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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박해와 병인양요
- 원인과 발단
- 박해의 전개 과정과 . 시복
- 시성과 박해의 의미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전국적으로 지속되어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박해. 일반적으로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년) 초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계에서 실각할 때까지를 박해 기간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실제로 포도청에서 천주교 신자를 체포한 것도 1873년에 마지막으로 나온다. 이를 다시 세분해 보면, 박해 초기인 1866년 봄의 박해, 병인양요 이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 계속된 박해, 덕산 굴총 사건(德山振域事件)으로 인한 1868년의 박해, 신미양요(辛未洋優)로 인한 1871년 이후의 박해 등 네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에서 1868년의 박해를 특별히 ‘무진박해’ (成辰迫害)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다만 이전의 박해와는 달리 이때에는 1873년 이후에도 박해를 마감하는 어떤 윤음이나 명
령이 반포되지는 않았으며, 따라서 1877〜1879년 사이에 다시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천주교 신자는 대략 8천 명에서 1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중 대부분이 무명(無名) 순교자이고, 이름을 알 수 있는 순교자 중에서 24명 만이 훗날 성 인품에 올랐다. 또 이 박해와 관련된 순교 사적지는 전국각지에 흩어져 있으며. 현재에도 각 교구별로 이들의 순교 행적을 조사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I - 원인과 발단
병인박해의 원인(遠因)으로는 일반적으로 설명되고 있는 벽이단(關異端)의 전통과 척사(麻邪)의식, 천주교 교리와 유교 사회 윤리와의 갈등, 천주교 신자들의 대외 의식과 이에 대한 위정자들의 반응 등을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문제는 서양 세력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천주교 세력이 그 앞잡이로 이해되면서 위정자들에 의해 배외(排外)사상을 부추기는 수단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병인박해의 발생과도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특히 1860년 10월 영, 불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의 지식인과 위정자들은 크게 당황하였고, 프랑스 함대나 다른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위기의식까지 갖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북경 함락 이후에 체결된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를 차지하고 남하 정책을 펴 오던 러시아가 1864년 2월(음》두만강 근처에 나타나 서한으로 통상을 요구한 이래 자주 북변을 침입하면서 현실로 다가오게 되었다. 이어 1865년 11월에는 러시아인 수십 명이 다시 경훙(慶興)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한 일로 인해 경홍 부사를 문책한 일까지 있었다. 당시 인도차이나 주재 프랑스 함대 사령관 게랭 소장도 1856년 7월 16일 이후 약 2개월 동안 조선 해안을 정탐하고 귀국하여 남하 정책을 펴는 러시아의 행동을 보고하였다.
당시 고종의 친부로 정권을 잡고 있던 홍선 대원군 이하응(李呈應)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 측과 교섭을 맺음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미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1864년 8월에는 사람을 중간에 내세워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프랑스가 러시아 세력의 남하를 막아 준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 고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베르뇌 주교 또한 러시아의 남
진을 우려하고 프랑스와 조선이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시아 세력을 저지한다는 방아책 까지 수립해 놓고 있었으나, 그로서는 프랑스 함대를 동원할 처지가 아니었으며, 한편으로는 대원군의 제안에 의혹을 품고 있었으므로 즉시 이를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때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던 홍봉주(洪鳳周, 토마스)는 남종삼(南鍾三, 요한)을 찾아가 프랑스와의 조약 체결과 방아책을 대원군에게 건의해 주도록 하였으나, 남종삼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원군이 다시 베르뇌 주교와의 접촉을 시도한 것은 1865년 11월 말(음)이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러시아인들이 경홍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때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두고 있던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 부인 여흥민씨(驅興閔氏)와 왕의 유모인 박(朴) 마르타, 그리고 홍봉주를 비롯하여 김면호(토마스). 이유일(안토니오) 등은 베르뇌 주교와 대원군의 만남을 주선했으며, 대원군에게 방아책을 건의하기로 했다.
그러자 남종삼도 청원서를 작성하여 대원군을 만나게 되었고, 김면호는 베르뇌 주교에게. 이유일은 다블뤼 주교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이에 따라 다블뤼 주교는 1866년 1월 25일(음 1865년 12월 9일)에 충청도에서, 베르뇌 주교는 1월 29일에 황해도에서 상경하게 되었다. 또 남종삼도 재차 대원군을 만났으며, 이어 홍봉주의 집에 와있던 베르뇌 주교를 만나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서는 북경에 있는 프랑스 영사관에 연락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 뒤 부친이 있던 제천 땅 묘재로 낙향하였다.
남종삼이 낙향한 이유는 베르뇌 주교의 상경을 알리기위해 두 번째로 대원군을 만났을 때. 그가 낙향을 권유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무렵에는 이미 대원군의 마음이 변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때는 방아책까지 받아들일 생각을 하였던 대원군의 마음이 변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프랑스 선교사들과의 조속한 회동을 기다리던 대원군이 초조해졌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 세력에 대한 의혹이 일게 되었고, 둘째로 러시아의 월경 행위가 잠잠해지면서 위험이 사라졌으며, 셋째로 반대파 대신들인 조두순(趙斗淳), 정원용(鄭元容), 김병학(金網學)등이 정치적 공세를 늦추지 않고 천주교와의 접근을 비난한 때문이었다. 그리고 넷째로 북경으로 간 사신으로부터 1862년 이래 중국에서 자행된 천주교 신자와 서양인 살육에대한 내용이 서한으로 전달된 때문이었다.
이 소식은 특히 천주교 탄압을 주장하는 조정의 대신들을 자극하였고, 마침내는 대원군을 압
박하여 박해령에 시명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병인박해의 시작이다.
그에 앞서 내포 출신으로 경상도 곤악이 (현 문경군 동로면 학전리의 건학이)에서 생활하던 전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내포 출신으로 예목이(문성군 문경읍 중평리) 회장의 아들인 이(李) 요한이 경상도에서 체포된 후 공주로 옮겨져 1866년 1월 26일(음 1865년 12윌 10일)에 순교하였다. 이어 평양 논재(평남 대동군)에서는 우세영(禹世英, 알렉시오)이 체포되었다가 배교하고 석방되었는데. 이것은 공식 박해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I, 박해의 전개 과정
[박해 초기의 양상] 대원군과 만남을 기다리던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는 조정으로부터 소식이 없자 다시 지방 순회에 나섰다. 이때 베르뇌 주교는 서울 인근의 교우 촌을 둘러보고는 다시 상경하였는데.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입) 포졸들이 몰려와 베르뇌 주교, 홍봉주. 그리고 하인 이선이(李先伊)를 체포하였다. 이어 2월 25일에서 3월 1일 사이에는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와 정의배(丁義濟,마르코), 전장운(요한),최 형(베드로) 등이 잇달아. 체포되었고, 배교하고 석방되었던 우세영이 다시 마음을 고쳐 상경한 후에 자수하였다. 이들은 곧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여기에서 이선이가 남종삼을 밀고하자 조정에서는 그를 체포한 뒤 함께 국문하도록 하였고, 이에 따라 3월 1일 남종삼이 경기도 고양(高陽)에서 체포된 이튿날 국청(輸廳)이 개설되었다.
의금부에서는 여러 차례 신문과 형벌이 계속되었다.
그런 다음 판결이 내려져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등 4명은 3월 7일(음 1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으며, 남종삼과 홍봉주는 같은 날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순교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이날부터 친주교 신자들과 서적을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는 동시에 남종삼, 홍봉주의 가족에 대하여는 노륙지전을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3월 9일에는 최형과 전장운을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였고. 3월 11일에는 정의ᅵ배, 우세영과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배론 신학교의 푸르티니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충청도에서는 3월 11일에 거더리(지금의 예산군 고덕면)의 손(孫)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었고. 이어서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黃親斗, 루카)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여기에 제천에서 체포되어 온 배론 성 요셉 신학교의 집주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추가되었다. 이들 5명은 3월 30일(음 2월 14일)에 보령의 갈매못(지금의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수영 백사장에서 순교하였다.
같은 무렵에 거더리에서는 손자선(토마스)이 체포되어 공주로 이송되었고,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고백한 뒤 3월 30일에 교수형을 받았다.
한편 공주 진밭(현 공주군 사곡면 신영리)에 거처를 두고 경상도 지역을 순방하던 리델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 3월 6일에 경상도를 떠나 진밭, 버시니(공주군 신풍면 산학리) 등지에서 피신 생활을 하다가 5월 18일 페롱 신부를 만났다, 당시 칼래 신부는 박해 소식을 듣고는 공소 순방을 중단하고 경상도 문경의 한실, 진천의 삼박골(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용덕리)을 거쳐 목천 소학골(현 충남 천안시 북면 납안리)로 피신해 있다가 후에 페롱, 리델신부와 상봉하였다. 이어 리델 신부는 장상인 페롱 신부의 지시에 따라 7월 1일에 장치선(張致著). 최선일 (崔普一,요한, 일명 智儀)등의 안내로 용당리(아산군 신장면 주산리)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그 후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도 10월 11일경에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병인양요와 박해의 확대〕이후 박해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각지로 확대되었다. 특히 10월에 는 서울을 비롯하여 경기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지의 감영이나 진영이 있는 곳에서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포졸들이 배교자를 앞세우고 각처의 교우 촌을 약탈하거나 유린하였다.
이처럼 박해가 확대된 데에는 서양 선박의 내침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첫 번째 사건은 1866년 4월과 8월에 유대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영국 상선을 타고 두 차례나 아산만에 나타나 상륙을 시도하려다가 좌절된 일이었다. 특히 오페르트는 두 번째 내침 시에 아산만 상륙이 좌절되자 강화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기도 하였다.
둘째로 6월에는 미국 상선 시프라이스 호가 평안도 해안에 접근한 적이 있었고, 이어 9월 2일(음 7월 24일〉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 하구에 닻을 내리고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안 감사 박규수가 이끄는 관군에 의해 소각되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9월 12일(음 8월 3일) 자로 예문관 제학 신석희가 지은 〈병인 척사 윤음〉을 조야에 반포하였다.
세 번째 사건은 바로 프랑스 함대가 두 번에 걸쳐 조선 원정에 나신 '병인 양요’였다.
이 중에서도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직전 조선 해안을 위협하고 군인들이 강화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자행한 사건으로, 위정자의 적대감과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켜 박해를 부추기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에 앞서 중국으로 피신한 리델 신부는 그곳에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선교사 학살 소식을 전하여 보복을 결심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의 조선 출정은 로즈가 인도차이나 원정에서 돌아온 뒤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즈는 조선에 원정하기 위해 9월 18일(음 8월 10일,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 최인서, 심순여(沈順汝)등 세 명의 조선 신자를 안내인으로 삼아 세척의 군함으로 체푸를 출발하였으며. 9월 26일에는 한강 입구를 거쳐 양화진(楊花淨)과 서강(西江)까지올라갔다가 체푸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병인양요인데, 이는 조선을 정찰할 목적에서 감행된 것이었다.
제2차 병인양요는 10월 11일(음 9월 3일) 로즈가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10월 14일에 강화도 갑곶 진(甲幸津)을 거쳐 이튿날 강화읍을 점령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프랑스 병사들은 강화도에 있던 은괴와 많은 서적, 물품들을 노획하였으며, 로즈는 선교사 처벌에 대한 문책과 통상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10원 26일과 11월 9일에 문수산성(文殊山城)과 정족산성(照足山城)에서 조선군에게 패하고 11월 21일 중국으로 철수하였다.
이처럼 병인양요가 프랑스측의 실패로 끝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가열되어 1867년과 1868년 초까지 도처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거나 순교하였다.
조정에서는 우선 11월 21일에 천주교 신자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였으며.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成連順)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선참후계(先新後啓)의 영을 내렸다. 이에 앞서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다는 구실 아래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총융진에 새 형장을 만들어 무수한 신자들을 이곳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후 양화진은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10월 22일(음 9월 14일)에 효수된 이의송(李義松, 프란치스코),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 그리고 10월 25일에 효수된 황해도 출신의 회장 박영래(朴永來,요한) 등이었다.
박해가 확대되면서 전라도에서는 정문호(바르톨로메오). 손선지(베드로). 한원서(요셉). 이명서(베드로),조화서(베드로). 정원지(베드로) 등이 체포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은 뒤 1866년 12월 13일(음 11월 7일)에 서문 밖 장대(즉, 숲정이)에서 순교하였고, 조화서의 아들 조윤호(요셉)는 12월 18일(혹은 28일) 전주 서천교 장터에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 또 대구 관덕당에서는 1867년 1월 21일에 이윤일(요한)이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으며. 수원에서는 1867년 3월에 박의서(사바) 회장과 두 아우가 순교하였고. 충남 공주에서는 배문호(베드로), 최종여(라자로)가 1866년 12월 24일(음 11월 18일)에, 서정직(요한)이 1867년 1월에 순교하는 등 1868년까지 공주, 해미, 홍주 등지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특히 서산 강당리 (서산군 운산면 용현리)에서는 김선양(요셉) 등 17명이 홍주로 끌려가 12월 27일에 교수형을 당하였고. 공주의 국실(공주군 반포면 난곡리)에서는 회장 김화숙(베드로)과 한 마을 신자 27명 가량이 함께 공주로 끌려가 1867년 4월에 두 차례에 걸쳐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덕산 사건의 발생〕이러한 상황 아래서 1868년 5월에는 충청도 덕산에서 굴총 사건 즉 일명 ‘남연군 묘 도굴 사건’ (南延君墓盜振牟件) 또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라 불리는 희대의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다시 한번 박해가 확대되었다. 1866년 조선 원정에 실패하고 상해로 돌아간 오페르트는 이후에도 계속 조선 원정을 노리던중. 중국에 있던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로부터 "덕산 가야동(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여 그 부장품을 가지고 협상을 하면 통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오페르트는 독일인 필러를 선장으로 삼아 세 번째로 조선 원정에 나섰다. 이때
그 일행에는 페롱 신부, 상해 영사관 통역관 출신이자 후원자인 미국인 젠킨스, 안내를 맡은 최선일등 조선 신자들이 끼어 있었다.
이들 일행은 1868년 5월 9일(음 4월 17일)에 아산만과 구만포(九萬浦)를 거쳐 덕산 관아를 습격한 뒤, 군기를 탈취하여 남연군 묘가 있던 덕산군 현내면 가야동, 상가리로 달려갔다. 그러나 묘광이 견고한 탓에 도굴에는 실패하고. 5월 11일에는 아산만을 출발하여 이튿날 인천 영종도 부근에 머무르며 프랑스 제독 알르마뉴의 명의로 된 통상 교섭 서한을 영종 첨사 신효철(申孝哲)에게 전하였다.
이때 대원군은 경기 감사 이의익(李宣翼)을 통해 통상을 거부하고 오페르트 일행을 퇴각시키도록 하였다. 그 결과 오페르트 일행이 3차 원정 9일 만인 5월 18일에 상해로 물러감으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다. 젠킨스는 한 미국인에 의해 고발되었고, 페롱 신부는 프랑스로 소환되었다가 1870년에 인도의 퐁디세리로 파견되었다.
특히 대원군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천주교에 대한 증오심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이미 체포되어 있던 신자들은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처단하였고. 배교한 경우도 유배형에 처하였다. 이때 먼저 오페르트에게 협력한 손경노(孫敬老. 요한, 일명 치양), 이영중(李永中) 등이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이어 서울의 포도청과 각 도의 감영에 신자들을 수색, 체포하도록 하는 영이 내려졌다. 그 결과 우선 중국을 왕래했던 교회 밀사 장치선, 최인서, 김계교가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고, 굴총 사건이 일어난 충청도 덕산과 해미 일대는 물론 서울의 포도청과 절두산, 경기도의 수원, 남한산성 , 죽산, 남양, 충청도의 공주, 홍주, 충주,,청주. 전라도의 전주,,나주,,여산, 경상도의 대구,울산, 진주, 황해도의 해주, 황주, 함경도의 영흥 등지에서 수많은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당시 조정에서 내려진 명령은 주로 참수형이었지만, 지방에서는 주로 교수형이나 장살, 생매장 등 남형을 적용하였다. 특히 생매장의 예는 충청도 순교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데, 수부인 공주에서는 행해지지 않고 지방인 홍주나 해미 진영에서만 적용되었다.
〔신미양요와 박해의 종식〕 무진년의 박해는 1869년에 이어 1870년 말까지 계속되다가 잠잠해지게 되었으나, 1871년에 미국 함대가 내침하는 ‘신미양요' 로 인해 다시 재개되었다. 이때 대원군은 5월 26일에 북경 주재 미국 공사 로오와 사령관 로저스가 이끄는 4척의 미국 함대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자 이를 물리쳤으며 . 미국 함대가 강화도 광성진(廣域 鐵)에서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洞) 등을 살해하자 군사를 동원하여 함대를 격퇴시켰다. 그런 다음 6월 12일(음4월 25일)자로 명을 내려 서울의 종로와 8도 각 지역에 척화비(斥和碑)를 건립하도록 하였고, 여기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오면 싸우거나 화친해야 하는데,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이라는 글자를 새기도록 하여 척화(斤和) 사상을 고취시켰다.
이로 인해 1871년과 1872년 사이에만 52명의 신자가 다시 포도청에 체포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과 같이 지방에서는 신자들이 체포되지 않았으며. 조야의 상소에 따라 1873년 12월 24일(음 11월 5일)에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이로써 오랫동안 계속된 병인박해는 끝을 맺었다.
한편 중국에 있던 칼래 신부와 리델 신부는 1867〜1868년 사이에 다시 조선에 잠입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는 칼래 신부, 새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블랑 신부와 함께 1868년 말부터 만주 태장하(太^河) 인근에 있는 차쿠(金構)에 머물면서 조선 입국을 계 획 하던중 1869년에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다음 1876년 5월 8일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를 황해도로 입국시켰으며, 이어 리델 주교 자신도 다시 조선 입국을 시도한 끝에 1877년 9월 23일에는 두세신부, 로베르신부와 함께 황해도로 입국하였다. 그러나 리델 주교는 1878년 1월 18일에 체포되어 6월 24일 중국으로 추방 되었고, 1879년 5월 16일(음 윤 3월 26일)에는 드게트신부도 체포되어 9월 7일에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시복, 시성과 박해의 의미]
〔시복,시성 과정〕1873년 이후에도 정식으로 박해령이 철회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박해가 일어날 소지는 충분하였다. 실제로 1877〜1879년 사이에는 다시 신자들이 포도청에 체포된 기록이 나타나며, 그중에서 오랫동안 교회의 밀사로 활약하던 최선일(요한)은 1878년에 포도청에서 아사로 순교하였고. 이듬해에는 공주출신인 김덕빈(金德彬, 바오로). 이용헌(李容憲. 이시도로), 이병교(李業敎, 레오) 등 세 명이 포도청에서 역시 아사로 순교하였다. 이들은 모두 리델 주교나 드게트 신부의 체포 사건과 연관된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병인박해의 순교자로 보기는 어렵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신자수는 기록마다 다르게 나타나는데,박해 직전의 총 신자 수가 23,000명이었으므로 이보다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는 기록들은 모두 과장된 것이 분명하다. 또 교회 측 기록에는 1870년 무렵까지 전국에서 8,000명의 신자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나타나며, 포도청의 기록에는 모두 403명(남 297, 여 106)을 체포하여 절반 이상을 처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모든 기록을 종합해 본다면 병인박해의 순교자 수는 대략 1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1876년부터 이미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예비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하기 전이었고. 아직 박해가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본격적인 조사는 1880년 뮈텔 신부가 입국한 뒤에야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어 제7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블랑 신부가 1882년에 보령 순교자들의 유해를 홍산(洪山) 남포의 서들골에서 발굴하였고, 제8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뮈텔 주교는 1895년에 시복 수속 담당자 르장드르 신부로 하여금 그 동안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치명일기》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이 책에는 모두 877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29명만이 1차 시복 대상자로 선정되어 1899〜1900년에 교구 재판이 개정되었으며. 이후 증거가 불충분한 이성욱(필립보), 이성천(베드로), 송성보(아우구스티노)를 제외한 26명을 대상으로 1921〜1926년에 교황청 수속이 시작되었다. 아울러 1923년에는 그동안의 증언 자료들을 다시 정리한《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이, 1925년에는《병인박해 치명 사적》이 편찬되었다.
이후 26위 순교자 중에서 푸르티에 신부가 1964년에 탈락되고. 1967년에는 프티니콜라 신부가 제외되면서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 브르트니에르,도리,볼리외, 위앵,오매트르신부, 남종삼,전장운,최형, 정의배, 우세영, 황석두, 손자선, 등과 정문호,조화서,손선지,이명서,한원서, 정원지,조윤호, 그리고 이윤일등 24위가 시복 대상자로 확정되었다.
그 결과 24위 순교자는 1968년 7월 4일의 어전 회의에서 기적 면제를 받고.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식을 거쳐 복자위에 오르게 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의미〕이처럼 병인박해는 대내외적인 사건과 결부되면서 네 단계로 진행되는 동안 전국적으로 수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물론 박해의 원인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반천주교(反天主敎) 인식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박해가 오랫동안 지속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화이관(華芮觀)에 입각한 홍선 대원군의 대외 인식과 쇄국 정책이 상승 작용을 일으키게 되었다.
아울러 1866년의 오페르트 원정, 서프라이스호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 1871년의 신미양요 등은 직접적으로 천주교와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박해를 가열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에 1866년의 병인양요는 그동안 종교 보호 정책을 펴온 프랑스와 무력을 통해서라도 종교의 자유를 얻으려 한 조선 선교사들의 의도가 부합되면서 현실로 나타난 것으로, 당시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던 무력 외교의 한 단면이었다. 특히 1868년의 덕산 굴총 사건에 천주교 선교사와 신자들이 동참하였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비난을 면하기 어려운 점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조선의 위정척사(衛正斤邪〉의식을 더욱 고착시키면서 천주교를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위정’이 아니라 '척사’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고. 적어도 천주교에 대해서만은 '위정‘에 필요한 교화(敎化) 정책을 전혀 쓰려고 하지 않았다. 이 점은 1866년 10월 이후 박해가 더욱 가열되었을 때, 평양 감사 박규
수가 “천주교 세력의 확대는 위정자들의 교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온 것”이라고 하면서 처벌보다는 선도를 주장한 사실과 잘 대비된다.
실제로 당시 박규수의 관내에서는 천주교로 인해 한 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다.
아울러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을 매국자로 매도하고 처형함으로써 병인박해를 집권의 한 방편으로 이용하였고. 이것은 북경조약 이후 더욱 강하게 대두된 조선 사회의 위기 의식이나 위정 척사 사상과 맞물려 정당성을 인정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끊임없는 학살은 서원(書院) 철폐. 경복궁 중건 등 대원군의 실정과 함께 민심을 이반시키는 동시에 그의 실각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교회 내적으로 볼 때, 우선 병인박해는 최대의 박해로 유례없이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최후의 박해였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그 후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처형되지 않고 중국으로 추방되었다는 사실이 바로 박해의 종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사소한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공적인 박해령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 병인박해로 인해 철종 연간에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내면서 교우 촌을 재건하고, 활발한 전교 활동을 통해 교세 확대에 노력해 오던 한국 천주교회는 다시 한번 침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국 각지의 교우 촌은 철저히 파괴되었고, 성직자나 교회 지도자들이 순교함으로써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사람이 없게 되었다. 박해를 피해 살아남은 신자들은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나 신자임을 숨기고 살아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박해가 복음의 씨앗을 더 멀리 뿌리는 결과’ 로 나타났던 것처럼 박해는 다시 한번 천주교 신앙을 다른 지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각처에 새로운 교우 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박해 이전인 2만여 명의 신자수를 회복하게 된 것은 20여 년 뒤인 1894년이었다.
다음으로 병인박해가 시작된 이래 한 명의 순교자가 다른 순교자를 탄생시키면서 신자들의 순교 신심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순교 신심은 병인박해와 관련된 순교 터와 순교자들의 무덤, 그들이 형벌을 당하거나 체포되었던 곳이 사적지로 조성되면서 순교자 현양 운동과 함께 현대의 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병인박해 순교자 중에서 24위만이 시성되었을 뿐이므로 아직 시성되지 못한 순교자들의 행적을 조사하고, 관련 사적지들을 개발하는 일이 과제로 남아 있다.
병인양요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芮實迫害) 때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한 데 대한 보복과 통상을 목적으로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가 조선 원정을 계획하여 1866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내침한 사건.
본래는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에 따라 원정이 계획되었으나, 오히려 조선의 위정자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위기 의식과 반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박해를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과 원인〕병인양요가 일어난 대내적인 배경으로는 먼저 조선의 일관된 쇄국 정책과 척사(斤邪) 인식, 서양 세력의 침입에 대한 위기 의식, 그리고 1866년 초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쇄국 정책과 위기 의식은 병인양요의 먼 배경일 뿐이었고, 그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병인박해였다. 당시 고종의 친부로 정권을 잡고 있던 흥선 대원군(與宣大院君) 이하응(李是應〉의 천주교 금압령으로 시작된 이 박해는 프랑스 선교사들과 천주교 신자들의 체포로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특히 1866년 2월 23일(음 1월 9일〉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였다.
박해를 면한 페롱신부와 칼래신부, 리델신부등 세명은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에 있던 프랑스 공사와 극동 함대에 이사실을 알리고 박해를 막아 보기로 협의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가 먼저 장상인 페롱 신부의 지시에 따라 7월 1일에 장치선(張致善), 최선일(崔善一, 요한, 일명 智編) 등의 안내로 용당리(能糖里, 아산군 선장면 佳山里)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 7월 7일 체푸에 도착한 리델 신부는 즉시 텐진(天津)으로 가 프랑스 함대 사령관인 해군 소장 로즈에게 조선에서의 선교사 학살 소식을 전하면서 보복을 결심하도록 했고, 아울러 하루빨리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를 구조해 주도록 요청 하였다. 이에 앞서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로부터 박해 서한을 받게 된 만주교구장 베롤 주교도 로즈에게 서한을 보내 보복을 요청하였으나, 로즈가 이 서한을 받은 것은 8월 말 홍콩에서였다.
다음으로 병인양요의 대외적 배경으로는 서유럽 열강들의 식민 정책과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을 들 수 있다. 1842년 아편전쟁(阿片戰爭)의 결과로 중, 영 사이에 남경조약(南京條約)이 체결된 이래 서유럽 열강들은 계속하여 중국과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식민지화를 추진해 나갔으며, 이어 일본과 조선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1844년 10월 중국과 황포조약(黃濟條約)을 체결하면서 다른 외교적인 통상 노력과 함께 천주교에 대한 금압령을 완화시키려고 노력하였으며 , 마침내 3개 항의 그리스도교 조항을 조약 안에 삽입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종교 자유를 얻어낼 수가 있었다.
그 결과 프랑스 선교사들은 프랑스 국민으로서 개항지에 성당을 건립할 수가 있게 되었고, 내지에서 전교 활동까지 가능하게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는 함포(艦砲) 외교를 통해 체결한 황포 조약으로 중국에서 종교 보호 정책을 실현하게 되었고, 이는 1860년의 북경조약(北京條約)으로 더욱 철저하게 보완되었다. 그러나 함포 외교는 훗날 박해가 재연되는한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황포조약 체결 이후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세실은 1846년에 조선 원정을 단행하여 1839년에 조선에서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한 데 대해 문책하였으며, 1847년에는 라피에르 해군 대령이 그 회답을 받기 위해 조선에 출정하였다.
이때 라피에르 일행은 고군산도(古群山島)에서 난파되어 두 척의 군함을 잃었을 뿐 조선으로부터 어떠한 회답도 얻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은 이것으로 중단되지 않았고, 따라서 기회가 오면 다시 조선 원정을 감행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1차 병인양요] 리델 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조심스럽게 보복 원정을 결심 한 로즈는 7월 10일자로 이 계획을 본국의 해군성 장관에게 보고하였다. 그러나 그는 인도차이나의 반란으로 인해 먼저 그곳에 원정해야 했으므로 즉시 조선 원정을 단행할 수 없었다. 이때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7월 13일(음 6월 2일)자로 총리아문(總理衝門)의 공친왕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의 임금을 폐위하겠다고 천명하였고, 아울러 조선에 대해 선전 포고를하였다. 그러자 공친왕은 조선은 고유한 법규를 지닌 완전한 독립 국가임을 설명하면서 중재에 나설 뜻을 비치는 한편. 조선에 이 사실을 자문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8월 22일자의 회자(回苦)를 통해 선교사 처형이 정당한 것임을 변호하였다.
한편 인도차이나 원정에서 돌아온 로즈는 9월 7일자로 해군성 장관에게 서 한을 보내 다시 한번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고, 벨로네 공사의 월권적 행위에 항의하였다.
로즈의 보고를 받은 해군성 장관은 벨로네의 선전 포고가 무효임을 선언하면서 해군성이나 프랑스 정부를 연루시키지 않고서도 조선 원정에 성공해야 한다는 조건 아래 이를 허락하였으며, 이후의 조선 원정은 전적으로 로즈의 책임 아래 수행될 것임을 통보하였다. 이처럼 프랑스 정부에서는 종교 보호 정책을 천명하면서도 정부의 직접 개입은 피하려고 하였다.
로즈의 원정은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1차 원정은 군사적 응징에 앞서 조선을 정찰할 목적에서 실행된 것으로, 이를 위해 로즈는 리델 신부를 통역으로, 최선일, 최인서(崔仁端), 심순여(沈汝) 등 세 명의 조선 신자를 안내인으로 선발하였다. 그런 다음 1866년 9월 18일(음 8월 10일) 기함 프리모게 호를 비롯하여 통보함 1척, 포함 1척 등 세 척의 군함을 이끌고 체푸를 출발하였으나, 즉시 한강 입구를 발견하지 못하고 아산만으로 향하다가 9월 20일에야 리델 신부를 태운 통보함이 한강 입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로즈는 프리모게호를 물치도(幼維島, 영종도 우측의 섬)에 남겨 둔 채 통보함과 포함만을 지휘하여 9월 23일부터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9월 26일 한강 입구를 막고 있던 조선의 소형선박에 함포 사격을 하며 2척을 격파한 뒤 양화진(楊花津)올 거쳐 서강(西江)까지 올라가면서 3장의 정밀한 해로 도를 만들었다. 이때 리델 신부는 서강 앞에서 1박을 하는 동안 잠시 양화진 인근에 상륙하였으나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이튿날 프랑스 함대는 그곳을 떠나 물치도를 거쳐 10월 3일 체푸로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차 병인양요의 전말이다. 한편 조선에 남아 있던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는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원정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실패하고. 10월 11일(혹은 12일)에는 미리 마련해 두었던 소형 선박을 타고 조선을 떠나 10월 26일에서야 체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9월 2일 대동강에서 미국 상선 제너널셔먼 호를 물리쳤을 때 공을 세운 숨 은 공로자를 찾아 상올 주고 또다시 그러한 공로자가 나오기를 회망하였으며. 대원군은 어영중군(御營中軍)이용회(李容邸)로 하여금 양화진 인근을 방비하도록 하는 한편. 방을 붙여 군사를 모으도록 하였다. 또 어린 고종 도 대신들올 불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칠 방도를 모색하도록 하였다. 그 후 프랑스 함대가 물러간 뒤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조선의 강물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진 것 또한 그들 때문이므로 더럽혀진 강물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있던 총융진(總戒陣)에 새 형장을 만들어 무수한 신자들을 이곳에서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후 양화진은 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서는 절두산(切頭山)으로 불리게 되었다.
〔2차 병인양요〕체푸로 돌아간 로즈는 10월 5일 한강 봉쇄를 선언하였다. 그런 다음 10월 11일(음 9원 3일)에 기함 기리에호를 비롯하여 모두 일곱 척의 군함을 이끌고 2차 원정을 단행하였다. 이들 함선에는 대포 10문이 실려 있었으며, 일본에서 불러온 병력을 포함하여 총 병력 1.000명에 리델 신부와 안내를 맡은 조선인 신자 3명도 함께 타고 있었다. 프랑스 함대는 10월 13일 물치도를 거쳐 이튿날 갑곶 진(甲幸津)에 이르렀고, 10월 16일에는 마침내 강화부를 점령하였다.
이때 부터 프랑스 군인들의 약탈이 시작되었고, 일부는 민가를 침입하기도 하였다. 그 약탈품 안에는 군기뿐만 아니라 도자기, 직물, 은괴. 그리고 역사 서적을 비롯하여 수많은 장서들이 있었다. 한편 로즈는 이 원정이 프랑스 국민인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한 정당한 보복임을 천명하는 서 한을 조선측에 보냈으나 회답을 받을 수는 없었다.
강화도 실수(失守) 소식을 전해 들은 조정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급히 순무영(巡推營)을 설치하고 이경하(李景夏)를 대장, 이용희를 중군. 제주 목사 양헌수(梁憲洙)를 천총(千總)에 임명한 뒤 출정하도록 하였다. 또 대원군은 이항로(李I里老)의 주전설을 받아들여 양이보국(樓喪保國)을 표방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경향에 엄명하였다. 10월 26일, 조선인 신자로부터 조선군의 출정 소식을 들은 로즈는 통진(通津) 인근의 문수산성(文殊山城)으로 120명의 정찰대를 파견하여 우수한 무기로 그곳을 지키고 있던 조선 군사들을 물리쳤다.
그러나 정찰대는 더이상 진군하지 않고 강화도로 돌아왔으며, 로즈는 포함으로 한강 입구를 방비하도록 하였다. 이때 조선의 천총 양헌수는 어융방략(藥戒方略)의 계책으로 강화도에 잠입하여 기습을 감행하기로 하고 비밀리에 정족산성(燕足山城)을 점령하였다. 다시 한번 이러한 사실을 조선인 신자로부터 전해 들은 로즈는 11월 9일, 올리비에 대령으로 하여금 군대 160명을 이끌고 야포 한 대 없이 정족산성을 공략하도록 하였고, 그 결과 프랑스군은 새로 만든 대포를 앞세운 조선군에게 무참한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패배 후 로즈는 즉시 강화도 철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11월 10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11월18일(음 10월 12일)에는 물치도를 떠나 입파도(立波島)에 정박하였고, 11월 21일에는 완전히 조선 해역을 떠나 2척은 일본으로, 1척은 체푸로. 그리고 나머지 4척은 상해로 돌아갔다. 이에 앞서 리델 신부는 중국을 다녀온 함정에 타고 있던 페롱 신부와 칼래 신부와 상봉할 수 있었으나, 조선 원정의 실패로 인해 조선에 다시 입국할 수있는 희망은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로즈와 함께 11월 21일 상해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결과와 으|미〕조선을 떠나기 직전에 로즈는 해군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자신의 목적이 완전히 달성되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공사 벨로네를 비롯하여 북경의 외교관들, 조선 원정에 참여했던 리델 신부는 이원정이 실패로 끝났다고 보았다. 특히 벨로네 공사는 해군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로즈의 원정은 조선에 타격을 주기는커녕 정족산성 참패 후의 서두른 철수로 인해 오히려 조선에 승리감을 안겨 주었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학살을 확대 시키도록 하였다고 항의하였다. 그러나 해군성 장관은 로즈를 두둔하여 그의 성공을 인정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중국 원정에서 얻은 것과 비교해 볼 때, 우선 군사적으로 로즈의 원정은 강화도 점령까지는 성공적이었지만 결국 프랑스 함대의 패배로 끝나게 되었다.
둘째 외교적으로 로즈는 수교 관계가 없던조선으로 가서 통상 조약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한 채 귀환하였고, 이것은 오히려 조선의 쇄국 정책과 척사 사상을 강화시켜 주고 만 결과를 가져 왔다.
그리고 세 번째로 병인양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연장시키고 가열시킴으로써 중국에서처럼 외교적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는 동시에 조선에 재입국하기를 희망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실망만을 안겨 주고 말았다. 실제로 대원 군은 11월 21일에 천주교도들을 남김없이 색출해 내도록 전국에 명하였으며, 이틀 뒤인 11월 23일에는 성연순 등을 체포하여 강화도에서 교수형에 처하고 전국에 선참후계(先新後啓)의 영을 내렸다.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조선에 입국할 수 있게 된 것은 10년뒤인 1876년이었다.
아울러 병인양요는 프랑스가 취해 온 종교 보호 정책의 좌절을 의미한다. 프랑스가 다시 한번 이를 시도하는 것은 20년이 지난 1886년의 한불조약 체결 때였다. 물론 프랑스는 로즈의 원정을 성공한 것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으며, 따라서 1867년 3월에 미국이 조선에 대한 공동 원정을 제의하자 새로운 원정이 불필요하다고 이를 일축하였다. 또 같은 해 5월 벨로네의 후임으로 북경에
부임한 랄르망 공사가 새로운 원정이 불가피함을 제의하면서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상 요구는 물론 통상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을 때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리델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프랑스 함대에 동승한 사실은 그 동
안 천주교 신자를 서양 세력의 앞잡이로 간주해 오던 인식을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그 결과 1868년에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조선 원정을 감행 하여 ‘덕산 굴총 사건’을 일으켰을 때,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이 안내자로 동승한 사실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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