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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67) 2024. 5. 29
37인의 용사들
사무엘하 23:18-39
<물을 떠 온 세 용사>
지난 시간 두 번째 세 용사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하였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성읍을 점령하기 이전, 아둘람 굴 근처에 산성을 짖고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블레셋 군대가 공격해 왔습니다. 그 당시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라는 곳에 진을 쳤는데, 그곳은 바로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어린 시절 베들레헴에서 양 떼를 돌보면서 뜨거운 햇볕에 목말랐던 때 마시던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의 향수가 있었습니다. 그 물은 시원하고 깨끗한 생수였습니다.
지금 다윗이 진 치고 있는 아둘람 굴 근처의 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우물물을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블레셋이 점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움에 사무친 다윗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15)
이 말은 너무 간절하여 무심코 뱉은 말입니다. 누군가 떠 오기를 바라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혼잣말을 세 용사가 듣고, 블레셋 진영을 돌파하고 물을 떠 온 것입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다윗의 소원을 들어주고자, 생명을 걸고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까지 가서 물을 떠 온 것입니다.
물을 받아 든 다윗은 감동하였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두려웠습니다. 자칫 충성스러운 부하 세 명을 물 때문에 잃을 뻔하였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차마 마실 수 없었습니다. 그 물은 그들의 피와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두 번째 세 용사의 이름>
오늘 본문은 그 세 용사가 누구인지를 밝힙니다.
둘째 그룹 중에 첫 번째 용사는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입니다.
18~19절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아비새는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로 요압과 아사헬의 형제였습니다.
세 사람 중에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는 창을 휘둘러서, 삼백 명을 죽일 만큼 놀라운 힘을 가진 용사였습니다.
아비새는 스루야의 아들 삼 형제 중 다윗을 위해 가장 충성스럽게 헌신한 용사입니다. 그는 매사에 용감하고 희생적이었고 특히,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부터 다윗에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충성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 불레셋 거인을 맞아 싸우다 지쳐 죽게 되었을 때 거인을 죽이고 다윗을 구했습니다.
삼하21:15~17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의 부하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16 거인족의 아들 중에 무게가 삼백 세겔 되는 놋 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17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니 그 때에 다윗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아비새는 이스비브놉이라는 블레셋의 장군에 의해 다윗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달려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 죽였습니다.
사실 그는 다윗 왕의 조카이자 군대 장관 요압의 동생입니다. 그야말로 군부의 실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만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군대 장관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군부의 실력자가 되었다면, 그가 앉아 있는 자리, 그의 신분은 이름뿐이지 왕인 다윗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명목상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실력 있는 장수였고,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용사였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높은)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없다면 과연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하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군인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울 때에만 진정한 군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처럼, 성도 역시도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이 있어야만 성도, 즉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4:2)라고 하였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직분에 합당하게, 맡은 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비새와 같이, 여러분의 신앙 이력서도 주님을 위한 희생의 경력이 포함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아바새는, 첫 번째 세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첫 번째 세 용사는 ‘요셉밧세벳’(8절 : 적군 800명을 단번에 죽임), ‘엘르아살’(9~10절 :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싸움), ‘삼마’입니다(11~12절 : 녹두밭을 혼자 지킴). 그들 모두 ‘다윗과 함께한 용사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입니다.
둘째 그룹 중에 두 번째 용사는 제사장인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입니다.
20~23절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죽였으며/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브나야 역시 보통 이상의 힘을 가진 용사였습니다(‘갑스엘’은 유다 남쪽에 있는 지방 - 수15:21,느11:25)
본문은 브나야의 힘과 용맹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세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1)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인 것입니다.
‘아리엘’은 '신(神)의 사자(獅子, lion)'란 의미로서, '아리엘의 아들 둘'은 '사자같이 용맹스러운 두 용사'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은 매우 뛰어난 용사를 가리켜 '아리엘'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명이나 죽였습니다.
2) 눈 올 때에 함정에 내려가서 사자를 죽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사자의 출현은 매우 흔했습니다. 이 사자들은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면 먹을 것을 찾아 민가로 내려옵니다. 사람들은 사자를 두려워하여 함정을 파 놓았는데, 종종 사자가 함정에 빠졌습니다(겔 19:4, 8). 그런데 ‘브나야’는 맨몸으로 함정으로 뛰어 들어가 사자를 때려잡은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비교해서 생각해 볼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삼손’입니다(삿14장).
블레셋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삼손은 그녀와 결혼하고픈 마음에 블레셋 여인의 집이 있는 딤나로 갑니다. 그런데 딤나로 가던 중 한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납니다.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났다’는 표현 자체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입니다. ‘나실인’이란 말은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민 6:1~21).
나실인에게 금지된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주나 술을 입에 대지 말 것, 둘째,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 것, 셋째, 시체에 가까이하지 말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포도원에 간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나실인이 먹지 말아야 할 포도를 찾아간 것입니다. 거기서 젊은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물론 사자는 하나님께서 그릇된 길로 행하는 삼손을 경계하시기 위해 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손은 “아, 내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왔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경고를 주시는구나”하고 빨리 그 자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힘만 믿고 맨손으로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다시 올 때 자신이 죽인 사자가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여 다시 자신이 죽인 사자의 사체를 찾아갔습니다. 그 시체에 벌이 꿀을 모아 놨습니다. 거기에 모인 꿀을 떠먹고 또 자기 부모에게도 가져다주었습니다. 매우 경박하고 불신앙적인 행동을 반복하였습니다. 나실인에게 금지된 행동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한 것입니다.
여러분, 브나야와 삼손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똑같이 사자를 죽일만한 힘을 가졌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 용도가 달랐습니다.
브나야는 다윗의 충성스러운 용사로 다윗 왕국을 건설하는 데 긴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일이 그 힘을 사용하였습니다. 나실인이 금하는 모든 행동을 하였습니다.
술을 가까이했고, 시체를 가까이했고, 결국 머리까지 잘려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힘(은사)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선히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3) 막대기로 창을 가진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습니다.
21절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대상 11:23에는 그 애굽 사람의 풍채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상 11:23 “또 키가 큰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 사람의 키가 다섯 규빗이요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으나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서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죽였더라.”
이 사람은 ‘키가 다섯 규빗이요 그 손에 든 창이 베틀채 같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고대 성경의 도량 법상 1규빗이 대략 45.6cm이므로, 그의 키는 무려 2m 30cm에 이릅니다. 이러한 자를 브나야가 막대기 하나로 대결하여 그 장대한 애굽 사람의 손에든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찔러 죽였다는 것입니다.
막대기로 물리쳤다는 말씀을 들으면, 누가 생각납니까?
예, 삿3:31에 나오는 사사 삼갈이 생각납니다.
삿3:31 “에훗 후에는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할 때마다 그들을 이웃 나라에 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속에 회개하며 부르짖을 때 ‘사사’를 들어 구원하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를 세우시는 것을 보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사람을 쓰시는 하나님의 '용인술'을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사 ‘옷니엘’은 거의 80세에 이르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세우셔서,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겁쟁이 ‘기드온’을 택하셔서 둘도 없는 용사로 만드셨습니다.
또, 드보라와 같은 여성을 사사로 세우시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사람은 사람의 상식과는 거리가 멀 때가 많습니다.
‘삼갈’도 마찬가지입니다(단 한 절의 분량에 불과). 불레셋이 쳐들어오자, 하나님은 삼갈을 들어 쓰셨습니다. 삼갈의 직업은 ‘농부’였습니다. ‘소 모는 막대기’는 끝이 뾰족하게 되어 있는 길쭉한 막대기입니다. 쟁기질을 시킬 때에 뒤에서 소를 쿡쿡 찔러서 방향을 통제하는 그런 농기구입니다. 즉 평소 그가 잘 쓰던 물건이었습니다. 그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삼갈이 어떻게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는지 우리는 그 내막을 알 수는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일어나는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삼갈의 개인적인 힘이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때에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삼갈이 블레셋 군사들을 향해 들고 나갔던 것은 ‘소 모는 막대기’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삼갈을 사사로 세우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블레셋 군사 육백 명을 삼갈의 손에 붙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를 부르실 때 모세의 손에 들려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손에는 칼도 없었고 창도 없었습니다. 그저 양을 치는데 필요한 ‘지팡이’ 하나만 달랑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붙잡으시니까, 그 지팡이가 살아 있는 뱀으로 변하기도 하고, 그 지팡이로 홍해가 갈라지기도 하고,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니까 샘물이 터지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모세의 손에 들렸을 때는 한낱 지팡이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면 능력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소년 다윗이 가지고 있는 도구는 물맷돌이었습니다. 짐승을 쫓는 돌멩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그렇습니다. 그 순간 다윗이 들고 있던 것은 ‘물맷돌’이 아니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 천 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때 사용한 도는 나귀의 턱뼈였습니다(삿15:14-17).
이 모두가 한결같이 초라하고 평범한 물건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될 때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예수님도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브나야가 막대기로 거인 애굽 사람을 물리쳤다는 것을 굳이 기록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사람이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드려질 때,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실 때, 그것은 강력한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이러한 용맹스러운 브나야를 시위대 장관으로 삼았는데, 시위대는 왕의 근위대를 의미합니다(경호실장).
훗날 브나야는 솔로몬 왕위 계승에 결정적 공을 세워, 솔로몬의 군사령관이 되었습니다(왕상2:28-35).
그러나 브나야도 첫 세 용사에 견줄 만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둘째 세 사람 중에 마지막 한 명은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아비새, 브나야, ?).
어떤 이들은 훗날 그가 아마사나 아히도벨과 같이 압살롬의 반군에 가담했기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때 훌륭했던 용사라도 마지막까지 충성하지 못하면 그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때, 주님의 충성스러운 용사였다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 신앙을 지키지 못하면 생명록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초창기에 동역했던 사람들 중에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데마’입니다. 사도 바울이 결박당해 있을 때만 해도 데마는 누가와 함께 사역하며 성도들에게 안부를 전했습니다(골4:14 “사랑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인사하느니라.”).
그러나 훗날 데마는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습니다(딤후4:10 “데마는 현재의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그레스겐은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바울의 동역자 데마가 바울을 떠난 이유는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했던 롯도 세상을 사랑하여 소돔을 택해 떠났고, 엘리사의 종 게하시도 세상의 탐욕을 따라 타락의 길로 갔습니다. 아간이 망한 이유 역시 세상 탐욕 때문이며 주님과 함께 했던 가롯 유다가 주님을 팔아버린 것도 돈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주님과 동행했던 사람일지라도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세상으로 떠나게 됩니다. 마지막이 좋아야 모든 것이 좋습니다. 주님 부르시는 그 순간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계속 싸워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7인의 용사들>
마지막으로 24~39절에서는 ‘다윗의 32명의 용사’ 명단을 그들의 출신지와 더불어 소개하고 있습니다.
앞서 기록된 1급의 세 용사(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와 제 2급의 세 용사 중 두 사람(아비새, 브나야)을 합쳐서 37 명이 됨을 말합니다.
‘다윗의 32명의 용사’ 명단을 보면, 여기에는 몇 가지의 특징적인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는, 특정 지파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서 골고루 선발되었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 속했지만, 유다 지파 사람들만을 중용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지파 사람들을 골고루 중요하기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개종한 이방인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합을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보여줍니다.
또, 주목을 끄는 것은 마지막에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넣었다는 것입니다.
39절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다윗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범죄로 인해 죽임을 당한 ‘우리아’의 충성심을 기억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요압이 명단에서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요압은 다윗을 도와 많은 공적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군사령관을 지냈습니다. 많은 전쟁에서 누구보다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는 다윗이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그가 비록 다윗을 도와 많은 공적을 세웠다고는 하나 자주 다윗의 뜻을 거슬러 독단적인 행동을 하였기에 다윗은 그를 충성스러운 자신의 용사로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압은 뛰어난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었지만 충성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요압을 살려두지 말 것을 유언했고,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모반에 가담한 요압을 죽였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은 자신의 주변에 단순히 출신 성분이 뛰어나거나, 힘이 세거나, 똑똑하거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곁에 두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출신 좋은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특별한 재능이나 지식을 가진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으십니다. 신실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교회를 맡기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십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 순간까지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용사’로 쓰임 받고, 마지막에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록 책에 선명히 기록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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