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전통문화, 종교, 신앙
(1) 윷놀이
고인돌에 새겨진 윷판
扶余市 - 百度地图 (baidu.com)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부여족이 북만주 일대에 세운 나라. 농경 생활을 주로 했고, 중국으로부터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은력을 사용하는 등 진보된 제도와 조직을 갖추었으나,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입으로 크게 쇠퇴한 후, 그 영토가 대부분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 출처 네이버사전
부여시 위치
고구려・부여계 유이민의 남하와 백제 부여씨의 등장
부여씨는 백제의 王姓으로서, 『삼국사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모든 왕이 부여씨였던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사료와 고고학상의 문제 등을 고려할 때
국가형성기부터 멸망기까지 백제 왕통이 부여씨에 의한 단일 계보로 이어졌다는 것은 신빙성이 낮은 편이다.
백제 건국 설화는 시조에 따라 溫祚, 沸流, 仇台 설화로 나뉜다.
세 시조 설화는 모두 북에서 남으로 이동해 와 정착하였다는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다.
백제 건국 세력이 북쪽의 고구려, 부여 지역에서 내려왔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근거는
임진강과 한강 중류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고구려식 적석총의 존재이다.
특히 비류 설화에 등장하는 비류는 고구려 5부 중 하나인 비류부 및 그 전신인
비류국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2세기 후반 산상왕의 즉위에 반대해 비류부 세력이 고구려 중앙에서 이탈한
사건을 백제 시조 비류의 남하와 관련지어 볼 수가 있다.
이들 비류 집단은 부여 정체성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화한 부여계 집단으로 추정된다.
백제멸망전과 백제부흥운동을 거치면서 백제 부여씨들은
상당수가 당나라로 끌려가거나[1] 일본으로 망명했다.[2]
신라가 통일한 한반도에 잔류한 부여씨들은 정황상 서씨(徐氏)와 여씨(余氏) 등으로
성씨를 바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야 '부여씨'라는 성씨를 그대로 쓰는 사람은 더 이상 한중일 3국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3] 대한민국에서는 부여 서씨[4], 이천 서씨[5],
의령 여씨[6]가 부여씨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는데,
보다시피 부여씨에서 서씨, 여씨로 글자를 바꾸었다고 족보에 전하고 있다.
복성인 '부여'를 한 글자로 줄여 칭하는 관습은
백제 당대의 중국 측 기록에도 종종 나오는데 이런 관습을 공식화한 것이다.
출처: 위키백과사전, 나무위키 사전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에서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갈사부여, 남부여 등 다양한 부여 국가가 존재하며,
고조선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명확치는 않으나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 건국자인 추모(주몽)의 아버지[6]를 단군으로 표현하는 등
고조선과도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대 동명왕(東明王): 갑신년(기원전 37)에 즉위하여 18년 동안 다스렸다.
성은 고씨(高氏)이고 이름은 주몽(朱蒙)인데 추몽(鄒蒙)이라고도 한다.
단군(壇君)의 아들이다.”
(第一東明王 甲申立 理十八 姓高 名朱蒙 一作鄒蒙 壇君之子)
《삼국유사》 <왕력(王歷)>편
한국인 최초의 성씨는 해씨
고구려 시조는 그가 세운 나라이름 ‘고구려’에서 ‘고’를 취하여 성을 ‘고(高)’씨로 삼았다.
그러나 이 ‘고’씨는 시조 ‘고주몽’ 1세대에서 끝났다.
왜 그랬을까. ‘삼국유사(고구려조)’는 주몽의 본성이 ‘해(解)’씨(本姓解氏也)라고 세주(細註)를 달았다.
이후 고구려 역대 왕들의 성씨는 ‘해’씨였다. 이런 점에 미뤄 고구려 왕족의 정통적 성씨는 ‘해’씨임에 틀림없다. ‘해’씨는 중국인에겐 없는 성이었다.
반면 부여 왕의 성명에선 ‘해부루(解夫婁)’ ‘해모수(解慕漱)’ 등 ‘해’씨가 등장한다.
이는 고구려가 부여(扶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다.
‘해’는 한국어 ‘해(日)’와 동일하다. 일본어의 ‘히(日)’도 이 말에서 유래된 듯하다.
그러면 ‘해’씨의 어원을 밝혀보자. ‘광개토대왕비문(414)’은
고구려 시조 주몽을 북부여 왕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명기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건국 후 오래지 않아 동부여를 통합하였다.
주몽이 부여 왕족 출신이기 때문에 ‘삼국유사’는 그의 본성을 ‘해’씨라 한 것이다.
이후 고구려 왕들은 ‘대해주류(대무신왕)’ ‘해색주(민중왕)’ ‘해애루(모본왕)’ ‘소해주류(소수림왕)’(제3, 4, 5, 17대) 왕 등 모두 ‘해’씨다. 나머지 왕들의 성씨는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나 고구려는 단일 혈족으로 왕위가 계승됐고 비(非) 왕족이 정권을 찬탈한 적이 없었으므로
다른 고구려의 왕들 역시 ‘해’씨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어 고구려 제2대 유리명왕의
성씨는 비록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아들이
‘해명’(解明) ‘해우’(解憂)였던 것으로 보아 ‘해’씨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근본은 부여에 있음이 확실하다.
고구려가 후에 동부여를 통합하였으니 부여의 역사를 승계한 나라다
. 백제 역시 부여의 다른 지파로 나타난다.
백제의 경우도 왕의 성씨는 ‘해’씨 또는 ‘부여’씨였다.
백제의 귀족 중에는 ‘해루, 해충, 해수, 해구(解婁, 解忠, 解須, 解仇)’처럼 ‘해’씨가 많다.
한때 백제의 성왕은 공주에서 부여로 수도를 옮기면서 백제의 뿌리를 찾아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고치기도 했다. ‘南扶餘’는 “남쪽에 있는 부여”란 뜻으로 백제의 근원이 ‘부여(扶餘)’임을 밝히는 것이다.
즉, 고구려와 백제는 언어적으로도 ‘부여’라는 한 뿌리에서 갈라진 나라다.
출처 : 학교문법론 - 이관규
신동아 -언어사적 측면에서 본 고구려어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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