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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경제적 수탈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압으로 병합된 뒤 우리 민족의 근대적 발전은 크게 제약받았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직후 〈조선토지조사령〉과 〈조선회사령〉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경제법령을 발표했다. 1912년에 공포된 〈조선토지조사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8년여에 걸쳐 전국토의 세부측량을 단행했다.
이 조사사업에서 일제는 토지소유권이 분명하지 않다는 구실로 전체 경작지의 12.3%인 35만7000여 정보, 전체 임야의 58%인 294만 정보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방대한 조선총독부 소유의 토지와 산림은 일본의 우리 나라 통치에 있어 주요 재원이 되었고, 또한 우리 나라에 진출하는 일본인에게 그 일부를 헐값으로 불하하여 그들의 경제활동 기반을 닦아주었다.
일제는 또 한국농촌에 대해서는 봉건적 현물고율소작료를 근간으로 하는 소작농체제를 그대로 유지 강화함으로써 농민경제의 향상을 억제하였고 농촌의 근대적 발전을 저해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구의 75%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였다. 그 가운데 1933년부터 1937년까지의 상황을 보면 55.2%는 순소작인이며, 25.6%는 자작 겸 소작인으로서 그들의 경작규모는 1호당 1정보 미만의 영세농이었다.
1910년 12월에 공포된 〈조선회사령〉은 일제의 조선상공업정책을 집약적으로 표명한 것으로서, 이 법령이 목적한 것은 조선에 근대공업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데 있었다.
즉, 조선은 일본공업에 대한 원료제공지요, 상품판매지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법령이 실시된 1910년대에는 조선 내에 진출한 일본인기업의 절대다수는 상사회사였고, 그 밖에 광공업 분야에서는 광산개발과 수출원석을 처리하는 제련공장, 수출면화를 위한 조면공장이거나 또는 수출미곡을 위한 정미회사가 고작이었다.
이 〈조선회사령〉은 1920년에 철폐되었으나 당시 그 철폐의 경제적 배경은 제1차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적 불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일본 내의 유휴자본을 조선에 옮겨놓고자 한 것이다. 〈조선회사령〉이 철폐되었어도 조선의 공업건설은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유휴자본은 군소자본이었고, 그들은 고율소작지대가 보장되고 있는 토지투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근대공장공업의 건설은 부진하였다.
1929년 말 조선의 공업노동자수가 10만1900여 명이었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근대공업의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당시 조선 내 근대공업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제지표를 들 수 있다.
즉, 1929년 말 조선의 산업생산액 중 농림·수산업은 전체의 78.6%, 광공업은 겨우 21. 4%였다. 그리고 당시 제조회사의 업종비율은 염직공업 4.7%, 화학공업 15.6%, 기계공업 7.1%, 식품공업 43.7%, 기타 잡공업 28.9%였다.
이와 같이 〈조선회사령〉이 철폐된 뒤에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에는 큰 변동이 없었으며,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량기지와 상품판매지로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에 변화가 온 것은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방을 장악하게 되자, 조선은 대륙전진기지로의 새로운 전략적 시각으로 재검토되었으며, 그때부터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1937년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전을 개시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 내의 경제체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전시물자생산을 위한 정책으로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량증산계획의 재실시와 산금5개년계획 및 조선의 중화학공업기지화계획이라는 세 부문에 걸쳐 집중적 개발을 단행하였다.
식량 특히 미곡증산정책은 일본의 식민지조선건설의 기본정책이었고, 따라서 병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의 중점사업으로 진행되어왔으나, 1930년대 초 일본농민이 조선미 수입을 심하게 반대하자 조선산미증산정책은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을 개시하면서 대륙에 진출한 일본군대의 군량충당을 위해 조선미의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38년 다시 산미증식10개년계획을 세우고 강력히 추진시켰으나, 당시는 전시중이어서 화학비료생산의 부진, 농민징용에 따른 농업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미곡증산계획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농민보유미곡의 징발을 강화하여 군량미를 보충했다.
산금정책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팽창되는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1938년 조선 내에 산금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그 개발을 감행해나갔다. 중화학공업기지화정책은 일본 대재벌의 진출에 따라 1930년대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창설하고 영월과 삼척탄전 개발에 착수했고, 1937년 이래 종래의 일본제철주식회사·겸이포제철회사 외에 미쓰비시 광업주식회사 청진제철소·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조선이연금속주식회사 인천공장에서 제철공업이 착수되었다. 조선마그네사이트개발주식회사도 창설되었다.
이와 같은 국방자원개발과 아울러 금속공업·조선공업·철도차량공업·무수주정공업·화약공업·인조섬유공업 등 중공업이 전력자원과 지하자원과의 연결하에 북조선 일대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전쟁이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은 소위 결전체제로서 경제운영의 근본을 규제한 국가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국력을 이에 경주할 태세를 갖추었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치하에서 우리 나라는 하나의 국민경제단위로서 발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경제활동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은 점차 높아졌고, 또 대중 속으로 확대되었다.
3·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참여운동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의 발로였다.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되고 일본의 군소자본이 조선에 진출하여 각종 산업 분야에서 기업활동을 전개할 무렵, 우리 민족은 대중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을 전국적 규모로 펼쳤다.
이 운동은 단순한 일화배척이 목적이 아니라 민족경제의 자립을 위한 근대기업활동에의 참여를 촉구한 운동이었다.
한편, 당시에 민중의 경제저항투쟁도 활발하였다. 농촌에서는 농민의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는가 하면 소작인의 소작쟁의가 일어나 봉건적 고율소작료에 반대하였고, 광산·부두 및 공장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도 치열하였다.
1920년대 초에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민족은 근대기업계로 활발하게 진출했는데, 그것은 3·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의식이 높아진 까닭이다.
1938년말 현재 우리 나라 기업회사 총수는 5,413개 사였고, 그 중 민족계 회사수는 2, 278개 사로서 전체 회사수의 40%였다.
이것은 1920년말 현재 한국인 소유회사수 비율이 18.2%에 비하면 그 동안 민족계 회사의 증가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계 기업회사의 성장은 극소수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영세기업회사의 수가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의 민족계 회사 2,278개 사 중 공칭자본금 50만 원 이상의 회사는 50여개 사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회사는 자본금 10만 원 미만의 중소기업회사였다.
1938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일본인 소유 1개 회사당 평균자본액은 30만5000여 원이었으나 한국인소유회사의 평균자본액은 5만3000여 원이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의 근대기업계 진출이 활발해졌던 것은, 영세자본에 의한 중소기업 분야에서 겨우 그 활로를 개척해나갔음을 말해 준다.
1937년 일본이 중국본토 침략전쟁을 감행하였고, 다시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함에 따라 일본의 전시경제체제는 강화되었고, 기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대에 접어들어 전세가 불리해지자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민간기업체를 그에 통합하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1942년의 〈중소기업정리령〉은 특히 조선인기업체가 정리대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민족기업의 몰락은 현저하게 나타났다.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에 가장 심하게 탄압받고 수탈당한 계층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3.1반일시위운동(三一反日示威運動)과 더불어 민족의식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勞動組合)을 결성하여 권익을 보호하고 민족독립운동(民族獨立運動) 세력과 연계하게 되었다. 3.1운동 때도 많은 노동자들이 참여하였다. 겸이포 제철소에서는 3월 3일 2백여명의 노동자들이 '대
한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운동에 나섰으며, 11월 14일에는 250여명의 노동자가 두번째로 시위를 하여 용광로를 점거하면서 일경(日警)과 대치하였다. 3월 9일 경성전기주식회사 종업원 5백여명은 2일간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에 참여하고, 8월 14일에는 전차운전사와 차장을 비롯한 전체 종업원이 파업을 단행하여 서울이 한때 암흑천지가 되었다.
동아연초주식회사 종업원 5백여명은 3월 7일 만세를 불렀고 10월 12일에는 두번째로 6일간 파업을 단행했다. 서대문 밖 터널공사장 인부들은 3월 12일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나섰다가 주동자 유장호가 구속되어 심하게 구타당했다. 충북 괴산군 소이면 노동자 1백여명은 3월 19일 수백명의 주민과 함께 인근 마을을 돌면서 만세를 부르다가 주재소를 습격했다. 이와 비슷한 노동자들의 반일시위운동은 전국 도처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노동자들이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일제(日帝)는 3.1운동으로 타격을 받자 정책을 바꾸어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나 노동운동에 대하여는 계속 탄압으로 일관하였다. 특히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성립되어 노동운동이 일원화되고, 노농쟁의(勞農爭議), 소작쟁의(小作爭議)가 발발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노농운동이 항일투쟁(抗日鬪爭)의 일환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치안유지법을 한국에까지 실시하였다. 1925년부터 시작된 네차례에 걸친 조선공산당 사건 이후부터는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동일시하여 더욱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 일제는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 노동자의 요구조건에 대한 이해, 소년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에 대한 보호기설, 동기술 교육 등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직 한국인 노동자를 탄압하고 혹사시켰다.
● 다쯔베야의 슬픈 사연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제로부터 당한 박해와 수탈은 국내나 일본 본토나 마찬가지였다. 많은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아 건너간 일본에서 한국인들은 참혹한 강제노동과 살육, 임금착취, 성폭행 등을 겪어야 했다. '아세아공론' 1975년 2월호에 따르면 1939년부터 41년까지 2년 동안에 한국인 노동자의 소모율은 35.6%, 즉 한국인 노동자는 2년 동안에 100명 중 35명이 죽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많은 희생은 일반 사고나 산재, 질병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영양실조, 위험한 고사장에서의 사고, 일본인 감독의 폭행, 일본 관헌의 고문치사 등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의 희생과 관련하여 '다쯔베야의 슬픈 사연'이 전한다. 1943년 가을 일본 북해도 지방에 큰 홍수가 났다. 마쓰비시[三菱], 비바이[美遣] 광산의 다쯔베야에 물이 들었으나 문은 밖으로 잠겨 있어서 안에 갇혀있던 1백여명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숙사와 함께 그대로 탁류에 휩쓸려 전원이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사람 살려!"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일본인들은 도망치기에 바빴다.
다쯔베야란 '한국인 노동자 합숙소'로 탄광지대에 많았다. '다쯔베야'의 어원을 살펴보면 '다쯔'란 문어란 뜻이며, '베야'란 거처하는 방이란 뜻이다. 이것을 풀이하면 '문어의 집'이 된다. 즉, 문어란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플 때는 제 집에 들어가서 제 발을 뜯어먹고 6개월을 살 수 있는 생리가 있는데 이를 빗대어 부른 것이다. 이러한 말은 옛날 노예를 사고 팔던 시대에 노예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집을 감옥과 같이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집은 크면 100명, 작으면 50~60명이 수용할 정도로서 주위에 몇겹으로 철조망을 치고 감시초소가 있어서 노동자들이 들어가면 문을 밖으로 잠가서 일체 외부출입을 못하도록 한 것이다.
다쯔베야에는 두목이 있어서 임금이나 식량배급 문제뿐만 아니라 기타 일체를 마음대로 정하였으며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매를 들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회사로부터 착취당하고 다쯔베야 두목에게 착취와 폭행을 당하는 이중의 박해를 겪어야 했다. 전시중 노동자에게 배급하는 식량은 1인당 하루 6흡 5작이었다. 그러나 중간에서 착취하고 두목에게 떼어먹히고 나면 1인분이 3흡이었는데 그 속에는 콩, 밀가루, 외미 등이 섞여 나왔다. 많은 노동자들이 굶어 죽어갔는데, 한 노동자는 죽기 직전에 자기 몫의 식량 3흡을 동료들에게 고루 나눠주고는 마지막으로 "내 영혼은 왜인(倭人) 감독들의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저주하겠다."면서 숨을 거두었다.
● 회사령(會社令)으로 한국인 기업 옭아매
1922년 7월 현재 조선인 노동자 수는 남자 88만 2천 291명, 여자 3만 6천 312명으로 도합 91만 8천 603명에 달하고 있었다. 1930년대 특히 후반기에 들어서자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한 대공업정책(對工業政策)과 군수시설의 확장, 더욱이 지하자원의 대대적인 약탈로 인해 공업노동자를 비롯한 각 부문의 노동자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다. 공장, 광산, 토건 3부문의 노동자 총수는 1933년~1938년의 5년간에 21만 3천 729명에서 59만 9천 798명으로 약 3배 증가하였는데, 매년 10만명이 증가하는 추세였다. 일제(日帝)의 극히 불완전한 통계에서도 1943년 11월말 현재 175만의 노동자가 있었다. 여기에 '국민징용' 중 '일반징용'에 의한 노동자로 1944년의 1만 9천 655명, 1945년의 2만 3천 286명, 합계 4만 2천 941명을 가산하면 약 180만명에 달한다. 결국 일제 식민통치 말기 한국 내의 한국인 노동자만도 2백만명을 훨씬 넘었다. 이것은 조선 내의 총인구 약 2500만명(1944년 조선총독부의 인구조사에 의하면 총인구는 2천 591만 7천 881명으로 그 중 일본인은 71만 2천 583명)의 약 12%에 해당한다. 당시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인 노동자들은 일본 군국주의 침략 전쟁의 '생산도구'로 착취되고 탄압받았다.
일제(日帝)가 모든 아시아를 자국의 영역으로 만들려는 목적으로 침략 전쟁을 시작하기 전인 1931년에서 35년 전까지만 해도 노동조합원 중 1천 759명이 노동조합원 중 4천 121명이 피검되어 형언할 수 없는 야만적 고문을 받았다. 그런데 침략 전쟁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일체의 조합운동이 금지되고, 더욱이 징용제가 무차별적으로 실시되면서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과 학살은 더욱 심해졌다. 일제 식민통치 말기 징용과 관련하여 자행된 잔학상에 대해서는 나중에 별도로 정리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1920~30년대를 중심으로 노동자 탄압실태를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이른바 '회사령(會社令)'을 반포하여 한국인 기업을 방해, 탄압하였다.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당장에 체형이나 벌금형을 처하여 한국인들의 기업 활동을 억압했다. 윤현진(尹顯振)은 경남 양산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귀국하여 동지 몇명과 소비조합기성회(消費組合期成會)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이 지역의 주임서기 히로[四轉]과 헌병대 소장 오카다[岡田]의 찬성을 얻었다. 그후 자금 1만 2천원을 마련하여 사원 3백명의 기성회를 설립하자 현지 일본 상인들이 시기하여 오카다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회사를 철폐하거나 다른 곳으로 옮기도록 한 것이다. 헌병대 소장은 윤현진에게 회사폐쇄를 지시했으나 듣지 않자, 일본 상인들이 그를 배척하여 배일파(排日波)라고 공공연히 선전하고, 오카다는 회사를 일본인에게 팔아넘기라고 협박했다. 그러나 윤현진이 법률을 근거로 굳게 버티면서 마침내 개업하였다. 그러나 이 조합 때문에 30일 동안 47회나 헌병대에 불려다니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광업 인가를 하는데 있어 일본인에게 우선권을 주는 등 한국인을 심하게 차별하였다. 종래에는 광업 인가를 중앙정부나 지방 관청에서 실시하였으나 병합 이후에는 광업법령을 반포하고 일본인을 불러들여 관리를 쓰게 하였다. 각 도에 지시 공표하기를 '광상(曠床)의 광협(廣狹)과 대소를 측량하여 청원하는 자가 있으면 인가를 준다'고 하였다. 이에 한국인들이 앞을 다투어 광산을 발견하여 청원서를 제출하면 일본인 관리가 즉시 달려가서 광산의 질과 매장량을 조사한 뒤에 2~3년이 지나도록 인가하지 않고 일본인에게 채광토록 허가했다. 이렇게 총독부는 앉아서 전국의 광산을 손바닥 살피듯이 조사하여 일본인에게 우량 광산의 채광권을 주고 한국인에게는 아주 열등한 것만을 허가했다. 그러므로 한국인 광산업자는 대부분이 채광의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고 파산하는 자가 많았다.
대한제국시대에 외국인이 채광권을 얻은 일을 제외하고는 1년의 산금액(産金額) 10만원 이상인 것은 다 일본인의 소유이고 한국인은 이익을 얻을 기회가 전혀 없었다.
● 최초의 주주 노동자가 된 평양 노동자
1929년 세계대공황의 여파는 한국의 고무업계에도 불어닥쳤다. 조선고무업자협회는 1930년 2월 3일 서울에서 대회를 열고 불황에서 오는 피해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1할 인하하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 당시 고무공장은 대부분 서울과 평양에 있었다. 서울의 고무공장은 모두 휴업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작업을 시작할 때는 내린 임금대로 인부를 모집하면 문제될 바 없었지만 평양에서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으므로 일방적인 임금 인하는 노동자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 평양고무공업협회는 임금인하 한도를 서울의 결의보다 7%가 높은 1할 7푼으로 인하한다고 공표했다. 한국인 노동자들은 "이번 불경기는 물가가 내려간 것이므로 원료대가 내렸고 동력대도 인하되었다. 그러나 고무제품은 아직 내리지 않고 있는데 무슨 까닭에 임금을 인하하느냐?"고 항의하면서 대표를 뽑아 업주와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업주 측의 태도는 완강하여 노동자들은 단합대회를 갖고 총파업을 결의하는 동시에 파업단을 조직하여 시내 3개소에 파업단 사무소를 두고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에 참가한 공장은 대동, 국제, 정창, 평안, 내덕, 구보다, 세창, 동양, 서경 등으로 파업에 참가한 인원은 1800여명이었다. 업주 측은 14일까지 출근하지 않는 자는 해고시키겠다고 강경일변도로 맞섰다.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알려지면서 신간회(新幹會)에서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이관구, 홍기문, 안병주 3인을 평양에 파견하였다. 파업단은 용기를 얻어 신간회 측과 연설회를 갖도록 경찰에 집회하기를 신청했으나 불허로 열리지 못했다.
업주 측은 정창 고무공장에서 파업에 가담한 2백여명의 직공을 해고하는 것을 시발(始發)로 무더기 해고와 함께 새 인부 모집에 나섰다. 경찰은 이때부터 업주 측의 충견이 되어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평양노동연맹을 이끌던 박원덕과 여직공 3명을 파업선동 혐의로 구속하고, 계속하여 모집방해, 취업방해, 파업선동 등의 혐의로 많은 남녀 노동자들을 검거했다. 파업이 사회문제로 확대되고 많은 노동자가 구속되면서 신간회 평양지회장 조만식(曺晩植) 등의 주선으로 노사간의 조정안이 마련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경찰이 금번 파업사건에 신간회의 간섭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노동자들에게 훨씬 불리안 조정안을 만들었다. 그리고 일부 노조간부를 협박, 매수하여 경찰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노동자들은 대표들의 불신임을 결의하고 1000여명의 노동자들이 시가행진에 이어 경찰서로 몰려갔다. 크게 놀란 경찰은 평남경찰부의 지원으로 기마경찰대 수백명을 동원하여 노동자들을 무차별 폭행, 해산시키고 150여명을 구속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구속됨에도 불구하고 일부 업체에서는 새 인부를 뽑거나 기회주의적인 노동자들을 불러모아 공장을 가동시켰다. 이것이 동지들에게 기름을 끼얹는 격이 되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결사대를 조직, 평양 고무공장을 습격하여 많은 사람이 다시 구속되고, 내덕, 평양 두 공장을 다시 습격하였는데, 이때 경찰과 충돌이 일어나서 30여명이 구속되었다. 여직공 50여명은 한밤중에 세창과 동양 두 공장을 습격하려다 다수가 구속되었다.
투쟁은 계속되어 여러 공장에서 경찰과 충돌하면서 많은 노동자가 구속되었다. 경찰은 유치장이 비좁아서 연무장을 유치장으로 사용할 정도로 수많은 노동자를 구속하고 심한 고문과 린치를 가했다. 쫓겨난 노동자들은 지역 유지들과 고무공장을 직접 세우기로 하고 기금 10만원을 목표로 고무공장설립준비회를 결성했다. 노동자들도 능력에 따라 한주 이상 주를 갖도록 하여 마침내 공장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파업에서 실업자가 된 노동자들은 주를 가진 노동자로 바뀌어 주주 노동자의 시발(始發)이 되었지만 일제의 여러가지 방해와 탄압으로 회사는 오래 견디지 못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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