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7章 北海에서 온 女人 혁사린은 석벽에 새겨진 칠십여 종의 무학을 한달여에 걸쳐 연마했다. 불가사의할 정도의 암기력이었다. 연후 사대천왕의 무공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대천왕의 심후한 무공을 하루 이틀에 익힌다는 것은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혁사린은 그 정수만을 깊숙히 파고 들었다. 세 달이란 시간이 덧없이 흘렀고 그 동안 그는 사대천왕의 무학 역시 익히게 되었다. 일반인이 삼십 년이 걸려도 암기조차 어려운 것을 단 석달만에 대성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혁사린은 독존경을 든 채 망설이고 있었다. (이것을 그대로 태워버릴까? 아니다. 일단 암기해 두자. 마로써 마를 제압할 때 쓰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는 독존경을 암기하기 시작했다. 다시 하루가 지난 후 혁사린은 수양제의 유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한동안 침묵을 하던 그는 조용히 일어섰지만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근 백일간 머물렀던 무릉미혼부이며 그를 새롭게 탄생시켜준 운명의 장이었기 때문일까? 혁사린은 짧은 백일 동안에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칠십여종의 무공을 익혔으며 사대천왕의 절대비학을 연마했다.또한, 가공할 저주의 무공도 암기했다. 혁사린의 두 눈에서 일순 지극히 당렬한 자광이 폭사되었다. [혁사린...너는 이제 비로서 진정한 제마신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변했다. 그가 지닌 엄청난 무공들, 한 가지만으로도 능히 천하를 종횡할 수 있는 그 무공들이 그를 변하게 한 것이다. 혁사린의 뜨거운 피가 거세게 용솟음쳤다. [할아버지, 보십시요. 소손의 모습을...으하핫...] 천지가 진동하고 천하가 움츠러든다. 탄생(誕生)! 제마신협의 새로운 탄생이었다. [무림이여. 내가 간다.나 제마신협이...] 스스스스... 혁사린의 신형은 웃음과 더불어 산화하듯이 사라졌다. 무릉비혼부의 불세대기연을 품에 안고... * * * 세상은 여름으로 치달리고 있었다. 칠월(七月) 초순의 정오 햇살은 어느새 불볕처럼 뜨거웠다. 호남(湖南)에서 대리(大理)로 향하는 관도(官道) 위로 한 명의 멍청하게 생긴 청년이 걷고 있었다. 그는 무릉미혼부에서 불세의 대기연을 얻고 나온 혁사린이었다. 혁사린은 지금 지옥갱(地獄坑)이 있는 운남성(雲南省)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옥갱으로 행하는 시일이 많이 지체되었다 .속히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침입하여 숨겨진 절세비경을 얻어야 한다.) 혁사린은 걸음을 재촉했다. 뜨거운 햇볕이 그의 머리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쯤 갔을까? 돌연 혁사린은 관도 옆 숲속에서 이상한 불빛을 발견했다. (이상하다. 관도 옆에는 인가가 없는 것이 상례인데?)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채 몇 걸음 숲안으로 들어가던 그의 발걸음이 일순 멈칫 세워지고 말았다. 정녕 놀라운 일이 그의 눈 앞에 있었다. 숲속에는 놀랍게도 흡사 궁전(宮殿)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로운 한 채의 빙옥(氷屋)이 자리잡고 있었다. 뜨거운 칠월 햇살 아래 눈으로 만든 집이 지어져 있다는 것은 분명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점입가경(漸入佳境)할 일은 빙옥의 크기가 무척 크다는 것과 주변 나무며, 땅이며, 심지어 공기까지 한 겨울을 방불케 할 정도로 얼어 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있나? 내가 꿈을 꾸고 있는가?) 그러나 꿈이 아닌 분명 현실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분명 이 안엔 곡절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눈으로 만든 빙옥이 칠월에 버젖이 녹지 않고 지어질 수 없다.) 괜시리 호기심(好奇心)이 일었다. 혁사린은 천안신공을 펼쳐 빙옥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거대한 빙옥엔 여러 개의 창(窓)이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창문이 가볍게 열려 있었다. 그리고 정녕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한 소녀가 우'쭉 창가에 서 있었다. 바람에 휘날려 가볍게 나부끼는 치렁치렁한 머리결,환상에 젖은 듯한 샛별같은 눈동자, 한 올 흘러내린 귀밑머리에 섬섬옥수로 가볍게 쓰는 그 우아한 자태, 붉은 불을 머금고 있는 듯한 새빨간 입술, 그런데, 안색은 흡사 종잇장같이 창백했다. 어떤 병을 앓고 있는 것일까? 그때였다. [공주(公主)님, 왜 또 일어나셨읍니까? 어서 침대에 누우십시요. 햇살을 너무 쏘이시는 것은 몸에 해롭습니다.] 늙은 노파의 음성이 슬프게 들려왔다. 곧이어 창문에 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나의는 대략 백여 세가 넘어 보였으며 두 눈에서는 햇불같은 정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허연 백발은 오히려 섬뜩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한눈에 절정고인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상하다. 무림에 저같은 노파가 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는데?) 나무 뒤에 숨은 혁사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파는 일신에 불같은 홍의를 입고 있었으며 소녀는 우아한 백의를 입고 있었다. 홍의노파가 안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님, 노신이 창문을 닫을까요?] 백의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나는 따사로운 햇살을 마음껏 맞고 싶어요. 이 봄이 제겐 마지막이겠죠?] 홍의노파의 전신이 괴로움에 떨렸다. [공주님, 어째서 그같은 말씀을 하십니까? 공주님은 곧 쾌유하실 것입니다.] 백의소녀의 입가에 쓸쓸한 고소가 스치듯 걸렸다. [모모(姆姆), 알아요. 모모와 아이들의 정성을...그러나 내 생명은 앞으로 두달 뿐이예요.] 이토록 절세의 소녀 생명이 겨우 두달 밖에 남지 않았다니 이 무슨 말이냐? 홍의노파가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 용기를 잃으시면 안됩니다. 원래 공주님의 생명은 이 년 전에 끝났습니다. 그러나...하늘이 공주님으로 하여금 지금까지 연명케 한 것입니다. 그러니...] 백의소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모모, 죽음이란 아픈건가요?] 느닷없는 질문에 홍의노파는 입을 열지 못했다. 백의소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죽음...그것은 불가(佛家)에서 이르기를 영원한 삶(生)이라고 해요. 나는 죽는 것이 아니고 새로이 태어나는 거예요. 영원한 불사신(不死神)이 되는거예요. 고통...그런 것은 없어요. 그렇죠? 모모...] [공주님...] 홍의노파는 백의소녀의 두 손을 잡으며 흐느꼈다. 백의소녀의 눈에도 어느 한순간 이슬이 맺혔다가는 사라졌다. 홍의노파는 천천히 말했다. [공주님, 창문을 닫겠습니다.] [별 수 없군요. 그럼 몸, 꽃 몇송이 가져다 주시겠어요?] [알겠읍니다.] 홍의노파의 대답에 백의소녀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창문이 닫혔다. 한편, 혁사린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빙옥 문이 열리며 홍의노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백의소녀에게 가져다주려는 듯 빙옥을 나서기 무섭게 숲 밖으로 걸어나왔다. 아니 걷는다기 보다는 차라리 날아온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스슥... 단 한번의 걸음에 쑥쑥 일 장을 날아옴은 물론 무릎도 구부리지 않은 채 꼿꼿이 선 모습이었다. 한데, 혁사린은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응시하는 순간 내심 크게 경악했다. (무탄력경공(無彈力輕功), 스치듯 땅위를 나아오는 저 경공술은 초영비(超影飛)의 일종이다. 분명 북해의 비전무공이다.) 북해(北海)- 항시 얼음과 눈 속에 덮여 있는 신비의 땅, 이백 년 전, 북해의 한 여고수가 나타나 중원무림을 온통 뒤흔들어 놓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무공은 가히 천하무적(天下無敵)이었다. -냉요선(冷妖仙)! 그녀의 한빙기공(寒氷奇功) 아래 강호무림은 꽁꽁 얼어붙었고세상이 곧 그녀 수중에 떨어져 빙천하를 이룰 듯 했다. 그런데 돌연 기적(奇蹟)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냉요선이 북해에서 왔다는 또다른 한 소녀에게 붙잡혀 사라진 것이다. 나중에 나타난 소녀는 불과 십여 세 남짓한 어린 소녀였다. 무림인들은 크게 놀랐고 뒤늦게 알았다. 두 소녀는 모두 신비의 땅, 북해에서 왔으며 냉요선과 그녀를 잡아간 소녀는 단지 북해의 시녀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무서운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그 후, 북해는 두 번 다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다. 북해는 눈의 나라에서 영원히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혁사린은 전설을 회상하며 홍의노파를 응시했다. 공교롭게도 홍의노파는 그가 있는 숲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빙옥을 중심으로 방원 십 장 내외는 온통 꽁꽁 얼어 붙어있어 꽃이 있을리 만무했다. 혁사린은 급히 뇌리를 굴렸다. (어떻게 할까? 모른 척 지나칠까, 아니면 북해 사람들이 왜 중원에 들어왔는지 알아볼까?)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어느틈엔가 바싹 숲가로 다가온 홍의노파를 발견하고는 황망히 몸을 숨겼다. 스스스... 그의 신형이 연기처럼 사라진 직후 홍의노파가 숲에 들어섰다. 홍의노파는 잠시 주변을 살피다가 아름답게 핀 야애화들이 가득한 곳으로 갔다. 뚝! 뚝! 홍의노파는 서너 송이의 야생화를 꺽다말고돌연 하늘을 응시했다. [하늘이시여! 공주님을 도우소서, 우리 공주님에게 기적을 주소서, 삶을 주소서...] 홍의노파의 음성은 몹시 떨리는 목소리였다. 툭! 그녀의 손에 들렸던 꽃한송이가 힘없이 떨어졌다. [아...] 홍의노파는 급히 꽃송이를 주워들려 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툭! 돌연 또 다른 야생화 한 송이가 불쑥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앗!] 홍의노파는 대경실색을 했다. 그녀는 급히 뒤로 주르륵 물러서며 공력을 끌어오렸다. 그녀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명의 멍청하게 생긴 백의청년을 발견하고는 만면에 긴장을 드리웠다. 멍청해 보이는 청년은 혁사린이었다. 그는 꽃 한송이를 말없이 내밀며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냐?] 홍의노파의 두 눈에 경악의 빛이 강하게 일었다.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그 분, 낭자에게 전해주시오.] 홍의노파는 혁사린을 한동안 응시하며 재빨리 생각하고 있었다. (이놈은 귀신도 모르게 내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절정의 대고수, 아니면 내가 너무 상심했기에 이 놈의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인가?) 혁사린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팔이 떨어지겠구료. 어서 받으시오!] 홍의노파는 일순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은 누구인데 감히 이곳에 침입한 것이냐?] 그녀의 목소리는 얼음보다 더욱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몹시 경계하는 듯했다. 혁사린은 힐끗 야생화를 응시하여 입을 열었다. [침입자는 아니오. 다만...지나가는 길에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오.] 홍의노파는 냉소했다. [흥! 멍청이같은 녀석, 그렇다면 썩 나가거라! 이곳은 너같은 녀석이 있을 곳이 못된다.] 혁사린은 싱겁게 웃었다. (멍청이...그렇지! 나는 지금 천하에서 가장 멍청이로 변해 있지. 그렇다면 멍청이가 되어볼까?) 그는 더욱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할머니, 어서 받으세오. 그래야 조금 전에 창문에 있었던 그 아름다운 낭자에게 나의 정성을 바칠 것이 아니오.] [이...런 발칙한!] 홍의노파는 대노했다. 그녀의 성격은 불과도 같았다. 그런데 백의소녀가 불치의 병을 앓고 있기에 홍의노파의 성격이 속으로 꿇고만 있었던 것이다. 하나, 이제 분풀이의 대상이 생겼으니 어찌 발끈하지 않겠는가? [흐흐훗...어린 녀석이 감히 공주님에게 어쨌다고...다시 한번 말하겠다. 속히 꺼져라!] 그러나 혁사린은 막무가내였다. [후후후...절대로 못가오. 백의낭자가 무슨 병에 걸렸고 왜 북해에서 이곳까지 왔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겠소.] 혁사린은 더욱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추스렸다. 홍의노파의 얼굴이 보기싫게 일그러졌다. [꽤씸한...노신은 살생을 하지 않으려 했거늘...] [헤헤헤...살생? 나는 수없이 살생을 해왔소. 아마 만명은 넘을 것이오.] [뭐...뭣이!] 홍의노파는 대경실색을 하며 혁사린의 아래 위를 훑어보았다. (그럴 리가...그렇다면 이녀석은 겉모습과는 달리 희대의 대살성이란 말인가?) 그런데 다음 순간 혁사린의 뒷말을 듣고 그녀는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광분했다. [헤헤헤...하루에 개미 대여섯 마리는 눈감고 죽이니...지금까지 만 마리는 넘을 것이오.] [크으윽...] 홍의노파의 전신 모골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죽일 놈!] 슈슈숫... 그녀의 오른손에서 강맹하기 이룰 데 없는 살강이 번개같이 뻗어나갔다. [어...엇?] 혁사린은 이에 크게 경악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미끈--- [어이쿠!] 쿠당탕! 그는 돌부리에 걸려 뒤로 넘어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위이잉... 살강은 그의 몸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고송을 거세게 때렸다. 콰앙... 고송이 진저리를 치며 바늘같은 솔침들이 우수수 비처럼 미친 듯이 떨어져 내려 그 밑에 엉덩방아를 찧고 앉아 있는 혁사린을 파묻어 버렸다. 꿈틀꿈틀... 혁사린은 솔침을 흠뻑 뒤집어 쓰자 흠사 한 마리 거대한 고슴도치처럼 화해 손발을 허우적거리며 솔침을 털기에 바빴다. [이...이...] 홍의노파는 어처구니가 없게 일초가 빗나가자 재차 십지를 퉁겼다. 쌔애앵... 공기를 꿰뚫으며 폭사되어 나가는 지풍은 철벽을 꿰뚫을 듯 했다. [아앗! 나는 죽었다.] 혁사린은 두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지풍이 막 그의 전신을 갈가리 찢어놓을 순간, 붕...! 혁사린의 신형이 갑자기 눈이 휘날리듯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파파팟... 그가 있던 그 자리에 불통이 튀었다. (저놈...피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구나. 고수다!) 홍의노파는 그제서야 개달으며 더욱 분노했다. [야아...또 살았구나. 으하핫...나는 불사신이다.] 혁사린은 허공에 뜬 채 두 손을 번쩍 쳐들었다. 찰나 그의 신형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쿵! [크윽...궁둥이야.] 땅바닥에 엉덩이를 거세게 찧은 그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고통에 찬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멍청이였다.하지만 홍의노파는 지금 자신이 철저하게 희롱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자 미친 듯이 포효했다. [에이잇! 찢어 죽을 놈!] 그녀는 돌연 쌍장을 번개같이 들어올렸다. 우우웅--- 그녀의 장심이 돌연 적홍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엇! 저것은 북해의 절기인 적홍마살강(赤紅魔殺 강)...) 혁사린은 내심 흠칫했다. 홍의노파가 이내 혼신의 공력을 발출할 바로 그 찰나였다. [모모, 멈추세요.] 갑자기 창문이 열리며 백의소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났다. [...!] 홍의노파는 이에 급히 공력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혁사린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백의소녀는 혁사린을 향해 아름다운 미소를 보냈다. [당신이 폭풍야(暴風爺)의 환영추종비(幻影追從飛)를 사용하다니...정말 놀랍군요.] 혁사린은 내심 아연했다. (저 소녀가 그것을 알고 있다니? 놀랍구나. 그렇다면 저 소녀의 무공조예는 나와 비교해서 손색이 없다는 결론이 아닌가?) 놀라운 일이다. -폭풍야(暴風爺)! 천하제일(天下第一)의 경공비술(輕功秘術)과 추적술(追跡術)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신이 추적하고자 한 인물은 지금까지 한번도 놓친 적이 없다. 조금 전 혁사린이 펼친 환영추종비(幻影追從飛)는 폭풍야만의 독문절기였다. 백의소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우연히 이곳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믿겠어요. 그러나...나를 본 이상 이곳을 떠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어찌하겠단 말이오? 낭자의 낭군으로 곁에 두겠단 뜻이오?] [이런 꽤씸한...] 홍의노파가 다시 분노를 토했다. 그러나 백의소녀에 의해 제지됐다. [당신은 경박한 듯 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사로잡는군요. 하지만 이것을 알아야 해요. 당신은 이곳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혁사린은 빙그레 웃었다. [나 역시 낭자와 함께 있는다면 영원히 이곳을 떠나지 않을 결심이오.] 백의소녀의 짙은 눈썹이 상큼 위로 올라갔다. [당신은...] 그녀는 돌연 말을 그쳤다. 이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의 신형은 창문을 넘어 눈 깜짝할 사이에 혁사린의 앞에 내려선 것이다. (무서운 신법이다.) 혁사린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홍의노파는 질겁을 했다. [공주님, 나오시면 안돼요.] 백의소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요.나는 이 기회에 내가 어느 정도로 약해졌는지 시험해 보겠어요.] 이어, 그녀는 혁사린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공격할 준비를 하세요.] 혁사린은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에 입을 열었다. [낭자를 공격하란 말이오?] [그래요.] [우헤헤헤...아니되오. 어찌 장부가 아녀자를 상대로 무공을 논할 수가 있겠소? 더군다나 낭자는 병환중인데 말이오.] 혁사린은 허리를 굽히며 웃었다. 백의소녀는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럴까요? 그러나...당금 무림에서 나의 오초를 받아낼 수 있는 고수가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면?] 혁사린은 흠칫했다. (그녀는 어쩌면 그런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나에게는 안되지...) 그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백의소녀의 아름다운 음성이 들려왔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용모를 감추고 있나요? 그럴 이유라도 있나요?] 혁사린은 그녀의 말에 아연 놀라고 말았다. (내가 사용한 수법은 완벽한 것이다. 그런데 저 소녀는 한 눈에 내 역용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그처럼 뛰어난 안력을 지녔단 말인가!) 백의소녀는 방실 웃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당신의 두 손을 보고 알았으니까요.] [두 손?] 혁사린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 백의소녀가 재차 말을 이었다. [당신의 얼굴은 피부가 거칠지만 두 손 만큼은 백옥처럼 윤기있고 깨끗해요. 이제 설명이 됐나요?] 혁사린은 싱거운 웃음을 흘렸다. (날카로운 관찰력이다.) 백의소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공격할 준비를 하세요.] 혁사린은 생각했다. (이 소녀의 무공 정도를 파악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같이 결심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녀자를 상대로 먼저 초식을 전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소. 그러니...낭자가 먼저 공격하시오.] 백의소녀의 입가에 어리던 미소가 서서히 걷혀졌다. [그렇게 되면 공격할 기회가 없을텐데요?] [...!] 혁사린은 담담하게 웃을 뿐이었다. [좋아요.] 백의소녀는 크게 고개를 그덕인 뒤 상체를 가볍게 앞으로 숙였다. 다음 순간, 그녀의 열 손가락에서 빗발같은 강기가 폭사되어 나왔다. [조심하세요!] 파---츠츠츳... 손가락에서 강기가 뻗쳐나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으로 보아 백의소녀의 무공이 특이하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가 있었다. (매서운 기세다. 섣불리 상대하다가는 십중십 패할 것이다.) 혁사린은 이같이 생각하며 재빨리 절정의 신공으로 맞섰다. 파파팟---!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음향에 이어 그들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전무후무한 대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의소녀는 내심 경악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욱 뛰어나다. 이자를 물리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혁사린 역시 아연하고 있었다. (아녀자의 몸으로 이같은 경지에 이르렀다니...또한 지금 이 소녀는 병중이 아닌가? 진정 놀랍구나.) 백의소녀는 일순 입술을 깨물었다. [한빙천하(寒氷天下)!] 쩌정--! 그녀는 십성의 공력으로 절대살강을 격출했다. (헛!가공할 위력이다. 무아성승의 보리밀다대승불...그것이면 능히 제어할 수 있다.) 혁사린은 주춤 물러서며 부처님과 같은 묘한 자세를 취했다. [보리밀다승불(菩利密多大乘佛)-!] 그는 두 손을 정면으로 쭉 뻗어 무시무시한 천공을 시전했다. 파파팟... 한데, 그 순간 지극히 공교로운 일이 발생했다. 백의소녀는 일초를 시전한 뒤 막 신형을 정면으로 날려 혁사린의 완백을 거머쥐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혁사린의 두 손에 자신의 탄력있는 젖가슴을 들이데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뭉클...! [아앗!] [어엇!]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놀라움에 찬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나쁜 사람...] 백의소녀는 뒤로 주르르 물러서며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혔다. 그러나, 두 눈동자에서는 수치와 분노의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혁사린은 손 끝이 그녀의 탄력있는 부드러운 젖가슴에 닿는 순간 전신이 찡해 오는 것을 느꼈다. 문득, 그는 괴이한 웃음을 흘렸다. [후후훗...절세미녀의 앞가슴 역시 까무러치도록 좋구려.] 이 말에 분노하지 않을 여인이 있겠는가? [닥쳐라!] 백의소녀는 수치심이 이런 엄청난 살기로 돌변했다. [이---야---얍!] 그녀는 앞뒤를 가리지 않은 채 십이성의 공력을 전개했다. [아앗! 공주님...안됩니다.] 일순 홍의노파가 대경실색을 하며 백의소녀를 제지시키려 했다. 그렇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파츠츠츳... 파아팡---! 무시무시한 강기가 허공에서 충돌했다. 그런데 이 순간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우...욱...] 백의소녀는 돌연 선혈을 분수같이 내뿜으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섰다. 혁사린은 일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단지 저 소녀의 초식을 제지하기만 했을 뿐 전혀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선혈을?) 문득, 그는 백의소녀에게 급히 다가서는 홍의노파를 보는 순간 의문을 풀 수가 있었다. (아...! 그랬었구나. 그녀는 불치의 병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새삼 깨닫는 혁사린은 급히 홍의노파에게 다가갔다. 이 순간 백의소녀는 홍의노파의 부축을 받으며 혁사린을 향해 원망의 눈빛을 던지고 있었다. [다...당신...] 돌연 그녀는 다시금 검붉은 선혈을 울컥 토해내며 혼절하고 말았다. [아앗! 공주님...] 홍의노파는 혼비백산하며 급히 백의소녀의 사대혈을 짚었다. 연후 혁사린을 노려보았다. [찢어 죽일 놈...감히 공주님에게 충격을 주다니...결코 오늘 네놈을 살려보내지 않겠다.] 혁사린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선 채 혼절한 백의소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상태로 방치한다면 생명이 곧 끊어진다. 서둘러야 한다.) 그는 다시 급히 백의소녀에게 다가갔다. 순간 홍의노파가 노발을 터뜨렸다. [멈추어랏!] 혁사린은 아랑곳 하지 않으며 여전히 다가서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홍의노파는 괴이한 탄성을 발하며 옆으로 석자 정도 주르르 비켜나는 것이 아닌가? [어헉! 이...이럴 수가...] 그녀는 자의가 아닌 혁사린이 일으킨 한 줄기 지극히 부드러운 잠력에 의해 저절로 비켜서게 된 것이다. 혁사린은 급히 백의소녀를 안고 빙옥으로 향했다. [이놈! 썩 내려놓지 못하겠느냐?] 홍의노파는 대갈일성을 토하며 혁사린의 등을 향해 일장을 격출했다. 츠츠츠츳... 파팡! 그녀가 격출해낸 무서운 장력은 혁사린의 등에 정확하게 가격되었다. 그런데 돌연 홍의노파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우우...저럴...수가...] 홍의노파의 눈은 부릅떠졌다. 혁사린은 그녀의 장력에 격중됐음에도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채 여전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니, 허공에 반치 정도 든 채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미...믿을 수가 없다. 나의 공력을 등으로 받아내다니...공주님조차 불가능한 일을...] 홍의노파는 망연자실한 채 언제까지나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것은 꿈일 것이다.) 향기 그윽한 지란지실(芝蘭之室), 침상 위에는 안색이 더 할 수없이 창백한 백의소녀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탁자를 마주한 채 혁사린과 홍의노파가 앉아있었다. 혁사린은 무거운 신음을 토했다. [낭자는 천하에서 가장 악독한 천음만학정(天陰萬鶴精)에 중독되었는데 어찌해서...] 홍의노파는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하나, 그러는 반면 내심 혁사린의 안목에 혀를 내둘렀다. -천음만학정(天陰萬鶴精)! 일종의 산공독(散功毒)의 일종으로 무림인이 복용하면 일신 무공이 모래 속에 스며드는 물처럼 서서히 사라진다. 하나 이보다 더 무서운 점은 천음만학정을 여인(女人)이 복용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이다. 여체(女體)는 음(陰)이 강(强)하다. 천음만학정 역시 음기가 강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천지간의 강한 음기(陰氣)를 지닌 것들 가운데 가장 으뜸인 것을 꼽으라면 주저없을 정도다. 그러나 음기지체인 여인이 천음만학정을 복용하게되면 체내에 지닌 순음지기(純陰之氣)와 천음만학정이 지닌 천음지기(天陰之氣)가 서로 상통하지 못하고 제각각 혈맥을 타고 흐르게 된다. 그로 인해 체내의 음맥(陰脈)이 서서히 응고(凝固)되어 결국 죽음으로 인하게 된다. 세상사 무엇이든 넘치면 좋을 것이 없다. 무공을 익힌 여인이 적당한 음기를 흡취하게되면 더할 나위없지만 그 도가 지나치게 되면 오히려 화를 당하는 것과 같다. 하여 천음만학정은 영정(靈精)이기보다는 극독(극獨)이라 말하는 게 나을 것이다. 홍의노파는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사실...공주님은 스스로 천음만학정을 복용한 것이네.] [스스로?] 혁사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천음만학정같은 절세신독을 누가 스스로 복용하겠는가? (으음...필시 무슨 원인이 있구나.) 혁사린은 내심 생각하며 홍의노파의 입술을 주시했다. 홍의노파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늙은이는 북해의 수석장로이며 호는 북해모모(北海 姆姆)라고 하네.] [아...!] 혁사린은 홍의노파가 북해모모라는 사실에 크게 경악했다. -북해모모(北海姆姆)! 북해의 단 한 명 뿐인 수석장로로서 그 무공은 가공할 정도이다. 그녀의 나이는 현재 일백 사십 세였다. 북해모모는 서서히 말을 이었다. [북해는 변을 당했네 그것은 한 사람의 음모 때문이었네.죽일 놈...놈은 공주님의 의숙부이면서도 그같은 짓을...] 두 주먹을 부르르 떠는 그녀의 눈에선 살망이 뿜어져나왔다. (음모...의숙부?) 혁사린이 다소 의아란 듯이 북해모모를 바라보자 그녀는 짖이기듯이 다시 말했다. [북해는 평화롭게 지냈네. 그런데...어느 날 홀연히 공주님의 의숙부인 천애마군(天涯魔君) 소천경(韶天璟)이 찾아왔네. 그 당시는 공주님이 홀로 전 북해를 통솔하고 있었네.] 혁사린이 천천히 물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어지 되었기에 그녀가 북해를 통솔하고 있었읍니까?] 북해모모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북해의 신이신 공주님의 부모님은 십 년 전에 작고하셨다네. 때문에 공주님이 모든 중임을 맡고 계셨네.] [음...] 혁사린은 백의소녀가 북해를 이끌어 왔다는 사실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의 몸으로서, 그것도 나이어린 측면에서 본다면 대단한 소녀인 것이다. 북해모모는 울분을 억누르지 못하며 부르짖듯이 말했다. [그 자...소천경은 살겁을 몰고 온 것이네. 북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 [...!] 혁사린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북해모모의 두 눈에서 원독의 화염이 폭사되었다. [결국 놈은 북해를 점령했네.] 혁사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소천경 혼자서 막강한 북해를 점령했단 말입니까?] 북해모모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네. 놈은 가공할 동조자를 구했던 것이네.] [가공할 동조자?] [놈은...혈무연(血霧淵)의 동조를 얻은 것이네.] [혈무연!] 혁사린의 전신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혈무연(血霧淵)!> 삼백 년 전 남악(南岳) 형산(衡山)에 혈무곡(血霧谷)에 괴이한 탑(塔)이 세워졌다. 사시사철 피빛 안개 속에 가려져 있는 탑은 바다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연못 중앙에 우뚝 세워졌고 연못 물빛은 차라리 핏물이라 할 정도로 붉었다. 세상은 혈무곡 안에 세워진 탑을 혈탑(血塔)이라 칭했고,피빛 연못을 혈무연(血霧淵)이라 불렀다. 그런데 혈무연이 생긴 이후 무림고인들이 의문스럽게 하나 둘씩 살해되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살해된 자 주검 옆에는 피빛 혈지(血紙)가 놓여있었다. 혈지 안에는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안개에 싸인 혈탑(血塔)이 그려져 있었다. 결국 세인들은 그것이 혈무연의 소행임을 간파했다. 이에 중원을 대표하는 그 당시의 최고고수들, 즉 천성삼기(天聖三奇)가 혈무연을 향했다. 하늘을 찌르고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탑, 천하에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며 높은 탑에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무림을 대표해 떠난 것이다. 그러나 천성삼기는 이틀날 한 장의 핏빛 서찰과 함께 사늘한 시체가 되어 무림에 되돌아 왔다. -크크큽...감히 혈무연에 도전하다니 가소롭구나. 이제 그 벌을 내리리라. 천하를 초토화로 만들 것이다. 중원은 피의 절규를 토했다. 끝내 혈무연은 천하를 초토화로 만들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고금제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혈무연이 돌연 원인 모르게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세인들은 혈무연이 사라진 진정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북해! 바로 신비의 북해에서 혈무연을 친 것이다. 결국 혈무연은 붕괴되었다. 북해의 위력은 정녕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우우...분하다. 그러나 혈무연은 다시 세워진다. 백년, 이백 년, 아니, 천 년이 흘러서라도 말이다. 저주의 외침과 함께 혈무연은 이렇게 사라졌던 것이다. [...!] 혁사린은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북해모모가 처연하게 입을 열었다. [혈무연...그들이 다시 일어났네.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네. 그 누구도...] (지옥갱(地獄坑), 백마도(百魔島), 거기에다 이제는 혈무연까지 나타났다.) 혁사린의 두 눈에서 강한 빛이 폭사되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과거 엄청난 마기를 동반한 혈겁의 주역(主役)들이 한 시대에 동시에 나타났다.) 드디어 운명의 시작인가? 북해모모는 울먹이듯 말을 이었다. [혈무연과 소천경은 북해를 완전 장악한 뒤 공주님을 사로잡았네. 연후...] 여기에서 잠시 말을 중단하는 그녀는 잠시후 다시 입을 열었다. [소천경은 공주님에게 더욱 비열한 요구를 했네. 자신의 아내가 되라는 것이었네.] [뭐...뭣이?] 혁사린은 놀라움에 앞서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세상에 아무리 의질녀(義嫉女)요, 의숙부(義叔父)라 하더라도 조카에게 부인이 되라는 숙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비열한 인간...아니, 그는 인간도 아니다.) 북해모모는 울분과 한에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공주님은 거절했네. 그러자 혈무연에서 온 한 마인이 돌연 한 병의 천음만학정을 꺼냈네. 그리고...공주님에게 복용하라고 했네.] 그녀의 두 눈에서는 원독에 찬 한기가 줄기줄기 뻗어나오고 있었다. [그 자는 천음만학정을 복용하면 북해를 떠나게 해 주겠다고 했네. 이에 공주님은 복용했네 달리 다른 선택의 방법이 없었네. 그런데 그놈은 약속을 어기고 감금을...] [아...] 혁사린은 무거운 탄성을 토했다. 북해모모는 말했다. [그러나 내공이 워낙 심후한 공주님은 천음만학정을 혈도 한 곳에 집중시키며 원한의 이를 갈았네. 이 늙은이는 천신만고 끝에 공주님을 모시고 탈출할 수가 있었네 그래서...이곳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네.] 혁사린은 무거운 신음을 길게 토했다. [한데...소천경은 아직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으니 이상하지 않습니까?] 북해모모는 고개를 저었다. [그자는 북해를 얻었지만 실권은 혈무연이 쥐고 있네. 때문에 명령이 있기 전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것이네.] 혁사린은 내심 생각했다. (그들은 먼저 그곳을 탈출한 백의소녀를 찾으려 할 것이다. 때문에 지금까지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곧 그들은 중원을 향해 마수를 뻗을 것이다. 백의소녀의 공력이 아무리 높다 해도 결국 천음만학정의 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스스로 위안하면서 말이다.) 혁사린의 입가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침상 위의 백의소녀를 응시했다. 북해모모 역시 그녀를 응시하며 말했다. [공주님의 방명은 경자옥(景慈玉)이라 하네. 북해에선 설영공주(雪影公主)라고 부르지...] [설영공주 경자옥...] 혁사린은 그녀의 이름을 되뇌여 보았다. -설영공주(雪影公主) 경자옥(景慈玉)! 북해모모는 장탄식을 토했다. [아...허나 이제 모든 것은 끝났네. 공주님는 억지로 십이성의 공력을 전재했기 때문에 독이 체내로 퍼진 것이네.] 혁사린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넌즈시 물었다. [혹시...그녀를 살려낼 방도가 없읍니까?] [...?] 북해모모는 천천히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또 다시 탄식을 토했다. [없는 것은 아니지만...불가능하다고 봐야 하네.] 혁사린은 내심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방법입니까?] [방법이 아니라 한 인물을 찾아야 하네. 그러나...그 자를 지금까지 찾아보았으나..영영...] [대체 누군데 그러십니까?] 북해모모는 처연하게 말했다. [절명사의만이 공주님의 중독을 해소시켜 수가 있을 것이네.] [아...절명사의...] 혁사린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절명사의(絶命死醫)! 그는 미친 의원(醫員)이다. 술을 마셔야만 사람을 살리든 죽이든간에 의술을 시전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사 자신의 아내가 옆에서 죽어간다 해도 거들떠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의술에 관한한 그를 능가할 자가 없다. 문득, 혁사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절명사의 말고도 또 한 사람이 설영공주의 독을 몰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모는 모르고 있군요.] [또...한 사람?] 북해모모의 두 눈이 더할 수없이 커졌다. [후후훗...그렇습니다. 설영공주를 살릴 수 있는 또 한 명의 신의(神醫)가 있읍니다.] [그 사람이 누군가?] 북해모모는 자신도 모르게 격동하며 혁사린의 어깨를 확 움켜쥐었다. 혁사린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바로 납니다.] [...?] 북해모모는 그 순간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혁사린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절명사의...그의 의술은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의 의술을 모두 습득하고 있음은 물론 단언하건데 그보다 더 고절한 의술을 익혔다고 자부합니다.] 북해모모의 턱이 부르르 떨렸다. [그...그렇다면 공자께서는 절명사의의 제자?] 혁사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다만 절명사의의 의술을 지닌 것 뿐입니다.] [...?] 북해모모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혁사린은 천천히 말했다. [어떻까요? 내가 한 번 치료해 보는 것이...] 북해모모는 잠시 주저했다. (믿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공주님을 이대로 둔다면 곧 죽게 된다. 모든 것은 운명이다.) 그녀는 생각을 굳힌 뒤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 공주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투는 어느 새 변해 있었다. 혁사린은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장담은 하지 못합니다만 자신은 있읍니다.] [...] 북해모모는 천천히 설영공주 경자옥에게 시선을 돌렸다.이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공자를 믿어 보겠소.] 혁사린은 그녀가 승락하자 이내 입을 열었다. [모모께서는 밖에 나가 계십시요. 그리고 사흘 뒤에 뜨거운 물을 가지고 들어오십시오.] [사흘 뒤...] 북해모모는 적이 놀란 표정을 띄웠다. 무슨 치료이길래 사흘씩이나 걸린단 말인가? 혁사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일종의 자신감인지라 북해모모는 절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인명은 재천... 하늘에 맡겨볼 수 밖에....)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