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기독교 문화
서언
바른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기독교 문화와 하나님 나라의 문화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기독교 문화는 기존의 제도적인 기독교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 놓은 문화이다. 이 문화 속에 물론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많이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기독교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갈등 관계 속에 있는 경우도 많이 있을 수 있다. 기존의 기독교 문화 속에는 자세히 보면 편협하고 율법주의적인,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는 상충되는 요소들도 상당수 찾아낼 수 있다. 이 시간 우리의 관심은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고 또한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기독교 문화의 특징이 아니다. 어쩌면 이런 기독교 문화는 서구 문화와 혼동될 위험도 그 속에 내재하고 있다. 이 시간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특징을 밝히는 데 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어떠하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우리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문화적인 목표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현존하는 기독교 문화와 상충될 때는 현존하는 기독교 문화를 바꾸고 변혁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문화와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다르다. 그러나 잘못된 기독교 문화가 아닌 참된 기독교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Ⅰ. 하나님 중심의 문화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하나님 중심의 문화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문화이고 하나님의 지배와 통치를 인정하는 문화이다. 무신론을 찬양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철학이나 문학 및 예술 속에는 무신적인 정신 위에서 전개되는 것을 많이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을 가르치지 않는 문화는 참된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과 하나님의 통치의 인정과 본질적으로 관련이 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롬 14:11).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하나님의 영광에 그 초점이 있는 문화이다. 이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특징은 다음 몇 가지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수 있다.
그러면 참된 기독교 문화, 즉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특징은 어떠한가?
1.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임을 인식하는 문화
옛 프린스턴(Princeton)의 유명한 신학자 하지(C. Hodge)는 독수리의 눈알만 보아도 하나님이 계심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말 그러한가? 사진을 찍는 사진기를 생각해보자, 사진기를 보고 이 사진기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사진기를 보면 사진기를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사진기와 독수리의 눈알을 비교해 보라. 사진기는 독수리의 눈알과 비교하면 형편없는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 독수리의 눈알은 사진기와는 도저히 비교될 수도 없을 정도로 정밀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 독수리의 눈알이 저절로 생겨났단 말인가? 창조 세계를 보면 창조 세계 속에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이 빛나고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 19:1)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창조 세계 속에 빛나고 있는 하나님의 신성과 영광을 감지하고 있는 문화이다.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걸작품임을 인식하고 있는 문화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문화이다. 그러나 인간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것을 인식하는 문화이다.
2. 하나님이 역사의 주(主)이심을 인식하는 문화
인간을 역사의 중심으로 보는 인본주의적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는 거리가 멀다. 1960년대 유럽에서 기독교인과 맑스주의자들과의 대화가 한창일 때 맑스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한 “너희들은 왜 기도하느냐?”라는 질문은 인본주의적인 맑스주의자들과 신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과의 근본적인 정신적 차이를 나타내는 핵심적 질문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이심을 인식하고 있는 문화이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시라는 것은 참된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정신이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문화의 형성을 정신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볼 때 역사를 심판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것은 세상의 도덕적 질서의 존재를 위해서는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고 주장한 바 있는 칸트(I. Kant)에 의해 이미 논증된 진실이다.
3. 다신적 문화가 아닌 십자가의 그리스도 중심의 문화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다신적인 일반 종교의 문화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영매, 초혼, 무당, 부적, 술객, 점쟁이 등으로 표현되는 저급한 일반 종교의 문화나 율법주의적인 특징이 강한 상당수의 고등 종교의 문화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특성이 강한 일부 기독교 문화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문화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 중심의 문화이고 이 하나님의 특성은 그리스도의 역사 속에, 특히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계시되어 있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신이시다. 따라서 율법주의적인 종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성경과 십자가에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참으로 섬기는 문화이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알고 그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문화이다. 온갖 잡신들을 찬양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생명의 주이심을 고백하는 문화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4. 인간의 행복만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문화
인간이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 하나님도 인간의 행복을 바라시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세계를 인간에게 약속하셨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이 빠지고 인간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전도된 인간세계의 문화이다. 이런 문화는 종국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고 결국 인간 자신에게도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문화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는 문화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열려 있는 문화이다. 인간끼리만 사랑하는 문화가 아니고 인간을 사랑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올리는 문화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주일과 예배를 존중히 여기는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인간의 삶과 행복이 하나님께 그 기원과 목표가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문화이다.
Ⅱ.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바탕을 둔 문화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억압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고대의 노예제도와 중세의 농노제도 및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을 기계화 혹은 상품화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제도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도 아니다. 인간은 땅 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니고 있다.
신약성경의 정의론은 죄인이나 무가치한 사람의 인권의 근거이다. 나이가 70이 넘었다고 고려장하는 풍습은 무가치한 자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정신에 정면 충돌된다. 노동력이 없는 노인이나 병자나 죄 많은 죄인까지도 인권은 보장되어야 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인정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인권을 억압하고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자유의 신이시고 해방의 신이시다. 구약의 출애굽 사건은 인권이 짓밟히고 애굽 왕의 불의한 채찍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권을 들려주고 자유를 들려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기술한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권의 근거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문화도 인간의 존엄성에 그 바탕을 둘 수밖에 없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자유의 축제가 거행되는 나라이다. 미니스커트를 입으면 안 된다, 극장에 가서는 안 된다는 식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여성들에게 억압적인 굴레를 씌우는 것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의 많은 종교 속에 억압의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억압은 사단의 힘이고 하나님 나라에 적대하는 힘이다. 자유가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창조적인 힘이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 창조적 자유가 있는 곳에 문화와 학문과 역사의 발전이 있다는 것도 유념해야 한다.
공산주의 사회가 실패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사회가 통제 사회라는 데 있다. 즉 인간의 자유가 상당히 깊은 곳에 이르기까지 침해됨으로 말미암아 자발성과 창의력이 말살되었고 그 결과 문화와 학문과 기술의 발전이 둔화하였고 걸국 실패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억압과 통제의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가 물결치는 나라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인간의 창조적 자유에 그 바탕을 두고 있고, 또한 인간의 이 창조적 자유를 통해 하나님은 그의 나라를 성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라는 말은 인간의 방종까지도 긍정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방종이 만드는 문화는 자유를 변질시키는 사단의 문화이다.
한 사람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서 만들어지는 문화는 참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이런 문화의 극단적인 형태는 독재체제에서 볼 수 있는 일인 지배의 문화이다. 일인 지배 앞에서 충성을 강요하는 과거의 왕정 문화나 오늘의 일인 독재체제의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
Ⅲ. 생명 존중의 문화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신학자 몰트만(J. Moltmann)은 성령을 생명의 영으로 정의했다. 성령은 사람을 비롯하여 만물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살리는 영이라는 말이다. 성령이 생명을 유지시키고 살리는 생명의 영이라면 생명을 존중하는 문화가 성령의 뜻에 상응하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아프리카의 성자 슈바이처(A. Schweitzer)가 생명 앞에서의 경외를 언급했는데 이 슈바이처의 사상은 오늘날 대단히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표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마귀는 분열과 싸움과 전쟁과 살인의 영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 의하면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다. 이데올로기나 민족주의를 앞세워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전쟁을 선동하는 선동 속에는 마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성령은 용서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갈 5:22), 하나 되게 하고(엡 4:3), 평화를 유지시키고(갈 5:22), 사람의 생명을 살리려고 하는 생명의 영이다. 따라서 하나 되게 하고 사랑을 가르치는 문화가, 살인을 선동하는 것이 아닌 용서하게 하고 사람의 생명의 존귀함을 가르치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종교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사람을 죽이는 것을 선동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적이다. 또한 자살을 찬양하는 소설이나 영화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적이다. 자살과 죽음을 찬양하는 그 어둡고 침침한 곳에는 살인의 영인 마귀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사람의 생명만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창조 세계 전체의 생명을 존귀히 여기고 보전하는 문화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인권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자연의 권리를 인정하고 동물의 권리도 인정하는 문화이다.
Ⅳ. 진리와 진실, 정직이 지배하는 문화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네 번째 중요한 특징은 진리와 진실, 정직이 지배하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라는 점이다. 성경에 의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이고 마귀는 거짓말하는 영이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혀를 미워하신다.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며, 너희 눈으로 찾아 보아라. 장마당마다 찾아 다녀 보아라. 바르게 살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으면 나는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렘 5:1).
“한번 혀를 놀렸다 하면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구나. 신실은 스러지고 거짓만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내 속 생각을 모르고 못된 일만 골라서 하는 세상이 되었다. 야훼의 말이다”(렘 9:2).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는 공동체의 특징은 진리와 진실, 정직이 없어지고 불의와 거짓과 속이는 혀가 판을 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는 것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렘 9:4)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와 진실, 정직이 지배하는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는 교육은 진리와 정직의 승리를 가르치는 교육이다. 거짓말의 궁극적 패배와 악한 혀의 실패를 가르치는 교육이 하나님 나라의 교육이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시 7:14~16).
하나님은 남을 속이기 위해 만든 함정을 미워하시고 그곳에 그 함정을 만든 자를 매장시키시는, 진리와 정직을 이 땅 위에 세우는 신이시다.
하나님 나라는 진리와 진실, 정직이 지배하는 곳이므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선한 활동들은 보호되고 장려되어야 한다. 특히 학문의 영역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선한 활동들은 보호되고 장려되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을 억압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경우에 하나님 나라의 운동에 역행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유념해야 한다.
과거 로마 교황청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악마의 교설로 보고 갈릴레오를 지하 감옥에 처넣은 역사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역행하는 행위였다. 기존하는 기독교가 행하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 하나님 나라 운동에 상응하는 일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다.
무신론자의 사상 속에 진리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진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녀야 한다. 무신론 그 자체는 비진리이지만 무신론자의 가르침 속에도 많은 진리가 존재한다. 오늘의 창조론과 진화론의 논쟁 속에서도 이와 같은 경우를 자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진리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귀중히 여기는 문화이다. 그것이 비록 무신론자에 의해 주장되었다 할지라도 진리는 귀중한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Ⅴ. 삶에 기쁨과 의미를 주는 문화
1. 무의미와 싸우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틸리히(P. Tillich)에 의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근거이고 모든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의 용기를 부여하는 분이시다. 존재의 의미를 상실케 하고 존재의 용기를 파괴시키는 것은 사단적인 힘이다. 화이트헤드(A. N, Whitehead)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쾌락과 즐거움의 원천이다. 쾌락과 즐거움의 증가는 신적인 세계의 성장에 상응하는 표상들이다.
우리는 틸리히와 화이트헤드라는 두 명의 20세기의 위대한 사상적 거장들의 정신 속에서 하나님은 삶에 의미와 기쁨을 부여하는 근원이 되는 분이라는 중요한 사상을 도출할 수 있다.
인생의 한계를 가르치는 소설이나 철학도 그 자체로는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인생의 진리의 일면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끝나고 인간을 무의미와 절망의 나락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은 어둡고 침침한 문화, 곧 사단적인 문화이다.
바르트(K. Barth)에 의하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은 부정(Nein)이 아니고 긍정(Ja)이다. 절망이 아니고 희망이며 비관이 아니고 낙관이다. 희망과 긍정이 인간과 세계의 본질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어둡고 침침한 세계, 곧 인간과 세계의 좌절과 절망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극복되었고 인간과 세계의 미래는 긍정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과 세계의 참된 본질은 희망과 낙관이고 용기이며 기쁨이다. 이런 까닭으로 무의미와 싸우는 문화가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2. 삶에 기쁨을 주고 삶의 깊이와 풍요를 더하게 하는 음악, 미술, 무용, 문학 및 예술 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상징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슬픔과 분노와 눈물의 세계가 아니고 노래와 기쁨과 풍요를 찬양하는 세계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영광이 울려 퍼지는 세계인 동시에 인간의 삶에 대한 기쁨과 희열이 분출되는 세계이다. 이 하나님 나라에 상응하는 인간의 활동은 기쁨과 감사의 표현으로 형상화될 수 있다.
이 기쁨과 감사의 표현은 음악, 미술, 무용, 문학 및 예술 세계 속에서 그 절정을 찾을 수 있다. 삶에 기쁨을 주고 삶의 깊이와 풍요를 더하게 하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하나님의 영광이 그 근원을 이루고 있는 음악, 미술, 무용, 문학 및 모든 예술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상징들이고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3. 하나님 나라의 잔치와 포도주
포도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는 그리 부정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포도주에 대한 긍정적인 특징을 성경 속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성경에 의하면 포도주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복의 상징이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시 104:15).
이 시편 기자의 가르침에 의하면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주신 복의 상징이다. 이런 견해는 성경 도처에 나타난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음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네가 하는 일들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전 9:7).
“잔치는 희락을 위하여 베푸는 것이요 포도주는 생명을 기쁘게 하는 것이나 돈은 범사에 이용되느니라”(전 10:1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9~10)
이상의 언급들은 포도주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과 기쁨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잘 나타내준다.
포도주가 근본적으로 이런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식탁에도 포도주가 있었고, 예수님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었으며, 가나 혼인 잔치 때에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어서 잔치를 기쁘게 했다. 또한 최후의 만찬 때에는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너희를 위해 흘린 나의 피를 기억하라는 말씀을 남겼다. 더 나아가서 포도주는 하나님의 성에서 베풀어지는 구원과 축제의 상징으로 언급되고 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 25:6).
따라서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된 세계의 상징이다.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과 기쁨의 상징이라면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는 세계는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으로 성경에 언급되고 있다.
“기쁨과 환희가 옥토와 모압 땅에서 빼앗겼도다 내가 포도주 틀에 포도주가 끊어지게 하리니 외치며 밟는 자가 없을 것이라 그 외침은 즐거운 외침이 되지 못하리로다”(렘 48:33).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노래하면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라 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사 24:8~11).
포도주와 수금과 비파와 노래가 없어지는 것은 성경에 언급된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다.
포도주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복의 상징인 것은 틀림없지만, 우리는 성경 안에 존재하는 포도주의 오용에 대한 심각한 경고 역시 깊이 유념해야 한다.
“재앙이 뉘게 있느뇨 근심이 뉘게 있느뇨 분쟁이 뉘게 있느뇨 원망이 뉘게 있느뇨 까닭 없는 상처가 뉘게 있느뇨 붉은 눈이 뉘게 있느뇨 술에 잠긴 자에게 있고 혼합한 술을 구하러 다니는 자에게 있느니라 포도주는 붉고 잔에서 번쩍이며 순하게 내려가나니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그것이 마침내 뱀 같이 물 것이요 독사 같이 쏠 것이며 또 네 눈에는 괴이한 것이 보일 것이요 네 마음은 구부러진 말을 할 것이며 너는 바다 가운데에 누운 자 같을 것이요 돛대 위에 누운 자 같을 것이며 네가 스스로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때려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고 나를 상하게 하여도 내게 감각이 없도다 내가 언제나 깰까 다시 술을 찾겠다 하리라”(잠 23:29~35).
성경 속에는 포도주의 오용에 대한 깊은 우려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포도주는 분쟁과 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고 왕이나 제사장이 이에 취해 있을 때는 하나님의 뜻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공의를 굽게 할 심각한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고 왕들에게 마땅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들에게 마땅하지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곤고한 자들의 송사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잠 31:4~5).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사 5:11~12).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인생을 기쁘게 하기 위해 주신 은총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조금만 변질되면 수많은 악과 재앙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이런 관점에서 “술 취하지 말 것”(엡 5:18)을 경고하고 있고, 이는 “방탕한 것”(엡 5:18)으로 정의하고 있다.
포도주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잔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온갖 죄악과 분쟁과 방탕의 원인이기도 하다. 성경 속에는 이 두 가지 차원이 공존하고 있다.
그러면 한국의 음주문화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추정컨대 오늘날 한국의 음주문화는 유감스럽게도 후자에 상당히 가까운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음주문화는 시급히 변혁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음주문화의 변혁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 죄악과 분쟁과 방탕의 온상인 음주문화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과 인생의 기쁨과 참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문화로 변혁시켜야 한다.
Ⅵ. 사랑과 코이노니아 중심의 문화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사랑과 사귐, 코이노니아가 그 중심에 있는 문화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시고(요일 4:8), 성령이 활동하고 있는 세계는 사랑이라는 열매(갈 5:22)가 맺혀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사랑과 코이노니아 중심의 문화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다음의 몇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1. 남녀 간의 사랑은 하나님의 창조의 절정이다. 따라서 남녀 간의 사랑은 존중되어야 하지 억압되어서는 안 된다. 남녀 간의 사랑을 억압하는 종교와 관습, 이데올로기 및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와의 사랑의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는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창세기의 아담의 고백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절정인 동시에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 속에 투영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와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의 유비이고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의 사랑의 관계의 유비이다.
2. 지배와 복종의 문화는 사랑과 나눔의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억압과 지배의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계급사회의 문화나 여성 차별의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돈으로 사람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잘못된 문화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사랑의 자발성에 기초한 형제자매 간의 사귐과 나눔의 문화이다.
3. 개인이나 가정, 집단의 이기주의는 하나님 나라의 적이다. 이기주의의 결과는 공동체의 파괴로 나타난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존재인 동시에 이웃을 위한 존재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규정성에 상응하는 사상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문화의 과제이다.
이웃 사랑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섬김과 봉사의 욕망으로 바꾼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또한 이웃 사랑을 위한 절제와 고난을 귀한 가치로 인정하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4. 곤경 속에 있는 이웃,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랑을 공동체의 우선적인 과제로 인식하고 있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가난한 이웃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독특한 특징이 있는 문화이다.
5. 그리스도 안에는 민족이나 지역이나 피부색의 차이가 없이 모두 한 형제자매라는 정신이 구현된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인종 차별이 엄존하고 흑인학교와 백인학교가 구별되어 있는 곳은 아직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숨 쉬고 있는 곳이 아니다. 흑인 아이와 백인 아이가 푸른 언덕 위에서 함께 사랑하고 뛰노는 그곳이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숨 쉬고 있는 곳이다.
Ⅶ. 하나님 나라에 궁극적 목표와 소망을 두는 문화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이 세상 속에 모든 목표와 소망을 두고 있는, 즉 이 세상 속으로 폐쇄화 된 문화가 아니다. 이렇게 폐쇄화 된 문화는 죽음 앞에서 좌절하게 되고 염세적인 특징을 강하게 나타내고,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행복과 쾌락을 지향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된다. 이런 미래를 향해 폐쇄된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이 세계가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종국적 목표와 소망을 두고 있는 문화이다.
1. 죽음 너머의 소망을 가르치는 문화가 하나님 나라의 문화이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죽음 너머의 소망으로 가득 차 있는 문화이다. 죽음과 관련된 한국의 전통적 문화는 대단히 차안적인 욕망과 차안적인 성취에 집착하고 있고 죽음 너머의 소망의 차원은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다.
예컨대 전통적 한국인의 관념에 의하면 죽은 자의 영혼은 저승이라는 어느 곳에 모여 있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지상에서 원한을 남긴 영혼은 그곳에서도 편히 쉬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원한이 많은 영혼을 그곳으로 가지 못하고 지상에 떠돌며 그 원한을 해결하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 아버지의 원한을 갚으면 그때 비로소 그 영혼은 쉴 곳에서 편히 쉴 수 있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현세 기복적인 한국인의 문화는 이 세상에서의 차안적인 욕망의 성취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을 때는 떠도는 영혼을 달래는 굿이나 기타 종교적 예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차안적인 욕망과 차안적인 성취에 집착하는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이 세상에서 이웃을 위해 가난해진 자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된다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종국적 목표와 소망을 두고 있는 문화이다. 이 문화는 오늘의 세계를 내일의 세계의 빛 속에서 보는 문화인데 이 세계 속에 폐쇄화 된 문화가 아닌 내일을 향해 열려져 있는 문화이다.
2. 탈세상적인 것이 아닌, 세상과 역사를 사랑하고 개혁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의 문화이다.
불교문화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탈세상적인 것이다. 불교가 세속적인 집착과 욕심을 버리도록 가르친 것은 매우 훌륭한 가르침이나 그 가르침의 배경이 되는 탈세상적인 사고는 불교 정신의 심각한 약점이다.
그리스도교가 죽음 너머의 소망을 가르친다고 해서 탈세상적인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 너머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위에 건설되어야 할 세계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건설되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고는 세상과 역사에 대한 책임성을 본질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정신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사상은 현존하는 세상과 역사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세상과 역사는 하나님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는 개혁되어야 할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에 종국적 목표와 소망을 두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현존하는 세상과 역사를 변혁시키고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형성시키고자 하는 문화의 변혁적 동인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탈세상적인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서 세상을 바꾸고 새롭게 하는 새로운 창조적 문화의 동인이다.
결언
무엇이 참된 기독교 문화, 즉 하나님 나라의 문화인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 문화의 일곱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밝혔다. 이상의 일곱 가지 문화의 특징을 다시 요약하면,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위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화이고, 옆으로는 이웃을 인정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문화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무신적인 문화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고, 이웃을 인정하지 않고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지배나 우월성에 바탕을 둔 문화도 하나님 나라의 문화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는 인간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문화인데, 인간의 존엄성과 하나님의 영광에 그 초점이 있는 문화이다. 그리고 이 문화는 세상을 긍정적인 빛으로 보는 문화이고 미래와 하나님 나라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고 있는 문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