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걸 옮기는 목적은 "무술"이다 "실전"이다라고 말을 할려면 꼭 이정도의 "양"의 수련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이런 즉 자신에게 솔직한 "질"적인 수련을 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래의 내용은 극진공수의 초대관장이셨던 故 최영의님(일본명;大山倍達)이 우리에게 이제는 전설로 남아있는 그 유명한 "입산수련"시의 일일수련메뉴 입니다. 우선 그분의 입산수련이 2회였음을 아시길.
만화책등에 나온대로 미군에게 지명수배를 당해 우선 피신형식으로 입산하며 수련을 합니다. 이때 약 1년정도였습니다. 그후 하산하여 처음있던 전일본 공수도 대회에 참가 우승을 하여, 이때 "내 갈 길은 공수도다. 목숨을 바치자" 라고 결심하여 다시 입산하여 (1948년) 1년반 (18달)동안 수련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3년을 예상했었다네요)
즉, 이 메뉴는 2차 입산수련시의 것입니다.
이젠 고인이 되신 그분의 초인적인 수련과 그 정신에 다시금 감명을 받습니다. 이 책을 읽을 기회를 주신 윤익암관장님께 감사드리며, 제가 다음주까지 시험과 강의가 풀이라 이번주까지 번역을 잡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04시 :
기상.
묵상 10분.
산 정상까지 구보 (Dash이므로 전력질주임) 왕복 2시간 설정
이후시간 :
종이에 그린 원을 보면서 명상을 하거나 독서.
* 종종 훈련이 격했던 날은 식사후 쓰려져 잤다고 함.
22시 :
취침
아! 그리고 이분에 대한 한가지 더 - 책에 있는 부분입니다.그가 수련한 것은 "차력"이나 "공수"만은 아니다. 그가 다녔던 "항공기술교"의 수업과목에는 "유도"가 있었다. 그는 이 유도 수업에 열심어서 대항시합의 선수로도 나갔었다. 또한 나중에 "소우네 도장"-아마 만화에도 나오는 그 도장일겁니다- 에 입문하여 4단을 획득하였다. 또한 그는 "대동류합기유술"의 "요시다 기따로"에게 사사받아, "대동류"와"요시다式 스틱/파라솔(지팡이와 우산)호신술"도 마스터 했다.또한 얼마간 "피스톤 호리구찌" -이사람도 만화에 나옵니다- 에게서 권투를 경험했으며, 맨손무술 이외에도 "鎖鎌術"(쇠로된 "낫"을 병기로 쓰는)도
수련 했었다.
다음 내용은 카메론 퀸의 저서 "마스 오오야마의 무도 가라데"에서 인용한 것이다. 마쓰다쓰(마스) 오오야마는 1923년 6월 23일 남한 지역의 군산과 멀지 않은 곳에서 최영의 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비교적 어릴때 그는 남중국의 만주에 있는 그의 누이의 농장으로 보내졌다. 9살때,그가있던 농장에서 일하던 일꾼인 이씨로부터 중국 남파 무술인 팔괘장을 배우기 시작했다.
(*주* 만화에서는 김제의 출생지에서 머슴이었던 이씨로부터
차력무술인 차비를 배웠다고 되어 있으나 이 글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한국을 떠나 만주에서 생활했으며 무술의 시작도 중국 쿵후로부터 였다고 나와있습니다. 팔괘장으로 번역한 것은 저의 추측이며, "Eight
hands"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아시는 분은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팔극권이나 취팔권등으로도 번역할 수 있을지...차력무술은 아닌것 같으며 저는 다른 오오야마 마쓰다쓰에 관한 웹 싸이트에서도 차비라는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유일하게 김용옥 교수의 "태권도 철학의 구성원리"에서만 그런 내용을 발견하였습니다. )
12살때 한국으로 돌아왔을때 그는 한국 권법을 수련하였다.
1938년,15살때 그는 당시 최초의 비행사였던 당시의 그의 우상처럼
되기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주* 최초의 비행사란 안창남이란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 나이에 스스로 자립한 것은 어려웠다, 일본에서 한국인으로서는 그의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비행사가 되는 훈련은 멀어지게 되었다.그러나 그는 유도와 권투를 배우며 무술 수련을 계속하였고,어느날 몇몇 학생들이 오끼나와 가라데를 수련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그의 관심을 끌었고 다쿠쇼쿠 대학에 있는 기찐 후나고시의 도장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훗날 송도관 공수로 알려진 것을 배웠다.
그의 수련의 진전은 17살때 이미 2단을 따낼 정도였고 20살때는 4단을 따고 일본 황국 군대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 시점에서 그는 또한 유도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이때의 발전은 대단히 매혹적인 것이었다. 이때까지(가라데를 배우기 시작하여 군에 들어갈때까지)그는 유도 수련을 중단한 상태였으나,유도를 다시 시작한지 불과 4년만에 그는 유도 4단을 땄다.(*주* 이로볼때 그의 권투 훈련은 한국에서가 아니라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며,만화에서는 산중수련후 소를 때려눕히는 훈련을 위해 유도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정식으로 착실히 기초를 다지며 유도를 배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곳의 글에는 나와있지 않으나 그가 군에서 담당한 것은 만화에서처럼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기 위한 소년 비행사가 아니라 일본군 특수부대의 격투기 교관이었다고 합니다.이것은 그의 뛰어난 무술실력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패전과 그에 이은 점령군의 멸시는 오오야마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고,그는 거의 낙담했다.다행히,그때에 조영주가 그의 삶에 들어왔다. 조영주는 일본에 거주하는 오오야마와 고향이 같은
한국인이었고, 당시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강유류의 사범중 하나였다. 그는 신체적,정신적 강함에서 모두 남달랐다.
마쓰다쓰 오오야마에게 그의 삶을 무도에 바치도록 격려한 것이 바로
조영주였다. 정신과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이후 3년간 세상으로 부터
격리되어야 한다고 권유한 것도 그였다.
그가 23살이 되었을때,그는 소설 미야모도 무사시의 저자인 요시가와
에이지를 만났다.미야모도 무사시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사무라이의 삶과 헌신에 기초한 소설이다. 소설과 저자 모두가 오오야마 마쓰다쓰에게 사무라이의 무사도와 그 의미에 대해 가르치는데 도움을 주었다.
같은해에,오오야마는 치바현에 있는 미노부산에 들어갔다. 그곳은
미야모도 무사시가 쌍칼을 사용하는 검투방식인 이도류를 창시한
곳이었다. 오오야마는 그곳이 그가 결심한 엄격한 수련을 지속하기에
적절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그가 가져간 것들 중에는 요시가와의 책이 있었다.야시로라는 학생도 그와 같이 입산했다.
(*주* 바람의 파이터와 다른 내용이 등장한 부분입니다. 그 만화에서는 기요즈미 산에서의 수련만이 나와 있으나 최초의 산중수련은 바로 이 미노부산으로의 입산입니다.또한 처음에는 일본인 친구인 야시로가 동행했다는 부분도 바람의 파이터에는 나오지 않았던 부분입니다. 미야모도 무사시의 이도류라는 것은 대개의 사무라이들이 한개의 검만을 사용하는 것과는 달리 왼손에 할복용으로 쓰이는 짧은 일본도를 들어 상대의 검을 방어하고 오른손의 긴 일본도로 방어와 동시에 공격으로 들어가는 검술의 방식입니다. 권투선수들이 왼손을 앞으로 내밀어 방어하고 카운터는 오른손으로 치는 것과 유사한 의도라고 합니다. 한개의 검만으로 싸울때의 방어에 이은 공격사이의 시간차를 최소한으로 하고 베는 것 뿐 아니라 찌르는 것을 활발히 사용하는 검투 스타일로서, 두손으로 검을 잡고 상대를 벨 때의 무방비상태의 헛점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장점이 있으나 동시에 한손으로는 제대로 물체나 사람을 완벽히 베는 것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찌르는 기법을 주로 사용하거나 한손만으로도 완벽히 치명상을 입힐 만큼 사람이나 물체를 벨 수 있는 깊이있는 수련을 해야만 쓸 수 있는 검투스타일입니다. 오늘날 특정한 검술유파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
주변과의 격리는 가혹하게 느껴졌고,6개월 후 야시로는 야반도주했다.오오야마는 더욱 힘들어졌고,이전보다 더욱 시내로 나가고 싶어졌다. 그에게 수치심 때문에 내려가지 못하도록 한쪽 눈썹을 면도하고 수련에 임하도록 하라고 편지한 사람이 조영주였다.당연히 그런 모습으로는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것과 그외의 여러가지 감동적인 말들이 오오야마로 하여금 수련을 계속하게
만들었고,오오야마가 일본에서 가장 강한 가라데가가 되기로 결심하게하였다.
그러나 곧 그의 후원자(요시가와 에이지)는 더이상 그를 지원할수 없다는 연락을 해왔고,그래서 그는 14개월만에 고독한 수련을 끝내야 했다.
1947년,몇 개월 후,오오야마 마쓰다쓰는 2차대전후 최초로 열린 제 1회 일본 무술선수권대회의 가라데부분에서 우승을 하였다.
그러나,그는 여전히 결심했던 3년간의 고독한 수련을 마치지 못했다는 공허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일생을 완전히 공수도에 헌신할 것을 결심했다.
그래서 다시 치바 현에 있는 기요즈미산에 들어가 수련을 시작했다.
이곳은 정신력을 강화할 수 있는 환경으로써 그가 선택했다.
이번의 그의 수련은 쉬는 날 없이 꼬박 매일 12시간동안
이루어졌는데,차가운 폭포수아래에서 버티고,맨손으로 자연석을 깨고, 마끼와라대신 생나무를 사용하고,매일 빨리 자라는 식물위를 매일 수백번씩 뛰어넘는 것등이었다. 또한 매일 무술의 오랜 고전과 선,그리고 철학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다.
18개월만에 그는 완전히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그의 삶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이제 다시는 그 주변의 사회상이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미칠수는 없게 되었다.(한편으로 그의 환경이 그 당시처럼 다시 그에게 상처를 줄만큼 되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 것도 적절할 것이다! )
1950년, 창시자 오오야마는 그의 위력을 소와 싸움으로써 시험하기
시작했다. 모두 합쳐서,그는 52마리의 소와 싸웠고 그중 3마리는 한방에 즉사시켰으며,49마리의 뿔을 수도(손날 치기)로 격파했다.
저 모든 것이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오오야마는 그의
첫시도가 단지 황소를 성나게 만들 뿐이었던 경험을 즐겨 회상한다.
1957년, 34살의나이에, 그는 멕시코에서 그의 등을 들이받고 깔아뭉겐 황소에 의해 거의 죽을 뻔 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 치명상으로
입원했다. 오늘날에는 물론 동물 애호 단체가 이런 시범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다.비록 저 짐승들은 이미 도살장에서 죽게 될 운명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1952년,그는 몇년간 미국에 건너가서,그의 가라데를 현장에서 그리고
TV를 통해 시범했다.이어지는 몇년동안,그는 모든 도전자들과 싸웠으며,270명의 다른 종류의 격투기와 싸웠다. 이러한 싸움 중에서
대부분은 단 한방에 끝났다. 어떤 싸움도 3분 이상 지속되지
않았으며,아주 드물게만 몇분 정도 더 걸렸다.만약 그가 누군가와
싸운다면,그의 싸움의 원리는 간단하고 명료하다. 만약 그가 당신을
때리면,당신은 부숴진다. 만약 당신이 갈비뼈로 날아오는 주먹을
방어한다면,당신의 팔이 부러지거나 탈골된다. 방어하지 않으면,당신의 갈비뼈가 부러진다. 그는 신의 손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이는 일본 전사들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이찌 게끼,히사쯔 즉,일격필살의 원리를 현실화한 것이다. 그에게는,이것이야말로 진실한 가라데의 지향점이다. 환상적인 발놀림과 복잡한 기법은 부차적인 것이다.(비록 그는 그의 박치기의 위력으로도 알려지긴 했지만.)
1953년,오오야마 마쓰다쓰는 도꾜의 메지로 벌판에서 그의 첫번째 도장을 열었다.
1956년,현재의 혼부 총본부도장에서 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리쿄
대학교의 이전에 발레 연습장으로 쓰이던 곳에서 첫번째의 실제 도장을 열게 되었다. 1957년까지 그곳에는 거친 훈련 때문에 대단히 높은 중도 탈락율에도 불구하고 700여명의 수련자가 있게 되었다.
다른 유파의 수련생들도 이곳으로 수련하러 왔다.이것은 지센 꾸미테를 하기 위해서였다.(지센 꾸미테 : 제한 없이 상대를 가격하는 대련)
초창기의 사범이었던 켄지 카또는 그들은 다른 유파들을 관찰하곤
했으며,실전에서 도움이 될 것이라면 어떤 기법이건 도입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오오야마 마쓰다쓰의 가라데에 유입되었다. 그는 모든 무술의 기법을 도입하였고,그 자신의 무술을 가라데 하나에 국한시키지 않았다.
오오야마의 도장의 수련생들은 쿠미테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이것을 기본적으로 싸움기술로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때리기를 원했고 또 맞기를 원했다.어떤 제한도 없이. 머리를 때리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대개는 맨손굽(주먹머리?)또는 수건을 감은 주먹으로 그렇게 했다. 움켜잡고,던지고, 낭심을 공격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매일 부상자가 발생했고 중도 포기율이 높았다.(90% 이상)
그들은 정해진 도복이 없었고 그들이 가진 아무것이나 입었다.
<중간생략>
(*주* 생략된 부분은 이 홈페이지를 만든 가라데 유파가 생긴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홈페이지를 만든 유파는 오오야마 마쓰다쓰가
하와이에서 시범할때 그에 감명받은 한 소년이 일본에 건너감으로써
시작되었다고 말하며, 글의 의도와 맞지않고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을 듯 하여 생략합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아래의 영문원문에는 나와있으니 그걸 읽어보시면 됩니다. 극진회아래에는 주로 지역에 따라 많은 별개의 유파가 존재합니다. )
현재의 세계 총본부는 1964년 6월에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고, 이때
교꾸신,극진이라는 의미가 도입되었다. 이때부터 교꾸신은 120개국
이상의 나라들로 전파되어갔고,천만명에 이르는 멤버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무술 단체의 하나에 등록하였다. 교꾸신 가라데의 잘 알려진 유단자로는 숀 코네리(명예 초단),돌프 룬드그렌(3단,전 오스트레일리아 헤비급 챔피언),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명예 8단)이 있다.
(*주* 돌프 룬드그렌의 경우는 저로서는 좀 혼동되는 부분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돌프 룬드그렌이 원래 스웨덴인이라고 말하는 곳도
있으며,극진 공수의 대회는 체급이 없는 무제한급 경기만을 하기 때문에 헤비급챔피언이라는 대목도 확인하기가 곤란합니다. 아마도 유럽에서는 체급 경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또한 유럽에서는 유럽공동체
운동(EU)으로 인해 국적 이동이 쉽다고 합니다만...돌프 룬드그렌의 원 국적이 어딘지 정확히 아시는 분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슬프게도,창시자 오오야마는 1994년 4월,70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고,(그는 담배를 피우지는 않았다.) 조직의 책임자로 아끼요시
마쓰이 5단을 남겼다.(*주* 아끼요시는 어떤 종류의 칭호인 것으로
보이며,마쓰이 5단이란 현 극진회 총수 마쓰이 신께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극진공수계에 많은 분열을 낳았고, 이것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마침내,극진회는 송도관류가 그랬던 것처럼 많은 분파로 갈라지게 되었고,각 단체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정신적으로,심지어 경제적인 면에서 마쓰다쓰 오오야마의 극진회의 진정한 유일의 유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 생략>
(*주* 마찬가지로 자신이 속한 단체에 대한 홍보입니다. 불필요한
내용이라 생각되어 생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