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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알아보 기☜ 스크랩 지리산 이야기 - 일흔 셋. ( 화개재. 화개골. 화개장터. 봉산탈춤
이제학(백두) 추천 0 조회 77 12.09.12 16: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리산 이야기 - 일흔 셋. ( 화개재. 화개골. 화개장터. 봉산탈춤. )

 


화개재.



.................................................~~연하천 산장..............↗
..........................................↖...... 총각샘~~............빗점골
.........달궁...............................↖.*토끼봉...~~..
....................................운봉.......화개재.................↘
반선.~~~~.~~~~~~~뱀사골*산장~~~ 목통골.......*화개골 (남난희)~~~
↖...........................................삼도봉.......불무장등................................. 화개장터...섬진강
...↖............반야봉.................노루목..↘...칠불사..불일폭포..쌍계사...
......↖...................................임걸령 샘터~목통(연동)골~*피아골 산장....연곡사...........
........↖...............................돼지령.
.............심원계곡..............노고단 산장....왕시리봉.........문수골


화개재는 삼도봉과 토끼봉 사이 잘록한 고개마루.
지리산 주릉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花開재(1320m).
화개(花開)재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꽃피는 고개마루.'

'화개장터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까닭은..?'

화개장터 상인들이 뱀사골 따라 넘나들기에 화개재.
화개장터 소금가마니 해산물이 남원으로 가던 화개재.
화개재는 옛부터 화개장터와 그만큼 밀접한 고개 마루.

화개재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은.. 목통마을.
뱀사골 산장의 물품은 목통마을 사람들이 운반을 한다.
그 운반 품삯은 목통마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수입원.

뱀사골 입구 반선에서 화개재는 12km
목통마을에서 화개재까지는 짧은 거리.

목통계곡의 옛 지명은 연동골이라고 불리웠다.
6.25 이전 존재했던 연동마을에서 비롯된 지명.
연동마을 옛터는 목통마을에서 4km 지점에 있다.

즉, 화개장터에서 화개재에 이르는 길에는
10리 마다 마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목통마을은 행정구역으로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이 마을에는 으름을 비롯한 식물의 열매가 지천.
으름은 한약재 자료로 쓰이며 목통이라고 부른다.

'하여, 목통은 으름에서 비롯된 지명

행정 지명으로 목통이라 부르기 시작.
옛부터 물레방아가 있었다는 목통마을.
화개장터보다 먼저 전기를 사용했다 한다.

당재 넘어 피아골 연곡사 아래마을 사람들까지
목통마을 물레방아에서 전기를 끌어갔다고 한다.

이 마을은 고로쇠 약수철이 되면 한 몫 단단히 한다.
범왕리 지구는 현재 지리산 국립공원 밖으로 되어있다.

지금은 칠불사 아래 마을이 범왕리 이지만
예전에는 목통마을이 칠불암 사하(寺下) 마을

칠불암에서 1km 아래 약간의 공터가 있고
남쪽 전주 있는 곳에 옛 칠불암 오르는 길.
칠불암은 6.25때 불탄 후 30년 간 버려졌다.
지금은 버스도 오르기 쉬운 곳으로 바뀌었다.

하동 화개골 목통마을은 새 교량도 설치되어 있고
주차장도 마련이 되어있고 민박집도 들어 서 있다.

목통마을은 소금장수가 뱀사골 넘기 위해 짐을 추스리던 마을
여기서 4km 안쪽 연동마을이 있어 목통계곡을 연동골이라 한다.

목통마을에서 계곡 오른쪽 난 산길을 따라 가면.
칠불암 스님들이 내려와 목욕하고 갔다는 스님소

하동에서 범왕리 가는 버스 13:00, 18:10 하루 두 차례 운행.
목통마을 물레방아 산장 (약초막걸리,메기 매운탕, 산채정식)

.................................................................
.................................................................

화개재는 지리산 능선에서 장터목 다음으로 유서 깊은 고개마루.
주능선에서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 '운봉 무더미' 설화 알려진 곳.

조상 3 대가 소금장수 운봉사람

일흔 살에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운봉으로 가다가 화개재에서 지쳐
소금을 진 채 쓰러져 죽었디는 전설.

그 손자가 할아버지를 그곳에 묻고
정성을 다해 큰 묘를 만들었다 한다.
화개재 언저리에 그 소금장수의 무덤

'그 무덤이 바로 운봉무더미.'

.................이 설화에 숨은 중요한 사실 3가지....................
1. 화개재는 운봉과 신흥을 이어주는 최단 고갯마루 지름길
2. <해안지방 소금 수산물>과 <내륙지방 삼베 농산물> 수송로.
3. 지리산 허리를 가로 지르는 특산품 물물교환 통로라는 점.
......................................................................

목통마을에서 출발해 목통골을 거쳐 화개재로 가는 길.
역시 오랜 도로 기능의 역사 덕분에 등산로가 잘 열린 듯.
수려한 경관 배경의 칠불사 아래의 첫 마을로 사하촌(寺下村).

현재 목통마을은 10여 가구 작은 마을이지만 개발 붐의 조짐.
지금은 승용차가 쉽게 오를 수 있어 물밀듯이 들어오는 관광객.
그런 가운데서도 마을앞 계곡에는 옛 분위기 물씬 풍기는 물레방아.

산 너머 직전마을로 가는 좁다란 길 이어주는 돌다리.

목통마을을 출발해 30여분 가량 오르면
연동골의 으뜸 명소인 스님소가 나온다.
그곳은 칠불사 스님들이 세속을 씻는 옥류.
계곡따라 한참 가면 잡목지대로 변한 마을터.

196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던 연동마을 터였다.
1967년 여름 폐쇄(서해안 무장공비 9명 사살된 곳).

연동마을 터를 지나 30여분 가량 지나면
화개재까지 급경사 오르막 2시간 반 코스
하산은 토끼봉∼칠불사, 또는 뱀사골∼반선

하동에서 짧은 시간에 반야봉을 올랐다가
내려올만한 등산로로 적당한, 연동골 코스

............................................................
.............................................................         

운봉 무더미' 설화는 조상 3 대가 소금장수였다는 대목.
화개재에서 소금을 진채 70 나이에 쓰러져 죽었다는 대목

우리나라에서는 소금장수의 정력이 왕성하다는 속설이 있다.
성주단지 소금을 먹고 치성드리면 자식을 낳는다는 민속신앙.
한반도에서는 옛날부터 소금은 생명력의 상징이라고 믿어왔다.

'70 나이에 소금가마를 지고 지리산을 넘었다면 대단한 힘.'

소금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힘이 좋아야 화개재를 넘었을 듯.
3대를 소금장수 했다면, 분업화된 교역 물량이 많았다는 증거.
이는 화개재가 단순한 물물교환의 통로가 아닌 것을 의미한다.

지리산은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상인들의 상품 운반로였던 셈.
가락국은 거상으로 뭉친 나라이자 무역으로 부를 이룬.. 해상왕국.
백제와 신라의 틈바구니에 끼여 쫓기면서도 지리산을 움켜쥔 이유.

가락국은 영토보다는 상권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 나라인 듯 싶다.
지리산의 지명 곳곳마다 가락국이 애착을 갖었던 흔적들이 역력하다.
가락국은 영토를 신라에게 넘겨줄 망정 상권은 움켜 쥐었던 것 같다.

가락국은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중국 인도와 국제 교역 국가.
지리산의 지름길은 운반비를 줄여준 만큼 이익을 안겨준 셈.
가락국은 화개재를 넘나드는 등짐 주민들에게 운반비를 지불.

예를 든다면, 소금 한가마니 운반하는데 몇 푼이란.. '공식 가격'.
그래서, 운봉 노인은 소금을 진채 쓰러져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산 지름길에서 소금 운반하는 일만, 조상 대대로 했던 것 같다.

지리산에서 벗어난 상거래는 가락국의 거상들이 했던 것으로 추정.
약속시간 내에 정해진 장소까지 소금을 운반해야 다음 거래가 성립.
정해진 시간에 쫓긴 소금장수는 쓰러져 죽는 경우가 많았던 듯 싶다.

조상 대대로 소금장수를 했다면, 강제성은 거의 없던 것으로 보인다.
운봉 노인은 소금장수의 십장이나 품팔이들의 우두머리였던 것 같다.
거상들은 상품 운반로를 중간 중간 끊어 '상거래 루트'를 숨긴 것 같다.
지리산의 지름길은 '상거리 루트'를 숨기기에도 가장 적합한 곳이란 셈.

그렇다면, 지리산의 지름길은 단순 물물교환 장소가 아니다.
화개재는 가락국 이전부터 상품 운반로 임을 알 수 있는 대목.

'화개재 역사는 2 천년 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마한왕조가 달궁에 쫓겨 들어온 시기는
기원 전 84년이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당시 마한왕조는 중국과 무역 및 교역을 했다는 기록.
가락국이 마한을 공격한 이유는 그 상권을 장악할 목적.
가락국은 마한왕조 멸망 후 동아시아 해상왕국이 되었다.

운봉 무더미'의 설화는 그 숨겨진 역사를 풀..'열쇄'
보잘 것 없는 설화에도 귀한 역사자료가 있다는 교훈.

화개재에 <뱀사골 입구>라고 잘못 표기된 간판
그 때문에 화개재에 얽힌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
<뱀사골로 내려가는 길>이란 표기가 옳을 것 같다.

주능선 상에 <뱀사골 입구>란 표현
국문법 상으로도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아래처럼 안내판 표기를 바꾸면 어떨까?

<화개재 : 뱀사골로 내려가는 길> .




화개골.



지리산의 골짜기 중 가장 풍성한 볼거리와 먹거리
가장 소중한 유적지와 그에 따른 배경무대 화개골.
사시사철 늘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화개동천의 풍경.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이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른 봄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하는 화개 10리 벚꽃길
일제 때부터 내려온 고목의 벚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곳.
김동리 소설 <역마> 및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 주무대

화개장터는 그 옛날 우리나라 5대 장터 중의 하나였다.
해안지방 해산물과 내륙 산나물, 약초를 거래한 5일장
지금은 그 명맥만 유지하며 향수를 달래주는 화개장터.

화개골의 또 다른 진면목은 수많은 불교 유적들이다.
이조시대까지만해도 이 계곡 안에는 100 여 절과 암자
당대의 고승들과 유학자들의 발길을 끊이지 않던 곳이다.

화개골의 사찰은 신라시대 최치원, 이조시대 서산대사
가락국 일곱왕자 성불에 얽힌 사연을 전해주기도 한다.

화개골에 사찰이 많았음을 보여 주는.. 탑리 마을
화개장터 건너편 3층 석탑 역시 그 사실을 뒷받침.
가락국과 신라의 융성했던 불교문화를 알수 있는 곳.

'한반도 범패음곡 불교음악의 원류였던 화개골.'

삼남 땅을 감싸는 큰 지붕은 곧 지리산이다.
어머니 젖가슴처럼 풍요로운 삼남 곡창지대
하동군 악양면은 박경리 소설 토지 배경무대

하동군 옥종면은 고려시대 명문 귀족들 배출지
남부군 이현상 부대의 최후 보루 보급투쟁 지역.
화개골 칠불사 연못 위쪽 옥보고 운상원(雲上院)

'구름 위 다락에서 뜯는 거문고 천상의 음률.'

화개면 정금리에는 '걸어 나오는 산'의 전설
화개동천 두 개울이 감싸듯 품은 화개골 쌍계사
화개골의 불교는 한반도 차문화와도 무관하지 않다.

삼국 사기에 따르면 흥덕왕 3년(828) 김대렴(金大廉)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차 종자를 가지고 귀국한 후.
그것을 지리산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차의 유래라는 설.

아울러 차는 선덕 여왕때부터 번성했다고 기록도 있다.
김대렴이 차를 처음 심은 곳은 쌍계사 근처의 화개골 부근.
화개일대 차밭으로 미루어 화개골이 시배지라는 시각이 지배적

'화개골 쌍계사 앞에는 줄줄이 전통 찻집의 거리.'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벗꽃이 아름다운 거리.
'사랑이 꽃피는 거리'라 하여 혼례길이라 불리운다.
화개골은 여성 산악인 남난희가 자연에 묻혀 사는 곳.

'백두대간 최초 단독 종주 기록 보유자..남난희'

'자연스럽게, 자연처럼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지만 현실로 적응하긴 어렵다.
화개골은 이름 그대로 '꽃피는 고을이고 골짜기'이다.

겨울 눈꽃이 지면 하얀 매화 꽃동산에 이어 벚꽃길.
이에 질세라 눈부시게 하얀 배꽃이 섬진강을 덮는다.
한창 찻잎을 따낼 무렵 진달래꽃이 화개골을 물들인다.

하동읍에서 19번 국도따라 가다 살짝 옆으로 비껴든다.
대나무 우거진 좁은 길을 지나면, 삼신봉을 마주한 흙집
학교종이 매달린 문간방을 지나 오붓한 마당에 들어서면,

'탁트인 남향집 대청에 앉아 차를 권하는.. 남난희.'

76일간 처녀의 몸으로 백두대간 단독 종주,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최초로 오른 여성 산악인.
그녀를 말할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들이다.

"산 속으로 들어서면 산을 볼 수 없다.
그 동안 산에 오르기는 했으나
산을 볼 줄 몰랐다.

산 아래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제야 산이 보인다.
이제는 오르지 않아도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다.
그 동안의 산은 나를 알피니스트로 선택했지만,
그 이후의 산은 나를 생활인으로 선택해 주었다.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남난희

- 낮은 산이 낫다 -




화개장터.



♬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말 하동사람 윗말 구례사람
닷새마다 어우러져 장을 펼치네~

구경 한번 와보세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조용남이 부른 구수하고 정겨운 노래
그 무대가 되는 곳이 하동의 화개장터.

하동군 화개면 탑리의 섬진강과 화개천이 만나는 곳
해방전까지만해도 우리나라 5대 장터 중 하나였던 곳.

전남 구례와 하동의 경계를 이루는 곳
인근의 광양, 순천, 여수, 사천, 남해
등지의 보부상들이 배타고 몰려왔던 곳.

'한마디로 영호남 화합의 장터였던 곳.'

김동리의 소설 [역마]의 무대가 되었던 곳,
장터에는 조용남의 화개장터 노래비도 있다.
장날인 1일과 6일은 시끌벅적 시골장터 모습

1919년 4월 이강률, 임만규, 이정수 선생 등의 주도로
3.1만세운동이 전개된 장소라 '화개장터 3.1운동 기념비'


[주변 볼거리]

남도대교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와
전남 구례군 간전면 운천리
두곳을 연결하는 닐센아치교

2000년 6월 착공되어 2003년 7월에 준공
화개장터와 쌍계사 중간지점 자리한 온천.
화개약수 주변에 개발된 게르마늄온천이다.

[맛있는집]

청림식당

화개버스 정류소 앞의 화개천변에 자리한 식당.
섬진강의 명물인 제첩정식과 제첩회가 유명하다.


[추천숙소]

섬진강펜션

화개면 부춘리에 자리한 펜션이다.
커플룸(7,8평형), 패밀리룸(10,15평형),
43평형 대형객실 등 7실의 객실을 보유.
야외 숯불구이 바비큐그릴 참숯 유료 대여

~~~~~~~~~~.~~~~.~~~~~~.뱀사골....산장...................↘
........↖.............실상사............삼도봉.......불무장등....화개골(남난희)... *화개장터...*섬진강
...........↖............반야봉.........노루목..... .칠불사.....(무학대사)...*불일폭포..*쌍계사...
..............↖...달궁.....목통골..임걸령 샘터..........피아골 산장....연곡사...........
.................↖.....................돼지령.
.................심원계곡.........노고단 산장....왕시리봉.........문수골
.......................↖............성삼재
............................←.....차일봉................화엄사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 우리나라의 옛 5대 장터.
우리나라 최초의 장터이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장터.
노량에서 출발한 장사 배가 섬진강 따라 모여들던 장터.

'지금은 옛 영화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시골장터.'

지리산 화개재를 넘어 남원 함양 특산물이 그곳에 모이고,
돌고지재를 넘어 등짐으로 덕산 장사꾼들이 모이던 화개장터.
해산물 ,농산물, 지리산 특산물이 모여 없는 것이 없던 화개장터.

조영남 노랫말 대로 있을 것 다 있고 없을 것은 없던 화개장터였다.
지금은 교통의 발달로 시장기능이 떨어져 겨우 명맥 유지하는 수준.
화개장터는 지리산의 큰 물줄기 대성골 물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지점.
지형상 삼도봉에서 불무장등을 거쳐 쌍계사 화개장터 흘러내려 섬진강.

......................화개장터가 형성 된 배경...............................
수박 내음 은빛 은어, 재첩 따는 여인들, 전라도 경상도 사람들
한쪽은 지리산, 반대쪽은 백운산, 임실까진 물이 얕아 징검다리
곡성부터 남해 앞까지는 강물이 깊어 마을마다 나루터가 많았다.

섬진강은 남해에서 큰 배로 올라오던 소금이나 젖갈, 건어물 등등
수심 낮은 하동에서 멈췄고 지리산 약초는 하동까지 가기엔 멀었다.
따라서, 섬진강의 상,하류가 만나는 화개에 장터가 들어서게 되었다.

옛날에 화개 장날엔 수십척의 크고 작은 배가 몰려 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화개에는 작은 줄배와 재첩 잡는 조각배만 한가롭다.
아직도 맑은 물에서 사는 은어와 재첩이 있는 섬진강은 그대로이다.
섬진강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옛모습도 바라볼 수 있다.
....................................................................................................

화개장터는 지리산 자락 선조들의 삶의 애환 깃들어 있는 곳.
지리산의 유래 및 전설은 이곳 장터를 통해 널리 퍼져 나간 듯.

지리산 맑은 물이 흘러내려 섬진강과 만나는 곳에 자리한 화개마을.
경남과 전남을 이어주는 화개장터는 해방전까지 우리나라 5 대 장터.
전국의 어느 시장보다 인파가 붐볐고 규모가 컸던 5일장..'화개장터.'

......................화개장터가 융성하게 된 배경.........................
지리산 화전민들은 고사리, 더덕, 감자 등을 가지고 와서 팔았고,
전남 구례, 경남 함양, 내륙지방 사람들은 쌀보리를 가져와 팔았다.

전국을 떠돌던 보부상들은 이 장을 놓칠새라 생활용품을 가지고 왔고
여수 광양 남해 삼천포 충무 거제에서는 뱃길을 이용 미역 청각, 고등어
수산물을 가득 싣고와 이곳에서 팔았던 가락국부터의 유서깊은 장터였다.

'해상왕국' 가락국은 일본의 원자재와 당나라의 상품을 교역하던 무역국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오가며 교역이 생계수단인, 9개 부족들 공동체 '가락국'

신라의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이루며 쌍계사 화개장터 는 더 활기를 띄게된다.
화계장터는 한반도의 유서 깊은 장터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교역 중심 상권.
그 뿐 아니라 화계장터는 인류 역사 상 유서깊은 해상무역 상권 중 한 곳이다.

기원전 230년 진시황이 지리산에 불로초를 캐러 보냈던 서불 일행의 항로.
진나라 - 제주 - 여수 -섬진강 -구례 - 지리산 -섬진강- 통영 - 여수 -일본.
구례읍 서시천, 여수시 연도와 통영시 소매물도, 일본 와까야마에 남긴 흔적.

17세기 제주에 표류한 화란인 하멜이 이조 억류 후 일본행 탈출 항로와 유사.
서불 일행의 한반도 여수와 일본을 잇는 항로는 오늘날까지도 최단거리 코스.
2236년 전부터 서불 일행은 그 항로를 알고 있었고 화개장터도 거쳐 갔을 듯.

기원 전 그리스에서 사용한 마약제는 1세기부터 12세기까지 <소아시아 산물>.
서기 5백년 이전부터 신라는 아랍지역에 사향을 수출했다는 역사 기록이 있다.
그것은 신라에 합병된 금관가야가 나라 형태를 갖추기 전부터의 무역 역사이다.

김해 김씨 계보를 찾아보면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의 탄생신화가 적혀있다.
가야국을 다스린 9개 부족 대표들은 김수로왕의 외모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 실화와 같이 상세하게 적혀있는 김수로왕 외모로는 아랍인.
금관가야에서 가야는 원래 석가모니가 탄생한 불교국가에서 본딴 나라 이름이다.

가야는 불교 종주국이였지만 지금 국민의 0.8% 불교신자를 갖고 있는 회교국.
가야국은 회교권 아랍지역의 종교전쟁에 의해 불교왕조로서 박해 받았던 나라.
아랍인인 그들은 회교국가들 간의 전쟁을 피해 배 타고 한반도로 민족이동한 듯.

진나라 한나라 혼란기에도 배를 타고 한반도로 민족이동을 했다는 역사 기록.
한반도로 이주한 그들은 중국 일본 아랍 인도 그리스를 오가며 국제무역을 한듯.
여기까지는 국가 형태를 갖추기 이전까지 가야 부족들이 해상무역을 했던 발자취.
금관가야가 해상왕국일때 거래국은 일본 당나라 진나라 인도 등등으로 알려졌다.

금관가야 교역상품은 금불상 무기 농기구 장식품 옥구슬 사향 약재 산삼.
금관가야 상권은 신라에 이어져 당나라에서 귀국한 장보고에게 넘어간다.
따라서, 한반도의 화개장터는 해상왕국의 상권 중심이므로 역사 깊은 장터.
...........................................................................................................

화개장터가 언제 형성된 장터였는지 역사기록이 없어 잘 모르겠다.
그러나, 화개장터는 해상무역과 육상무역 상권이 만나는 중요한 장터.
아울러, 지리산 고찰의 스님들이 당나라의 불교 문명을 접할 수 있던 곳.
따라서, 화개장터는 한반도에서 가장 유서 깊은 장터로 알려졌던 것이다.

'화개장터는 언제부터 어떤 이유로 쇄퇴한걸까?'

................화개장터가 쇠퇴한 역사적 배경...................
화개장터는 삼국시대로부터 한반도의 중심 상권이었다.
해상왕국인 가락국이 그 상권의 보이지 않는 주역인 장터.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 때에도 상권이 활발했던 화개장터.

나당연합군에 패한 백제 잔여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곳에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대비.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한을 품고 재기를 기회를 노린다.

9세기 신라는 장보고에 힘입어 해상무역을 장악.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
서해 해상권을 장악하고 당, 일본과의 무역 독점

'동북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했던 장보고 살해.'

장보고의 해상왕국 잔여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신라에 구혼이 많은 세력도 백제 망명정부와 합류.'
신라는 동아시아 해상왕국으로서 면모를 잃어간다.

신라는 당나라와 , 유학생, 승려, 상인, 사신 왕래.
당나라와 신라 해상 무역 수출품은 인삼, 금은 세공품
신라가 당나라에서의 수입품은 비단, 책, 차 등등

신라 무역로는 당항성(울산)에서 산동 가는 길
전남 영암에서 중국 상하이로 가는 길 정도였다.
당항성 울산 국제무역항은 아라비아 상인도 왕래

신라 귀족 회의에서 이자겸을 배타한 진골 세력.
이자겸은 인천에서 자리잡고 당나라와 해상무역.
이자겸은 왕건과 힘을 합쳐 고려를 창건한 공신.

화개장터는 해상왕국의 상권 중심에서
고려 이조를 거치며 차츰 벗어나게 된다.

조선 선조 25 (1592.임진)년에 6년간의 ..<임진왜란>.
이 순신 장군은 물론 승병까지 일어나 나라를 구했지만
백제인이 일본의 주인이 되자 빼앗긴 영토를 찾으려는 전쟁.

일본이 나날이 국력을 키우는 동안 이조 국력은 쇠퇴한다.
동북아 해상 무역권도 일본으로 넘어가자 화개장터는 쇄퇴.

화개장터는 불교문화가 꽃핀 삼국시대가 전성기.

이조 초기까지도 화개장터는 융성했던 것 같다.
이조의 불교 박해로 화개장터는 점점 쇠퇴한다.
이조는 동남아 불교국가들로부터 차츰 고립된다.

이조 유교관이 융성할수록 화개장터 상권은 쇠퇴.
특히, 17 세기 <하멜의 표류기> 이후 더욱 더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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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하멜 표류기.......................
1653. 8. 16, 제주 차귀진 해안에 표류한 스페르웨르호
하멜 일행은 13년 28일간 이조에서 억류생활을 하게된다.
제주 서울 강진 남원 순천 여수를 전전하며 남긴 표류기.

하멜은 이조를 탈출한 후 <하멜의 표류기>를 작성.
이조는 하멜 표류기에 의해 서방에 알려지게 된다.

'드디어, 이조를 탈출하는 하멜 일행.'

여수 출발 6일 후 한반도 해안을 벗어나는데 성공한 그들은 항로를 잃는다.
제주도에 표류한지 13년 후였고 36명의 표류자 중 생존자 16명 중 탈출 8 명.
1666년 5월 하멜의 일행은 일본 나가사끼 항구에 인접한 보또 섬에 도착했다.

그때 상황을 동인도 회사 데지마 상관은 이렇게 보고했다.

"지난 3일 동안 이상한 차림의 유럽인 8명이 낯선 배를 타고
보또섬에 상륙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즉시 파견된 일본수군들
그들의 신병이 수군에 인수됐고 나가사끼로 오고있는 중이라 한다.
오늘 그들을 실은 배가 어제밤 나가사끼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멜 일행의 출현은 이조와 일본의 역사를 바꿔놓는 중대한 사건.

9월 14일 아침 탈출자 8명은 나가사끼에 상륙.
동인도 회사 직원들 환영아래 화란 옷도 받았다.
그날 정오 그들은 나가사끼 부교에 가 심문받았다.

"우리는 코리아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했습니다."
"너희들이 조선을 떠날 때 몇 명이 남아 있었느냐?"

"16명 중 8명 만 탈출, 남원과 순천에 아직 8명이 남아있습니다."
"너희들이 탈출한 곳은 조선의 어느 지방이냐?"

"전라도 라고 하는 지방입니다."
"그런데 왜 탈출했느냐?"

"그곳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습니다"
"이유가 뭐냐? 무슨 큰 죄라도 지었느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전라도! 하멜 일행이 억류기간 중 10년을 살았던 곳.
그곳에서 그들은 결혼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의 교류
조선의 풍습을 익히며 안정된 생활을 모색하는 듯 했다.
그러나, 1659년 4월 북벌의 상징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북벌 체계는 와해되었고 이조 조정은 서인과 남인의 권력투쟁

효종이 1649년 왕위에 올라서 1659년에 10년만에 승하.
남명정권도 끝나고 청나라 북벌보다는 방어태세에 급급.
효종의 승하후 현종 즉의 1년후 부터 3년 간 극심한 가뭄.
도처에서 산불과 식량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떼강도가 극성.

전염병까지 나돌아 수천명의 사람들이 죽어갔다.

"국왕은 길에서 죽은 사람들을 묻도록하고 매일 발생하는 살인과 강도를
막기 위해 길목마다 감시를 강화하는 엄한 명령을 내렸습니다.국민들은
목숨을 부지하기위해 도토리를 줍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야했고 심지어
잡풀까지 뜯어 먹어야 했습니다." - 하멜의 표류기 중에서 -

대 가뭄과 전염병을 이겨낸 하멜 일행 생존자는 33명 중 22명에 불과.
식량난에 22명도 식량 사정이 좋은 남원, 여수,순천으로 분산 배치됐다.

하멜은 전라 좌수영이 있던 여수로 배치됐다.
여수는 왜구의 배가 자주 출몰한 지역이었다.

전라 좌수영은 왜구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수군 사령부.
수군 절도사는 병권은 물론 그 지역 전체를 통괄하는 권한
하멜은 전라 좌수사 교체에 따라 대우가 죄우되며 고생한다.

어떤 사령관은 아무 하는 일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보초세웠다.
또 어떤 사령관은 자기가 쏜 화살을 하루종일 줍게 하기도 했다.
우리가 항의하자 사령관은 더 힘든 일을 시키겠다고 협박 했다.
결국 그 모진 고생을 참지 못하고 동료 부르트는 죽고 말았다.
이 때부터 우리는 탈출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큰 배가 있어야 했기에 장사를 해 돈을 모았다.
그리고 그 동안의 경험으로 일본행 항로를 알아놓았다.

하멜일행은 좌수영 수군의 삼엄한 경비를 피해 여수해안을 탈출.
12일 만에 나가사끼 항구에 도착 나가가끼 부교의 심문을 받았다.

"너희는 기독교인이냐? 다른 사람을 태웠느냐?"
"회사 선원들 밖에 없었습니다".

"조선은 전쟁을 하고 있었느냐? 또는 어느나라에 곡물을 바치고 있었느냐?"
"전쟁은 하고있지 않습니다. 타르타르인이 일년에 두 세번씩 곡물을 받으러 옵니다."

나가사끼 부교가 실시한 조사는 매우 구체적이고 치밀했다.
첫째-스페르웨르호의 규모,항해목적,난파경위에 관한 질문 11 개항.
둘째-조선에서의 생활을 묻는내용 7 개항.
셋째-조선의 군사정보,경제,풍습,종교에 관한 7 개항.
넷째-조선의 대외 관계에 관한 6 개항.
다섯째-탈출경위와 조선의 입장에 대한 내용 13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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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에 표류한 외국인 모두 나가사끼 부교의 심문을 받았다.
심문내용은 즉시 막부에 보고. 그것이 국제정세에 대한 막부의 조처.
조선과 비교해 볼때 나가사끼 부교는 놀랄만큼 체계적인 심문을 했다.
단, 한번의 심문으로 조선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아내고 심문을 마쳤다.

1688년 7월 하멜일행이 귀국후 이조는 ‘금단의 땅’으로 알려진다.
이조는 그들을 13년간 억류했지만 서양 정보를 얻은 것이 없었다.
당시 하멜보다 24년전 이조에 귀화한 화란인 박연이 통역을 담당.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멜 일행에게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던 잘못.

'중국사신과 하멜 일행의 접촉을 이조에서 경계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멜 일행으로부터 서양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북벌에 활용하려 한듯.
그러나, 현종이 죽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북벌계획도 물거품이 된 듯.
하여, 이조의 국가 기밀을 많이 알고 있는 하멜 일행을 유배후 억류한 듯

당시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방을 향해 열려진 항구였다.
1543년 포르투갈 상인,1549년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엘이 가고시마

표류인 하멜일행과 한반도의 첫 만남, 첫 거래에서 이조는 완전 실패.
하멜의 표류기는 수백년간 서양 열강들에겐 입맛을 다시게 한 근거자료.
이조 말기에서 구한 말에 보이지 않는 외교전 끝에 우리나라는 일본에 합병.

일본이 서양 정보를 꿰뚫은 싯점에도 이조는 여전히 폐쇄적이었다.
일본은 15세기 포르투갈인에게 입수한 조총을 자체적으로 모방 개발
그 조총으로 자신만만하게 임진왜란을 일으켰음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이조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이조는 그 조총이 어떻게 개발되었는지 알아야 했다.
서방을 두려워할 게 아니라 문호개방을 했어야 옳았다.
유교만 고수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도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했다면 화개장터는 국제상권의 중심이 되었을 듯.
여수 광양만은 나가사키 못지 않은 국제항구가 되었을 듯.
섬진강과 지리산은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부상했을 것이다.
유럽과 한반도를 연결한 <해상과 육로> 실크 로드도 열렸을 듯.

결국, 화개장터는 해상무역과 연결고리가 끊어지자 쇠퇘.
우리나라의 최고이자 최대의 장터에서 시골 장터로 변한다.
하멜 표류기를 통해 이조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보면 안타깝다,

그러나, 아직도 늦지는 않다. 광양만은 철강왕국의 상징.
여수가 국제항구로 발돋움하면, 화개장터의 미래는 밝다.
아름다운 한려수도, 지리산을 연계한 관광산업 실크 로드.

일본과 우리나라 그리고 아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실크 로드.
현대 첨단문명의 발달 추세로 보면, 멀지 않은 장래가 아닐까?
우리나라 한반도 지리적 여건으로 보면, 꿈 같은 미래는 아닌 듯.

미래에 다가올 절호의 기회를 잡으려면, 사전준비가 꼭 필요하다.
화개장터는 한반도 실크로드와 연계된 마스터 플랜이 있어야 할 듯
로마 역사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 쉽게 무너지지도 않는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화개장터는 긴 안목을 보고 지켜야 한다.

화개장터는 우리나라의 단순한 시골장터 만은 아니다.
우리나라가 해상왕국인 시절의 맥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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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소설 '역마'의 무대 '화개장터.'
벚꽃길 따라 봄이면 관광객이 몰린다.

봄날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 도로변은 환상적인 벚꽃터널.
옛 시골장터의 정취가 물씬한 화개장터는 만남과 화합의 장소.
국밥집, 도토리묵, 재첩국집, 주막, 엿장수, 산나물, 녹차, 특산품

왁자지껄 흥정속에 무엇이든 사고 팔던 전통 5일 장.
우리나라 5대 장터의 옛 명맥을 겨우 이어 가고 있다.

70년대 화개장터와 새로 조성된 화개장터는 예전과 다른 풍경.
이전된 화개장은 5일장 명맥을 이어 화개입구에 1일/6일 5일장.

화개장터 앞에 남도대교(전남 구례와 경남 하동을 잇는 섬진강대교)
완공되면 화개장터가 다시금 영호남 화합의 장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화개장터 가는 길 : 하동-화개-구례( 화개 입구의 초가 지붕과 주차장)

지리산 자락의 애환이 어린 화개장터의 옛 모습 복원 계획.
경남 하동군은 총 8억 천만원 사업비로 지난 8월에 실시설계.
총 3,061평에 이르는 화계장터를 전통적인 이미지로 리모델링.

기존 가옥은 허물고 초가 지붕과 전통 한국 목조 건축 양식으로 복원.
기존 콘크리트 장터바닥을 완전히 철거해 황토바닥으로 단장할 계획.
김동리(1913~1995)의 소설 '역마' 속 '옥화네 주막' 벽화를 배치할 예정.
섬진강, 하동 송림공원, 쌍계사, 노고단에 이르는 관광 상품도 개발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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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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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시골장터는 보통 3일장 또는 5일장.
티? 몽골 유목민의 풍습에서부터 유래된 듯.
기동력이 생명인 유목민에게 거추장스러운 짐.

3일에서 5일마다 정해진 언덕에 올라 물물교환.
서로 다른 마을의 특산물과 생필품을 나눠쓴 듯.
장이 열리면, 서로 친선을 도모하며 축제도 벌린듯.

장날 장터에 쳐놓은 장막 풍경은 유목민 사회 풍습.
상품을 더 많이 운반하기 위해 가벼운 장막을 이용.
아직도 장터에 가면 장막 아래 진열한 각종 특산물들

장막은 옛부터 유목민 사회에서는 삶의 터전.
집 떠나 가축을 몰고 초원을 누빌 때 잠자리.
유목민의 방랑생활 습관은 상인으로 발전한다.

동아시아 해상 무역왕국일만큼 항해술도 발달.
바다 건너 대륙을 이동하며 국제무역에도 능통.
이방인과 상거래를 하기 위한 놀이 문화도 발전.

장터 놀이문화는 이방인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
이방인 관객들이 모여들도록 신바람나는 놀이판.
관객들이 모여들면 상거래를 하던 유목민의 상술

'한반도의 대표적인 장터 놀이문화는 탈춤.'

관객 궁금증을 한껏 부풀려놓고 벌리는 좌판.
춤추는 엿장수,뱀장수, 마술 묘기도 같은 맥락.
요즘 몸매 늘씬한 여성들의 길거리 신바람나는 춤.

새로 개장한 업소 앞에서 벌리는 춤판.

마치, 옛날 시골장터 풍습이 현대화된 느낌
이따금 시골장터 향수에 젖어 물끄러미 구경.
시샘하는 처녀에게 옆구리를 꼬집히는 총각들.

'옛 장터 모습이 도심에서 되살아나는 듯.'

판소리와 함께 지리산 일대 놀이문화 탈춤.
그 탈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봉산탈춤
봉산은 한수 이북 항해도 해서지방 한 도시.

'하필이면, '봉산탈춤'이라 부르는걸까?'




봉산탈춤



우리 말에 `탈나다`라는 말이 있다.
음식을 잘못 먹어 배아플 때는 배탈.
다친 곳이 덧나도 '탈났다.'고 한다.

즉, '탈'이란 뭔가 꺼림칙한 변고를 뜻한다.
우리 민족은 탈을 생활 주변에 두길 꺼렸다.
장례 때 쓰는 방상씨는 마을 당집에 두었다.

'마을 지킴이' 탈들도 역시 당집 안에 보관.
탈놀이가 끝나면 탈을 태워 버리는 것이 관례.
탈에 붙은 액살을 태워 없애기 위한 풍습이다.

이처럼 탈은 우리 민족에게 경계되는 대상
그럼에도 불구, 탈춤은 전국적인 놀이문화
탈춤이란 탈을 쓰고 하는 전통적인 가면극.

탈춤은 놀이꾼과 구경꾼이 함께 어울리는 대동놀이.
탈춤은 우리 민족의 중요한 놀이의 한 양식으로 전승.
탈춤은 그 자체가 생활의 일부이거나 생활의 연장선상

탈춤의 연희 공간과 시간은 삶의 현장이며 민중의 삶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탈춤은 대동놀음으로의 축제판
우리나라 탈춤은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른 명칭

북부지역은 탈춤이라는 명칭으로 전승되어 왔고
중부지역은 산대놀이, 남부지역은 들놀음, 오광대

북부지역 탈춤은 주로 황해도 일원에 분포.

중부지역 탈춤은 흔히 산대놀이로 칭해지며,
서울의 애오번(阿峴), 녹번, 사직, 구파발,
퇴계원, 가믄돌, 노들, 송파, 의정부 등.

남부지역의 탈춤은 들놀음과 오광대로 칭해지며,
수영, 동래, 부산진(들놀음), 율지, 신반, 진주,
창원, 진동, 산청, 통영,가락, 고성, 거제, 가산

현재 전승되는 탈춤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
은율, 강령, 봉산탈춤을 비롯 양주, 송파 산대놀이
통영, 고성, 가산오광대와 수영, 동래들놀음 등이다.

탈춤은 그 기원에서 볼 때 생산의 풍성함을 기원
원시 부락의 안녕, 번영을 비는 부락굿 등이 목표
그러므로 현재 전승된 탈춤은 전형적인 축제 성격.

우리나라 역사 속에 전래되어 계승된 탈춤.

두더지처럼 땅만 파다가 죽어간 이 땅의 민중들
그 숱한 표정들이 현재까지 이어진 숨김없는 얼굴.

탈춤의 율동은 이 땅에서 살다간 민중들의 육체요,
그 몸짓이고 신바람이며 민족의 영혼과 분노와 해학
그 영역에서 조상대대로 민중에게 뿌리내린 놀이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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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유목민 원나라 문화가 성행했던 고려시대.
고려정권의 경제적인 밑바탕 세력은 개성상인들
개성상인들이 자리잡은 해서지역에서의 봉산탈춤.

'탈춤의 분포를 보면 사리원, 봉산 중심으로 황주.'

서쪽 평야지대 안악 재령 신천 장연 송화 은율 탈춤
동남쪽 평야지대 기린 신원 서흥 평산 신막 등지의 탈춤
해안지대 해주 강령 옹진 송림 추화 금산 연백 등지의 탈춤

크게 셋으로 구분되며, 5일장 장터에서 탈꾼들을 초빙
1년에 한번씩 황해도 전지역에서 놀던 탈춤이 봉산탈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일제시대에 특히 성행했던 탈춤

탈춤 분포지역은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 교역지
팔도 남북 주요 읍 및 장터에서 탈춤 공연이 성행.

황해도 탈춤은 북으로 대동강을 넘지 못한 반면
남으로 중부 산대놀이 지역과 남북 직로로 연결,
산대도감 계통 탈춤이 해서지방 탈춤인듯 보인다.

200년전 봉산 이속 '안초목'이 만든 봉산탈춤.

그가 전남의 어느 섬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후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며 이 놀이를 발전시켰다.
그 후 안초목과 같은 이속들이 주로 이 놀이를 담당

양주 별산대 놀이에는 없고
봉산 탈춤에만 있는 사자춤
약 80년 전 새로 들어온 듯.

이 놀이는 세시풍속의 하나로
5월 단오날 밤 모닥불을 피우고
시작된 연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5월 단오에 노는 것은 이조 말 풍습.
그 전에는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 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하게 놀았다
고려 연등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

단오는 한수 이북 지방에서는
남부 지방 추석과 맞먹는 명절

모내기 직전의 망중한 시기이며,
단오의 명절놀이로서 봉산·기린·
서흥·황주·강령 등지에서 탈춤

이것은 불교와 관련된 행사로서 출발,
오락 위주의 민중 탈춤으로 발전된듯.

산대놀이는 관청행사와 보다 많이 관련된 것
봉산 탈춤은 농민과 장터 상인들을 위한 놀이

다른 군과의 연희 경연대회에서는
5월 단오 직후 해주감영에서 놀았고,
우승하면 감사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

1915년경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가고,
경의선 철도 개통따라 이 놀이도 사리원 경암산로 이전


2. 특 징

봉산 탈춤은 양주 별산대놀이와 거의 비슷하며,
피리·젓대·북·장구·해금으로 구성된 이른바
삼현육각으로 연주되는 염불·타령·굿거리곡
그 음률에 맞춰 몸짓, 동작, 재담, 노래, 춤

중부지방 양주 별산대놀이 탈춤
느린 춤사위로 긴 소매를 고개 너머로
휘두르는 동작이 장삼춤에 비하면 활발하며,

장삼 소매를 휘어잡고 뿌리거나
한삼을 경쾌하게 휘뿌리면서
두 팔을 빠른 사위로 굽혔다 폈다 하는
깨끼춤이 기본이 된다.

목중춤은 오광대의 말뚝이춤과 마찬가지로
도무(跳舞)로서 모닥불을 뛰어넘는 것이 장기
이것은 대륙에서 전래한 건무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춤사위는 양주 별산대춤처럼 자세하지는 못하나
팔목중의 외사위·곱(겹)사위·양사위·만사위,
취발이의 깨끼춤(깨끼리춤), 말뚝이의 두어춤
(두어춤은 양반을 돼지우리에 몰아넣는다는 해서춤),

미얄의 궁둥이춤과 까치걸음,
팔목중의 뭇동춤 등의 사위 명칭
불림에 따라 장단을 청하고 춤을 춘다.

의상은 김진옥이 어렸을 때 무당의 옷을 썼다 하며,
그러한 연유에선지 원색 더거리(더그레)가 화려하다.

팔목중은 원래 장삼 위에 더거리를 입으며,
더거리는 붉은 원동에 초록색 소매를 달고,
소매 끝에 각기 청황남색 등의 끝동을 달고,
긴 한삼을 손목에 달고 그것을 휘두르며 탈춤

고구려 무복 '유고' 전통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다리에는 행전을 치고 웃대님을 맨다.

해주 탈춤은 주로 회색 칠베장삼을 입으며,
그 소매 홍태기는 땅에 닿을 정도로 길다.

봉산 탈춤은 양주별산대놀이와 비슷,
과장은 크게 7과장으로 나눌 수 있다.

제1과장은 사상좌춤,
제2과장은 팔목중춤
제3과장 사당춤,
제4과장 노장춤
제5과장 사자춤,
제6과장 양반춤,
제7과장 미얄춤.

연희자는 모두 남자,
그것도 그 지방 이속들
신분상 천시되지 않았다.

1920년대 기생조합이 생긴 후
기생들이 상좌와 소무를 맡았다.

봉산 탈춤 길놀이는 탈놀이에 출연하는 일부
악공의 주악을 선두로 사자·말뚝이·취발이·
포도부장·소무·양반·영감·상좌·노장
남강노인의 순서로 열을 지어 읍내 일주.

이 때 원숭이는 앞뒤로 뛰어다니며 장난.

일주 도중 광장에 이르면 행렬자 모두 어울려 춤
다시 줄지어 지정된 놀이터로 가서 본격적인 탈춤
원숭이와 사자는 놀이판이 좁아지면 관객을 정리한다.

봉산탈춤에 사용되는 가면은 종이탈
상좌(4), 목중(8), 거사(6, 목중탈 겸용),
사당(소무탈 겸용), 노장, 소무, 신장수, 원숭이,

취발이, 맏양반(샌님), 둘째양반(서방님),
셋째양반(종가집 도련님) 말뚝이, 영감,
미얄, 덜머리집, 남강노인, 무당, 사자
모두 34역이고 가면은 26개를 사용.

봉산탈춤은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
김진옥(1894~1969,첫목중·노장역),
이근성(1895~1978, 목중·취발이·사자역),
김용익(1902~79, 목중·마부·거사역),
양소운(1924년생, 사당·미얄역),
최경명(1912~85, 말뚝이·취발이역),
김선봉(1922~97, 상좌·소무역),
윤 옥(1925년생, 상좌·덜머리집·무당역),
오명옥(1906~87, 피리·해금·악사)등

8명이 예능보유자로 지정

1997년 현재 양소운과 윤옥 만이 생존
김기수(1936년생, 노장·목중역)가 1987년,
김애선(1937년생, 소무·상좌·목중역)이 1989년

'봉산탈춤 기능 보유자로 추가 지정.'



덧 말.

지리산 일대 삼남지방에서 사랑받는 봉산탈춤.
봉산탈춤은 고구려 유민들의 전통적인 놀이문화
하필이면, 봉산탈춤이 삼남 지방에서 사랑받을까?

지리산 일대는 옛 고구려 유민들의 정착지.
당나라의 삼국시대 고구려 옛 유민 분산정책.
판소리와 함께 전통적인 놀이문화도 계승된듯.

'봉산탈춤은 고구려 놀이문화 중 하나인듯.'

동아시아 해상무역 왕국이었던 고구려.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했던 고대국가.
지리산 일대는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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