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예로부터 三多(風多, 石多, 女多)가 있다는 제주도는 푸른 하늘을 떠받치는 한라산과 그 주위에 펼쳐져 있는 오름이 그 절경을 더해 주면서 오늘날 한국의 대표적 관광지로써 알려져 있다. 이국적인 정취와 깎여 내린 절벽에는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그것을 씻어내고, 봄에는 노란 유채꽃이 온 섬을 덮으면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제주, 하지만 이름다운 제주에는 아직도 한 세대가 지나버린, 잊고 싶고 또 망각을 강요당해 온 그러나 결코 잊을 수 없는, 씻어지지 않은 역사가 있다. 순박한 섬사람들의 가슴팍에는 잃어버린 비극의 현대사가 시퍼렇게 멍울져 결코 지워지지 않을 한으로 남아 있고, 그것은 분단의 시대를 사는 우리 민족의 아픔과 잇닿아 있다.
제 2차 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의 최강국으로 등장한 미국은 트루먼 선언에서 나타나듯 사회주의의 확대를 저지하고 식민지의 민족해방 투쟁을 분쇄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 2차 대전 이전 소련에만 국한되었던 사회주의가 동유럽·몽고·북한 등으로 확대되고, 중국 내전에서 중국 홍군의 우세와 미국의 지원을 받는 국민당의 패배가 분명해지는 등 사회주의 세력이 급격히 확대되자, 이는 미국에게 심각한 도전으로 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미국의 시각으로 남한은 사회주의 봉쇄를 위한 대소반공전초기지로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미군의 전후정책은 사회주의 확대를 저지하고 식민지의 민족해방투쟁을 분쇄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를 확립한다는 기조 위에서 짜여졌고, 이는 한반도에서 곧바로 남한의 점령과 지배정책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새나라 건설을 요구하며 나라의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은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고, 공격해야할 대상이었다. 정의·독립·평등을 요구하는 한국민중은 미국에게 있어 敵(적)인 셈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민중을 공격함에 자신이 직접하지 않고 주로, 한국인들끼리 싸우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미국은 8·15 이후 민중의 심판을 피해 숨거나 도망치면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자들,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에 빌붙어 민족의 등을 치고 고혈을 짜던 민족반역자들을 끌어들여 한국민중을 억압하고 탄압하는데 이용하였다. 그리하여 어제는 '천황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아부하던 친일파들이 오늘은 친미를 외치면서 거리를 활보하고, 민중의 탄압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제에 대항하여 치열한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해 온 우리민족이 해방의 마당에서 건설해야 할 새로운 나라는 마땅히 일제에 아부하여 민족의 등을 치고 고혈을 빨아온 민족반역자를 응징하는 정의의 나라, 우리 스스로 주권을 세우고 지키는 독립의 나라, 생산의 결실이 전 민중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평등의 나라여야 했다. 하지만 일제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민족의 반역자 이승만과 그를 앞세워 한반도를 정복하려는 미군정이 합세하여 정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할 자리에 친일파들을 등용하여 미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민족의 인권을 유린하며, 생산의 소유권을 미군이 강제로 접수시키는 모순의 현대사가 시작되었다.
이런 시기에 외따로 떨어진 제주도에는 이와 같은 모순된 사회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 제주4·3항쟁이었다. 제주의 특수한 상황과 시대의 전환점을 요구하는 제주 민중들의 항쟁은 외적으로 살펴보면 지역적으로 국한되어 있어 보이나 그 내면에 고찰된 내용을 들여다보면 해방 후 혼란스럽던 한반도 전체와의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다. 이 보고서는 현대사에서 4·3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점점 더 파묻혀 가는 제주 4·3을 현재의 시각과 대비해서 고찰해 보려 한다.
1. 제주 4·3 민중항쟁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
1) 해방 후 제주도의 상황
① 경제적인 상황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한 것은 해방된 지 44일 만인 1945년 9월 28일이었고, 실질적인 군정업무를 담당할 제 59군정중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10일이었다.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일제가 제주도청으로 사용하였던 건물에 그대로 군정청을 설치하였고 미군정 관리를 구성하여 군정업무를 실시하였다. 포고령 제 1호에 따라 붕괴된 일제 통치기구를 재수립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본질상 일제 식민기구의 계승이었다.
59군정중대는 도착 후에도 내적으로는 준비 부족과 인민 부족으로, 외적으로는 인민위원회의 힘이 강력했던 관계로 통치업무를 수행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인민위원회에 대해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59군정중대가 인민위원회를 공식적인 행정기관 통치기구로 인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1일 제주도를 도(道)로 승격시키면서 우익의 입지를 넓혀주었고 동시에 인민위원회의해체를 위해 좌익계열을 공개적으로 탄압하였다.
즉 도내의 물리력을 군 수준에서 도(道) 수준에 맞게끔 법적·제도적으로 확대 강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제주도의 도 승격은 단순한 행정적 의미 이상의 정치적 결정이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갈등 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중첩되면서 도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8·15당시 제주도는 본토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소작농의 비율이 매우 낮았다. 농민의 대부분은 자영농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의 농촌 대부분의 농지가 밭이었고 토지 생산성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절대적 빈곤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농업은 계속된 흉년으로 인하여 그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어 있었고, 빈농들의 보조적인 경제 활동인 수산업 어획고 또한 38선 이북으로부터의 재료 공급이 두절됨에 따라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였다. 게다가 일제시기에 해외로 이주했던 도민들이 대거 귀환하면서 도민의 실업율이 급증하였다. 생활필수품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도내의 유통되는 상품은 귀환자가 반입하여온 일본 상품 및 미군정에 의하여 분배된 미국상품이 대부분이었다.
여기에 1946년 8월 1일 도제가 실시된 후, 도제 승격에 따른 각종 부담 잡세가 신설되거나 증가하여 도민의 부담은 더욱 심해졌다. 게다가 미군정은 "대일 교역 및 일본 상품 유통은 불법"이라는 조취를 취하여 제주도 경제를 더욱 위축시켰다. 특히 6만명에 이르는 귀환인구로 식량난은 더욱 악화되었는데, 이 와중에서 실시된 미군정의 미곡수집정책은 도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인민위원회는 이러한 미군정의 정책에 맞서 미곡수집거부 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도민들은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미곡수집저지의 선전활동과 거부운동에 대해 민중들은 폭넓은 지지를 보냈으며, 수집관리를 집단구타하거나 마을별로 거부하기도 하였다. 1946년산 추곡에 대한 지역별 수매실적을 보면 전국적으로는 69.5%가 이루어진 반면에 제주도는 0.1%를 기록하여 추곡수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안았다.
미군정의 미곡수집 정책과 더불어 밀무역을 둘러싸고 모리배와 결탁한 단속기관의 뒷거래 행위는 도민들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악화시켰고, 이때에 이르러 제주도민들 사이에는 "미군정이 일제 때만도 못하다."는 개탄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② 사회·정치적인 상황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제주도는 해방된 한반도의 전국적인 상황과 마찬가지로 식민시기에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주도 지방은 전국의 어느 지방보다도 강한 항일 독립운동의 전통을 갖고 있었다. 독립운동의 전통은 그 뿌리가 매우 깊어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21년 도내 최초의 사회주의적 민족해방운동 단체인 '반역자 구락부'가 조직된 이후 제주도에서는 1920-30년대를 거치며 많은 항일 운동 단체가 만들어 졌으며 이들의 지도아래 크고 작은 규모의 대중적인 항일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비록 1940년대에는 일제의 강력한 투쟁을 주도했던 많은 인물들이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시 전면에 부상하여 다른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건국준비위원회라든가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의 자주적 조직들을 구성하였다. 해방직후 제주도의 정치적 주도권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해방 초기 이들의 정치적 성향과 이념적 지향은 급진적이지 않았고, 다른 지역보다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그 결과 일반 제주도 민중들은 대부분이 이들을 지지했다. 더욱이 현지 점령정책을 집행할 미군의 진주가 다른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었던 관계로 제주도민들의 자주적 조직만이 통치 기구로 가능하던 이 기간 동안에 식민시기 독립운동세력들의 정치적 지도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미군이 제주도에 진군한 것은 해방된 지 44일 만인 9월 28일이었으며 실제로 통치기증을 담당할 제 59군정 중대가 도착한 것은 이보다 훨씬 더 늦은 11월 중순이었다. 미군은 자신들이 진주했을 때 제주도가 이들의 강력한 통제아래 있음을 인식, 곧바로 반민중적인 역전정책이나 탄압정책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주도 현지 주둔군의 이와 같은 온건한 점령정책은 세계적 수준에서의 미소 냉전의 심화와 이에 따른 미국 외교 정책의 공세화, 그리고 서울을 비롯한 중앙 수준에서 미국의 점령정책은 본질상 오래 계속될 수는 없었다.
제주도 진주 이후 미군은 점차 다른 지방에서와 마찬가지로 식민시기 독립운동세력들을 주요 행정기관에서 배제하고 대신 자신들의 점령정책을 더 잘 집행해줄 과거의 친일세력들로 그 자리들을 채워나갔다. 이것이 제주도민들을 분노케 만들었음을 강조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다가 미군정 경제정책 실패로 인하여 악화돼 가고 있던 제주도의 사회·경제상황 또한 민중들의 분노를 격화시킨 한 요인이 되었다. 이에 따라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제주도민과 미군정,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세력과 친일협력세력 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립이 곧바로 격렬한 대결로 표출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제주도 좌파 지도부가 비교적 온건했고, 중앙의 좌파 지도부로부터 일정하게 자율적이고 독립적이었던 데도 그 이유가 있었다. 1946년 가을, 남한에서는 미군정 점령 1년간의 정책에 대한 격렬한 저항의 표시로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발발했다. 10월 인민항쟁이 그것이다. 10월 인민 항쟁은 남조선 노동당 등 중앙좌파의 영향력이 큰 곳에서 격렬했다. 남로당은 이 시기에 실시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선거를 단독정부 수립 음모라며 참여하지 않았다.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은 이를 저지해야 하다고 주장하며 전국적인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 좌파는 봉기를 결행하지 않고 오히려 남조선 과도입법 의원 선거에 참여하여 두 명의 당선자를 내었다. 이 당선자들은 모두가 인민위원회 출신이었다. 좌파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 참여한 것도 제주도가 유일하지만 그들이 당선된 것도 역시 제주도가 유일했다. 이는 제주도 좌파의 자율성과 강력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제주도의 이러한 특수한 조건에다가, 1947년 말-1948년 초에 단선단정 추진에 대해 전국적인 단선 반대움직임이 고조되면서 제주도에서도 단선을 반대하기 위한 적극적인 저항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1948년 2월 중순에서 3월 초 사이에 계획되었던 최초의 봉기계획은 사전에 미군정에 발각되어 제주도 좌파 지도자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불발되고 만다. 이 시점까지도 제주도는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인민위원회의 조직과 역량, 그리고 좌파 지도력이 파괴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었다. 이 점이 1948년의 시점에서 거대한 봉기를 발생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봉기가 단선단정을 둘러싼 가장 치열하던 시점에서 발발했다는 점은 4.3 민중항쟁이 단순히 제주도의 내적인 문제만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민족의 보편적인 문제, 곧 분단과 통일의 문제와 직결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단선의 추진과 반대, 곧 민족통일국가의 수립 문제는 해방 이후 내연해 오던 제주도민들의 저항의식이 봉기와 연결될 수 있는 접점을 제공하는 도화선 역할을 했던 것이다.
2) 4·3이 일어난 결정적인 계기(3·1 발포 사건)
1947년 3월 1일은 제주 현대사에서 분수령으로 기록될 만큼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날이었다. 제 28주년 3·1절 기념일을 맞아 제주도 좌파세력이 주도한 시위에서 군정경찰이 군중에 발포함으로써 빚어진 이날의 사건은 중요한 기폭제가 되어 그때까지도 큰 소요가 없었던 제주사회를 들끊게 만들었다. 이 발포사건에 항의하여 총파업투쟁위원회를 결성, 전도적인 파업이 시작되었고 미군정은 이에 맞서 응원 경찰과 서청 등 극우 청년 단체원들을 제주에 대거 내려보내 물리력으로 검거공세를 전개함으로써 미군정과 제주도 좌파세력이 전면대립 국면으로 돌입했으며, 제주도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4·3의 배경 가운데 3·1사건은 중요한 위치에 서 있다. '4·3의 도화선'이라 불리는 3·1발포사건의 성격과 그 뒤에 전개된 사태 진행과정을 제대로 살펴야만 4·3의 발발 배경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3·1사건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을 안고 있다.
첫째는 1947년 3·1절 집회와 시위에서 정치적인 슬로건이 전면으로 내세워졌다는 점이다. 그 슬로건은 '모스크바 3상회의 절대지지', '미소 공동위원회 재개촉구', '3·1정신으로 통일 독립쟁취' 등으로 요약 할 수 있다. 이런 구호들은 그 무렵 남한 좌파 세력이 즐겨 사용하는 지향과제였지만 한편으로 보면 3상회의 결정사항과 미·소 공위의 재개 등은 그때까지도 미국의 표면적인 공식 외교정책기도 하였다.
둘째는 이 날 기념 집회에 제주 역사상 최대의 인파가 참여했다는 점이다. 군정 당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 대회' 가 열린 제주 북국민학교 주변에만 대략 3만명으로 추산되는 군중이 참여했다. 이 밖에 이날 면 단위 기념식이 열린 한림·대정·안덕·중문·서귀·남원·표선·구좌 등지의 군중까지 감안해 보면 '탐라 개벽이래 최대의 인파가 동원됐다.'는 표현에서 지나침이 없을 정도였다. 이날 관중동원에는 남로당·민전·민청·부녀동맹 등 좌파조직이 조직적으로 가동되었고, 이 밖에 일부 관공리와 유교, 학교단체 등에서도 참여하였다.
셋째는 이날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발포 사건이 모두 일주일 전에 제주에 들어온 응원경찰들에 의해 자행됐다는 점이다. "제주읍에서 발포한 경관들은 대전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가을 좌익폭도들이 동료 경찰에게 모욕적인 잔학 행위를 범한 기억을 마음에 갖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는 미군정보보고서의 분석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지역 실정에 어두운 이들 외지 경찰대는 조그마한 분석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지역 실정에 어두운 이들 외지 경찰대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얼마든지 발포할 수 있는 심리 상태를 갖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넷째는 경찰 당국이 도립 병원 앞의 발포에 대해서 '무사려한 행위'였음을 시인하면서도 관덕정 앞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관덕정의 발포사건도 시위군중이 현장을 지나간 다음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새로 발굴된 사료들에 따르면 그때는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나 서문통으로 빠진 다음이어서 현장에는 관람군중들만 있었으며 이때에 기마 경관이 어린이를 친 사건이 발생, 일부 군중들이 기마 경찰대에 욕설과 돌팔매질을 하며 쫓아가는 순간 경찰 측에서 발포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다섯째는 발포사건의 희생자들(사망 6명, 중상 8명)도 관람군중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은 아낙네 등이 숨진 피해 현장은 경찰서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던 은행건물의 처마 밑, 또는 골목 한 모퉁이였다. 또 총탄에 쓰러진 피해자를 검안한 결과 한 사람을 빼놓고는 전부 등 뒤쪽을 맞은 것이 판명되었다.
여섯째는 경찰의 무모한 발포에 항의, 대규모 도민 파업사태가 전개된 점이다.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발로 관공서·학교·은행·통신기관·회사 등 모두 166개 기관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제주 읍내에서는 경찰서와 도립병원 등 3개 기관만 빠진 유례없는 대파업이었다. 미군 정군 정보보고서에도 "파업에 좌·우익 공히 참가하고 있다." 고 기록할 정도로 여기에는 우익인사들도 상당수 참여하였으며. 지방의 제주 출신 경찰관들도 동조, 나중에 경관 66명이 파면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일곱째는 전국적으로 벌어진 3·1 소요 사건 진압에 미군이 직접 개입한 곳은 제주도가 유일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날 제주 이외에도 서울·부산·정읍·순천·영암 등 전국각지에서 3·1절 시위 행렬이 충돌하거나 경찰의 발포로 38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런데 군중해산에 미군이 동원된 곳은 제주도 뿐으로,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미군이 제주 지역 군중을 해산시키는데 지원했다." 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덟째는 미군정이 이 사태를 중시해 카스틔어 대령을 반장으로 한 미군 조사반을 파견, 정세 분석한 뒤 강공정책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미군조사반은 총파업의 원인을 "무모한 경찰발포로 인하여 증오심이 고조 됐고, 이런 도민 감정을 남로당에서 선동, 증폭시키고 있다."고 분석하면서도 사태 해결의 후속조치로서 전자는 경찰의 행위를 덮어 둔 채 후자의 '남로당의 선동' 부분을 부각, 좌파세력의 척결에 주력하는 정책을 펴 갔다. 그런 후속 조치가 바로 조병옥 경무부장과 응원 경찰대의 현지 파견이었다.
아홉째는 조병옥 경무부장의 내도와 응원 경찰대의 증파, 특별수사대, 그리고 서청의 파견이 곧바로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규정, 검거선풍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3·1사건 직후 경무부 관리들이 공공연히 "제주도민 90%가 좌익 색채를 띠고 있다." 고 발언하고 있는 점, 미군 정보보고서에도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에 정치적으로 동조하는 듯하다.", "여러 가지 보고에 따르면 섬 주민의 60%-80%가 좌익이라 한다." 고 기록하고 있는 점등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열번째는 결국 미군정이 3·1절 발포 사건 수습을 위한 문제 해결의 열쇠를 그 당시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던 경찰 측에 넘김으로써 도민선무에 실패한 채 돌이킬 수 없는 대립의 갈등구조로 치닫게 하는 결과를 빚게 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2500명의 구금→ 4·3봉기→5·19선거의 보이콧으로 이어진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이런 3·1발포사건을 지원한 미군정에서는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제주도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커녕, 자신들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저항을 억압하고 그들을 통제하고 있는 인민위원회를 분쇄하기 위하여 본토에서 군정경찰을 추가파견하고 극단적인 반공사상으로 무장된 극우 단체인 서북 청년단도 파견하였다. 이들은 반공을 명분으로 제주 도민들을 탄압해 갔다. 한반도의 남단 제주도는 점차 미군정에서 극우 청년단까지, 그리고 좌파 정당에서 일반 민중까지 모두가 연루된 남한 정치 갈등의 한 압축판이 되어 갔다. 그러나 좁은 섬에 육지에서까지 많은 경찰과 청년단들이 파견됨으로 인해 제주도민들이 받은 탄압의 강도는 여타 지역에 비해 그 강도가 훨씬 높았다.
미군정의 이러한 극단적인 억압정책은 제주도민들에게 격렬한 분노를 자아내게 했으며, 많은 중도적인 도민들마저 반미군정 성향으로 몰아갔다. 여기에다가 3·1절 기념시위 이후 미군정은 제주도 내의 행정기관의 주요직에서 제주도 출신들을 몰아내고, 대신 육지 출신 사람들을 앉힘으로써 제주도민들을 또 다시 격분시켰다.
군정 경찰과 서청의 탄압으로 이들에 대한 재주도민들의 감정이 매우 악화돼 가고 있는 상태에서 3·1절 시위 이후 경찰과 서청의 탄압과 체포 위협을 피해 적지 않은 수의 제주도민이 한라산으로 피신했고, 그 숫자는 점점 더 늘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자연스레 저항의 지도부를 형성해 갔다.
2. 제주4·3민중항쟁이 전개된 시기 구분
① 미군정 공세기(1947.3.1.-1948.4.2.)
3.1 발포사건과 이어 벌어진 전도적인 총파업을 계기로 인민 위원회와 미군정의 대립이 본격화된다. 육지부의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극우단체가 파견되면서 여러 차례 검거선풍이 일고, 특히 1947년 8월 대탄압과 1948년 3월 잇따라 발생된 3건의 고문치사 사건들은 민심을 크게 자극한다. 군정경찰은 이 기간에 2500명을 구금한다. 미군정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도민들은 섬 밖으로 피신하거나 일부는 산에 올라 적극적인 무력항쟁을 준비한다.
② 무장대 공세기(1948.4.3.-5.11.)
4월 3일 첫 봉기를 시발로 무장대가 공세의 주도권을 줜 시기이다. 미군정은 처음 이 사태를 '치안상황'으로 간주해 1700명의 응원 경찰대를 투입, 진압하려 했으나 더욱 악화되자 경비대의 출동을 명령했다. '4·28 협상'으로 한때 무장대와 경비대 간에 평화적 해결방법이 모색되기도 했으나 경찰의 방해 공작으로 무산된다. 5·10선거를 전후한 무장대의 강력한 저지투쟁으로 도내 2개 선거구가 투표미달, 전국에서 유일하게 선거 무효화된다.
③경비대 주도 토벌기(1948.5.12.-10.19.)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한 경비대의 작전이 강력히 전개된 반면 무장대의 공세는 비교적 약화된 시기이다. 미군정은 9연대장 교체와 함께 군경 병력을 크게 증강시키고 브라운 대령으로 현지에 파견, 최고 사령관으로서 토벌을 시도하나 무리한 강경작전으로 주민들을 오히려 도피입산케 한다. 이 무렵 9연대 병사 41명이 입산하는 사건도 벌어진다. 박진경 연대장 암살 (6월) 이후 토벌은 더욱 강화되나 무장대는 조직 재정비, 8·25 지하선거 준비, 해주대회 참석 등으로 인해 공세를 완화함으로써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9월 초 경비대의 공세가 재개되나 제주도에 배속될 예정이던 여수 14연대가 총부리를 돌림으로써 상황은 새로운 모습으로 급진전된다.
④사태의 유혈기(1948.10.20.-12.31.)
토벌대의 무제한적 초토화 작전 전개로 인명피해가 극심한 시기이다. 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한 후 해안선에서 5km이상의 중산간 지대를 '적성지역'으로 간주한다고 포고령을 내리고 주민소개령과 동시에 마을 방화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한다. 특히 12월 연대교체를 앞둔 9연대는 '좋은 전과와 기록을 올리려는 욕망'에 의해 안마을로 소개당한 주민들을 대거 학살한다. 토벌대에 쫓긴 무장대는 아지트를 산중 깊숙히 옮기는 한편 때때로 해안 마을에 대해 보복기습전을 시도한다.
⑤육·해·공 합동 토벌기(1949.1.1.-3.1.)
9연대와 교체된 2연대가 도착한 후 무장대의 공세가 한때 활기를 띠었으나 육·해·공 3군의 합동작전에 의한 토벌이 강화되면서 무장대 세력이 더욱 약화된 시기이다. 토벌대는 또한 해안 마을마다 성을 쌓게 해 무장대의 근거지를 차단하고 주민과 고립시키는 작전을 전개한다. 이 무렵 '북촌주민 학살사건' 등 집단적인 주민 학살이 자행된다.
⑥ 선무활동기(1949.3.2.-5.15.)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3월)가 설치되면서 마무리 진압작전을 전개하는 한편, 이승만 대통령의 내도(4월)와 국회의원 재선거(5월)가 실시되는 등 정부의 통치력이 회복되던 시기이다. 토벌대는 선무공작과 병행해 5만명의 민보단을 대거 동원, '산을 빗질하듯 쓸어 내려 무장대를 몰아가는 작전을 구사', 인명피해가 많았다. 잔여 무장대는 거의 궤멸상태에 이른다.
⑦ 소강상태기(1949.5.16.-1950.6.24.)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산(1949년 5월)된 후 독립 1개 대대만 남아 잔여 무장대 소탕작전에 나서는 등 소강상태의 시기이다.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도 이때 사살(1949년 6월)된다.
⑧ 대대적 예비검속기(1950.6.25.-10.9.)
6·25 발발 직후부터 보도연맹 가입자와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 돼 많은 인명이 처형된다. 제주비행장·모슬포비행장·사라봉 등이 학살장소로 이용됐으며, 밧줄에 묶인 채 제주 앞 바다에 수장된 사람들도 많았다. 육지형무소에 수감됐던 4·3 연루자들이 즉결처분되기도 하고 '백조일손지지' 132명의 희생자도 이때 발생한다.
⑨ 마지막 토벌기(1950.10.10.-1954.9.21.)
제주도의 비상계엄령이 해제된 이후 제100 전투 경찰사령부 창설(1951년 10월), 유격전 특수부대인 '무지개 부대 투입(1953년 1월)등으로 무장대 세력이 완전히 소멸된 시기이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됨으로써 만 6년 6개월 만에 유혈사태가 막을 내린다. (최후의 빨치산 오원권이 생포된 것은 1957년 4월의 일이었다.)
3. 제주 4·3 항쟁의 의미
제주 4·3은 한반도의 축도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었을 때, 어느 곳 보다 제주도는 좌·우가 연합하여 치안을 자치적으로 수행하는 등 '해방의 맛'을 누리며 활동하였다. 남로당의 4·3봉기에 제주도민이 어쩔 수 없이 따라든, 적극적으로 따라든, 동조를 한 것은 1947년 3·1시위와 3·10관민 총파업 이후 외지 경찰과 서청원들이 대거 투입되어 고문·감금·테러를 하고 금품을 빼앗고, 강간을 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 데 대한 울분이 쌓여 있었고, 한 민족으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웠던 단독선거가 치러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의 기쁨 속에서 자치 활동을 벌인 것이나, 친일 경찰과 청년단의 억압과 테러에 시달린 것은 육지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항쟁 또는 소요가 발생하였다. 분단에 대한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제주도에서 그런 현상이 더 강하게 일어났을 뿐이다. 이 점에서 제주도는 한반도 현대사의 축도였다. 남로당의 모험주의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평가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살 또한 제주도에서 훨씬 심하게 자행되었지만, 한국 전쟁 이전이건 이후건 육지에서도 양민학살은 육지에서도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만주나 중궁 등지에서 삼광작전·삼진작전 등의 이름으로 저지른 초토화 작전과 유사한 제주도에서의 초토화 작전은 반문명적·반인간적 만행으로 국제법이건 국내법으로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그것을 지시한 자는 전범으로써 재판을 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다. 설령 무장대를 체포하였다 하더라도 재판없이 처형하는 것은 명백히 불법 행위였다. 그런데 제주도에서 희생된 3만여 명의 대다수는 누가 보아도 양민이었고, 그들 대부분이 집단학살을 당하였다.
제주 4·3민중항쟁은 제주 인구의 1/10인 3만명의 희생자를 낳고 1954년 9월 21일, 만 6년 6개월 만에 유혈 사태가 막을 내린다.
제주 4·3민중항쟁은 단군이래 나라가 세워진 뒤 이 한반도 땅에서 유래가 없는 대학살 사건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어둠의 역사 속에서 서서히 밝혀졌지만 아직도 그 내부의 본질은 흑막 속에 갇혀 있다.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탄압에 대하여 제주 도민 모두가 합세하여 부정요소를 타도하려 하였지만, 민족 반역자들의 총칼과 무력 앞에서는 힘없이 쓰러지는 갈대와 같았다. 하지만 민족 반역자 이승만과 미군정은 그들을 쓰러뜨리기는 했지만, 그들의 영혼마저 부러뜨리지는 못했다. 4·3은 감추면 감출수록,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그 상처를 더해가며 더욱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따라서 한국 현대사의 올바른 복원과 제주 도민의 진정한 바램을 위해서라도 제주 4·3 민중항쟁의 문제 해결과 역사적 의미를 밝히는 것은 필수 불가결한 과제이다.
닫는 글
제주 4·3민중항쟁은 역사적 사실 자체의 발굴과 규명에 관한 것이 아직도 미궁에 빠져 그 갈피를 못 찾고 있다. 따라서 제주 4·3 민중항쟁은 사실적·법적·국제 관계적으로 이 사건은 아직도 많은 쟁점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진실의 규명은 역사적 교육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우리가 앞선 시기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후세에 대한 바른 역사교육은 필수적이다. 앞선 시기의 오류와 과오를 밝히고, 후세에 교훈을 주고 교육하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세대의 몫이며 역사발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작업이다. 과거를 제대로 알아야 오늘을 위한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듯이, 오늘을 살아가는 후세는 오늘의 문제와 고민을 제대로 알아야 그로부터 배워 같은 실수와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 4·3민중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오늘의 노력은 미래를 위한 헌신이기도 하다.
이와 같이 제주4·3민중항쟁에 있었던 비극은 무엇보다도 미래에 바른 역사교육 설정을 위하여 교육자료로써 활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소망하는 바람직한 인간 공동체는 인간의 오만과 독선이 빚은 고통과 참회의 역사로부터 배움과 교육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는 타인에 대한 교육이기에 앞서 무엇보다도 자기에 대한 교육인 것이다.
이제 제주4·3민중항쟁은 덮어만 두어야 할 역사가 아니다. 우리의 후손들에게 현대사의 치부를 보여줌으로써 다시는 그런 오류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지침서를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