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문인 몇 분이 매일 아침 봉의산을 오른다. 8부 능선 쯤 올랐을 무렵 한차례 쉬고 다시 산행을 재촉하는 모양인데 숨을 고르며 정상을 바라보다 말고 불끈 울화가 치민다고 했다. 춘천을 상징하는 진산 꼭대기에 지금은 용도 폐기된 철구조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아침 산행길이 즐겁지 않다고 심회를 털어놓았다. 서둘러 폐기처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차일피일 미루는 작태를 신랄하게 꼬집으며 아무래도 환경운동하는 사람들이 나서줘야 일이 되겠다고 필자를 재촉했다.
춘천이 토박이인 어떤 지인은 잠을 잘 때 반드시 머리를 봉의산 쪽으로 두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잠을 자다 문득 가위눌리기를 수없이 반복한다고 했다. 가끔 비가 오는 날 뒤숭숭해서 깨어나 보면 봉의산이 앓는 소리를 내는 환청에 시달린단다. 그 원인이 정상에 박힌 쇠말뚝 때문이라고 했다.
멀리서 바라보면 반사판은 도청 건물 바로 위에 위치한다. 그 전파 반사판은 춘천에 주둔하던 미군들이 70년대에 설치했고, 봉의산 정상에 위치한 송신탑은 83년 무렵 방송국과 경찰국이 합작으로 세우고 한국통신이 운영하는 철구조물이라고 춘천시가 밝히고 있다. 일관성 없기는 봉의산 쇠말뚝 관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반사판은 건설과 담당이고 송신탑은 산림녹지과 소관이었다. 철거 업무가 효율적으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
최근에는 송신탑 관리소 옥상에 춘천소방소가 화재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해 두고 있어 쇠말뚝 철거작업이 용이하지 않다고 담당자가 털어놓았다.
봉의산 살리기를 주도해온‘춘천 생명의 숲’에 문의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봉의산 살리기를 테마로 연1회씩 토론회를 개최하고, 장마철에 쓸려나간 주요 등산로에 흙 채우기, 나무 심기 등 생태계 복원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봉의산의 경관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차례 관계기관에 공문서를 보내 쇠말뚝 철거작업을 독려했고, 관계기관장 회의도 소집해보았지만 강 건너 불구경, 반사판과 송신탑은 여전히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시 담당자에게 다시 문의했다. 전파 반사판은 미군기지 양여 문제와 직결되어 있어 철거 작업에 한계가 있으며, 송신탑은 금년 말까지 부지 사용계약이 만료되면 관리소 옥상에 설치한 화재 감시카메라부터 옮겨야 철거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봉의산 자체가 도유림이어서 여러 통로를 거쳐야 하는 등 행정절차가 까다롭다는 것이 담당자들의 소견이었다.
3박4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해질 무렵 원창고개를 넘어서게 되면 첫눈에 들어오는 것이 봉의산이다. 봉의산을 바라보는 순간 피로가 말끔히 풀리는 것을 느낀다. 봉의산의 그 젖무덤 같은 용태는 춘천의 모성적 상징이요 그리움의 대상이다. 몽고 침입 때도 그랬고 6.25 한국전란 때도 봉의산은 춘천을 지켜주는 엄폐물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전주 의주 강화 등지와 같이 춘천이 전란에 대비하기 위한 이궁으로 선택된 까닭이 바로 우두벌과 소양강을 굽어보는 봉의산이란 전략적 가치 때문이었다.
그렇거늘 미군은 점령군처럼 춘천시민들에게 한마디 의견도 물어보지 않고 덜커덕 반사판을 봉의산 꼭대기에다 세웠고, 시민들의 여론을 이끌어갈 지도 층들이 일제의 쇠말뚝 같은 송신탑을 봉의산 정상에 설치했던 것이다.
전라도 광주 시민들은 무등산을 거의 신주처럼 받든다. 광주 사람들의 무등산 살리기 또한 민.관.군이 합심하여 단합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증심사에서 토끼봉에 이르는 경사면을 복토하는데 헬리콥터가 산 정상 부근에 흙을 나르고 산행길에 나선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준비해 놓은 비닐주머니에 흙을 담아다가 나무뿌리가 드러난 곳에 흙을 채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광주 시민들의 자존심이 곧 무등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생명의 숲도 그런 의욕으로 봉의산 살리기를 주도했지만 요즘은 맥빠지는 모양이었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춘천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봉의산 정상의 철구조물을 서둘러 철거해 보겠다고 나서는 단체장이나 기초의원 후보자들이 없다. 굵직한 공약도 좋으나, 춘천의 정기를 되살리는 매우 중요한 봉의산 쇠말뚝 철거작업에 일조해보겠다고 외치는 후보자 한두 명쯤 있었으면 참 좋겠다. 실천 가능한 것부터 챙기는 일이 곧 매니페스토(참공약 실천) 운동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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