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은 내 고장으로부터
리틀 박정희 -임광원 前 경북도청 농수산국장
경북도민들과 도청 공무원들은 아직도 그를 경북도청 농수산국장 임광원으로 기억하고 있다. 경북도청이 생긴 이래 최장수(3년) 농수산국장으로 재임하며 도내 구석구석을 누비던 성실하고 부지런한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국장정도 되면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나 내리고 보고나 받는 것이 대개의 일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직접 현장을 돌며 농어민들과 온몸으로 부딪치며 고충을 상담하고 문제를 풀어나갔고, 직원들도 현장에서 농민들과 만나며 고충을 듣게 하고, 바쁜 시간을 내어서라도 농민들을 모시고 자체 연수를 시켰다. 그런 그를 경북도민들은 아직도 따뜻하고 친근한 이미지의 농수산국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오랫동안 관료생활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위주의가 몸에 밸만도 한데 몇 번을 만나도 그에게서 그런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를 아끼는 많은 이들은 임광원국장은 버릴게 한 가지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로 그를 평했다.
임광원국장은 과묵하다. 지천명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수줍음 많고 자신을 잘 표현할 줄 모르는 그는 소년같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가까운 친구인 중학교 동창생중 하나는 임광원국장을 가리켜 숙맥이라는 표현으로 대신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른 정치인들은 남이 한일도 자기가 한 것처럼 말하며 공치사, 생색내기에 바쁜데 임 국장은 지역발전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해놓고도 한마디 내세울 줄도 모르는 바보천치라면서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허기사 월간 박정희와의 인터뷰요청도 몇 번씩이나 고사하다가 몇 개월 만에 겨우 허락을 받아낼 정도이고 보면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그는 한번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이루고야마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과묵하지만 묵묵히 행동하며 실천하는 그를 가리켜 주변사람들이 왜 리틀 박정희라 칭하는지 그 말속에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담겨져 있음을 곧 알 수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겪은 고통
임광원국장은 6. 25동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그해 11월에 태어났는데 어머니가 산후욕으로 큰 병을 앓으면서 이웃 아주머니들의 젖동냥으로 겨우 목숨을 연명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고 또래 애들보다 덩치가 작은데다 학교까지 멀어 한해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만성위궤양으로 힘든 일을 하실 수가 없어 어머니가 농사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 어린나이였지만 힘들어하는 어머니의 일손을 거들어야 했다. 학교에 가기 전에 아침 일찍 소를 먹이러 가고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소를 치고 꼴을 베거나 농사일을 거드는 것이 하루의 일과였다.
그렇게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12년 동안 집안일을 도우면서 학교를 다녀야했다. 고등학교는 대구로 가고 싶었지만 형님이 사범학교를 마치고 군 복무 중인지라 농사일을 거들 일손이 필요했다. 그는 결국 고향을 떠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집에서 학교를 다닌 12년 동안 대부분의 농사일을 직접해보았다고 했다. 그가 훗날 농촌과 농민의 고충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경북도청 최장수 농수산국장으로 재임하며 농민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보람 있었던 교직생활
고등학교 졸업 후 그가 택한 진로는 대구교육대학교였다. 가난한 농촌에서 대학교육은 엄두도 못 내던 시절 대구교대는 2년 후 교사로 임용되고 그나마 적은 액수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어려운 집안형편을 생각한 그는 미련 없이 교대 입학을 결정했다. 교대에 입학하면서 그는 스스로 돈을 벌어 공부를 계속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당시 대구교대는 2년제였는데 백화점처럼 나열된 교과목에다 일주일에 8시간씩 짜여 진 고된 군사훈련으로 캠퍼스의 낭만을 즐길 사이도 없었다고 했다.
그가 교대 졸업 후 처음 발령을 받은 학교는 서울 남부교육청소속(당시) 봉천초등학교였는데 전교 학생 수 1만 여명, 132학급, 한 학급당 80여명으로 4학년까지 2부제 수업을 하는 메머드급 학교였으며 당시 봉천초등학교는 세계에서 제일 큰 학교였다. 그러다보니 학생들 얼굴 익히고 환경 파악하는데도 몇 달이 걸렸다. 그래도 교직생활은 여유와 보람이 있었다며 특히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은 신나는 일이었다고 짧았던 교직생활을 회고했다.
주경야독으로 고달팠던 야간대학시절과 행정고시합격
그는 당초 목표대로 야간대학에 편입학하였다.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 밤에는 야간 대학생으로의 고달픈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주경야독의 3년은 그야말로 고달픈 기간이었다. 학교 퇴근시간이 오후 5시이고, 대학 수업 시작이 오후 6시 30분이었으니까 퇴근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1시간을 달려가면 저녁은 인근 식당에서 라면으로 때우거나 시간이 늦으면 굶기가 일쑤였다. 간혹 버스에서 졸다보면 내리는 곳을 지나칠 때도 여러 번이었다. 공부에 전념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강의가 끝나고 혼자 남은 강의실에서 한 두 시간 책을 보다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늘 통금 시간이 가까워져서였다.
4학년이 되면서 앞으로의 진로도 고민이었다. 행정고시와 사법시험을 놓고 고심했는데 법을 다루는 일보다는 국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행정직에 매력을 느껴 행정고시에 주력하기로 했다. 그러나 교직에 있으면서 수험공부를 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교과 연구나 학생 지도 등에 소홀할 것 같아서 1978년 9월에 교직을 그만두었다. 교직 생활 5년 6개월 만이었고 의무 복무 기간을 6개월이나 더 근무한 때였다고 했다. 그는 1979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고향으로 내려와 수험준비에 매달렸다. 그러나 단기간에 끝장을 내려고 달려든 행정고시는 그렇게 만만치 않았다. 너무 서두르다 보니 몇 달 사이 건강에 이상이 왔고 급기야 후반기부터는 공부보다 건강을 챙기는 일이 더 급하게 되었다. 1979년에 1차 시험 합격에 만족하고, 2차 시험에서는 실패는 했지만 예상외로 좋은 점수였다. 1980년에 2차에만 주력하면 무난할 것 같았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것이 그리 녹녹치가 않아서 아는 것을 정해진 시간 안에 명쾌하게 요약 정리하여 나타내 보여야 하는 것이기에 많이 알아도 짧은 시간에 정리 기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단다. 결과는 2차 시험 실패였다. 2년을 그러고 나니 멀쩡한 직장을 버리고 공부한답시고 시골에 틀어박혀 있는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님의 걱정이야 오죽 했겠는가! 그 자신도 만신창이가 된 건강과 기약 없는 시험공부가 은근히 걱정됐다고 토로했다. 설상가상으로 제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공직 축소 바람이 불어 행정고시의 시행 여부도 불투명하다는 소문도 들렸는데 결국 선발 규모가 전년도 220명의 절반인 110명으로 줄기는 했지만 1981년 제25회 행정고시가 예정대로 치러지게 된 것은 그에겐 큰 다행이었다.
그해 10월에 있은 2차 시험이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12월 합격자 발표 때 그의 이름도 있었다. 임광원이란 이름 석 자가 신문에 실린 최초의 사건이었다고 회상했다.
첫 발령지 구미시에서 맺은 박정희대통령과의 인연
행정고시 합격 후 1983년 경상북도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받은 첫 보직은 구미시 시민과장이었다. 신생 공업도시였던 구미시는 매우 활발했다. 경기가 좋던 때라 250여개 섬유와 전기. 전자업체들은 열심히 일했고 6만여 근로자들은 구미를 움직이는 젊은 동력이었다. 공단지역은 잘 정비되었지만 구 시가지는 복잡하고 무질서했다. 구미시에서의 1년 반은 공무원 초년생인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몇 가지 면에서 의미 있는 만남이 있었던 곳이었다고 했다. 그 하나가 박정희대통령 생가와의 만남이었다. 금오산 자락 상모동에 대나무로 둘러싸인 생가는 여느 시골집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안방에는 대통령과 영부인의 영정이 걸려 있었고 공부방에는 당시 사용했던 책상이 놓여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본래의 생가의 모습이었다. 마을 어귀에서 생가까지 들어가는 길은 좁아서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도 없었고 들어가면 되돌려나올 공간도 없었다. 그 때는 박정희대통령께서 서거하신지도 수년이 지난 때였지만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들과 뜻 있는 인사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최소한 생가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확장하고 반듯한 주차장쯤은 만들어야했었고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반만년 역사에서 백성을 가난으로부터 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룩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재임하신 18년간의 자신과 관계된 모든 평가를 후세에 미루어 놓았던 것이다. 심지어 생가에 관계된 일 까지도.... 그는 구미시 시민과장과 새마을과장을 거치면서 박정희대통령의 많은 부분에 대해서 새롭게 인식하고 박정희대통령을 위대한 지도자로 우러르는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고 했다. 또 하나는 새마을 운동과 관련해서 당시 초등학교와 중학교 졸업생이 대부분이었던 공단 근로자들과의 만남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빈곤의 멍에를 벗어버리고자 어린 나이에 낯선 도시로 달려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가는 앳된 근로자들로부터 밝은 우리의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있는 것은 박정희대통령이라는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고 가난을 벗어나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구미공단의 근로자들과 같은 젊은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그리고 행정의 일선기관인 구미시에서의 소중한 경험은 차후에 그가 정책을 수립할 때마다 항상 그 정책이 일선에서 어떻게 추진되고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를 한 번 더 감안하도록 해서 정책이 의도하는 바와 그 결과의 괴리를 줄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했다.
청렴하고 깨끗했던 27년간의 공직생활
그는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줄곧 경북도내에서 공직생활을 한 지역전문가이다. 경북도청 조사계장 시절 00시장의 부정을 적발하였다. 적당히 눈감아주라는 상관의 요구를 거절하고 시장을 징계한 일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그는 청렴하고 검소하며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품성까지 박정희대통령을 꼭 빼 닮았다. 그러나 정작 임 국장 자신은 감히 그 어른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큰 누를 끼치는 일이라고 손사래를 치며 정색을 했다.
경북도청 내에서도 임국장의 청렴함과 깨끗함은 널리 알려졌고 평소 그런 그의 강직한 성품을 눈여겨보던 뭇사람들의 인정을 받아 감사관실 조사계장과 총무과 인사계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경주세계문화 EXPO를 치러내다
경북도청 국제통상과장으로 재직하던 1998년 5월에는 경상북도에서 개최하는 “경주세계문화 EXPO"홍보실장으로 겸임 발령을 받았다. EXPO를 국내외에 홍보하는 일로 국내외 여행사와 언론 및 기자들을 상대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그는 여기서 약 5개월 동안 방송 인터뷰와 보도자료 작성 및 기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98년은 IMF 사태와 두 번째로 치러지는 지방선거가 있었던 때라 4월이 되어서도 행사 개최여부에 대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따라서 8월에 개최하기로 한 EXPO행사는 촉박할 수밖에 없었고 장마 등으로 준비가 지연되는 바람에 방송과 기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홍보실장은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로 때로는 인간적인 부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는 안 볼 듯이 막말로 싸우기도 한 자리였다. 더위가 한창이던 8월 중순에 시작하여 11월까지 계속된 행사는 IMF사태로 경제가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원 동원에서는 대 성공이었고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기획한 최초의 대규모 문화 행사였다.
지방자치단체 영덕군 부 군수 시절
1999년 8월에 영덕군 부군수로 영전하게 되었다. 비록 부단체장이었지만 임명직으로서는 지역의 최고 책임자였다. 영덕군은 울진군의 인근 군이니 고향에는 못가도 인근에서 일하게 되어 보람도 있었다. 당시 영덕 군수와 지사 사이는 원만하지 못한 처지였다. 그가 한 첫 번째 일이 이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예산을 비롯한 도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는 군수와 지사를 비롯한 도 간부들과 만남의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착공한지 10년이 되도록 진척이 되지 않던 영덕군 종합운동장에 지역현안사업으로 도비를 지원하게 하여 이후 2년 만에 운동장을 준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는 영덕군 부군수로 있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지역을 둘러보고 많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다. 영덕군은 간부회의가 너무 경직되어있다는 것 외에는 공무원들의 능력은 예상보다 잘 훈련되어 있었고, 한정된 지방재정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영덕 부 군수 1년 반 만인 2001년 2월에 도청 기획관으로 자리를 옮겨야했다.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던 3년간의 농수산국장시절
2002년 1월에 그는 기획관 1년 만에 감사관으로 전보되었고, 다시 8월에는 농수산 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농수산 국장 3일 만에 태풍 루사로 김천시의 감천이 범람하여 시가지 일부가 물에 잠기는 것을 비롯해 도내 곳곳의 제방과 농경지가 유실. 매몰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애써 지은 농사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저수지의 수위가 위험수위에 이르자 하류 지역의 주민들이 대피하고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변의 농지는 물바다가 되었다. 헬기로 돌아본 피해 지역은 시뻘건 황토물만 보일 뿐이었다. 이후로 기상이변으로 인한 재해는 계속되었는데, 태풍 루사에 이어 태풍 매미를 겪으면서 그때까지 원상복구에 그쳤던 사후 대책이 완전복구 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단다. 2004년 봄에 있었던 충청북도와 경북 북부지역을 덮은 폭설과 다음해 같은 시기에 강원도와 경북 및 울산, 경남의 동부지역을 뒤덮은 폭설로 인한 인삼·과수·시설하우스 피해는 해당 지역을 특별 재해지역으로 지정하게 했고, 느닷없이 한 줄기 쏟아 붓고 가는 한여름의 우박피해, 이른 봄의 냉해 등이 수시로 이어졌고 그때마다 농민들의 피해 대책 요구는 거세졌다. 과거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이 닭과 오리와 돼지를 괴롭혔고, 도살 처리하여 땅속에 매립한 것만도 수십만 마리였다. 브루셀라는 덩치 큰 소를 도살 처리하게 했다. 지금은 가축 방역체제와 검사장비 및 시설들이 잘 갖추어 졌고, 농민들의 인식도 바뀌어 자체 방역 능력도 향상되었지만 이 모든 것이 해당 농민들과 관련 기관 담당자 및 공무원들의 뼈아픈 노력과 투쟁의 결과였다. 2003년 여름에는 바다 적조 피해로 수만 마리의 양식 넙치가 떼죽음을 하기도 했다. 넓은 바다에서 어선들과 바지선 몇 척과 황토만으로 적조를 막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골리앗과의 싸움처럼 보였지만 바다에 생계를 걸고 있는 어민들을 생각하면 무엇이든 하지않을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농민, 사회단체, 근로자들과 정치권까지 반대한 UR(우루과이라운드)에 이은 DDA(도하개발아젠다)에서의 농산물 협상, 쌀 재협상, 한. 칠레 FTA 등등 농수산국은 하루도 바람 잘 날 없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농수산국은 본청 6개과 사업소 4개, 사업소 지소 3개에 직원 250여명이 근무하는 공무원 수로만 따진다면 어지간한 중앙부처와 맞먹는 규모였다. 매년 옮기다시피 하는 국장보직 중에서 그것도 제일 복잡하고 시끄러운 농수산국장을 역대 최장 기간인 3년 동안 담당했다는 것은 그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농수산국장으로 재임하면서 농업과 농촌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이 필요하고 이는 농림부와 해양수산부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역설했다. 1차 산업으로서의 농수산업은 분명 우리나라를 선진국으로 끌어올릴 미래 성장산업은 아니지만 환경과 안보 측면에서 포기할 수 없고, 그리고 바이오 등 생명산업과 연계하여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으므로 중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국장의 결정으로 도청 예산중 농수산 분야의 예산은 매년 30% 이상씩 증액시켜나갔다. 중앙시책과 경상북도 특유의 시책을 개발해 추진했고, 농민단체를 비롯한 현장농민들과 접촉을 통해 미리 필요한 것을 파악해 시책과 예산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농수산국장 재임 시 제일 기억에 남는 일로 과수 농가들을 위한 경상북도 자체의 농작물 재해보험료 추가 지원, 울진 바다목장사업 유치, 한우클러스터 사업 유치, 과수 우량 육묘기지 유치, 그리고 2회에 걸친 농정시책 최우수도 달성 등을 들었다. 그는 시책을 최종 채택하는 것은 최고 책임자이지만 그것을 채택하도록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참모인 국장의 몫이라고 했다.
그가 3년 동안 농수산국장을 하며 농어민의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었던 힘은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2005년 8월 경제통상실장으로 보직을 옮겼고, 그해 10월에 다음 해에 있을 지방자치단체장 출마를 위해 정년을 5년 앞둔 시점에서 모든 공직생활을 접어야했다.
조합원이 뽑은 “2004 Best 간부공무원”으로 선정되다.
그는 30년에 가까운 공직 생활 중 꼭 두 번 상을 받았는데, 한 번은 1993년의 “신한국창조 근정포장”이고, 또 한 번은 2004년 농수산국장 재임 시에 받은 “홍조근정훈장”이다. 개인으로서 영광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공직생활 중 가장 큰 보람으로 꼽는 것은 2004년 경북도청공무원노동조합이 주관하여 하위직 공무원들로부터 투표로 The Best 와 The Worest 간부 공무원을 선정한 결과이다. 임광원국장은 “조합원이 뽑은2004 Best 간부공무원”으로 선정되었다. 소신껏 일하면서 많은 직원들이 힘들어했지만 열린 마음으로 사심이 없다면 동료 직원들도 믿고 함께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힘을 얻은 순간이었단다. 그 때 받았던 Best 간부공무원 패에는 다음과 같은 서산대사의 선시가 새겨져있었다고 한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들길 걸어갈 제 함부로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마침내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지방자치단체장에 도전하다
정치와는 전혀 안 맞을 것 같은 그가 정치를 한다고 했을 때 임광원국장을 아끼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우려와 걱정을 했다고 했다. 자신을 드러낼 줄 모르는 그의 겸손한 성격 때문이었다.
서로 잘났다고 하는 정치판에서 그의 청렴함과 깨끗함은 오히려 상처를 받을 것이라는 가까운 사람들의 우려 섞인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는 27년간의 공직생활을 접었다.
그가 정치에 입문한 직접적인 계기는 지방자치제의 모순 때문이었다. 국회의원은 몰라도 지방자치단체장은 정치인이 아닌 행정전문가가 맡아야 지역이 발전할 수 있는데 능력보다는 정당이 우선하는 지방자치제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시기상조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고향인 울진군수에 출사표를 던지고 울진자치발전연구소를 열어 주민들을 만나 의견을 들었다. 오랜 행정경험에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고향발전을 위해 봉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역 정서는 비켜갈 수 없었고 능력과 인물보다는 공천이 결과를 좌우했다. 또 한 번의 고배를 맛보는 순간이었다.
불모지에서 시작한 고독한 박근혜지지
행정고시 합격 후 첫 발령지인 구미시에서 위인 박정희의 진면목을 접할 수 있었다면 공직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에 입문해서는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정치철학과 조우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철학은 평소 임광원국장이 지니고 있던 신념과 일치했는데, 그것은 법과 질서가 바로 서고, 원칙과 기본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이 우라 나라를 일류 국가로 만드는 지름길이며 구태정치 청산은 내 고장 내 지역부터 이뤄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경북지역에서도 특히 울진, 봉화, 영덕, 영양은 타 시군에 비해 낙후되었고 박근혜 전 대표보다는 타 후보의 바람이 드셌다고 했다. 또한 울진은 국민의 정부 시절 영남에서는 최초로 민주당 후보가 군수로 당선되기도 했던 특수한 정서를 지닌 지역이었는데 그는 한나라당 경선 때까지 줄곧 서울과 대구, 그리고 고향인 4개 군을 종횡무진하며 박풍을 일으키려고 무척 애를 썼다.
새마을운동의 실천만이 나라를 살린다
임광원국장은 “우리나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제 때에 영토가 가장 넓었고, 세종대왕 대에 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로 평가되는 한글을 창제했으며,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며 반만년 역사에서 이루지 못했던 백성들의 배고픔을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역설했다.
그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세계 선진국 대열에 올라서기 위해서는 경제성장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의식의 선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며 이는 어린 아이가 덩치만 크다고 하여 어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앞당긴 새마을 운동은 다음 단계로 의식의 선진화를 추진하였는데 지금은 새마을 운동이 지지부진하고 당국의 관심도 멀어진 상태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과거 10년 동안의 좌파 정권에서 법과 질서가 무시되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라가 온전할까를 걱정해 왔는데 이제 새로운 정부는 새마을운동이란 좋은 제도의 장점을 살려 의식의 선진화와 더불어 진정한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더욱더 분발해야한다고 주문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의 선진화, 진정한 민주화를 내 고향으로부터 이루어내고 싶다고 하였다. 아무리 정치가 살아있는 생물이라 할지라도 신의와 신뢰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주민에 바탕을 두고 주민들이 원하는 깨끗한 정치를 위해 온몸을 던져 희생하겠다는 각오를 피력했다. 그는“敬事而信, 爲政基民” 이것이 우리나라가 진정한 정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는 말을 끝으로 긴 인터뷰를 마쳤다.
취재. 정리 월간 박정희 金東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