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복은 이루고자 욕심을 낸다고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교육학이 신학에도 적용이 되어 인문학이니
수사학이니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걸 봅니다. 심지어 요즘은 교수들이
나와서 인문학이 어째서 수사학이 어째서 하고 따지듯 항변합니다.
어거스틴도 칼빈도 수사학이나 인문학을 연구하던 사람인데 왜 문제냐고
항변을 합니다. 사람의 입의 말이나 글이 왜 문제겠어요? 그게 사람의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감동에 의해 대변하느냐가 문제일 뿐입니다.
바울도 헬라어로 그의 서신서를 기록했는데 철학이 왜 문제일까요?
중요한 것은 성경을 보는 안경 곧 계시의 영을 가진 자로 인문학이나
수사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거나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8복은 아무나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있는 제자들이
진리의 성령을 받아 포도나무에 가지로 붙어 있는 상태에서 진행됩니다.
그래서 마5:3절의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하는 시제는 현재입니다.
그리고 마5:10절에 또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는 시제도 현재입니다.
마5:4절부터는 미래형으로 되어 질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8복은 현재
천국 안에서 천국의 대헌장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심령천국이 이루어져야만 그 다음부터 단계적으로 진화가 되어 집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앞에는 배부름이 나오는데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자는 자신을 버리고 그 분 안에서 땅을 기업을 얻은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를 쌓을 영혼의 창고가 준비된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됩니다. 긍휼히 여겨봐라 그리하면 나도 그러하리라가 아니라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있음은 모세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롬9:15) 또 육체의 모든 조건은 에서가
월등한데도 하나님의 뜻은 이삭의 축복을 야곱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롬9:13)
우리는 율법도 성전도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그 뜻대로 그리스도를 담아 주신 새 언약을 받았음을
복음을 듣고 깨달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들로 발견이 된 겁니다.
율법에 흠이 없었던 바울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므로 그리스도를
그 몸에 모신 새 언약의 일꾼이 되었노라 고백한다면 율법을
까맣게 모르던 완전히 다른 종자였던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신기한 능력으로 개종(改種) 중생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긍휼 중에도 최고의 긍휼을 받은 겁니다.
그야말로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원 돌감람나무에 찍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과한
은총에 피동 되어 본성하고는 전혀 다른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은
것(롬11:24)은 불순종에 가둔 다음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롬11:32)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긍휼입니다.
성경을 읽어 보면 만인 구원설이 맞는 것 같으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오직 긍휼히 여기는 자들만 구원하시겠다는 뜻입니다(롬11장)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눈과 귀가 열리지 않는 어린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참고 기다려야죠.
그러나 미혹하고 노략질(거짓말)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지금도 성경을 이 시대의 교육방법으로 교훈에 교훈을 더하는 꽃다발을
만들어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사람들의 영혼을 죽이는
살인자들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말에 열광하는 팬이
있으면 유대인들과 같이 당을 지어 만장일치로 예수님까지 처형할
기세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긍휼이 보이지 않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미 8복이 이루어져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말씀을
행하며 가르치므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마5:19) 그래서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2:12-13)합니다.
주기도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와 일백 데나리온의
비유(마18장)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교훈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빚 갚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랑의 빚외에는 아무것도 지지 말라(롬13:8)고 했습니다.
사랑해야 할 마음 외엔 아무 빚을 지지 말고 남에게 긍휼을 베풀라입니다.
야고보서 앞에 있는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 속에서 항상 말씀하시는
아들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어서 사도이시며 대 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파악하여 소망의 담대함을 붙잡아 하나님의 집이 되고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므로(히4:16) 들은 바 복음의 말씀이 화합(결부)이 되면
드디어 그 속에 있는 긍휼을 남에게 나누어주는 구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기도에도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구한 다음에 다른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게 되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쌀뒤주에서 인심이 납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비유를 뒤집으면 우리가 백 데나리온의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일만 달란트의 긍휼로 계산해 주시는 겁니다.
첫댓글 8복은 현재 천국 안에서 천국의 대헌장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