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처대(安處大, 1675-?)공이 충주(忠州) 위류면(圍柳面) 순흥안씨 외손 김씨 집에서 순흥안씨 구보를 보고 광주안씨 결세 계보를
등사해왔다고 하는데, 충주 위류면은 어디인지 확실치 않으나 글자의 의미로 보아 주류면(周柳面)인 것 같다.
[충주에 유등면(柳等面, 현 대소원면)도 있으나 위류면은 아닌 듯 하다. 맨 아래 첨부 지도 참고.]
충청북도(忠淸北道) 충주시(忠州市) / 주덕읍(周德邑)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48.44㎢, 인구 6,417명(2008년 현재). 읍 소재지는 신양리이다. 본래 충주군 지역으로
주위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어 주류면(周柳面)이라 하였다. 망청·신대 등 21개 리(里)를 관할하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덕면(德面)의 상류·하류 등 21개 리와 신니면의 수청동 일부를 병합, 주류와 덕면의 이름을 따서 주덕면이 되었다.
1995년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됨에 따라 중원군 주덕면에서 충주 통합시 주덕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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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는 본인이 지금은 폐쇄된 동국안문(ahn21.or.kr) 시절부터 모아온 것으로, 출처를 밝혀 원본 그대로 전재하는 것은 허용하나,
광주안씨 결세(缺世) 12대 및 광주 - 순흥 분관 논란 관련 기록 모음
종래에 광주안씨는 시조(휘 방걸[邦傑])는 고려 태조 때 분으로 전해왔지만, 그 직후의 계보를 잃어버려 시조 다음에 결세(缺世)를 두고, 고려중기의 전중시어사(휘 유[綏])공을 1세로 하여 계보를 이어 왔다.
순흥 안씨가 광주 안씨에서 분관했다는 말이 나오게 된 최초의 발단은 원주에 살았던 광주 안씨 안처대(安處大, 1675-?)라는 분이 1719년 충주의 순흥 안씨 외손가에 들렀다가 거기서 본 순흥 안씨 족보에서 이러한 계보를 베껴와서 문중에 알린데서 연유한다. 하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힘들어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 ~ 1791) 선생의 부친 안극(安極,1696-1754) 공이 1725년에 직접 충주로 갔으나 원족보 소장자의 집을 찾는데 실패한다. 그후 문중에서 족보 간행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자(무오보, 1738년), 이를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어 안신형(安信亨, 1692-1760)이란 분이 안처대(安處大) 공과 함께 다시 충주로 갔지만, 시간이 20년 가까이 경과한 뒤라 그 족보는 불타고, 주인은 다른데로 이사가서 재차 확인에 실패한다. 근래에 순암 안정복 선생 종손가의 문서들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역통)에서 "광주안씨 순암종택(順菴宗宅) 문서"라는 이름으로 인터넷에 공개하였다. 여기에서 순암선생의 부친 안극(安極,1696-1754) 공이 이 사안에 대해 직접 기록한 "십이대 결세 전의록(十二代缺世傳疑錄)"이라는 문건이 발견되었는데, 사건의 전말을 비교적 자세히 적어 놓았다.[아래 참고]
광주안씨 무오보(1738년)에서는 별록에 재차 확인에는 실패한 처대공이 베껴온 계보와 함께 그 계보가 나온 전말을 간단히 수록하며, 훗날의 고증을 기다린다고 했다. 이 계보는 그 후의 족보에서도 계속 별록에 참고기록으로 실려 왔지만, 더 이상의 고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것만으로 보면 이 계보는 현존하는 어느 순흥안씨 옛 족보에도 없으므로 광주안씨(안처대)가 날조한 것이다고 주장할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 이 계보를 폐기하지 않고 별록에 수록한 것은 족보 간행에 관련된 분들이 조작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사안에 관여한 사람은 역사학자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 ~ 1791) 선생의 부친 안극(安極,1696-1754) 및 그 분과 가까운 사람들이다. 순암선생이 젊을 때의 일이긴 하지만 이 분들이 그 후에 족보 간행에서 사실 고증을 엄청나게 중요시한 것을 볼 때 만일 조작했다는 의심이 들었다면 족보에 싣지도 않았을 것이다. 안처대라는 분은 혈연상으로도 안극과 그리 멀지 않고 평소에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를 족보 별록에 수록한 것은 조작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순흥안씨의 경우는 1765년 을유보 범례에 이 계보를 수록하면서, 이를 근거없는 것이라고 상당한 비판을 가하였다. 하지만 1830년 경인보에서는 당진공(唐津公) 안우제(安羽濟: 21世, 1720-1784)라는 분이 순흥안씨 중에도 역시 충주의 순흥안씨 족보에서 같은 계보를 보고 적어 온 것이 있다고 하였다. 이 두 기록은 근래 간행되는 순흥안씨 족보들의 전의록에 계속 수록되고 있다. 당진공의 언급을 볼 때 이 계보를 광주 안씨들이 조작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은 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계보의 내용이 그대로 믿을 만한가는 별개의 문제로 가부간에 추가적인 고증이 필요하지만, 시대가 고려 중기 이전이라 문헌의 부재로 명확한 고증이 쉽지는 않다.
따라서 이 사안의 원천 기록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연대순으로 안극의 "십이대 결세 전의록(十二代缺世傳疑錄)"과, 광주안씨 1738년 족보 별록의 기록, 순흥안씨 을유보(1765) 및 경인보(1830)의 기록 [근래의 순흥안씨 족보 전의록에 수록] 등 4가지이다. 이 외의 다른 기록들은 이것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약간 변형한 것에 불과하므로 그다지 참고할만한 것이 못된다. 아래에 네 가지 기록에다 관련된 주변 기록들을 약간 추가하여 올린다. 이 사안에 대한 원천 자료로 볼 수 있다.
- 처대(處大)공이 순흥보에서 등사해온 결세 계보
- 광주안씨 구보 기록(廣州安氏 舊譜 記錄) : 1738
- 십이대 결세 전의록(十二代缺世傳疑錄) : 안극(安極,1696-1754)
- 위 글의 필자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 ~ 1791) 선생의 부친 안극(安極,1696-1754)공인 것은 울산으로 부임해가는 분을 선군(先君)이라고 칭하는데서 알수 있다. 안극공의 부친 안서우(安瑞羽, 1664~1735)공이 울산 부사를 지냈다. 서우공이 별세한 후인 1735년 이후에 지었을 것이다. 선군(先君)=선친(先親) : 돌아가신 아버지를 칭하는 말.]
- 광주안씨 세계(廣州安氏 世係)
시조(始祖) 諱 邦傑 廣州君 高麗大將軍
2세 국신(國信) 문하시중(門下侍中)
3세 여중(礪仲) 문하시랑(門下侍郞)
4세 보평(輔平) 내사시랑(內史侍郞)
5세 헌사(憲思) 첨의중찬(僉議中贊)
6세 무성(武成) 평장사(平章事)
7세 경립(慶立) 참지의사(參知議事)
묘가 양주 서면에 있다. (墓在楊州西面)
8세 석창(石昌) 중서령(中書令)
9세 필몽(弼夢) 내사령(內史令)
10세 홍미(弘美) 문하시중(門下侍中)
자미(子美) 순흥안씨(順興安氏) 시조(始祖)
11세 익상(益相) 내의령(內議令)
12세 학성(學成) 내봉경(內奉卿)
13세 충계(忠季) 문하시중(門下侍中)
위 계보는 광주안씨 구보의 별록에 수록 되어 왔음.
按廣州安氏 自始祖大將軍以下 殿中侍御史以上 有十二代缺世 適原州宗人處大 往忠州圍柳面 順興安氏家 見順興安氏刊板舊譜 則順興安氏 亦以廣州君爲始祖 而歷八代至諱弘美子美兄弟 子美爲順興安氏中始祖 以仍貫順興 弘美以下至諱忠季 則乃廣州君直派 而自廣州君以下 至諱忠季 計之則十二代也 處大遂謄錄 送于宗中 此子孫之目見謄出 似無可疑 而只見其謄出 不敢遽以傳信 送宗人信亨 往見處大與之偕 往忠州順興安氏家 則順興舊譜 已入於回祿中 問于主人 主人年少 不識古蹟 無處更問 今姑別錄 以竢後日故
[시조 대장군 이하부터 시어사공 이상 12세에 관한 구보 기록]
살피건대 광주안씨는 시조 대장군으로부터 이하 전중시어사 이상 십이대가 빠져 있었다.
우연히 원주 종인 처대가 충주 위류면 순흥안씨(順興安氏) 집에 갔다가 순흥안씨가 판각 간행한 구보를 본즉 순흥안씨 역시 광주군을 시조로 하고 내려와 팔대에 이르러 휘 홍미 자미 형제가 있었는데 자미를 순흥안씨 중시조로 하여 이에 관향을 순흥이라 하였다고 되어 있었다.
홍미 이하 휘 충계에 이르름이 곧 이에 광주군 직파이고, 광주군으로부터 이하 휘 충계에 이르기까지 계산한즉 바로 십이대였다. 처대가 기록을 등초하여 종중에 보내오니 이는 자손의 눈으로 볼때에는 등사된 것에 의문의 여지가 없었으나 단지 등초의 출전을 본것만으로 감히 거증하지 못함으로, 종인 신형을 보내어 처대를 만나보게 하고 함께 충주의 순흥안씨 집을 다녀오게 하였는바, 순흥 구보는 이미 화재로 불타버렸고, 주인을 찾아보니 주인이란 사람이 어려 옛 문적을 알지 못했다.
이에 다시 물어볼 곳 없이 지금에 이르렀다. 별도로 수록해둠으로서 후일에 이런 연고를 밝히기를 바란다.
** 위 광주안씨 첫 족보인 무오보(1738, 때로는 기미보[1739]라고도 함)의 기록은 아래 안극(安極,1696-1754)공의 "십이대 결세 전의록(十二代缺世傳疑錄)"을 축약한 것으로 보이나, 충주의 순흥안씨 족보를 소장한 사람이 순흥안씨 외손 김씨 선비 집에서 순흥안씨가로 바뀌어 있다. 글을 축약하면서 번거로움을 피해 이렇게 한 것 같다. 족보가 광주안씨의 공식적인 문건이므로 먼저 소개하였으나, 두 문건은 모두 1738년 족보를 간행할 무렵에 지은 글이다. 안극(安極,1696-1754)공은 무오보 간행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서문을 짓기도 했으므로, 자신이 지은 아래의 원본 글을 족보 편찬시에 참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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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통(한국학중앙연구원) 廣州安氏 順菴宗宅 고문서의 1번자료
가승(광주안씨팔고조, 비문, 방목)[家乘(廣州安氏八高祖, 碑文, 榜目)]
十二代缺世傳疑錄 (원문 이미지 Link)
始祖 安邦傑 廣陵君 子 國信 門下侍中 子 礪仲 門下侍郞 子 輔平 內史侍郞
輔平 子 憲思 僉議中贊 子 武成 平章事 子 慶立 參知議事 墓在楊州西面
慶立 子 石昌 中書令 子 弼夢 太保內史令 子 弘美 門下侍中 弟 子美 順興始祖
弘美 子 益相 內議令 子 學成 內奉卿 子 忠季 門下侍中
按 廣州安氏自始祖 廣陵君 以下 殿中侍御史 以上 有十二代缺世矣 己亥 冬 宗丈處大氏 往忠州圍柳面至順興安氏 外孫 金姓 士人家 見 順興安氏刊板舊譜則 順興安氏 亦以廣陵君爲始祖 其下系以十二代屬之于 殿中侍御史 遂謄出來傳于余 余於乙巳七月間 先君 赴任 蔚山時 余陪先君 往忠州圍柳面 訪其金姓 士人 而終不得尋 其後 嶺南 修譜時 以處大氏 所傳謄本 送于宗中則 宗中諸人 但見其所謄 不敢遽以傳信 送宗人 信亨于 原州 樓山 與處大氏 偕往忠州圍柳面 金姓 士人家則 其家移居他處 順興舊譜 已入於回祿中云 豈不痛恨哉 且以野史所記 思簡公語觀之 安氏 在王朝 遠祖以下十七代 世受國恩 有侍中八人 學士七人云則 與十二缺世 實爲暗合 但不見刊板舊譜之前 直錄未安 當付傳疑之例也 今姑書之于家狀之首而竢後日
[번역문]
고찰하건대 광주안씨는 시조 광릉군(廣陵君) 이하로부터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이상 십이대의 세대가 누락되어 있다.
기해년(1719년) 겨울 종장(宗丈)이신 처대(處大)씨가 충주(忠州) 위류면(圍柳面)의 순흥 안씨 외손인 김씨 성을 가진 선비 집에서 순흥 안씨가 판각 간행한 구보(舊譜)를 본즉 순흥 안씨 역시 광릉군으로 시조를 삼아 그 아래 12대 계대에 전중시어사를 붙여 두었다.
이로부터 등사하여 가지고 와 나에게 전달해주었다. 나는 을사년(1725년) 7월달에 선군(先君)이 울산부사로 부임할 때에 내가 선군을 배종하여 충주 위류면에 가서 그 김씨성의 선비 집을 수소문하였으나 마침내 찾지 못했다.
그후 영남에서 족보(무오보, 1738)를 만들 때에 처대씨로부터 전달받은 등본을 종중에 보내었더니 종중의 여러 사람들이 그 등본의 것만 보고는 갑자기 감당할 수 없음을 전하며 종인 신형(信亨)씨를 보내어 원주(原州) 누산(樓山)의 처대씨로 더불어 같이 충주 위류면 김씨성의 선비 집으로 가게 하였는데 그 집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살고 있었고 순흥의 구보는 이미 불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하였으니 이 어찌 통한스럽지 않으랴.
또 야사(野史)에 사간공(思簡公, 安省, 1344-1421)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바를 살펴보면 ‘안씨는 왕씨의 조정(王朝)에서 먼 윗대 조상 이하 십칠대에 대대로 나라의 은총을 받아 시중(侍中)이 8인이요, 학사(學士)가 7인이 있다’고 하였은즉 12대가 누락됨과 더불어 진실로 딱 들어맞는다. 다만 앞의 판각 간행본을 보지 못하여 바로 수록하기는 미안하여 마땅히 의혹을 전하는 예에 부쳐 지금 간단히 가장(家狀)의 머리에 써놓아 후일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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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역통)
廣州安氏 順菴宗宅 문건 208 번
廣州安氏 世係
始祖 諱邦傑 廣州君 高麗太祖時
二世 諱國信 門下侍中
三世 諱礪仲 門下侍中
四世 諱輔平 內史侍郞
五世 諱憲思 僉議中贊
六世 諱武成 平章事
七世 諱慶立 參知議事 墓在楊州西面
八世 諱石昌 中書令
九世 諱弼夢 太保內史令
十世 諱弘美 門下侍中 弟 子美 爲順興君 始分派
十一世 諱益相 內議令
十二世 諱學成 內奉卿
十三世 諱忠季 門下侍中
十四世 諱綏 觀察使 墓在咸安
十五世 諱祉 光祿大夫 觀察使
順菴公(安鼎福, 1712 ~ 1791) 아니면 부친 극(極, 1696 -1754)공의 필적이라고 함.
몇몇 글자에서 12대 결세 전의록과 차이를 보인다.
시조 군호가 廣陵君 아닌 廣州君이고 高麗太祖時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3세 礪仲공의 관직도 門下侍郞 아닌 門下侍中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더 나중 사본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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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록들과 관련된 종인 두분 처대공과 신형공 및 순암공 가계의 계보는
省 | - 從生 | - 彭老 | - 潤德 | - 漢彦 | - 汝敬 | - 滉 | - 應元 | - 時聖 | - 信行 | - 瑞羽[계자] | - 極 | - 鼎福 | - 景曾 |
- 健行[출계] | |||||||||||||
- 汝恒 | - 溱 | - 宗禮 | - 時稷 | - 世伯 | - 處大 | - 吉亨 | - 鼎三 | ||||||
- 沂 | - 宗福 | - 時望 | - 健行[계자] | - 瑞羽[출계] |
國柱 | -- 崗 | - 叔良 | - 普文 | -- 覯 | -- 峋 | - 應雲 | - 餘慶 | -- 璹 | - 翔漢 | - 時泰 | -- 欽 | - 信亨 | - 景漸 |
서우(瑞羽, 1664~1735) - 극(極, 1696 -1754) - 정복(鼎福, 1712 ~ 1791)
처대(處大, 1675-?) : 사간공후 감찰공파 29세손. 1730년대까지 생존하나 후대가 끊어졌음. 부(父) 세백(世伯)이 원주원씨(原州元氏)를 취처(娶妻)하여 원주에서 거주(居住). 순암(順菴)공의 조부(祖父) 서우(瑞羽)공과 동항(同行)이며 서우공의 생부(生父) 건행(健行)공이 처대공의 작은집에 입후(入後)하여 한 집안의 처지로 서우공이 문과(文科)하여 한성에서 벼슬할 때 왕래(往來)가 빈번 했을 것임. [1983 대동보: 字는 大潤이요 乙卯生. 配鄭震甲女요 墓는 原州正之安]
《대동지지(大東地志)》원주목(原州牧)【방면】정지안(正之安) 서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이다.
신형(信亨, 1692-1760) : 중랑장공후 사맹공(휘 峋)파로 31세이며 밀양에 거주했음. 순암공의 부친 (휘 極)과 절친하였고, 광주 초보 간행에 두 분이 큰 기여를 했음. 아들 경점(景漸)공은 문과에 급제했으며, 또한 순암공과 절친한 사이였음.
처대(處大)공과 신형(信亨)공은 기미보(1739)에 수록된 한때 시어사공묘로 잘못 알려졌던 온양의 묘와 관련한 글에도 나온다.
순암공이 지은 신형공 묘갈기가 "순암선생문집 제21권 묘갈(墓碣)"의 "학생 안공 묘갈기(學生安公墓碣記) 갑오년"이다. [민족문화추진회 고전국역총서 순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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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간공 유사(思簡公 遺事)
- 순흥안씨 을유보(1765) 범례
- 순흥안씨 경인보(庚寅譜:1830)
- 임진왜란(1592) 이전의 안씨 족보들
- 순흥안씨 역대 족보의 전의록(傳疑錄)
- 광주안씨 임술보(1922) : 결세 12대 본계에 편입
- 광주안씨 대동보 (1983) : 결세 12대 본계에 편입
安鍾和 편, 광릉세고(廣陵世稿, 1907년 간행, 국립중앙도서관 DB)
설천집(雪泉集) 사간공 유사(思簡公 遺事) : 사간공(思簡公)은 안성(安省, 1344-1421)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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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朝壬申(1392년)革鼎後 勳貴輩仇視舊臣 多被屠刈之禍 公及權陽村近 皆有老父 未免出仕 徵拜留後松京 公曰 遠祖以下十八代 世仕前朝 侍中七人 學士八人 吾乃喬木世臣 今出仕宦則入地之 先靈皆爲王氏鬼 何獨畏沒身之誅 忍作他姓臣耶 一觸礎 失聲大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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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록(傳疑錄) 이전기록. 원문은 첨부파일 참고]
凡例
廣州安氏鼻祖 大將軍邦傑下 舊有缺世 今考其新譜別編 始於大將軍下 繼以 子門下侍中 國信 子門下侍郞 礪仲 子內史侍郞 輔平 子僉議中贊 憲思 子平章事 武成 子參知議事 慶立 子中書令 石昌 子內史令 弼夢 子門下侍中 弘美 以吾始祖 護軍公 書於弘美弟行 而註以順興安氏始祖 以爲得於順興刊板舊譜云 此所謂舊譜迺吾安之所不知者也 若有此舊譜 則何不出於 前後修譜時耶
其言固無稽 其所錄 亦傳疑之例 而旣有刊行文字 恐爲百世之疑 故玆以卞明云
“광주 안씨 시조인 대장군 방걸(邦傑)의 아래에 빠져 있는 세대가 있었는데, 이제 그 신보(新譜)의 별편을 상고해보니, 대장군의 아래로부터 시작하여 아들인 문하시중 국신(國信)과 아들인 문하시랑 여중(礪中)과 아들인 내사시랑 보평(輔平)과 아들인 첨의중찬 헌사(憲思)와 아들인 평장사 무성(武成)과 아들인 참의지사 경립(慶立)과 아들인 중서령 석창(石昌)과 아들인 내사령 필몽(弼夢)과 아들인 문하시중 홍미(弘美)를 계속 썼으며, 우리 시조인 호군(護軍)공을 홍미의 아우 항렬에 써 놓고는 순흥 안씨의 시조라 주기(註記)하고, 이것을 순흥 안씨의 판각한 구보(舊譜)에서 얻었다 하였다. 이들이 말하는 구보는 우리 안씨는 일찍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구보가 있었다면 어찌 전후에 수보(修譜)할 때 나오지 않았단 말인가. 그 말은 진실로 황당무계하며 그 기록 또한 의심스러운 것을 전하는 준례에 불과한데, 이미 간행한 문자가 있으면 백세(百世)에 의심할까 염려되므로 이에 분별하여 밝히는 바이다.”
순흥안씨 을유보(1765)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順興安氏族譜 / 안대제 (조선), 1722-? / [ ] / 英祖 41(1765) / K2-1761
참고 : 순흥 을유보(1765년) 범례
근래 나오는 순흥안씨 족보는 대개 총록에 전의록(傳疑錄)을 싣고 있다. 첫 부분은 앞서 나온 순흥 을유보(1765) 범례의 처대공 등본 관련 사항이고, 그 다음에 아래와 같은 경인보(庚寅譜:1830)의 내용이 있다.
庚寅譜曰 廣州安氏 新譜 密陽板 別錄註卽 安順菴鼎福所著 有曰 廣州安氏自大將軍以下 典農寺尹 以上有缺世 原州宗人處大 往忠州順興安氏外孫金姓人家 見順興安氏刊版舊譜 則亦以廣州君爲始祖 其下系以十二代 屬之于典農寺尹 處大遂謄 送于宗中 宗中諸人 但見其所謄 不敢遽以專信 送宗人信亨 往見處大與之偕 往忠州金姓人家 則順興舊譜 已入於回祿中 其家亦移居 無處更問 今姑別錄 以俟後日云 族祖唐津公羽濟氏世乘亦曰 此舊譜似是丙午前本也 而第吾宗人亦有於忠州吾安氏外孫柳姓士人家得見 其板本所謄 護軍公以上九世而謄來者則此也 忠鄕之有此本審矣 豈前時 譜學不博 未能闡發故耶 廣州安氏之所不敢信者 亦未敢遽信 而姑錄之云 今姑竝記之
경인보(庚寅譜:1830)에 이르기를 “ 광주안씨의 신보(新譜)인 밀양판(密陽版) 별록(別錄)의 주(註)는 바로 안순암 정복(安順庵鼎福)이 지은 것인데 여기에 이러한 기록이 있다.
“광주안씨는 시조인 대장군 이하 전농시윤(典農侍尹) 이상에 빠진 세대가 있었는데 원주(原州)의 종인(宗人)인 처대(處大)가 충주(忠州)의 위류면(團柳面)에 사는 순흥안씨의 외손(外孫)인 김씨 집안에 가서 순흥안씨가 간행한 구보(舊譜)를 보니 또한 광주군(廣州君)을 시조라 하였고 그 아래에 12대를 이어 전농시윤 에게 소속 시켰었다. 처대는 마침내 이것을 등사하여 종중에 보내왔는데 종중의 여러 사람들은 다만 그 등사한 것만을 보고는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하여 종인인 신형(信亨)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처대는 그와 함께 충주에 사는 김씨 집에 가보니 순홍의 구보(舊譜)는 이미 화재에 불타 없어졌고 그 집도 이사해 가서 다시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제 우선 별도로 기록해서 후일을 기다리는 바이다. 하였으며 족조(族祖)인 당진공 우제씨(唐津公羽濟氏)의 세보(世譜)에도 또한 이르기를 이 구보(舊譜)는 '병오보(丙午譜:1546) 이전의 본(本) 인듯하다. 다만 우리 종인 중에도 충주에 사는 우리 안씨의 외손인 유씨 집안에서 그 판본에 등사된 호군공 이상 9세(世)를 얻어 보고는 등사해 온 것이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충주지방에 이러한 본이 있는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예전에는 보학(譜學)이 밝지 못하여 이것을 발견하지 못했는가보다. 광주안씨 들이 감히 그대로 믿지 못하는 것을 우리 또한 그대로 믿을 수가 없으므로 우선 기록한다.”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아 울러 기록하는 바이다.
** 위 원문은 순흥안씨 찬성공파보(1993년), 번역문은 순흥안씨세보 총록1권 번역판 (1992년)의 내용이다. 위 자료로 보아, 순흥 문중에서도 처대공이 충주에서 등사해온 등본과 유사한 내용의 족보를 보고 기록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진공(唐津公) 우제(羽濟, 순흥 21世, 1720-1784) : 처음 이름(初諱)은 덕제(德濟)이고, 자(字)는 공보(公輔), 호(號)는 만암(晩菴)이다. 숙종(肅宗) 경자(庚子, 1720)년 생. 갑오(甲午) 연벽진사(聯璧進士), 을미(乙未) 참봉(叅奉), 당진현감(唐津縣監)에서 그치고, 갑진(甲辰, 1784)에 졸(卒)하니 수(壽)는 65세이다. 배(配)는 숙부인(淑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로 부친은 설서(說書) 도형(道亨)이고, 조부(祖)는 통덕랑(通德郞) 필승(必升), 증조(曾祖)는 현감(縣監) 호열(虎烈)이며, 외조부(外祖)는 문화(文化) 유양(柳穰)이다. ○묘(墓)는 배천군(白川郡) 동백양골(東白楊谷) 국사봉(國師峯) 아래 계좌(癸坐)이며, 쌍분(雙墳)이다. 재종질(再從姪) 첨추(僉樞) 업(業)이 지은 묘지(墓誌)가 있다.
唐津公(羽濟:21世, 1720-1784) : 初諱德濟字公輔號晩菴肅宗庚子(1720)生甲午聯璧進士乙未叅奉止唐津縣監甲辰卒壽六十五配淑夫人昌寧成氏父說書道亨祖通德郞必升曾祖縣監虎烈外祖文化柳穰○墓白川郡東白楊谷國師峯下癸坐雙墳再從姪僉樞業撰墓誌.
연벽(聯璧/連璧) : 형제가 동시에 과거에 급제함. 우제(羽濟), 습제(習濟) 형제가 1774년 동시에 진사시에 합격함. 순흥안씨 당진공 안우제(安羽濟) 사마방목
당진공 우제(羽濟)씨는 순흥 을유보(1765) 간행에 주요 역할을 함. 순흥안씨 을유보(1765) 서문 - 안석경(安錫儆, 1718-1774)
임진왜란(1592) 이전의 안씨 족보로 순흥 병오보(1546)는 순흥안씨만 수록하고 있다. 현재 전하지는 않지만, 순흥안씨와 다른 안씨가 포함된 족보도 있는데, 사간공(思簡公) 안성(安省, 1344-1421)
사간공 보서(思簡公 譜序)
순흥안씨 사촌(沙村) 안덕린(安德麟, 1563-1609)
沙村先生文集卷之一 雜著
通京中文 b_013_083a
.....仍得安氏族譜。考其分派。則胄于順興者三派。我密直其一也。
안씨족보를 얻어서 그 분파를 살펴보니 순흥의 혈통인 자는 3개파가 있고, 우리 밀직공파도 그 중 하나였다.
胄 (자손 주,투구 주) : ㉠자손(子孫) ㉡맏아들 ㉢핏줄 ㉣혈통(血統), 계통(繼統) ㉤투구 ㉥(뒤를)잇다 ㉦쫓다, 뒤쫓다
라 하였다. 안덕린이 풍기에 살면서 얻어 보았다는 족보에는 순흥안씨 3개파 외에도 다른 안씨 분파도 같이 들어있었던 것이 확실하므로. 순흥 병오보(1546)가 아닌 다른 족보임에 틀림없다. 이것은 공인된 순흥안씨 족보 병오보(1548)나 기해보(1659)와는 다른, 순흥안씨와 다른 안씨까지 포함된 옛족보가 임진왜란(1592) 이전에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이 족보는 광주안씨 안처대가 충주에서 보았다는 광주-순흥 분관 계보를 담은 족보와 같은 것일 가능성이 상당히 있는 것 같다. 사간공이 만든 족보와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참고 : 순흥 3파와 다른 안씨까지 포함된 임진왜란(1592) 이전의 안씨 족보들
참고 : 순흥 을유보(1765년)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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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序文) : 주부공파 안홍원(安弘遠, 外府主政)
始祖 諱 邦傑
仕高麗太祖爲大將軍封廣州君 謹按 諸譜麗祖時廣州人弑主公倡義討平之以功拜大將軍封廣州君因爲貫鄕 或云 以州吏出顯而 嶺譜云 公嘗奏捷平壤授元帥封廣陵君 墓左廣州連三世四君襲世祿 按諸譜 墓在廣州渴馬峙 或云開城府 東十五里兩眼村今屬長端 有廣州安氏始祖墓有齋宮名安齋宮云 今未詳也
[原文] 接 戊 庚 丁 三舊譜則 始祖以下缺世 無文可徵也云 今壬戌修譜時 堧(土를 뺀 글자)按長水戊午以上舊譜二卷 系代數則 以大將軍公爲一世 故今依上舊譜系代數斷然無疑也 亦以大將軍公爲一世
서문을 쓴 안홍원(安弘遠. 1827-?.주부공파. 안종화의 숙부)
임술보를 편찬한 안종화(安鐘和. 1860-1924. 주부공파. 1894.진사인일제문과.비서승 겸 장례)
安鐘和. 이분은 조선조말 고종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관직을 한 분이며, 歷史에 해박하여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일본강점후에는 역사교과서를 많이 저술하였고. 임술보를 주관하여 우리 族史를 考證하는데 최선을 다 하였음.
시조 기록 다음에
"今而壬戌一九八二年大同譜編纂에 있어서 己未譜에 始祖大將軍諱邦傑以下缺十二世함을 諸先祖께서 諱啣만 續記하고 侍御史公諱綏를 一世로하였으나 考證함을 後日로 미루어 왔으니 明確한 文證은 없으나 諸般史的 考證은 될 수 있으며, 先代로부터 諱啣을 系列明示하여두었으므로 이에 吾安宗員 大多數의 所望에따라 今般 壬戌大同譜 出刊時부터 大將軍을 一世로 하노니 後日 確實한 文證에 힘써주기 바란다. 今玆蓬山에 設壇奉位하여 後世에 남기니 이를 契機로 尊祖敬宗收族의 實을 거두기 바란다."
라고 하고, 이후 맨 위와 같은 2 - 13세 계보를 정식계보로 편입하고, 이전 족보에서 1세로 했던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諱綏)공을 14세로 함.
[안처대 공과 함께 충주의 순흥보 원본을 확인하러 갔던 분임.]
학생 안공 묘갈기(學生安公墓碣記) 갑오년 (1774년)
순암선생문집 제21권 묘갈(墓碣) - 민추 고전국역총서 순암집
공의 휘는 신형(信亨), 자는 충백(忠伯), 관향은 광주(廣州)이다. 시조의 휘는 방걸(邦傑)인데 고려 태조를 섬겨 광주군으로 봉해졌다. 중세에 휘 유(綏)가 관직이 전중시어사였는데 처음으로 함안군에 이사하여 살게 되니 이로부터 영남 사람이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휘 구(覯)는 우리 공희왕(恭僖王 중종(中宗))을 섬겨 염근(廉謹)으로 선발되었다. 3대를 지나 생원 휘 여경(餘慶)에 이르러서는 호를 옥천(玉川)으로 삼고 학행이 뛰어났으니, 공에게는 5대조가 된다. 고조의 휘는 숙(璹)이니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이고, 증조의 휘는 상한(翔漢)이니 선교랑이고, 조부의 휘는 시태(時泰)이고, 부친의 휘는 흠(欽)이다. 모친은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성관(聖觀)의 따님이다. 공은 명릉(明陵) 임신년(1692, 숙종 18) 7월 22일에 태어나 지금 주상 35년 기묘년(1759, 영조 35) 정월 12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68세였다. 밀양의 성만총(星巒村) 선영 왼쪽 자좌(子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부인은 탐진유씨(耽津兪氏)로 필명(必明)의 따님인데, 공보다 1년 뒤에 태어나셨고 돌아가시기는 공보다 8년 뒤이니 향년이 75세였다. 성만촌 앞산 슬이동(瑟伊洞) 간좌(艮坐) 언덕에 안장하였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경점(景漸)은 지금 예조 좌랑이고, 다음은 경진(景晉), 경우(景愚), 경제(景濟), 경리(景履)이다. 좌랑은 1남 5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후중(重)이고, 사위는 전홍의(全弘毅), 곽숭경(郭崇敬), 황상원(黃尙鍰), 박형국(朴馨國)이고 막내딸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경진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형중(瑩重)과 정중(珵重)이고, 사위는 이수직(李守直)이고 아래로 두 딸은 어리다. 경우는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영중(瑛重)이고, 사위는 이형악(李衡岳)이고 아래로 두 딸은 어리다. 경제는 2남을 낳았는데 환중(瑍重)과 찬중(璨重)이다. 경리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남녀 손자들이 모두 20여 명이다.
공은 소시부터 병치레를 잘 하여 15세에 비로서 입학하여 열심히 책을 읽어서 경사자집(經史子集)은 몇천 번씩 읽고 여러 책들을 베껴 적은 것이 거의 백 권에 이르러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굳은살이 박혔다. 일찍이 탄식하기를, “만학으로서 성취가 없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능히 스스로 일어나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꾀하고 경리함에 성법(成法)이 있었다. 여러 자제들을 가르치기에 각기 그 재능을 따라 지도하니 좌랑 군이 문학으로 이름을 이루었고 나머지는 각기 근검으로 능히 가업을 이었다.
유부인은 능히 공의 뜻을 따라 안살림을 잘 하여 나이가 칠순이 넘도록 오히려 몸소 길쌈을 하였다. 좌랑 군이 일찍이 원근으로 다니면서 배웠는데, 부인은 살림을 절약하여 경비를 마련하여 그 비용을 대주었다. 그러나 막상 좌랑 군이 벼슬에 나가 조정에 오르기에 이르러서는 공도 부인도 미처보지 못하였다.
갑오년(1774, 영조 50) 봄에 내가 경성의 동촌에 우거했는데, 좌랑 군이 벼슬살이에 종사하느라 함께 살게 되었다. 하루는 공의 행장을 내보이면서 나에게 “녹을 받았으나 부모가 계시지 않아 봉양하지 못하니 끝없는 은혜를 갚을 길 없는데, 또 능히 묘도에 비석을 세워 후예에게 보이지 못한다면 불효가 더욱 큰 것이다. 그대가 어찌 나를 위하여 글을 지어주지 않겠는가.” 하였다. 공은 나의 선친과 교분이 좋아 서로 매우 기뻐하였고, 내가 어려서부터 공에게 종유(從遊)하였으니, 공의 사실을 나만큼 아는 이도 없다. 우리 두 사람은 지금 이미 머리가 세었고 모두 부모가 살아 계시지 않는 슬픔을 알고 있는 처지이다. 옛날을 돌이켜 생각함에 차마 사양할 수 있겠는가. 삼가 차례로 서술하여 기록한다.
a0100594_4965384a7a929.jpg : 순흥안씨 을유보(1765) 범례
a0100594_4965384a891f2.gif : 순흥안씨 판관공 파보
권지1. 世系 기록에
安氏 本新羅大將軍邦傑之後也 將軍後八世有 內史令弼夢生二子伯侍中弘美 季上護軍子美 護軍受封于順興 子孫遂爲順興之族.
이라 하고
子美(자미) - 永和(영화) - 得財(득재) - 希諝(희서) - 碩(석) - 軸(축) - 宗源(종원) - 景恭(경공) .....이라 계대기록
초간은 77년 전 정유(1897)라 함.
초간본에는 安氏 本高麗大將軍邦傑之後也라 되어 있다고 한다.
방걸(邦傑)공은 본래 광주안씨 시조로, 고려 태조 때의 대장군으로 전해오나, 조선말에 나타난 안씨가 신라말 중국서 온 농서이씨에 기원한다는 조작된 설이 퍼지면서, 이의 영향으로 초간본의 고려대장군이 중간본에서는 신라대장군으로 변경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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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충주의 이안면(利安面)과 유등면(柳等面)을 합하여 이류면(利柳面)이 되었다. 이류면(利柳面)은 2012년 대소원면 (大召院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충주 이류면, 대소원면 (大召院面)으로 개명 추진 2011-06-22
순흥안씨족보 順興安氏族譜, 19권중 1, 1931 간기 - 소화(昭和) 6년 (1931)
충청북도(忠淸北道) 충주군(忠州郡) 이류면(利柳面) 하문리(河文里)
저작겸 발행자(著作兼 發行者) 안혁중(安赫中)
충주 위류면(圍柳面)으로 추정되는 주류면(周柳面)이 위치했던 주덕읍(周德邑)과 인근 지도 대소원면도 인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