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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7강 - 아짠 문의 열반과 영원한 마음(00:07-5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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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짠은 고승이라는 뜻이에요. 아짠 문 이러면 저는 이제 스타워즈 이런 게 생각나요. 이쪽 양심 제다이들 쪽도 이렇게 각 나라별로 붙이는 게 다른데 이쪽 남방불교는 아짠이라고 불러요. 아짠, 아짠 문. 1870년에서 1950년까지 사신 분인데 열반과 영원한 마음에 대한 가르침 볼까요? 이게 힌두교랑 동일하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힌두교랑. 힌두교가 에고의 세계를 떠나서 참나의 세계에 안주하면 이 에고가 난 줄 알고 살았잖아요. 그럼 이게 이 참나가 아닌 거죠 힌두교에서는 거짓 나로 봅니다. 거짓 나이기 때문에 참나야말로 나의 진짜 나이기 때문에 참나를 깨닫고 나면, 참나를 깨닫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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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이 에고는 생각 감정 오감 작용을 일으키겠죠. 아직 에고가 있더라도 만약에 이 참나에 안주해버렸다. 안주했다는 건요 늘 참나를 자각하고 사는 겁니다. 에고도 자각하는 거죠. 사실은 에고도 자각되고 참나도 자각하지만 힌두교에서는 참나를 자각했다는 걸 포인트를 두고 이 에고는 어차피 거짓 나인데다가 참나의 작용에 불과하다고 보는 거예요. 참나의 작용이다. 그래서 힌두교는 불교식으로 말하면 법공 마인드거든요. 만법은 공하다 대신에 만법은 참나의 작용이다. 브라만, 아트만의 작용이다. 이렇게 보기 때문에 에고에 대해서 이제 무시하고 참나 관점에서만 볼 때 참나에 안주했으면요 생존 해탈자라고 합니다. 생존 해탈자. 그런데 이 에고가 이제 죽을 때 이 에고가 이 생각 감정 오감이 사라진다고 보는 거예요. 죽을 때 이게 사라지면 이제 사후 해탈자가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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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또 이제 유신 해탈, 몸이 아직 있다. 무신 해탈 이렇게도 얘기하고요. 몸이 없는 해탈. 이게 이제 힌두교에도 똑같이 있어요. 이거를 그대로 불교에서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생존 해탈만 돼도 힌두교, 힌두교의 유명한 마하리시니 이런 도인들은 다 살았을 때 열반에 드신 거 아니에요. 살아서 열반에 들었다면 그분이 그러면 계속 또 죽었다는 건 뭐예요? 열반에 이미 들었는데도 생각 감정 오감은 계속 작동하거든요. “그럼 이게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까? 이게 업을 짓지 않습니까?”라고 할 때 힌두교에서 대는 게 뭐냐 하면 “새끼줄을 불로 태우면 재가 새끼줄 모양을 하고 있긴 하지만 새끼줄로는 못 쓰지.” 또 이런 이런 비유도 들어요. 마하리시 같은 경우 “선풍기를 딱 버튼을 눌러봐라. 그러면 이제 끊어졌지만 돌긴 돌지.” 이런 지금 동력이 끊어졌는데 돌고 있는 상황, 그 업 때문에 지금 카르마가 굴러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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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눈에는 생각 감정 오감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업의 근원이 끊겼다. 참나에 안주했다는 건 업이 끊어진 거다. 힌두교식이에요. 그래서 어차피 그 업이 이제 돌다가 그 생의 업을 다 채우면 어떻게 돼요? 죽겠죠. 그때 이제 완벽하게, 완벽하게 참나 안에 녹아들어간다. 이게 사후 해탈입니다. 이게 그래서 대해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에서도 똑같은 구분이 아라한들이 생존에 얻는 열반, 여기서는 참나 대신에 아라한들은 열반 안주라고 하죠. 열반에 안주한 양반들은 살아서 아라한이 되고 아라한들은 열반에 들었죠 무슨 열반에 들었냐? 유여열반. 아직 남은 게 있다는 겁니다. 있을 유(有) 남을 여(餘). 남은 게 있는 열반, 몸뚱이가 남았잖아요. 그게 유신 해탈과 똑같죠. 그다음에 무신, 남은 것도 사라지는 거. 무여열반에 들어가면 이게 위대한 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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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 이럽니다. 마하 열반. 위대한 열반에 들어서 이렇게 완전히 사라진다. 열반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거예요. “그러면 존재하지 않습니까?” “열반에 들었다니까.” “그럼 존재하는 건가요?” “오온이 없다니까.” 이런 식이에요. 그 사후의 부처는, 아라한은 어떻게 되는지 부처님이 얘기하지 않았어요. 없다 있다도 아닌 거예요. 없다고 하자니 열반에 드셨고 있다고 하자니 오온이 작동하지 않는단 말이에요. 그러니 살아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그 상태, 그걸 규정하려고 하지 마라는 거예요. 너가 체험하라고. 그래서 언어화 안 합니다. 부처님은 그 이상 대답하시지 않은 질문 중에 하나예요. 그게 부처와 아라한의 사후는 어떻게 되는가? 존재한다 안 한다 말할 수가 없어요. 그게 이제 무여열반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힌두교랑 초기 불교는 동일하다. 유사하다 같다고 하면 또 참나니 열반이니 또 싸울 것 같으니까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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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시죠. 그럼 이 아짠 문은 어떻게 봤는지? 1. 유여열반의 경지(생존 아라한). 생존한 아라한이죠. 아짠이 깨달음(아라한과에 도달)을 완성한 이후로 오온은 조금도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고 그전과 같은 상태를 유지했다. 생각 감정 오감은 그대로 굴러갔다는 소리예요. 오온은 여전히 마음의 지시에 따라 작용하지만 이제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늘 열반에 안주했기 때문에 집착에서 벗어나 있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미 오온과 마음은 스스로 평정되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대항하는 투쟁은 더 이상 없었다. 늘 깨어 있으니까 오온이 싸우지 않더라. 시비 걸지 않더라 이겁니다. 이러한 상호 협동의 상태는 각기 재갈 길을 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즉 업이 다할 때까지 제 갈 길을 계속 가는 겁니다. 그러다가 이제 완전히 이제 나중에 분리되는 거죠. 여기서 말한 제 갈 길은 이제 완전히 나중에 이제 헤어지는 거죠. 오온과 헤어질 때까지 계속 작동한다는 겁니다. 자기 식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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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역할을 다 한다는 겁니다. 2. 무여열반의 경지(사후 아라한) 볼까요? 마음이 정화된 이들(아라한)은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다. 몸은 죽음이라고 하는 마지막 순간에 해체된다. 그들은 외면상으로든 내면상으로든 어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해서 더 이상 집착이나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분리는 모든 오온에 대한 진정한 작별이다. 어떤 두려움이나 근심도 없으며 다른 세계로 가고픈 소망도 없고 선악을 체험할 것이라는 생각도 없다. 선악도 초월해서 그 순간에는 오직 속세에서 해탈된 마음 즉 열반에 든 마음에 편안함과 확고부동함만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시공을 초월한다.(이 시공을 초월한 해탈된 마음이 바로 ‘청정광명심’이다.) 이 상태가 제가 볼 때는 우리가 계속 지금 읽어오고 있는 부처님이 강조하셨던 특징도 없고 볼 수 없지만 무한하고 모든 곳에서 빛나는, 오온과 지수화풍 사대도 사라진 그 자리, 청정광명심이라고 보시면 되겠죠. 청정광명심에 완전히 녹아 들어간다라고 보시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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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힌두교랑 기본적 구조가 똑같다니까요. 그래서 여기서는 이제 몸이 사라지면, 근데 이게 또 문제가 되는 게 그러면 몸이 사라질 때 그럼 영계에서는 계속 존재하는 거 아니야? 영계에서는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힌두교나 초기 불교는 그리고 남방 불교는 그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완전히 열반에 들어가 버린다고, 시공을 초월한 세계로 들어가 버린다고 믿는 거예요. 영계가, 아직 영계에 접속이 된다는 건 윤회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밖에 안 되니까 윤회를 완전히 초월하려면 완전히 사라져야 된다고 보는 겁니다. 이게 이제 대승과 달라요. 대승은 사라지지 않겠다는 거죠. 그리고 사라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여열반 무여열반 이렇게 따지는 게 대승에서는 별 의미가 없어요. 이런 거는. 대승은 본래 열반이에요. 본래 내가 이미 열반에 들었다는 거예요. 이 말이 맞는 게 여러분 보세요. 열반은 지난 시간에도 읽었지만, 우리가 같이 읽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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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 자리가 인과가 있는 자리가 아니죠. 인과에 영향 받는 자리가 아니죠. 즉 뭐냐 하면 여기는 본래 탐진치가 없지. 열반을 우리가 어떻게 가공해가지고 탐진치를 없앨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본래 탐진치가 없죠. 그래서 본래 열반인 거예요. 여러분 의식의 어느 한 곳은 지금도 이미 본래 열반인 거예요. 그 열반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접속을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 지금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현존하는데 지금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죠. 그래서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사실을 알고 보면 여러분이 뭔가 대상을 알아차리건 여러분의 존재 자체를 알아차리건, 그 알아차리는 의식을 알아차린다는 얘기예요, 존재 자체를 알아차리건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사실은 알아차림, 순수한 알아차림이 사실은 열반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왜? 그 상태에서만 탐진치가 없거든요. 여러분 의식의 근원을, 원래 이미 열반 상태인데 여러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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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의식이 그걸 알아내기 위해서 알아차리려는 마음 챙김의 수련을 하는 거예요. 수행을 하다 보면 결국 “알아차리던 내가 이미 열반이었구나” 하는 걸 아는 것뿐이에요. 지금 저를 알아차리시죠? 그 알아차린 자리는 열반이에요. 거긴 탐진치 없습니다. 탐진치가 굴러가는 건 여러분 이제 의식의 영역이에요. 탐진치가 의식의 영역에서 신나게 굴러가고, 무의식에서부터 그 탐진치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거고요. 더 깊은 무의식, 무의식 안에서도 얕은 데서는 에고가 작동을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탐지치가 작동해요. 여기서 계속해서 의식으로 올립니다. 신나게 여러분이 느끼는 탐진치는 의식의 탐진치고 배후에는 무의식의 탐진치가 있고 더 들어가면, 더 깊은 무의식에는요 여러분이 탐진치, 여러분이 일으킨 모든 작용이 업으로 기록돼요. 그래서 이 업에 의해서 계속해서 또 작용이 일어나는 거. 근데 그 너머에서 순수하게 알아차리는 그 의식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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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탐진치니 업이니 하는 게 붙을 수가 없죠. 그 자리가 열반이에요. 그래서 지금 저를 보고 있는 의식이 이미 열반에 들었다는 걸 아셔야 돼요. 그리고 지난번 태국 스님만 해도 얘기하잖아요. 우리는 찰나찰나 계속 열반을 체험한다. 그게 열반인지를 모른다는 거죠. 본래 열반이지 그게 노력해서 열반이 아닌데. 자 청정광명심도 본래의 모든 곳에서 무한하게 빛나고 있지, 지금 여러분 의식 안에서요, 여러분이 노력해서 광명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인과가 없어요. 그 자리는 스스로 빛나는 자리예요. 스스로 영원히 빛나고 현존하는 자리를 기독교에서 뭐라고 할까요?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영원한 현존. 스스로 현존하시는 분, 영원히 현존하시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어요. 똑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또 다른 버전이에요. 불교는 불교의 또 다른 버전이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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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세계에서는. 이해되시죠? 이 부분. 힌두교 똑같아요. 힌두교도 배척하지 마세요. 힌두교도 똑같아요. 이 참나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뿐이에요. 진짜 청정광명한 마음을 참나라고 하면 맞아요. 그런데 상을 세워놓고 에고의 세계를 참나라고 아트만이라고 주장하니까 부처님이 거부한 거예요. 참나에 무슨 나라는 게 묻어 있으면 안 되거든요. 근데 나라는 게 안 묻어 있다면 그 자리를 참나라고 해도 돼요. 우리 의식의, 우리 모든 마음 작용의 모든 의식, 내가 경험하는 생각 감정 오감의 근원 자리니까. 모든 빛은 거기서 시작하니까. 스스로 현존하는 그 빛에서 우리의 모든 의식 작용이 일어나고 의식 작용이 일어나니까 나와 남이 여러분 우주에 존재할 수 있는 거거든요. 이 우주가 여러분 마음 안에서 작용할 수 있는 거거든요. 그렇게 보시면 이런 것도 좀 이해가 잘 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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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러분 안에는 본래 이미 깨달아 있는 참나가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짠 차 스님은 아는 마음을 붓다라고 하잖아요. 아는 마음을 부처님이라고 왜 부르겠어요? 그 아는 마음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른다니까요. 이쪽에서는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거고. 진리의 마음이라서 그래요. 진리 그 자체의 마음, 거기엔 어떤 에고적 사심이 없거든요.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예요. 알아차리는 의식이 이건 그냥 내 것 같거든요. 이 알아차리는 의식이 지금 저를 볼 수 있는 그 의식이 하느님이라는 걸 알아야 기독교적으로도요 하느님을 아는 거예요. 그래야 “하느님 없이는 내가 숨 쉬고 생각하고 울고 웃고 움직일 수도 없구나” 이 말이 그때 나와요. 하느님이 뭔지를 모르니까 나 밖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니까 하느님이 날 조종해서 이런 말을 들으면요 누가 조종해서 숨 쉬게 하고 나를 막 움직이게 하고 기계처럼 나를 굴리는 줄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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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아니라 지금 여러분 안에 있는 영원한 현존의 그 느낌이 사실 하느님인데. 이런 차이예요. 그래서 아시면 별거 아니니까. 사실 이렇게 진지하게 얘기하기에도 웃겨요. 별 얘기가 아니거든요. 제가 볼 때는. 웃기지 않나요? 이런 진지하게 얘기하는 게. 여러분 의식이 사실은 삼입니다. 겁나 어려운 얘기, 이건 대학원이나 가야 불교대학원이나 가야 고민할 얘기 같죠? 여러분 의식은 본래삼매 상태, 그걸 본연삼매라 그래요. 그래서 마하리시는 이 참나 자체가 본연삼매 상태라고 하는 거예요. 그걸 대승에서는 본래열반 상태라고 하는 거예요. 똑같아요. 공유하고 있다니까요. 힌두교랑 불교랑 엄청나게. 기본적인 거를 체험한 사람한테는 똑같은 얘기인데 본래삼매, 본연삼매란 말하고 본래열반이라는 말이 다를 것 같으세요? 본래라는 건요 인간이 조금도 가공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렇다는 거예요. 손댈 필요가 없이 어떤 조작도 어떤 수행도 안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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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는 영원히 온전하고 스스로 빛나고 무한한 자리다. 이걸 이해 못하시니까 아직도 막 참나론 비방하고 한마디만 하면. 제 강의를 듣고 참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그 자리가 참나거든요. 제가 뭘 뭐라고 하겠어요? 그것도 참나 작용인데 사실은. 뭐라고 떠드는 것도. 재밌죠. 그러니까 저는 그래요. 예수님도 뭐죠? 그런 말씀하셨죠. 성부 성자, 그러니까 나를 욕해도 좋다. 성자를 욕해도 좋고 아버지를 욕해도 좋다. 성부 욕해도 괜찮대요. 근데 성령을 비방하지 마라고 하는 게요. 성령이라는 게, 여기서 성령의 의미는 너 안에 있는 그 참나자리는 비방하지 마라 이거예요. 그러면 답이 없어요. 너 안에 있는 그 신성을 비방해버리면 답이 없다. 그러니까 나를 욕해도 좋고 아버지를 욕해도 좋다. 하지만 아버지가 너 안에 임해 계신 그 자리가 성령인데 너 안에 있는 신성을 비방하지는 마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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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해요 예수님이. 그럼 답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거예요. 제 참나를 비방해도 좋고 저를 비방해도 좋은데 본인의 참나를 부정하지는 마세요. 그 모든 게 참나 작용입니다. 사실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그 뭐죠? 정광명, 정광명의 마음, 정광명심이라고 할게요. 광명심 그래도 되고, 또 정광명 이래도 돼요. 그러니까 정광명심 하면은 최대한 다 써드린 거예요. 요 정광명심 요게 달라이 라마도 체험하신다고 했죠? 달라이 라마가 아침마다 체험하는 게 청정광명심을 체험해요. 이 명상을 해요. 왜냐하면 이게 이제 닝마파에서 하는 명상인데 우리랑 똑같아요. 최상승선을 달라이 라마도 하시더라고요. 왜냐하면 달라이 라마는 4대 문파에서 다 배우거든요.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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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명상법이 제일 본인한테 맞으셨다는 얘기죠. 할 만했다는 얘기죠. 아침마다 명상하신 거 써놓으신 거 보니까 과거 몰라 미래 몰라 지금 이 순간 현존 하다 보면 청전 광명심이 알아차려진대요. 그때가 되면 본인도 써놨어요. “달라이 라마 명상을 말하다”란 책에 청정광명심 상태에서는 소리가 들려도 소리 또한 청정광명심의 작용으로 느껴진대요. 달라이 라마도 느낄 거 다 느꼈죠? 근데 나와서 꼭 뭐라고 하냐면 이 청정광명심은 영원은 맞는데 불변은 아니다. 대신에 영원불멸이다. 계속 생멸하고 있다. 이 자리도 사실은 계속 알아차리고 있다. 뭔가를. 그러니까 뭔가 하나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리고 계속 그 알아차리면 사라지고 또 알아차리고. 참나 자리도 이러고 있다. 그러니까 즉 정광명도 광명하게 알아차리고 있는데 계속 생멸하면서 알아차리고 있지 영원한 건 없다.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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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믿는 귀류 논증 중관파, 중관파 중에서도 겔룩파의 중관파에서는 영원한 건 없다 거든요. 전제가. 그러니까 이 정광명도 계속 생멸해야 돼요. 대신에 영원히 에고랑은 달라야 되니까 에고 작용, 이 육근 작용과는 달라야 되니까 불멸이고 영원해도 돼요. 그리고 인과도 없대요. 그리고 시작된 적도 없대요. 그냥 늘 태초부터 이렇게 알아차렸대요. 하나만 달라요. 무상해야 되거든요. 이것도, 이것도 계속 변하고 있어야 돼요. 그런데 저는 괜찮다는 거예요. 달라이 라마한테 이게, 이게, 이게 참나다. 사실 당신이 말한 그게 참나다. 정광명. 참나라고 안 불러도 좋다. 당신도 똑같은 그 정광명심을 의식하고 있고 우리도 그걸 의식하고 다만 여러분 보세요. 참나 체험했는데 참나 체험 여기 하신 분들 많죠? 저한테 왔더니 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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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는 시공을 초월했고 영원하고 불멸이며 불변하는 자리입니다.” 하면 여러분이 그런 줄 알 거예요. 근데 티벳 불교를 가서 그 얘기를 하면 “그게 영원하고 불멸이긴 한데 끝없이 생멸하면서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쩌실래요? 또 그런가보다 하겠죠. 뭔 차이인지 아시겠죠? 이게 이걸 미세하게 판단하기는 힘들거든요. 근데 개념이 먼저 주입돼버리면 그런 줄 알아요. 이해되시죠? “참나가 알고 보면 참나도 계속 진동하고 있어.” 그러면 그런 것 같지 않으세요? 이게 별 차이가 있어요? 이게, 이걸 따지는 게 실익이 있냐고요? 결국 뭐냐? “달라이 라마도 사실은 참나론자다”라는 결론에 도달하죠. 달라이 라마도 날마다 참나를 만나고 정광명, 그 알아차리는 그 마음에 의지해서 모든 수행, 중관파의 수행을 닦아가고 계신 겁니다. 결국 다 일체를 이 참나의 힘으로 해가고 계시다고요. 정광명의 이 마음이 없다면 이거 석가모니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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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명심은 불교의 기본입니다. 이걸 부정은 못 해요. 그러니까 이것도 무상하다는 식으로 논리를 전개할 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뭐 중요하냐 이거예요. 아무튼. 인과도 없고 시공도 초월하고 시작도 없는 그런 정광명심이라면 좀 진동하는 데 어때요? 영원하다는데. 그게 의미가 있어요? 참나도 사실은 진동이죠. 진짜로 진동이에요 참나도. 우주에 존재하는 게 진동 안 할 수 있나요? 다만 현상계 차원의 진동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태극에도 음양을 그려놨죠 그럼 현상계도 음양이죠 그럼 현상계에서 음양이 찢어졌으면 분열인데 왜 태극에다가 분열을 해놨죠? 태극은 시공을 초월한 자리인데? 음양이 거기서는 하나로 녹아 있거든요. 근데 음양이 녹아있지만 거기도 진동의 세계입니다. 사실은. 에너지의 세계거든요. 원기는 에너지 아닐 것 같으세요? 거기 원기의 세계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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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후천기가 아니라 선천 기운의 세계거든요. 선천기도 진동이에요. 차원이 다른 진동이죠. 즉 달라이 라마식으로 다 인정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맞다고. 근데 차원이 다른 무상이라고 자기도 똑같이 얘기했어요. 그 시작도 인과도 없는 아무튼 특이한 무상함이잖아요. 그렇죠? 극적 대타협. 저는 다 살려드립니다. 제가 비방만 하진 않아요. 비방한 다음에 손을 내밀어드려요. 알았으니까 같이 놀자고. “이런 차이가 있는 건 알겠지? 다만 같이 놀 수 있다.” 차이가 있어도, 달라도 같이 놀 수 있어요. 그래서 중관파도 같이 명상하고 같이 참나 체험하고. 여러분이 좀 맞춰주세요. 참나란 말 앞에 가서 좀 쓰지 말고. 남방불교 이런 아짠 붙은 분들 만날 때는 열반이라고 꼭 얘기하고. 제가 열반을 체험했는데 이렇더라. 그렇죠. “근데 왜 지나 잘하지 왜 우리한테 그러냐?”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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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해요. 강의를 하다 보니까 두루 얘기해야 되는 거지. 그분들을 직접 만나면 다 맞춰드립니다. 그분한테 다 맞춰드려요. 강의는 원리 원칙을 정해놔야 되니까 이렇게 세게 얘기 안 할 수가 없고 개인적으로 만날 때는 방편이 들어가기 때문에 달라요. 방편을 써야 돼요. 그분이 힘들어하는 얘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건 싸우자는 얘기밖에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분들한테는 참나 얘기하지 말고 정광명을 얘기하세요. 티벳 가서는 정광명이라고 하세요. 그러면 “나 지금 아침마다 최상승선을 닦아서 정광명이 늘 체험되고 정광명이 각성되고 늘 정광명 상태다.” 이런 얘기하시면 부러워할 겁니다. 그걸 참나라고 얘기하면 여러분 바로 어디 사탄이 왔다라고 취급받으실 수 있어요. 이게 보세요. 근데 그 중관파가 언어의 그런 언어의 잘못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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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집착하는 걸 그렇게 까는 분들인데 지금 보시면 누가 언어에 집착해 있죠? 중관파가. 이게 코미디예요. 가장 언어 비판하는 분들이 사실 언어에 걸려 있어요. 언어로 밥벌이하는 분들이 언어에 제일 걸려 있게 돼 있어요. 이해되시죠? 그런 거 감안하시면 좋겠습니다. 저희는 그런 분들 어떻게 상대할지까지 얘기해 드려요. 그분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법. 같이 이 보살도를 딱딱하게 어떻게 인도할 건가까지 알아야 보살도지 비방하고 끝내서 좋을 게 뭐 있어요? 나 잘났다는 것밖에 안 되는데. 세 번째, 3. 영원한 마음, 영원한 다르마(법아法我, 일심一心, 법신法身). 아짠 문 이분도 정광명심을 어떻게 체득했고 어떻게 이해했는지 볼까요? 법아라는 말을 써요. 법아, 다르마의 나. 이 정광명을요 아짠 문께서는 체험하시고 진리의 나라고 불러요. 이게 부처님의 법신에 해당되거든요. 그래서 부처님이라고 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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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짠 문의 제자가 아짠 차인데 아짠 차 그분은 아는 마음을 부처라고 아예 불렀잖아요. 그쪽 발음으로 붓도라고 했잖아요. 이 알아차리는 마음이 진리의 나고요. 진리의 몸인 거예요. 진리의 마음이라고 부르죠. 나라고는 안 부르죠. 아짠 문도 진리의 마음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법아. 우리는 이렇게 보실 수 있죠. 참나를 이렇게 제가 표현해 본 거예요. 참나를 아짠 문식으로 표현하면 법아가 되지 않을까? 다르마의 나, 다르마의 마음이라고 했으니까요. 보세요. 일단 ‘다르마’(진리, 법法)에 의해 쟁취된 마음은 ‘영원한 마음’, ‘영원한 다르마’가 된다. 이게 이런 것도 재미있는 게요. 여러분 조선 선비들의 최고 목표가 뭔지 아세요? 이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죠. 양심과 욕심. 그런데 이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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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자들이 연구한 건 인의예지의 원리죠. 천리라고 하는, 천리와 마음을 합치키는 게 성리학자들의 희망입니다. 이게 합치되면 성인이라 그래요. 양심과 욕심이 인의예지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게 될 때 여러분 성인이 되는 거예요. 불교도 똑같아요. 내 마음이 여기에 이제 법이라고 와요. 다르마랑 하나가 되는 거. 이게 목표입니다. 내 마음이 다르마와 하나가 되는 거, 진리와 하나가 되는 거. 그래서 일단 진리에 의해 쟁취된 마음은 영원한 마음, 그 마음도 그러면 진리와 하나 된 마음은 이 마음도 영원하다는 거예요. 이 영원한 마음이 열반이라는 거고요. 열반이고 이게 진리가 되는 겁니다. 진리와 마음, 이게 원래 하나예요. 원래 하나니까 이 둘이 하나가 되지 아니면 억지로 다른 거를 합친다면 말이 되겠어요? 성리학에서도 마음 안에 원래 원리가 들어있으니까 이게 하나니까 마음이 원리랑 하나가 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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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똑같아요. 영원한 마음 영원한 다르마. 그 다르마도 영원하고 마음도 영원한 거예요. 그럼 영원한 마음이 있다는 얘기죠. 이분 말대로라면. 진리와 하나 된 마음이라는 건 영원해야 돼요. 진리는 영원하기 때문에. 이것이 절대적인 ‘지고至高’와 ‘불멸不滅’임은. 불멸이래요. 지극히 높으며 영원히 변치 않는 거라는 걸 어느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르마’는 죽은 건너편에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서 기쁨을 취하는 자는 결코 다르마를 깨달을 수 없다. (아짠 마하 부와 엮음, 김열권 옮김, “위빠사나의 성자 아짠 문”) 이게 또 뭐죠? 소승불교의 한계인데 소승불교는 죽어야, 사후 해탈까지 가야 완벽한 다르마를 성취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영원한 마음을 성취하려면 완전히 오온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이것도 힌두교에서 똑같이 보이죠. 힌두교도 마하리시도요 마하리시도 항상 주장이 “나는 지금 참나 상태고 참나는 본래 삼매이기 때문에 나는 이미 영원한 삼매에 들어있다.”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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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난 뒤에 사후 해탈하느냐 마느냐는 사실 중요치 않다라고 그래요. 왜냐하면 그 참나가 그 참나이기 때문에. 보세요. 이렇게 있으나 이렇게 여러분 참나에 안주하나 이게 다 사라진 뒤에 참나만 있는 상태 요게 대열반이라니까요. 대해탈이고.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같은 참나죠. 그러니까 구름 낀 태양을 보나 구름 다 지워진 뒤에 태양을 보나 그 태양은 그 태양이지 다른 태양이 있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따라서 이미 생존 해탈자도 이미 해탈자라고 하는 거예요. 살아서 열반에 안주한 분도 이미 아라한인 거예요. 이미 탐진치를 벗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실제 그분이 탐진치를 다 벗었냐? 아니에요. 실제 그분이 만약에 탐진치를 다 벗었으면, 보세요, 어리석음을 벗었다면 부처님하고 똑같은 지혜를 갖고 있어야 돼요. 아라한들은 절대 공력이, 내공이 부처님 근처에 못 갑니다. 쌓아놓은 공덕이 달라요. 즉 턴 업장이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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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얘기는 업장이 아직 많다는 얘기예요. 아라한들은. 그렇죠. 그러니까 업장이 많아도 상관이 없다니까요 원래. 원래 열반인 그 자리를 깨달았다는 거지 탐진치가 다 닦인 뒤에 깨닫는 게 아니에요. 이게 기독교식으로 가면 뭐라 그래요? 내가 착한 일을 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그래요. 믿음으로 구원받지. 맞는 말이에요.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예요. 착한 일 했다고 받는 게 아니에요. 왜 그런지 아세요? 원래 영원히 현존하는 하느님과 접속되는 게 구원인데 그 접속은 착한 일 했다고 접속되는 게 아니에요. 착한 일을 하면 접속에 용이한 환경이 만들어지는 거지. 결국 마지막 접속은 뭐예요? 나를 놓고 완전히 몰입하는 거죠. 그렇죠. 선(禪)을 닦는 거죠. 불교식으로. 기독교식으로는 기도와 믿음으로 접속합니다. 오직 하나님 외에 어떤 내 마음 안에 다른 대상이 없을 때 딱 몰입이 돼가지고 접속이 돼요. 믿음이면 접속돼죠. 즉 내가 아무리 죄가 많아도 접속 가능해요. 문제는 뭐죠? 여기서 하나 더 나가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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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은 된다니까요. 기독교식으로 칭의잖아요. 칭의, 의로운 하나님 자녀는 돼요. 갑자기 접속했더니 하나님 안에 안주했네요. 근데 여기는 지금 업장이, 때가 많네요. 칭의는 됐죠. 불교식으로 돈오는 했어요. 견성은 했어요. 근데 돈오는 했지만 견성은 했지만 성불이 안 됐어요. 돈오는 했지만 점수가 안 됐어요. 칭의는 했지만 성화가 안 돼있다는 얘기입니다. 거룩하지 않아요 이 사람이.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건 알았죠. 근데 하나님 뜻대로,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살 때 성화라고 하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그러니까 교회 다니신 분이 이런 말하면 엉터리 말이라고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 행위로 실천으로 받는 게 아니다. 따라서 행위는 중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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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끝.” 이렇게 주장하시면 엉터리입니다. 잘 모르시는 분입니다. 진짜로 구원받았다면 행위로 나와야 돼요. 그러니까 이것만 기억하시면 돼요. 행위로 구원받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구원받았다면 행위로 입증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러니까 행위가 변해야 돼요. 행위가 안 변했는데 구원받았다고 우기면 이상한 거죠. 이해되시죠? “니 안에 하느님 안 사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네 안에 하느님이 안 사는 것 같아. 좀 알아봐. 전문가 좀 만나봐.” 구원받았다는데 전혀 행동이 안 달라졌다면요 그러면서 막 우겨요. “야 행위로 구원받는 거 아니야.” 막 이러면 “너 좀 심각해 지금. 왜냐하면 행위로 구원받는 건 아닌데 네 말처럼 구원받았으면 행위로 나와야 돼.” 그때는 야고보서를 읽으면 돼요. 야고보서가 보면은 행위로 안 나온 놈들은 하나도 믿을 놈 아니다. 가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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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시점이 다른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랑 구원받으면 행위로 나와야 된다가 충돌되는 말 같은데 충돌 나는 말 같은데 같은 말이에요. 이해되시죠? 이게. 이게 불교 이해가 된다니까요. 견성은 여러분 명상만 잘하면 견성해요. 하는 짓거리는 안 바뀌어요. 하는 짓거리는 견성해야 바뀌어요. 근데 견성했다는데 안 바뀌어요 하는 짓거리가. “너, 네 안에 부처님 안 사는 것 같아. 너 부처님 못 만난 것 같아 다시 좀 알아봐.” 아니면 “어느 날 어떤 때 그때 한 번 만난 것 같아. 너 요즘 같이 요즘은 안 사귀는 거 같아.” 그때 한 번 만났다고 바뀌질 않죠. 왜냐하면 여러분 여러분은 계속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게 인생인데 언제 한 번 만났던 하느님이 지금 영향력이 있겠어요? 기억 속에 있지. 기억 속에 있는 하느님으로는 문제를 못 풉니다. 지금 하나님하고 접속이 돼 있어야 내가 선택의 기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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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뜻대로 행동을 할 수 있거든요. 선택을 할 수 있거든요. 행동이라는 건 결국 선택인데 선택이 계속 잘못될 수밖에 없다고요. 한 번 만났다거나. 그렇죠? 그냥 만난 것 같은 기분만 느껴서는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그 안에 우리가 살고 있어야 돼요. 그래서 아라안들을 우리가, 부처님이 아라한만 해도 인정해 준 건요 그럼 아라한도 가만 보면 그러면 칭의 정도인데 아라한을 왜 이렇게 인정해 주나요? “열반에 안주했다는 것만으로 일단 그게 성스러워지지 않았냐. 기본값이 바뀌지 않았냐” 이거예요. 다만 그래서 아라한들은 더 열심히 치열하게 삶으로써 완전히 부처님의 길에 들어서게 되죠. 그런데 안타까운 거는 아라한 이론은요 그 생이 마지막이네요. 윤회를 벗어난다라고 이론이 돼 있으니까. 그렇죠? 그럼 다음 생에, 그 상태로 다음 생에 오면 더 닫고 더 닦고 해서 나중에 부처님 경지까지 갈 텐데 아라한에서 만족해야 돼요. 이게 아라한 이론의 문제점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인도인들이 다 윤회에서 벗어나길 원하니까 부처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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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주마.” 하고 어느 힌두교 학원보다 손쉽게 윤회에서 벗어나게 열반 찾게 해주고 참나라는 말은 대신에 안 쓰셨지만, 바로 열반 찾게 해주고 힌두교 성자들 못지않게 그 참나 안에서 열반 안에서 안주하게 도와주셨어요. 그런데 여기서 석가모니는 더 나가가지고 팔정도 하라고 그랬어요. 팔정도, 팔정도가 성화입니다. “너가 진짜 깨달았다면 중도(中道)인 팔정도를 걸을 수 있어야 된다. 팔정도 걸어라.” 그러니까 깨달을 때도 팔정도지만 사실 깨달을 때는 팔정도 중에 마음 챙김만 잘해도 깨달아요. 명상만 잘해도 깨닫는다고요. 근데 너가 진짜 깨달았다면 일반인하고 다른 팔정도의 향기가 나야죠. 그렇죠. 바르게 보고 바르게 말하고 이게 나와야 될 거 아니에요. 이게 성화의 영역이라니까요. 팔정도가. 이 팔정도 실천 능력이 부처님만큼 안 된 거예요. 다들. 왜? 여전히 아직 탐진치가 많거든요. 근데 탐진치가 많은데 왜 아라한이라고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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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에 들어앉았기 때문에요. 원래 온전한 열반에 들어앉았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하는 거지 탐진치 업장이 다 지워져서 아라한이라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일주일에 아라한이 나오죠. 일주일 만에 아니면 하루만 해도 나올 수 있다고 했잖아요. 하루만 잘 닦아도 보리왕자경에. 그게 가능한 이유는 이거예요. 근데 왜 부처님처럼은 못 되느냐? 무수한 세월을 부처님은 업장을 털었거든요. 그 차이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도 누구나 아라한은 가능합니다. 지금 이 생에. 부처님처럼 되고 싶다면 이 탐진치 뿌리를 끝없이 뽑아내는 작업이 계속 이어져야 돼요. 그거를요 바로 14페이지로 갈게요. 14페이지. 시바경(尸婆經) 한번 보실래요? 잡아함경에 있어요. 지금 방금 이 의문이 있죠? 그러면 “아라한은 이미 해탈자, 탐진치를 떠났다고 해서 아라한인데 왜 아라한은 부처님하고 다를까?” 이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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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도 똑같아요. “예수님도 성령 받았고 제자들도 성령 받았다면 능력치가 같아야 되지 않나?” 이런 의문도 가능하잖아요. 근데 왜 성령 받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경지까지는 왜 다다르지 못할까? 뭐가 다른 게 있는 거죠. 그런 부분을 설명해 줄 수 있습니다. 여기 보시면 시바경에 1.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가란다 죽원정사에 머무셨는데요. 실제는 이제 여기서 이름이 시바카예요. 시바카라는 출가 외도가 부처님의 처소를 방문하였다. 그럼 브라만교 사람이겠죠. 다른 학원 다니는 사람이 온 거예요. 다른 학당 사람이 와가지고. 당시 학당 간의 교류가 있었다는 얘기죠. 활발했다는 얘기죠. 와가지고 물어봐요. 부처님께 나아가 문안한 뒤에 한쪽에 물러앉아서 여쭤봅니다. “고타마시여 무엇을 ‘배움’이라고 합니까?” 배운다는 게 뭐죠? 공부한다는 게 뭐죠? “배운다는 건 어떤 걸 배워야 됩니까?”라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배워야 할 걸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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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배움이라고 한다.” 2. 시바카가 물어요. “배워야 할 게 뭡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시바카에게 대답하셨다. “때를 따라 증상계增上戒(뛰어난 계율)를 배워야 하고, 증상의增上意(뛰어난 뜻) 증상혜增上慧(뛰어난 지혜)를 배워야 한다(3학을 배움을 말함).” 증상이라는 건 뛰어나다는 거예요. 즉 3학을 얘기해줘요. 팔정도의 핵심이죠. 팔정도를 축약하면 3학이에요. 계정혜(戒定慧). 명상, 이론공부 지식공부죠. 그렇죠. 계정혜가 지식공부 경전공부, 명상, 실천 이거잖아요. 지혜개발, 명상 명상수련 그리고 이게 실천 계율 실천인데. 뛰어난 계율(증상계增上戒)을 배워야 되고. 뛰어난 뜻이라고 했는데 이게 명상이에요. 뛰어난 뜻(증상의增上意)을 배워야 되고. 뛰어난 마음 상태에 이르는 법을 배워야 되고 뛰어난 지혜(증상혜增上慧)를 배워야 된다. 3학을 배워야 돼. 이럽니다. 그래서 3학이라고 하잖아요. 세 가지 배움, 3학 배워야 돼. 3. 시바카가 여쭙니다. “만약 아라한 비구로서 모든 번뇌가 이미 다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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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걸 이미 다 마쳤고. 여기서 나온 말이에요. 선불교가 지금 딱 아라한 경지입니다. 선불교에서 견성하면 뭐라 그래요? “일 마친 한가한 도인”이라 그래요. 일 마친 한가한 도인이란 말이요 초기경에서 이미 등장한 거예요. 그게 아라한들한테 쓰는 말이었어요. 이미 열반에 안주해버렸고 탐진치를 떠났으니 일을 마쳤다는 거예요. 일 마친 한가한 도인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이미 해야 할 일을 다 마쳤고 모든 번뇌에서 떠났고 모든 무거운 짐을 다 버려서 자신의 이익을 얻었고 ‘모든 존재(3계의 존재)의 결박’을 끊어버렸고, 다시는 삼계에 안 태어나도 되는 그리고 바른 지혜로 잘 해탈한 그런 아라한이라면 그럼 뭘 배웁니까?” 보니까 아라한들도 공부하고 있거든요. 학원에 오니까. “그럼 저 아라한들은 뭐 배우는 거예요?” 이제 이런 거죠. 뭐라고 하시겠어요? 4.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아라한 비구로서 모든 번뇌가 다 했고. … 바른 지혜로 잘 해탈하였다면, 어쩌고 쭉 앞의 얘기를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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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는 탐욕을 밝게 깨달아 알아서 영원히 남김없이 다 없애야 하고 ‘성냄’과 ‘어리석음’을 밝게 깨달아 알아서 영원히 남김없이 다 없애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일체의 악을 짓지 않을 수 있어야 하고 일체의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 된다(아라한들도 3학을 배워서 3독을 영원히 뿌리 뽑아야 함). 시바카여, 이것을 배워야 할 것을 배운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 시바카라는 출가한 외도는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아라한들은 이런 걸 배운다. 아라한들 그럼 이상하죠. 그 앞에 “일을 마쳤느니 모든 번뇌 다 했느니 삼계에 안 태어나느니” 다 해놓고 다시 또 뭐라 그래요? 석가모니가 “아라한이 탐진치 끊는 공부하고 있다.” 그래요. 이상하죠? 이 경이 되게 이상한 경이에요. 여러분 우리식으로 이해 안 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게 지금 불교학자들 이거 이해 못해요. 저도 불교학자들이 이거 가지고 논쟁하는 거 보고 알았어요. 이런 경이 있다는 거. 자기들끼리 설명이 안 돼요. 잘못 적으셨나? 이렇게. 그렇죠. 경전이 많다 보니 좀 헛소리가 나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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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안 되겠죠. 우리 식으로 이해 안 하면 이해 안 됩니다. 아라한들은 탐진치를 떠나 있어서 아라한입니다. 열반에 안주했기 때문에 아라한이라고 한 거지 탐진치를 다 밝게 알아서 끊어 없앤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탐진치를 떠나서 열반에 안주했다는 점, 자기만의 섬을 만들었고 진리의, 진리를 섬으로 만들어서 거기에 귀의했다는 점에서 삼계를 떠났다. 윤회를 초월했다고 해준 거지 실제 윤회를 초월한 것도 아니에요. 사실은 알고 보면. 이 논리로 보면. 석가모니께서 볼 때는 다만 사람들이 윤회를 떠나고 싶어 하니까 윤회를 떠나는 방법을 가르쳐준 거예요. 윤회가 없는 자리를 가르쳐준 거예요. 윤회가 없는 자리가 어디예요? 열반이요. 여기는 그러니까 여기서, 여기 보세요. 아까 달라이 라마식 중관파 이론이 뭐가 틀렸냐면 그런 현상계를 초월한 그 진동을요 생멸한다고 봐버리면요 여기도 현상계가 돼버려요. 이해되시죠? 현상계가 돼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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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거예요. 이런 차원의 생멸이 아닌 거예요. 다른 차원이라는 얘기를 해줘야 되는데 이렇게 되면 중관파에서 참나론을 인정하게 되니까 또 안 해요. 그래서 모순에 빠지는 겁니다. 실제로는 윤회를 왜? 윤회라는 게 생멸인데요. 보세요. 여러분 절에 가면 이런 얘기하시죠. 한 생각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이 윤회라고. 윤회를 떠날 수가 없잖아요. 윤회를 떠나야 되니까 그런 생멸의 세계가 아닌 거예요. 그 모든 걸 떠난 이 정광명의 자리, 열반의 자리에 안주하시는 거는 이미 생멸을 초월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열반의 일주일 만에라도 열반에 안주한 자를 보면 “넌 윤회를 떠났다”라고 해준 거예요. “넌 이미 윤회를 떠났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데 포인트를 두고 들었겠죠. 부처님 입장이라면 “넌 이미 윤회가 없다”라고 얘기해줬겠죠. “윤회가 없는 자리에 안주했고 윤회가 없는 자리에 너가 안식처를 삼았으니 넌 이미 윤회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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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럼 그 사람들은 뭐 공부하나요?” “탐진치 닦아야지.” 이 말이 이상한 거예요. 윤회가 떠났는데 탐진치는 또 왜 닦고 있어요? 그래서 일체 악을 아직 할 수 있다는 거잖아요. 이대로라면. 일체 선을 아직 다 못한다는 얘기잖아요. 부처님처럼 못한다는 얘기예요. 선이면 다 하고 악이면 딱 끊어버리는 이 짓을 다 할 수 있으면 부처님이에요. 그걸 못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아라한 중에요 심지어 아라한 중에 부정관(不淨觀)하다가 자기 몸을 되게, 부처님이 이런 얘기 있었잖아요. 안타까운 이야기인데 부처님이 한 달간 본인 호흡 수련하고 나오려고 호흡에 출입식념하려고 들어가면서 제자들한테 부정관 시키고 갔어요. 몸땡이가 더럽다고 관하게 하는. 부정관을 언제 하면 좋냐면 이성에 흔들릴 때. 특히 막 이런 곳 나오면 부정관을 해야 됩니다. 저기는 지방이요. 다 고름이요.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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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이 보이고 막 이제. 그렇죠. 눈에 좋아 보이는 이성을 봐도 다 분해해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아라한에 도달할 수 있답니다. 실제로 경전에 나와요. 길 가다가 옛날에 비구 하나가 엄청 아름다운 여자가 유혹해 왔어요. 딱 보는데 부정관으로 봤어요. 쫙 다 분해해서 “고름, 지방 몇 프로.” 그 자리에서 아라한이 됐다는 전설이 있어요. 이런 식의 아라한이라면 아라한 안 되고 말겠죠. 그런 말 있잖아요. 어떤 연예인이 한 것 같은데 “고기와 밀가루를 끊는다면 오래 살 수 있겠지만 그렇다면 오래 살 이유가 없어진다.” 뭐 이런 느낌. 그 사바세계가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근데 아무튼 아라한 되는 비법은 제가 얘기해 드렸어요. 부정관을 하면 돼요. 근데 부정관의 폐해가 당시에 부처님이 한 달인가 들어갔다 나오니까 제자들이 숫자가 확 줄어들어 있었어요. “어떻게 됐냐?” 하니까 다 자살했대요. 실제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경전에 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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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까지 자살했어요. 아라한도 뻘짓을 할 수 있다는 얘기예요. 여기 기록이 나오죠. 아라한도 탐진치 빠진 거예요. 몸뚱이가 더럽다는 데 집착해가지고 이런 더러운 몸을 가지고 한시라도 있는 게 안 좋아진 거예요. 이게 찜찜해진 거예요. 그래서 서로 자살하고 서로 도와주고 해가지고 다 죽었어요.그 뒤로 부처님이 “부정관하지 마라. 호흡수련 해라”라고 이렇게, “호흡을 알아차려라” 이렇게 권했다는 게 경전에 나옵니다. 예전에 이렇게 제가 카페에 올려놓으니까 불교 공부하시는 어떤 학생이 “아라한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막 저를 공격하더라고요. 그래서 증거 보여줬어요. 경전에 써 있거든요. 아라한들까지 그랬다고. 조용해졌죠. 그래서 저기 네이버 홍익학당 카페 아마 검색하시면 제가 자료 올려놓은 거 나올 거예요. 경전에 있는 걸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여기서 봐도 아라한들이요 부처님만큼 그렇게 자명한 상태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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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왜 아라한이죠? 탐진치를 벗어날 수 있는 기술을 얻었어요. 마음 챙김, 철저한 마음 챙김, 정신 차림으로 육근이 어떤 육근이 작동하든지 알아차리면서 아공의 진리로 무장해서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보고. 그러니까 내가 겪는 모든 육근의 본질을 무상 고 무아인 줄을 꿰뚫어보고 열반에 안주할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에 탐진치를 벗어났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랑 업장에서 탐진치가 다 떨어져가지고요 탐진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부처님의 경지랑은 다른 거예요. 이거 구분되시죠? 굳이 이렇게 해볼게요. 부처님 경지는, 열반에 여기도 맑은 거예요. 그래서 육근 작용이 항상 선은 하고 악은 안 할 수 있는 경지인 거예요. 근데 아라한들은요 열반에 안주한 건 똑같아요. 중심이, 축이 딱 잡힌 거는 똑같은데 지금 여기가 업장이 많아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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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방심하면 탈선할 수 있는 거예요. 다만 이 육근이 일어날 때마다, 육근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그 육근 작용을 열반의 힘이 확실히 내 안에 자리 잡다 보니까 열반의 힘을 이용해서 알아차릴 수 있죠. 항상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따라가지 않고 알아차리고 알아차린다는 거. 마음 좀 구분해 보면요 마음 챙김으로 이게 오히려 선정 쪽이고요. 알아차림은 지혜 쪽이죠. 같이 얘기할 수 있는데 굳이 둘을 찢어본다면 마음을 챙기면 바로 그 자리를 알아차리게 돼 있어요. 여기는 태양빛과 같고 마음 챙김은 돋보기랑 같다고 그랬죠. 거기다 돋보기 대면 반드시 햇빛이 때리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건데 같이 작동하는데 구분해서 보면 선정과 지혜의 정혜쌍수로 인해서 육근 작용이 어떤 게 일어나든지 육문(六門)을 알아차린다고 하죠. 육문을 마음 챙긴다고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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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에서 보이는 거, 들리는 거, 또 여기 생각과 감정이라는 의근, 마음의 작용이 일어날 때마다 생각 감정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리고 마음을 챙겨서 알아차리면 동시에 알아차림은 뭐로 이어지냐면 지혜로 이어지거든요. 지혜가 뭐냐 하면 그놈들은 무상(無常)하고 고(苦)고 무아(無我) 내 것이 아니고 열반만이 적정 고요하다. “열반만이 고요하고 육근 작용들은 무상 고 무아가 본성이다”라는 걸 항상 잊어버리질 않아요. 마음 챙기고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면 항상 자명한 지혜로 이어지고, 자명한 지혜로 이어지고. 이렇게 되니까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팔정도를 따를 수밖에 없겠죠. 제가 그려놓은 이 Z자 이론으로 볼까요? 이렇게 아라한의 경지, 아라한은요 항상 이 알아차림이 확립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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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현존에 항상 안주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이 진리를 알아차려요. 진리,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만물의 본성 만물의 본성을 알아차려요. 만물의 본성을 직관하고 있습니다. 항상 알아차리고 있어요. 따라서 이 진리를, 만물의 본성을 잘 분석할 수 있어요. 여기까지가 정견이에요. 항상 올바른 견해를 갖고 있어요. 이렇게 하면은 이거는 이제 마음 챙김이고요. 이게 선정이고요. 이게 이제 이게 선정이라면 선정이나 마음 챙김. 마음 챙김도 이제 선정의 안에 들어가니까. 선정에서 지혜, 선정에서 지혜로 이어집니다. 자연스럽게. 그럼 지혜는 정견 정사유가 지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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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견 정사유. 이 정견 정사유는요 진리 분석에서 “무상 고 무아다”라는 게 이게 정견이고요. 이걸 가지고 응용해가지고 여러분 모든 일에 적용하는 게 정사유입니다. “그럼 이것도 무상하겠네. 이것도 무상하겠네.” 그래서 올바른 분석이 이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계율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생기죠. 그럼 여기가 이제 분석과 실천이 요게 이제 선정 지혜면 계율이 되겠죠. 8정도가 다 나온다고요. 열반 안에 안주해 계시면, 열반에 안주해 있다는 거는 마음을 잘 챙기고 있다는 얘기고, 마음을 잘 챙기고 있으면 자명한 진리를 항상 자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직관하고 있다는 거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의 진리를 놓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일을 경계를 닥쳐도, 경계를 당해도 보고 듣고 고민이 일어나도 딱 알아차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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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의 중심축이 서 있으니까 바로 알아차려지고, 알아차리면 바로 무상 고 무아라는 실체를 압니다. 지혜가 항상 작동한다는 거예요. 금강경에서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 남방불교 소승불교랑은 다르지만, 금강경은 대승이지만 그건 같아요. 대승의 지혜건 소승의 지혜건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해서 금강은 금강저(金剛杵)을 말하거든요. 절에 가면 그 무기 있죠? 금강저. 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무기잖아요. 이게 벼락을 치는 무기예요. 벼락이라는 거에요. 벼락. 금강반야바라밀경은요 반야바라밀이라는 지혜는 벼락이다. 어떤 번뇌건 작살낸다는 거예요. 그냥 날려버려요. 여러분한테 어떤 번뇌가 일어나도 마음 챙김과 알아차림으로 무장돼 있으면, 정신 차리고 있으면, 마음 챙김은 정신을 차리는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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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차리고 있으면 알아차림으로 지혜가 작동합니다. 그래서 뭐가 나오냐? 어떤 일을 겪건 무상 고 무아 해서 다 분해해버려요. “너가 고민하는 건 무상고무아일 뿐이다”라고 때려버리고 “열반으로 돌아가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럼 항상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내 섬으로 돌아오고, 바다로 나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섬으로 돌아오고. 이런 삶이 되겠죠. 이게 이걸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라한은 그냥 지혜로, 그냥 지혜나 단순히 지식으로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이렇게 살아야 돼요. 당연히 지혜가 있으면 사시겠지만 지혜만 갖고 말할 수는 없다고요. 계정혜 3학이 굴러갈 때 아라한이 되는 거예요. 근데 그 핵심은 지혜고 더 들어가면 마음 챙김이죠. 마음 챙김이 잘 된다면, 마음 챙김이 잘 된다면 지혜가 반드시 따라오게 돼 있고 그 지혜로 올바른 삶을 살 수가 있겠죠. 그래서 여기 오면 아까 말한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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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선은 다 하고 악은 하지 않는 거. 선은 하고 악은 하지 않는 경계로 가겠죠. 이런 게 아라한이다. 아라만 해도 얼마나 멋져요. 그래서 여러분들 다 일단 아라한들 되시기 바래요. 아라한. 그렇죠. 아라한도 보살이에요. 다만 그 윤회를 벗어나야 된다는 말만 안 하면 돼요. 왜냐하면 이런 거예요. 윤회를 벗어나겠다는 생각을 한다면요 이번 생에 저렇게 얻은 거 가지고 윤회를 떠날 생각만 할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자기 몸이 불편하면 몸을 죽여 버리기도 하잖아요. 아라한들이. 그런데 보살은 뭐가 다르냐면 이 몸뚱이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리고 아직 부처님에 비해서 얼마나 내 공덕이 부족한데요. 난 이제 열반에 안주했어요. 그럼 시공을 초월해서 열반에 안주할 수 있는 힘을 얻었는데 왜 이번 생이 끝이라고 선언해야 되죠? 이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은 인도인들이 윤회 하도 떠나고 싶다니까 윤회 떠나는 비방을 가르쳐 준 거예요. 근데 그 안에 뭘 넣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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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자비행을 하고 싶게 만들어 놨어요. 팔정도를 가지고. 그럼 부처님 사후에라도 그런 움직임이 당연히 일어나겠죠. 이상한데 이제 딱 열반에 들어서, 이제 딱 뭐 좀, 이제야 팔정도로 할 수 있게 됐는데 죽음이래요. 명 짧은 아라한은 바로 죽으면 어떡해요? 뭐 해보지도 못하고 죽어요. 그러니까 열반에 안주하는 걸 목표로 하는 인도인들한테는 그것만 해도 좋아요. 인도인들은요 라마크리슈나 말씀만 들어도요 동네 어떤 소년이 자살했대요.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그 소년은 이번 생이 마지막이었어. 이제 해탈했어.” 끝이에요. 여러분 받아들이겠어요? 이런 얘기. 인도인들 발상은 완전히 달라요. 우리랑. 그런 인도인들한테 부처님은 방편을 쓰신 거라고요. 진짜. 그러니까 이 생을 언제 죽고 상관없어요. 자살로 죽든지 안 올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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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수행자라고 믿는 사람들. 다시 이 세상에 안 태어날 수가 있다. 그런 사람들한테 수행을 가르치면서 방편 안 쓰겠어요? 근데 부처님은 특이한 게 그렇게 가르치면서 열반에 안주시켜놓고 여기까지는 힌두교랑 비슷한데 “팔정도로 하라” 그러고 끝없이 아침저녁으로 그 아라한들은요 온 우주 중생이 더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자비염을 계속해야 됩니다. 자비송을 읊어야 돼요. 그러면서 한 명이라도 더 해탈에 들 수 있게 전도하러 다녀야 돼요. 아라한은 예수님 제자들이랑 사도랑 비슷한 행보를 합니다. 특이하죠. 힌두교에서 볼 때 그런 거 업 짓는 행위거든요. 업 짓는 행위 하지 말고 조용히 숲에 앉아서 명상이나 해야지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이거부터 벌써 보살도입니다. 부처님이 살짝 틀어놨다고요 그게 틀어놓은 게 더 발전된 게 대승인 거예요. 대승이 볼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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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미 열반에 안주했는데, 이제 보세요, 이제 열반이고 나는 중생들은 탐진치 삼독에 그냥 당하는데 나는 삼독에서 날 지킬 수 있는 보호복을 입었다니까요. 그럼 그 이후로 오히려 열심히 돌아다녀야 되지 않겠어요? 그게 보살사상이에요. 견성한 때부터 이제 오히려 본격적으로 보살도가 시작돼요. 세세생생 이제 죽으면 빨리 오라고 기원합니다. 보살도에서. 여러분 보살 죽으면요 “빨리 오셔서, 다시 오셔가지고 또 일하세요.” 이런 거예요. 이게 저주죠. 원래 소승에서는. 여러분 이걸 이렇게 하면 저주죠. “부처님 빨리 오세요.” “내가?” 겨우 탈출했는데 빨리 오라니요. 아라한들이 다 “다시는 여기 안 온다” 하고 갔는데 “빨리 다시 태어나가지고 이 탐진치 소굴로 빨리 오세요. 업 좀 지어주세요.” 막 이런 거잖아요. 대승식 발상입니다. 소승에서는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소승에서는요 “성불하세요”가 덕담이 아닙니다. “열반에 드세요”라고 해야지 “성불하세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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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에서 할 수 있는 덕담입니다. 그러니까 “성불하세요”는 “계속 윤회해서 빨리빨리 부처에 더 다가가라”는 얘기예요. 그렇죠. 이렇게 달라요. 10분 쉬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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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7강 - 아짠 문의 열반과 영원한 마음(00:07-54:13)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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