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3:17-30
찬송가 342장 너 시험을 당해
사울이 죽자 다윗은 이스라엘 남쪽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만의 왕의 됩니다. 분명 다윗은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온 나라를 다스리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성경은 그 시간이 7년 반이라고 알려주며 이 기간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사무엘하 3:1)”
다윗은 전쟁을 더 치러야 했습니다. 이때 전쟁은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백병전이기만 하지 않았습니다. 각종 야합과 모반이 벌어지는 정치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이 속한 사무엘하 3장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이 정쟁에서 먼저 움직인 건 사울 집안 실권자 아브넬이었습니다. 사울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이 죽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워 왕가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도 시대의 조류를 더는 맞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보셋을 버리고 새 왕을 선택합니다. 바로 다윗을 말입니다. 앞서 다윗에게 전령을 보내 그의 의사를 확인한 아브넬은 이제 자기가 설계한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조각을 집어 듭니다.
아브넬과 다윗의 협상(17-21절)
(17-18)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아브넬이 다윗과 담판을 지으러 가기 전 찾은 사람은 이스라엘 장로들이었습니다. 아브넬은 그들에게 이제 다윗이 나라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장로들은 전부터 여러 차례 다윗을 왕으로 옹립하기를 요청했었습니다. 아마 그때의 목소리를 잠재웠던 게 아브넬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그가 먼저 나서 이제 그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아브넬은 이 일이 결코 매국 행위가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강조하려고 하나님 말씀을 인용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세우겠다 약속하셨다고 말입니다. 아브넬이 제시한 말씀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사무엘상 9장 16절에서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신 말씀과 비슷합니다.
아브넬은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장로들의 응답을 알려주진 않지만, 아브넬의 이후 행보로 봤을 땐 모두 긍정한 걸로 예상됩니다. 뒤이어 19절에서 베냐민 사람들까지 설득한 아브넬은 다윗이 있는 헤브론으로 향합니다.
(20)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아브넬은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다윗에게 갔습니다. 적진 한가운데로 가는데 이십 명은 결코 싸울 의도가 없는 숫자입니다. 이처럼 오직 협상만을 위해 온 아브넬과 일행을 위해 다윗은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계약을 체결하고 나면 당사자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아브넬은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다윗에게 말합니다.
(21)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아브넬은 처세술에 능했고 언변도 뛰어났습니다. 그는 세 동사를 활용해 다윗에게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표명합니다.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을 모으겠다며 말입니다. 또한 그는 다윗을 ‘내 주’라고 높이며 충성 서약을 하겠다고 확언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나라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겠다며 짐짓 자신이 바로 킹메이커임을 밝힙니다. 이에 다윗은 아브넬에게 평안, 샬롬을 고하며 보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야기 흐름이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권력투쟁이 이는 나라에서 있을법한 모략과 야합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이 자연스러움 안에 몇 가지 어색한 모습이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중 큰 이질감을 선사하는 건 바로 다윗의 모습입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다윗은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다 아는 듯 넓은 아량을 보입니다. 일전에 사울이 죽은 뒤 바로 투항하지 않고 칼날을 들이밀었던 아브넬을 품는 아량 말입니다. 다윗은 그를 위해 잔치까지 베풀며 일견 원수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까지 합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달라진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앞서 광야 구석구석을 전전할 때, 위기 때마다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에봇을 가져와 우림과 둠밈을 사용해 물었고, 때론 노래로, 때론 절규로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뢰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나라의 통일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다윗 입장에서 보면, 어서 통일을 이뤄야 하는데 피 흘리지 않고 일을 이룰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뜻에도 부합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윗의 착각이었습니다.
다윗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이 방법이 맞는지 질문했어야 합니다. 또한 그가 그동안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 존중한 걸 생각할 때, 이 일을 진행하며 이스보셋과 이야기 나누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둘을 다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다윗을 이렇게 달라지게 했겠습니까?
혹 인생 항해가 순풍에 돛단 듯 순항일 때, 오히려 그때 우리는 스스로 제동을 걸어 잠시 멈춤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제대로 가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물어야겠습니까?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묻고, 내 좌우 믿음의 동역자들에게 물어야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긴장감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길입니다. 순탄함이 항상 복이기만 하진 않습니다. 그늘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어느새 너무 생활화 해버려 무뎌져 버린 우리의 영적 긴장감을 다시 회복하십시다. 그렇게 우리 인생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 안에서 노정 하는 교우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한편 본문은 다윗의 실수만을 지적하지 않습니다. 아브넬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21)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아브넬이 다윗을 ‘내 주’라며 높이고 있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그러나 지금 아브넬은 자신이 하나님인 양 왕을 세우기도 하고 폐하기도 합니다. 아브넬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분명 아브넬은 뛰어난 정치 감각을 가졌습니다. 행동도 기민하고 추진력도 뛰어납니다. 부하를 겨우 20명만 대동하고 적장을 마주할 정도의 대범함까지 갖췄습니다. 분명 그는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다윗도 이런 그의 능력을 사서 요압을 견제하고자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교만했습니다. 그는 교만한 자아에 취해 분별력을 잃은 사람이었습니다. 팀 켈러 목사는 인간의 본성적 자아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한껏 부풀어 오른 풍선 마냥 우쭐해지고 스스로 높아졌다” 아브넬은 자기 중심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렇게 그에게는 다윗도 하나님도 아닌 자기 자신이 왕이었습니다. 이렇게 교만한 그는 일개 인간 왕에 의해 샬롬을 보장받는 듯했지만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이 왕인 사람의 인생은 겉으로 보기엔 승승장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아도 분명 실재하는 세상, 영적 세상에선 악화 일로를 걷습니다. 오늘 교우님은 누구를 왕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오염되고 터지기 직전까지 부푼 자아를 지닌 나입니까? 매주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대언 하는 듯한 목사님입니까? 아니면, 자타공인 뭇 사람의 존경을 받는 유튜브 속 선생입니까? 세상 그 무엇도 우리 인생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도 사람도 나 자신도 아닌 오직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가장 완전하며 지혜로우신 왕,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왕의 보호와 인도만을 구하며 의뢰해야 합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내가 왕으로 살기보다 진정한 왕의 사자로 사는 복된 인생 사시길 축원합니다. 다윗과 아브넬의 회담이 끝났을 때 오늘 본문의 또 다른 주인공이 화면 안으로 들어옵니다.
요압의 아브넬 살해(22-27절)
(23) 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다윗의 군사령관 요압입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주변국 영토를 노략하고 왔습니다. 아직 헤브론엔 세금을 걷을 행정 체계가 없었기에 다윗은 시글락에서처럼 약탈한 물건들로 나라 살림을 했습니다. 이때 요압에게 한 사람이 소식을 전합니다. 아브넬이 다윗과 만났고, 그가 평안히 돌아갔다고 말입니다. 이에 요압이 반응합니다.
(24-25)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소식을 들은 요압은 분노했습니다. 그는 곧장 다윗에게 가 따졌습니다. 아브넬이 나라 사정을 염탐하려는 속셈으로 온 건데 어떻게 그냥 돌려보냈냐며 말입니다. 사실 요압이 이렇게 반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게 아브넬은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요압은 마치 아브넬이 이스보셋에게 윽박지른 것처럼 다윗을 대합니다. 그리곤 다윗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나와 움직입니다.
(26-27)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요압은 곧바로 아브넬에게 사람을 보내 그가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곤 성문 안에서 그를 죽였습니다. 요압은 동생의 죽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동생이 당한 것과 똑같이 아브넬의 배를 찔렀습니다.
요압의 이 행동은 일정부분 이해가 됩니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인 자입니다. 요압은 아마 그날을 결코 잊지 않았고 그때부터 아브넬을 향한 복수심을 키웠을 것입니다. 노략질을 마치고 온 그에게 누군가가 아브넬 소식을 곧장 전한 것도 이런 그의 마음이 공공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동시에 요압은 아브넬을 경계했을 것입니다. 왕이 개국공신인 자기만 빼고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앞으로 세워질 통일 왕국의 자기 자리를 아브넬이 차지한다 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더더욱 아브넬을 없애야겠다며 이를 갈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아브넬은 오로지 협상만을 위해 왔습니다. 세계 곳곳 역사를 통틀어 협상자의 안전은 보장해주는 관습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때 아브넬이 아사헬을 죽인 건 죽음이 불가피한 전장이었고 사실 아브넬은 아사헬을 죽일 생각도 없었습니다. 창의 뒤 끝으로 찔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요압의 범죄 현장인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도피성 중 하나였습니다. 율법은 죄인이 도피성에 이르면 그의 죄가 의도적이었는지 우발적이었는지를 판결할 때까지 생명을 보장합니다. 게다가 헤브론이라는 이름에는 ‘친구로 삼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피의 보복이 금지된 이곳, 누구든지 서로 친구가 되어야 할 이곳에서 요압은 사적 원한을 앞세워 행동합니다. 그에겐 다윗도, 율법도, 하나님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뒤늦게 요압의 일을 보고 받은 다윗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윗의 저주(28-30절)
(28-29)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다윗은 이 일을 듣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상황이 묘합니다. 아직 다윗은 사울의 집과 전쟁 중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군사령관이 무방비 상태인 적의 군대 장관을 죽였습니다. 누가 봐도 이 일 배후에 다윗이 있다고 여길만합니다. 그렇다면 무르익었던 대업, 이스라엘의 평화 통일은 물 건너 가고 더 큰 분열이 생길 게 뻔합니다. 이에 다윗은 곧장 이 일에 자신과 나라는 무관하다고 선언합니다. 어찌나 다급했던지 이제야 다시 하나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증인 삼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요압과 그의 집안을 저주합니다. 그가 부른 피의 절규는 오직 그와 그의 집안에 돌아갈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다윗은 임종 때 요압을 제거하라는 유언까지 남기게 합니다. 결국 이때로부터 약 30년 뒤 요압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실 요압도 아브넬처럼 자신을 자기 내면의 왕으로 세운 채 살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 힘만 믿고 이곳저곳에서 칼을 휘둘렀습니다. 이런 그의 폭정을 막은 건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질주하는 자의 최후는 이토록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사실 다윗도 요압이나 아브넬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지금 요압의 일에 선을 긋고는 있지만, 요압은 다윗의 신하입니다. 즉, 다윗은 최종 책임자입니다. 아브넬의 억울한 죽음에 다윗의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다윗의 대처도 일정부분 의아한 면이 있습니다. 율법 어느 곳에도 적절한 처벌 대신에 저주를 선언해도 좋다는 말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백성은 다윗의 행동에 만족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기자는 이 상황에 누가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 잘 보라며 독자의 주의를 환기합니다. 어쩌면 다윗도 보장된 왕좌에 눈멀어 자기 마음속 하나님 자리를 조금씩 지워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요압의 만행을 몰랐었다는 말은 결코 다윗 죄책을 덮지 못합니다. 이처럼 다윗마저도 영적 긴장감이 무뎌져 버려 죄의 길을 걷는다면 과연 오늘 우리에게 어떤 소망이 있는지 의아해집니다. 이번 주일 말씀에서 살핀 2천 년 전 동산 위 우리 믿음의 대 선배들도 전 우주적 사건을 앞두고 그저 꾸벅꾸벅 졸만큼 영적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실패한 일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못난 다윗도, 난폭한 요압도, 교활한 아브넬도 다 사용하셔서 자기 일을, 역사를 이뤄가신다는 점입니다. 이 부족한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고야 마신다는 점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제자들의 무뎌진 영적 긴장감을 지적하신 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마태복음 26:46, 마가복음 14:42)” 하나님이 다윗을 끝까지 붙들고 그를 하나님 나라 주역으로 세우신 것처럼 예수님도 제자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못난 이들 손을 잡고 함께 가셨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 속 아브넬과 요압과 다윗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보고 좌절하지 마십시다. 결국 우리를 붙들고 목적하신 곳까지 이끌고야 마시는 하나님을 보십시다. 작고 좁고 낮은 이 세상에 살다 보면 하나님을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 기억 못 하고 다 알지 못해도 하나님이 우릴 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목적 삼기 전에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오늘 하루도 담대하게 세상을 이긴 주님의 자녀로 사시길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워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교활한 아브넬도, 난폭한 요압도, 타성에 젖어버린 다윗도 다 저마다의 이유로 하나님 아닌 자기 자신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이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영적 긴장감을 잃은 우리는 이들보다 나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자이신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의 못남을 보고 좌절하기보다 하나님의 크심을 보고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목적 삼기 전 우리를 목적 삼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만을 왕으로 높이며 살기를 구합니다. 그때 그렇게 사는 우리 삶이 이 땅에 보내진 하나님의 사자로 드러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윗과 협상한 아브넬의 속내는 무엇이었고, 그 일로 아브넬이 얻은 것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에 비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오늘 내가 보일 내 행동의 동기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2. 아브넬을 향한 요압의 복수는 온당했는지와, 하나님께 토로할 내 마음의 원통함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세요.
3. 하나님께 묻는 게 일상이었던 다윗이 어느새 자기 스스로 나라의 대소사를 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반면교사 삼아 영적 긴장감을 유지할 나만의 방법을 생각해보세요.
4. 아브넬도 요압도 다윗도 온전한 없는 이가 없는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는 세워져 갔습니다. 이를 보며 하나님의 일하심의 크기와 한계를 헤아려 보고,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보세요.
(작성: 이종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