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국사 수심결 4.선지식 일갈은 만년 동굴 어둠 깨는 광명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부처가 무엇 입니까?” “내가 그대에게 일러주고 싶어도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큰스님의 간절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바로 묻는 그대가 부처니라.” “어떻게 보림공부를 해야 합니까?” “한 티끌이 눈에 있으면 허공꽃이 어지러이 떨어진다.” 그 스님이 말끝에 몰록 깨달았다.
입정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는 밑 없는 배를 삼매의 바다에 띄우고 금당으로 서서히 침몰하는 장엄한 낙조의 후광에, 천리를 달려왔던 생각의 길이 문득 끊어지고 거금도는 어느덧 부처로 좌정하고 있다.
선지식의 간절한 한마디는 광겁장도(曠劫障道)의 치렁치렁한 무명을 걷어내고 본래 청정한 마음을 보게 한다. 다만 천년을 하루 같이 새벽을 알리는 닭처럼 진실한 믿음을 요구할 뿐이다. 동진 출가하여 소문을 듣고 처음 선지식을 찾아간 곳은 봉암사였으나 서암 큰스님께서는 칠십 년대 말 원적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오십 리 길을 걸어서 산길을 헤매어 찾아간 암자엔 벌써 초여름의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나이 어린 동자 스님이 공부하겠다고 이 깊은 산중에까지 찾아온 것이 기특하고 대견스러운데 어떤 물건이 이 몸뚱이를 끌고 왔는지 한마디 일러보라고 하였지만 첫 마디에 꽉 막히고 말았다. 영리한 마음은 마치 독약과 같아서 공부하는 데에는 가장 두려운 것이니 이 집안에서는 귀환 일이 못 된다고 하시며, 여기에서 삼 년 동안 내려가지 않겠다면 방부를 허락 하겠노라고 하였다.
암자의 살림살이는 가난해서 늘 배가 고팠다.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며 채전을 가꾸고 때때로 마을에 내려가 탁발을 해가며 일구월심으로 간절히 화두를 챙겼다. 때로는 눈물을 쏙 빼도록 추상같이 꾸짖는 경책의 서러움을 참고 선지식이 지시하는 대로 믿음을 잃지 않았다. 해태심이 일어나고 화두를 놓쳐 졸음에 빠질 때는 죽고 싶은 절망감으로 어미 잃은 한 마리 짐승처럼 온 산천을 헤매야 했다. 세월은 흘러서 큰스님과 약속한 삼 년이 지나고 군대에 가게 되었는데 공부에는 큰 힘을 얻었지만 아직 다 마치지 못한 줄 알고 전방부대에까지 찾아와 몇 번 면회를 해주시며 다시 선방에 삼 년 입제한 것과 같으니 평지에서 죽은 사람이 수없이 많으니 오히려 펄펄 살아서 요동치는 삶의 현장에서 큰 힘을 얻어야 한다고 끝까지 공부를 격발시켜 물러나지 않게 해준 선지식의 은혜 골수에 사무쳐 잊을 수가 없다.
참선 공부는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야 한다. 지루한 장마 끝 먹구름 속에 갇힌 태양이 홀연히 제 얼굴을 드러내듯이 한 줄기 바람을 만나 얼굴을 드러내듯이 선지식이 지시하는 한마디는 만년 동굴의 칠흑 같은 어둠을 깨고 일순간에 지혜의 광명을 놓게 한다.
팔 년 정진 끝에 깨달은 남악 혜양 선사가 육조 스님을 다시 찾아 왔다. “어떤 물건이 왔는가, 다시 일러라?”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도리어 닦고 증득함이 있느냐”고 물으니 “닦아 증득함은 없지 않으나 물들여 더럽힐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다만 오염될 수 없는 것이 모든 부처님께서 호념하시는 바이니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고 하시며 크게 인가하셨다.
오염될 수 없는 이것은 깨달음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흔적이 남아 있다면 아직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다. 마치 귀한 금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병을 일으키듯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한다면 우스운 일이다. 산 높고 물 깊은 줄 모르고 난행고행을 해가며 몇십 년을 찾아 헤매었구나.
깨닫기 전에도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았고 깨닫고 봐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구나. 낚시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 앉아 고기 잡는 아랫마을 장 씨 아저씨 김 씨 아줌마 깨달은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네. 깨달았다고 하지만 이 모습을 벗어날 수가 없으니 시커먼 얼굴 그을린 손에는 벌써 숭어를 한 마리 잡았는데 큰 것을 잡았다고 박수치며 깔깔대는 천진한 저 모습. 어느덧 하루해는 바다에 떨어지고 황금빛 물결 비단 같구나. 오늘도 무심의 바다에 배를 띄워 바람 부는 데로 물결치는 데로 높았다 낮았다 남은 세월을 보내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부족함이 없구나.
어디로 가야 하나
길 따라가지
거금선원장 일선 스님 www.gukumzen.com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