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부터 눈이 도로가 옆으로 1미터 가량 쌓인 고속도로를 4시간가량 달려 도착한 보스턴은 추웠다. 긴장감에 밤잠을 며칠이나 설친 탓에 자다 졸다를 거듭하면서, 쏟아져 내리는 피로감을 가까스로 견뎌가고 있었다. 혓바늘 돋은 듯 까끌한 입안에 도는 마른침을 삼키며 나는 인연이란 단어에 대해 헤아리고 있었다. 1939년 우리나라의 회암사 혹은 개성의 화장사로부터 도굴되어 미국 보스턴까지 흘러가버린 ‘라마탑형 사리구’와 부처님, 지공스님, 나옹스님이 아주 먼곳에서 손짓하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무도 되돌아 보지않고 창고속에 묻혀 존재가 잊혀진 부처님과 고승의 사리들이 태평양 너머의 나를 향해 자꾸만 말을 걸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힘으로 나는 무조건 부처님과 고승들의 사리를 친견하기 위해 2009년 이곳 보스턴에 방문했었다.
생면부지의 한국 승려가 당돌하게 부처님과 고승들의 사리를 친견하겠다는 생떼를 보스턴 미술관은 무슨 이유인지 별다른 저항없이 수락해 주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정병국 의원도 바쁜 시간을 내어 보스턴 미술관 방문에 동행해 주었다. 미술관측에서는 관장, 부관장, 동양미술관 부장 등이 나와 ‘라마탑형 사리구’를 반환해 달라는 우리의 입장을 청취했고, 미술관측도 외부인에게 공개하기는 처음 있는 일이라며 직접 사리구를 열어 부처님과 고승들의 사리를 보여주었다.
2009년 1월 부처님과 고승들의 사리를 직접 확인하는 모습 첫 번째 만남이 있고, 수차레의 서신왕래가 있었다. 보스턴 미술관은 우리의 진정성을 이해하는 듯 보였고, 사리구의 반환은 불가능 하지만 종교적 신성물인 부처님과 고승들의 사리는 원산국으로 반환할 수 있다는 답변을 주었다. 단 한국 문화부 장관이나 문화재청장이 사리만의 반환을 승인한다면이란 조건을 달았다. 보스턴 미술관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자신들은 1939년 일본의 ‘야마나까 컴퍼니’로부터 정당하게 매입했고, 도굴품이란 결정적 증거가 없으므로 ‘사리구 반환’은 불가하다는 입장이었다. 완전한 반환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었지만, 현실적으로 ‘사리구의 반환’이 성사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므로 우리는 ‘사리만의 반환’에 일단 동의하고 문화재청에 승인을 요구했다.
그러나 뜻밖에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사리만의 반환은 승인해 줄 수 없다는 거절의사를 통보했다. 완전한 반환이 아니면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문화재청이 사리구의 반환을 추진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지만, ‘사리만을 받으면 자칫 나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이번에 사리라도 받지 않으면 모든게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며 문화재청장에게 간곡한 사정을 전달했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끝내 사리만의 반환에 동의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전면 백지화되었다.
2009년 11월 막 추운 겨울이 시작되던 때였다. 그때 나는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보스턴 미술관과 싸울 수도 없고, 문화재청과 싸울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디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불교의 상징물이 될 수 도 있는 부처님과 지공, 나옹 스님의 사리를 눈앞에서 잃어 버린 자신이 너무 무력하게 느껴졌다. 사리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그릇 때문에 사리를 돌려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무언가 본말이 전도된 듯한 생각이었다. 옷을 돌려주지 않으면, 인질도 받지 않겠다는 말인가?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렸다.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리구까지 받아야지 사리만 받아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여기서 끝인가 하는 좌절에 좀 사로잡혀 있었던 듯 하다. 봉선사 조실스님께서 상심한 내게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아직 부처님과 조사스님의 사리가 돌아올 인연이 무르익지 않아서 그렇겠지. 시간이 좀 지나면 또 좋은 인연이 있을게다” 특별히 무슨 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그날로 모든 것을 잊었다. 또 다른 인연이 무르익으면 언젠가 기회가 있으리라는 막연함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인연의 소치를 기다리면서…. 부처님 진신사리의 모습. 백색옥석 모양 2010년 11월 나는 다시 보스턴 미술관에 가야겠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알 수 없는 힘이 나를 잡아당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보스턴 미술관에 새해를 맞아 사리를 참배하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고, 동양미술부장으로부터 그래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출국 준비에 한창 여념이 없는 터에 나는 뜻밖의 뉴스를 접했다. 2009년도 보스턴 미술관에 함께 동행했던 정병국 의원이 문화부 장관에 지명되었다는 소식이었다. 뭔가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뉴욕에 도착한 며칠 뒤, 정병국 의원이 청문회를 통과해서 장관에 취임했고, 문화재청장도 교체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보스턴 미술관이 문화부장관의 승인을 받는다면 사리를 반환할 수도 있다는 조건이 완성될 수 있다는 희망이 꿈틀거렸다. 보스턴 미술관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양미술부장 제인포탈은 자신들도 정병국 의원의 장관취임 소식을 듣고 있으며, 문화재청이 교체되었다는 뉴스도 접하고 있다고 했다. “ 한국 문화부장관이나 문화재청의 승인이 있다면 사리를 반환할 용의가 있다는 보스턴 미술관의 입장은 아직도 유효합니까? “우리는 정병국 장관의 취임이후 사리반환문제가 두 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한국 정부의 입장을 타진해 볼 생각입니다. 만약 정부가 사리만의 반환에 동의한다면 부처님과 고승들의 사리는 원산국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면담 지나치게 긴장한 탓이었는지 면담을 마치고 나니 맥이 풀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벌들이 윙윙대는 듯이 산란해서 나는 그만 휴대전화마저 분실해 버리고 말았다. 회담이 지난 뒤, 며칠간 내리 잠만 잤다. 한명의 승려로서 부처님과 조사스님들의 사리를 찾아 고국으로 보낼 수 있다는 영광. 그리고 혼신을 다한 승부 끝에 오는 피로가 겨울잠으로 나를 엄습해 왔다. 그렇게 며칠간의 잠에서 깨어난 뒤, 나는 뉴스를 통해 정병국 장관이 기자 감담회를 통해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한 사리반환을 추진’하겠다고 말한 기사를 읽었다. 꿈을 꾸는 듯 구름위를 걷는 듯 넋이 나간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지난 수년의 세월,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맨몸으로 미국에 건너와 좌충우돌 헤쳐나간 시간들이 필름처럼 머리를 스친다. 고려말 꿈틀대던 불국정토의 꿈을 담아 봉안되었던 부처님과 고승들의 사리는 과연 700년의 세월을 넘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