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겪은 대재앙 3
현대까지 계속 되는 재난들
갤브스톤의 살인적 허리케인--1900년 156
우간다를 공격한 수면병--1900년 160
펠레산: 죽음의 산--1902년 162
프랭크 산사태--1903년 166
샌프란시스코 지진--1906년 168
시베리아를 덮친 수수깨끼의 불덩이--1908년 174
메시나의 지진--1908년 176
미국 북서부의 큰 산불--1910년 178
타이타닉호의 최후--1912년 180
전세계를 공격한 인플루엔자--1918년 188
간토 대지진--1923년 192
올드맨강의 범람--1927년 196
미 중부 지방의 대한발--1930년대 200
뉴일글랜드의 허리케인--1938년 204
칠레의 대지진--1939년 208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충돌한 폭격기--1945년 212
살인 파도--1946년 214
갤브스톤의 살인적 허리케인
화려한 텍사스 항구를 죽음의 도시 로 만들어 버린 폭풍우
텍사스주에서 가장 큰 항구이자 가장 부유한 도시이면서 휴양지였던 갤브스톤은 텍사스 본토에서 떨어진 나주막한 모래톱 섬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갤브스톤의 가장 높은 곳도 2.7m를 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땅은 평균 파고인 1.5m를 간신히 넘고 있었다. 그러나 갤브스톤은 열락의 매력 을 가진 곳으로 불렸을 만큼 아름다운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매력에 눈이 멀어 위험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갤브스톤은 모래 위에 세워지고 허리케인의 길목에 놓여 있는 도시치고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었다.
범람 --글 지방 사람들이 폭풍우에 의해 일어난 홍수를 부르는 말--이 종종 48km 길이의 이섬을 강타했지만 한 번도 커다란 인명 피해나 재산 피해를 낸 적은 없었다. 그리고 큰물에 대한 대비책으로 모든 집은 지면에서 1--2m위에 지어져 이었다. 또 실제로 범람이 일어났을 때는 도시 전체가 휴가를 떠나고 없을 경우가 잦았다. 그랬기 때문에 1900년 9월 4일 화요일, 열대 폭풍 저기압이 쿠바를 넘어 북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는 긴장된 보고가 미국 기상국 갤브스톤 지부에 도착했을 때도 갤브스톤 사람들은 별로 경계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 보고는 해마다 그때쯤이면 오는 흔한 것이었으며 또 어쨌든 이번 폭풍은 플로리다 쪽으로 갈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후 3일간, 갤브스톤 기상국의 구장인 아이작 클라인과 그의 동생이자 사무관인 조셉은 평소와 다름없이 워싱턴의 훈령에 따라 폭풍우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저기압 은 예측한 대로 플로리다 일부를 침수시킨 다음, 목요일 오후 갑자기 북쪽으로 가던 경로를 버리고 멕시코만의 넓은 물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죽음의 폭풍우가 취약한 도시 갤브스톤을 향했을 때 갤브스톤은 평소와 다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금요일 오전 10시 30분, 아이작 클라인은 워싱턴으로부터 폭풍경보 깃발을 내걸라는 훈령을 받았다. 시속 27km의 상쾌한 바람이 부는 가운데 아이작은 기상국의 지붕으로 올라가 두 개의 페넌트를 달았다. 하얀 삼각기는 북서쪽 방향 을 뜻했고 빨간색과 검은색이 섞인 사각기는 현저한 위력 을 가진 폭풍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갤브스톤 사람들은 무관심했다. 심지어 해변에 나와 있던 여름 휴가객들은 그 시원한 바람을, 지난 며칠간의 더위를 식혀 주는 것으로 환영했을 정도였다.
금요일 하루가 지나갔다. 클라인형제는 파도가 솟아오르고 하늘의 구름이 늘어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압계 역시 하루 종일 떨어지고 있었다. 심각한 기단이 다가오고 있다는 분명한 표시였다. 그러나 종종 허리케인에 앞서 나타나는 불그스름한 빛인 벽돌가루빛 하늘은 그날 저녁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정쯤에는 하늘이 어느 정도 맑아지기까지 했고 섬에 달까지 비추었다. 아마 갤브스톤 (뉴스)지의 한 기자가 토요일 아침판 신물에서 추측한 대로 폭풍이 경로를 바꾸거나 텍사스에 이르기 전에 힘을 소진해 버린 것 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중에 밝혀졌듯이, 그 기자의 추측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9월 8일 토요일 오전 1시경, 조셉 클라인은 기상국에서의 일을 마치고 형의 집에 있는 자기 방으로 갔다. 해변에서 네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그날 밤 조셉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새벽 4시에 잠을 깼다. 임박한 재난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다. 창문으로 가본 조셉 클라인은 만의 물이 뒤뜰을 쓸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조수가 평소보다 적어도 1.5m는 높아졌다는 뜻이었다. 조셉은 형과 서둘러 상의한 뒤 기상국으로 돌아갔고 아이작은 말을 마차에 묶고 해안의 주민들을 깨워 위험이 임박한 사실을 알리려고 뛰어나갔다.
아이작 클라인이 해변으로 주민을 깨우러 간 일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일부 거주자들은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시내 중심부의 높은 곳으로 피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머물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많은 갤브스톤 사람들은 점점 장관을 이루는 광경을 지켜보러 해변으로 나가기까지 했다.
오전 8시 45분,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0시 직후, 조셉 클라인은 워싱턴으로부터 북서 폭풍 경보를 북동 폭풍 경보로 바꾸라는 말을 들었다. 조셉은 기상국에 새 깃발을 달았다. 그러나 강한 바람이 곧 깃발을 찢어발겼다.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 폭풍은 몇 시간 뒤 깃대마저 부러뜨렸다.
정오 무렵, 비와 바람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해졌다. 수천명의 갤브스톤 시민은 뒤늦게 피신하려 했지만 바람에 실린 비의 힘은 사람을 쓰러뜨릴 정도로 강했다. 게다가 거리에는 보도에서 떨어져 나온 나무 토막을 포함한 파편들이 날아다녀 움직이기가 더욱 힘들었다. 오후 중반이 되자 도시의 반이 침수되었고 본토로 가는 둑길은 유실되어 버렸다.
오후 2시 30분경, 조셉 클라인이 기상국 지붕으로 돌아가 보니 우량계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수치가 약 32mm였으나 그 후에 폭풍은 도시에 약 254mm의 빗물을 더 퍼부었을 게 틀림없었다. 당시 바람은 이따금씩 시속 67km에 이르는 돌풍을 동반하면서 대체로 시속 56km로 불고 있었다. 기압계 수치는 744mm였으나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작 클라인은 해안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고 오후 중반이 되어서야 자신의 아내와 세 딸이 안전한가 보려고 집으로 갔다. 조셉은 워싱턴에 보고를 하기 위해 전보 회사인 웨스턴유니언 사무실로 갔다. 그러나 웨스턴유니언과 포스털텔레그래프 사무실의 통신들은 모두 끊겨 있었다. 다행히도 휴스턴과는 연락이 되어 소식을 알릴 수가 있었다. 그나마 연락을 마치자마자 선이 끊어져 버렸다.
이제 갤브스톤은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 기상국에서 할 일을 다했기 때문에 조셉은 오후 5시쯤 형의 집으로 향했다.
이 무렵 많은 거리는 목까지 오는 소용돌이치는 물에 잠겨 있었다. 지붕 슬레이트 타일이 바람에 날려 공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조셉은 30분 뒤에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거의 50명에 이르는 이웃이 클라인의 잘 지은 집은 폭풍에도 견딜 것이라고 믿고 그곳에 피신하고 있었다.
5시 30분, 기압계의 눈금은 735mm로 떨어졌다. 풍력계는 이따금씩 시속 160km에 이르는 돌풍을 동반한 시속 134km의 바람을 기록한 후에 박살이 나 버렸다. 이후 몇 시간 이내에 폭풍은 절정에 이르렀다. 갤브스톤의 바람은 약 시속 160 내지 190km 속도로 불면서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하였다.
집들이 부서지고 파편들이 공중을 날아다녔다. 갤브스톤 사람들은 사라져 가는 모래톱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으려 했다. 도시의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트레몬트 호텔에는 약 1000명의 사람들이 모여 폭풍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5시 직후 물은 호텔의 원형의 큰 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 안내 데스크가 가라앉았다. 불안해진 피난민 무리는 중이층으로 피신했다. 비록 앞 창문들이 깨져버리고 지붕이 뜯겨 나가긴 했지만 호텔 건물과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결국 살아 남았다. 그러나 모두가 그렇게 운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오후 6시30분경, 폭풍 해일은 허리케인의 소용돌이에 앞서 1.2m가 높아진 물결로 갤브스톤섬을 강타했다. 그때까지 폭풍에 견디었던 많은 집들이 몇 분만에 쓰러지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 한 시간 뒤, 근처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던 플라인의 집을 향해 파편들이 밀려왔다. 클라인 가족은 떠다니는 파편더미 이곳 저곳에 기어올라 안전한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작의 아내를 비롯해 그의 집에 피신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죽었다.
기압계는 오후 7시쯤 722mm라는 기록적인 낮은 수치로 떨어진 후 곧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10시에 폭풍의 눈은 갤브스톤에서 남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텍사스 본토로 건너갔다. 이제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속도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자정 무렵이 되자 해일이 일었을 때 평상시보다 4.5m 더 높은 수위를 기록했던 밀물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물은 빠져 나가면서도 또 몇 채의 집을 송두리째 부수어 버렸다.
폭풍 뒤 갤브스톤 거리는 시체와 파편으로 가득 찬 참담한 모습을 드러냈다.
9월 9일 일요일 새벽, 갤브스톤 사람들은 맑은 하늘, 잔잔한 바다 그리고 엄청나게 파괴된 그들의 도시를 볼 수 있었다. 몇몇 동네에는 건물이 단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중에 재산 손실은 2000만 달러로 평가되었다.(그것은 인플레이션이 있기 전인 1900년 당시의 평가액이었다)더 심각했던 것은 미국 역사상 그 어떤 자연 재해에서보다 사망자 수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갤브스톤에서만 3만 7700명으로 추정되는 인구 가운데 약 6000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인접한 텍사스 해안에 살고 있던 4000에서 6000명에 이르는 사람들 또한 죽었다. 여러 교회로 피신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건물이 무너지면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도시의 한 병원에서는 100여명의 환자들이 죽었고, 성마리아 고아원에는 90명의 아이들 중 3명만 살아 남았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다. 한 여자는 나무 욕조에 있다 바다로 쓸려 나갔다가 아침 밀물에 밀려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옷을 안 입었다고 부끄러워할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마리아 고아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구조원들은 한 아기를 발견했다.
아기의 부모들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기의 손목에 못을 박아 지붕에 고정시켜 놓았다. 이 아기는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 손목의 출혈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시련을 견디고 살아 남았다. 운 좋게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는 음식, 식수, 의약품이 아주 귀했다. 그런 것을 갤브스톤에서 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갤브스톤의 황폐가 엄청난 만큼 시민들의 살고 재건하려는 의지 또한 엄청났다. 일요일 오후에는 중앙 구조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자원자들이 섬에 몇 척 남아 있지 않던 항해 가능한 보트 가운데 한척을 타고 재난의 소식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러 휴스턴으로 갔다. 다치지 않은 사람들은 청소대원으로 징발되었다.
일부는 파편을 치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속히 썩어 가며 도시에 악취를 풍기는 시체들을 처리해야 했다. 9월 13일 목요일 갤브스톤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어 약탈자는 발견 즉시 총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런 식으로 처형된 여섯 명의 약탈범 가운데 한 사람은 호주머니에 반지를 낀 절단된 손가락을 23개나 넣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갤브스톤의 비극에 관한 소식은 전국을 깜짝 놀라게 하여 그 결과 엄청난 기부금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전세계의 개인과 단체들의 의연금 덕분에 구조 위원회는 몇 달 동안 갤브스톤 시민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등 여러 가지 구호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허리케인이 쓸고 간 뒤 1년이 안 되어 갤브스톤의 경제는 회생을 했으며 정부는 만 해안을 따라 4.8km 길이의 방파제를 세울 계획을 짜게 되었다. 1904년에 완공된 이 놀라운 공학적 업적은 그 후 16km로 확장되었다. 벽이 세워진 후에는 500블록의 지역에 수백만 입방 미터나 모래 주머니를 깔아 갤브스톤의 땅 자체를 높였다. 어떤 곳은 51m씩이나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땅을 높이기 전에 우선 약 2156동의 건물들--3000톤에 이르는 성패트릭교회를 포함하여--을 하나하나 들어올려야 했다. 도시 전체를 들어올리는 데 쏟아부은 그 엄청난 노력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금세기에 들어 갤브스톤 섬은 여섯 번의 심각한 허리케인의 습격을 받았으나 다시는 1900년의 끔찍한 참사에 가까운 인명 및 재산 피해를 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구조에 나선 적십자
미국 적십자의 설립자인 78살의 클라라 바튼에게는 갤브스톤의 폭풍 소식이 마치 화재 경보가 울리는 것처럼 다가왔다. 적십자의 실무진 몇 명을 데리고 9월 15일 갤브스톤에 도착한 클라라 바튼은 도시가 살이 타는 독특한 냄새 로 꽉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피곤하고 병들어 있었지만 바튼은 원조를 호소하고 곧 12만 달러에 상당하는 기부받은 현금, 식량, 의복, 목재, 철물을 분배하는 것을 감독했다.
클라라 바튼이 갤브스톤에 두 달 정도 머문 것은, 바튼이 재난 구조 사업에 직접 참여한 것으로는 마지막이었다. 클라라 바튼여사는 남북전쟁의 전쟁터에서 시작하여 1881년의 미국 적십자를 수립하기까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들을 해 왔다.
이듬해 바튼은 의회가 전시 부상자 및 포로의 대우에 관한 제네바 협정을 비준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바튼은 또한 협정을 개정하여 적십자의 활동 범위에 평화시 긴급 사태가 발생했을 때 구조 활동을 하는 것도 포함 시켰다. 1904년, 바튼은 적십자 이사회와의 오랜 불화 끝에 사임할 때까지 미국 적십자 회장을 맡아 왔다. 바튼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우간다를 공격한 수면병
곤충이 옮기는 세균으로 인해 확산된 죽음
금세기초 어느 날, 영국 의사와 우간다인이 언덕에서 빅토리아호의 북쪽 물가를 굽어보며 서 있었다. 그곳 주변은 한때 광활한 바나나 플랜테이션이었다. 우간다인은 그 폐허를 가리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룸베가 우리의 가장 좋은 밭들을 다 먹어 버렸습니다. 룸베 란 우간다에서 병을 의인화해서 가리키는 말로, 우간다인의 말은 룸베가 밭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죽임으로써--특히 아프리카 수면병에 전염되어--밭들을 먹어 버렸다 는 뜻 이었다. 병이 전염병 수준에 이르렀던 1900년과 처음으로 그병에 대해 효과적인 대책이 세워졌던 1907년 사이에 빅토리아 호숫가에 살고 있던 아프리카인이 무려 20만명이나 죽었다. 이것은 그 지역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2가되는 숫자였다.
미세한 기생충에 의해 야기되는 아프리카 수면병, 즉 트리파노소미아시스는 역시 수면병으로 알려진 아메리카의 병(바이러스에 의한 뇌염의 일종)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때로는 몇 년씩이나 환자의 생명을 갉아먹는 이 병에 걸리면 두통, 무기력, 불면증, 뚜렷한 압박감을 느낀다. 사람을 무능하게 만드는 2단계에서는 정신 분열, 통증을 초래하며 밤에는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낮에는 음식을 먹다가도 졸게 만든다. 결국 혼수 상태에 빠지고 죽음이 찾아온다. 이 병은 아프리카에서만 발생하고 또 수백년 동안 아프리카에만 존재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대 역사에서 그 병의 전염과 치료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유럽인들이었다. 우선 유럽인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던 전염 지역에서 다른 지역으로 그 병을 옮겼다. 그 결과 수면병은 우간다의 전염병이 되었으며 경악한 유럽인들이 결국 퇴치법을 찾아냈다.
1800년대말의 빅토리아호 주변은 병이 퍼지기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했다. 비옥한 토양과 일정한 강우량 덕분에 북쪽과 서부 호숫가와 근처의 부부마제도는 인구 밀도가 높았다. 이 지역은 동시에 다양한 생물, 그 가운데도 인간의 피를 먹고 사는 체체파리--학명은 글로시나 팔팔리스--종의 이상적인 서식지이기도 했다.
이 지역에서 체체파리와 인간은 언제나 함께 살아왔다. 체체파리는 그저 무는 정도의 성가신 일 외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는 수면병을 일으키는 기생충 트리파노소마 감비엔세라는 핵심적인 요소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 기생충은 인간, 동물 그리고 그 병을 옮기는 유일한 수단인 체체파리에 기생한다. (그 기생충은 파리의 타액선으로부터 파리가 무는 생물의 피로 옮겨진다.)
19세기 이전에는 이 기생충, 즉 트리파노솜은 아프리카 서쪽연안의 아주 작은 지역에만 한정되어 존재했다. 그것이 퍼지지 않았던 것은, 그 기생충을 지니고 있는 인간 숙주가 자기가 사는 곳을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유럽인 모험가들이 대륙을 탐험하고 다니면서 그 병에 감염된 사람들을 짐꾼으로 쓰게 되고 따라서 유럽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을 다른 곳으로 퍼뜨리게 되었다. 때로는 감염된 파리들을 몰고 다니기도 했다. 파리들은 보트에 붙어 이동했다. 그 결과 광대한 지역이 이 병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되었다. 우간다의 빅토리아호 근처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은 가장 취약한 곳에 속했다.
우간다에서 대량 발병하는 데 20년이 걸린 이병은, 한 영국인 관측자가 지적한 대로, 호수 주변과 나일강을 따라 너무 급속히 퍼지는 바람에 북쪽으로는 이집트, 동쪽으로는 인도, 남쪽으로는 남아프리카를 위협했다. 마침내 1900년, 이 병이 광범위한 전염병이 되었을 때 1894년 우간다를 보호국으로 만든 영국인들은 병의 전염을 막을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그 병을 잡는 일은 국가적 중요성을 지닌 문제가 되었다.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조악한 병원과 캠프를 지어 놓고 죽어가는 환자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식민지 행정관들은 빅토리아호의 부부섬에 지어 놓은 수용소에 환자들을 격리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섬에는 체체파리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격리 수용을 했다면 병의 전파를 더 촉진시키는 결과만 낳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계획은 런던에서 공식적인 조사위원회의 도착을 기다리라는 명령 때문에 연기되었다.
첫 수면병위원회는 1902년 여름 우간다에 도착했다. 그들은 병의 발병 지도를 그려봄으로써 감염의 뚜렷한 패턴을 발견했다. 수면병은 호수 주변의 마을들, 섬, 강둑에서 발병했다. 그러나 물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는 절대 퍼지지 않았다. 위원회의 위원인 앨도 카스텔라니박사가 수면병 환자의 뇌척수액에서 트리파노솜을 발견함으로써 또 하나의 돌파구가 열렸다.
데이비드 브루스 박사가 이끄는 두번째 위원회는 1903년에 우간다에 도착했다. 브루스박사는 우연의 일치로 우간다에 오기 얼마 전에
아프리카의 어떤 가축병이 트리파노솜에 의해 발병하여 체체파리에 의해 옮겨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루스는 카스텔라니의 조사 방향을 따라가면서 체체파리의 분포와 병의 분포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도를 그리게 되었다. 브루스는 감염된 파리들이 실험실 원숭이의 피를 빨도록 한 결과 수면병의 원인과 그 전염 수단을 완전히 밝혀냈다..
이 수수께끼를 푼 것은 모든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미래에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 업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급격히 줄어들고 있던 우간다의 주민에게는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하지 못했다. 1907년에 이르러서야 병의 치명적인 전염활동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그것은 의사들의 활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감염된 호숫가를 관할하고 있던 지역 추장들과 협조하여 활동한 단호한 행정관의 조치에 의한 것이었다.
우간다 보호령의 식민지 행정관이었던 헤스케스 벨을 체체파리에 감염된 지역에서 전주민을 소개시키게 해 달라는 허가를 되풀이하여 본국에 요청했다. 그러나 런던의 식민지국에서는 그런 행동이 토착민과의 전쟁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벨의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 벨은 대담하게도 그 문제를 자신의 손으로 처리하기로 하고 자신의 계획을 추장들과 상의했다. 그들은 함께 행동에 착수했다.
주민 소개는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감염된 파리의 서식처를 떠났을 때 수면병의 전염은 멈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 병은 땅에 대한 지배력까지 잃지는 않았다. 벨은 일단 감염 과정 가운데 인간이 사라지면 파리들도 결국 병에서 벗어나 인간은 호숫가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벨은 얼마 전에 그 지역에 유입된 기생충이 벌써 여러 야생동물들 사이에서 영원한 서식지를 발견하여 그 짐승을 무는 체체파리를 계속 감염시켜 오늘날까지 수면병의 첫 환자들의 후손을 집요하게 괴롭힐거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그림 설명
수면병의 매개체인 체체파리(위)는 집파리의 친척이라고 할 수 있다. 감염된 체체파리는 인간의 피를 빨면서 인간의 몸 속에 병의
원인이 되는 기생충을 주입한다. 오늘날 왼쪽의 모자처럼 수면병에 걸린 사람들은, 기생충이 중추 신경계에 이르기 전에 병을 발견하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펠레산: 죽음의 산
갑작스럽고 무시무시한 격동으로 죽어간 3만명
해적, 사치, 전공, 우아한 방식의 생활 등을 포괄하는 로맨틱한 역사를 가진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은 1902년까지는 미국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7세기 이후 프랑스령의 이 섬은 길이 약 64k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약 26km였으며 아주 산이 많았다. 사탕수수, 담배, 커피, 카카오 플랜테이션이 성했던 마르티니크는 가장 높은 산인 펠레산 꼭대기까지 정글과 간은 숲으로 덮인 곳이었다. 펠레산은 해발 약 1450m로 섬의 북쪽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다.
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인 생피에르는 펠레산의 남쪽 발치에 그림처럼 둥지를 틀고 있었으며, 그곳의 집들은 평온한 만을 따라 색색의 리본처럼 약 3.2km를 뻗어 있었다. 다른 모든 마르티니크 사람들처럼 생피에를 사람들도 아주 신앙심이 깊었다. 생피에르에는 웅장한 성당과 몇 개의 교구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외에 세속적인 것으로는 매년 겨울 프랑스에서 온 극단이 공연을 하는 극장, 클럽, 카페, 무도장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 바로 외곽에 있는 펠레산의 평평하고 구름이 화환처럼 드리워진 봉우리는 오래 전부터 피크닉의 최적지였으며, 또 정상의 맑은 호수는 수영하기에도 적당했다.
1902년 4월초, 펠레산 정상 근처에서 화산 활동이 있었으나 피해는 별로 없었다. 분기공, 즉 희미하게 유황 증기를 뿜어내는 연기 구멍들이 나타났던 것이다. 4월 23일, 화산재가 섞인 가랑비가 산의 남부와 서부 경사면에 내렸다. 강렬한 지하의 충격이 느껴졌으나 처음에는 지진으로 오인되었다. 이어 4월 25일, 생피에르 사람들은 펠레산 정상으로부터 바위와 재가 섞인 거대한 구름이 피어오르는 장관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펠레산의 화려한 불꽃놀이는 위협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5월 2일 금요일 자정 30분 전, 되풀이되던 화산 폭발이 갑자기 위협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생피에르 사람들은 천둥소리 같은 폭발음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동시에 번쩍이는 번개를 수반한 짙은 검은색 구름 기둥이 위로 솟구쳐다. 새벽이 되자 생피에르는 갓 내린 눈에 덮인 것처럼 희끄무레한 재로 덮여 있었다. 그날 내내 대여섯 시간 간격으로 끔찍한 폭발음이 들였으며, 사람들은 그 도시를 떠나는 방법을 논의했다.
5월 4일 일요일, 재를 실은 시커먼 비가 내리는 바람에 해안에 있던 배들은 그 비를 뚫고 항해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바다에는 죽은 새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피난민 농부들의 아이들이 길을 잃고 어린 당나귀들과 함께 도시를 정처없이 배회하였다. 그들은 어리둥절하여 정신없이 떠돌고 있었다. 월요일 밤, 공전에 의한 공중장애 때문에 도시의 전기가 모두 나갔다. 어둠 때문에 불확실성과 두려움이 한층 더했다. 화요일 오전 2시 무렵, 펠레산 깊은 곳에서 천둥소리보다 더 큰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등불과 촛불을 들고 집에서 달려나와 제정신이 아닌 모습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서로 물었으나, 동이 터 도시가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5월 7일 수요일--생피에르의 마지막 날--다시 동요가 일어났다. 오전 4시, 펠레산은 포효하기 시작했다. 정상 주위에서 번개가 계속해서 번쩍였으며, 두 개의 불타오르는 분화구가 터진 용광로처럼 빛을 발했다. 생피에르를 떠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났다. 여자들은 멀리 떨어진 곳, 심지어 가까운 섬인 과들루프까지 피난을 갔다. 남자들은 그대로 남아 업무 처리를 했다. 그러나 이 무렵, 겁에 질린 시골 사람들이 당황하여 정처없이 도시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들의 숫자가 떠나는 사람들의 숫자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사실상 도시의 인구는 수천 명 늘어났다.
그날은 밤새도록 더웠다. 공기는 이상할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펠레산은 조용히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목요일 오전 4시,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화산은 검은 재를 쏘아올렸으며, 그 재는 무역풍에 밀려 서쪽으로 떠갔다.
오전 6시 30분 여객 증기선 로라이마호가 항구에 닻을 내렸다. 로라이마호의 갑판은 떨어지는 재로 인해 잿빛이 되었으며 승객과 승무원들은 난간에 줄을 지어 서서 화산이 폭발하는 경외스러운 장관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또다른 여객선인 기선 로당호가 해안 가까이 닻을 내렸다.
예수 승천 대축일은 맑고 화창하게 동이 텄다. 도시의 공기는 교회서 울려오는 종소리에 떨리고 있었다. 도시 주변의 높은 곳에 사는 교외 거주자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샌 뒤 펠레산이 벌이는 경탄할 만한 불꽃놀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생피에르 우체국에서는 야간 교대 근무자들이 화산에 대한 최신 공식 보고서를 올렸다. 주목할 만한 새로운 상황은 없다는 내용이었다. 남동쪽으로 19km 떨어진, 마르티니크의 수도인 포르--드--프랑스의 전신 담당자는 응답을 하기 시작했다. 생피에르 군사 병원의 벽에 걸린 시계가 7시 52분을 가리키고 있을 때, 포르--드--프랑스의 전신 담당자는 전송을 중단했다. 알레, 생피에르의 전신 담당자가 두드렸다--신호를 계속 보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포르--드--프랑스의 전신 담당자가 키를 다시 두드렸을 때 선은 끊어져 있었다. 그 순간에 생피에르는 죽은 것이었다.
잠시 후 엄청난 폭발음이 포르--드--프랑스의 공기를 찢었다. 거대한 검은 연기 기둥이 솟구치더니 대단히 빠르게 위로 올라가 버섯모양으로 퍼지며 하늘 전체를 가리고 빛을 삼키는 것이었다. 8시 미사를 막 시작하려던 포르--드--프랑스의 교회는 눈깜빡할 사이에 텅 비어 버리고 사제들만 남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거리에 굻어앉아 흐느끼며 횡설수설하였다. 생피에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7시 52분 수리선 푸예--케르티에호는 해안에서 약 13km 떨어진, 바다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승무원들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 산의 위쪽 옆면이 갑자기 벌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갈라진 틈에서 마치 대포 아가리에서 쏟아져 나오듯 짙은 검은 증기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두 번째 검은 화산 분출물--포르--드--프랑스에서 본 구름이었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미친 듯이 위로 솟아올라 버섯처럼 퍼지더니 금방 검은 우산처럼 80km 반경의 하늘을 채우는 게 보였다.
산에서 수평으로 터져나온 화산 분출물은 빠른 속도로 산 경사면을 내려가 소리없이 도시로 향했다. 화산 분출물의 앞쪽 가장자리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 목격자의 말에 따르면, 마치 도약하는 사자들 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화산 분출물은 때로는 백열의 빛을 발하고 내부에서는 천둥 같은 폭발음이 들이고 번개 같은 불꽃이 번쩍거렸다.
1분도 안 걸려 화산 분출물은 생피에르의 북쪽 가장자리에 이르렀으며 그와 동시에 시커먼 담요처럼 펼쳐지며 모든 것을 지워 버렸다.
화산 분출물에 닿는 것마다 불길을 내며 폭발했다. 부두에서는 수천 병의 럼주가 큰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해안에 있던 배들은 화산 분출물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뱃전을 대어 정면에 충격을 받아 대부분 선체에 불이 붙으며 전복되어 가라앉았다.
오직 로라이마호와 로당호만이 물위에 떠 있었으나 로라이마호의 돛대, 연통, 보트들은 쓸려갔으며 갑판 대여섯 곳에서는 화재가 발생했다.
로당호는 옆으로 기우는 바람에 난간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왔으며 이어 닻의 사슬이 끊어 지면서 배는 다시 수평을 이루었으나 불똥이 튀겨 이물과 고물에 불이 붙었다. 해안에서 약 13km 떨어진 푸예--케르티에호에서도 열기를 느낄 수 있었으며 갑판으로 시뻘겋게 단 돌과 재가 날아왔다. 승무원들은 간신히 배를 바다로 빼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섬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이 엄청난 재난에 대해 모르고 있었고 총독으로부터는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북쪽과 교신을 하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정오가 될 무렵 부총독이 전함을 보냈다. 전함은 불타는 도시에서 좀 떨어진 곳에 12시 30분쯤 도착했다. 고성능 망원경으로 보니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도 안 보였다. 선장은 도시 중심부 근처의 플라스베르탱에 배를 갖다 댔다. 플라스베르탱은 한때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었으나 서 있는 나무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았다. 땅에는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광장 중앙의 분수는 아직도 차갑고 맑은 물을 뿜어올리고 있었다. 상륙한 승무원들은 불길과 악취 때문에 더 깊이 탐험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불운한 도시에 갇혔던 3만명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 남았다.
생피에르에서는 단 두명의 생존자가 발견되었다. 한 사람은 제화공인 레이옹 콩페르--레앙드르인데, 그는 불붙은 화산 분출물이 뒤덮어 버린 땅의 가장자리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불붙은 화산 분출물 밖으로 기어나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은 오귀스트 시파리라는 이름의 죄수인데, 그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다. 감옥의 유일한 통풍구는 화산과는 반대 방향으로 난 문의 좁은 쇠창살문이었다. 재난 사흘 뒤, 구조 작업을 하던 사람들은 그의 신음을 듣고 파내 주었다. 시파리는 끔찍한 화상을 입었지만 자신이 겪은 시련에 대해 비교적 조리있게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시파리는 5월 8일 아침 주위가 갑자기 아주 어두워지면서 미세한 재가 섞인 뜨거운 공기가 쇠창살 통풍구로 밀려들어오는 바람에 화상을 입었다. 고통스러운 열기는 잠깐밖에 지속되지 않았으나 시파리는 괴로워 펄쩍펄쩍 뛰면서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살이 타는 냄새 외에는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옷에는 불이 붙지 않았으나 옷 밑의 몸은 깊은 화상을 입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시파리가 그런 고통을 겪는 동안에 3만 명의 다른 사람들은 죽어 버린 것이다.
연구자들은 그들의 사망 원인이 치명적인 가스와 폭발적인 먼지가 섞인, 아마 섭씨 1000도는 될 고열의 증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희생자들은 평소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갑작스레 죽음을 당했다는 증거였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통 때문에 일그러져 있었다. 집 밖에서 불붙은 화산 분출물을 만난 희생자들은 대부분 옷이 찢겨 나가 있었다. 마치 사이클론의 길목에 서있던 사람들 같았다.
도시에는 며칠 동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위생반이 조금씩 조금씩 폐허를 뚫고 들어가 죽은 사람들을 화장 처리했다. 악취가 역겨웠다.
수천 명의 희생자들이 재로 뒤덮인 채 몇 킬로미터 깊이로 쌓여 있었으며 거기에 비가 내려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몇 주가 지난 후에야 발굴되었으며 신원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생피에르에는 생존자가 없었기 때문에 진정한 부활은 불가능했다. 울창한 산림이 곧 그 끔찍한 상흔을 덮었다. 펠레산 기슭까지 숲이 다시
덮혔으며 어부들은 부두를 따라 새로 오두막을 지었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집들도, 결국 그곳에 들어선 마을의 거주자들도, 사라진 생피에르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매력적이고 독창적인 생피에르의 독특한 생활 방식은 영원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뼈들을 보관한 채 녹색 경사면에 서 있는 하얀 납골당만이 그 운명을 상징하고 있다.
죽음을 가져 온 펠레산의 화산 폭발
마르티니크의 주요 도시인 생피에르를 1902년 소멸시킨 펠레산의 화산 분출물은 뉘에 아르당트, 즉 빛나는 구름 으로 알려져 있다. 빛을 내는 산사태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는 화산 분출물은 고열의 증기와 가스들이 백열을 발하는 화산재와 섞이면서 치명적인 파괴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 화산 분출물은 엄청난 속도로 산비탈을 흘러내려 세 가지 측면에서 죽음과 파괴를 초래했다. 그 폭발력은 벽을 부수어 버렸고 나무의 뿌리를 뽑았으며 희생자가 입은 옷을 찢었다. 약 1000도 씨에 달하는 열기는 건물들을 화장터로 만들었으며 사람들의 살을 새카맣게 태워버렸다.
어떻게 이런 치명적인 위력을 지닌 폭발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오랜 기간 축적된 압력이 격렬하게 분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런 화산 폭발의 경우 화산의 구멍은 마그마, 즉 암전에 의해 막혀 있다. 그 밑에서는 휘발성 가스가 유난히 많이 녹아 있는 마그마 기둥이 끊임없이 압력을 증가시키며 마침내 폭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가스를 가득 담은 마그마는 암전을 뚫고 위로 분출하거나 산의 측면에 구멍을 뚫으면서 폭발적인 힘으로 분출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갑자기 풀려 난 가스는 급속히 팽창하면서 마그마를 공중에 흩어 버린다.
프랑스 과학자들이 1902년 펠레산의 화산 폭발을 분석했으며 이런 폭발적이고 아주 위험한 화산 분출은 그 이후 지질학자들에게 펠레형 화산 폭발로 알려지게 되었다.
프랭크 산사태
캐나다의 광산 마을을 박살내 버린 산사태
이 지역 인디언들은 터틀산(거북산) 기슭에서는 야영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캐나다의 남부 중앙 앨버타에 있는 쌍둥이 봉우리는 그 모양이 거북의 등 같고, 아래 크로즈네스트강 위 1000m에 거북의 머리처럼 석회암 덩어리가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어쩌면 인디언들은 언젠가 잠을 자던 거북이 깨어나 고개를 끄덕이면 산이 굴러내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에 이 외딴 서부 캐나다 구석에 정착해 살던 백인들 대부분은 인디언들이 터틀산에 대해 가지던 두려움에 공감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몬타나의 은행가인 H.L. 프랭크는 1900년 10월 터틀산 기슭에서 발견된 석탄 광맥에 재빨리 투자했다. 1년 후, 프랭크의 캐나다--아메리카 석탄 코크 회사는 새로운 광산으로부터 하루 수백 톤의 석탄을 채굴하고 있었으며, 때문에 캐나다 태평양 철도회사를 설득하여 광산 입구까지 이르는 지선을 놓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계곡 밑바닥에서는--터틀산의 그림자가 정확히 드리우은 곳--프랭크의 회사가 회사 건물, 광부 숙소, 하숙집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곧 프랭크 마을로 성장해 갔다. 마을 이름은 능란한 수완가인 광산 회사 설립자의 이름은 딴 것이었다.
이 마을은 1901년 9월 10일 요란스러운 행사와 함께 공식적인 도시로 인정받았으며 1903년 봄에는 인구가 600명 이상으로 늘었다. 새로 온 사람들 가운데는 과거 행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말을 하려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성명을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터틀산에서 석탄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한 프랭크에서는 이들의 불확실한 배경 같은 것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 새로운 도시는 할리우드 서부 영화에서 금방 베껴 온 것 같은 떠들썩한 변경 지대 도시였다. 사교 생활의 중심은 호텔 술집이나 카지노였으며, 프랭크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센티널)의 표현에 따르면, 이곳에서 광부들과 목장주들이 바람둥이 처녀, 여장부, 응접실에서 노닥거리는 유한 마담들 과 함께 돈을 쓰고 여가 시간을 보냈다. 프랭크 사람들이 강인하고 거칠고 숙명론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들은 1903년 4월 29일 이른 시간에 도시를 덮쳐 이 도시의 이름을 역사책에 남게 만든 재난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판명되었듯이 인디언들이 터틀산을 쭉 피해 왔던 것은 옳은 일이었다. 유난히 가파른 동쪽 경사면, 그리고 석회암 정상의 상당한 균열 때문에 이 산은 지질학적으로 불안정했으며 산사태가 날 만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광부들이 회상에 따르면 터틀산은 몇 달 동안 불길한 조짐을 보였다. 산의 중심부까지 1.5km 정도 들어가는 광산 터널과 갱도에서는 밤이면 목재들이 신음 소리를 토했고 터널 벽들이 파도에 맞은 배처럼 움찔하면서 떨리기도 했다. 4월 28일 화요일 밤, 크로즈네스트 강둑 옆의 천막에서 살고 있는 늙은 사냥꾼 앤디 그리삭은 산에서 우르릉 거리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소와 송아지를 팔기 위해 계곡에 왔던 네드 모건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렸다. 그리삭은 잠을 자러 갔으며 모건은 자정 무렵 집으로 향했다.
수요일 아침 4시 10분 철도 제동수인 시드 초케트는 광산의 철도 측선에서 석탄 열차들을 화물차에 연결시키고 있다가 휘파람을 부는 듯한 독특한 소리를 들었다. 순간 직경 약 1km 크기의 거대한 석회암이 터틀산의 동쪽 면에서 분리되어 프랭크를 향해 굴러 내려왔다. 천천히 움직이는 열차 옆을 걸어가고 있던 초케트는 재빨리 승강구로 뛰어올랐고 기관사는 속도를 높였다. 기차가 가까스로 크로즈네스트강의 다리를 건너고 몇초 있다가 바위들이 덮쳐 다리를 쓸어가 버렸다. 열차 승무원들이 무력하게 지켜보는 가운데 9000만 톤의 석회암은 산의 경사면을 수직으로 떨어져 내려 약 3km 폭의 계곡 바닥을 가로질러 반대편 경사면을 122m나 굴러 올라갔다.
100초내에 모든 게 끝났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바위 산사태--그리고 바위와 공기의 마찰력--는 그것이 가는 길에 있는 거의 모든 물체와 사람을 파괴시켜 버렸다. 또한 광산 입구를 막아 17명의 광부들을 안에 가두어 버렸다. 바위 산사태는 광부들의 숙소와 야영지를 휩쓸어 버렸고 크로즈테스트강을 둑으로 막아 버렸다. 또한 캐나다 태평양 철도의 부분 부분을 30m 높이의 파편 더미 밑에 묻어 버렸다.
산사태는 프랭크의 남쪽 면을 완전히 없애 버렸으며, 도시 전체를 석회암 가루로 이루어진 두껍고 하얀 장막으로 덮어 버렸다.
굉음을 듣고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화산이 폭발하는 소리로 오인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빨리 수색대를 파견했다. 제임스 그레엄의 목장에서는 네드 모건에게서 산 암소 외에는 생명체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 암소마저 머리에서 뿔이 떨어져 있었다. 늙은 앤디 그리삭의 몸을 굴리자 머리 가죽이 가발처럼 떨어져 나갔다. 상인인 알렉스 레이치와 그의 아내 그리고 네 아들은 집이 무너지면서 그 밑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딸 둘은 그 파편 더미에서 살아나왔다. 그리고 셋째딸은 집에서 퉁겨져 나와 건초 더미 위에 누워 있었다. 구조대원들이 제임스 워링턴을 무너진 그의 침실에서 끌어낼 때 워링턴은 아래 쪽에 뭔가 물컹한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 물컹한 것은 이웃인 존 왓킨스 부인이었다. 부인은 바위 조각 사이에 끼여 있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산 속에 갇혔던 광부 17명도 살아 있었다. 구조대가 광산 입구를 막은 바위를 폭파해 뚫고 들어가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산사태가 난 지 13시간 만에, 광부들이 갑자기 산허리쪽으로 나왔다. 그들은 바위를 헤치고 길을 뚫고 나왔던 것이다.
프랭크 산사태로 적어도 7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도시의 인구는 계속 유동적이었으며 시체가 확인된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정확한 사망자 수는 알수 없다. 광산은 결국 다시 문을 열었으나 1905년에 대화재를 만나고 말았다. 3년 후, H.L. 프랭크는 그 재난으로 정신이상이 된 상태로 정신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18년 지방 감독관들은 마침내 광산을 영원히 폐쇄해 버렸다. 오늘날 약간 위치가 옮겨진 프랭크는 주민 수가 겨우 200명에 불과하며, 크로즈네스트 패스 지방자치 도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터틀산의 동쪽 면의 상흔과 계곡 바닥의 파편 더미는 이제까지 기록된 가장 큰 산사태를 생생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지진
미국의 파리 를 파괴해 버린 충격파와 들불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지 사회부 기자 존 배럿은 1906년 4월 17--18일 화요일 야간 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다. 배럿은 오전 5시에 일을 끝내고 두 기자와 이야기를 하며 마켓가로 나섰다. 아침 안개가 걷히고 햇빛이 비치면서 건물들 지붕이 환하게 빛났다. 이따금씩 지나가는 신문이나 우유를 실은 수레의 덜그럭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도시는 고요했다. 한 사람이 재담을 하여 다른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웃음소리가 멎었다. 배럿은 이렇게 썼다. 갑자기 우리 몸이 비틀거렸다. 마치 우리 발밑에서 땅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내려간 것 같았다. 순간 땅이 크게 흔들렸다. 우리는 구역질을 느끼며 땅에 엎어지고 말았다. 우리는 거리에서 몸부림을 쳤다.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나는 어리벙벙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적으로 커다란 건물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는 게 보였다. 이어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에 내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커다란 건물들이 손에서 비스킷이 으깨지듯 가루가 되고 있었다... 돌 조각이 폭우처럼 거리로 쏟아졌다. 유리가 깨지는 거칠고 날카로운 소리가 무시무시한 굉음 속에 묻혀 버렸다. 내 눈앞에서 거대한 처마 장식이 떨어지며 어떤 사람을 구더기처럼 짓누르고 있었다--겨드랑이에 도시락을 끼고 유니언 제철소로 일을 하러 가던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였다...15분이 지나서야 땅의 움직임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한 3분 정도 지속되었을 뿐이다. 다시 땅에 단단하게 발을 디딜 수 있을 것 같아 일어섰으나 되풀이되는 충격으로 다시 비틀거렸다. 그러나 이번의 충격은 좀 약했다. 뭔가를 붙잡으면 일어설 수는 있었다.
배럿은 여명처럼 어두컴컴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배럿은 전차의 철로들이 뽑혀 기괴하게 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또한 도로의 넓게 찢어진 상처 도 보았으며 전선들이 제멋대로 꼬여있는 것도 보았다. 어떤 전선들은 축 늘어져 파란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갈라진 틈에서는 물이 솟아나왔다. 깨진 관에서는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가스가 솟아올랐다.
남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것이 인간들이 고통을 못이겨 지르는 끔찍한 소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저 아래 빈민가에서는 집이 파괴되면서 잠자고 있던 가족을 덮치기도 했다. 또 저쪽에서는 하루 종일 불길이 치솟았다...바로 그게 다음에 찾아온 것이었다--사방에서 불이 났던 것이다. 격렬한 파괴의 파동은 횃불을 동반하고 온 것이었다--괴로움, 죽음, 그리고 치솟는 불길, 마치 어떤 불의 악마가 횃불을 들고 이곳저곳에서 날뛰고 있는 것 같았다.
역사가 60면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미국의 파리 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 대도시는 불길에 휩싸이고 있었다. 미시시피 강 서쪽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금융, 상업, 문화의 중심지인 샌프란시스코는 당시 국내외 무역에 있어서 뉴욕 다음가는 도시였으며 또한 초기의 대륙횡단 철도의 서부 종착역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또한 다양한 민족이 뒤섞여 45만의 인구를 이루고 있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곳은 미국인, 멕시코인, 스페인인, 이탈리아인이 뒤섞여 살고 있는 인종의 용광로였다. 또한 미국에서 가장 큰 중국인 집단 거주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또 어떤 이들에게는 사악한 도시였다--1000개의 술집과 위층에 침실 이 딸린 사치스러운 레스토랑들, 그리고 악명 높은 바바리해안이 있는 밤의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문화를 아는 신흥 부호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했다. 유럽에서 인기 오페라 가수들이 수입되어 왔다. 사교 시즌에는 사치스런 무도회가 열리기도 했다. 800개의 객실을 갖춘 마켓가의 팰리스호텔은 그 호화로움과 서비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물론 이 도시의 스타일과 번영은 대부분 그 지리적 특성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는 길이가 80km 가량 되는 반도의 북단에 자리잡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이 있고 동쪽으로는 샌프란시스코만과 선창들, 부두, 페리 정기 여객선들이 있었다. 높은 언덕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 중 한 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샌프란시스코는 거대한 단층과 인접해 있었다--북캘리포니아의 멘데치노곶에서 시작되어 대체로 캘리포니아주와 평행를 이루며 약 1300km를 달리는 산안드레아스 단층이 그것이다.
1906년 4월 18일 아침, 이 단층내에 축적된 압력과 긴장은 2차세계대전시의 모든 폭발물의 에너지를 능가하는 힘으로 터져 나왔다. 그 힘은 샌프란시스코의 북쪽 145km 지점의 해안으로 몰려들어 초속 약 3km 속도로 남쪽으로 땅을 가르며 내려갔다. 오전 5시 13분 그 충격파는 엄청난 힘으로 도시를 강타했다.
그날 아침 팰리스 호텔의투숙객 가운데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있었다. 카루소는 전날 밤 샌프란시스코의 그랜드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을 했다. 카루소는 나중에 지진이 일어나던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내 침대가 마치 배처럼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창밖을 보니 건물들이 흔들리고 커다란 돌조각들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나는 거리로 달려나갔다. 그날 밤 나는 딱딱한 땅바닥에서 잠을 잤다--그렇게 등걸잠을 자서 나는 아직도 다리가 아프다.
오전 6시 팰리스호텔 앞의 마켓가 건너편에 있던 우편전신회사의 책임자는 전국에 다음과 같은 첫 소식을 타전했다.
오늘 아침 5시 15분 지진이 발생하여 몇 개의 건물이 부서졌다. 우리 사무실 건물 역시 부서졌다. 사람들은 무너진 건물에서 사망자들을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다. 도시 전역에 화재가 발생했다. 몇 분마다 약간씩 진동이 있기 때문에 나도 사무실에서 나갈 작정이다.
지진이 일어난 지 30분 만에 50건이 넘는 화재가 발생했다. 전기가 흐르는 전선이 나무에 닿거나 빠져나온 가스에 불이 붙거나 난로들이 쓰러지면서 불이 붙은 석탄을 쏟아놓거나 하는 바람에 일어난 화재들이었다. 각각 따로 일어났던 수만은 불이 곧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대화재로 커졌다. 2--3시경에 번화가의 사업 지구는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초저녁에는 불길이 차이나타운에까지 번져 노브힐의 저택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목요일 새벽에는 바바리해안에 불이 붙었다. 치솟는 불기둥이 160km 떨어진 바다에서도 보였다. 강철 I--빔들이 녹았다. 은행의 은화들은 녹아 은괴가 되어 버렸다. 과열된 은행 지하 금고는 며칠 동안 열 수가 없었다.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면 지폐와 서류들이 불길에 휩싸일 것이기 때문이다.
13년간 샌프란시스코의 소방대장을 맡아 온 데니스 설리번은 80개의 소방서와 585명의 소방수를 거느리고 있었다. 설리번의 소방대는 전국에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소방대로 꼽혔으나 설리번은 자신의 소방대의 결함, 그리고 도시가 화재로 인해 직면한 심각한 위험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건물들의 90퍼센트는 완전히 목조이거나 벽돌로 외장을 한 목조였다. 그리고 이 도시의 소방 장비는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4월 17일 화요일 저녁, 설리번과 그의 아내는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설리번은 모임 장소를 떠나 두 건의 화재 진압 현장을 둘러보고 오전 3시 근처 소방서의 아파트로 쉬러 갔다. 5시13분 설리번은 침대가 흔들리고 벽돌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설리번은 어둠 속을 뛰어가 옆방 문을 열었다. 그러나 건물이 무너져 문 밖은 허공이었다. 설리번은 그대로 3층에서 소방차로 떨어지고 말았다. 설리번은 두개골, 갈비뼈, 팔, 다리의 골절로 고생하다가 일요일에 죽고 말았다.
설리번의 부하들은 초기에 화재를 진압하려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그들의 소방차와 말들은 쓸모가 없었다. 지하의 쇠로 된 주관과 수도 도관들이 지진으로 휘고 깨져 물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화재 현장 근처의 몇 개 안되는 물탱크는 곧 바닥이 나 버렸다.
오후 12시 45분 프레드릭 펀스턴 장군의 명령에 따라 극단적인 방법이 취해졌다--불길의 진행 방향에 있는 건물을 철거함으로써 불길을 잡으려 한 것이다.
글 지역의 고급 장교였던 펀스턴 장군은 초기에 화재를 진압하고 이재민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 연락을 취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했다. 펀스턴 장군은 권한은 없었지만 사실상의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금문교 근처의 군사 주둔지인 프레지디오에 주둔한 육군 병력 2000명을 동원하기도 했다.
재난이 일어난 후 첫 사흘간 도시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움직이면서 서로 밀고 당기는 사람들, 재산을 운반하는 사람들, 친척을 찾는 사람들, 먹을 것과 물과 피할 곳을 찾는 사람들, 탁 트인 안전한 공원을 찾아 밀려드는 사람들, 북쪽 해안을 빙 돌아 약 10km를 걸어 페리 하우스로 가는 사람들, 목격자들은 모두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기가 죽어 있었고 술이나 약에 취한 듯 생각에 잠겨 말없이 움직이고 있었다고 말한다. 작가 잭 런던은 (콜리어즈 위클리)에 이렇게 묘사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온 도시가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 폐허로 변하던 수요일 밤은 조용한 밤이었다. 외치는 소리나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없었다. 히스테리나 무질서도 없었다...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기 전에 수만 명의 집을 잃은 사람들이 밤새도록 피난을 갔다. 어떤 사람들은 담요로 몸을 싸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침구와 귀중한 가보를 들고 가기도 했다. 때로는 온 가족이 자신들의 재산의 무게로 내려앉을 것 같은 마차나 배달 수레를 말처럼 끌고 가기도 했다.
동시에, 흥분하여 구경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도시를 둘러싼 언덕 위에 서서 불이 번지는 것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고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심지어 피난민 가운데도 일종의 환희를 느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의 목격자인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친절하고 침착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나와 이야기를 나눈 백 명의 집 잃은 사람들에게서 나는 흐느끼는 소리나 애처로운 하소연을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대신 계산을 넘어 서로 도와주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혼란의 도가니 어딘가에는 24세의 미남 배우 존 배리모도 있었다. 배리모는 지진 직후 성프랜시스호텔을 나서는 것이 목격 되었으나 그 이후 이틀 동안 실종자의 명단에 올라가 있었다. 당시 배리모는 한 친구의 집에서 주연에 탐닉해 있었던 것이다. 배리모는 그후 주연에 빠져사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하룻밤 새에 거리와 공원은 집을 잃고 굶주린 엄청난 수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동안에 1000대가 넘는 열차에 실린 피난민들이 서던퍼시픽 철도를 통해 도시에서 피신했다. 철도 회사에서는 운임을 받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약 30만명의 집을 잃고 굶주린 사람들은 도시의 공원들로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잠잘 곳과 먹을 것과 위생 시설을 제공하고 병자와 부상자를 돌보고 죽은 자를 매장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군대는 하룻밤 새에 도시 곳곳에 천막을 쳤다. 첫 구조 열차는 지진 발생 후 19시간후인 수요일 자정에 도착했다. 적십자사는 그 보급품을 이용하여 24시간 음식을 제공하는 장소들을 개설하였다. 다른 보급 열차들이 그 뒤에 속속 도착했다. 철도는 그 기차들의 통행에 최우선권을 부여하였다. 병사들은 감옥의 조수들을 동원하여 무덤을 파도록 했다. 집을 잃은 아이들은 오클랜드의 임시 수용소에서 돌보았다.
펀스턴 장군은 목요일인 19일 오후에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불이 밴네스가 동쪽의 넓은 지역을 유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불길은 서쪽으로 번지며 밴네스로 향하고 있었다. 벤네스가는 구도시와 신개발 지역을 가르며 남북으로 뚫린 도로였다. 그 신개발 지역에는 15만명의 고소득층이 모여 사는 웨스턴 어디션이 있었다. 만일 불길이 밴네스가를 건너게 되면 샌프란시스코 전체가 불에 타는 셈이었다.
밴네스가는 이 도시에서 폭이 제일 넓었다--약 45m였다. 그것은 최후의 방어선이었으며, 논리적으로도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었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밴네스가의 동부에 있는 모든 건물의 거주자들은 서둘러 소개되었다. 파괴될 운명의 거주지를 따라 대포가 일렬로 늘어섰다. 군인들이 성냥과 등유 깡통을 들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적당한 장소에는 다이나마이트를 설치했다. 방화를 하고 폭약을 터뜨리고 포를 발사한 결과, 길이 16블록--1.6km--폭 46m에 걸쳐 도시에서 가장 좋은 새 집들이 폭삭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 덕분에 다가오는 불길과 밴네스가 서부의 건물들 사이에 폭 52m의 공간이 확보되었다.
금요일 오후, 파괴되지 않은 밴네스가의 서쪽 부분으로 불길이 아주 가깝게 접근했다. 집의 페인트 칠이 녹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바람이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불길은 멀어지고 벤네스 저지선은 성공했다. 다른 곳에서는 아직도 불이 위험하게 타오르면서 부두로 접근해 샌프란시스코의 경제적 생명선인 선창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도시의 소방차들이 만에서 소금물을 길어 올릴 수 있었다. 또한 해군 소방선도 도와준 덕분에 소방대는 불길을 잡을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마지막 불길은 4월 21일 토요일 아침 7시 45분에 진화되었다.
이제 지진과 사흘 낮 사흘 밤의 화재로 인한 사망자 수를 헤아리고 피해를 결산할 시간이 왔다. 샌프란시스코 지진의 사망자 수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추정치도 각기 달랐다. 대략 500명이 깔리거나 갇히거나 불에 타 숨진 것 같았다. 그 외에 350명이 실종되었으나 발견되지 않았고 415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시의 중심부는 폐허가 되었다. 512개의 블록에서 2만 8188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사업 및 상업 지역 전체가 파괴되었다. 좀 크다 싶은 소매상들은 전부 불에 탔다. 단 하나의 은행 건물만이 심한 피해를 면했다. 마켓가는 숯이 된 목재, 뒤틀린 쇠, 깨진 유리, 벽돌 더미에 묻혀 좁은 오솔길이 되어 버렸다. 국민학교 건물 29개동이 파괴되었으며 44개동이 손상을 입었다. 거의 도시의 4분의 3을 재건축하거나 광범위하게 수리하여야 했다. 보험금 요구는 총 2억 2900만 달러에 달했는데 이것은 1988년 시가로 환산하면 30억 달러에 가까운 액수다. 이것 외에 보험에 들지 않은 재산이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으로 큰 지진을 겪은 높은 강철 구조물들은 잘 견뎌냈다. 이 건물들은 소수의 부상자만 내고 상대적으로 가벼운 손상을 입었다--그것도 대부분이 화재에 의한 것이었다. 최악의 파괴는 인공 육지 , 즉 만의 습지에 흙을 채워 만든 지역에서 발생했다. 건물이 가장 쉽게 무너진 곳은 그 지역이었다.
화재는 진화되었지만 엄청난 곤경이 여전히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천 명의 피난민들이 다시 도시로 밀려들어와 지속적인 대규모의 구조 사업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급수 탱크에 물을 길어 올릴수가 없었다. 만 3000채 이상의 주택의 수도 꼭지가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주관에서 상수와 하수가 섞여 버렸다. 굴뚝의 안전 점검을 하기 전에는 어느 집에서도 불을 피울 수가 없었으며, 집을 검사하기 전에는 가스와 전기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모든 조리는 야외에서 해야 했다. 조리 기구는 계속 부족했다.
그럼에도 회복과 재건은 즉시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 시민들이 샌프란시스코를 재건하는 데 보여준 그 정신만큼 샌프란시스코에 어울리는 것은 없었다. 일꾼들은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을 계속 일하여 파편들을 치웠다. 그 대부분은 얕은 만에 버려졌으며 시간이지나 그 매립지는 원래의 해안선을 계속 밖으로 밀어내며 확장되었고 그곳에는 주택 단지들이 들어섰다. 사업은 일주일내에 재개되었다. 두 달 안에, 8000동 이상의 이재민 주택 --긴 나무 막사--이 세워졌다. 각 막사에는 여섯에서 여덟 가구가 들어갔다. 군대는 7월 1일에 일을 끝낼 수 있었다. 7월 5일 술집들의 영업 재개가 허용되었다. 급식소는 8월 1일에 문을 닫았다. 전국 및 해외(중국 황후가 보낸 4만5000달러, 일본 적십자사가 보낸 24만 5000달러 등)에서 보내온 900만 달러 이상의 성금이 구조 사업에 도움을 주었다.
1907년 봄이 되자 파편들은 거의 사라졌다. 세번째 해가 끝날 무렵에는 엄청난 건설 불이 일어 2만채의 좋은 새집들이 지어졌다. 건축 자재 공장들은 2교대로 일을 해 나갔다. 석공들은 하루 8시간 일하고 12달러--보통 임금의 3배가 넘는 액수였다--씩이나 받았다. 어떤 석공들은 하루 18시간 일을 했다.
1905년, 샌프란시스코는 10년 뒤에 대규모의 파나마--태평양 박람회를 개최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 샌프란시스코는 예정대로 개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대지진 며칠 뒤, 이 도시에 살고 있던 뉴욕 신문의 기자는 샌프란시스코의 운명에 대해 이렇게 개탄했다.
샌프란시스코는 재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금문교 옆의 그 독특한 도시를 알고 있는 사람들과 아라비안 나이트의 맛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가 절대로 예전과 똑같은 도시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 기자의 슬픔은 정말 절절한 것이었지만 때 이른 한탄에 불과했다.
산안드레아스 단층
지구의 표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단층들로 봉해져 있다--이곳은 지각의 운동이 일어나는 골절 부위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단층들은 과거 지속적으로 바위가 형성되던 때 바위간에 단절이 생겨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산안드레아스 단층은 지구의 외각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개의 두껍고 딱딱한 판 가운데 두 개가 만나는 불안한 지점이다. 단층의 동쪽으로는 북아메리카판이 캘리포니아 거의 전체를 따라 1300km 가까운 길이로 놓여 있다. 서쪽으로는 태평양판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로스앤젤레스나 샌디에이고와 같은 도시들이 서 있다.
북아메리카판은 이 단층을 따라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남동쪽으로 움직은 반면, 태평양판은 북서쪽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층의 일부분에서는 두 판이 서로의 위에 겹쳐져 아무 일도 안 일어나기도 하며, 1년에 5cm씩 움직이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지난 1500만 내지 2000만 년 동안 그런 움직임을 다 합치면 적어도 563km에 달한다고 추정한다.)
시베리아를 덮친 수수깨끼의 불덩이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은 원인
그 사건은 1908년 6월 30일 아침에 발생했다. 우주 공간에서 뭔가 날아와 중부 시베리아의 숲 위에 눈부신 섬광을 발하며 폭발하였다. 그 결과 믿을 수 없을 만큼 파괴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강력한 폭발은 TNT 3000만톤의 폭발력과 맞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원인은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그런 재난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나갔다. 폭발이 일어났던 이 외딴 직역은 일년 중 8개월 동안 겨울의 혹한에 사로잡혀 있으며 순록을 모는 퉁구스족 외에는 사람도 살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광범위한 파괴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대사건에 대한 기사는 오직 지방 신문에만 실렸을 뿐이다. 한 기자의 말에 따르면, 불 같은 모양의 천체가 하늘을 가로질러 나타났다.
너무나 의외로 또 너무나 빠르게 닥친 것이라 그 크기나 형태는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러 마을의 많은 사람들은 그 비행 물체가 지평선에 닿는 순간 거대한 불길이 치솟으며 하늘이 둘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공중에 가득했으며 격렬한 진동이 땅을 흔들었다. 기자는 사람들은 땅이 입을 벌리고 모든 게 그 심연 속으로 삼켜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폭발의 근원이 눈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미신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고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 날 저녁 북반구 전역에 걸쳐 이상한 밝은 밤 즉 백야현상이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어떤 사람은 한밤중에도 밖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1시 15분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 시간에도 빛이 아주 강해 나는 내 방에서 그 빛으로 아주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1시 45분에는 하늘 전체가..연어살 같은 분홍빛이 되었다.
백야현상은 두 달 동안 계속 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폭발하는 불덩이와 연관시키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유난히 밝은 북극광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 밝은 빛에는 북극광 특유의 깜빡거림이 없었다. 1930년에야 한 영국 기상학자가 퉁구스카 폭발로 인해 수백만 톤에 이르는 대기의 먼지가 거대한 반사경처럼 햇빛을 반사하여 밤하늘에 빛을 비춘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레오니드 A. 쿨릭이라는 젊은 러시아 과학자가 없었더라면 그런 사실조차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1921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는 쿨릭에게 운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쿨릭이 막 시베리아 탐사 여행을 떠나려 할 때 한 동료가 1908년 신문에서 스크랩한 기사를 건네주었다. 그것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타고 있던 승객들이 커다란 운석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기사였다. 그러나 쿨릭이 운석 충돌 위치를 확인 했을 때 이른 겨울이 시작되는 바람에 그 지역에는 접근할 수가 없게 되었다. 몇 년이 흐른 뒤에야 쿨릭은 2차 탐사를 준비할 수 있었다.
1927년 쿨릭은 그 지방 퉁구스인과 파괴 지역으로 들어갔다. 쿨릭은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 전체 모습은 너무 웅장해 쉽게 파악하기 어렵다. 우리가 관찰한 지점에서는 숲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모든 게 황폐화되고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이어 몇 주 동안 쿨릭은 육중한 운석의 잔해를 발견하기를 기대하며 파괴된 지역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발견한 것은, 파괴 지역의 거의 정중앙 근처에는 비록 가지가 다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나무들이 그대로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폭발은 나무들 바로 위에서 일어났으며 나무들을 죽이긴 했지만 쓰러뜨리진 않은 것이 분명했다. 계속해서 광범위한 탐사를 한 끝에 쿨릭은 자신이 앞으로도 운석이나 운석이 떨어진 분화구 형태의 자국은 발견할 수 없을 것임을 확신했다. 비록 쿨릭 자신이 일어난 일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못했지만 외딴 시베리아에서 일어난 신비스러운 대사건에 대해 다른 과학자들의 주목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쿨릭이 살았던 시대 이후 이 파괴를 설명하기 위해 놀랄 만큼 많은 이론들이 제시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이색적인 것에 속하는 것은 그것이 외계인의 우주선에서 발생한 핵폭발로 야기되었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두 주장도 마찬가지로 상상력의 비약을 요구한다. 하나는 작은 블랙홀, 즉 먼지 알갱이만한 블랙홀이 퉁구스의 땅에 부딪혀 지구를 쭉 관통한 다음 북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는 주장이다. 블랙홀이란 노쇠한 별이 내부로 함몰하여 붕괴할 때 형성되는 것으로 그 중력은 너무 강해 심지어 빛조차도 그 중력을 이기고 빠져나오지 못한다. 블랙홀이 지구를 통과해 지나갔다면 이론적으로는 숲을 파괴할 만큼 강한 충격파를 방출했을 수도 있다.
두번째 이론은 그 피해가 별 사이의 반물질 덩어리가 지구에 떨어져서 생긴 것이라는 주장이다. 반물질이란, 요컨대 보통 물질이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보통 물질과는 반대의 전기 부하를 가지고 있다. 반물질의 분자가 그에 상응하는 물질의 분자와 만나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를 폭발시키며 둘 다 소멸하게 된다. 그런 폭발이 시베리아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좀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는 설명은, 지구를 향해 곤두박질치던 혜성이 대기와의 마찰로 인해 일어나는 엄청난 열 때문에 공중에서 폭발했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어떤 과학자들은 쿨릭의 원래의 가설을 약간 바꾼 것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그것은 퉁구스의 불덩이는 돌로 이루어진 운석, 또는 더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소행성이 지구 위 3--5km 상공에서 폭발하여 발생한 것인데, 그 열이 너무 강해 소행성 자체는 증발해 버리고 그 밑의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다는 가설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혜성이든 소행성이든 아니면 아직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은하계를 떠도는 어떤 방랑자이든 그 물체가 우주 공간에서 온 것임은 틀림없다. 최근 폭발에 의해 남겨진 것으로 보이는 현미성 조각들을 분석한 결과 중금속 원소인 이리듐 등의 물질이 주성분으로 밝혀졌으며, 이것은 그 기원이 외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1908년과 1909년에 남극 대륙에 덮인 얼음을 분석한 결과, 여기에도 유난히 많은 우주의 이리듐이 축적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이리듐은 퉁구스 폭발로 성층권으로 올라간 먼지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남극 대륙에서 발견된 이리듐의 양에 기초하여 볼 때 폭발한 물체의 무게는 700만톤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베리아 불덩이의 수수께끼는 앞으로도 풀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약간의 생각할 소재를 제공한다. 만일 그런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만일 다음 번에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만일 다음 번에는 그러한 폭발이 길도 없는 시베리아의 황무지 위에서가 아니라 지구의 어떤 분쟁 지역에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에 있던 해당 국가는 그것이 핵공격이라고 믿고 똑같이 반격하여 전세계가 멸망의 위험에 직면하게 되지는 않을까? 그러한 전망을 해 보면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메시나의 지진
잠자는 동안에 무너져 버린 시칠리아의 고도
메시나 논 에시스테 피우! 메시나에서 일어난 사상 최악의 지진에서 살아남은 겁에 질린 로시나 칼라브레시는 자신이 방금 겪은 시련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그렇게 소리쳤다. 메시나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08년 12월 28일. 운명의 시간인 오전 5시 20분, 동트기 전의 아침 날씨는 쌀쌀했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 진동은 몇 분 안에 도시 건물의 90퍼센트 이상을 무너뜨려 잠자고 있던 주민 10만명 이상이 죽었다. 며칠 뒤, 안전한 로마에서 로시나와 그녀의 아들 프란체스코는 모드 호라는 이름의 미국 기자에게 그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프란체스코의 말은 이러했다. 세 번의 긴 충격이 있었다. 땅은 마치 괴로운 듯 좌우로 흔들리며 신음을 토했다. 집이 우리 근처로 쓰러졌지만 우리는 다치지 않았다. 거리고 통하는 문은 움직이지 않아 열수가 없었다. 나는 문 근처의 벽에 조그만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 그리고 빠져나가 다른 사람들도 나오도록 도왔다.
로시나는 몸을 떨며 그날 아침의 끔찍한 일을 회상했다. 어둡고 추웠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오, 말도 말아, 어찌나 비가 많이 내리던지!
프란체스코와 그의 임신한 아내, 로시나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이들의 두 손자들은 야외에서 이틀을 보냈다. 러시아 선원들--프란체스코는 그들을 천사들 이라고 묘사했다--은 그 가족에게 음식과 의복을 주고, 그들의 군함에 태워 본토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리히터 지진계로 7.5를 기록한 이 지진의 진원지는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장화의 발가락 사이에 있는 메시나해협의 소용돌이 치는 물 아래 깊은 곳이었다. 그곳으로부터 파괴의 반경은 시칠리아와 본토까지 몇 킬로미터나 확대되어 갔다.
이 재난에서 메시나 시민이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칼라브레시 가족들처럼 수천 명이 폐허로부터 기어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몇 분 뒤 8m 높이의 쓰나미, 즉 지진으로 인한 파도가 도시를 덮치는 바람에 죽고 말았다. 이 쓰나미는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내고 물러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시의 가스관이 갈라져 도시에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타 죽고 말았다. 당시의 사망자는 메시나에서 9만명, 본토의 레지오디칼라브리아시에서 4만명으로 추정되었다. 그 외에도 메시나 해협의 양쪽 해안에 있는 도시와 마을들에서도 2만 7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근의 추정치는 사망자 총수를 약 12만명으로 잡고 있다.
호는 로시나의 재난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구조된 사람들이 대부분 노동계층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어, 로시나의 남편은 은퇴한 우편배달부였다. 프란체스코는 배관공이었다. 호의 말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났고 작은 집에 살았다. 부자들이 사는 궁전 같은 커다란 집들은 그들 대부분에게 치명적인 죽음의 덫이 되고 말았다.
사실 메시나의 웅장한 대저택들과 공공 건물들은 지진의 충격을 견딜 장비를 거의 갖추고 있지 못했다.(과거에도 지진이 메시나 지역을 몇 번 강타하긴 했지만--1783년에는 지진으로 도시가 거의 소멸되다시피 했다--이 지역 건축가들은 1908년 메시나 재건이 시작되고 나서야 비로소 대비책을 세우게 되었다) 벽들은 지나치게 높고 또 너무 얇았다. 또한 대부분 자갈과 잡석에 품질이 나쁜 시멘트를 섞어 벽을 세우고 겉에는 벽돌이나 돌을 발랐다. 땅이 진동하자 대충 지은 석조 건물들은 모두 무너졌다. 건물들이 거리로 무너져 내려 석고 가루가 피어 오르는 바람에 생존자들은 눈과 코와 목이 막혔다. 도시의 커다란 건물들--오래된 성당, 군사 병원, 육군 막사, 관광호텔--이 무너져 내리면서 주위의 초라한 건물들까지 함께 무너졌으며 수백 명의 사람들이 엄청난 파편 더미에 묻히게 되었다.
이 도시를 찾아왔던 외국 방문객들은 메시나의 혼란에 대해 좀더 실감나게 묘사했다. 트리나크리아호텔에 머물고 있던 런던 선박중개상 콘스탄틴 도레사는 갑자기 주위가 흔들리는 바람에 잠이 깨서 즉시 침대의 양옆을 움켜쥐었다. 침대는 텅빈 공간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그때 일련의 끔찍한 붕괴가 일어나면서 지붕이 내 주위로 떨어져 내렸다. 나는 벽돌과 석고에 숨이 막혔다. 나는 손으로 더듬어 성냥불을 켰다. 순간 내 침대가 심연 가장자리에 걸려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도레사의 동료는 한 스웨덴 부부와 함께 시트를 매듭으로 연결하여 부서진 건물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도레사는 나중에 러시아 선원들과 웨일스 기선의 승무원들과 함께 로프와 사다리를 가지고 다른 호텔 투숙객들을 구조하는 것을 도왔다.
한 뉴스 속보는 목격자 디 루볼리토 후작이 한 말을 근거로 지진 후의 메시나의 참담한 광경을 이렇게 그려냈다. 이곳에서 목격되는 광경은 줄 베르느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그가 목격한 끔찍한 광경들 가운데는 집이 무너져 내린 잡석 더미 위에 우산을 쓰고 모여 앉은 반쯤 미친 가족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냥 폐허 속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부상을 당한 난타체의 생존자들이 멍한 표정으로 파편으로 이곳저곳이 막힌 도시의 겨울길을 비틀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이 흔히 목격되었다. 약탈자들 역시 거리를 배회하며 가게와 창고를 약탈하고 죽은 시체를 훼손했다. 선량한 시민들도 어쩔 수 없이 음식과 물과 의복을 약탈하는 경우가 있었다.
후작을 비롯한 목격자들은 이런 슬픈 광경에 대해 예리하고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많은 영웅적 행동과 자선행위에 대한 기록도 남겼다. 가까이 있던 영국, 이탈리아, 러시아의 해군 선박들은 몇 시간내에 도움과 보호의 손길을 뻗었다. 특히 러시아 해군은 구조 활동뿐 아니라 약탈자들을 막는 데도 용감하게 나서 감탄을 자아냈다. 그런 놀라운 구조 활동의 이야기 가운데는, 러시아 순양함 사령관이 잡석 더미 밑에서 두 아기를 무사히 구조해 낸 이야기도 있다. 그 사령관은 이렇게 쓰고 있다. 두 아기는 아주 편안해 보였다. 아기들은 자기 옷의 단추를 가지고 놀며 웃고 있었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메시나 근처에 미국 선박은 없었지만, 로마의 미국 구조 위원회는 독일 정기선 바이언호를 세내, 1월초에 1주일 동안 폐허가 된 지역을 돌아다니며 생존자들에게 물자를 나누어 주고 의료혜택을 베풀었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재난을 면한 이탈리아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구호 자금이 쏟아져 들어왔다. 12월 30일, 이탈리아의 왕 빅토르 에마누엘과 왕비 엘레나가 메시나에 와서 직접 구호 작업에 참여했다. 호의 말에 따르면 왕비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앞치마를 두르고 나서서 환자와 부상당한 생존자들을 간호했다. 호가 감탄하며 기록한 대로 왕비는 그 어두운 시간에 이탈리아를 위해 일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열심히 일했다.
미국 북서부의 큰 산불
3개 주에 걸쳐 수백만 헥타르를 태워 버린 불길
온몸이 검댕으로 뒤덮인 키가 큰 미국 산림 순찰대원 에드 펄래스키는 오래전에 폐광된 광산 워이글터널의 출구를 막고, 누구든 그가 서있는 곳을 지나가려 하는 사람은 총으로 쏘아 버리겠다고 단호하게 위협하고 있었다. 축축하고 어두운 광산 수갱에 그와 함께 갇힌 44명은 항의하였으나 펄래스키는 땅에 굳게 버티고 서 있었다. 충혈된 눈은 손에 든 장전된 권총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터널 입구 바로 위의 숲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펄래스키는 절망적인 상태에서 도박을 하여 자신의 소방대원을 광산 안으로 몰고 들어와 있었다. 펄래스키는 그들이 들어와 있는 바위 안식처도 결국은 죽음의 덫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바깥의 불지옥으로 뛰어들게 되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것이 틀림없다는 것 또한 확실한 사실이었다.
날짜는 1910년 8월 20일, 장소는 아이다호주북부의 커덜레린 국유림, 미로를 이루고 있는 이 지역의 험한 상 정상들은 침엽수 숲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오랜 세월 동안 에메랄드 빛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10년 여름, 산비탈들은 바싹 말라 먼지가 일고 있었다.--4월초부터 시작된 가뭄 때문이었다. 첫불길은 4월 29일에 일어났다. 6월초가 되자 몬태나에서 아이다호를 거쳐 워싱턴 동부까지 산불이 붙었다.
그때 막 창설된 미국 산림청의 지방 순찰대원들은 5월에서 6, 7월에 이르기까지 불길이 솟을 때마다 불길과 싸움을 했다. 평소 내리던 봄비도 내리지 않았다. 7월이 되자 오히려 거대한 검은 천둥 구름이 뭉치더니 바싹 마른 나무에 마른 번개가 쳐 더많은 불을 일으켰다.
한여름이 되자 너무 많은 불이 나는 바람에 산림청에서는 임시로 직원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간단한 장비--도끼, 삽, 톱, 곡괭이--를 갖춘 이들은 불길을 저지하기 위해 주위에 참호를 파기도 하고 방화선을 만들기 위해 나무들을 잘라냈다. 그 결과 약 3000개의 작은 불이 꺼졌으며 90개의 큰 불의 불길이 잡혔다. 그러나 8월초 불길이 새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8월 8일,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은 군에 대기 명령을 내렸다.
공중에는 연기가 자욱하고 하늘에 걸린 해는 심홍색으로 변해 있었다. 모두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8월20일 토요일 오후에는 이 지역의 허리케인에 해당하는 치투크라는 바람이 남서쪽으로부터 시속 112km의 속도로 접근해 왔다. 불길의 거대한 전선--28km길이로 추정되었는데--이 쏜살같이 산들을 가로질러 오며 모든 것을 태워 버렸다.
동원할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소방대원으로 등록시켰다. 에드 펄래스키도 그렇게 해서 소방대원이 된 사람이다. 그는 아이다호주 월러스에서 북쪽으로 16km 정도 떨어진 숲에 있었던 소방대원들의 대장이었다. 그리고 펄래스키는 8월 20일 밤 바로 그 지역의 버려진 광산에서 부하들의 안전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지역 광업과 상업의 중심지인 월러스에서는 주민들이 걱정스럽게 하늘이 노란색으로 괴상하게 변하는 것을 비켜보고 있었다. 지역 산림청 감독관인 윌리엄 G. 위글은 커다란 재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눈치채고 철도 회사에 연락하여 만일의 경우 주민을 소개할 수 있도록 열차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을을 빠져나가는 최선의 길은 철로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길마저 곧 차단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깊은 협곡에 놓인 다리들은 대부분이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월터 핸슨 시장도 위글의 상황 평가에 동의했다. 오후 6시, 불길이 월러스로 쳐들어오자 핸슨시장은 소방대장에게 주민 소개를 알리는 종을 치라고 했다. 동시에 몸을 움직일 수 있는 남자들은 모두 남아 불과 싸우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 도시의 가장 저명한 인물들은 기다리고 있던 기차로 달아나고 말았다. 하지만 겁쟁이는 소수였고 용기있는 사람들은 많았다. 펄래스키는 불길이 너무 강렬해져 더이상 싸워 봤자 소용이 없을 때까지 싸웠다.
다른 수천 명의 소방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의 가족들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니 그들의 죽음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21일 새벽, 펄래스키 소방대의 주방장 프랭크 폴츠가 월러스에 도착했다. 거의 벌거벗고 반쯤 죽은 상태였다. 그의 목소리마저 불에 그을려 알아듣기 힘든 쉰 목소리만 나왔다. 그럼에도 펄래스키와 그의 대원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에마 펄래스키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는 남편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펄래스키가 대원들과 함께 갇혀 있는 워이글터널 부근의 연기가 걷혔을 때 다섯 명이 질식해 죽은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나 나머지는 안전했다. 산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광산의 축축한 바닥에 펄래스키의 움직이지 않는 형체가 보이자 동료들에게 말했다. 밖으로 나가세, 대장은 죽었어. 죽다니, 무슨 소리. 펄래스키가 쉰 소리로 말했다. 펄래스키는 부하가 그의 죽음을 선언하는 순간에 의식을 회복한 것이다.
다음날 에마 펄래스키는 화재를 피한 자신의 집 창 밖을 내다 보다가 두 남자가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에드였다.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살아 있었다. 펄래스키는 시력은 회복했지만 건강은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1910년에 발생한 대화재의 민간인 영웅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 1910년의 화재는 기적적으로 85명의 목숨밖에 앗아가지 않았다. 그 가운데 78명이 소방수였다.
화재는 마침내 8월 22일 자정 직후에 끝이 났으나 산림 약 120만 헥타르가 완전히 파괴되었고 1417만 3200 입방평방미터의 목재가 전소되어 버렸다. 나라 전체가 그 엄청난 손실을 벌충하기 위한 행동에 나섰다. 1년 내에 의회는 산림 보호를 위해 연방 지원을 제공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아이다호의 산림은 수십년이 흐른 후에야 그전의 장엄한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그 비극을 보도하면서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인간의 인내심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불길과 싸웠다. 펄래스키와 그의 동료 순찰대원을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덧 붙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캐나다의 포큐파인 화재
불이 마을을 삼켰다. 이것은 1911년 7월 11일 캐나다 온타리오의 포큐파인 지역에서 보낸 전신의 마지막 메시지였다. 불과 1년 전, 정착민들은 역사상 가장 풍요한 금광을 찾아 빽빽한 산림 지대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 황금 열병은 사우스 포큐파인, 골든 시티, 포츠빌 등 다채로운 변경 마을들을 창조했냈다. 그런데 불과 5시간의 불폭풍우로 말미암아 이 정착촌들은 파괴되어 불에 그을린 황폐한 땅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 두 달 동안, 이 지역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긴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다. 7월 10일에는 메마른 공기가 41도씨까지 올라갔다. 산불의 연기는 태양을 가려 버렸다. 이어 7월 11일 한낮, 정착민들은 엄청나게 큰 굉음을 들었다. 순간 하늘이 한밤중처럼 깜깜해졌다. 허리케인의 위력을 지닌 바람에 내몰린 불은 32km에 걸쳐 말발굽 모양의 전선을 형성하여 때때로 공중으로 45m씩이나 솟아오르면서 시속 13km의 속도로 질주했다. 여자와 아이들은 재빨리 선박을 이용해 사우스 포큐파인을 떠났다. 남은 사라들은 대열을 지어 물통을 날랐으나 기온은 47도씨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그들은 살기 위해 소용돌이치는 물로 뛰어들었다.
어두워질 때까지 적어도 38만 헥타르, 즉 2015평방킬로미터의 삼림이 파괴되었다. 그날 물의 증발로 인해 포큐파인 호수는 수심이 60cm가 줄었다. 공식적인 인명 손실은 73명이 었으나, 주민들은 숲속에 들어가 있던 탐광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200명에 달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타이타닉호의 최후
처녀 항해에 나섰다가 빙산에 침몰당한 세계에서 제일 큰 배
나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어떤 조건도 상상할 수 없다...현대의 조선 기술은 이미 그수준을 넘어섰다. 이것은 영국의 가장 저명한 항해자 가운데 하나이자 장차 기선 타이타닉호의 선장이 될 에드워드 J. 스미스가 1907년에 한 말이다. 5년뒤, 정기여객선 브레멘호가 북대서양 먼 바다에서 뉴욕을 향해 서쪽으로 항해하고 있을 때, 유보 갑판을 거닐던 한 승객이 대양의 바다 위에 조용히 떠다니는 수많은 물체들--그게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았지만--을 보고 다른 승객들을 불렀다. 브레멘호가 그 현장으로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갑판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선실로 돌아가 울거나 말을 잃고 앉아 있었다. 배가 그 말없는 잔해들을 지나가게 될 때, 갑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갑판 저 밑으로 보이는 게 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브레멘호는 구명 조끼를 입은 채 차가운 바다속에서 숨져 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시체들은 닷새 전인 4월 15일, 4만 6000톤의 타이타닉호가 바다 밑의 영원한 어둠 속으로 시속 4km의 속도로 하강을 시작할 때 빠져 나온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브레멘호의 한 승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잠옷만 입고 아이를 부둥켜 안고 있는 한 여자의 시체를 보았다. 그 옆에는 개를 껴안고 죽은 다른 여자의 시체가 있었다...남자 셋이 함께 모여 의자 하나를 꼭 움켜쥐고 있었다. 바로 그 너머에는 여남은 명의 남자들 시체가 있었다. 모두 구명 조끼를 입고 서로 필사적으로 부둥켜 안고 있었다. 마치살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인 것 같았다.
1909년 봄 타이타닉호를 건조하기 시작할 때는 그런 종말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타이타닉호는 인간이 움직이게 만든 가장 큰 물체로 알려져 있었다. 사실 벨파스트의 동굴 같은 조선소에서 소문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 통계치들은 엄청나 보였다. 그 새로운 거물 밑에 깐 선박 지탱용 포장 바닥은 평방 인치당 2톤이 넘는 무게를 받치고 있었다. 100톤이 넘는 방향타 하나만도 완전히 자란 느릅나무 하나만한 크기였다. 159개의 화실은 마일당 2톤의 석탄이 필요했다. 완성된 배는 건물 11층 높이에 도시 네 블록 정도 되는 길이를 가지게 될 예정이었다. 일단 이 5만 마력의 경이로운 배가 움직이게 되면 거의 1000명에 가까운 승무원들이, 2500명 이상 수용되는 승객들의 요구와 변덕에 비위를 맞추며 시중을 들게 될 예정이었다. 아마 가장 만족스러운 통계치는 16개의 방수구획실이었을 것이다. 이것들은 함교에서 전기 스위치만 누르면 몇 초내에 떨어져 내리는 비상문들로 격리되어 있었다. 비록 타이타닉호가 타블로이드판 신문들이 말하는 대로 침몰 불가능한 배는 아니었을는지 몰라도 안전도가 높은 배였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화이트스타 해운회사가 이 새로운 정기선을 건조하면서 세웠던 주된 목표는 승객의 안전이었다. 고액의 요금을 지불하는 승객들을 위해 타이타닉호에는 고급 레스토랑 시설뿐만 아니라 파리풍의 노천 카페도 있었으며 저녁 식사하는 사람들을 위해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세 명의 탁월한 음악가도 대기시켜 놓았다. 가장 좋은 스위트룸은 값비싼 가구에 아름답게 장식된 떡갈나무 판자벽을 갖추어 편도 최고 4350달러(오늘날의 4만달러에 가깝다)의 요금에 걸맞는 시설이었다. 타이타닉호는 수영장을 갖춘 최초의 배였다. 또한 21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들이 웅장한 계단을 비추었고 일등 선실의 모든 목욕탕에는 시가 받침대가 갖추어져 있었다. 전기 감자 깎기 덕분에 식기실 승무원들은 약간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체육관에는 독일제의 최신형 운동 기구들이 설치됐다. 아마추어 사진 작가들은 필름을 현상할수 있는 암실도 갖추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하였다. 심지어 아래쪽 갑판에 탈 1000명 정도의 3등 선객들에게도 보다 나은 편의 시설이 제공될 예정이었다.
규모, 설계, 편안함, 안전 등 어떤 기준에서 보더라도 타이타닉호는 의문의 여지 없이 이제까지 건조된 가장 훌륭한 배였다. 이렇게 해서 1912년 4월 3일 대영제국의 새로운 거인은 사우샘프턴의 44 정박장으로 다가가게 되었다. 4월 10일에 닻을 올리고 대양으로 출항 준비를 하면서 2등 항해사 찰스 H. 라이톨러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배가 영국 선박계가 이제까지 들었던 가장 훌륭한 평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항해가 계속됨에 따라 배에 대한 감탄은 매일 늘어만 갔다. 타이타닉호가 점차 본격적으로 움직임에 따라 그 가동되는 방식, 진동이 전혀 없는 상태, 계속 속도가 증가함에도 흔들림을 느낄 수 없다는 것 등에 대해 칭찬이 자자했다.
가까스로 타이타닉호의 첫 항해의 탑승권을 끊을 수 있었던 사교 칼럼니스트들은 일등 선실로 여행하는 부유하고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과 선내 활동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금방 수첩을 채워 버릴 수 있었다. 그 가운데는 광산업계의 거물인 벤저민 거겐하임이 있었고 최근에 이혼을 하고 새로운 10대 신부인 매들린에게 유럽을 구경시켜 주기 위해, 저명인사들에 관한 잡담 거리를 찾는 연예기자들을 뒤로 하고 온 존 제이콥 에스터도 있었다. 코스모경과 더프 고든이 영국 귀족을 대표하였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보좌관을 지낸 후 이제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 밑에서 일하고 있는 위세당당한 아치볼드 버트 소령이 미국 정계를 대표하고 있었다. 백만장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하나는 이시도 스트라우스로, 그는 메이시 백화점 사장인 동시에 40년 이상 함께 살아 온 아내 아이다 스트라우스에게 헌신하는 남편이었다. 콜로라도 덴버의 마거릿 토빈 브라운 여사도 마찬가지로 눈에 띄었는데 브라운여사는 솔직한 태도, 분명한 의견, 세련된 커다란 모자로 주목을 끌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몰리로 불리는 브라운여사는 곧 침몰 불가능한 몰리 브라운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유명해질 운명이었다. 가장 바쁜 탑승자들 가운데 하나는 토머스 앤드루스로 그는 타이타닉호를 건설한 회사의 관리였는데, 배의 개선점을 메모하면서 보내는 것 같았다. (유보 갑판에 짙은 색 목제품이 너무 많다. 일등 선실 모자걸이에 나사가 너무 많다 등등) 이런 결점들은 여객선이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고칠 예정이었다.
4월 14일 일요일 아침, 타이타닉호는 일간 항속을 거의 880km로 높였다. 아마 런던에서 온 젊은 과학 교사인 로렌스 비슬리 보다 이 여행을 더 즐긴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비슬리는 대서양 위의 공기가 점점 쌀쌀해지는 가운데 아주 독실한 영국인 성직자 어니스트 카터와 배의 도서관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런던의 가장 황량한 빈민가 한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카터는 저녁 8시 30분에 예정된 찬송가 합창 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2등 선실 식당에서 열릴 이 모임은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었으며 카터 목사가 지도할 예정이었다.
그날 밤 부른 찬송가에는 바다에서 위험에 처한 이들을 위하여 라는 구절이 포함된 찬송가도 있었다. 카터는 조용히 밤 인사를 하면서 탁월한 안정감과 규모 때문에 이 훌륭한 새 정기 여객선을 신뢰한다는 말을 했다. 그 직후인 10시 45분 로렌스 비슬리는 잠자리에서 책을 읽기 위해 자신의 선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타이타닉호의 함교는 그렇게 느긋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함교의 유리들은 이제 0도씨로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바깥 공기를 잘 막아
주고 있었다. 일요일 내내 타이타닉호의 고급 선원들은 북대서양에 있는 다양한 다른 정기 여객선들로부터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래브라도해류가 거대한 빙산 몇 개를 평소보다 남쪽으로 더 멀리까지 싣고 오는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배들이 지나다니는 항로를 막을 수도 있었다. 얼음이 보일 때까지는 배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는 전통, 무전실과 함교 사이의 형편없는 통신 상태 때문에 함교에서는 그 경고에 피상적인 관심만 기울였다. 그러나 오후 9시 40분 훨씬 작은 배인 메사바호에서 무선으로 타이타닉호의 항로 주변에 빙산들이 밀집해 있다는 경고를 했다. 고요하고 싸늘한 밤을 헤치고 계속 열심히 나아가고 있는 거인의 아주 가까운 곳에 아주 많은 수의 빙산들 이 놓여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타이타닉호의 무선 책임자 잭 필립스는 너무 바빠 메사바의 메시지를 함교로 전달하지 못했다.
타이타닉호의 선객들이 미리 미국과 캐나다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려는 인사전보가 가득 쌓여 있어 무선실에서는 우선 그것부터 처리하려 했기 때문이다. 두 명의 사우샘프턴 출신의 젊은 해면 감시원들인 프레드릭 플리트와 레이놀드 리가 15m 높이의 앞갑판 망대에 올라가 별이 찬란한 하늘 아래서 망을 보기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까지 곧 빙산과 마주치게 될거라는 경고는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무선실에 남아 있었다.
밤 11시 40분 플리트는 갑자기 자신의 배가 빠르게 나아가고 있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뭔가를 보았다. 너무 검어서 바다 수면과 구별되지 않았다. 플리트는 망대의 종을 세 번 강하게 울리고 곧이어 함교에 대고 긴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면에 빙산이 있다. 그런 다음 그냥 기다리고 있을 도리밖에 없었다.
37초 후, 타이타닉호 전체에서 전율이 느껴졌다.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형체가 배의 우현을 긁고 지나갔다. 화실에서 나온 열기로 섭씨 38도까지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6번 보일러실에서 화부 프레드릭 바렛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타이타닉호의 안으로 우그러진 옆면으로 차가운 물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바로 몇 초 후, 일등 항해사 윌리엄 머독이 아래의 모든 방수문을 닫는 전기 레버를 가동시켰다. 바다의 포효와 배의 비상벨로 귀가 멍멍한 상태에서 바렛과 다른 승무원들은 5번 보일러실로 허겁지겁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 뒤로 방수문이 닫혔다. 바렛이 탈출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6번 보일러실에는 급속히 물이 들어차고 있었다.
선실들을 서둘러 조사했을 때, 거대한 배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는 한 가지 사실이 분명해졌다.
조선 기사인 토머스 앤드루스가 선실에서 함교로 불려 올라갔다. 앤드루스와 냉정을 잃은 스미스 선장은 배의 밑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런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예기치 않은 장소에 나타나게 되면 혹시 마주칠 승객들이 놀랄까봐 정상적인 속도로 걸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10분도 안 되어 그들은 이미 배에 물이 4.2m나 찼으며, 이물 즉 뱃머리가 아래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았다. 앤드루스는 재빨리 계산을 해 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침몰하기까지 한 시간 반 또는 두 시간의 여유가 있다고 앤드루스가 말했다. 그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선장 역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선장은 무전실에 연락하여 근처에 있는 모든 배에 구조 요청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한밤중 12시5분 쯤, 선장은 타이타닉호의 16개의 나무 구명 보트와 4개의 접을 수 있는 배--이것은 필요량의 반밖에 안 되었다--를 끌어냈다. 드디어 보트로 옮겨타는 일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수백명의 개인들이 보여준 용기, 비겁함, 행운, 절망의 일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날 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금세기 최대의 감동적인 드라마 가운데 하나가 연출되었다.
그 가운데는 J. 스튜어트 화이트 부인도 있었는데 부인은 배가 가볍게 덜컹거린 것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 마치 배가 수많은 공기돌 위를 넘어간 것 같았다. 그 자체로는 전혀 무서운 게 없었다. ) 두 시간이 안 되어 부인은 8번 구명 보트에 탄 승무원 몇 명이 보트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무례를 범한다고 불평하고 있었고 부인 뒤로 파손된 정기여객선 타이타닉호--여전히 불을 켠 채--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학교 선생인 로렌스 비슬리는 타이타닉호의 엔진이 왜 그렇게 갑자기 침묵을 지키게 되었는지 알아보러 선실에서 나왔다. 아무도 설명을 못하자 비슬리는 다시 선실로 돌아갔다. 나중에 다시 나온 비슬리는 계단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균형을 잃어 제대로 발을 내디딜 수 없다는 묘한 느낌이었다. 타이타닉호는 벌써 가라앉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토머스 앤드루스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사람들이 구명복을 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정작 자신은 입지 않고 있었다. 앤드루스는 배의 여승무원 한 사람에게, 아주 심각한 상황이지만 공황상태가 일어날지도 모르니 나쁜 소식을 알리지 말라 고 말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더 솔직하게 말했다. 앤드루스는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배 아래가 박살이 났다. 고 말하고 종말이 한 시간쯤 남았다고 알려 주었다.
1등 선실부의 리츠 레스토랑의 지배인인 프랑스인 루이지 가타는 중산모를 쓰고 작은 옷가방을 들고 한 팔에는 여행용 담요를 걸친 채 단정갑판(구명 보터 설치 갑판)에 서 있었다. 그는 식당 직원 대부분과 함께 오전 중에 익사할 운명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지막에 기억하게 될 소리를 후갑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다.
로저 브리쿠는 다른 음악가들을 따라 구명 보트에 타기 위해 서둘러 가는 바람에 그의 첼로의 금속 각봉이 카펫에 자국을 남겼다. 그들은 갑판이 기울어 서 있을 수 없을 때까지 연주를 했었다. 이 오케스트라단원 가운데는 구조된 사람이 없었다.
존 제이콥 에스터는 아내가 창문틀을 넘어 구명 보트에 타도록 도와주었다. 마치 뉴포트의 자기 요트에 있는 자리로 아내를 안내하듯 차분한 태도였다. 에스터는 자신이 아내를 따라갈 수 없다는 대답을 듣자 정중하게 뒤로 물러섰다.
이시도와 아이다 스트라우스 부부는 몸을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한 생존자는 이 늙은 백화점 주인이 구명 보트의 자리를 제공받고도 그것을 거부하는 소리를 들었다. 스트라우스는 나이 때문에 자리가 제공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남들에게는 제공되지 않는 특혜를 받고 싶지 않소.
그의 부인 아이다 스트라우스도 똑같이 자리를 거부했다.
싫어요. 남 남편과 헤어지기 않겠어요. 우리는 함께 살았듯이 또 함께 죽을거예요.
아이다 스트라우스는 하녀인 엘렌 버드에게 구명 보트에서 입을 외투를 주었다. 그러고 나서 부부는 그들이 함께 맞을 마지막 순간에 일어날 일을 받아들이기 위해 아래로 내려갔다.
5번 보일러실에서는 두 하급 기관사인 허버트 하비와 조나단 셰퍼드가 계속 펌프를 가동시키고 있었다. 순간 셰퍼드는 맨홀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다. 셰퍼드는 방 맞은편으로 옮겨지고 하비와 프레드 바렛은 펌프와 함께 남아 있었다. 갑자기 5번 보일러실과 6번 보일러실 사이의 벽이 함몰되었다. 순간 바렛은 그날밤 두번째의 기적적인 탈출을 했다. 비상 계단 아래를 뒤돌아 보았을 때 하비가 셰퍼드를 도우러 가는 게 보였다. 곧 두 사람 모두 쏟아져 들어오는 물에 익사하고 방 전체가 어두어졌다.
아치 버트도 평소와 다름없는 냉정한 태도와 예의--이것으로 그는 워싱턴에서 인기를 끌었었는데--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버트는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는 한 여자에게 부드럽게 말 했다고 한다.
그렇게 행동해선 안되지요. 우리는 이 일을 통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될텐데요.
그 직후 마리 영이라는 루스벨트 아이들의 음악 선생은 버트의 행동 때문에 그를 특별히 기억하게 되었다.
아치는 나를 보트에 태웠어요. 담요로 내 몸을 싸 주었죠. 마치 자동차 드라이브를 시작하듯 신중하게 나를 보살펴 주었어요. 내 몸을 다싸 주자, 버트는 보트의 뱃전에 올라서서 모자를 쳐들고 나를 내려다보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어요. 안녕, 미스 영.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그리고 잊지 말고 고국의 동포들에게 내 소식을 전해 주시오.
그 밤에 살아 남은 많은 사람들이 놀랐던 것은 배가 마지막 순간에 무척 고요했다는 사실이었다. 배의 후갑판 끝에서는 중얼거리는 소리밖에 들리자 않았다. 그곳에서는 토머스 R. 바일스 신부가 고해성사를 거행하며 무릎을 꿇은 백여 명의 영혼에게 죄를 사면해 주고 있었다. 무선실에서는 잭 필립스가 여전히 SOS를 치는 전신기를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 메시지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보트에 탔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다. 거겐하임과 충실한 시종은 조용한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구명복을 벗고 이브닝 브레스로 정장을 하고 있었다. 누가 그런 모습에 대해 묻자 거겐하임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린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있소. 그래야 신사답게 아래로 내려갈 준비를 하는 게 아니겠소.
이제 타이타닉호 쪽에서 물위에 떠 있으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할 때가 왔다.
새벽 2시 20분, 구명 보트에 탄 사람들과 물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람들은 타이타닉호의 거대한 고물이 바다 위로 들어올려져 잠시 공중에 걸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 1분쯤 되었을까? 이어 고물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한 구명 보트에서 9살 된 프랭크 골드스미스는 어머니와 함께 타이타닉호의 불들이 영원히 꺼지기 직전 바다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보았다.(어른이 되어 디트로이트에 살게 된 골드스미스는 집 근처의 야구장에서 함성이 들릴 때마다 그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타이타닉호가 사라진 후 텅 빈 바다 속에서 물에 가라앉는 사람들이 미친 듯이 지르는 소리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골드스미스의 유언에 따라 그가 죽은 후 화장된 재는 그의 아버지가 작별을 고했던 그 바다에 뿌려졌다)
골드스미스의 구명 보트 너머 어딘가에서 용기있는 욕실 담당 승무원 해럴드 필리모어는 뭔가 물에 뜰만한 것을 잡아 구조될 때까지 살아 있겠다고 결심했다. 갑자기 모르는 어떤 사람이 그의 몸을 잡아 끌어 배의 벽 판자 조각에 올려주었다. 미끌미끌한 나무를 움켜쥐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앉아 있는데, 필리모어와 함께 앉은 사람이 어둠 속에서 필리모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단한 밤이군! 이 엄청난 재난에 대해 그렇게 아주 가볍게 말한 뒤에 그 사람은 바다 속으로 떨어져 죽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구명 보트들에서는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노젓는 소리,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 그리고 6번 구명 보트에서 나오는 따뜻한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6번 구명 보트에서는 몰리 브라운이 거기 탑승한 28명의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몰리 브라운이 거기에 타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타이타닉호에서 몰리 브라운은 모피로 몸을 감싸고 다른 승객이 6번 구명 보트에 타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른 곳의 상황을 조사하러 몸을 돌리는데 갑자기 몸이 들리더니 1.2m 아래서 내려가고 있는 구명 보트 위로 던져졌다.
배의 조타원인 로버트 히친스는 앞을 막은 빙산이 너무 두려워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한 여자가 자신이 기선에서 입던 가운으로 그의 어깨를 덮어 주었다. 몰리 브라운도 검은담비 겉옷으로 반쯤 몸이 언 화부의 몸을 덮어 추위를 막아 주었다. 그리고 모두들 피를 순환시키고 기운을 북돋기 위해 노를 젓도록 했다.
마침내 새벽 4시, 구명 보트를 탔던 모든 사람들이 그 화창한 봄날의 아침에 볼 수 있었던 가장 멋진 광경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증기선이었다. 커나드 해운회사가 소유한 강력한 정기선 캐퍼시아호가 타이타닉호의 마지막 절망적인 구조 요청을 듣고 온 힘을 다해 빙해를 헤치고 그들을 구조하러 온 것이다. 케퍼시아호는 705명의 생존자 모두를 태우고 타이타닉호가 사라진 지점에서 추모 예배를 드린 뒤 뉴욕으로 돌아갔다. 뉴욕에서는 3만명이 모여 그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 몇 달간 영국과 미국 위원회는 각각 대서양 선박 횡단 사상 최악의 참사를 조사했다. 통계 수치만으로 끔찍했다. 2200명이 넘는 승객과 승무원들 가운데 약 1500명이 죽었다.
타이타닉호의 구명 보트는 나중에 보니 겨우 1200명만 수용 할 수 있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그것이 당시 법적 기준에 합당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나마 침몰의 혼돈 가운데 거의 500석에 가까운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아주 잔인하게도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백만장자들에 대해서는 신문이 머리기사로 취급했지만 3등 선실에 탄 사람들의 운명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도 되지 않았다. 일부 3등 선객들은 금속 문과 방수벽 뒤에 갇힌 상태에서 많은 구명 보트가 내려질 때까지도 보트에 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1등과 2등 선실에 탄 아이들은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살아남았다. 그러나 3등 선실에 있던 아이들은 3분의 2가 죽었다.
타이타닉호의 비극은 그런 재난이 되풀이되지 않는 방법들을 강구하게 됨으로써 적으나마 보상을 받았다. 타이타닉호 이후에는 모든 승객을 수용할 수 있는 구명 보트를 분비하였으며 모든 대서양 횡단선에서는 의무적으로 구명 보트 탑승 훈련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빙산이 떠내려오는 철에는 항로도 훨씬 남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재난으로 서구인들은 절대 보상될 수 없는 것을 잃었다. (기억해야 할 밤)의 저자인 월터로드는 이렇게 언급했다. 타이타닉호는 우리가 잃어버린 안정과 예의를 갖춘 세계를 상징하게 되었다...1912년, 사람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가 자신감을 잃으면 잃을수록 우리는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더 행복했던 옛시절을 갈망하게 된다. 그 시기의 분위기가 집약되어 있던 타이타닉호의 갑작스런 침몰은 거의 무한한 충격을 주었다. 생존자 가운데 한 사람인 2등 항해사 찰스 라이톨러는 나중에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을 했다. 라이톨러는 선창 바로 위의 쇠창살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기적적으로 갑작스러운 바람이 위로 불며 그의 몸을 날렸고, 라이톨러는 가까스로 보트 위에 기어올라가 전복된 접는 구명 보트를 지휘하게 되었다. 라이톨러는 그 위험한 피난처에서 기술적 걸작품 타이타닉호의 단말마를 목격했고 죽기 직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비명을 들었다. 라이톨러는 위원회 위원들에게 그 경험을 전하면서 확신의 시대에 대해 간결하고도 적절한 묘비문을 제공했다. 난 이제 다시는 그 어떤 것에도 안전함을 느낄 수 없습니다.
엄청난 묘지의 발견
해저로의 하강은 분당 30m의 속도로 이루어졌다. 앨빈이라는 이름의 잠수정 속에는 저명한 해양 지질학자 로버트 밸라드 박사와 매사추세츠 우즈홀 해양학연구소의 두 동료가 타고 있었다. 세 사람은 비좁은 연구용 탐사선에 웅크리고 앉아 아주 작은 현창으로 북대서양의 깊고 차가운 물 속의 어둠을 내다보았다. 그 밑바닥 어딘가에는 74년 전 바닥으로 가라앉은 거인이 완전한 어둠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마침내 대양 밑바닥 바로 위를 맴돌면서 수색을 시작했다. 앨빈호의 조명들이 바다의 부유물들이 소용돌이를 이루며 떠 다니는 사이사이를 비췄다. 앨빈호는 남쪽으로 움직여 갔다. 갑자기 그것이 나타났다.
바닥에서 검은 강철판들이 끝없이 솟아 있었다. 벨라드는 나중에 그 발견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밸라드의 말은 이어진다.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 우리는 마침내 여행의 목표물에 이르렀다. 타이타닉호는 몇 십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우리는 무덤에 누운 타이타닉호를 처음 본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해양학 연구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밸라드는 오랫동안 타이타닉호를 찾는 꿈을 키워 왔다. 1985년 마침내 타이타닉호를 찾을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그 해 여름, 밸라드는 미국 해군 조사선인 노르호를 타고 출발했다. 노르호는 두 척의 작은 잠수정을 싣고 있었다.
아르고호는 해저에서 예)인되며 비디오테이프를 찍고 또 한 척인 앵거스호는 스틸 사진을 찍는 데 사용하는 것이었다. 노르호는, 타이타닉호가 빙산과 충돌한 뒤 마지막으로 자기 위치를 보고한 북대서양의 같은 지점에서 프랑스 해양 탐사팀과 만났다. 프랑스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음향탐사장비를 사용해 타이타닉호가 침몰했다고 믿어지는 대양 바닥의 80퍼센트를 갈아 보았을 때, 노르호가 결국 그들보다 먼저 수색하던 것을 찾아냈다.
9월 1일 자정 직후, 노르호의 20개 비디오스크린을 모니터하던 승무원들은 갑자기 눈을 한 곳에 고정시켰다. 아르고호의 카메라에 거대한 보일러의 영상이 잡힌 것이다. 거대한 정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항해 전 벨파스트에서 장치한 보일러와 꼭 닮은 것이었다. 그 직후 음파 신호들을 근처에 보일러 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있다고 알려 왔다. 마침내 타이타닉호가 발견된 것이다.
밸라드는 타이타닉호의 숨져간 사람들을 위해 노르호 갑판에서 간단한 추모 예배를 드렸다. 이어 난파선을 사진에 더 담은 후에 노르호와 그 승무원들은 우즈홀로 돌아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986년에 실시한 타이타닉호 현장에 대한 2차 탐사 때 밸라드는 7.5m 길이의 앨빈호를 가져갔다. 이 믿을 만한 작은 잠수정--이 잠수정은 세 명의 열중한 연구자들을 싣고 타이타닉호의 갑판 위에 종종 내려앉곤 했다--으로부터 제이슨 주니어호가 75m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벨라드가 헤엄치는 눈알 이라고 묘사하곤 하는 이 잠수정은 앨빈호보다 훨씬 작은 장치로, 이것은 타이타닉호의 유령이 나올 것 같은 계단을 내려갔다. 승객들이 구명보트에 남은 자리가 있나 보려고 올라갔던 바로 그 계단이었다.
예상과 달리 타이타닉호는 빙산에 의해 선체 옆구리가 찢긴 것이 아니었다. 연구자들은 배의 우현 이물판이 충돌의 충격으로 우그러진 후 틈이 생겨 바닷물이 들어오게 된 것을 알아냈다. 또 하나의 발견은 타이타닉호의 고물이 하강된 후 배의 나머지 부분에서 뒤틀려 떨어져 나왔다는 사실었다.
밸라드는 고물에 작은 기념 표식을 해 두었다. 바로 이 고물에서--이물이 바다 속으로 깊이 가라앉음에 따라 점차 위로 솟구치던--약 1500명의 사람들이 최후의 순간을 보냈다. 마지막 구명 보트가 떠난 뒤, 고물에 있던 사람들은 몇 분 후면 죽는다는 것을 거의 분명하게 알고 그 고요한 순간 침묵 속에서 죽음을 어떻게 맞을지를 생각했다.
전세계를 공격한 인플루엔자
제1차 세계대전의 그림자 속에서 날뛴 사상 최악의 재난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8년 여름, 나중에 메이저 리그 야구에서 흑백 차별의 벽을 부순 것으로 명성을 얻게 된 브랜치 리키 소령은 곧 뉴욕을 떠날 유럽파견 미군부대 수송선 갑판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찰스 소여가 있었는데 장차 헤리 S. 트루먼 대통령 정부의 상무장관이 될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한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갑판에 줄지어 놓인 세걔의 관이 왜 필요한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항해를 시작하자마자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분명해졌다. 각관만다 시체가 한 구씩 넣어져 바다로 내려졌다. 이어 수십 구의 꽁꽁 싸맨 시체들이 첫 세 구의 시체를 따라 배 밖으로 내던져졌다. 시체들을 가라앉힐 추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무시무시한 14일간의 항해 끝에 마침내 프랑스의 생--나제르항에 도착했을 때, 또 다른 많은 시체들이 갑판 위에 놓이게 되었다.
배를 습격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자를 낸 침묵의 살인자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치명적인 새 변종이었다. 이 질병은 순식간에 전세계적으로 최소 2000만명의 죽음을 초래했다.
파악하기 힘든 돌연변이 바이러스에 의해 야기된 이 병은 스페인 바이러스로 널리 알려졌다. 이 인플루엔자가 스페인에 창궐한 건 사실이지만 스페인에서 최초로 발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감염 경로를 추적해 보면 미국 부대 수송선에서 출항 항구로, 거기서 다시 육군 주둔지인 캔자스주의 포트라일리에까지 이른다. 두 사단이 그해 봄 인플루엔자 전염병이 끝날 무렵 그 유서깊은 기병대 기지를 출발했는데, 1100명 이상의 병사가 감염되고 46명이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해 봄의 발병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이 병은 계속 전파되어 많은 사망자를 내지는 않았지만 프랑스와 플랑드르까지 퍼졌다.
인풀루엔자의 본격적이 대공세는 1918년 가을에 찾아왔다. 연합국이 서부 전선에서 마지막 공세를 막 시작할 때였다. 미국 원정군(AEF)사령관 존 J. 퍼싱 장군은 모든 징집 가능한 병사를 요청했으나 육군 주둔지와 항구에 창궐한 인플루엔자 때문에 10월 징집이 취소되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퍼싱은 아르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으로는 독일군 역시 인플루엔자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병과 적의 반격때문에 그의 부대 역시 많은 희생을 치렀다. 9월 1일과 11월 11일 사이에 AEF군 가운데 3만 5000명이 전투에서 전사하거난 부상으로 사망한 반면에 거의 같은 기간 9000명이 인플루엔자나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1919년 봄에는 그들의 전우 2000명이 또다시 같은 질병 때문에 죽었다.
그동안 약 2만 2000명의 병사들이 미국의 육군 주둔지나 항구에서 죽어갔다.
해군은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육군의 10분의 1규모에 불과한 병력 가운데 전염병으로 5000명의 잃은 것이다. 예를 들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순찰중이던 순양함 피츠버그호에서는 반 이상의 병력이 병에 걸려 58명이 죽었다. 그러자 피츠버그호는 아치 어뢰에 침몰되기나 한 것처럼 전선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그림 설명
1918년 12월 시애틀에서 보병이 행진할 때 모두들 인플루엔자를 막기 위해 거즈 마스크를 쓰고 있다. 비록 유럽에서의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미국에서 살인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전투는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었다. 뜨거운 식초를 넣은 팩, 코담배, 마스크, 양치질 등의 민간 요법들은 도움이 안되는 것으로 판명났다. 이 질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책이 없었기 때문에 이 병은 계속 전염될 수밖에 없었다.
인플루엔자 전염은 미국에서 약 55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이것은 전쟁에서 전투로 사망한 숫자의 거의 10배에 해당한다.
비록 이 살인 인플루엔자가 20세에서 40세 사이의 연령층에서 가장 탐욕스럽게 희생자를 찾는 듯했지만--군 병력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연령--인플루엔자가 특별히 군인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풀루엔자는 육군 주둔지나 해군 기지로부터 미국 전역으로 파고들었다.
인플루엔자가 퍼지는 속도만큼이나 무시무시했던 것은, 인풀루엔자에 걸린 사람들이 죽어가는 속도였다. 워싱턴에서는 한 여자가 당국에 전화를 하여 같은 방 친구들 가운데 둘이 죽었고 하나는 병에 걸렸으며 자기 혼자만 건강하다고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이 조사를 하러 갔을 때는 네 여자 모두가 죽은 상태였다. 그리고 매사추세츠주 퀸시에서는 세 남자가 한날 오후에 보도에서 쓰러져 죽었다.
특히 필라델피아는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10월말이 되자 필라델피아에서 인플루엔자 전염병으로 사망한 수는 1만 3000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뉴욕시에서는 10월 23일 하루에 851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매일 평균 5500명의 환자가 새로 발생했다. 10월 마지막 주에는 미국 48개주에서 총 2만 1000명이 사망했다. 미국 역사상 7일간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한 기록이었다.
미국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적에게 온갖 방어 수단을 동원하여 저항했다. 박테리아가 원인이라는 이론에 따라 다양한 백신이 조제되고 이용되었다. 그러나 의학 연구자들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인플루엔자의 원인이 바이러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환자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주된 원인인 폐렴과 싸울수 있는 항생 물질을 이용한 치료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엄격한 통제 수단이 사용되었다. 많은 도시에서 극장, 학교, 술집, 심지어 교회마저 폐쇄되었다. 공공 장소에서 침을 뱉는 행위에 벌금이 부과되었으며 뉴욕시는 손수건 없이 기침을 하거나 콧물을 흘리다 발견되는 사람은 누구나 징역형에 처하거나 엄청난 벌금을 물리겠다고 위협하는 커다란 선전물들을 길거리에 붙여놓기도 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마스크를 착용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전염성이 있는 침과 콧물이 옮겨지는 것을 막고 자 입과 코를 여러 겹의 거즈로 덮었다. 사실 바이러스는 거즈 사이로 쉽게 침투하기 때문에 마스크는 별 도움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모든 사람이 공공 장소에서 마스크를 쓰도록 했다. 다른 도시에서는 접촉 하는 직업을 가진 사라들, 예를 들어, 치과의사, 이발사, 은행 금전출납원등에게만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으나 수많은 미국인들이 자발적으로 베일을 썼다.
1918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가족의 사망으로 마음이 굳어 있었고 전염병에는 익숙하게 되었다. 사실 노인들은 살아오면서 황열병, 장티푸스, 발진티푸스 등의 전염병들을 견디어 왔던 것이다. 인플루엔자가 치명적인 모습을 드러냈을 때 광범위한 대중적 공황 상태는 없었지만 두려움과 개인적 공포의 예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었다. 오리곤주 포틀랜드에서는 긴급 호출을 받은 구급차 운전사들이 막상 그 집에 가 보면 환자만 버려진 채 혼자 남겨진 것을 발견하곤 했다.
필라델피아에서는 한 카톨릭 사제가 기동대를 만들어 환자들을 찾아 뒷골목을 수색하기도 했다. 이들은 24시간만에 200구 이상의 시체를 모아 시체 안치소로 운반하였다. 시체 안치소에는 이미 시체들이 서너 겹으로 쌓여 있었다.
워싱턴에서 응급 병원을 개설한 내과 의사 제임스 P. 리크 박사도 무시무시한 일을 겪었다. 나중에 리크 박사가 그때를 회상한 바에 따르면 병원은 금방 사람으로 가득 차서 환자들에게 공간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의사들을 문에서 기다리게 하는 것뿐이었다...산 사람이 한쪽 문으로 들어오고 죽은 사람이 다른 문으로 나갔던 것이다.
관과 무덤을 파는 사람들도 모두 모자랐다. 많은 사망자들이 보통 소나무 상자에 넣어져 땅 속에 묻혔으며, 필라델피아에서는 죄수들을 동원하여 공동 묘지에 무덤을 파기도 했다. 시체들이 쌓이지 않는 경우에도 애도 행사가 제한되는 경우가 잦았다. 시카고에서는 한동안 모든 공공 장례식은 금지됐으며 시체를 교회나 예배당으로 가져가는 것을 막았고 10명 이상의 조객이 관을 따라 공동묘지로 가는 것을 허용되지 않았다.
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플루엔자와의 전투는 기본적으로 패배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패배 속에서 그 나름의 영웅들이 나왔다. AEF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동료들을 데려가는 바람에 두배의 일을 해야 했던 의사와 간호원들 사이에 그런 수천명의 영웅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도 병자들에게 위안이나 줄 수 있었지 치료는 거의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들도 치료책을 알지 못하는 질병에 대처하는 데는 무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온갖 종류의 예방 과 치료법 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났다. 독한 술인 스카치 위스키를 매일 마셔라, 마늘을 많이 먹어라, 편도선을 없애라, 클로로포름을 흡입해라 등등. 1918년 겨울 보사부 장관 루퍼트 블루는 공식 경고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 연방정부 보사부에서는 아직 인플루엔자의 특정한 치료법은 없다는 것을 모든 미국 국민들이 기억해 줄 것을 촉구한다.
지리적 경계 또한 없었다. 인플루엔자는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캔자스주 포트라일리로부터 들불처럼 지구 전역으로 번져갔다. 이 전염병이 미국에서는 한풀 꺾이고 있던 11월 첫째 주, 영국에서는 1만 4000명이 인플루엔자로 사망했다. 극지방의 에스키모 마을 전체가 사라져 버리기도 했고 중앙 아프리카의 정착민촌 전체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멕시코에서는 50만병이 죽었으며, 캐나다에서는 4만 4000명이 죽었다. 프랑스 병사들도 무수히 쓰러졌으며 이 병은 프랑스 민간인들 사이에서도 폭발적으로 발생했다. 더 이상 프랑스 주민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AEF의 인플루엔자 희생자들은 밤에 공동묘지로 운반됐다. 인플루엔자는 힌덴버그 전선을 뛰어 넘어 패배와 굶주림과 함께 독일을 괴롭혔다. 러시아에서는 이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45만명으로 추정됐다. 이탈리아에서는 37만 7000명이 사망했으며 대영제국에서는 총 22만 8000명이 사망했다.
인도에서는 수없이 많은 시체들을 화장했기 때문에 사망자 추정치는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사망자수는 적어도 5000만은 됐을 것이다.
최악의 고통을 겪은 곳은 태평양의 작은 섬들의 원주민들이었다.
남태평양 주민들은 그 전에 한번도 인플루엔자 전염병에 감염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인플루엔자에 가장 취약하였다. 미국 해군 선박들이 괌에 바이러스를 옮겼는데 그곳에서는 주민의 45퍼센트가 사망했다. 또한 소사이어티제도에도 옮겼는데 그곳에서는 모든 타히티 사람의 10퍼센트가 사망했다. 서사모아 사람들은 이 전염병으로 인한 전세계적인 피해 가운데 인구비례로 피해를 따질 때는 최고의 수치를 기록했다. 1918년 11월 7일 뉴질랜드의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배가 우폴루섬의 아피아항에 정박했다. 그해말에는 7542명의 서사모아 사람들이 인플루엔자와 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것은 그지역 전 주민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이 괴물 같은 전염병은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1918년말에 최악의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때 대학살이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1919년 3월에는 런던 및 다른 영국 도시에서 인플루엔자와 관련되어 거의 4000명이 사망했다. 독일에서는 그해 봄의 사망률이 더욱 높았다.
그리고 뒤늦게 1920년에는 전염병의 세번째 파도가 10만명의 미국인을 죽였다.
인플루엔자는 또한 1919년 베르사유 평화 회담도 괴롭혔다. 3대 강국의 참석자들 모두 인플루엔자에 걸린 것이다.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대영제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프랑스의 조르쥬 클레망소 총리. 역사에 큰 의문점으로 남아 있는 것은, 윌슨이 인플루엔자를 포함한 여러 병 때문에 평화 회담의 핵심적 단계에서 주도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1918년의 재난이 또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1933년 인간의 몸에서 인플루엔자가 처음으로 분리된 이래로 A형 인플루엔자로 불리는 인플루엔자의 어떤 변종이 1918년의 재난의 원인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소아마비와 더불어 인플루엔자 A는 그 이후 모든 바이러스들 가운데도 가장 광범위하게 연구되는 바이러스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 광범위한 연구가 미래에 그런 재난이 다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해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낙관적인 사람들은 인플루엔자에 대해 지식의 증가로 백신을 향상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덜 낙관적인 사람들은 새로운 변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인플루엔자의 능력에 대해 경고한다. 예를 들어, 1957년의 아시아 인플루엔자 전염병의 바이러스는 그 이전의 변종과는 너무 달라 A2형이라 부르게 되었다. 미처 대항할 백신을 개발하기도 전에 또 다른 돌연변이가 온 세계로 퍼지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그 대답은 아무도 모른다. 1918년에 있었던 이 오래된 인플루엔자의 서사시는 아직도 우리를 놀라게 할 내용을 감추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간토 대지진
엄청난 진동과 불의 소용돌이로 황폐해진 도쿄와 요코하마
인간의 기억에 남은 지진 가운데 이것보다 더 격렬했고 또 더 많은 희생자를 낳은 지진은 거의 없었다. 1923년 9월 1일 토요일 저오 12시2분 전, 도쿄에서 80km 떨어진 사가미만 밑의 땅이 갈라지면서 파괴의 물결이 일본의 수도인 도쿄와 그 지역의 가장 큰 항구인 요코하마가 자리잡고 있는 간토 대평원 전체를 휩쓸었다. 사가미만의 진원지에서 지진은 리히터 지진계로 진도 8.3이라는 치명적인 수치를 기록했다. 첫 충격은 거의 5분간 지속되었으며 곧 이어 해안을 쓸어 버리는 살인 파도 쓰나미가 덮쳐 사람과 집을 바다로 쓸어내 버렸다. 24시간 뒤 두 번째 큰 진동이 간토 지역을 다시 덮쳤다. 그리고 주말 내내 작은 여진들이 수백 차례 일어나면서 생존자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시카고 트리뷴)의 도쿄 특파원이었던 로드릭 매시슨은 이런 격변이 우리 말밑에서 계속 고통을 주는 충격 으로 나타났다고 썼다. 땅은 울리고 건물들은 흔들리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어 포효와 함께 처음으로 일련의 엄청난 충격이 찾아왔다. 땅은 흔들리고 파도처럼 움직여 사람이 서 있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한편 모든 건물에서 가는 먼지들이 피어 올라 하늘을 어둡게 했다. 흔들리는 건물들에서 나는 소리는 포효로 변하고 이어 귀가 멍멍할 정도의 소리를 내면서 건물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예비 진동이 있은 몇 초 후 건물들에서 겁에 질린 거주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건물들끼리 부딪치고 쓰러졌다. 땅은 물결치듯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리를 뒤덮기 시작하는 건물의 파편들을 피하느라 비틀거리고 쓰러지면서 가장 가까운 빈터로 향했다. 모두 겁에 질려 얼굴이 창백했다. 몇 사람은 기절하기도 했고 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웃기도 했다.
첫 진동으로 많은 건물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파괴와 죽음의 주요한 원인은 화재였다. 지진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일본 가정 어디에서나 사용되는 뚜껑이 없는 석탄 화로인 히바치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조가옥의 실내 다다미에 흩뿌려진 석탄은 즉각적인 비극의 불씨가 되었다. 몇 분이 안 되어 도쿄의 수천 채 가옥에 불이 붙었다. 게다가 지진으로 도시의 수도관이 파열되었기 때문에 화재를 진화할 물을 구할 수 없었다. 매시슨에 따르면 4시 무렵이 되자 도쿄에서는 21건의 큰 화재가 났으며 사람들은 들 수 있는 물건들을 챙겨 들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화재 지역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안전한 피난처는 찾기가 힘들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대고 부서진 집의 파편이 널린 상태에서 불은 파괴적인 소용돌이가 되어 도쿄 시내의 가옥이 밀집한 거리와 뒷골목을 휩쓸며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다리와 좁은 통로는 피난민들이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죽음의 덫이 되었다. 예를 들어, 스미다강에 놓인 커다란 나무 다리 가운데 한 곳에서는 미칠 것 같은 표정의 수백 명의 사람들이 양쪽 강둑에서 휩쓸고 들어오는 두 개의 불의 벽에 갇혀 다 타 죽고 말았다.
스미다의 동쪽 강변의 낮은 도시 로 알려진 도쿄 지역에서는 경찰과 소방수들이 과거 군대의 의복 창고로 사용했던 한 공원을 피난민 집결지로 지정해 주었다. 토요일 오후 4시쯤, 약 4만명의 사람들이 공원에 밀집해 있을 때 갑자기 그들 위로 불기둥이 떨어져 순식간에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사람들이 워낙 빽빽하게 밀집해 있었기 때문에 희생자들은 선 채로 죽었다고 전해진다.
(뉴욕 타임스)에 실린 목격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화재에 의한 도쿄의 파고는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광경 이었다고 한다. 건물들이 빈번하게 다이너마이트처럼 터져 나갔기 때문에 이건 전쟁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밤새도록 도시 위의 하늘은 선홍색이나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땅에서는 회색과 검은색과 흰색의 연기들이 솟아올라 거대한 구름을 이루었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도 이런 광견을 상상해 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는 도시의 반이 쓰러져 있었고 연기가 피어 오르는 파편 속에서 사람들이 시체를 발굴하고 있었다. 시체들은 무더기로 쌓여 멍석에 덮여 있다가 매장지로 옮겨졌다. (사실 시체들을 매장한 것이 아니라 석유를 뿌려 집단 화장했다.)
도쿄의 15개의 구 가운데 서쪽에 언덕 높이 솟은 높은 도시 만이 화재를 면했다. 스미다강과 도쿄만을 따라 낮은 도시 에 놓여 잇던 다섯 구는 거의 전소되었다. 일본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도쿄는 30만동 이상의 건물을 잃었는데 여기에는 300개의 정부 건물, 1500개의 학교와 도서관, 2500개의 교회, 5000개의 은행, 2만개의 공장과 창고, 250개의 극장과 오락센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또 진귀한 책, 원본 문서, 아주 귀중한 예술품들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 가운데 하나인 동경 제국 대학 도서관도 지진중에 파괴되었다.
도쿄에서 남쪽으로 28.8km 떨어진, 도쿄보다는 작은 도시 요코하마는 상대적으로 수도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다. 토요일 늦은 밤, 로드릭 매시슨은 아직도 불에 타고 있는 도쿄를 떠나 차, 작은 배 들을 타거나 걸어서 결국 요코하마항구까지 갔다. 무시무시한 여행이었다.
나는 파괴된 마을을 통과하고, 6m나 갈라져 있는 등 점점 파괴되고 있는 도로를 지나갔다. 다리는 내려앉고 노반은 휘어져 있었다.
어디를 가나 살아 있는 사람들은 공터에서 맨몸으로 노숙했다. 몇 분마다 진동이 일어났다. 어떤 때는 지면의 진동이 너무 심해 부서진 벽이 완전히 내려앉기도 했다. 나는 작은 배나 자전거 또는 인력거를 세내려 해보았으나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일본인들은 망연자실해 있었고 남을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요코하마에서는 중요한 부두 및 항구 시설과 더불어 약 6만동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매시슨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길은 갈라지고 파헤쳐졌으며 자동차가 빠질 만한 틈이 벌어져 있기도 했다. 도처에 시체 투성이었으며 폐허 속에는 그 수가 더 많았다.
요코하마의 외국인 거주지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주택이 거의 없었다. 도시 전체의 땅이 90cm나 내려앉아 철골 구조, 다리, 하수구 구멍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와 있었다. 일본인 구역에는 불길을 피하지 못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무시무시하고 기이한 자세로 죽어 있었다.
수만은 사람들이 두 손을 들어올리고 무릎을 꿇고 있었으며, 곧 부서질 것 같은 팔에는 아기들의 시체가 안겨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돌이나 콘크리트 기둥이나 보도의 연석을 끌어안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둑을 기어오르거나 땅의 갈라진 틈에서 기어나오다 가스에 질식당해 죽은 것 같았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운하의 진흙이나 물 속에 턱까지 몸을 담그고 서 있어 죽음을 피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곳에서 익사하기도 했다. 그 대학살의 시간에는 죽은 자와 산 자들이 함께 서 있었던 것이다.
지진과 그 치명적인 여파로, 총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으며(그 외에 약 4만 3000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0만명이 중상을 입었고 150만명이 집을 잃었다. 그러나 통계 수치만으로는 그 가장 암담했던 몇 시간동안 일본인들이 겪은 고통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으며 시체의 숫자만으로는 사람들이 죽어간 그 수많은 무시무시한 상황을 드러내 줄 수 없다. 예를 들어, 사가미만의 네부카와에서는 15m 높이의 진흙 산사태가 일어나 마을 대부분을 만 안으로 밀어 넣으면서 약 300명의 거주자들을 죽였다. 역시 사가미만에 있는 아타미에서는 11m높이의 쓰나미가 16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요코하마 남쪽에 있는 요코스카 해군기지에서는 기차역 옆의 높은 둑이 무너지면서 200명의 국민학생들이 소풍 열차 속에 갇힌 채로 묻혔다. 요코하마 언덕에서는 기름 탱크가 터지면서 그 아래 있는 무력한 희생자들에게 수백만 통의 불이 붙은 기름을 쏟아 부었다. 요코하마 스페시에은행에서는 수백명의 사람들이 은행의 지하 금고는 안전할 것으로 생각하여 그곳으로 가려다 불에 타 죽었다. 그러나 지하실로 들어간 사람들은 열기와 질식 때문에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했다.
9월 10일자 (뉴욕 타임스)는 참상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전보다 더 비참한 이야기들이 매시간 나오고 있다. 하루 종일 그리고 밤이 새도록 거리에는 굶주리고 지친 사람들이 친척을 찾으며 돌아다녔다. 이들은 조그만 깃발에 잃어버린 친구, 부모, 아이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다녔으며 굶주린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대답을 들어 볼까하여 이름들을 소리쳐 부르다 목이 쉬기도 했다. (뉴욕 타임즈)는 계속해서 보도하고 있다. 밤의 어둠 속에서 끝도 없이 행렬이 이어졌다. 모든 헤매는 사람들은 일본식 종이등과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으며...이 움직이는 인간 군상을 마치 말이 없는 환상 드라마 속의 인물들과 간은 인상을 주었다.
밤이 되자 소문들이 들불처럼 퍼지고 테러가 도쿄의 거리를 휩쓸었다.
지진후 며칠 동안 유행하던 소문 가운데는 일본의 한국인 거주자들이 지진을 당한 지역에서 불을 지르고 수원지에 독을 풀었다는 것도 있었다. 당국이 질서를 다시 잡기 전에 자경대들의 테러 행위로 수많은 무고한 한국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통신선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세계 다른 곳에서는 일본의 소식을 거의 알 수 없었고 또 그나마 느리게 전달되었다. 9월 1일 토요일 저녁 8시 20분, 라디오 코포레이션의 미국 샌프란시스코지부는 도쿄에서 북쪽으로 230km 떨어진 도미오카에 있는 회사의 지부에서 재난의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뉴욕 타임스)는 그 재난을 알리는 기사를 일면에 커다란 머릿기사로 실었다. 기사가 나간 며칠 뒤 이 비극적인 소식은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원조금과 의약품을 보냈다. 프랑스는 하루를 일본인 사망자들을 위한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지진이 일어나고 48시간 내에 미국 태평양 함대의 배들이 물, 식량, 의약품을 싣고 일본의 여러 항구에 도착하였다. 미국 적십자는 구호 물자로 525만 달러의 목표를 정했다. 뉴욕시는 사흘만에 할당액의 3배가 되는 돈을 거두어 들였다.
일본은 저리의 외채와 좋은 신용도 평가, 국민의 무궁무진한 에너지, 주요 산업 중심지가 별피해 없이 살아 남았다는 좋은 조건 덕분에 급속히 회복되었다. 재건 위원회가 임명되고 훌륭하고 널찍한 수도를 지을 계획이 입안되었다. 그러나 당장 살곳이 필요했고 잃어버린 집이 서 있던 똑같은 자리에 비슷한 설계와 구조로 된 집을 가지고 싶다는 이재민의 욕구가 워낙 강해 입안자들의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요코하마는 재난을 거치고 더 나은 계획도시로 태어난 반면(그리고 대양 바닥에서 일어난 지진의 결과로 수심이 더 깊어진 항구를 갖게 됐다) 새로운 도쿄는 전과 다름없이 혼잡하고 비좁고 화재에 취약한 곳이 되었다. 도쿄는 또한 그 문화적 유산과 전통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이제는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새롭고 더 현대적인 시대에 걸맞는 도시가 되었다.
환태평양 화산대
100년 동안 되풀이되는 격렬한 지진의 피해를 입은 곳은 일본만이 아니었다. 태평양에 접한 거의 모든 육지--남아메리카의 서부 해안으로부터 북쪽으로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를 거쳐 일본, 그리고 남쪽으로 인도네시아와 뉴질랜드에 이르기까지--는 유사 이래 무자비한 지리적 격변의 희생물이 되어왔다. 이 거대한 호를 따라 세계의 주요 지진 가운데 4분의 3이 일어나며 지구의 600개의 활화산의 절반 이상이 위치해 있다.
과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 환태평양 화산대 를 지도상에 쉽게 지진과 화산 폭발 지역으로 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역으로 표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숨은 힘은 1960년대에 지각판 구조지질학, 또는 대륙 이동설 이 부각되기까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때 이후의 연구들은 지각이 수많은 두꺼운 암석 판으로 갈라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왔다. 태평양 밑의 지각판들은 느리지만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어떤 곳에서는 인접한 대륙판들 밑으로 파고들려 한다.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엄청난 온도는 밑으로 파묻히는 암석층을 녹여 아주 뜨거운 마그마 웅덩이를 만들며 이것이 결국 화산 활동시 지표를 찢고 터져나온다. 다른 곳에서는 지각판의 가장자리들이 서로 심하게 부대끼면서 압력을 증가시켜 마침내 어떤 시점에 이르면 암반이 갑작스럽고 격렬한 지진과 더불어 부서지게 된다.
올드맨강의 범람
미시시피계곡을 휩쓴 산사태와 같은 폭발적인 홍수
미시시피 강은 북아메리카의 생명선이다. 거대한 미시시피강과 그 커다란 지류들은 미대륙의 배수로 중 40퍼센트에 해당되며 미국의 31개주와 캐나다의 경계선이 된다. 미시시피강을 위대한 강 과 물의 아버지 라고 불렀던 인디언 부족들은 미시시피강의 홍수 주기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으나 백인들은 이 불안정한 강을 통제하기로 마음 먹었다.
18세기와 19세기초, 미시시피강 하루를 따라 임시 변통의 둑이 세워졌다. 그러나 이러한 원시적인 홍수 통제 시스템은 워낙 비조직적이라서 농장주가 자신의 들판을 보호하기 위해 이웃의 제방에 파괴 행위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릴 정도였다. 1897년 의회는 미합중국 육군 공병대와 협조하여 일관된 홍수 통제 계획을 세울 미시시피강 위원회를 만들었다. 공병대와 위원회는 제방이 홍수 통제의 최선의 수단이라고 확신하고 1900년까지 일리노이주 카이로에서 멕시코만에 이르기까지 강 양쪽으로 1600km에 이르는 흙 제방을 건설했다. 이 제방벽은 주류와 지류가 만나는 곳에서만 끊어져 있었다. 그러나 미시시피강은 계속 범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병대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더욱 높은 제방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강을 더 효과적으로 가두어 두면 가두어 둘수록 강은 흐름을 가둔 제방에 더 큰 압력을 가했고 따라서 이 물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갈 가능성도 더 높아졌다. 1858년에서 1922년 사이, 미시시피강은 11번이나 둑을 무너뜨리고 충적토 평원에 대규모로 범람했다. 그러나 이런 범람들은 1927년의 대 홍수가 초래한 재난의 서곡들에 불과했다.
사실 문제는 1926년 8월에 시작되었다. 미시시피강 유역에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시시피강의 거의 전역에 걸쳐 지속되었다. 땅은 마를 새가 없었고 넘치는 물은 미시시피강의 지류들 외에는 달리 흘러 갈 데가 없었다. 따라서 불길하게 지류들의 수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비는 2월에 잠시 멈췄다가 3월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4월초가 되자 미시시피강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커다란 선미 외륜 기선--보통 기선의 모습은 제방 밖에서 다 보이는 것에 깜짝 놀랐다. 강 밖에서는 마치 그 기선이 구경꾼의 머리 위로 6m쯤 공중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모든 주요한 지류의 범람은 또 다시 이 괴물 같은 강의 매우 심각한 범람을 예고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상황은 심각했지만 통제할 수 없었던 상황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공병대에서는 그렇게 주장했다. 일리노이주 카이로로부터 남쪽으로 미시시피주의 면화 도시 그린빌에 이르는 강의 홍수 통제를 책임지고 있던 공병대의 도널드 코널리 소령은 4월 9일 멤피스에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든 강을 통제하고 있다 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런 확신은 슬프게도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린빌에서 북쪽으로 28.8km 떨어진 강 굽이에 있는 미시시피주 마운드랜딩에서는 제방이 범람한 강의 물마루로부터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4월 20일이 되자 약한 제방이 곧 무너질 것이 확실해 보였다. 밤새도록 노동자들이 서둘러서 제방에 45kg짜리 모래주머니들을 쌓았다. 제방은 그들 발 밑에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의 가장 낮은 음처럼 떨리고 있었다. 동틀 무렵에 공병대의 알렉산더 G. 팩스턴 장군은 그린빌에서 마운드랜딩으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제방의 한 노동자는 제방이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 팩스턴은 평생 기억하게 될 두 마디를 듣게 되었다. 지금 무너집니다!
물의 아버지 는 나이아가라폭포와 같은 양으로 추정되는 수량으로 그리고 짐승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내며 마운드랜딩제방을 뚫고 터져나왔다. 터진 부분은 금방 1.6km 가까운 간격으로 벌어졌다. 이 틈에서 나온 물만으로 미시시피주의 약 92만 헥타르의 땅이 침수되었다. 또한 불운한 제방 노동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미시시피강이 범람하자 사람들은 높은 곳을 향해 달아났다.
미시시피주 스콧 근처에 살던 코라 리 캠벨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거의 50년이 지난 후까지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던 캠벨부인의 기억은 이 홍수의 역사를 기록한 1977년 피트 대니얼의 책 (다가올수록 깊어지다)에 수록되어 있다. 코라 캠벨은 다리가 무너지기 직전 스콧의 한 다리를 건너 집으로 달려가 아들 루스벨트 캠벨 2세를 들여 업었다...그리고 제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우리가 제방에 이르렀을 때, 끓는 물처럼 거품이 일고 있는 강물의 수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코라 가족은 사람들이 붐비는 제방에서 2박 3일을 보낸 뒤에야 마침내 구조 보트를 만날 수 있었다. 캠벨부인은 회상한다. 우린 제방 위에 아주 조그만 천막집을 지었지요, 아이 하나가 들어가면 꽉 차는 집이었어요. 나는 그 안에 아이를 싸 가지고 온 군용 담요를 깔고 누었지요. 그런데 물이 우리가 있는 데까지 올라 오더군요. 난 아기가 젖지 않도록 아이를 안아 가슴 위에 올려 놓아야 했어요. 하지만 난 온몸이 흠뻑 젖고 말았죠.
4월 21일 초저녁, 아칸소주 펜델튼에서 두번째로 제방이 무너졌다. 마운드랜딩의 건너편이었다. 남쪽으로 51km 떨어져 있는 아칸소시의 시민들은 다가올 홍수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 4월 29일 처음으로 물이 시 외각에 흘러들었을 때, 18살 난 버나 레이재머는 주일학교에 있었다. 물은 천천히 들어왔기 때문에 버나는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집에서 운영하는 식료품점에 나가 물건들을 카운터에 올려 놓는 것을 도와줄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수위가 높아지자 버나는 거리의 나무 토막을 쌓아 놓은 곳에 올라가 있다가 지나가는 보트를 타고 마른땅으로 건너 갈 수 있었다. 나중에 버나는 집의 이층에서부터 자신의 피아노가 산산조각 난 채로 현관문 밖으로 떠내려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때가 내가 홍수 기간 중 유일하게 울었던 때였다.
버나 레이재머가 피아노가 떠내려간 걸 슬퍼하는 동안에 미시시피계곡 저지대 곳곳에서는 폭 약 128km에 깊이 5.4m에 이르는 광대한 내해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미 강에서 역류하는 물로 잔뜩 불어나 있던 아칸소강 때문에 리틀록에서 미시시피에 이르는 160km 구간의 제방여남은 곳이 터져 나갔다. 또한 화이트, 레드, 세인트프랜시스 등과 같은 미시시피강 지류들이 제방을 뚫고 나오는 바람에 아칸소주 반과 루이지애나 대부분이 침수되었다. 마운드랜딩의 무너진 둑에서 흘러나왔던 물은 빅스버그 근처에서 미시시피강으로 다시 들어갔으나 그 가중된 압력으로 인해 5월 3일, 루이지애나주 캐빈틸 근처의 강둑이 터져 다시 약 240만 헥타르가 침수되었다. 다 합해서 120개의 터진 틈--그 가운데 42개는 아주 큰 것이었다--에서 방출된 물로 인해 7개주의 약 660만 헥타르에 이르는 땅이 침수되었다. 미시시피주, 아칸소주, 루이지애나주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4월 2일 (뉴욕 타임스)의 기자는 이렇게 썼다. 미시시피강이 연출한 그 광대하고 경외스러운 장면을 봐야만 한다. 멤피스의 언덕에서 보면, 아칸소주에는 땅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참나무와 버드나무의 우듬지는 보이지만 어디에도 땅은 없다. 나무들이 빽빽한 곳의 모습은 어떻게 보면 물 위에 떠 있는 손질하지 않은 정원처럼 보인다.
5월 중순, 홍수의 물줄기는 루이지애나의 늪지대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겨우 48시간만에 루이지애나주의 사탕수수 재배 지역인 바이우 드글레이시스를 따라 만들어진 제방 전체가 폐허가 되었다. 5월 17일, 아차팔아야강은 멜빌의 육중한 제방을 무너뜨렸다. 멤피스의 (커머셜어필)지의 한 기자는 이렇게 썼다.
물은 제방이 무너진 곳에서 엄청난 힘으로 솟구쳐 나와 세 개의 분명한 흐름으로 나뉘어 총알처럼 쏟아져 나갔다. 한 물줄기는 정확히 서쪽으로 분출되어 집, 헛간 담장을 파괴하며 흘러갔다. 또 한 줄기는 정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텍사스--퍼시픽 철도 중 15m를 순식간에 휩쓸고 나서 도시 중심가로 들어가 시내를 완전히 침수시켰다...세 번째 흐름은 남쪽에서부터 쓸고 지나갔다. 그 물줄기는 앞에 놓인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물통, 공구대, 가구, 심지어 닭과 개까지 아차팔라야강의 거센 물결에 휩쓸려 떠 내려갔다.
뉴올리언스 당국은 제방 위에 모래 주머니를 쌓은 것으로는 이 역사적인 도시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을 재빨리 깨달았다. 그들이 제시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뉴올리언스 바로 밑의 카에나본의 제방을 폭파시키는 것이었다. 불어난 미시시피강의 물이 이 인공적으로 만들어 낸 틈으로 빠져나가 인구가 아주 적은 플라크마인스와 세인트버나드군을 거쳐 바다로 빠르게 빠져나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해당 지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5월 3일, 제방은 폭파되었으며 몇 시간이 안 되어 뉴올리언스를 구한 폭파는 미합중국 육군 공병대가 홍수 통제 정책으로 그렇게 애용하던 제방 유일 정책도 완전히 무너뜨렸다.
미시시피강과 그 지류들은 7월이 되어서야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했으나 홍수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영향은 그 이후까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공식적인 사망자수는 약 250명이었으나 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익사하거나 떠다니는 파편에 의해 죽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6만 2000채 이상의 집이 물에 쓸려갔으며 그 외에 4만 1000동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면화가 아직도 주상품이었던 지역에서 적어도 100만 헥타르에 이르는 면화 재배 지역이 물에 침수됐다. 곡물 손실 추정치는 1억 달러를 넘어섰다. 약 2만 6000두의 소, 12만 7000마리의 돼지, 9000마리의 말이나 노새, 100만 마리의 닭을 잃었다. 물이 빠졌을 때는 파종기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 있었을 뿐 아니라 농사를 시작하는 데 필요한 종자나 가축도 없는 상태였다.
1927년 홍수의 규모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에 대응한 구조 작업의 규모였다. 당시 상무장관이었던 허버트 후버와 미국 적십자의 제임스 피서(재난 구조에 대한 전문 지식으로 재난 짐이라는 별명이 붙었던)의 공동 감독 아래, 자원자들로 이루어진 연인원 3만 3000명의 사람들이 이재민을 돕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 놀라운 역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적십자에서 154개의 숙박 시설을 만들어 32만 5000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자기 집에 남아 있던 31만 2000명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미국과 해외에서 보낸 1700만 달러와 철도와 정부에서 제공한 600만 달러를 나누어 주는 것을 도운 일이다.
구조 작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던 것은 자발적으로 봉사에 참여한 온갖 종류의 수천 척의 보트들이었다. 미시시피주 그린빌 지역에서는 주류 밀매자들이 자신들의 고성능 보트들--특히 미국 세무서 직원들의 배를 따돌리기 위해 고안된--을 구조선으로 바꿈으로써 하루 아침에 영웅이 되었다. 황량하게 쓸려나간 빅스버그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선미 외륜 기선 스프라그호가 피난민들을 가득 태우고 전속력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기운을 얻었다. 멤피스에서는 워바시호의 선장이 자신의 선미 외륜 기선을 이끌고 물이 넘치는 들판과 반쯤 가라앉은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다니며 지붕 꼭대기로 피한 사람들을 태웠다. 그러나 구조 작업의 선봉을 담당한 사람은 미시시피주 메트칼프의 허먼 카이웨트 같은 사람들이었다. 카이웨트는 모델 T 포드 엔진을 단 작은 발동선으로 삼각주를 돌아다니며 오도가도 못하게 된 홍수의 피해자들을 찾아다녔다. 한 번은 거의 72시간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200명 가량의 사람들을 구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비극을 목격하기도 했다. 카이웨트는 회상한다.
일곱 명을 태운 채 떠 다니는 집이 있었다. 난 그들이 부부와 다섯 자녀라고 생각했다...그 집에 접근해 가는데 갑자기 집이 어떤 그루터기 같은 데 부딪혀 박살이 나 버렸다. 난 그곳에서 판자 같은 것들을 10분 동안 수색했으나, 한 명도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그 부부는 한 서른 다섯쯤 되어 보였고 가장 큰 애는 기껏해야 열 여섯쯤 된 것 같았다.
1927년의 미시시피 대홍수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은 게 있다면 그것은 연방과 지방 정부가 그들의 홍수 통제 정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928년 5월 15일, 의회는 기존의 제방 체계를 증대하고 강화시킬 저수지, 댐, 방수로를 건설하기 위해 3억 2500만 달러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가장 큰 강 미시시피는 1927년 이후에도 여러 차례 범람했다. 그러나 1927년의 끔찍한 홍수와 같은 참담한 결과를 낳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지 홍수 통제 기술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강의 가장 유명한 수로 안내인인 마크 트웨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한번쯤 되새겨 보는 게 좋을 것이다.
미시시피강을 아는 사람은 곧 단언하게--큰 소리가 아니라 혼잣말로--될 것이다. 배후에 세계적인 재력을 가진 강 위원회가 1만개나 되더라도 그 무법의 물줄기를 길들일 수는 없다고.
미 중부 지방의 대한발
폐허로 변한 미국의 곡창지대
오클라호마주 기몬시에서 1935년 4월 14일에 있은 감리교회의 주일 예배는 평소와 다름없이 비가 오게 해달라는 기도로 끝을 맺고 있었다.
오클라호마주의 서부에 있는 손잡이 모양의 땅과 그 너머 갈색 평원에는 구름 한점없는 청명한 하늘에서 뙤약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지역 주민들의 생업의 근간인 끝없이 펼쳐진 밀밭은 땡볕에 타들어가고 있었고, 밭의 흙은 가루가 되어갔다. 비가 오지 않으면, 그것도 아주 빨리 오지 않으면, 올 농사는 버리게 될 것이다. 농사를 망친 농장이 늘어날 것이고, 문을 닫게 되는 은행이 속출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뜩이나 심각한 경제적 곤경에 처해 있는 주민들은 더욱 큰 불행과 절망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다.
그 일요일 오후 3--4시께 북서부쪽으로부터 거대한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하늘이 어두컴컴해지기 시작했다. 300m 상공에 드리워진 시커멓고 짙은 구름이 사나운 바람에 실려 지평선과 지평선을 이으면서 순식간에 대지를 뒤덮었다. 그 광경은 유전에서 타오르는 불길로부터 나오는 연기를 연상시키기도 했고, 진흙탕 물이 거대한 폭포를 이루며 밀려오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먹구름은 한방울의 습기도 머금지 않았다. 그것은 흙먼지, 다시 말해 바싹 마른 들판에서 가루처럼 부숴져 날려 올라간 엄청난 양의 흙을 가득 싣고 있었으며 질식시킬 것 같은 파괴적 폭풍이 되어 인근 지역 일대를 휩쓸었다.
그때까지 거의 4년 동안 바람이 많이 부는 겨울이나 이른 봄에는 미국 서부의 대평원 전역(서부의 대평원은 황사 현상이 심해 황진지대라고도 불린다--편집자주)에 흙먼지 바람이 간간이 불곤 했었다. 흙먼지 바람은 교통을 마비시켰고, 기차를 탈선시켰으며, 울타리 기둥을 흙에 파묻기도 했다. 또 그 바람은 들판의 흙을 벗겨내서 토양을 황폐화시켰다. 주민들은 먼지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유리창 틈새를 헝겊으로 막고, 젖은 천을 문 앞에 쳐놓아야 했다. 또한 숨을 쉬기 위해서는 젖은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려야만 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대부분 1935년 4월 14일에 밀어닥친 검은 폭풍 이 어느 폭풍보다도 가장 심했다는 사실에 별로 이의가 없다. 그 폭풍은 와이오밍주 동부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진행 콜로라도주와 캔자스주를 거치면서 세력을 더욱 확장했다. 폭풍이 오후 2시 40분 도지시티의 하늘은 갑자기 40분 동안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캔자스주 리버럴시에서는 대낮이 밤처럼 바뀌어 사람들이 성냥불을 켜들고 팔을 뻗었을 때 그 불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폭풍은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오클라호마주 기몬시를 시속 130km로 통과했다. 오클라호마주 보이시시티 부근에서는 장례행렬이 멈춰야 했다. 텍사스주 애머릴로시에서는 앞이 안 보여 차를 길 옆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폭풍이 지나갈 때 까지 차 속에 웅크리고 있거나 짐마차 밑이나 지하실이나 지붕을 씌운 우물 등, 어디든 들어가 피신했다. 한 피해자는, 그 칠흑 같은 어둠이 마치 이 세상의 종말같이 보였다 고 말했고 악용이 현실로 나타났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대평원의 광활한 벌판은 항상 홍수와 가뭄이 되풀이 되는 피해를 입어왔고 특히 기몬시를 중심으로 한 남부 지역은 그 피해가 더욱 컸지만 이때와 같은 피해는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다. 거듭되는 흉작, 농산물 가격의 하락, 그리고 전국적인 경제 파탄으로 빈곤과 붕괴의 시기가 도래했다.
가뭄의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은 더스트 보울(황진지대)지역으로, 이곳은 콜로라도주 남동부, 뉴멕시코주 북동부, 캔자스주 동부 그리고 텍사스주와 오클라호마주에 걸쳐 손잡이처럼 뻗어 있는 지역이었다. 약 3880만 헥타르에 달하는 이 지대에는 대초원과 관목지대가 어우러져 있다. 19세기초 정부 조사관은 이곳에 미국의 대사막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지역이 전체적으로 황폐하여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날로 팽창하는 미국의 목축업자들이나 농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남북전쟁 전에는 대규모의 가축떼들이 이곳에서 풀을 뜯었다. 그리고 1870년대와 1880년대에 들어서서 철로가 서부 지역으로 확장됨에 따라 홈스테드법으로 자작농이 된 농부들이 정부의 토지 무상공급 약속과 표충이 견고한 목초지를 쉽게 개간할 수 있는 강철 쟁기의 등장에 힘입어 수만 명씩 이곳으로 이주했다. 캔자스주 서부의 인구는 1880년대에 4배로 증가하였고, 폴로라도 평원은 3배, 텍사스주의 좁고 긴 돌출부 지역은 6배의 인구 증가를 보았다.
이곳에 새로 이주한 사람들은 있는 힘을 다해 거친 풍토와 싸웠다. 1890년대 중반에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어 흉년이 들자, 수많은 농부들은 짐은 싸들고 다시 동부로 향했다. 그러나 새 정착민들이 즉시 그 자리를 차지했고, 그들은 또다시 홍수와 가뭄이 반복되는 자연에 맞서 싸웠다.
1914년부터 예년과는 달리 습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당시는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군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엄청난 밀의 수요가 발생했다. 대평원에는 새로운 방식의 영농 기계화가 이루어지고 있어서 농부들은 수확량을 대폭 늘릴 수가 있었다. 드 넓은 처녀 목초지가 새로운 농경지로 편입되었다. 1920년경에는 약 680만 헥타르에 달하는 대평원의 땅이 경작되어 대평원은 미국의 밀 수확에 큰 몫을 차지했다.
새로운 기계 농법은 지나치게 빠르고 효율적이어서, 농부들은 예기치 않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로 과잉 생산이었다. 전후 수요가 감소하여 남아도는 밀이 시장으로 밀려들어왔다. 밀값이 하락하자 농부들은 줄어든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더 많은 땅을 경작했다.
1920년대에 경제가 다시 부활했을 때, 약 200만 헥타르의 새 땅이 추가로 농경지로 개발되었다.
1930년에는 미국 대부분의 지역이, 그 전해 10월에 일어났던 월가의 주식 폭락 사태의 여파로 인해 극심한 경제 공황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러나 농부들은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 해 겨울에 밀어닥친 가장 큰 문제는 가뭄이 아니라 폭우로 인해서 생긴 홍수였다. 그러나 곧 강우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흙먼지가 날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의 첫번째 흙먼지 바람은 1931년의 늦겨울과 이듬해 초봄에 걸쳐 텍사스주의 좁고 긴 돌출부 지역에 밀어닥쳤다. 규모도 작았고 또 피해도 경미했지만 이 바람은 다음에 이어질 비극의 서곡에 불과했다. 4월과 5월에는 비가 내려 땅을 적셨기 때문에 먼지는 일시적으로 가라앉았다. 그러나 그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기는 점점 더 불순해졌다.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는가 하면 간간이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려 지역에 따라 심한 홍수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우박을 동반한 폭풍 탓에 상당한 지역의 밀 재배가 피해를 입었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는 뿌리를 잘라먹는 벌레떼들이 밀밭을 덮쳤다. 그해 여름의 밀 수확량은 헥타르당 약 24말밖에 안될 정도로 곤두박질했다. 소떼들은 흙먼지로 뒤덮인 초원에서 질식하거나 굶어 죽었다.
사태는 이제 재난으로 변하고 있었다. 1933년초에는 수년만에 보는 최악의 먼지 폭풍이 텍사스주 북부를 강타했고, 이를 시작으로 139개의 다른 폭풍이 잇달아 이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흙먼지가 파도를 타듯이 바람에 날리며 들판을 휩쓸었고, 창고와 헛간 벽에는 흙먼지가 마치 눈처럼 쌓였다.
그리고 가뭄 지역이 점점 확산되었다. 비교적 수분이 풍부했던 아칸소주와 그 북부 지역의 평야까지 가뭄이 들었다. 1933년 11월 중순, 지금까지 온 것 중에서 가장 큰 시꺼먼 폭풍이 다코타주에 몰아쳤다. 며칠 동안 하늘은 어둠에 휩싸였다. 먼지 구름은 바람에 실려 오대호와 미시시피강 계곡까지 옮아갔다.
1934년은 농부들이 한층 더 어려운 지경에 처한 한해였다. 거대한 먼지 바람이 봄철 내내 대평원을 휩쓸었다. 그 바람은 5월 9일부터 4일동안 초특급 폭풍이 되어 다코타주에서부터 텍사스주까지 걸쳐 있는 밀밭 지대를 휩쓸었다. 폭풍으로 인해 철로는 막혀버렸고 시카고까지 연결되는 항공 교통이 두절되었다.
시속 161km의 속도로 휘몰아친 이 바람은 가루가 된 대평원의 표피 토양을 완전히 벗겨내어, 동쪽에 있는 대서양 연안까지 날라다 뿌렸다.
그 바람에 볼티모어와 뉴욕에서는 해가 먼지 속에 가려 시계가 흐려졌고 워싱턴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책상 위에도 대평원에서 날려온 먼지가 뽀얗게 쌓였다.
가뭄과 강풍이 계속해서 대평원을 강타하면서 피해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비록 폭풍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먼지가 가득찬 공기를 계속 호흡하게 되면서 호흡기 질환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기관지염, 패혈성 인두염 그리고 무엇보다도 분진 폐염이라고 부르는 병이 기승을 부렸다. 적십자에서는 황진지대에 속한 주들에 6개의 간이병원을 개설하고 긴급 사태에 대비해서 수천 개의 방진 마스크를 배포했다.
질병보다 더 심각한 것은 가뭄으로 인한 경제적 침체였다. 수확량이 격감하자 농부들은 경기가 좋았던 시절에 값비싼 농기구를 새로 구입하거나 땅을 늘리기 위해 은행에서 빌린 융자금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은행들이 담보물들을 차압하면서 수천가구의 농가들이 거주하던 땅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곡물상에서부터 약국, 그리고 트랙터 대리점에 이르기까지 많은 소규모의 기업들이 문을 닫았다. 마침내 은행마저도 무너졌다.
농장에서 쫓겨난 농가들은 하나 둘씩 비참한 황진지대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다 찌그러진 소형 트럭과 포드 자동차에 보잘것없는 가재도구를 싣고 대부분의 농부들은 서쪽의 캘리포니아로 향했다. 그곳은 아직 땅이 푸르렀다. 그들은 거기서 기회를 잡기를 바랐다.
1936년경에는 이주민 행렬이 봇물 터지듯이 늘어나 한 조사에 따르면 농가 4채 중 1채가 빈 집이 되었다.
5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1930년대에 대평원(황진지대)을 떠나 서부로 이주했다. 그들은 대부분 대기업화된 농장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는 일을 하면서 포장용 나무상자로 지은 집에서 살았는데 난방은 물론 하수시설도 안된 상태였다. 본토막이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이들이 어디 출신이건간에 모두 오키(1930년대 오클라호마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생활고를 못 이겨 방랑하게 된 농부를 지칭)라고 불렀다.
황진지대에 남아 끝까지 가뭄과 싸운 사람들은 이들보다 사정이 다소 나았다. 여기서 돈을 벌었으면 이곳을 뜰 수 있었을 거야. 지금처럼 빈털터리가 된 상태로 뜰 수는 절대 없지. 기몬시의 한 농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 결단은 아주 현명한 것이됐다. 수많은 정부 기관이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식량과 옷을 제공하고 씨앗과 사료 그리고 연료를 구입하는 데 필요한 비용 등을 대출해 주었으며 수확량 쿼터를 설정해 주었다.
토양 보존 전문가들은 가축들이 풀을 너무 많이 뜯어먹으면 토양이 파괴되므로 이런 관행은 시정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추수를 한 우에는 그루터기들을 태우지 말고 쟁기로 땅을 갈아 그루터기를 땅속에 묻도록 했다. 이렇게 하면 땅이 비옥해지기 때문이다. 쟁기질에도 새 방법이 도입됐다. 바람이 많이 불어오는 방향과 직각으로 깊게 고랑을 파면 바람이 불어도 흙이 흩날릴 확률이 적었다. 그리고 토양 보존을 위한 민가 단체에서는 바람막이용 나무를 수천 그루씩 심기도 했다.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도움이 됐다. 그러나 복구에는 시간이 걸렸다. 가뭄이 극에 달했던 1935년 한해에만 황진지대에서 날아가 버린 표피 토양은 8억 5000만 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그해에 한 번의 폭풍이 휩쓸어가 버린 흙만 해도 파나마 운하를 두 번이나 메꿀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가뭄은 1936년과 1937년에도 계속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메뚜기 떼가 날아와 가뜩이나 부족한 농작물을 거의 다 먹어 버렸다.
그러나 한 두 지역에서 서서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938년에는 여러 해만에 풍작을 거두었다. 그해 겨울에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비가 듬뿍 쏟아져서 목초지대를 땅속 깊숙이 적셨다. 8년에 걸친 숨막히는 먼지와 엄청난 절망을 가져왔던 가뭄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텍스호마의 (타임)지는 기뻐서 이렇게 보도했다. 황진지대라는 말은 이제 우리가 잊어야 할 말이 됐다.
뉴잉글랜드의 허리케인
초대형 폭풍이 미 북동부 지역에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내다
최초의 경고는 1938년 9월 16일, 금요일 밤에 왔다. 브라질 화물선 알레그레테호가 푸에르토리코 북동쪽 564km 해상에서 대형 폭풍을 만났다고 무선통신을 보내온 것이다. 프로리다주에서는 알레그레테호가 보내온 통신 내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잭슨빌의 미국 측후소는 폭풍이 시속 32km로 본토를 향해 올라오고 있으며, 9월 20일 화요일 저녁쯤 마이애미 근방에 상륙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플로리다 주민들은 집에 바리케이드를 치는 등 최악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러나 월요일 밤이 되었을 때 폭풍은 진로를 바꿔 동부 해안과 거의 평행을 이루며 북상했다. 만일 폭풍이 이 진로를 그대로 유지한다면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해터러스곶 남쪽 부근에서 바다로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됐다. 화요일 밤, 안도의 숨을 내쉰 잭슨빌의 기상학자들은 워싱턴 D.C.의 기상국 본부에 폭풍은 더 이상 해안 지방에 아무런 위협도 주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허리케인 소식은 노동절 휴가가 끝난 뒤에도 롱아릴랜드 남부 해변가 휴양지에 남아 쉬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실로 아득히 먼 나라의 이야기같이 들렸을 것이다. 북동부 지방에 규모가 큰 허리케인이 오는 것은 드문 일일 뿐 아니라 날씨도 전혀 그런 기미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화요일 밤에는 롱아일랜드에 천둥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졌다. 그러나 9월 21일 수요일 아침에는 안개와 구름 사이로 햇살이 이따금씩 비치기도 했다.
롱아일랜드 브리지햄프턴에서 발행되는 한 신문의 편집자인 어니스트 클라우스는 사람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계획도 세우고 일도 했다고 썼다. 자녀를 하인에게 맡겨 놓고 시내에 볼일을 보러 가는 사람도 있었다. 평소처럼 조촐한 사교 모임을 가졌고 점심 식사를 했으며 소풍을 갔다. 몬토크에서는 몇 척의 낚싯배들이 바다로 나가기도 했다. 사정은 훨씬 북쪽에 있는 로드아일랜드주의 해변 휴양지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아침, 가정용 무비카메라에 잡힌 화면에는 휴가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따스한 9월의 날씨를 즐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클라우스는 또한 바다가 밤새껏 시끄러웠으며 그래서 많은 주민들이 수요일 아침에 해변가로 나가 여느 때하고는 달리 큰 흰파도가 수평선을 따라 일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쓰기도 했다. 해가 구름 사이를 뚫고 고개를 내밀자 녹색 기운이 감도는 파도의 물 비늘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열대성 폭풍에 대해 경험이 많은 서인도제도 출신의 한 여인은 자신의 고용주에게 허리케인이 올 것 같은 날씨라고 말했다.
매사추세츠주 케이프코드의 남서단에 있는 팔마우스의 소방서장 레이 D. 웰스도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오후 1시 30분, 그는 해안가로 차를 몰고 가 간조 때 바다의 상태를 눈여겨 보고 웨스트브리지워터에 있는 주 경찰 본부에 전화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케이프의 남쪽 해안이 그날 안으로 범람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인근 지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배와 장비는 물론 자원봉사자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을 거의 믿을 수 없었던 주 경찰 당국에서는 즉시 다시 전화를 걸어 그의 전화가 장난이 아니었는지 확인했다.
웰스는 확고했다. 1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실제로 웰스가 주 경찰 본부에 전화를 걸고 있을 때 폭풍은 벌써 시속 240km로 북동쪽으로 올라오고 있었으며 속도나 위력면에서 가히 롱아일랜드 특급열차 라는 별명이 붙을 만했다.
대서양으로 빠져 나가리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알레그레테호가 처음 목격한 폭풍은 두 개의 고기압골 사이에 자리잡은 해터러스곶에서부터 롱아일랜드를 거쳐 뉴잉글랜드 지방까지 뻗어 있던 덥고 습기찬 저기압골로 빨려 들어가 버린 것이다. 고기압대는 저기압대를 물리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허리케인은 극도의 저기압권이다) 궤도를 벗어난 폭풍은 저기압골밖에는 갈 곳이 없었고 진행하는 동안 엄청난 속도가 붙은 것이다. 당시 미국의 기상국에는 현대적인 푹풍 추적 장비가 없었다. 또 폭풍의 진로 안에 든 배도 별로 없었기 때문에, 기상국은 그저 사람들의 목격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어 시의 적절한 경보를 내리지 못했다. 이와같이 엄청난 추진력을 갖고 대서양 연안을 따라 북진한 허리케인은 뉴저지주를 모로 때리고 높이가 9m나 되는 파도를 와일드우드와 매너스퀀 및 포인트 플레즌트 해변으로 밀어 올렸다. 뉴욕시에서는 방송국 건물이 파괴돼 방송이 중단됐고, 정전이 돼 지하철이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오후가 되자 허리케인의 눈은 롱아일랜드 남쪽해안 중심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이곳 해안선에는 모래톱이 죽 뻗어 있고 해안의 저지대를 따라 방이 30개나 되는 호화 맨션과 간단히 지은 여름 별장 등 수천 채의 가옥이 늘어서 있었다.
바람이 먼저 불어닥쳤다. 돌풍이었다. 곧 굵은 빗줄기가 뒤따랐다. 해변에 정박해 있던 조그만 배들은 부서져 버렸고 정원을 장식한 육중한 가구들은 공중으로 날아갔다. 하늘을 가득 덮은 먹구름이 빠르게 이동을 하자 지붕을 이은 널판지들이 뜯겨져 나갔다. 유리창이 깨지고 문이 꽝 소리를 내며 닫히다 열리기를 거듭했다. 전신주가 쓰러졌다. 클라우스는 오후 3시, 이것은 9월에 불어 오는 평범한 폭풍이 아닌 것이 분명 하다고 말했다. 기압계가 기록적으로 낮게 떨어졌고 바람은 급속하게 허리케인급이 되었다. 4시쯤 되자 사람들은 짙고 높은 안개가 바다에서 빠른 속도로 육지쪽으로 밀려 오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것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보니 그것은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더미 같은 바닷물이었다.
실제로 9m 높이의 물기둥이 저기압에 의해 바다에서 빨아 올려져서는 맹렬한 바람을 타고 해안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하늘은 칠흑으로 변했고 후텁지근한 공기는 비를 잔뜩 머금었다. 물보라가 날리며 온갖 조그만 물체들과 어우러져 공중을 가득 채웠다 고 클라우스는 썼다.
창고와 계사는 뿌리째 뽑혀 산산 조각나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지붕은 어두운 하늘로 뜯겨 올라가 버렸고 굴뚝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강렬한 풍금 소리 같은 폭풍의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한번 들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소리였다.
억센 남자들이 강풍에 내동댕이쳐지고 거목도 마치 잡초처럼 뽑혔다.
죽음과 비극이 꼬리를 물었다. 어린이들이 물에 쓸려 내려가고 남편이 익사하는 것을 지켜본 아내들의 비극 속에는 영웅적인 행동과 남다른 침착성을 유지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노르웨이 출신으로 집사 일을 맡아 보고 있던 아르니 베네딕츤은 해변가에 있던 집들이 허리케인으로 날려가 겁에 잔뜩 질려 있던 20여명의 웨스트햄프턴 주민들을 질서 정연하게 모아서 온갖 파편이 날아다니는 폭풍을 뚫고 안전한 내륙쪽으로 피신시켰다. 그날 운이 좋지 않았던 30여명의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롱아일랜드를 할퀸 허리케인은 조그만 로드아일랜드주를 강타할 살인 펀치를 아껴 두고 있었다. 폭풍우로 일어난 큰 파도가 밀어닥치기 직전 로드아일랜드주의 미스카미커트 해변에 있는 휴가용 병장 소유주들은 9월의 폭풍에 대비해 안전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해변에 있던 사람들은 웃으며 농담을 주고 받았죠. 한 생존자는 이렇게 그때를 회상했다. 커튼이 비에 안 젖게 셔터를 올리고 유리창을 단단히 고정시키려고 했지요. 아주 재미있다고들 생각했어요. 그런데 갑자기...집들이 6--9m 높이의 물기둥 속에 잠긴거예요. 어떤 집들은 그냥 쓸려가 버렸죠. 이렇게 닥친 해일은 미스카미커트 한 곳에서만도 41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아마 피해가 가장 심했던 곳은 바다에서 48km 가량 떨어진 프로비던스일 것이다. 그 도시는 깔때기 모양으로 생긴 나라간세트만 꼭대기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만이 점점 좁아지면서 그 사이에 끼인 폭풍우 너울은 무시무시한 높이와 강도의 파도를 일으켜 로드아일랜드주의 주도인 프로비던스를 침수시켰다. 20톤이나 되는 방파제 바위들이 마치 돌멩이처럼 내던져졌고 높이가 21.3m나 되는 등대도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코네티컷주는 해안을 따라 자리잡은 롱아일랜드가 방파제 역할을 해주어서 해일로부터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인구가 밀집되어 있던 뉴런던시는 강풍과 홍수가 밀어닥친데다가 중심가에 화재까지 발생하는 바람에 시내가 폐허가 되다시피했다. 매사추세츠주는 케이프코드에서 엄청난 재산 피해와 약간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팔마우스의 칩 웰스 같은 관리들의 신속한 조치로 적어도 100명 이상이 목숨을 건졌다. 뉴욕에서처럼 보스턴에서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기가 끊겼다.
허리케인은 코네티컷강 계곡을 세찬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 매사추세츠주 중심부로 이동한 다음 버몬트주와 뉴햄프셔주의 산악지대까지 진출했다. 밤 10시쯤 세력이 약해진 폭풍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뉴욕주의 챔플레인호를 지나 캐나다로 들어가 몬트리올에서 마지막 힘을 쓰고는 소멸하고 말았다.
9월 22일 아침, 폐허로 변한 북동부 지역에 찬란한 햇살이 비쳤다. 수많은 나무들이 마치 성냥개비처럼 흩어져 있었다. 피해를 입은 해안 지역을 비행기로 살펴본 한 목격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들은 옆으로 쓰러져 진흙 속에 반쯤 묻혀 있었다. 집들은 마치 증기롤러로 눌러 놓은 것처럼 납작하게 되어 버렸다. 어떤 곳은 15채 정도의 집이 거대한 달걀 교반기로 휘저어 놓은 것처럼 함께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통계를 보면 적어도 600명 이상이 이 폭풍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그중 250명은 로드아일랜드주에서 불행을 당했다. 전체 재산 피해액은 4억 달러로 추정되었다. 가옥은 4500채 이상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1만 5000채가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으며 6만명이 집을 잃었다.
수많은 자동차와 배들이 파손되었고 약 3만 2000km에 달하는 전신, 전화 및 전선이 파괴되었다. 보스턴과 뉴욕의 몇몇 사업가들은 런던이나 파리, 그외 다른 유럽의 수도들과 연결된 케이블 선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다. 자동차 도로도 두절되었고 철로도 불통이었기 때문에 보스턴과 뉴욕을 왕래해야 하는 사람은 항공 교통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갓 태동한 항공 업계는 예기치 않은 호황을 누렸다.
피해를 복구하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때로는 힘이 들기도 했다. 바다는 수천 채의 집을 휩쓸어 갔을 뿐만 아니라 여러곳의 땅 모양을 완전히 바꾸어 놓아 복구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했다. 로드아일랜드주 찰스타운의 방파제용 해변은 이제 바다와 조수 연못 사이에 틈이 나 바닷물이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갈라져 버렸다. 그곳 주민들은 조그만 배들이 쉽게 쉰코크만에 닿을 수 있도록 수로를 파자는 얘기를 오래 전부터 해왔었다. 9월 22일 아침 그들은 하느님이 그 일을 대신 해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엄청난 재앙에도 희극적인 순간들이 있는 법이다. 롱아일랜드에 살던 한 남자는 폭풍이 불던 날 아침 뉴욕에 주문했던 비싼 기압계를 우편으로 받았다. 포장을 뜯는 순간 기압계의 바늘이 토네이도와 허리케인 이라고 표시된 부분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허리케인이라고? 해가 이렇게 밝게 비치고 있는데? 그는 기압계를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그러나 바늘은 그대로였다.
화가 난 그는 상품에 대해 불평을 하는 편지를 쓰고 기압계를 다시 포장해서는 근처 우체국으로 향했다. 그가 비와 바람을 헤치고 간신히 집에 돌아왔을 때에는 바닷가에 있던 그의 집은 이미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1938년의 허리케인은 너무도 갑작스러웠고 하느님이 전혀 경고없이 분노의 손길을 뻗쳤다는 점에서 이 폭풍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아주 특이한 경험이 되었다. 맹렬한 폭풍은 겨우 몇시간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허리케인의 영향권에 든 지역에서 모든 사람들의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칠레의 대지진
엄청난 희생자를 낸 한밤의 공포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1월의 수요일 아침에 발생한 지진 뉴스는 그렇게 대단한 것 같지 않았다. (뉴욕 타임스)지는 기사의 밀집한 안쪽 지면의 미국--필리핀 교역에 관한 기사와 캐나다의 국방비 기상 사이에 칠레의 지진 소식을 단신으로 보도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1939년 당시는 세상의 관심이 온통 유럽에 감돌고 있는 전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먼 남아메리카 국가에서 발생한 지진 소식은 1면 기사감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진은 드문 일도 아니었다. 지진학자들은 지난 300면 동안 칠레가 거의 3년에 한번 꼴로 지진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지진 발생 24시간이 되기 전에 아마추어 무선 통신사들이 미친 듯이 보낸 메시지들은 이 지진의 피해가 간단하지 않음을 말해 주었다. 칠레 남부 중앙에 자리잡은 길이 320km, 폭81km의 비옥한 농업 지역이 1939년 1월 24일 한밤중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황폐화된 것이다.
자세한 소식이 단편적으로 알려지면서 일간 신문들은 엄청난 규모의 파괴와 절망적인 희생자들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지진의 피해가 가장 심한 지역은 산티아고 남쪽에서 400km쯤 떨어진 곳으로 이 지역의 최대 도시인 콘셉시온은 납작하게 무너져 내린 폐허가 되었고 그 인근 지역도 마치 불도저가 제멋대로 밀어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콘셉시온에서 내륙으로 80km 정도 들어간 곳에 위치한 대도시 치얀도 마찬가지로 파괴되었다.
사상자 수를 정확히 헤아린다는 것은 며칠이 지나도 불가능 할 것 같았다. 아니 영원히 불가능했다. 폐허가 된 농장에서, 그리고 지진이 일어난 도시에서 사람들은 이웃과 연락이 끊어졌고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수천 명도 너무 깊이 파묻혀서 구출될 희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외부로부터의 원조는 빨리 오지 않았다. 지진 발생 소식이 알려진 후 몇 시간이 지나서야 식량과 응급 처치 약품 그리고 의료진을 실은 기차가 칠레의 새 대통령으로 선출된 페드로 아기레세르다와 함께 산티아고를 출발했다. 그러나 이 기차는 11개의 적십자 물자 후송대와 함께 치얀 북방 98km 지점에서 철로가 불통되는 바람에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또 구호 비행기는 콘셉시온의 활주로가 너무 짧아 착륙에 실패하고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가 파괴의 참상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대참사 첫날 목격자들로부터 계속 전해지는 소식은 실로 악몽 그 자체였다. 예를 들어, 치얀 시립극장에서 심야 영화를 보고 있던 1000명의 관객들이 그저 우르르 하는 소리만 듣는 순간 건물 전체가 무너져 내려 압사하는 참화를 당했다. 탈출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뉴욕 타임스)지는 이렇게 전했다. 시신들을 끌어내었을 때 그들의 얼굴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표정을 띠고 있었다. 집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모르타르와 벽돌이 무너지고 무거운 기왓장이 폐허 더미 속으로 마치 납덩이처럼 떨어졌다. 몇몇 사람은 간신히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었지만 공중에서 쏟아지는 파편 세례만 받을 뿐이었다. 이날로부터 약 100년 전인 1853년에도 치얀은 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됐었다. 그런데 이제 성당의 벽이 가루가 되어 무너져 내리고 지사 관저도 옆을 지나가던 차를 덮치며 무너져 내리는 참사가 또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다.
지진관측소들은 지진이 절정에 달했을 때 지진계의 바늘이 완전히 상한선을 벗어났었다고 후에 보고했고 이에 앞서 여러차례 지진을 경험했던 주민들도 이번 지진이 가장 끔찍했다고 말했다. 그 진동은 멀리 아르헨티나의 마을에서까지 느낄 수 있었고 북쪽으로는 페루 접경 지대까지 미쳤다. 그러나 피해는 남북으로는 산티아고와 발디비아항 사이 그리고 동서로는 해안에서 안데스를 잇는 대륙 지역에 집중되었다.
6개주에서 모두 160만(이는 칠레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숫자이다)이 심한 진동을 느꼈다. 콘셉시온과 치얀 외에도 그보다 규모가 작은 도시들이 숱하게 파괴되었다 이 지역 농산물의 대부분이 선적되는 콘셉시온의 항구인 탈카우아노에서는 부두가 크게 파손되었고 조선소도 파괴되었다. 식량과 의복이 절망적으로 부족하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혼돈의 밤을 보낸 이들에게 닥친 길고 끔찍한 첫날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은 산자와 죽은자 모두에게 가혹하리만치 내리쬐는 태양이었다.
이곳에서는 1월이 한여름인 것이다. 구호품을 투하해 주려던 구호 비행기로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졌다. 시체들이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아마 일가들에게 신원 확인을 하게 하려는 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일가도 발견되지 않을지 모른다. 비행기 조종사는 치얀을 뾰족한 성당의 첨탑들과 다른 석조물들이 마구 불거져 있는 모습이 흡사 거대한 개미둑 같이 보인다고 말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전염병이 돌기 전에 시신들을 처리하기 위해 시신들을 미친 듯이 구덩이 속으로 집어던졌다. 또 비행기에서 참사 지대를 내려다본 사람들은, 수많은 무리들이 있지도 않은 피난소를 찾아 콘셉시온 거리를 헤매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재난 지역에서 온 소식들은 점점 더 참혹한 양상을 띠어갔다. 파상풍과 탈저에 대비한 혈청이 필요하다. 간호사와 다른 의료 원조도 필요하다. 식량이 아주 귀하다...텐트가 빨리 도착해야갰다. 콘셉시온에서는 이렇게 절망적인 구원 요청이 들어왔다.
사상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치얀에서만도 1만여명이 죽고 2만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철로와 다리가 끊기고 전선이 끊겼으며 상수도가 복구되려면 며칠 몇 달이 걸릴지 몰랐다. 정부는 재난 지역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군대는 치얀과 콘셉시온의 살아 남은 주민에게 완전 소개 명령을 내렸다. 그 지방 군대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동원되었지만 정부와 자선 단체, 개인 그리고 우방 국가들이 많은 지원 약속을 한 기본 생활 필수품들은 여전히 끊어진 철로와 고속도로 저편에 머물러 있었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가련할 정도로 적은 수의 구조 요원들이 견딜 수 없는 더위와 부족한 음료수에도 불구하고 쉴 사이 없이 사망자들을 묻고 부상자들을 도와주고 무너진 건물 더미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구출해 내고 집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 고 (뉴욕 타임스)는 보도했다.
구호대들이 조금씩 남쪽으로 내려오는 동안 지진으로 난타당한 이 지역을 탈출할 수 있는 사람들은 차로 또는 걸어서 빠져 나갔다. 지진이 난 지 만 3일이 되는 금요일에 최초의 구조선이 탈카우아노항에 닻을 내렸다. 영국 순양함 에이잭스호와 엑시터호는 칠레 정부의 명령을 받도록 조치되었다. 순양함은 해병대를 파견하여 구조대를 도와주고 대대적인 항구 청소 작업을 벌였다. 그날 저녁 엑시터호는 600명의 피난민들을 북쪽의 발파라이소로 수송했고 다른 많은 외국 선박도 일정을 변경하고 이재민을 대피시키는 것을 도왔다. 100명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식량과 의약품들이 제일 먼저 이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구호 노력은 체계적이지 못했다. 많은 지역이 여전히 도움을 받지 못했고, 피해가 제일 심한 지역의 사정은 말할 수없이 비참했다.
식수가 너무 귀해서 찌는 둣한 더위에 입이 말라붙은 국민학교 아동들이 수저로 물을 받아먹고 있다 는 소식이 여러 곳에서 들려왔다.
점증하는 사상자 수와 끝이 없는 것 처럼 보이는 피해 상황은 드디어 믿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다. 치얀을 재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 이라며 현대의 폼페이처럼 폐허가 된 이 도시를 버리고 다른 곳에 도시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고 말하는 시 관리도 있었다.
새로운 진동에 이어 화산 폭발의 기미마저 나타났다. 그리고 폭우가 겹쳐 생존자들을 더욱 곤경에 빠뜨렸다.
금요일에도 몇 시간 동안 공포의 순간이 계속되었다. 치얀을 내려다보는 화산 봉우리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하늘에 새빨간 불덩이를 쏘아 올렸다. 폼페이에 비유한 것이 정말로 더 잔인한 의미를 지닐지라도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행히도 화산의 폭발은 일어나지 않았다.(그러나 지진이 일어난 지역의 다른 화산들은 그 다음 주에 폭발했다) 그대신 새로운 재난이 토요일에 일어났다. 맹렬한 여름 폭풍우가 참사 지역에 밀어닥친 것이다. 반라 상태의 수천 명의 생존자들은 은신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억수 같은 비를 맞아 온몸이 흠뻑 젖은 채 안데스산맥의 차가운 바람을 거슬러 북으로 북으로 가려고 했다. 대피할 곳이라곤 전혀 없다...수천 명의 부상자들은 담요로 간신히 몸을 감싸고 나무 밑에 누워 있다. (뉴욕 타임스)가 보낸 기사다.
이것으로 악몽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치얀시의 폐허 더미 속에 파묻혀 있는 생존자들을 구출하려는 마지막 시도 끝에 드디어 12살짜리 소년이 구출되었다. 그 소년은 자기가 기르던 개와 함께 4일간 폐허 속에 갇혀 있었다. 미친 듯이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점점 작아져 가더니 오늘은 조용해졌다. 생존자들은 실종된 그들의 일가들을 다시 보리라는 희망을 모두 버렸다.
그들은 더이상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 그들은 심지어 말도 하지 않는다. (타임스)의 보도처럼 구조의 기적은 한계가 있었다.
치얀의 관리들은 생존자들(이중에는 수천 명의 고아가 포함돼 있었고 이 아이들을 돌봐 줄 가족들이 절실히 필요했다)을 소개시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손이 미치지 않아 방치돼 있는 수천구의 썩어가는 시체들로부터 발생하는 질병들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을까를 토의했다. 밤이 되자 수백 톤의 생석회와 다이너마이트를 체계적으로 폭발시키면 몇 시간 안에 한때는 아주 아름다웠던 식민지 풍의 이 도시에 마지막 손질 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구출 작업과 소개 작전은 천천히 계속되었다. 관리들은 이제 이 재난이 사회적, 경제적으로 끼칠 영향과 이 지역에 올 장기적 피해를 헤아리는 데는 관심을 돌렸다. 당국의 통계에 의하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5만, 부상자는 6만이었고 7만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비록 나중에 조사원 집계에서는 사망자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인명 손실은 엄청났다.
콘셉시온의 70퍼센트가 사라졌고 치얀은거의 전지역이 소멸했다. 칠레의 곡창이요 경제를 살려 주던 농업지대도 마찬가지로 파괴되어 버렸다. 헛간들, 창고 건물들, 그리고 곡물 사일로들이 무너져 버렸고 관개용 수로가 파괴되었으며 상수도원이 오염되었다. 농작물을 심었던 들판은 완전히 갈라졌고 추수를 눈앞에 두고 있던 농작물은 완전히 버렸다. 칠레의 가장 비옥한 농토 수백만 에이커가 하룻밤 사이에 황무지로 변한 것이다. 이 농토를 얼마나 빨리 정비해서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을는지는 예측 불가능이었다.
경제의 다른 부분에도 혼란이 왔다. 참사 지역의 탄광업은 피해를 보긴 했지만 귀중한 질산염 및 구리 광산은 지진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광산업 역시 칠레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남북 교통망의 붕괴로 인해 큰 손실을 당했다.
남북으로는 4281km나 뻗어 있고 동서로는 평균 201km에 불과한 독특한 지형의 칠레에서 중부의 넓은 지역이 마비된다는 것은 나라 전체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었다.
재무장관은 이 지역 복구를 지원하기 위해 수천만 달러에 상당하는 금액을 차관으로 도입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는 중에도 여러 차례의 여진이 이 지역을 계속 뒤흔들어 마비 상태를 지속시켰다. 지진이 발생한 지 6일째 되던 날 생존자들은 공포에 질린 채 거의 24시간 내내 여진에 시달려야 했다. 처음에 약하게 시작된 진동은 천둥치듯 커지더니 마침내 잦아들었다. 여진으로 인한 피해는 거의 없었다. 첫 번째 지진이 그만큼 참사 지역을 완전하게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지진파의 유형
지진으로 방출되는 엄청난 에너지는 세 종류의 기본적인 지진파에 의해 전파된다. 가장 빠른 1급파 혹은 P지진파는 초속 6.5km로 땅속을 뚫고 지나간다. P지진파 앞에 놓인 암반층은 순식간에 오그라들었다가 다시 길쭉하게 펴진다. 2급파 즉 S지진파의 속도는 1급파의 절반 정도로 굴곡을 그리며 진행하면서 바위를 좌우, 상하로 흔든다. 마지막으로 표면파는 P지진파와 S지진파가 지구표면에 주는 충격으로 생긴다. 바다의 파도처럼 수직으로 움직이거나 아니면 Z자 모양을 띠며 수평으로 움직이면서 건물이나 땅 표면에 가장 심한 피해를 줄 때가 많다.
엠파이어 스테이트에 충돌한 폭격기
지옥의 불길이 현실로
사상자 수는 엄청난 재난치고는 그리 많지 않았다. 14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렇지만 수많은 뉴욕 시민들에게 1945년 7월28일 토요일 아침은 기억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공포의 순간으로 남을 것이다. 그들의 눈앞에서 비행기 한대가 당시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자 미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뉴욕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375m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충돌한 것이다.
이 비행기는 B-25 쌍발 폭격기로, 1942년 하늘의 영웅 지미 두리틀이 조종하여 실전에서 우수한 성능을 발휘한 기종이었다. 그는 이 폭격기 16대를 이끌고 일본에 대한 미국의 첫번째 공습을 감행했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들이받은 불운의 폭격기의 이름은 올드 존 페더 머천트였다. 조종사는 2년의 전투 경험이 있고 훈장도 탄 윌리엄 F. 스미스 중령이었다. 그는 그날 매사추세추주 베드포드에서 뉴저지주 뉴워크 공항까지 정규 비행을 하던 중이었다. 폭격기에는 크리스토퍼 도미트로비치 상사와 집에 가기 위해 비행기를 얻어 탄 젊은 해군 수병이 동승하고 있었다.
스미스중령은 뉴욕의 라가디아공항 상공에 당도했을 때 관제탑으로부터 착륙권고를 받았다. 지표의 안개, 이슬비 및 불과 210m 상공에 떠있는 구름 등 기상 악화로 가시거리도 4.8km 밖에 되지 않아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 이었다. 그러나 스미스중령은 원래 비행 계획을 그대로 지키기로 결정하고 맨해튼섬을 가로질러 뉴워크를 향해 몇 킬로미터를 계속 비행했다. 그가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리자 관제탑은 구름이 무척 낮게 떠 잇기 때문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위부분이 시계로부터 가리워져 있다고 경고했다. 알았습니다, 관제탑 감사합니다. 스미스의 짤막한 대답이었다.
그 다음 몇 분 동안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앞으로도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스미스가 시계 제로 상태의 짙은 안개비 속에서 완전히 방향을 잃었으리라는 설명이 가장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여전히 맨해튼 상공을 날고 있으면서 그는 분명히 그곳을 지났다고 생각하고 뉴워크에 착륙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이런 추측은 그가 뉴욕시를 가로질러 죽음의 비행을 시작하였을 때 착륙기어를 내렸다는 사실로 뒤받침된다.
이 폭격기가 맨해튼의 상업 지역과 주거 지역 중간 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향하다가 5번 애비뉴 부근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순간 사라들은 공포에 질려 그 위험한 비행 항로를 지켜보았다. 5번 애비뉴 부근의 고층 건물들 거주자와 근무자들은 비행기 소리에 모두 유리창으로 다가가서는 구름 사이를 번득이며 지나가는 은빛 유령을 보고 그 자리에 못박히고 말았다. 그 비행기는 너무 낮게 날고 있었던 것이었다. 록펠러 센터의 RCA 건물 옥상 전망대에 있던 한 남자는 그 비행기가 자기 위치보다 300m나 낮게 날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고층건물 사이 미로 속에 갇혔다는 것을 깨달은 스미스는 고도를 높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프로펠러가 상승 모드로 들어가자 엔진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착륙 기어가 제자리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가 상승하는 것이 방해를 받았다. 비행기 아래에서는 수많은 보행자들이 정상이 아닌 비행기 소리가 도심에 울려퍼지자 큰 재난이 곧 닥쳐 오리라는 것을 느꼈다. 라디오의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인 스탠로맥스는 5번 애비뉴에서 비행기를 보고 소리 질렀다. 올라가, 이 바보야, 올라가! 그러나 너무 늦었다. 오전 9시55분, 총 중량 12톤인 올드 존 페더 머천트기는 지상 293m 높이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8층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이 참사를 아래에서 지켜본 목격자들은 충돌하는 소리에 이어 무시무시한 정적의 순간이 뒤따르더니 폭격기가 곧 폭발했다고 말했다.
폭발과 더불어 주황색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고 유리와 금속 및 돌의 파편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79층에 있던 미국 천주교 복지 협회에 근무하는 사람들에게 이 재난은 청천 벽력이었다.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사무원 10명과 비행기에 타고 있던 3면은 충돌한지 몇 분 만에 불에 타 죽었다. 다른 1명은 나중에 화상으로 죽었다. 한 사망자는 몸이 유리창 밖으로 퉁겨져 나와 7층 아래 선반에 걸렸다. 기체는 가로 5.4m, 세로 6m 되는 구멍을 내며 빌딩에 정통으로 박혔다. 엔진 한 개는 79층 바닥에 부딪친 후 기체에서 나온 연료에 불을 붙여 산소 탱크를 폭발시켰다. 이 불붙은 엔진은 엘리베이터의 통로로 튀어들어가 빌딩의 지하층으로 떨어졌다. 800갤런의 가솔린이 계단을 따라 75층까지 폭포처럼 쏟아졌다.
다른 엔진과 착륙 기어 한 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78층을 뚫고 들어가서는 산산조각이 났다. 엔진 한 조각과 무게 500kg의 착륙 기어는 7개의 벽을 뚫고는 건물 남쪽 밖으로 튀어나가 훨씬 낮은 다른 건물 위로 떨어졌다. 비록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연기와 불길이 치솟고 건물이 크게 파괴되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있던 엔진의 파편은 두꺼운 벽을 뚫고 나가 엘리베이터 케이블을 끊어 버렸다.
엘리베이터를 운행하고 있던 베티 루 올리버는 76층을 막 지나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가 갑자기 줄이 끊겨 그대로 건물 지하층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등과 다리가 부러진 채 파편 더미에 덮인 20살의 올리버부인은, 마침 사고가 나던 순간 그 건물 옆을 지나가고 있던 젊은 해안 경비 대원 도널드 몰로니에 의해서 엘리베이터 지붕에 난 구멍을 통해 구출되었다. 몰로니는 그날 활약한 영웅들 중의 한 명으로 연기가 자욱한 계단을 뛰어올라가, 79층에 있던 캐서린 오코너를 지상으로 데려왔다. 오코너는 79층에서 일어난 참변을 피한 7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남쪽에 있는 방으로 피신해서 화를 면했다. 검은 연기가 문 밑으로 밀려들어오자 그들은 곧 죽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때 한 젊은 여인이 절망에 빠진 나머지 반지를 빼 유리창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놀랍게도 소방관들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그들을 구출한 것이다.
그날 뉴욕 소방서는 신속하고도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소방관들은 엘리베이터로는 67층까지밖에 올라갈 수가 없어서 나머지 12층은 소방 호스와 다른 장비를 어깨에 메고 걸어 올라갔다. 그들은 불과 40분 만에 불을 진압했고 나중에는 유리창 밖으로 던져 버린 반지까지 찾아내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86층 전망대에 있던 40명을 포함해 1500명 가량이 1층으로 안전하게 내려왔다. 충돌 사고 이후 몇 주간 지나가던 행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던 그 시꺼멓게 그을은 빌딩 구멍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수많은 뉴욕 주민들은 비행기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부딪쳐 그 빌딩을 뒤흔든 끔찍한 순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림 설명
1. 짙은 아침 안개 속에서 낮게 비행하던 B-25기가 왼쪽 그림에서와 같이 34번 스트리트 쪽에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과 충돌했다.
다행히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그 건물에서 일하고 있는 1만 5000명이나 되는 사무원들은 대부분 출근하지 않았다. 더욱이 비가 오늘 날씨여서 보통 주말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찾아오던 관광객들도 이날은 많지 않았다.
2. 이 괴상한 사고로 2개 층의 건물 벽면이 뚫려 시꺼멓게 그을린 구멍을 남겼다(아래). 3개월 안에 그 구멍은 수리되어 아무런 손상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복구되었다.
살인 파도
초고속 파도가 하와이 섬들을 강타하다
이것은 분명 만우절 장난이 아니었다. 1946년 4월 1일 새벽 1시 30분, 북태평양의 알류샨열도에 떠 있는 유니맥섬의 남동쪽 149km지점에서 무서운 기세로 수면에 물거품이 일고 있었다. 그때 3.6km 깊이의 심해에서 살인자라고 부를 만한 현상이 일어났다. 알류샨해구의 북쪽 경사면 바닥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대규모 해저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이 지진은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전세계의 지진계에 기록되었다.
지진은 유니맥섬에 잇는 스코치캡 등대와 그곳에 파견된 5인조 해안 경비 분대를 뒤흔들었다. 27분 후 더 강한 두번째 진동이 알류산열도를 뒤흔들었다. 유니맥섬의 지표면은 미친 듯이 융기되었다. 스코치캡 등대의 분대원들은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졌지만 강대한 자연의 힘이 휘두르는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1분 뒤에 희생됐다. 유니맥섬을 뒤흔든 두 차례의 강력한 충격으로 빚어진 지각의 움직임은 알류샨 해구에 거대한 틈을 만들었다. 해저면의 일부가 사라지자 크게 벌어진 틈 속으로 바닷물이 밀려 들어갔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바닷물이 이동하자 쓰나미라고 불리는 거대한 살인 파도가 일어났다. 이 살인적인 파도는, 파도가 처음 일어났던 지점을 중심으로 점점 더 커져 가는 소용돌이를 그리며 태평양 전역에 대재앙을 가져왔다. 지각 변동의 진원지에 너무도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던 유니맥섬은 그 첫번째 희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비극적인 날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따라서 높이가 34.5m나 되는 거대한 파도가 시속 116km라는 무서운 속도로 몰려 닥치는 광경을 본 스코치캡 주민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귀가 찢겨질 듯한 노도의 소리가 들리더니 장벽처럼 높이 솟은 파도 더미가 등대를 때렸다.
등대는 산산조각이 났고 그곳에 있던 분대원들은 망각의 세계로 휩쓸려 들어가고 말았다. 파도는 계속 몰려와 스코치캡 위쪽의 절벽 끝에 있던 해안 경비대 기지를 삼켜 버렸다. 기지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은 허둥지둥 더 높은 지대로 기어 올라갔다. 그 와중에 한 분대원은 스코치캡 등대쪽을 내려다보았다. 등대 불빛은 더이상 비치지 않고 있었다. 밤새껏 살인 파도가 섬을 계속 강타하고 있는 동안 해안 경비대원들은 무선 통신으로 등대와 교신하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동이 튼 후에 그들이 절벽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을 때 완전히 파괴된 등대가 눈에 들어왔다. 등대가 서 있던 자리에는 형체도 알 수 없는 파편 조각들만이 땅에 널려 있었다. 그날 아침 뒤늦게 수색 대원들은 한 희생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사체 일부를 찾았다. 며칠 후에 다른 두 시체의 일부가 또 발견되었다. 그러나 나머지는 완전히 바다가 삼켜 버렸다.
그 동안 해일이 연속적으로 일으킨 살인 파도는 하와이제도를 향해 남쪽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평균 시속 788km라는 무서운 속도로 나아가던 첫번째 파도는 거의 4시간 반만에 3700km 떨어진 오아후섬에 당도하였다. 아주 이상한 것은 그 해역을 항해하던 배들이 살인 파도가 몰려오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또 배밑 바다 속으로 지나가고 있는 사실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살인파도가 대양 한가운데 있을 때는 물마루간의 거리가 161km나 되고 그 높이는 보통 바다 표면 위로 30--60cm 정도밖에 올라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도가 해안가의 얕은 바다로 들어오게 되면 파도의 길이와 속도가 모두 감소하면서 엄청난 양의 물이 우뚝 솟아오르게 되어 대단한 파괴력으로 해안을 휩쓰는 것이다. 4월 1일 오전 6시와 7시 사이, 바로 그런 상황이 하와이 제도 해안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오아후섬 북단의 유명한 휴양지인 카웰라만의 바닷가에 면해 있는 집에서 잠들어 있던 해양학자인 프랜시스 P. 셰퍼드와 그의 아내는 이상한 소리에 잠이 깨었다. 마치 수십 개의 기관차가 바로 그의 집 밖에서 증기를 뿜어내는 듯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그 젊은 과학자는 얼른 앞에 보이는 유리창으로 달려갔다. 그는 거대한 규모로 소용돌이치는 해일이 3m 높이나 되는 해안 언덕을 휩쓴 다음 그의 집쪽으로 곧장 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셰퍼드는 과학자로서의 본능이 생존 본능보다 앞선 나머지 카메라를 집어들고는 집 밖으로 달려나갔으나 거대한 파도는 빠른 속도로 물러나고 있었다. 드러난 산호초 위에 서는 오도가도 못하게 된 물고기들만이 펄떡거리고 있었다.
전문가의 눈에, 바다의 이 이상한 움직임은 오직 한 가지 사실만을 의미했다. 해일이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셰퍼드가 사진 두 장을 급히 찍는 동안 물은 다시 불어나기 시작했다. 두번째 파도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파도는 점점 더 높게 일더니 놀라운 속도로 질주해 왔다. 시간이 없을 안 셰퍼드와 그의 아내는 집 뒤로 피신했다. 뒤를 돌아다 보니 내가 방금 전에 서 있던 자리에 해일이 밀어닥친 것이 보였다. 그날 아침의 일을 기록하면서 셰퍼드는 이렇게 썼다. 갑자기 우리는 집 앞쪽에서 유리창이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냉장고는 똑바로 선 채로 우리 왼쪽 옆을 지나 근처에 있는 사탕수수 밭으로 떠밀려 갔다. 오른쪽으로는 장벽처럼 밀려오는 파도가 탈출로를 따라 우리가 있는 곳으로 몰려왔다. 그는 계속 써내려갔다. 주택들은 부서진 목재 더미로 변했다.
셰퍼드부부는 다시 제 모습을 드러낸 해안을 따라 줄달음쳐 가다가 사탕수수밭 사이를 뚫고 지대가 약간 높은 큰 길로 황급히 피신했다.
그들이 목적지에 다다르자마자 세번째 파도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사탕수수밭을 깔아뭉개 버렸다.
비교적 안전한 높은 지대에 있는 길에서 셰퍼드와 그의 아내는 다른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기가 막힌 사연을 털어놨다. 그들은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첫번째 파도가 갑자기 집을 들어올려서는 수십미터 떨어진 사탕수수밭에 내려놓았는데 어찌나 살그머니 내려놓았던지 아침 식사 준비를 해놓은 것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아침 식사를 먹기 위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지는 않았다 고 셰퍼드는 말했다.
파도가 여섯 번 정도 밀려 들어왔다. 나가자 셰퍼드는 그의 집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집문에 막 당도했을 때 그는 엄청난 물살이 그곳으로 다가오고 있음 을 느꼈다. 이번에는 집 뒤쪽에도 피할 곳이 없었다. 나는 가까운 나무로 달려가 있는 힘을 다해 기어올라가서는 죽어라고 매달렸다. 이것이 그날 카웰라만을 강타한 큰 파도 중 마지막 것이었다. 파도가 잠잠해졌을 때, 셰퍼드는 자기 집이 반파된 채로 서 있고 가재 도구는 사탕수수 밭에 널려 있음을 보았다.
셰퍼드가 그날 겪은 경험은 하와이제도 여러 곳에서 똑같이 반복되었다. 높이가 13.5m나 되는 파도가 카우아이섬 북쪽 해안을 덮쳤다.
하에나만에서는 두 명의 여인이(그중 한 명은 아기를 안고 있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며 집 앞에 서 있다가 파도에 휩쓸렸다. 그들은 근처에 있는 나무로 헤엄쳐 가서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러나 그들의 집은 뿌리째 뽑혀 파괴됐다.
사망자의 얼굴에는 북쪽에서 온 살인 파도에 대한 경악과 공포의 표정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 피해가 심한 지역은 하와이제도의 큰 섬 인 하와이섬의 북쪽 해안이었다. 이곳은 높이가 1.5m 이상 되는 파도가 여러곳을 강타했다.
(오아후섬을 할퀸 파도는 가장 높은 것이 11m 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장 심하게 파괴된 지역은 힐로시였다. 이곳에서는 96명이 익사하거나, 물 위에 떠다니던 파편에 몸을 부딪쳐 목숨을 잃었다. 시체가 쌓여가자 한 시체 안치소는 시신을 얼음 창고에 보관했다. 시체가 얼마나 단단하게 서로 얼어붙었던지 나중에는 망치로 힘껏 쳐서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쓰나미 파도!)를 쓴 민 리와 월터 C. 더들리는 이 재난에서 살아 남은 수많은 사람들을 면담했다. 힐로시 북서쪽에 있는 라우파호호에서 프랭크 칸자키라는 한 젊은 학교 선생은 오전 7시 조금 넘어 첫번째 파도가 강타했을 때 친구 집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칸자키는 즉시 친구의 두 딸인 크리스틴 나카노와 스텔라 나카노를 붙잡고 해일이 집을 받치고 있던 기둥을 부러 뜨리기 전에 그들을 집 뒤쪽으로 밀어냈다. 그 집은 몇 초 동안 물에 떠 있더니 부서지기 시작했다. 칸자키는 소용돌이치는 물속에서 두 애를 꼭 붙잡고 있느라고 발버둥이쳤다. 그러나 성난 듯이 닥친 파도는 곧 스텔라를 쓸어가 버렸다. 그러나 칸자키는 크리스틴을 여전히 꼭 움켜쥔 채 부서진 집들과 다른 파편들이 쌓여 있는 인근 야구장으로 함께 쓸려갔다.
카푸아 휴어는 힐로만이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 그녀 집에서 식구들이 하루 일을 할 준비를 해주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한 딸이 큰 소리를 쳤다. 엄마, 바다가 왜 저래요? 카푸아는 자기 집 끝에서 9m 아래에 있는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바닷물이 무서운 속도로 육지로 밀려오고 있었다.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면서 절벽에 있던 코코넛 나무 위로 물보라를 뿜어내는 순간, 그들은 건물들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고 힐로 중심가에서 사람들이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46년 만우절에 일어난 이 해일은 1819년부터 이런 종류의 일들이 기록된 이래, 가장 파괴적인 파도였다. 모두 159명이 목숨을 잃었고 가옥 1400여 채가 부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파괴 되었으며 엄청난 농작물 손실이 있었다. 해변가 고속도로의 많은 부분과 오아후 북쪽과 힐로의 철로가 파괴되었다. 전부 2600만 달러 어치의 재산 피해가 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사망자 수가 비교적 많이 난 것은, 하와이제도가 아주 오랫동안 큰 해일을 겪어보지 않았다는 데에도 부분적으로 그 이유가 있다.
셰퍼드에 따르면, 죽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처음 해일이 밀려오는 조짐을 보았을 때 고지대로 대피하기만 했어도 목숨을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암초가 모습을 드러내는 기이한 현상 에 이끌려서 또 어떤 경우에는 옴쭉달싹 못하고 있는 물고기들을 잡으러 해안으로 갔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파도가 밀려 온 시간 때문에 많은 생명을 구했다고도 볼 수 있다. 만일 파도가 2--3시간 먼저 당도했더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 잠자리에 있거나 집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사망자 수가 늘어났을 것이다.
하와이에 이 재난이 있고 나서 해일에 대비한 경보 시스템이 설치되었다. 환태평양 주변에 5개의 지진 관측소가 설치되었고 태평양 전역에 파도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검조기망이 조직되었다. 시설은 모두 호놀룰루에 있는 국제 태평양 해일 경보 센터의 관리하에 있다. 1957에서도 해일이 밀어닥쳤지만 다행히도 이 센터에서 적절한 시간에 경보를 내렸기 때문에 하와이에서는 단 한 사람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시스템이 재난을 완전히 방지해 주는 것은 아니다. 1960년 5월에는, 칠레 대지진의 여파로 해일이 닥쳐왔는데 하와이 사람들이 그 경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힐로에서만 61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일은 여전히 괴이한 자연의 힘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해일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호놀룰루 경보 센터 원장인 고든 버튼은 최근에 이렇게 말했다. 해일이 해안을 때릴 즈음에는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되어 있지요. 과학자들은 총상 해일이 언제쯤 해안에 도착할지는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강도는 예측할 수 없다. 그리고 심지어 그 도착 예정 시간도 틀린 적이 있었다. 1986년 5월 7일에는 하와이와 북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에 살던 수천명이 해일 경보가 나서 높은 언덕으로 대피했다. 그러나 해일은 일지 않았다.
이 살인적인 파도에 대해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앞으로 머지 않은 장래에 해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지구 대양 밑 어디선가 해저면이 굽어지거나 화산이 분출하게 되면 또다시 해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면 해변가에 있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빨리 높은 곳으로 피신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