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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朴正熙)와 군부
노 영 기(조선대 강사)
1. 박정희에 얽힌 몇 가지 풍경
얼마 전의 일이다. 박정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서울 목동의 공원에 세워져 있던
군인 박정희의 흉상을 철거하였다. 박정희의 흉상을 철거했던 사람들은 박정희가
반민족주의자이며 독재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박정
희기념관 건립의 국고지원을 반대하였다. 700억의 박정희기념관 건립 자금 중에서
200억원을 국고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던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범죄자로 취급하
였다.
현재 인터넷상에서는 안티 박정희와 박정희 기념관이 활동하고 있다. 언론도 그
의 평가를 둘러싸고 찬반 양론으로 나뉘어져 있다. 1997년 대선에서는 거의 모든
대선 후보들이 박정희를 칭송하며, 그를 본받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말을 하였다.
심지어 박정희의 정적으로 죽음 일보 직전까지 갔던 현 대통령마저도 그의 업적을
계승하겠다는 입장을 표하였다.
이렇듯 박정희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고, 그에 대한 평가는 기차
의 선로처럼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기념하는 사람들은 박정희를 '경제개발을 이루
어낸 위대한 지도자'로 찬양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반민
족과 반민주의 독재자'로 폄하한다.
극과 극을 달리고 있는 박정희라는 개인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이 문제는 박
정희 한 개인의 평가만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한국 군부의 변화와 함께 살펴보아
야 할 것이다. 박정희가 군대를 동원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또 이를 기반으로 자
신의 통치권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한국 군부의 변화와 함
께 박정희를 살펴보겠다.
2. 대일본 제국의 군인,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
우선 한국군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그 뿌리는 일제시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일
제 식민지 시기에 군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일제에 저
항하는 군대에 몸담는 길이었다. 이 길에는 한말 의병부터 독립군, 빨치산, 광복군,
그 외 중국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갈래가 있었다. 신돌석(의병), 홍범도(독립군),
김좌진(독립군), 김일성(빨치산), 무정(빨치산), 이청천(광복군), 이범석(광복군), 김
홍일(중국군), 장준하(광복군)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일제에 저항했던 세력
들은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탄압 때문에 더 이상 국내의 활동이 어
렵게 되자 만주나 중국 관내, 또는 시베리아 등지로 망명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이들 중에는 중국군이나 소련군에 편입되어 항일 전선에서 활동했던 인물들도 있
었다. 이청천(본명 지대형)과 같은 인물은 일본육사를 졸업한 뒤 곧바로 망명하여
항일전선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다른 하나는, 그 반대편인 일본군에 몸담는 길이었다. 일본군에 참여한 한인들은
일제가 만든 사관학교(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봉천군관학교는 2년제, 신경군관학
교는 4년제)나 일본군에 입대(학병과 지원병)하는 방식으로 군인의 길에 접어들었
다. 이들은 일제의 대륙침략이나 태평양 등지의 전투에 일본군이나 만주군의 일원
으로 참여하였다. 예를 들어 김석원(일본 육사 출신, 일군 보병 대좌 출신, 949년
제1사단장 역임)은 중국 대륙에서 일제에 저항하는 중국 군대를 몰살시킨 공로로
일제의 칭송과 표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일제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만든 간도특설대에는 다수의 한인 출신 만주군인들이 참여하였다.
이렇듯 일본군(만주군 포함)에서 군대 경력을 쌓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응준(일본
육사출신, 초기 육군 창설기에 실권자), 원용덕(만주군 군의 출신, 중좌, 제1공화국
기에 헌병사령관), 김창룡(관동군 헌병 오장, 특무대장, 1956년 암살), 이형근(일본
육사, 대한민국 군번 1번), 정일권(만주신경군관학교1기, 한국전쟁기 육군 참모총장,
국무총리), 백선엽(만주 봉천군관학교 9기, 간도특설대 근무, 전 교통부장관), 장도
영(5.16당시 육군 참모총장, 학병출신), 송요찬(지원병 출신, 4.19 당시 육군 참모총
장) 등이 있었다.
박정희 또한 일본군에서 군대경력을 쌓은 인물이었다. 그는 구미보통학교와 대구
사범을 졸업한 뒤 문경에서 한동안 교사생활을 하다가 군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만주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였던 1937
년은 일제의 대륙침략이 한창인 때였으며, 이른바 '만주특수'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
로 만주는 새로운 땅이었다. 만주군관학교에서 그는 모범적인 생활을 하였고, 졸업
성적은 수석이었다. 그리하여 1942년 3월 어느 날 만주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답사를 했다. 그는 답사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는 선서도 했다.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이한림(5.16 당시 1군단장, 5.16쿠데타에 반대하
여 감금), 김재풍, 이섭준 등과 더불어 일본 육사 3학년에 편입하였다. 박정희의 일
본 육사 생활 역시 만주군관학교의 생활과 마찬가지로 모범적이었고, 이러한 그를
보고 육사 교장이었던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는 "다가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
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는 창씨개명한 박
정희의 일본 이름이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졸업하였다. 졸업 성적
은 유학생 중에서 3등이며,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상을 받았다. 일
본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는 중국의 열하성 흥륭현 삼도하에 주둔하고 있던 만주군
제5관구 보병 제8단에서 근무하였다. 이 부대는 일제가 만주의 항일빨치산을 토벌
하기 위해 만들었던 특수부대로, 이곳에서 그는 일제에 맞서 싸웠던 항일빨치산을
토벌하는 임무에 종사하였다.
만주군에서 박정희는 일본 군부의 정치참여 방식을 배웠고, 이를 후일 자신의 정
치행동에 그대로 옮겼다. 당시 만주군의 장교로 파견된 일본 군인들은 국군주의적
경향을 띠며 2.26쿠데타를 일으켰던 경험이 있었다. 1936년 2월 26일 일본의 청년
장교들은 천황제를 지지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동경의 요충지를 점거하
고, 사이토 내대신, 와타나베 육군 교육총감, 다카하시 대장대신 등을 죽이는 등 요
인들을 암살하였다. 이들의 행동은 천황의 노여움을 샀고, 천황이 이들을 '반도'로
규정하자 자살하거나 투항하였다. 그러나 2.26사건에 연루되어 쫓겨난 장교들이 만
주군관학교 교관이나 구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의 국가개조 사상은 박정희에
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후일 그가 5.16쿠데타를 일으키는 밑천이 되었다.
만주군의 경험 외에도 만주군의 인맥은 훗날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지고 유지하
는 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 5.16쿠데타 당시 해병대를 동원했던 신현준은 만주
군관학교의 선배이고, 제3공화국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냈던 정일권 또한 만주군관학
교를 졸업한 만주인맥이었다. 이들 외에도 이주일(최고회의 부의장, 2군참모장), 김
동하(해병대 소장), 윤태일(육군중장, 서울시장), 박임항(5군단장), 방원철(육군 대
령), 김윤근(만주군관학교 6기, 김포 주둔 해병여단장), 강문봉(육군 중장, 미군측과
교섭) 등이 만주군 출신이었다. 이들은 5.16쿠데타에 직접 참여하거나 제3공화국에
참여하여 박정희정권의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었다.
3. 해방공간의 박정희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이 땅에는 많은 움직임들이 있었다. 식민지 지배
질서의 붕괴에 따른 새 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이었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
국준비위원회가 수립되었고, 각지방에서도 활발하게 건준(뒤에 인민위원회로 개편)
이 만들어졌다. 그 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교훈을 되새겨 군대를 만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과거 일제시기 군대 경력자들을 중심으로 사설군사단체가 만들어
졌다. 이 중에는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덮으려는 시도로 만들어진 단체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활동은 새 국가에 걸맞는 새로운 군대를 건설하려는 건군운동이
었다.
자주적 건국, 건군운동은 미군정의 진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치안유지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38도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곧바로 우리 민족의 자주적 건국운동을 부정하였고, 일제의 식민통치 구조를 그대
로 인정하였다. 건국운동과 마찬가지로 건군운동도 부정되었다. 미군정은 사설군사
단체의 해산을 명령하였고, 이 명령을 거부하고 계속 활동을 전개했던 학병동맹과
국군준비대는 친일경찰로 비판받던 군정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였다. 미군정은
사설군사단체를 해산시키면서 '경찰예비대'의 성격인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다. 국
방경비대는 과거 일제시기 군대 경력자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이 국방경비대가
오늘날 육군의 전신이 되었다. 국방경비대가 창설될 때 과거 독립군에서 군대 경력
을 쌓았던 인물들은 참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일군인의 전형으로 비판받았던 이
응준과 원용덕의 추천으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총 110
명의 군사영어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의 출신 중에서 이성가와 유해준을 제외한
108명이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육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는
과거 일본군 출신의 영향으로 일제의 유산이 청산되지 않은 채 유지되었다.
1946년 6월 만주에서 귀국하여 고향인 구미에 있던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로 다시 군문에 들어섰다. 그는 제8연대, 육군사관학교, 육군본부 등에서 미군정
기와 대한민국 초기의 군대 경력을 쌓았다. 박정희는 1947년 9월 27일 조선경비사
관학교 중대장이 되었고, 10월 23일에 입교한 육사 5기생들을 가르쳤다. 육사 5기
는 이전의 육사 생도들과는 달리 순수 민간인 출신을 대상으로 모집하였고, 이들
중에서 2/3가 이북 출신들이었다. 육사 중대장으로서 박정희는 사관생도들에게 많
은 영향을 끼쳤고, 이들은 5.16쿠데타 당시에 또다른 주역이 되었다. 5.16쿠데타의
지휘소였던 6관구 사령부 참모장 김재춘, 서울에 진입한 5사단의 채명신 사단장,
한강을 건넌 공수단장 박치옥, 육군본부를 장악했던 6군단 포병사령관 문재준 등이
5기생 출신이었다.
미국의 대한정책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으로 결정되자 국방경비대는 '경찰예
비대'에서 군대로 그 성격이 변하였고, 단선단정수립에 반대했던 세력들이 군대에
서 축출당하는 숙군이 시작되었다. 단선단정이 본격 진행되자 이에 반대하는 저항
이 발생하였다. 제주도에서는 4.3항쟁이 발생하였고, 단선단정에 반대했던 국방경비
대원들의 저항이 뒤따랐다. 제주도에서 발생했던 제9연대원 탈영사건과 박진경대령
암살사건이 대표적인 저항이었다. 미군정은 국방경비대에서 단선단정에 반대했던
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해 숙군을 강화하였고, 국방경비대 내부의 숙군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계기로 한층 강화되었다.
분단으로 치달리던 상황에서 숙군과 제주도 파병에 반대한 여수 주둔 제14연대
의 반란이 일어났다. 여순사건은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의 존립을 시험하는 무
대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숙군이 전개되었다. 과거 남로
당 또는 좌익 정파에 가입했거나 동조했던 세력들은 장교와 사병의 구분없이 체포
되었다. 체포된 인물들 중에는 김종석(일본 육사 출신), 최남근(만주군 출신), 오일
균(일본육사), 조병건(일본육사) 등이 있었다.
박정희는 그의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의 영향으로 남로당에 가입하였다.
그가 군 내부에서 남로당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는 여순사
건이 일어난 뒤 1948년 11월 12일경 군 수사당국(육군본부 정보국)에 체포되었다.
수사과정에서 박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던 과거 동료들의 명단을 수사당국에 제공
한 뒤 만주군(정일권, 백선엽)과 일본군 출신(이응준)의 노력으로 숙군의 칼바람을
비껴날 수 있었다. 국방경비대법 제18조(반란기도죄)와 제32조(군병력제공죄) 위반
으로 재판에 회부된 박정희는 1949년 2월 8일 육군본부에서 열린 재판에서 무기징
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심사장관의 조치에서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되었고, 최종
확인장관의 조치에서는 징역형 면제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불명예 제대로 민간인
신분이 된 박정희는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의 도움으로 다시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 과장이라는 문관 직책에 임명되었다. 이곳에서 박정희는 5.16의 또 다
른 주역들이었던 육사 8기생들을 만난다. 육사 8기생들 중 31명이 육군본부 정보국
으로 임명되었다. 이들 중 15명이 전투정보과에 배치되어 이들과 박정희의 기나긴
인연이 시작되었다. 김종필을 비롯하여 이영근, 이병희, 전재덕, 석정선 등이 있었
고, 이들은 그뒤 5.16의 기획과 중앙정보부 창설 등에 깊이 참여하였다.
숙군과 여순사건을 거친 뒤 군은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민족사의 과제를 무시해
버렸다. 채병덕을 비롯한 군의 간부들은 공산당과의 대결을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
를 내세우며 과거 친일경찰 출신들을 대거 군문(헌병대를 비롯한 육군 정보국)에
들여놓았다. 군대의 간부들을 친일 부역 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협조하라는 국회의
요구를 '군의 정치적 중립'을 내세우며 묵살하였다. 그러나 '군의 정치적 중립' 약속
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치안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군은 적극 민간의 영
역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육본 정보국과 헌병대를 중심으로 대민사찰이 강화되었
고, 민간 사회를 준전시의 상태로 몰아가는 체제-학도호국단, 우익 청년단체의 입
대, 호국군의 창설 등-가 성립되었다. 헌병대의 국회프락치 사건 조작, 안두희(포
병)의 김구 암살 등은 당시 군이 저지른 대표적인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당시 군대가 최초로 민간인 학살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육군은 경찰을 대신하여 '치안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제주도와 여순의 토벌작
전과 부역자 색출작업, 그리고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군은 해당지역에 계
엄령을 선포하면서 모든 권한을 행사하며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고, 이러한 작전개
념은 이후 발생하는 거창 등 한국전쟁기의 양민학살과 1980년 광주학살 등의 전례
가 되었다. 바야흐로 군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집단이라는 본래의 성격
을 벗어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통제하는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4. 부산정치파동과 군사쿠데타 계획
한국전쟁기에는 군의 정치참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1년 11월부터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 시나리오가 진행되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초기의 패배 책임,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등의 문
제로 국회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
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52년 1월 18일 국회는 이 개헌안을
찬성 19, 반대 143, 기권 1로 부결시켰다. 국회의 반대로 재집권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 이승만은 5월 25일 부산, 경남, 전남북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
사령관에 이종찬 육군 참모총장,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 원용덕 헌병 사령관을 임
명하였다. 그 이유는 부산의 금정산에 공비가 출몰한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계엄군
은 국회의사당으로 출근하던 국회의원 통근버스를 헌병대로 납치하였고, 내각제 개
헌을 추진하였던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 사건에 연루시켰다. 이승만은 대구의 육
군본부에 있던 육군 참모총장 이종찬에게 계엄군의 부산 파견을 명령하였다. 그러
나 이종찬이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군의 정치참여가 시도되었다.
육군본부 참모들은 군대를 파견하라는 이승만의 지시를 거부하고, 군대를 동원하
여 이승만과 원용덕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이종찬의 묵인 아
래 육군본부 참모들이 기획하였다. 여기에는 작전전투과장인 박정희와 직속 상관이
었던 작전교육국장 이용문, 그리고 제15연대장 유원식 등이 참여하였다.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인 선우종원을 찾아가 "장면박사를 추대하여 무력혁명을 하자"고 제의
하였으나, 선우종원은 이를 거절하였다. 선우종원과의 교섭이 실패하자 이들은 육
군본부의 지휘 아래 부산이나 전남 주둔의 2개 대대를 부산으로 파견하여 이승만
을 실각시키고 원용덕을 견제하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생각하는 참모들의 반대로 육본 참모회의에서 부결되었고, 최종적으
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이종찬 명의로 전군에 '육군장병에게
고함'(훈령 제217호)으로 하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훈령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1952년 5월 29일부터 31일 사이 장면
과 이종찬 등이 극비리에 미대사관에 각각 쿠데타계획을 타진하였다. 즉, 장면은
라이트너에게 "밴플리트가 묵인한다면 이종찬이 거사할 수 있다"고 제의하였다. 이
종찬은 미국이 지지해주면 제2병참사령부 예하 병력을 부산지역의 치안을 위해 사
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미국은 부산정치파동기에 이승만 배제의 문제를 놓고 심도
깊게 논의하였으며, 여기에는 미국의 쿠데타지원을 포함한 적극개입론과 신중론이
대립되었다. 6월 4일 미국은 최종적으로 현상유지-이승만 체제의 유지-가 최선이라
는 정책방침을 결정하였고, 미국의 입장을 살피던 이종찬을 비롯한 반이승만 계열
의 정치참여론은 없었던 일이 되었다.
국회에서는 7월 4일 장택상 총리가 제안한 발췌개헌안이 기립투표로 통과됨으로
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승만과 군부의 대립으로 7월 22일 이종
찬은 육군 참모총장 직위에서 해임되어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8월 17일 대구
의 동촌 비행장에서 미참모대학으로 유학을 떠나는 이종찬에게 박정희는 한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쿠데타를 결행하지 못하고 해임되어
떠나니 유감스럽고, 1년 후 귀국하면 다시 이종찬의 지도편달을 받겠다는 요지의
편지였다. 이렇듯 박정희는 부산정치파동 당시부터 군의 정치참여(쿠데타)를 계획
하였으며, 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였다.
한국전쟁을 거친 뒤 한국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10만여명에서 70만으로 양
적인 팽창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성장하였다. 군의 발전과 더불어
제1공화국시기의 군대는 파벌과 부정 부패가 만연한 집단으로 변하였다. 각종 고급
장교들은 후생사업을 빙자하여 고철수집, 벌목, 차량대여 등을 통해 치부하고, 사병
들의 주·부식비까지 횡령, 착복함으로써 훈련소 등에서는 훈련병의 사망률이 높아
지는 상황이었다. 군대의 자금은 자유당의 정치자금으로 전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부산정치파동을 겪은 뒤 이승만은 군부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지배하기 위
해 노력하였다. 이승만은 김창룡의 특무대와 원용덕의 헌병대를 발판으로 삼아 군
부를 통제하였다. 이승만은 육군참모총장과 더불어 이들을 직접 면담할 수 있는 권
한을 주어 군 내부의 반이승만 세력을 통제하였다. 이승만은 원용덕의 헌병대와 김
창룡의 특무대를 통해 군부를 견제하였으며 또한 사찰기관 상호간의 경쟁을 유도
하면서 사찰기구가 어느 한사람에게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이
승만은 군 내부에 각 파벌을 양성시켜 서로를 견제토록 하였다. 이 파벌은 출신별,
지역별로 참모총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파벌로는 정일권을 중심으로
한 동북파(함경도파), 백선엽을 중심으로 한 서북파(평안도파), 이형근을 중심으로
한 중남부파(이남파)등이 있었다. 이같은 이승만의 군부통제와 파벌대립의 결과는
1956년 특무대장 김창룡 암살사건으로 나타났다.
군의 부정부패와 파벌 사이의 대립이 깊어가는 상황에서 1959년 2월 육군 참모
총장에 송요찬(일본군 지원병 출신)이 임명되어 일본군 지원병 출신이 득세하였다.
그리하여 중남부파가 다시 만주군 출신 비주류파(박정희, 송석하), 일본 육사출신파
(유재흥, 장창국), 일군 지원병 출신파(송요찬, 최경록), 일군 학도병 출신파(최영희,
김종오) 등으로 나뉘어졌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서 송요찬(일본군 지원병 출신)
육군 참모총장이 부정선거를 명령하자 이를 둘러싼 군대 내부의 갈등과 정치참여
가 본격 진행되었다. 4.19혁명 뒤 박정희를 비롯한 일부 군인들은 부정선거의 책임
을 물어 송요찬의 사퇴를 촉구하는 정군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정군 운동은 일본군
지원병 출신들과 만주군 출신 사이의 보이지 않는 암투였다.
5. 무르익는 쿠데타
1952년 부산정치파동 때 쿠데타를 계획했던 박정희는 1960년 초반 다시 쿠데타
를 도모하였다. 3.15부정선거가 군부에 내려지자 박정희는 군부의 불만 분위기를
이용하여 쿠데타를 기도하고 포항 해병사단장 김동하 소장, 2군 참모장 이주일 소
장, 부산 주둔 제33고사포 대대장 홍종철 중령, 육군정보 참모부 김종필 등과 모의
하여 참모총장 송요찬의 도미 직후인 5월 8일 쿠데타를 계획하였다. 이들이 쿠데타
를 모의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다. 우선, 이들은 한국전쟁기부터
이미 쿠데타를 계획할 만큼 이미 정치화된 군인들이었다. 둘째로, 1950년대 빈발했
던 제3세계의 군부쿠데타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승진정체로 인한 영관급
장교들의 불만은 높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4.19혁명이 발생함으로써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고, 박정희를 비롯한 쿠
데타 세력은 정군운동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1960년 5월 2일 부
산 군수기지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1960년 5월 2일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송요
찬 총장은 퇴진해야 한다는 서한을 송요찬에게 전달하였다. 이와 동시에 육사 8기
출신들을 중심으로 3.15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중장급 이상은 퇴진해야 한다는 정
군운동이 전개되었다. 김종필을 위시로 한 8기생들은 5월 8일 정군 건의의 내용을
담은 연판장을 작성하여 육군 참모총장에게 전달하였다. 이 건의는 군 지휘부에 의
해 거부당하였고, 이를 주도한 김종필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강제 예편당하였다. 정
군운동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들은 다시 1960년 9월 10일 일식집 충무장에서 모여
정군운동이 아닌 쿠데타를 모의하기에 이르렀다(이른바 충무장 결의).
쿠데타 주도 세력들은 정군운동이 좌절된 뒤 다시 쿠데타 계획을 수립하였다.
1961년 4월 15일 해병대 창설기념일에 맞춰 해병대 단독으로 쿠데타를 모의하였으
나 김윤근의 만류로 박정희와 제휴하게 되었다. 그 뒤 1961년 초순부터 3·4월 위
기설이 유포되었다. 이 위기설에 대처하기 위하여 민주당은 각종 시위를 금하는 조
치를 수립하였고, 이 계획의 실행과정에서 군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기로 결정
하였다. 그러나 쿠데타 세력들은 이 진압계획을 이용하여 4월 19일 쿠데타를 일으
키기로 모의하였다. 즉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쿠데타군이 주요 시설을 점거
하고 정부 요인들을 체포하자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4월 19일에 사회가 평온하
여 군의 출동계획이 무산됨으로써 연기되었다.
4월 19일의 쿠데타 계획이 무산되자 박정희는 다시 5월 13일을 쿠데타 일로 정
하였다. 그리하여 쿠데타 세력 내부에서 '행정반'과 '작전반'을 조직하였고, 동원될
병력(제30사단, 제33사단, 제6군단 포병, 제2군사령부, 해병대 등)의 역할분담까지
이루어졌으나,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1년
5월 14일 김종락(김종필의 형)의 집에서 최종 회합하여 5.16쿠데타를 모의하였고,
1961년 5월 16일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으로 시작되는 군사혁명위원회(의장 장
도영)의 발표를 방송함으로써 군부정치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결국 창군 초기부터 내포한 군부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쿠데타를 배태하였고, 박
정희는 그의 군인 시절 형성된 다양한 인맥을 활용하여 5.16쿠데타를 결행하였다.
박정희는 이들을 규합하여 대략 3천 5백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1961년 5월 16일
한강 다리를 건너는 데 성공하였고, 마침내 우리 현대사의 또 다른 청산해야 할 과
제가 된 군부정치를 시작하였다.
쿠데타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구정치권의 부패와 부정, 국민경제의 불안정, 사회
적 혼란과 공산주의자들의 침투, 그리고 장면정권의 무능력함 등으로 나타난 국가
적 위급성이 외재적 일대개혁(군사쿠데타:인용자)을 단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
다고 주장하였다. 즉, 1960년 4·19 이후 사회적 불안을 틈탄 용공사상의 대두, 경
제적 위기, 고질화된 정치풍토, 사회적 혼란과 국민 도의의 퇴폐, 한국군의 발전 등
으로 군사혁명이 필연적이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역사적 필연성을 배경으로 우국
충정에 불타는 청년장교들이 일대 개혁의 쾌도를 든 것이 5·16이었다는 주장하였
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만큼 사회가 혼란스럽고 군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을까? 4.19혁명 직후 실시된 7.29총선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권은 이전
의 이승만 정권에 비해 허약하였다. 그러나 쿠데타세력들이 주장한 만큼 민주당이
부패하지 않았고, 장면정권은 나름의 전망을 세운 상태였다. 장면정권은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국토건설사업을 실시하려고 기획하였으나, 이 계획은 5.16쿠데타
로 실행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제3공화국의 정책으로 이어졌다. 사회적 혼란이라고
지적하는 면은 1960년 하반기에 일어난 우리 사회의 각종 민주주의와 통일의 요구
였다. 이승만 독재 아래 억눌렸던 요구가 분출하였고, 특히 혁신계와 청년 학생들
의 통일운동은 많은 호응을 받게 되었다. 이 운동은 미국에게는 커다란 자극이 되
었고, 결국 미국은 군사쿠데타를 지지하였다. 실제로 5.16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은 다양한 경로의 정보로 박정희의 거사 사실을 알고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방기하였다. 미국은 5.16이 발발할 당시 군사쿠데타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는 당시 유엔군 사령관 겸 제8군 사령관이었던
맥그루더의 성명을 내세웠다. 맥그루더는 5월 16일 발표한 성명에서 '합헌정부(장면
정권)'를 지지하고 쿠데타군의 조속한 복귀를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 성명의 의도
는 다른 곳에 있었다. 맥그루더가 염려한 점은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군사
령관의 권한침해에 따른 항의였다. 5월 25일 김종필과 맥그루더 회담에서 맥그루더
는 자신의 임무를 "북으로부터 공산침략이나 국내의 공산주의 전복에 대하여 한국
을 방어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한국군을 통제할 권한을 가진 자신의 능력을 저하
시키는 것은 그 무엇이든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들이 비판했던 부정부패와
파벌간의 대립은 5.16쿠데타 이후 곧바로 재연되었다. 군정시기 터진 4대의혹사건
(증권파동, 워커힐사건, 새나라자동차사건, 빠징고사건)과 반혁명사건은 쿠데타세력
들의 비판이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었으며, 이들의 쿠데타가
구국의 결단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선택이었음을 반증하였다.
쿠데타 세력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실천하기 위해 "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
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② 유엔헌장
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
를 더욱 견고히 할 것, ③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피폐한 국
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다시 바로 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할 것, ④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재건에 총력을 경
주할 것, ⑤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할 것, ⑥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
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
를 갖추겠다"라는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쿠데타 세력이 약속했던 6가지 공약 중에서 철저하게 이루어진 것은 '반공을 제
일의 국시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이의 실천을 위해 민주인사들을 대량 검거하고
중앙정보부를 만들었으며, 최고회의에서 추방된 전 군부지도자와 언론인을 비롯하
여 정치인, 전직 고위관리, 부정축재자, 남북학생회담 관련 학생지도부 등 총 4374
명에게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 유대를 견고히
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쿠데타의 배경으로 지적했던 부패와
구악의 일소, 자주경제재건과 민정이양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군정의
시기에 신악이 생겨나게 되었고, 자주경제재건은 그뒤로 풀 수 없는 매듭으로 남겨
졌다. 민정이양의 약속은 박정희가 암살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공염불에 불
과하였다. 2년간의 군정을 거친 뒤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에서 군복을 벗
은 박정희가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군사혁명사편찬위원회, 1963 {한국군사혁명사}
박정희, 1963 {국가와 혁명과 나}(2000년 지구촌에서 복각)
김형욱, 1979 {김형욱 회고록}1, 아침
한용원, 1984 {창군}, 박영사
김윤근, 1985 {해병대와 5.16}, 범조사
한용원, 1993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한배호 편, 1996 {한국현대정치론}Ⅱ, 오름
이상우, 1984 {비록 박정희시대}1∼2, 중원문화
김성진 편, 1994 {박정희 시대}, 조선일보사
조갑제, 1998 {내무덤에 침을 뱉어라} ①∼④, 조선일보사
한국정치연구회, 1998 {박정희를 넘어서}, 푸른숲
진중권, 1998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 개마고원
김교식, 1990 {다큐멘터리 박정희}1∼3, 평민사
이용원, 2000 {제2공화국과 장면}, 범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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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되도록이면 근대사 인물방에 지금은 해방전 인물을
올릴려구 합니다
해방전 인물 발굴하고 다음 부터는 해방후 인물들을 이렇게 정리
되도록 하는게 좋을듯 싶어요
자료 감사합니다
차라리 지난 대통령방을 하나 만들면 어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