과를 동시대인들이 알았으면 물리학(특히 전기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발표한 대부분의 연구 결과는 주로 화학 분야였다. 실제로 그 분야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으며, 18세기 후반의 화학 발전에서도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캐번디시의 첫 번째 화학 연구는 비소 연구와 관련되었으며 1764년에 이루어졌다.
그 결과 역시 발표되지 않아, 우리는 왜 캐번디시가 이런 특수한 물질을 탐구 대상으로 삼았는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그의 숙련도로 볼 때, 당시 그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비소산 제조 방법의 개발에 성공했음을 그의 노트 기록으로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1775년, 셸레가 비소산을 독자적으로 만들어내면서 그 성과는 셸레에게 돌아가고 말았다(과묵한 캐번디시에게 이는 꽤 타당한 일이었다). 비록 셸레가 그 영광을 차지했지만, 1766년 캐번디시는 그 일을 성공시켜 〈철학회보〉에 처음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소의 발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과학, 2010. 6. 5., 도서출판 들녘)
원소기호 | O |
---|---|
원자번호 | 8 |
화학계열 | 비금속, 칼코겐 |
원자량 | 15.9994 |
전자배열 | 1s2 2s2 2p4 |
상태 | 기체 |
밀도 | 1.429g/L (0℃, 101.325kPa) |
녹는점 | -218.79℃ |
끓는점 | -182.95℃ |
융해열 | 0.444kJ/mol (O2) |
기화열 | 6.82kJ/mol (O2) |
비열용량 | 29.378J/(mol·K) (O2) |
전기음성도 | 3.44 (Pauling scale) |
산화수 | 2, 1, -1, -2 |
1772년 스웨덴의 화학자 카를 셸레는 잘게 부순 연망가니즈석을 진한 황산에 녹이고 가열하여 산소를 얻는 데 성공하였고, 영국의 화학자 죠셉 프리스틀리는 1774년에 볼록 렌즈로 태양 광선을 모아 적색 산화수은에 쬐어서 산소를 얻어 냈다. 프리스틀리는 그가 얻은 기체가 물에는 녹지 않고, 다른 물질의 연소를 도우며, 생물의 호흡을 돕는 등의 성질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새로운 공기라고 명명하였으나 더 이상 진전을 하지 못하였다. 그후 프랑스의 과학자 앙투안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의 연구를 계속한 결과 이 독특한 기체가 새로운 원소라고 인정하였다. 1778년 라부아지에는 이 새로운 기체 속에서는 연소 생성물 대부분이 산의 성질을 갖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스어의 '신맛이 있다’는 뜻의 oxys와 '생성된다’는 뜻의 gennao를 합쳐 oxygen이라고 이름붙였다.
산소는 상온에서 두 산소원자가 이중결합하여 이원자 분자(O2)로 존재한다. 산소는 색, 맛, 냄새가 없고 물에 조금 녹는 공기보다 무거운 기체이다. 지각의 49.2%, 바다의 88.9%를 구성하는 요소이며 공기 중 전체 부피의 약 21%를 차지하며 질소기체(78%) 다음으로 많다. 산소기체 자체는 타지 않지만 다른 물질이 타는 것을 도우며(조연성), 반응성이 매우 커서 할로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원소와 반응하여 산화물을 만든다. 어떤 물질이 빛과 열을 내면서 격렬하게 산소와 반응하는 연소는 빠른 산화의 일종이며, 철과 같은 금속이 습기가 있을 때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하여 부식되는 것은 느린 산화로 볼 수 있다. 동·식물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산소의 존재 없이 동물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산소를 강하게 가열하면 원자상태의 산소를 소량 생성하며 공기 중에서 무성방전(無聲放電)을 하거나, 원자외선을 조사하면 동소체인 오존이 생성된다. 액체산소는 약간 푸르스름한 색을 띠며 금속을 산소 용접할 때나 산소 호흡 등에 쓰인다.
산소(O2)의 동소체 오존(O3)은 산소와 전혀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 대기권의 상층부에서 자외선에 의해 분해된 산소원자가 산소분자가 결합하여 생성된다. 대기권 상층부의 오존은 자외선을 흡수하여 지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공기오염으로 인해 지표면 부근에 오존의 양이 많아지면 '오존주의보'가 발령되는데, 대기권 밖의 오존과 달리 지표면 가까이에 존재하는 오존은 호흡기와 폐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정한 천연 동위원소로 16O(99.762%), 17O(0.038%), 18O(0.2%)가 존재하며 원자량 16인 산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14개의 방사성동위원소가 발견되었으며 그 중 가장 안정한 15O의 반감기가 122초, 14O의 반감기는 70.6초이다.
산소는 대부분 녹색식물의 광합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며 공업적으로는 액체공기의 분별증류, 또는 공기의 분별액화(分別液化)가 널리 사용되며, 공기 액화에는 공기의 단열팽창이 사용되며 이것을 분류함으로써 산소와 질소를 동시에 얻을 수 있으므로 질소에 의한 암모니아합성 등과 함께 이용된다.
물의 전기분해에서는 보통 수산화나트륨 또는 수산화칼륨 수용액을 철전극과 격벽을 써서 전기분해한다. 이 방법은 산소와 함께 수소를 얻으며 오히려 수소제조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어서 수소가 필요하지 않을 때는 사용하지 않는다.
실험실에서는 염소산칼륨에 이산화망가니즈를 촉매로 넣고 가열하거나 과산화수소에 이산화망가니즈를 가하여 산소를 얻는다.
MnO2
2KClO3 -------> 2KCl+3O2
MnO2
2H2O2 -------> 2H2O+O2
황산 산성으로 과산화수소수에 과망간산칼륨 수용액을 떨어뜨리거나 또는 과망간산칼륨을 진공 중에서 가열·분해시키는 방법도 사용한다.
산소는 동식물의 생명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물질이다. 호흡을 통해 몸 속으로 들어온 산소는 영양분을 태워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하며, 혈액 속에 녹아 몸 전체에 공급된다. 산소는 각종 화학공업·야금(冶金) 등에서 대량으로 사용된다. 암모니아합성, 그밖의 합성화학공업에서의 원료가스 제조에, 특히 철강 관계 노공업(爐工業)에서 사용량이 많다. 그밖에 산수소염(酸水素炎)·산소아세틸렌염 등으로 금속의 용접·절단 등, 액체산소 폭약·흡입·로켓추진제 등의 용도도 많다. 운반용에는 액체산소가 주로 사용되며, 의약용 산소흡입에서는 30%(부피)로 해서 쓰인다.
[네이버 지식백과] 산소 [oxygen, 酸素]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