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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자료실 - 종교간대화와 그리스도인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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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한국) 스크랩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2 (서울)
대화일치 추천 0 조회 36 09.09.19 20: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헤론>

 

 존 W. 헤론 선교사 

 

최초로 묻힌 의료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John W. Heron, 惠論)는 1858년 6월 15일 영국에서 출생하여 미국으로 이민하였으며, 동테네시주 메리빌대학과 뉴욕종합대 의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다. 1884년 4월,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송하는 최초 선교사(장로교파)로 정식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해티 깁슨(Hattie)과 결혼했다. 헤론 부부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여 일본에서 1894년 4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머물다가 1885년 6월 21일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입국하여 알렌(H. N. Allen)의 후임으로 광혜원(제중원) 원장과, 고종 임금의 시의(侍醫)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하여 혜참판(惠參判)이라 불렸다. 그의 업적은 우리 나라에서 병원사업과 성서번역사업을 비롯하여 기독교 문서사업에 크게 기여하였다. 성서 출판을 위하여 1887년에 조직된 성서번역 상림위원 4인 중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1890년 6월 25일 창설한 기독교서회 창설자였다. 그는 1889년 언더우드의 압록강 세례문제와 관련하여 언더우드와 헤론 간에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헤론의 인간성에 대하여 기포드 선교사는 1897년 코리안 레포지트리에 "헤론의 성격은 오래 사귄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는 의지적인 사람이며 자기 책임은 철저히 지켰다. 그는 의사로서 강한 희생정신과 사랑의 정신과 인술로써 모든 어려운 의료사업을 담당해 냈다. 절대로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몸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그는 과로와 정신적 긴장 때문에 기진 맥진하여 질병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고 하였다. 헤론은 1890년 7월 26일 결국 한국에 온지 5년만에 이질에 걸려 33세의 나이로 별세하였으며 양화진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묘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라고 쓰여 있다. 헤론이 별세한 뒤 그의 미망인 해티는 헤론과 가까웠던 친구 게일(Gale) 선교사와 1892년 4월 7일 재혼하였다. 이때 게일은 노총각으로 30세였고,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헤론의 아이가 둘(1885년에 출생한 큰딸, Sarah Anne과 1887년에 출생한 딸Jessie Elizabeth)이 있었다. 게일과의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으며 해티는 1907년 8월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 왔다. 결핵으로 1908년 3월 28일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의 전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뒷자리에 안장하였다.

양화진이 외국인 선교사 묘지로 결정되기까지는 헤론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긴 사연이 담겨 있다. 헤론이 별세하자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와 논의 끝에 양화진을 묘지 후보지로 선정하고 한국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묘지로 허락되지 않았다. 양화진은 본래 언더우드 선교사 등이 자기네 주거지로 삼으려고 한 곳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정동 미국공사관 안에 임시로 묘를 설치하니,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외교적인 차원에서 미국·러시아프랑스·독일 등 5개국 공사의 공동 명의로 양화진을 외국인 묘지로 청원하여, 1890년 10월 24일 정부의 허락을 받아 그후 헤론의 시신을 이장하게 되었다. 이때 헤론 묘지의 관리인은 최봉인(후에 서교동교회 설립교인과 초대장로로 임직)이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존 W. 헤론 선교사

 

 존 W. 헤론 선교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존 헤론이 고종으로부터 받은 병풍

 

<에비슨 선교사>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 가족 묘

 

올리버 R. 에비슨 선교사 가족 묘


올리버 R. 에비슨(Avison, Oliver R. 1860-1956)은 캐나다 출신의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로 어비신(魚丕信)이란 한국 이름으로 세브란스 병원장을 비롯하여 연합의학교 초대교장과 연희전문 교장 등 한국의 의료 개척 선교사(1893-1934)로 많은 공적을 남겼다.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에서 출생하여 6살 때 캐나다 왼스턴에 이주하였으며, 1887년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내과 및 약리학을 강의하다가 언더우드의 영향을 받아 한국 선교를 지원하였다. 1893년 부산을 경유하여 11월 1일부터 제중원 의사로 봉직하였으며, 1895년 여름에는 서울에 만연된 콜레라 방역사업 책임자로 진력하여 일찍이 상상 할 수 없는 65% 완쾌자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고종의 시의로 임명되었으며, 1899년 제중원에서 수명의 학생을 모아 의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는 수학 자연과학 농학 등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1900년에는 안식년을 미국에서 보내면서 한국 의료 선교의 확장을 제창하였다. 이때 오하이오 출신의 석유회사 중역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를 만나 그의 후원금을 가지고 제중원을 구리개(銅峴)에서 남대문 밖으로 이전하여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을 세웠다. 이때 제중원에 있던 남대문교회도 함께 이전하였으며 그는 교회를 열성으로 섬겼다. 1904년 제중원을 "세브란스"로 개칭하고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1913년부터 세브란스 의전(醫專) 교장으로 봉직하다가, 1916년부터 1934년까지 연희전문 교장까지 겸직하였다. 1934년 3월 세브란스 의전과 연희전문학교 명예교장으로 추대되었으며 두 학교 즉 "연세" 통합에도 노력하였다. 1935년 은퇴하고 그해 12월 미국으로 돌아가 1956년 8월 29일 플로리다 피터스버그에서 96세로 별세하였다. 제자들은 에비슨의 동상을 건립(1928)하였다.


제니 바네스 에비슨(Avison, Jennie Barnes,1862-1936)


남편 올리버 에비슨과 아이 셋을 데리고 내한하여 부산 베어드 선교사 집에서 네 번째 아이 더글러스 에비슨을 낳았다. O. R. 에비슨 부부는 모두 10남매를 낳아 일곱을 키웠다. 자녀 중 큰아들 고든(Gordon W.)은 YMCA 선교사(1915-1939)로 북한지역에서 농촌선교를 담당하고, 딸 레라(Lera)도 선교사역(1911-1914)을 담당하였으며, 아들 더글러스 에비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브란스 병원장이 되었다. 제니 바네스는 1862년 2월 23일 온타리오에서출생하여 남편의 선교사역을 열성으로 조력하였다. 언제나 화사하고 아름다운 옷차림에 매력 있고 상냥한 표정으로 손님을 접대하였다고 한다. 1936년 9월 15일 74세로 별세하였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더글러스 B. 에비슨(1893-1954) 선교사 가족 기념비

 

더글러스 B. 에비슨(1893-1954) 선교사 2세 부부


더글러스 B. 에비슨(Avison, Douglas Bray)은 부산에서 1893년 7월 22일 출생하였다. 캐나다에서 토론토 의대를 졸업하고 1920년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선천지방에서 활동(1920-1923)하고 서울로 전임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소아과 교수, 부학장 및 병원장 등으로 1947년까지 헌신하였다. 1952년 8월 4일 캐나다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임시 안장하였다가 생존시 한국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1954년 유해를 화장하여 세브란스병원에서 장례하고 양화진에 안장하였다. 양화진 묘역에는 제자들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비문이 건립되어 있다. "더글러스 B. 에비슨 선생은 우리 나라에 나시고 일하시고 여기에 무치셨다. 20년 동안 우리 학교에서 몸바쳐 일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셨다.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후학을 가르치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환자를 대하셨다. 높은 덕 넓은 은혜를 마음에 색이면서 그 유언을 따라 유해를 모신 이 자리에 이 비를 세워 선생을 추모한다. 1953년 8월 4일 세브란스의과대학 동창회 세움"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 1898-1985)


더글러스 B. 에비슨의 부인 캐들린 로슨(Kathleen Isabel Rawson, 1898-1985)은 1898년 8월 10일 캐나다(Claremont)에서 출생하여, 남편과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자녀로 다섯 딸이 있으며 1985년 8월 6일 벤쿠버에서 별세하여 한국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양화진 남편 곁에 합장하였다.

 

<허스트>

 

J. W. 허스트(1864-1952) 가족 묘


J. W. 허스트(Hirst, Jesse Watson. 許時泰, 許濟)는 1864년 12월 24일 미국 마사추세스주에서 출생하여 1890년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1893년 필라델피아 제퍼슨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9년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에서 수련을 마친 뒤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0년부터 4년간 제퍼슨 대학에서 조직학, 산부인과 진단학을 강의했다. 1904년 9월 13일 미국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내한하여 같은 해 9월 23일 세브란스(Severance)병원의 새 건물이 신축된 때부터 에비슨과 함께 전담 의사로 봉직 했다. 왕과 고관의 건강을 보살피는 시의(侍醫)와 군의(軍醫)로도 활동했다. 이때 에비슨은 주치의, 허스트는 부주치의로 임명되었다. 가마를 타고 다니던 그 시절에 고종황제는 그에게 특별히 인력거를 하사하여 교통수단으로 제공해 주었다. 이만열은 <한국기독교의료사>에서 “고종은 일본에서 새 인력거를 하나 더 주문하고 허스트에게 전용 인력거꾼을 붙여주었다. 에비슨과 허스트는 세브란스에서 가르치고 진료하는 일 외에도 시내의 화자들을 방문 치료하는 등 당시의 일과는 아침부터 저녁 8-9시까지 이어졌는데 전용 인력거가 큰 도움이 되었다.”라고 했다. 1906년 세브란스 간호사양성학교 설립 때 실즈(Shields)에게 도움을 주었으며, 1907년 9월 9일 ‘한국의료선교사 협회’가 창립될 때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의학교육의 전문화 과정에서 산부인과 주임교수로 활동하고, 1915년에는 진료사업의 입원실 책임을 맡았다. 그 후 세브란스 병원장(1925-1927)으로 환자를 진료하고 병원 발전의 기틀을 닦아, 의과대학 교수로서 의사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1934년 3월 30일 많은 공적을 남기고 퇴임했다. 연세대학 교직원과 동창들은 그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허스트 흉상’을 헌정”했다. 그러나 <연세대학교사> 조차 “그의 공적보다 더 큰 에비슨의 그늘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세브란스의 제2인자였다. 그는 남대문교회에서 에비슨 부부와 함께 복음을 전하며 교인들을 지도했다. 귀국 후 북 캐롤라이나주(Durham)에서 거주하였으며, 1952년 4월 28일 플로리다 주에서 별세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H. S. 허스트와 그 자녀들


허스트의 아내 할보 새디 허스트(Hirst, Harbaugh Sadie, 1875-1928)는 1875년 3월 28일 미국 일리노이주 록포드(Rockford)에서 출생했다. 1901년 3월 4일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로 J. W. 허스트보다 앞서 내한하였다. 개성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송도학교 설립에 기여했다. 1907년 3월 11일 J. W. 허스트와 서울에서 결혼한 뒤 미국 북장로회 소속으로 바꾸고 세브란스 간호원 양성소에서 교육에 종사하는 등 남편의 의료 선교에 협력했다. 1928년 2월 19일 서울에서 53세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 바탕의 돌에 대리석을 붙여 꽃병 모양으로 조각된 묘비에는 개성(송도)의 개척 선교사이며, J. W. 허스트의 부인이다. “일하고, 사랑하고, 고난 받으며, 승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Having labored, loved and suffered she entered into glory triumphantly)”, “자녀들은 축복의 소산(Her children rise up and call her blessed)"이라 쓰여 있다. "

한편 그 옆 자리에는 허스트 부부의 딸 캐롤(Carol)의 스크롤로 조각된 묘비가 있다. 그는 1920년 11월 15일 4살의 나이에 서울에서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이밖에 허스트 부부의 자녀로서 1907년 11월 6일 서울에서 사망한 아미(Hirst, Amy)와 1908년 8월 2일 사망한 조엘(Hirst, Joel)이 양화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 묘지의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해리 로드의 에 의하면 허스트 가족으로 "제시(Hirst, Jessie M.), 리챠드(Hirst, Richard W.) 및 도날드(Hirst, Donald V.)가 미국에 거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페인 선교사>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선교사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선교사


조세핀 O. 페인(Paine, Josephine Ophelia, 陛仁, 1869~1909) 여성 선교사는 미국 마사츄세츠주 보스턴에서 1869년 2월 21일 출생했다. 보스턴 공립학교를 졸업하고, 1892년 뉴잉글랜드 교사양성소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보스턴 상업도서관에서 사서로 잠시 일 할 때에 한국에서 귀국한 선교사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아 선교사로 지원했다. 1891년 11월 뉴잉글랜드 지부에서 한국 파송 선교사로 선임되고, 1892년 8월 미국 감리회 소속으로 내한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먼저 한국어를 공부하고 1893년 9월 18일 제3대 이화학당장으로 취임하여 15년 간 여성 교육에 이바지했다. 구약 성경을 가르쳤으며, 교과과정의 편성과 정비에 힘썼다. “여자가 공부는 해 무엇 하느냐”하는 시절에 여성 교육에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그의 주요 업적과 활동 상황을 살펴보면 첫째, 1899년 생리학(生理學) 교과서를 한국 최초로 프라이(Frey)와 공동 저술했다. 이 책은 “젼톄공용문답(全體功用問答, Lessons on the Human Body)"이라고 했다. 젼톄(全體)란 온 몸이며, 공용(功用)이란 신체 각 부분의 쓰임세(機能)를 의미한다. 68쪽의 총10장으로 분류하여 사람의 몸 즉 인체(人體) 각 부분의 구성과 기능 및 위생에 관한 내용을 문답식으로 만든 교과서이다(자료: 이화100년사1994). 생리학(生理學)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전에 인체의 기능에 관하여 여성에게 교육을 했다는 사실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둘째, 1904년 9월 중학과(중등과정)를 설치하였으며, 교과과정(敎科課程) 정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면서 우리 민족은 배워야 나라도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교육열이 점차 높아갔다. 그러나 외국 선교사들의 한국어 실력이나 학생들의 연령, 지식 수준 등에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적절한 교과 과정을 편성하기란 대단히 어려웠다. 이 때 페인은 산수 등 기존 과목 외에 성경, 영어, 체조 등을 교과과정에 편성하였으며 재봉, 자수를 가르치는 가사과를 설치했다. 특히 한국 최초로 여성에게 체육 운동과목을 첨가한 것은 큰 변혁이었다. 여성의 걸음걸이가 뒷 발꿈치 높이 정도로 걷는 것이 미덕(美德)이라고 여기던 시절에 온몸을 흔들어 대는 체육운동은 대단한 혁신이었다. 이 같은 체육운동 때문에 양반층에서 처음에는 크게 반발하고 “집안 명예가 손상되고, 혼사 길이 막힌다”고 하면서 하인들을 시켜 학생을 집으로 데려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셋째, 학생수 증가로 1900년 11월 정동에 2층 양옥 본관을 건축했다. 이 건물은 규모가 크고 서양식으로 미려하게 건축되어 장안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공부하는 교실과 생활하는 기숙사가 함께 있어 학생들은 좋은 환경에서 즐겁게 생활했다. 페인 선교사는 학생들을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면서도 엄하게 훈육하여 학생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식료품 조달을 위한 <장보기>도 직접 담당하였는데 그의 시장 행렬은 “앞뒤에 각 각 두 사람씩 모두 네 사람이 메는 사인교(四人轎) 가마를 타고 기수(護身人)를 앞세웠다.” 늘 흰밥(쌀밥)을 해주니까 학생들이 팥밥이 먹고 싶다고 하면 가끔 시장에 나가 팥을 사다 팥밥을 해 먹이기도 한 무척 인정이 많은 분이었다. (자료:이화70년사) 넷째. 학생을 보호하고 신앙을 통한 기도회 등으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1904년 러ㆍ일전쟁이 있었을 때 학생들을 기숙사에 보호하고 쌀, 콩, 어포 등 각종 식량을 구입 비축하여 안정된 생활 속에서 수업을 계속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었을 때는 신앙을 통한 기도회로 민족 운동을 지원했다. 조국을 잃은 슬픔 속에서 가냘픈 소녀들은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수업을 중단하고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여 조국의 주권 회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기도회를 가졌다. 다섯째, 1907년 이화학당장 자리를 프라이(Frey, Lulu E., 富羅伊, 1907-1921) 선교사에게 인계하고 인천, 평양, 서울의 기독교 학교의 관리와 전도를 위한 선교활동에 주력했다. 신앙이 돈독한 그는 험한 길을 수 백리가 넘도록 걸으면서도 지칠 줄 몰랐다. 열정적인 설교와 전도는 감동을 주었으며 여성 해방 운동에 공헌했다. 40세를 일기로 1909년 9월 25일 해주지방 전도사업 순회 중 콜레라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으며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졸리>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헨리 B. 졸리(Joly, Henry Bencraft W. 1857-1898)는 1857년 터키(Smyrna)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영국 외교관인 영사로 중국 상해에 있다가 구한말 우리나라에 부임하여 주한 영국 영사로 인천에서 활동했다. 1896년 영국 작가 이사벨라 비숍 여사가 방문하였을 때는 그의 안내로 한국의 문화를 외국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졸리 부부에게는 3남매의 자녀가 있었는데 막내 딸 릴리안은 서울에서 성장하여 스탠다드 석유회사 사무실의 비서직으로 1920년대까지 일했다. 졸리는 1898년 별세하여 처음에는 인천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 후 딸 릴리안에 의하여 부모의 유해를 1950년대 중반에 양화진으로 옮겼다. 묘비에는 “Now rests in Peace, perfect peace. not having died but only gone before in 1898(이제는 평안, 완전한 평안 속에서 안식한다. 죽은 것이 아니라 1898년이 가기 전에 또 다른 여행을 떠날 뿐이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리고 1901년 2월 졸리(周驪)의 별세를 슬퍼하고 그의 덕업과 혜택을 크게 치하하여 인천에 거주하는 중국 상공인이 건립한 묘비도 있다. 비문에는 “嗚呼周公 德業昭彰 惠澤流長 俾我華商 言念不忘 善人云亡 泲泗沱滂 嗚呼周公 美玉善藏”이라 쓰여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클라라 A. 졸리(1860-1928)


클라라 A. 졸리(Joly, Clara Agnes Lillie) 부인은 1860년 1월 1일 출생하였다. 주한 영국 영사 헨리 졸리와 결혼하여 인천에 거주하였다. 그는 남편이 별세한 뒤에도 한국에 머물면서 순종(1907-1910)이 왕세자로 있을 때 영어 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한국에서 1927년까지 살다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아들을 찾아 1927년 이한하였다. 그 후 북경(Peking)에 있는 또 다른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그곳에서 1928년 3월 28일 별세했다. 유해는 양화진으로 돌아와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졸리의 아름다운 기억, The eternal GOD is thy refuge and underneath are the everlasting arms.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영원하신 하나님은 피난처이시고, 그 영원하신 팔로 안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 기록되어 있다.

 

릴리안 A. 휘트만(1896-1968)


릴리안 A. 휘트만(Whitman, Lilian Agnes Joly)은 졸리 부부의 세 자녀 중 막내딸로 1896년 출생하였다. 릴리안은 서울에서 석유회사 사무원으로 1920년대까지 일하면서 휘트만(Grant Whitman)을 만나 1927년 서울에 있는 영국성공회당(Anglican Cathedral)에서 결혼하였다. 이들 부부는 한ㆍ일 스탠다드 석유회사에서 기독 실업인으로 30년간 일하다가 퇴직하였다. 퇴직 후에는 미국 매릴랜드의 베데스다(Bethesda)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릴리안은 1968년 별세하였다. 그가 별세하자 남편 그랜트 휘트먼은 부인 릴리안의 유해를 양화진으로 운구하여 그 부모가 묻혀있는 졸리 가족묘지에 안장하였다. 비문에는 “Lord in thy mercy grant us safe lodging and a holy rest and peace at the last(주여 당신의 긍휼로 우리를 받으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시며 거룩한 안식과 평안을 주옵소서)”라 쓰여 있다.

 

<일본인 소다>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소다 가이치(Soda Gaichi, 曾田 嘉伊智, 1867-1962)는 1867년 10월 20일 일본 야마구치(山口)현 소네무라(曾根村)에서 출생했다. 오카야마(岡山)의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1893년 노르웨이 선박 선원으로 홍콩에 체재하다가 대만으로 건너가 독일인 경영의 공장 사무원 겸 통역으로 일했다. 그 후 방랑 생활을 계속하다가 1899년에는 술에 취해 길에 쓸어져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한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그 후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의 나라 한국에 은혜를 갚고자 1905년 6월 내한하였다. 서울 YMCA에서 일본어 교사로 있으면서, 이상재 선생의 감화로 1906년 기독교인이 되어 ‘백만명 구령운동’에 가담하였고, 경성(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가 되었다. 3·1 운동과 105인 사건 때에는 한국인 청년지도자들의 석방에 앞장섰다. 특히 가마쿠라 보육원장으로 수천의 한국 고아들을 양육하는데 정성을 다했다.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 데려다 이집 저집 안고 다니며 젓 동냥을 하기도 했고, 밤새워 우는 아이들을 안고 꼬박 날을 밝히는 일이 많기도 했다. 1943년 가을 부인 우에노에게 고아원을 맡기고 원산(일본인)감리교회 전도사로 봉직하다가, 8‧15 광복 후 1947년 10월 13일 서울로 돌아와 부인을 잠깐 만난 뒤 부산으로 걸어가 1947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자료:전택부,이 땅에 묻히리라,1986) 귀국 후에도 늘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의 사정을 안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사와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의 주선으로 1961년 5월 15일 다시 내한하였다. 서울의 옛집인 영락보린원에서 고아들과 함께 지내다가 1962년 3월 28일 96세로 별세하였다. 장례식은 1962년 4월 2일 ‘사회단체연합장’으로 국민회당(의사당)에서 집례되었다. 2천여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대광고교 밴드의 조악(弔樂)으로 시작하여 한경직목사의 사회로 기도와 성경 봉독, 그리고 재건운동본부장(柳達永), 보사부장관(鄭熙燮), 서울시장(尹泰日)의 조사가 있었다. 유족으로 조카딸 마스다(增田須美子)가 참석하였으며, 박정희 의장과 일본외상(小坂)은 조화를 보냈다. 유달영은 조사에서 “소다 옹의 생애는 어느 사회사업가보다 우리들에게 감격과 충격을 준다. 소다의 생애처럼 깨끗한 인류애와 사랑만이 한국과 일본이 단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자료: 한국일보, 1962. 4. 2 기사)

 

우에노 다끼(上野, )


우에노 다끼(上野, Takiko, 1878-1950)는 1878년 일본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했다. 나가사키 기독교학교를 졸업하고 1896년 내한하여 소학교(日新) 교사로 봉직했다. 1908년 30세 때 41세의 소다 가이치와 결혼했다. 숙명여학교와 이화여학교의 영어교사로 일하다가 1926년 퇴직하여 가마쿠라 보육원에서 남편을 도와 보모가 되었다. 1943년 소다가 원산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할 때에는 서울에서 고아원을 운영했다. 1945년 8‧15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고아들을 돌보다가 1950년 1월 14일 74세로 서울에서 별세하여 양화진에 안장되었다. 소다(曾田)는 부인의 죽음에 대해 “그녀는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봉사의 생애를 마쳤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아니 그의 영혼은 늙은 남편과 같이 여행하면서 힘이 되어질 줄로 믿습니다. 그는 나대신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라고 전택부는 기록했다. 묘비에는 “언 손 품어 주고, 쓰린 가슴 만져 주어, 일생을 길다 않고 거룩한 길 걸었어라, 고향이 따로 있든가 마음 둔 곳 이어늘”이라는 주요한 시가 쓰여 있다.

(글 참조- http://blog.empas.com/graced/16816142, 신호철 장로(양화진 선교회장)  

 

묘비

 

묘비에는 “孤兒의 慈父 曾田嘉伊知”, “소다 선생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인에게 일생을 바쳤으니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으로 나타냄이라. 1913년 가마쿠라 보육원을 창설하여 따뜻한 품에 자라난 고아 수천 이러라. 1919년 독립운동 시에는 구금된 청년의 구호에 진력하고 그 후 80세까지 전국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다. 종전 후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에 대한 국민적 참회를 순회 연설하다. 95세인 5월, 다시 한국에 돌아와 영락보린원에서 1962년 3월 28일 장서하니 향년 96세라. 동년 4월 2일 한국 <사회단체연합>으로 비를 세우노라.”라 쓰여 있다.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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