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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뫼 성지
1.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솔뫼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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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108
도로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솔뫼로 132
전화번호 (041)362-5021 홈페이지 http://solmoe.or.kr
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金大建, 1821-1846년)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金澤鉉)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청남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에 속한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 안드레아(金宗漢, ?-1816년 순교, 족보에는 漢鉉으로 나옴),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金濟俊, 1796-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바로 이곳에서 사제품 받고 1년 만인 1846년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가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오르고 30년 뒤인 2014년 8월 16일, 나머지 3대 순교선조들도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라 4대 모두 복자와 성인품을 받았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는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신해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 전주 ·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었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의 고통을 참아내던 중 1814년 12월 1일(음력 10월 20일) 75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再福)이라는 아명으로 솔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칸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한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가 수차례 체포되기를 반복하고, 1805년부터 10년간의 긴 옥중 생활을 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셋째 아들 종한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붙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하였다. 둘째 아들 택현은 1827년 아들 김제준과 손자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내부.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성 모방(Maubant)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마카오로 유학을 갔던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페레올(Ferreol)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그 해 10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하였다. 유학 중에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만 대했을 뿐, 김대건 신부 또한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하였다. 1814년 증조부인 김진후로부터 시작하여 김대건 신부까지 32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1906년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Kremff)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인근의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문필(Perrin)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m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다. 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기념탑을 세웠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다.
대전교구는 또한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에 지자체와 함께 2004년 9월 22일 생가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복원된 성 김대건 신부 생가는 전통 한옥 구조로 당시 내포 지역 사대부가 살던 집 규모와 구조를 따라 건립되었다. 이어 2006년 3월 30일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과 성당 축복식을 갖고 성인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장을 마련하였다.
새로 정비된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뫼산(山)자 모양의 정문과 그 옆의 예수성심상이 자애로운 미소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정면에 조성된 솔뫼 아레나와 생가 사이에는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m 크기의 솔뫼 성모상이 정겨운 시선으로 순례자를 맞이한다. 성모상을 지나면 소나무 숲속에 건립된 성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 그리고 가장자리 벽면으로 유리타일로 제작된 십자가의 길 15처와 조각 작품들로 조성된 십자가의 길 14처가 순례자들의 마음을 이끌고 있다.
이는 2009년 주차장 및 야외 화장실 건립 공사를 시작으로 5년여에 걸쳐 솔뫼 성지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시행한 결과이다. 솔뫼 성지는 한국인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성지의 위상에 걸맞게 야외무대와 광장을 조성하고 성지를 집회와 순례, 기념 공간으로 나누어 순례자들이 성지순례의 참 의미를 묵상하도록 단장하였다.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인 솔뫼 아레나(Arena)와 광장을 건립해 2011년 5월 14일 축복식을 가졌다. 아레나는 고대 로마 원형경기장 내지 극장 중심 부분을 지칭하는 말로, 로마 시대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2014년 8월 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솔뫼 성지를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고, 그해 9월 25일 문화재청에 의해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다. 2015년 4월 24일에는 교황 방문 후속 사업의 일환으로 충남 당진시의 협조로 프란치스코 교황 동상 2점과 족흔 조형물, 교황과 성 김대건 신부가 남녀 어린이와 손을 잡고 웃고 있는 토피어리가 설치되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2월 18일)]
솔뫼와 다락골 - 첫 한국인 사제들의 생가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는 첫 한국인 사제로, 서로 동갑내기인데다가 인척이었으며, 함께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이국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다만 김대건 신부가 훗날 피의 순교자며 성인이 된 반면에 최양업 신부는 한국 사제들의 모범이 될 땀의 순교자가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이 언제부터 ‘솔뫼’(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생활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그의 집안에서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증조부인 김종현(金淙鉉)이고, 그 때 솔뫼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증조부 진후(비오)를 비롯하여 조부 택현과 종조부 종한(안드레아), 희현(루수)이 입교하였으며, 이러한 신앙 전통이 부친 제준(濟俊, 이냐시오) 성인과 대건 신부에게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1년 대건이 태어났을 때는 이미 증조부인 진후가 1814년에 해미에서 옥사하였고, 종조부인 종한은 경상도로 이주하여 생활하다가 1815년의 을해박해 때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에서 순교한 뒤였다.
김제준 성인이 가족을 이끌고 고향 솔뫼를 떠난 것은 김대건의 소년 시절인 182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이후 그의 가족들은 서울 청파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경기도 용인의 한덕동(寒德洞, 이동면 묵리)을 거쳐 이웃 골배마실(내사면 남곡리)로 이주하였다. 바로 이곳에서 김대건은 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내부.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선대는 본래 서울에서 세거하던 집안이었으나,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1791년의 신해박해 때 과부가 된 증조모가 아들 인주(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와 함께 충청도 청양 다락골로 낙향하게 되었다. 인주는 이곳에서 장성한 뒤 이웃 ‘새터’(청양군 화성면 농암리)로 옮겨 새 삶의 터전을 가꾸었으며, 차츰 이곳으로 신자들이 이주해 오면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최양업은 1921년에 이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과 모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의 신앙을 먹으며 성장하였다.
최경환은 이후 가족들과 함께 다락골 새터를 떠나 서울의 낙동(현 회현동)으로 이주해 살다가 다시 이곳을 떠나 지방을 전전하였고, 양업의 나이 만 11살이 되던 1832년 무렵에는 과천의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에 정착하였다. 이 뒤뜸이 마을은 얼마 안 되어 신자들의 비밀 공동체인 교우촌으로 바뀌게 되었다. 양업은 1836년 초 바로 이곳에서 신학생으로 추천되었으며, 경환은 훗날 수리산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솔뫼는 김대건 신부의 가족이 이주한 뒤 교우촌으로서 의미를 잃었다. 반면에 다락골과 새터 교우촌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병인박해 이후 여러 순교자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솔뫼 생가 터는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이하여 후손들에게 매입되었고, 같은 해 6월 4일에는 순교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그 후 대전교구의 ‘솔뫼 성역화 추진 위원회’에서는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성지 개발을 시작하여 이듬해 동상과 기념탑을, 1983년에 피정의 집을 건립하였다. 반면에 병인박해 때의 무명 순교자들이 안치되어 있던 다락골 줄무덤은 1982년에야 비로소 청양 본당 교우들이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솔뫼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1846년 순교)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고,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습니다.
1906년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인근의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습니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미터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습니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습니다.
또한 1998년 7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에 지자체와 함께 2004년 9월 생가를 복원하였고, 2006년 3월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축복식을 갖고 성인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장을 마련하였습니다. 2009년부터 주차장 공사를 시작으로 솔뫼 성지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가 성지의 위상에 걸맞게 야외무대와 광장을 조성하고 성지를 집회와 순례, 기념 공간으로 나누어 순례자들이 성지 순례의 참 의미를 묵상하도록 단장했습니다.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인 솔뫼 아레나를 건립해 2011년 5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4년 8월 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을 가졌고, 2014년 9월 25일에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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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천주교 대전교구 - 60주년 행사자료
http://www.djcatholic.or.kr/home/pds/60th_notice.php?enter=v&idx=12886&page=1&s=&k=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2-1. 2차 도보성지순례 공세리,신평,솔뫼 중에서
솔뫼 성지
1845년은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역사적인 해이다. 세계 교회 역사상 그 유래가 없이 자생적으로 설립된 한국 천주교회는 그 해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과 귀국으로 비로소 명실 상부한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솔뫼는 바로 한국 최초의 사제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조부 김택현을 따라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충남 당진군 우강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곳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한현(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김 신부는 1846년 사제품 받은 지 1년 만에 순교하기까지 그의 삶을 채웠던 뜨거운 신앙과 열정을 배웠던 것이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이며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된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한다.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된다.
하지만 1791년 전라도에서 제사 문제로 일어난 진산 사건으로 그 역시 박해의 회오리에 휩쓸려 홍주, 전주, 공주 등지의 옥에 갇히게 되고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귀양을 떠나야만 했다. 그 후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후 1805년 또다시 붙잡혀 해미 감옥으로 끌려가고 이곳에서 10년간 옥중 생활을 하던 중 1814년 마침내 76세를 일기로 순교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1821년 8월 21일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김대건 신부는 재복이라는 아명으로 골배마실에서 신학생으로 간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갈 때까지 소년 시절을 보낸다. 당시 김대건 일가가 살던 집은 아흔아홉 간이나 되는 큰 집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우물과 집터만 남아 있고 대나무들이 주위에 있다.
솔뫼에서 대대로 명망이 높았던 김씨 가문이었지만 김진후의 15년간의 긴 옥중 생활로 가세가 기울어 신앙을 지키고 살기가 어려워져만 갔다. 셋째 아들 한현은 부친이 옥중에 있을 때 경상도 안동 땅으로 피난을 갔다가 잡혀 1816년 대구 감영에서 순교했다. 둘째 아들 태현은 1827년에 그의 아들 김제준과 김대건 등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 땅 ''골배마실''이라는 산골로 삶의 터를 옮겼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이 있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김씨 일가의 피난길은 설움과 눈물이었지만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선대의 신앙을 이어받은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성세와 견진 성사를 받고 회장에 임명되어 전교에 힘쓰면서 자신의 아들을 사제의 길로 인도한다. 그 역시 1839년 기해박해로 체포돼 그 해 9월 26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마카오로 유학을 간 신학생 김대건은 1845년 8월 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로 서품돼 그 해 10월 귀국한다. 귀국 후 첫 사목지를 은이 마을로 정한 뒤 공소를 차려 용인 일대의 사목을 시작한다. 하지만 부친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모친 역시 귀국 후 잠시 얼굴을 대했을 뿐, 김 신부 역시 사제품을 받은 지 1년 만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장렬한 순교로 일생을 마감한다. 1814년 김진후로부터 시작 되어 김대건 신부까지 30여 년 동안 김씨 일가는 4대가 순교의 월계관을 쓰는 신앙의 명가가 된 것이다.
솔뫼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순교 100주년을 맞은 1946년에 성역화 사업이 시작돼 기념비를 세웠고 생가 터를 매입했으며 성인의 동상과 탑이 건립됐다. 탄생 장소와 생가 터에는 아직도 300여 년의 연륜을 지닌 소나무들이 무성하고 오른편 숲 속에는 김 신부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솔뫼의 역사를 굽어보았던 소나무들이 30여 그루나 남아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있는 우물터에는 아직도 지하수가 솟아나고 있다.
1983년에는 솔뫼 피정의 집이 완공돼 사적지를 찾는 순례자들의 피정을 주선하고 있다. 피정의 집 성당 안에는 김 신부의 영정과 유해가 모셔져 있기도 하다. 또 순례자를 정겨운 시선으로 맞는 솔뫼의 성모상은 한복을 입고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2미터 크기의 상이다.
소나무 숲을 따라 만들어 둔 14처 끝에는 김 신부의 동상이 서 있다. 3미터 높이의 이 청동상은 한국 전통 의상인 갓과 도포를 갖추고 영대를 두른 모습으로 바로 뒤에는 보호자인 성모를 의미하는 흰 탑을 세웠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순교자 김대건 신부님은 1925년에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품에 올랐고, 1949년에 한국 천주교회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해졌으며,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김 신부 생가 복원과 박물관 겸 경당을 건축하기로 결의하였다. 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 신부 생가터를 충남 지방문화재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솔뫼 피정의 집은 130여 명이 숙박할 수 있고, 개인, 단체 피정의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짜여져 있어 전국의 신자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방법
① 서울에서 오실 때 - 동서울 터미널(하루에 2번), 남부터미널(하루 6번)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② 다른 지방에서도 합덕으로 오시는 차편을 이용하시면 되겠습니다.
③ 합덕터미널에서는 걸어서는 20분, 택시를 타시면 3분 거리입니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방법
① 서해안 고속도로(서울,인천,전주,광주)를 타실 경우에는 당진TG에서 합덕, 예산 방향으로 나오셔서
32번 국도를 타시고 15분-20분정도 오시면 솔뫼표지판이 나옵니다.
② 경부 고속도로를 타실 경우에는(대구,부산 등) 남천안TG에서-천안-신례원-당진,합덕으로 오시면
됩니다.
③ 대전에서는 동부터미널에서 천안-신례원-당진,합덕으로 오시면 됩니다.
**** 참고 *****
공세리 성당
공세리 성당이 위치하고 있는 아산만과 삽교천은 교회 박해시대에는 내포지방 입구로 해상과 육로가 연결되는 중요한 포구였다. 공세리 성당은 대전교구에서 첫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고, 이남에서는 다섯번째 성당으로써 유서깊은 성당이다. 현재 성당이 위치한 9,500여 평의 부지는 예로부터 공세곶창고지(貢稅穀倉庫地)로 유명한 곳이다.
이같이 세곡을 임시 보관하던 자리가 가톨릭 신앙 전교의 전진 기지로 바뀌었다.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드비즈 성 신부가 이곳에 와서 공세 창고를 헐고 복음 창고인 성당을 세운 것이다. 1895년 당시에는 동네 한가운데 있는 가정집을 성당으로 사용했었으나 1897년 창고 건물을 헐고 구 성당 건물(구 사제관)과 구 사제관 건물(현 회합실, 창고)을 짓게 되었다. 초대 본당 신부이던 드비즈 신부는 자신이 직접 성당을 설계하고 지휘 감독하여 1922년 10월 8일 현 성당을 완공하였다. 그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 한약을 조제하였으며 이명래 고약으로 유명한 이명래(요한)에게 고약의 비법을 전수시켰다.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명인 成一論고약으로 불렸었다. 드비즈 신부는 1930년까지 공세리에서 사목하였다. 1988년 9월 20일 성당에서 서남쪽으로 5km 떨어진 해암리 맹고개 3형제 순교자 묘를 성당 구내로 모셨다. 이분들은 공세리 성당 출신의 박의서(사바), 원서(마르코), 익서(세례명 미상)이며 1867년 정묘년에 순교했다. ‘병인치명사적’ 제11권에 “병인풍파를 당하여 3형제가 함께 잡혀 수원으로 올라가며 원서가 말하되 ‘내 평생 천주 공경을 실답게 하지 못하였더니 오늘 주께서 나를 부르셨노라” 하며 즐거워... ’동생 들어 보소. 우리 3형제 올라가 위주 치명하자‘ 하고 조금도 변함없이 3형제 수원으로 올라가니....’ 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 분의 묘 옆에는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제대가 준비되어 있고, 성당 건물 주위에는 십자가의 길도 조성되어 있어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묵상과 기도를 도울 수 있다. 1990년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수마음 피정의 집’이 완공되어 성지 순례객들의 피정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보석은 비록 일시적으로 땅속에 묻히어 빛을 받지 못한다 해도 캐내면 역시 빛난다.-
순교자는 박해로 일시 역사의 암흑 속에 묻힌다 해도 반드시 언젠가는 찬란한 광채로 드러난다. 걸매리에서 살다가 1867년에 순교한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이 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홍갑,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열 분은 하느님이 땅에 묻으신 보석이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수원, 발안, 아산만을 지나면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 앞뜰에는 치명일기(致命日記) 387 박의서와 388 박원서와 389 박익서, 세 분 순교자의 묘가 있다. 이 분들은 모두 걸매리에서 살다가 병인박해가 일어난 이듬해인 1867년에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이 분들의 묘는 본디 인주면 해암리 맹령(속칭 맹고개)에 있었는데, 1988년 9월 20일 공세리 성당 변갑철 신부의 주관하에 성당 앞뜰로 이장해 왔다.
박의서, 박원서, 박익서, 세 분의 순교자는 옛날 걸매리에 살던 밀양 박씨 의암공파의 후손이다. 이 집안에는 이미 치명일기에 기록된 이 세 분의 순교자 말고도 이 마리아, 박인서, 박제환, 박홍갑, 조 모니카, 박화진, 이씨 부인 등 일곱 분의 순교자가 더 있다. 그리고 그 주변 마을에서 살던 순교자들이 12명이나 더 있다.
이들의 순교는 어떤 한 개인의 죽음, 가령 병들어 죽은 죽음과는 다른 것이다. 그들의 죽음은 천주교 박해라는 역사적 사건 속에서의 죽음이다.
따라서 그들의 순교는 한국천주교회사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일대에서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해 가던 창고집이 있던 곳이다. 마을 이름도 세금을 바치던 공세 창고가 있는 곳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공세리는 충청도 일대의 공세 관곡을 수합하여 서울로 운송하던 나루였기 때문에 일찍이 마을이 형성되고 또 번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걸매리는 물이 얕아져 공세나루가 폐쇄되고 아산만에서 삽교천에 이르는 방조제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공세리 앞 방조제 공사는 걸매리에서 살다가 순교한 박씨 3형제의 증조부이신 박만선이 통진 부사에서 물러나온 뒤 시작하여 준공하지 못하고 1782년에 돌아가시자, 그의 아들 박종학이 1784년부터 뒤를 이어 계속하여 준공하고 유민 수 백집을 모아 개간한 논을 나누어주고 살게 함으로써 모원리, 신성리, 신밀두리, 서강리, 신원리, 걸매리의 여섯 마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종학은 걸매리로 이사 오기 전에 면천에서 살고 있었다. 이 면천은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살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면천과 이존창이 살던 예산 여사울은 거리가 약 8킬로미터이지만 넓은 평야를 사이에 두었을 뿐 옛날 같으면 하루 아침에 오갈 수 있는 거리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이존창(신유박해 때 내포지방의 사도)과 서로 지면이 있었을 것이며 이러한 지면으로 인하여 전교가 이루어져 일찍부터 천주교를 신앙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공세리 지역의 순교자들
1. 박씨 3형제의 순교
O 박의서 (사바스)
- 치명일기 387번
후덕한 인품과 굳은 신앙심으로 죽음이 두려워 신앙심이 흔들리거나 배교하려는 마음없이 깨끗하게 주님을 증거하고 목숨을 바쳐 순교하였다. 박의서3형제가 수원 걸매리에 살았으며, 그 후손들이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에서 살고있는 밀양박씨 집안임을 알수 있다. 이 후손들은 박해를 피해 일부는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면 용왕동으로, 일부는 충남 강경으로, 또 일부는 평택으로 흩어져 살고 있다. 이 후손들 중에서 박상래, 박성팔, 박노헌, 박중신 신부 등 네 분의 사제가 배출되었다.
O 박익서 (세례명 미상)
- 박상래 신부의 증조부
(비문) 천성이 곱고 순결하여 오로지 한 마음으로 천주를 공경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들 삼형제와 이 마리아가 함께 수원으로 잡혀가 1867년 3월 8일 순교하였다. 시체는 그 당질 웅진씨 바오로와 양성우씨가 거두어 아산시 인주면 맹고개 선영에 안장하였다가 1988년 9월 20일에 맹고개 묘지에서 공세리 본당으로 이장하였다.
2. 밀양 박씨 집안의 순교자들 (7명)
- 이 마리아 (박원서의 부인)
- 박인서 (박의서의 사촌동생)
- 박제환 (기천 베드로)
- 박홍갑 (박의서의 아들)
- 조 모니카 (박덕여의 부인)
- 박화진 알렉산데르 (박덕여의 아들)
- 이씨부인 (박의서의 종제수)
3. 박씨 외의 걸매리 지방 순교자들
- 김중백
- 김지득
- 이학습
- 김장복 (박덕여의 생질)
- 김씨 (김장복의 아내)
- 오인악
- 장원심과 그의 아들 장팔보
- 김흥서 토마 - 지금의 수원교구 남양성당에 성지화
- 김 필립보(비리버)와 그의 아내 박 마리아 - 남양에서 순교
- 최사도 요한
순서 | 성명(세례명) | 나이 | 거주지 | 순교일 | 순교지 | 기타 |
1 | 박홍갑 | 18 | 걸매(수원) | 1866 | 서울 | 박의서의 아들 |
2 | 김중백 |
| 걸매(수원) | 1866.10 | 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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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지 글라라 | 58 | 아산 구말리 | 1867 | 공주 | 병인박해때 공주로 피신 |
4 | 박의서(사바) | 60 | 걸매 | 1867.8.8 | 수원 | 걸매 회장 |
5 | 박원서(마르코) | 51 | 아산 신성리 | 1867.8.8 | 수원 | 박의서의 둘째 동생 |
6 | 박익서 | 45 | 아산 걸매 | 1867.8.8 | 수원 | 박의서의 셋째 동생 |
7 | 박인서 | 38 | 아산 걸매 | 1867.8.8 | 수원 | 박의서의 사촌, 옥중 영세 |
8 | 이씨(여) | 38 | 아산 걸매 | 1868.8.8 | 수원 | 박의서의 종제수, 옥사 |
9 | 이 마리아 |
| 아산 걸매 | 1867.8.8 | 수원 | 박마르코의 처 |
10 | 박제환(베드로) | 18 | 아산 걸매 | 1867 | 서울 | 처가에서 |
11 | 김 필립보 | 57 | 아산 걸매 | 1868.8.3 | 남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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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 박 마리아 | 57 | 아산 걸매 | 1868 | 남양 | 김 필립보의 첩 |
13 | 김흥서(토마) | 38 | 아산 걸매 | 1868.8.3 | 남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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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 조 모니카 | 50 | 아산 걸매 | 1868 | 수원 | 옥사 |
15 | 박 알렉산도 | 31 | 아산 걸매 | 1868 | 서울 | 조 모니카의 장자 |
16 | 이학습 | 42 | 아산 걸매 | 1867.9 | 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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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 김지득 | 47 | 새원여 | 1867.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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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김장복 |
| 인주 밀머리 | 1867.12 |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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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 김씨 |
| 인주 밀머리 | 1867.12 | 수원 | 김장복의 처 |
20 | 장원심 | 50 | 아산 걸매 | 1868 | 수원 | 신문 교우 |
21 | 장팔보 |
| 아산 걸매 | 1868 | 수원 | 아산 용봉골 피난 후 |
22 | 오인악 | 18 | 아산 걸매 | 1868.6 | 수원 | 모친은 방면됨 |
23 | 최 사도요한 | 45 | 아산 걸매 | 1869.8.25 | 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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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유 요셉 | 28 | 아산 산솟말 | 1879 | 서울 | 아사 |
25 | 함 베드로 | 20 | 아산 뒷내 | 1876.4.9 | 공주 | 함 요한의 아들 |
26 | 이 요한 |
| 아산 쇠재 | 1871.3.16 | 서울 | 이 베드로의 부친 |
27 | 이 프란치스코 |
| 아산 쇠재 | 1871.3.16 | 서울 | 이 베드로의 아들 |
28 | 이 베드로 |
| 아산 쇠재 | 1871.3.16 | 서울 | 이 요한의 아들 |
출처 : [무명 순교자의 뿌리를 찾아서, 걸매리 밀양박씨 순교자연구] 하성래 지음, 가톨릭 출판사 1995년 9월 25일 초판인쇄
-공세리 성당 041-533-8181-
출처 : [무명 순교자의 뿌리를 찾아서, 걸매리 밀양박씨 순교자연구] 하성래 지음, 가톨릭 출판사 1995년 9월 25일 초판인쇄
-공세리 성당 041-533-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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