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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st. May(토)
토요일. 별 수 없는 날이지만 두어 시간 일찍 작업을 마친다. 종일을 역시 배에서 서성거리다. 저녁에 식사시간이 30여분 늦더니 따끈한 느른 국수가 나왔다. 정말 오랫만이다. 뚝뚝 흐르는 땀을 참고 두 그릇을 비웠다. 손으로 빚었으니 국수의 가락이 굵고 고르지 못했으나 그런대로 맛과 멋이 있다. 원래 이 국수는 가락이 고르지 않는 게 맛이 있는 것이다. 비록 재료가 제대로 없어 갖출 것을 못 갖추었으나 등줄기에 후줄근한 땀방울이 맺힌다.
내가 어릴 때 정확히 몇 살인지는 기억이 없다만 국민학교 3-4학년은 됐을 것이다. 여름날 저녁이면 으레이 이걸 먹었다. 한동안은 이 맛에 싫증을 느끼기는 했었다. 그러나 이걸 먹는 날은 그래도 고급축에 든 것만은 틀림없다. 저녁 해질무렵이면 방앗간에서 빻아온지 며칠 안 되는(어떤날은 그날 빻은 것도 있다) 밀가루를 반죽하기 시작한다. 엄마라고 부른 기억은 없다. ‘어무이’이었다. ‘어무이 수제비하나 국시하나?’ 물으면 ‘국시다’. ‘야!’ 그 국시꼬리가 생기기 때문이다. 반죽된 밀가루덩이를 넓직한 들판에 놓고 홍두께로 양쪽을 돌리며 밀기 시작한다. 붙으면 밀가루를 뿌리고 -. 그 반죽 덩이는 자꾸 엷어지며 옆으로 퍼져 마침내 둥그런 판만큼이나 커진다. 그러면 판에 놓아 둔 체 다시 한 덩이를 민다. 서너개가 끝나면 접어서 썰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부엌이나 아니면 부엌 앞 마당에 걸어둔 솥에서 누나가 물을 끓인다. 엄마는 처음 것은 가늘고 곱게 쓴다. 아마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등 어른들의 몫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것은 나와 관계가 없다. 썰고 남은 밀가루 판의 꼬리! 그게 군침을 돌게 한다. ‘그만하고 주이소’ 곧 다 썰어버리고 말 것 같아 애가 타지만 자꾸 썰어간다. 엄마도 예산이 있는가보다. 꼭 남겨 주었다. 할머니가 썰 때도 있지만 할머니는 꼭 한마디 잔소리를 붙여서 주곤 하면서도 엄마보다 꼬리가 짧았다. 얼른 불을 지피는 누나 곁에 간다. 보리짚 불이 야글야글 탄다. 누나의 이마에도, 콧등에도 땀방울이 맺혀있다. 부지깽이 끝에 걸치고 저만치 보리짚 불 위에 얹어 익힌다. 누나가 구워주마 해도 맡기질 않는다. 조금이라도 떼어 먹힐 듯 해서다. 가끔은 구워주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내가 많이 차지한다. 처음부터 누나는 내게 많이 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구워졌을 거라 생각하고 꺼내보면 끝은 이미 숯이고 중간은 아직도 생거다. 가끔은 속에서 부풀어 올라 봉긋봉긋하게 오르다가 터지기도 하며 까맣게 탄 부분도 있다. 부지껭이 들었던 손등이 보리짚 불에 따깝다. 한입 가득히 떼어 넣지 못한다. 아껴서 오래 먹기위해서다. 아직도 입안에 따끈한 기운이 남는다. 다시 엄마 곁으로 간다. 두 번째 써는 것을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처음 시작한 부분의 것도 미리 잘라 모아두었다. 그냥 가져가도 말씀이 없었다. 타서 새카만 부분도 그런대로 맛이 구수하고 생것은 또 그대로 쫄깃한 맛이 입안에서 돈다. 언젠가 한두 번 엄마가 구워준 국수꼬리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나지않는 것도 같다. 꼭 같은 불에 굽는데도 아무래도 엄마 것이 골고루 익었고 맛이 구수했으니 말이다. 어떤 땐 꼬리를 다 먹고도 더 욕심이 생기면 설익은 국수를 가져간다. 그러나 이것은 엄마도 꾸중이다. 그냥 생것으로 몇 줄 집어먹다 만다. 함께 넣을 나물이 다 익은 느른국수는 큰 버지기에 퍼 담는다. 국수를 넣고 휘젖는 것은 꼭 엄마의 차지다. 누나는 상을 차린다. 어른들은 평상에 앉고 우리와 삼촌은 멍석에 둘러앉는다. 둥근상을 가운데 두고 -. 양푼에 가득 담은 국수. 어찌도 그리 뜨거울까? 들고 샘가나 기멍통으로 간다. 국수그릇을 반쯤 찬물에 담그고 휘젖는다. 식히기 위해서다. 어쩌다 물이 듬뿍 들어가기도 한다. 그릇 씻어낸 물, 행주가 담겨있기도 한 물이다. 먹어보면 그저 밍밍하다. 한참 식힌다. 맛을 보며 -. 맛 보며 식히다보면 다 식었다고 들어냈을 때는 이미 절반도 더 먹은 다음이다. 그래도 배불리 먹었다. 모자라는 날은 엄마가 덜 먹어도 우린 먹었다. 남는 날은 다시 큰 양푼에 담아 장독 위에 놓아둔다. 실컷 놀다 밤늦게 잠자기 전에 쉬이 배가 꺼진 뒤 다시 먹는다. 이미 국수는 꾸들꾸들하게 굳었고 국물마져 엉키었다. 그래도 식었으니 먹기는 좋다. 뜨거워 짜증도 났지만 분명히 느른 국수는 뜨끈할 때 먹어야 제맛이 나는 것 같다. 먹기 싫어도 배불리 먹었고 그런대로 맛이 좋았던 그 국수다. 요즘의 아이들은 그 맛을 모를 거다. 있을 때는 대개 여름부터 가을까지지만 그 풍요함이 있었다. 감, 사과 감자, 콩 등. 저녁때 호박구덩이에 물주는 것도 내차지였지만 대개는 할머니의 잔소리가 뒤를 따라 다녔다. 그때쯤의 나는 분명히 나 혼자만의 특권이 있었다고 생각되어진다. 위에는 누나니까 형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고 밑으로는 정희가 있었지만 차이가 꽤나 있었다. 그만한 또래의 애는 나뿐이었으니까.
30여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모처럼 먹은 칼국수 한 그릇이 몹시 그때를 그립게 한다. 다시 먹고 싶다고 했을 때 마누라가 만들어 준 국수에서 그 옛맛이 되살아 날런지 모르겠다. 애들과 마당에 둘러앉아 먹을 수 있도록 한번쯤은 해봐야겠다.
3/E가 퇴원을 했다. 그런대로 건강을 회복한 얼굴이다. 식욕은 괜찮단다. 다행이다. 오후에 의사의 처방전을 대리점에 의뢰, 약을 가져다 주었다.
용선자측의 Mr. Matani라든가 Las에서 한사람이 왔다. 인도인 검둥이다. 중간에 Las 들러지 말고 바로 스페인의 Algeciras로 가란다. 개새끼들! 진작 그랬으면 여기서 준비할게 또 있는데-. 좌우지간 갈팡질팡에 믿을 수가 없다. 다른 것은 두고라도 기관실 Transformer만은 수리해야 겠다. Italy를 거쳐 Las에서 Docking한댔다. 그래 빨리 빨리 해라. 여기 온지도 10일이 넘었다. 지루하고 갑갑하고 머리조차 멍멍하다. 빨라야 25일은 되어야 떠나겠다.
22nd. May(일)
종일 배에서 서성데다 말았다 꼬박 이틀을 땅을 밟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좀 일찍 작업을 끝내는 모양이다. 시내 구경 같던 사람들이 우리의 태극기가 걸린 대한민국 대사관을 보았단다. 뭐야? 분명이 있더란다. 몇번인가를 되물었다. 대리점 녀석은 분명이 없다고 했는데 -. 이렇게 정보가 어두웠어야 원! 당장 가봐야겠다. 일요일이라 아무도 없단다. 그러나 말만 들어도 반갑다. 조국을 떠나본 사람이 아니면 조국이 그리운줄 모른다는 누구의 말이 새삼 느껴진다. 동남아와 다르다. 여기가 어디냐.
저녁 늦게 걸어서 극장까지 갔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림 같은 영화지만 그런대로 몰두해본다. 내용도 줄거리도 그저 내 상상 속으로 내가 엮어간다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그 감정을 읽으려 애쓴다. 포르노가 아니면서도 남녀가 완전히 벗은, 그놈의 물건(?)이 덜렁덜랑한체 화면에 비친다. 어쩌면 그것이 훨씬 자연스럽고 좋아 보인다. 조금도 우습거나 어색한 점이 없어 보이는 데는 스스로 이상하다. 굳이 카메라의 앵글을 움직여 피하려 하지 않으려니까 결국 영화의 그 장면이 어색하지 않는 것일까.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Wari에서 보았듯이 그 휫바람소리는 커녕 웃음소리 하나 없이 진지하다. 어느 한구석에서 ‘으흐흐’하는 매우 음흉한 한마디가 있었을 뿐이었다. 나오는 사람들도 하나의 특색이 있거나 잘난 사람도 없다. 저게 배우인가 싶은 사람, 저보다 훨씬 예쁜, 잘생긴 사람들이 많을 텐데.... 할 정도의 그저 평범하게 길거리에서 아무데서나 만나고 부딛치는 그런 사람들이다. 역시 그것이 더욱 좋다. 애써 예쁜 사람, 잘난 사람 골라 쓴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각색일 거다. 근래 영화가 대부분 그렇다고 본다. 영화 그 자체가 꾸민 것이니까. 꾸몄다는 인식을 보는 사람이 갖지 않고 스스로 그 영화 속에 들어가서 동화 될 수 있게 하자면 역시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그 배경을 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여겨진다. 예술가들이 오죽 알아서 하랴만. 勸善懲惡이나 반드시 정의가 어디서나 이긴다는 것도 아니다. 더러는 착하고 옳은 사람이 오히려 비참하게 되는 수도 있고 힘세고 총 솜씨가 날랜 사람도 얻어터지서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드는 것이 현실이니까. 죽지 말아야 할 사람이 어처구니 없게도 죽는 것도, 하는 짓을 보면 꼭 한쪽을 잃어 병신이라도 되어야 마땅할 작자들이 오히려 구름을 탄 듯이 나는 것이 또한 요즘의 세상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한순간일 뿐이다. 모순이겠지. 그 모순이 정당화 된다면 사회는 붕괴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디까지나 사회의 큰 흐름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不義가 正義를 이기는 순간은 있어도 그것은 영속적이지는 못하고 비록 패배한 정의일망정 언젠가는 그 빛을 되살아 발할 수 있겠금 만들어져 있다. 심지어 바닷속의 고기 한 마리 보다 가볍고 작은 인간들! 그러나 그 정신의 위대함은 자연도 탄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주인공 Key란 젊은 놈. 뱃가죽에 구멍이 나고 콧구명에 호수를 연결하여 공기를 들락이게 되었으나 역시 그 행위는 가상하다. 죽지나 말았으면- . 그를 위해 기다리는 비록 매춘부지만, 한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한 여자를 위해서도 -.
대리점 차가 왔다. 아마 당직인 모양이다. 33살의 젊은 친구. 마누라가 둘이란다 하나는 29살의 첫 번째이고 두 번째는 17살의 학생인데 앞으로 7-8개월 후라야 결혼을 한단다. ‘키워서 잡아먹는 식’인가. 아직 애들이 없어 걱정이랜다. 딸이 셋이라며 사진을 보였다. 예쁘기가 최고란다. 그러면서도 아들이 없으면 안 된다고. 이것도 세상 어디서나 같은 모양이다. Wari에서 툭박진 검둥이 우쯔구도 ‘오! 노 굿’하며 아들이 있어야 한댔는데 -. 어쩌면 그게 생물의 종족보존의 본능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들 ! 역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장 좋은 ‘和音’이라고 박인구씨의 수필에서 읽었다. 그러면서도 내가 왜 반대를 했을까. 싫어서가 아니고 의식적이었다. 갖고 싶고 키우고 싶은 것이야 당연하다. 지난 겨울 어쩌면 한번쯤 더 아내가 얘기를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면 속셈으로는 더 했을런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긴하다. 앞으로 더욱 각박해져 가는데 제대로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야 하는 것도 힘겹지 않을 수 없다. 제대로 키우지 못할 바엔 없는 것만 못할 거다. 끝까지 보살펴 주지는 못해도 자신의 힘으로 제 갈 길을 찾도록은 해줘야 한다.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다.
내일 아침 대사관 가야하니 차 수배를 의뢰하고 돌려보냈다.
23rd. May(월)
선원들의 雇入준비를 한 채 대사관을 찾았다. 대리점 검둥이가 자기가 알았다며 안내해준다. 그러면서도 ‘South Coree'를 몇번인가 확인하다. 태극기를 그려뵌다. 맞단다. 이곳 대통령관저의 앞길을 쭉 뻗어 아프리카 기념회관 앞 조그만한 분수대를 중심으로 한 로타리가 있다. 크다란 빌딩이 몇 개 있고- .이곳 TV방송국의 맞은편 건물 5층에 선명한 태극기가 날린다. 진짜 선명하다는 말이 이런 때 쓰이기 위해서 만들어 졌으리라. 하얀 바탕에 빨강과 파랑이 유난히 조화를 이루어 보인다. 반가히 맞아준다.
유 서기관이란 분이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는냐고? 고입이 뭔지, 어떻게 하는지, 영사업무는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필요하면 해드려야 한다고 한다. 우선 반갑고 고맙다. 말만 들어도 -. 그러면 그렇지. 우리의 대사관이 없어서야 돼나. 기운이 솟는 듯하고 무엇인가 마음 든든해진다. 이북 대사관만 있다는 처음 대리점의 얘기 때문에 상륙을 해도 얼마나 조심을 했고 마음대로 편지 한 장 써 보내지 못했지 않은가. 내일쯤 다시 한번 들려달란다. 아마 고입업무에 대한 내용을 알아볼 모양이다. 그래 어쨌던 좋다. 다시 오마, 별것아니니까 연구하고 찾을 것도 없을 것이다. 불어가 유창한 걸보니까 전문분야를 거친 듯 하지만 고지 고입업무는 처음인가 보다. 일본에서 흔히 있는 영사관과는 그 인상이 다르다. 그 딱딱하고 하던 분위기하며, 관료적인 표정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정말 애국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내 나라 내 국민이 그립고 반갑고 좋다는 것만은 분명히 느낀다. 내일 다시 만나면 저녁시간이라도 약속해서 얘기라도 좀 나누자. 외교관! 허울 좋은 개살구인지도 모른다. 까놓고 보면 먼 타향에서 만난 知己처럼 정다운 대화가 이루어질지 모른다.
오면서 마켓트에서 칫솔과 비누 넉장을 쌌다. 2장은 대리점 그놈에게 주면서 ‘하나는 첫 번째 마누라, 한 개는 두 번째 예비마누라 주고 너는 없다’고 했더니 고맙다고 기뻐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순진스럽고 측은하다. 어쩌면 이런 것이 더 큰 외교적 효과를 올릴지도 모른다. ‘꼬레아 까삐딴(한국 선장)’ 좋은 사람이랜다. ‘꼬레아 사람’이 좋다는 인식이 들거다. 내일 오후 다시 오라고 하니 염려 놓으란다. 줘서 싫다는 놈 없고, 너 잘생겼다 해서 흐뭇해 하지 않은 여자 없는 걸 보면 검건 희건 인간을 동질인가 보다.
입항한지 2주일째다. 옆 앞부두에 벌써 10여척의 크고 깨끗한 배들이 접안했다가 출항했다. 그저께 입항했던 그 호화로운 France 선박도 오늘밤 어디론가 다시 항해길에 올랐다. 어디로 갔을까?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지금도 바닷물을 가르고 있을 것이다. 며칠이나 됐을까? 초승달이 제법 높이 걸려 있다.
Cook 다시 병원가다. 전신이 가려워 미치겠단다. 병원측 왈. 혈액검사를 하잔다. 골치 아픈 것은 아닐까. 아직 두 배가 남았단다. 25일 까지는 어려울 것 같군. 연료이송장치를 여기서 수리의뢰를 했다. 담배도 떨어졌단다. 어허참. 술, 오입 기타 좋은 것은 맞돈주고 하고 제게 가장 필요한 것은 외상으로 부탁하잔다. Free Tax로 사봐야 Lome의 시중 값이다. 두박스(50보루)를 신청하다.
근 한달만에 다시 붓을 잡아본다. 먹물이 시원찮은데다 놀던 손과 마음이라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마치 처음 해보는 기분이다. 손이 떨리지는 않으나 획이 바르게 그어지질 않는다 . 틈나는데로 여기 와서 멍하니 앉았거나 서성거릴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썼드라면 이러지는 않았을텐데. 낮에 대사관 공보책자에서 본 金思達씨의 글씨가 생각난다. 의학박사에다 그 뛰어난 글 솜씨에다 다시 수필까지 겸하여 쓰지 않는가. 머리라도 한번 만져 보았으면 싶다. 내가 알기는 독학을 한 사람 같은데 -. 물론 재능이 바탕이 되기도 했지만 그만큼 피나는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위대한 인간일수록 넓은 재능과 예술에 대한 식견이 높다. 또한 스포츠도 잘한다. 과연 그런 사람들은 뭣인가 다른 점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환경이 만들어 주었을까? 그도 아니면 스스로 택하고 행해서 일까? 하나의 전문가가 되기도 힘드는 데 둘 셋씩이나 남을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가 되는 걸 보면 분명히 우수성이, 자질이 타고 났음이리라.
정신과 의사 崔臣海씨의 ‘惡의 種子’를 보면 그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기도 하고 또한 후천적인 환경과 교육적 영향이 큰 영역을 차지하는 것도 같다. 참고로 적어 둬보자.
〔미국의 닥대일씨가 1877년 우연히 한 감옥소에 같은 이름의 죄수가 6명 있는 것을 보가 각각 그 계보를 찾아 올라갔다. 그 원조는 ‘아주타크’란 화란으로부터 이민 온 게으런 어부였는데, 그의 후손 1200명을 더듬어 조사해본 결과 경력미상이 540명. 어렴풋이 아는 사람이 약 500명. 어려서 죽은 이 300여명. 병약자가 440명. 거리로서 수용소 신세를 진 사람이 310명, 범죄자 130명 그중 상습절도 60명에 살인범 7명이고, 여자의 경우 약 반수는 매춘부였으며 소학교를 제대로 마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단다. 이 일가를 위해 미정부가 쓴 돈이 75년간 125만달러였단다. 그 뒤 23년 후 퀸시프라는 학자가 다시 이 가계를 조사하여 경력을 확실히 알 수 있는 709명중에 사생아 106명, 매춘부 181명, 거지 142명 구호소 수용 62명 범죄자 76 살인범 7명 형무소 생활을 한사람의 형기 합계가 161년, 구호소에 수용되어 구제 받은 햇수의 합계가 734년 이였단다. 다시 15년 뒤 1915년 에스타 부르크가 조사. 2820명중 여자의 반수가 매춘부 600여명의 정신박약자가 생존했고 250만달러의 국가경비가 지출되었음이 밝혀졌다.
또 다른 한 예로서 카리크가 집안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와서 4대에 걸쳐 농사를 지으면서 부지런히 살아온 집안이다. 18세기 독립전쟁시 이 집안의 ‘마이티 카라카크’라는 청년이 싸움터에서 마침 머리가 모자라는 어떤 소녀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았는데 그 여자 소생으로부터 퍼진 자손들이 1901년까지 1143명. 이중 기록 불확실이 585명. 저능아 262명. 간질병자 3. 정신병자 2. 早死가 94. 건전한 사람이 197명이었다. 이 청년은 그 후 그 여자와 헤어져 건전한 여성과 재혼, 그 몸에서 자손이 1911년까지 496명. 이 중 정신병자, 간질환자. 범죄자는 하나도 없고 일찍 죽은 자가 15명에 불과, 나머지 478명은 건강했다 한다.
그 반면 우수계열 집안으로서는 미국 프린스 대학 총장이었던 ‘조나단 에드워드家’(1705-1758)로서 1900년에 1394명 중 대학졸업자 285명, 13명이 대학 총장을 지냈고 65명이 교수였으며 의사가 60명, 목사 선교사가 100명, 육해공군 장교가 75명. 유명한 저술가 및 기자가 60여명. 법률가가 100명 이중 재판장이 30명, 공무원 80명, 부통령이 1명, 상원의원 3명, 기타 주지사, 국회의원, 시장, 대사 공사, 각 회사의 상급 실업가가 부지기수였단다.〕
한국의 사회구조는 옛부터 양반과 쌍놈의 정치적인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패배자는 곧 쌍민이 됐고 자신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고관대작이였으므로 출세를 하는 등. 종잡을 수 없다고 했지만 옛사람들의 머리에도 분명히 그 ‘種’의 개념은 있었나 보다. 우리말로는 ‘뼈다구’라고도 했다. 이름난 개도 족보가 있어 그걸 달고 다닌다는데 사람도 결코 그걸 무시할 수는 없는가 보다. 어떤 상태의 바탕 위에 세워지는가, 세웠던 것을 뒤엎을 수는 있어도 그 바탕만은 뒤엎지 못할 거다. 환경과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껴진다. 또한 그보다 더욱 필요한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닐까.
『글과 담을 쌓게 되는 때부터 情緖를 잃어버린 物質的 動物의 生活은 시작된다. 이 관계는 그 반대일 수도 있고 또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因果관계일 수도 있다. 글을 쓰는 생활을 갖자. 이것이 바로 슬기로운 人間이 인간답게 살아 갈 수 있는 첫째 요건이다. 거창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상실해 가는 人間性을 회복해 가는 捷徑도 바로 글을 쓰는 생활에서 쉽게 찾아질 수 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전문적인 文士들의 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祖上들은 참으로 슬기로웠다. 전문적인 詩人은 아니었지만 文字를 해득하고 쓸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글을 썼던 자랑스런 遺産을 우리는 오늘날 이어받고 있다. 전쟁터에 나가 千軍萬馬를 호령하던 장군도 그 陣中에서 글을 썼고, 詩로서 출세를 목표로 한 선비는 물론 집안에서 슬픈 운명을 견디며 살아온 우리의 할머니들도 붓을 들어 자기의 소회들을 적어 놓았으며, 陋巷의 賤妓들도 훌륭한 詩文을 남겨놓지 않았는가? 』
(정한모씨의 글중에서)
대학노트로 두 권째로 접어든다. 나는 이것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다거나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이렇게 적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누구를 주거나 남기기 위함도 아니다. 그저 그냥 적어보는 것뿐이다. 내 청춘을 바쳐가며 이 낯선 지구의 한쪽 끝에서(어쩌면 중간이라고도 할 수 있긴 하다만) 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떼어두고, 디딜 땅을 잃은 채 헤메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다는 생각. 그래서 어쨌건 빨리 내가 설 땅을 찾고 그기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기 위한 내 마음의 결정이 흐트러지거나 약해져 감을 막아보고 나아가서 더욱 채찍질해보자는 뜻에서 그냥 적어볼 뿐이다. 그러다 보면 한해의 내 역사가 될런지도 모른다. 허나 구태여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그냥이다. 우선은 -.
적고 싶을 때 생각나는 데로 적어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러나 뭣보다 글씨부터 좀 단정히 쓰야겠다. 내가 봐도 너무 개발세발이다. 내 귀중한 시간을 잡아먹는 ‘殺歲濟’라고 할까, 아니면 잡념을 잊게 하는 ‘殺煩濟’라고 할까. 그런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 서부 아프리카 세네갈의 수도 Dakar에서 쓰다 -
24th. May(화) 1977.
‘어느 길가 집이다. 방문이 바로 길과 마주한 집이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절터 같기도 하고. 내가 서있다. 방문이 열리고 아내가 나타나며 나를 부른다. 방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이부자리가 펴져 있다. 마치 아내가 몸져누웠다 일어난 듯하다.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며 내 목을 살며시 안아주고 자리에 들었다. 이번에는 우리 고향마을이다. 지금은 큰길로 넓혀졌지만 돌 공장이 있고, 내가 학교에 갔다 차에서 내려 걸러오던 논두렁이다. 교복차림의, 아니 흰 세타에 까만 스커트 차림의 아내와 그 친구를 만났다. 무척 반갑게 얘기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아내는 없고 그 친구와 얘길하며 가는데 우리 집 앞 밭 옆길로 아내가 아기를 업고 걸어 나온다. 미안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얼른 손을 들어 인사를 하나 아내가 쳐다보지를 않는다.’
오늘 새벽녘의 꿈이다. 여섯시가 가까운 훤한 아침이다. 좀처럼 꿈에 뵈질 않더니 이상하다. 기분이 - . 바로 일어나 버리긴 했어나 뭣인가 불안한 기분이다. 꿈이 많지 않는 내 자신이다. 또 꿨다 해도 일어나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예다. 일종의 신경쇠약 증세라고 알긴 했어나. 오늘은 이상하게 분명히 기억이 된다. 무슨 일이 있는가? 당신이 아니면 애들 중 누군가가? 집에 무슨? 별생각이 다 든다. 어저께부터 코가 막히고 감기기운이 있는 듯하더니 -. 아침에는 식욕이 준다. 내 몸에 무슨 이상이 오는 건가? 종일 바깥출입을 삼갔다. 방안에만 있었다. 물렁한 소설책을 갖다 읽었다. 이종항씨의 ‘에덴의 후원’ 이다.
Shipchandler에서 담배 가져 왔다고 Sign받으러 온 것 이외는 아무도 찾는 이도 없었다. 오후 3시 대사관 가기로 한 날인데 -. ‘여보! 제발 무사하길 바라오, 진심을 빌 뿐이오.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구료. 이런 날은 내가 미워지고 하루가 지겹기 짝이 없는 날이기도 하오, 무슨 받아야할 업보라도 있으면 내가 받을게 -.제발 당신이나 얘들만은 일없이 오늘 하루를 보내주오.’
오후 3시 대사관 벨을 눌렀다. 유서기관이 반가이 맞는다. “영사업무라 내용을 잘 몰라서 해주긴 해야겠는데 어쩌겠냐.” 한다. 해달라고 할 수밖에 -. 둘이서 하나하나 대조해가며 Stamp를 찍었다. 답답하기고 했지만 할 수 없다. 근 한 시간이 걸렸다. 수수료가 다시 말썽이다. 건당 한화로 30원 받는단다. 나는 건당 1불30센트는 든다고 했다. 달라는 데로 준다. 모여진 신문을 한참 읽다가 퇴근길에 함께 배로 왔다. 신문뭉치를 든체 -. ‘마메다쿠시(콩택시)’라 불리는 폭스바겐을 운전한다. 다시 고기 한 마리를 싣고 자기집까지 가잔다. 무언가 외로운 가보다. 얘기가 하고 싶기도 한 것 같고. 프랑스 파리에서 2년, 그리고 외무부 본부에서 3개월 후 다시 이곳으로 온지 2개월째란다. 조용할 것 같아 박사학위를 위한 준비도 할 겸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일이 바빠 생각 같지 않단다. 대사를 비롯해서 3명. 공식직명은 참사관인가 보다. 그의 아내와 두 아기가 있다. 오랜만에 국수를 대접받았다. 내 추측대로 자세한 얘긴 않으나 함께 앉아 부담 없는 얘기를 한끗 나누고 싶은 가보다. 같이 근무하는 최 서기관이 이웃 아파트에 살고 있으나 서로의 자기 시간을 갖는 모양이다. 외교관이고 박사고 그게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땅을 잃고 사는 우리들의 신세가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땅위의 섬 생활이다. 귀로에 그의 부인이 동석했다.
배를 타고 온 항구를 다닌다고 하니 정말 좋겠단다. 맨날 애들 데리고 방안에만 있단다. 도중에 최 서기관 댁에도 들렸다. 최 서기관의 머슴애는 오히려 우리가 이상한 모양이다. 맨날 시커먼 애들만 보다가 우리 말하는 내가 신기해 뵌다는 최서기관의 얘기다. 우리 정주 정현이 보다 한 살씩 적어 뵈는 그 집 두 얘들 한테서 더욱 내 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죄스러움을 느낀다. 더구나 오늘 하루가 염려스럽다. 이곳에 사는 한국인은 없으나 경제사절단이나 민간기업체에서는 자주 온단다. 와야지. 와서 이런 곳에도 한국을 심고 길러야지. 상품뿐아니라 사람도 필요하면 심어두어야 한다. 흔하게 내버리는 情蟲들을 그냥 버리지 말고 이런 곳에 뿌려 열매도 맺어두고 결실을 보기도 해야 한다. 이곳에 흩어진 인도놈들을 봐라. 마치 동남아의 상권을 쥐고 흔드는 중국 떼놈들 모양, Lome, Lagos 그리고 이곳 Dakar의 상권을 잡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낮에 대사관 5층 창문에서 바라본 근, 원경이 아름다웠다. 하얀 고층건물들, 빨간 기와지붕, 우거진 수풀, 그리고 바로 길 건너 잔잔한 바다는 2-3일 후면 내가 지나가야 할 길이다. 대사관에 걸린 태극기를 찾으며 -.
대사가 참치회를 그렇게 좋아한단다. 전에 김종필 총리의 방문시 그놈의 참치구한다고 온 배를 돌아다니며 구했다는데 겨우 Yellowfin 두 마리였단다. 결국 낙지국을 먹었다는 최서기관의 얘기. 내일 따로 잘 썰어서 갖다 주기로 하다. 줘야지. 그리도 한국선원을 위해서 몸소 찾아주고 말이나마 고맙게 하고 신문도 갖다 주는데-. 물론 그것이 곧 그들의 임무고 우리들의 세금으로 살아가는 처지지만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다. 고향 까마귀만 봐도 반가운 지금이다. Las.만 가도 다를 것이다. 그 우월감, 관료의식들, 아이구 머리야 다. 한국에서 보내는 신문이나 편지 등은 대개 7일 내지 10일이면 온단다. 보낼 때 주소를 한글로 쓰되 위에 크게 불어로 Coree라고 써야 한다고 일러준다. 가끔 우체국 직원들이 영어를 몰라서 잘못 선별하는 수가 있다고. ‘Seoul, Coree'라 쓰면 쉬이 간단다. 저녁에 신문을 뒤적이는 선원도, 다시 편지를 쓰는 선원들도 있다. 나도 내일쯤은 써 모았던 것을 띄워야겠다. 얼마나 기다릴까. 별일 없는지. 늦게까지 잠이 안 온다. 넓은 아파트에 헐렁한 가구, 아담한 맛이 없는 사막 같은 느낌. 두 애와 그 부인과 그리고 유병화 참사관. 그도 역시 어딘가 잘못 찾은 곳, 혹은 길이 아닌가 싶다. 나중에야 어쨌던 지금은-. 내나 그나 내일 잘 먹으려고 오늘 굶는 어리석은 群像들인지도 모르겠다.
25th. May(수)
船主 德丸해운에 보낼 서류 완결. Las의 Mavacasa에 띄울 청구서 완료, 그리고 집에 보낼 편지, 대아의 元부장에게 보낼 私信 등의 준비를 끝내다. 내일 아침에 보내야지. 오전 중에 유 참사관이 망고과일 한 상자와 4월치의 신문, 책 두 권을 가지고 왔다, 참치 얘길 듣고 대사가 얼른 갖다주랬단다. 좋은 놈으로 두 마리 잘라 상자에 넣어 보냈다. 오후에 내가 직접 갈려 했는데 잘 됐다.
오늘 아침에 들어온 Spain선 ‘Playa de aritzatxu'의 선장인가 어로장인가 하는 녀석이 고기를 톱으로 서는 것을 보고는 대노했다. ’No possible'의 연발이다. 자식 저네배의 고기도 아니면서-. Sign받으란다. 하라면 하지. 먹는 것은 먹어도 좋으나 밖으로 반출은 안 된다는 그의 말에 일리는 있다. 또한 어부로서 잡은 고기에 대한 그 애착, 비록 자기가 잡은 것은 아니래도 자국의 선박에 애써 잡은 고기를 우리가 톱으로 썰어 내는 걸 보고 느끼는 그 흥분, 분노! 이해한다. 나도 어선을 경험한 사람이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는 미안하다. 그러나 사전에 너희 회사 책임자에게 양해를 구했고 또 필요하다면 Sign도 해 줄테니 염려는 말아라. 그래도 우리는 너의 그 노력의 대가로 너의 나라까지 너희들을 대신해서 운반해 주지 않느냐. 뭣하면 잘 보관했다가 갖다 주라고 한 두마리 그냥 줘도 괜찮을게 아니냐? 그래봐야 우리 얄팍하지만 유리한 입장을 살려 너네들 골탕먹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랬다. 대사관 차에 두 마리를 실어 보내고 당장 선원들이 나선다. 약간이라도 상한 고기는 전부 가려내기 시작했다. 골탕 좀 먹어보라는 뜻이다. 화낸 놈도 순진하고 우직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책잡아 애를 먹이려는 우리 선원들도 너그럽지 못해 말리기는 했지만 뭔가 떫지근한 느낌이다. 오후에 다시 Shipper측 Manager와 Mr. Conzelee에게 대사관 직원이 와서 두 마리 선사했음을 다시 양해 구했다.
'No Problem'이란다. 말이야 그랬지만 속으로야 좋질 않았겠지. 염려마라 그만큼 더 많은 일을 해 줄테니. 그게 곧 돈을 주지 않아도 생명과 바꿔가며 잡은 고기는 선뜻 내주는, 어부들의 어디가나 마찬가지인 그 후하고 툭박지면서도 우둔한 마음아닌가.
아무래도 출항이 늦어지면 Algeciras까지 7일. 부식이 달랑달랑 하겠다. 너무 여유가 없을 수는 없다. 며칠 분 더 싣자. 오늘 담배는 쌌다. Cook 병원 혈액검사 결과가 나왔다. 이상이 없단다. 그런데 왜 그렇게 가려운가?
내일 다시 대사관에 들려 그놈의 영수증을 다시 받아야겠다. 불어에 능통하고 박사학위를 밟은 사람이 써주는 영수증치고는 너무나 졸작이다. 적어도 일본회사에 보내야하는 것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다. 이게 대한민국 해외공관의 영수증인가하고 나라전체가 망신당할 우려가 있다.
26th. Apr(목)
대사관을 재 방문 영수증을 다시 만들다. 유 서기관은 마침 은행에 가는 길이라며 중간까지 태워다 준다. 우체국에 들러 오랜만에 다시 집과 대아에 편지를 띄우다. 우표 파는 검은 아주머니(아물래도 아가씨 같지는 않다)의 몸치장이 요란하다. 팔찌를 대여섯개나 끼었다. Coree라고 하며 웃어주었더니 살짜꿍 윙크를 한다.
출항전 고국이 친구들에도 소식전해야겠다. 값싼 Card에 써서라도 -.
德丸에서 전보에 Docking Schedule이 6월 10일경인데 본선에서 확인하여 打電하란다. 이상하다. 통신장과 의논해보아도 자기도 이상하단다. 본사에서 본선의 일정을 모른다면 용선자와의 관계가 없다는 소린가? 임시검사 기일이 6월 2일인데-.
Las의 Mavacasa에 다시 Telex를 Socopao에 의뢰하다. 누구 장단에 배가 움직이고 춤을 추어야 하는지 염려스럽다. C/P도 안주고, Agent도 자기들 화물이 아니니 잘 모르겠단다. B/L도 스페인가서 받으란다. Mate Receipt가 뭐냐고 한다. 정말인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Mr. Conzales는 아무 염려 말란다. ‘무슨 걱정이 있냐?’ 한다. 허허참.
27th. Apr.
Mavacasa에서 회신 오다. 금항차 끝나고 6월10일-12일 사이에 Las에서 Docking예정이란다. 여기서는 Italy행으로 보고 모든 하역을 하고 있는데 -. 그게 될까?
Dock를 해야 한다는 Owner측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적당히 얼버무리려는 용선자측의 속임수인 것 같다. 교활한 놈들이군. Mr. Conzales 왈, 오늘아침에 Las전화해서 확인했는데 Italy가 맞단다. 할 수 없다. 회신내용을 그대로 알려주되 Italy행은 분명하다고 -. 대신 모든 수검관계는 본사와 Mavacasa가 협의해서 하고 연락을 바란다고 타전했다.
어제 저녁 늦게까지 쓴 5매의 Card을 우송하다. 함께 Mavacasa와 일본 선주에게도 보고서를 띄웠다.
입항한지 18일째다 지루하다. 거기다 모든 사정이 불명확하니 차분히 마음이 안정되질 않는다. 그저 허황하게 하루를 보낸다. 그날그날의 무사고를 비는 마음뿐이다. 어서 출항했으면 싶다. 아무도 이 일을 해줄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엊저녁 늦게까지 쓸데없는 얘기들을 적어 띄웠는지 모른다.
南洋社의 Stern Trawl선인 Iris호가 입항했단다. 가보다. 급한 환자 때문에 긴급입항이란다. 선장 이용수 水大출신이다. 금년 3월 교대. 우리보다 5일 먼저 출국했군. 모두가 제 얼굴이 아니다. 첫항차이라는데-. 마침 대리점이 같은 Socopao라 협조를 해주었다. 병원에도 가보고 대사관 유 서기관 댁에도 안내해주었다. 마침 출타 중이었다. 선경합섬에서 지사 설치관계상 사람이 와서 나갔단다. 귀선 중 그 배의 기관장과 지난 옛이야기를 거리삼아 두어시간 보냈다. 어쩌면 내 스스로가 다소 많은 얘기를 하는 편인 듯 하다.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사람이 그리운가 보다. 李洪在군. 내가 동방73호 승선시 해운국직원의 부탁으로 손인경씨가 태운 사람이다. 그 배의 Head로 승선중이란다. 우선 반갑다. 갑판장이 꼭 맹장염 증세 같아 긴급입항했는데 병원측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모양이다. 내일 아침 병원의사와 대사관 만나보고 적절한 조치 후에 출항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상호의견에 따른다. 혹시 필요하면 협력해 주기로 했다. 현재 Las를 기지로 조업 중인 한국어선들의 실태를 대강 이 선장에게 들었다. 쫒고 쫒기는 불안의 연속인 작업! 그러면서도 같은 한국작업선 끼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시기. 갈등. 협조란 가면을 쓴 형식적인 유대관계, 그 위에 군림하여 선원들의 고충을 묵살한 체 자사의 이익을 탐하는 선주들의 횡포, 또한 더욱 차원적인 입장에서 뒷바침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국가의 힘. 유 서기관도 얘기했다. 열심히 교섭중이나 어려움이 많다고 -. 그러나 앞서 지켜지지 않았던 우리나라 어선회사들의 약속 때문에 지금 더 큰 피해를 입고 있단다. 지나친 入漁料! 그 때문에 마치 도둑질 하듯이 영해를 들어가야 하는 모험과 위험을 감행해야 한단다. 국력! 그것은 결코 너무 먼 거리에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분명히 이쪽 Africa쪽 나라들과는 비교 안될만큼 우리가 신장되었다고 자부한다. 독립의 기분과 석유가 생산됨으로 덩달아 날뛰는 신생 아프리카 독립국들이다. 밥 팔아 똥 사먹어 가면서도 큰소리 치는 꼴이다. 이곳 시장에서는 우리의 상품이 더러 있지만 어디 우리시장에 이놈들 상품이 검은 털 한 개라도 있는가 말이다. 텁수룩한 머리 그리고 내가 경험한 적이 있는 트롤선인지라 그 선원들의 고충을 이해할 있다. 역시 어디가나 잘 살고 볼일이다. 그것이 자신의 정당한 노력의 대가라면 그 이상 값진 것은 없으리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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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래서 죽은 잣죽이라도 싫어하면서 국수를 좋아하는 이유를 짐작이 가네요.
어릴적의 입맛과 엄마의 손길과 형제가 둘러앉은 즐거움이 아련하네요,
죽! 건더기라고는 멀근 나물 풀어진 것 밖에 없는 물도 아니고 죽도 아닌 것을 하루 세 끼, 딱 2~3일만 먹으면 배가 고파도 안 넘어 감다. 한 번 질리면, 특히 어릴 때 기억이라 지워지지가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