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의 굿문서와 학습 요령
문서는 무당들이 무업을 해 나가는데 알아야 할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 학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당들 사이에서 큰무당을 들먹거릴 때 바로 이 문서의 깨달음이 깊고 얕음을 기준으로 한다.
즉, 무당의 학습이 많고 적음을 알아보고 문서 깊이의 여부에 따라 큰무당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논한다. 애동제자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스승에게 오랜 세월 매여 있는 것은 이 굿에 대한 문서(文書)를 터득하기 위함이다.
스승에 의해 구술되는 문서는 스승이 주제 하는 무의식이나, 스승의 일상생활에서 속에서 우연적으로 이야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는 그러한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스승에게 매이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서의 내용들은 거의가 신(神)과 관련된 것들이고, 오래된 구어(口語)와 고사성어가 많고 지방어로 구술(口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학식이 많은 사람도 그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위와 같은 문서학습(文書學習)은 순전히 구전(口傳)학습 방법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을 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황해도(黃海道) 굿의 문서를 익히는데 무가(巫歌)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무가는 무당이 무의식을 주제할 때 신을 부르고 모시고 놀리고 또한 보내기 위해 정 해진 무악에 맞추어 정해진 가사를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황해도 무당 들 사이에서는 청배라 한다. 굿을 할 때 부르는 청배는 굿 청배 고사를 할 때 부르는 청배는 고사 청배, 그리고 점을 칠 때는 부르는 청배는 점 청배로 통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청배를 따로 가르치는 일은 없고 오직 실질적 무의식을 통해서만 학습된다.
애동제자는 신어머니 또는 신 아버지가 굿을 할 때, 뒤편 또는 옆 편에 서서 스승이 메기는 청배 소리를 기억한다. 애동제자 중 가장 오래된 제자는 스승 바로 옆에 서서 방울을 들고 거든다.
나 죽었소! 하는 처절한 마음으로 앉은 고장 청, 선 거리 바리공주 양 고장 장구, 기예 등을 죽어라 하고 배워야 하고, 기도(祈禱)는 일상생활이니 시간이 나는 대로 명상기도(瞑想祈禱)를 많이 했으며, 천세 만세 청배 근력으로 신명(神明)을 풀어 가면서 악착같이 돈'을 모아 건물을 사시도 했다.
노 만신이 하시는 말씀 왈" 산에 가서 산왕대신 찾으며 기도한들, 오히려 금전의 고통과 엄동설한에 선배무당의 말만 듣고서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가좌 부를 틀고 앉아 기도를 하니 귀가 얼어서 동상이 걸려서, 지금도 겨울이 되면 그 후유증으로 귀가 아프다고 하였다. 기도 중에 신"의 공수는 10개중에 1개만 맞아도 다행이지만, 결국 깨우침을 얻고 보니 그것이 다 조상들의 농간이며 신"은 말씀이 없었고, 순간의 느낌으로 온다고 무지몽매한 기도를 하느니 그 시간에 기예를 배우면 신"도 신명나서 좋고, 신"의 일만 하니 돈"은 자연히 생기게 되고 신"은 신"으로 풀어야한다! 라는 말이 기억난다고 한다.
자는 시간만 빼놓고 신명(神明)을 푸는 노력을 하니 기적처럼 자식을 원자력 병원에서도 못 고친다 하였는데, 지금은 눈 멀쩡히 뜨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살고 있으니, 저는 지금도 신을 모시는 보잘 것 없는 인간이지만 씁쓰레 웃음이 나오는 것은, 귀신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자연적(超自然)인 존재인데, 어찌 인간이 귀신을 쫒는다는 것인지?
이 분은 지금 경기도의 대학교에서 정식으로 민속학을 강의하는 교수로 활동하고 계시며, 한참 전에 대통령이 기독교를 믿는 장로님이라 청와대 안에 있는 불상을 철거할러고 건드린 적이 있었는데, 책임자가 이유 없이 몸이 아파서 신"께 비는 굿을 주관해서 책임자가 병이 완쾌 되었으며, 더 더욱 신기한 것은 이분은 충청도가 고향인 도줄인 도법제자인데도, 앉은거리, 한양 천신굿 선 거리를 다하시는 양두거리 박수무당이시니, 이거야 원 참 귀신을 쫒는 유일한 방법은 귀신보다 주력이 높은 신령님의 원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속인은 인간일 뿐이며 신에 의해서 신"께 선택받아서 신의 몸주가 되었으니, 오로지 신께 빌어서 신의 원력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겉만 보고 판단을 하여 본인한테 오신 조상이나 조상신"몸주가 할아버지, 할머니, 장군이라면 의당 신"줄과 격"이 맞는 무당을 만나서 그 분들의 맺힌 원통한 "한"과 신명의 "한"을 풀어드려야 하는데 겉을 보고서 판단을 하니 "신굿"을 주관한 무당이 작두도 못타고 피가 낭자한 돼지창자를 입으로 물어 뜯고 얼굴에 피 범벅이 되어서 문에서는 불이 나며 소름끼쳐서 볼 수가 없을 정도의 군웅장군도 없고 선녀"동자님"이 몸주인 무당이나 조상귀"에 잔뜩 씌여서 무당행세를 하는 사이비 무당에게 예비제자는 육신과 영혼을 맡기니 지금도 이러한 무당들이 득세를 하고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다.
앞으로 무속종교는 더 더욱 제살 깎아먹기 식으로 도태만 되고, 그런 무당들은 신"의 내면을 볼 수가 없으니 예비제자의 겉의 뛰는 행동과 나는 관우장군이다, 하니 아~네 그렇습니까? 추켜세우며 너에게는 몸주신"이 관우장군이 오셨다고 하니 기왕지사 높은 신이 오면 그 동안의 설음과 고통은 싯은듯이 사라지고 중국에 삼국지의 영웅인 관우장군님이 왜? 한국의 자손에게 오는지 거참 하늘에 별꼴이 반쪽인 것이다.
신"은 말문이 터지면 당연히 신"의 영검한 공수가 있어야 하건만, 돈"받기 전에는 친절하고 돈"받고 굿하니 얼른 마무리해서, 멀쩡한 사람을 귀신에 씌이게 해서 병신을 만들고, 한술 더 떠서 그 동안의 이론적인 노하우로 청배 무당을 일당주고서 "신내림굿"을 주관하니, 옳은 말은 귀가 따갑고 간사한 말은 귀가 솔깃하니 어느 누구를 탓 할 것인가? 귀에 걸면 귀걸이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데 요즘 금값이 신"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다.
한편, 황해도 무당들 사이에서는 "영험은 신령이 주지만 재주는 눈치껏 배워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재주는 기술적인 눈치이다.
무당 자신들도 때에 따라선 신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스스로를 자문 할 때가 종종 있다. 이렇듯 무당 자신들도 신령님의 위대한 능력에 의심을 가질 때가 있는 것인데, 이러할 때 "재주껏" "눈치껏" 하라고 스승은 말한다. 제대로 된 무당이 되기 위해선 눈치가 발달되어야 하고, 눈치를 터득하기 위해선 많은 경험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서는 눈치(sensitivity)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깨닫게 된다.
기, 예능(무가, 춤. 재담, 등등)의 학습은 보편적으로 직접적이고 능률적이지 만, 기술적인 요소(눈치, 요령, 재주)는 스승들의 지도방식이 비공개적이고, 일반인에 게는 배타적 성격을 같게 하며 간접적으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써 적지 않은 무당들은 스승의 가르침이 눈치껏 하는 것으로 미리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학습자들은 스승의 무가나 음악적 이해를 하게 된다.
이렇듯 학습방법이 직접적이거나 과학적이지 않고, 또한 무가를 기록한 무가 책이나 문서가 없이 오직 구전으로 전승되어 진다. 그렇기 때문에 무당에 따라서는 같은 종류의 무가라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이나 구술 방식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 한 방법에 의한 무가 외우기는 학습자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완성단계까지는 대부분 10여년이 걸린다.
무당 집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그들의 무속 전승은 상당히 보수적이고 비개방적이다.
그러한 것은 그들의 오래된 전통에 의해 학습을 공식화 않거나 또는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당수업이 능률적이지 못하거나 일반인에게는 배타적이기 때문에 절대로 개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한 학습 방식은 결국 학습자들로 하여금 스승의 뜻대로 행해지는 학습에 임하면서도, 자신의 "자아체험 적 실천"을 바탕으로 깨닫거나 익혀 나가게 한다.
애동제자들이 무(巫) 학습 기간에 자아체험(自我體驗)적 실천을 밑바탕으로, 학습(學習)의 폭을 키우는 것은 결국 신의 영험(靈驗)력을 믿는, 무당들의 신의탁사고(神依託思考)적 신념에서 찾을 수가 있다.
무속을 논함에 있어 문서(文書)를 따지는 것은 아주 복잡한 일이다.
이유는 다양성을 넘어 너무 많은 문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황해도 무당들 사이에 서는 "성수(신령) 본(本)은 한본 이요 제자(무당) 본은 각본(각 각의 본)이다"라는 전래어가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위의 말뜻은 무당들이 모시는 신령은 동일하지만 그 신령을 따르면서 행하는 무의식은 무당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굳이 황해도 무속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무속이던지 다 해당이 된다.
한편, 무당의 문서는 무 계보에 따라 그리고 무업활동 지역에 따라 수많은 문서로 구분되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고 어렵다. 그렇기에 굿 문서를 놓고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황해도 굿문서는 지역적 구분에 의해 해안지역의 굿문서와 내륙지역의 굿문서 그리고 산간지역의 굿문서가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계 보에 의해 그 문서는 더욱 세분 화 되어있다.
여러 무당들이 동일한 신의 스승 밑에서 무 학습을 받았음에도, 각자가 행할 때는 전수한 학습 내용을 각자 자신의 해석 방법에 의해 인식하여 실행하기도 한다. 그러기 때문에 학습자(學習者)의 해석(解釋)방법과 인식능력(認識能力)에 따라, 스승의 모든 것은 달리 만들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속에 있어서는 어느 특정 무당이 갖고 있는 문서만이, 정통한 것이라든지 아니면 기본이 된다던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문화상대주의에 의해 각각이 갖고 있는 문서의 중요성과 특성을 살펴야하고, 그것들의 비교를 통한 종합연구가 이루어 져야 한다.
황해도 지역의 여러 굿 문서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나 연구는 아직 시도되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 여러 가지 다양한 굿문서가 존재한다는 인식은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황해도 무속과 문서 학습
성수 본은 한 본이요 제자 본은 각본이라고 무속을 논함에 있어 문서(文書)를 따지는 것은 아주 복잡한 일이다.
이유는 다양성을 넘어 너무 많은 문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황해도 무당들 사이에 서는 "성수(신령) 본(本)은 한본 이요 제자(무당) 본은 각본(각 각의 본)이다"라는 전래어가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위의 말뜻은 무당들이 모시는 신령은 동일하지만 그 신령을 따르면서 행하는 무의식은 무당마다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굳이 황해도 무속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의 무속이던지 해당된다.
한편, 무당의 문서는 무 계보에 따라 그리고 무업활동 지역에 따라 수많은 문서로 구분되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다. 이에 굿문서 따지기는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황해도 굿문서는 지역적 구분에 의해 해안지역의 굿문서와 내륙지역의 굿문서 그리고 산간지역의 굿문서가 존재한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계 보에 의해 그 문서는 더욱 세분화 되어 진다. 여러 무당들이 동일한 신의 스승 밑에 서 무 학습을 받았음에도 각자가 행할 때는 전수한 학습 내용을 각자 자신의 해석 방법에 의해 인식하여 실행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학습자의 해석방법과 인식능력 에 따라 스승의 것은 달리 만들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속에 있어서는 어느 특정 무당이 갖고 있는 문서만이 정통한 것이라 던지 아니면 기본이 된다던가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문화상대주의에 의해 각각이 갖고 있는 문서의 중요성과 특성을 살펴야하고, 그것들의 비교를 통한 종합연구(綜合硏究)가 이루어 져야 한다. 황해도 지역의 여러 굿 문서에 대한 종합적인 조사나 연구는 아직 시도 되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이 지역에 여러 가지 다양한 굿문서가 존재 한다는 인식은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무당 문서는 다양하게 존재한다.
황해도 무속뿐 아니라 어느 지역의 굿문서(文書)에는 무업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과 실기적인 기술을 포함한 무속의 전반적인 행위가 포함된다. 이론적인 지식 이란 무속과 관련된 역사적 유래와 뜻을 말하기도 한다.
실기적인 기술이란 무의식에서 사용되는 기, 예능적인 재주를 가리킨다.
문서라고 할 때는 위의 양자의 것을 포함하여 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전자의 것에 더욱 치중하고 있는 편이다. 문서라는 용어는 무당마다 또는 지역마다 다르게 통용되고 있다.
문서를 본래 형태의 것이라는 뜻으로서 본서(本書)라 하기 도 하며, 불교의 영향이지만 신령님의 말씀이 곧 법이라는 뜻으로 설법(說法) 또는 법문(法文)이라고도 쓰여 지기도 한다. 무당이 알아야 하는 무속에 관한 제반 지식은 곧 신의 법칙이라 하여, 이것을 신법(神法)이라고 말하는 무당도 있다. 경기도 지방의 무당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마달이라는 용어는 무가와 재담만을 뜻하지만 이것 역시도 문서에 해당된다.
충청도 지방의 무당(법사 또는 보살)들이 알아야 하는 "경문(經文) 즉 (독경(讀經), 좌경(座經), 또는 앉은 경) 등도 경(經)을 읽는 것만을 지칭하고 있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문서를 일컫는 것이다.
이렇듯 문서는 지방에 따라 또한 무당에 그 명칭이 달리 호칭(互稱)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속문화가 시공과 전달자에 따라 새롭게 향유되고 해석되고, 또한 탄생되듯이 무속에서의 문서 역시도 새 무당에 따라, 달리 향유되거나 해석되고 또한 탄생 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속에서의 문서 전승은 새 무당이라 할지라도 새 법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옛 것을 귀중히 여기고 되도록 옛 문서를 따르려고 하는 것이 무당들의 자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승과정에서 문서 해석이 달리 되거나 또는 달리 인식되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화전승에 있어 그러한 변이 현상은 오로지 구전으로 전승되는 무속행위에 있어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