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의 어린시절이란 제목으로 내 어릴적 생활상을 글로 적어 보았습니다.
다들 옛날에 같이 생활했던 기억이 나겟지요!
옛날 사진을 같이 실어놓았는데 용량초과라 입력이 안되네요.
그냥 글만 읽어보세요.
재미 없겠지만 읽어보고 그 옛날 한번 생각해보세요
담에는 우리 중학시절을 실어볼 예정입니다.
자전거통학이랑 모처럼 운동회 사연들이랑 박중근선생님 영어시간 맞은거랑 최진도선생님 체육시간이랑
1학년때 군사혁명일어나 보리밥 도시락 싸오는거 검사한다고 군인과 선생님이 점심시간에 검사한 사연 등등 해서..
◘ 백천(白川)의 어린 시절
옛 성산가야의 도읍지였던 성주는 합천과 경계를 하고 있는 가야산과 김천 방면의 수도산 줄기 그리고 구미 방면의 금오산 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아늑한 아름다운 시골 마을과 같은 모습이다.
그 가운데에 성주읍이 있고 성산이 있다. 3개 면을 걸쳐서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과 가야산 사이로는 가천과 대가천 백천의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이 시냇물은 성주의 젖줄이다.
성산과 백천은 내 어린 시절에 뛰놀던 즐거웠던 고향산천(故鄕山川)이다. 가을과 겨울이 되어 북녘 하늘에서 날아오는 기러기와 낙동강과 맞물려있는 백천은 붕어 송어 잉어 메기 피레미 등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잇는 곳이다.
맑고 푸르던 하늘에는 온갖 새들의 노래와 구름 꽃이 고향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려주었고 들에는 아지랑이와 가지가지의 곡식들과 뱀과 개구리 그리고 시냇물의 물고기는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친한 벗이었다. 나는 그들의 절친한 고향의 벗이었지만 그들은 죽도록 나를 위해 함께 놀아주었던 자연의 아름다운 친구들이 아니었던가!
정지용의 향수는 내 고향을 노래했다. 김소월의 진달래도 접동새도 산유화(山)有花)나 못 잊어 생각이 나는 모든 시(詩)들이 내 고향을 노래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날마다 풀을 따서 시냇물에 던져요 등 소월의 시는 내가 지으려했던 고향의 노래였다.
그 때 어린 시절의 마을은 30여 호가 거의 다 초가집이었다. 이웃집들이 옹기종기 담을 두고 가까이 살았다.
찔래꽃도 외나무다리도 능금 꽃 순정과 버들피리도 내 고향에 다 있었다.
내가 살던 어린 시절의 고향은 우리나라 고향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고향이었다.
익은 곡식을 거둬들이고 난 겨울 논에서는 썰매를 타고 팽이놀이를 했다.
논둑에 쌓아 둔 짚단 앞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날아가는 구름과 기러기를 보면서 연을 날리었다. 지게를 지고 이산저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니기도 했고, 찬바람 몰아쳐도 산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동네 아이들과 세상이야기를 하면서 한 때를 보내기도 했다. 그 때는 눈도 참 많이 왔었는데 이산 저산으로 토끼 잡으로도 가고 마당가운데 짚 소구리를 걸쳐놓고 참새도 잡았다.
설을 앞두고는 한 달 전부터 남은 날을 손꼽아 헤아리며 기다리고 밤새 호롱불 아래서 옛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보름날 달 불 놀이는 더 한층 신이 났다.
설이 지나면 봄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봄눈 녹아 흐르던 시냇가 들녘에서 버들피리 보리피리 불며 아지랑이와 함께 춤추던 어린 시절!
뒷동산에 진달래와 할미꽃이 필 때는 “창 꽃 꺾으러 가자”하고 동무들과 산으로 다녔다. 그 때는 소월의 진달래꽃을 몰랐다. 아무런 감정 없이 그저 꽃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단오가 될 무렵이면 백천의 모래밭에는 사나이들의 씨름과 버드나무숲에서 그네 타던 처녀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봄은 더욱 즐거운 계절이 되었다. 봄의 아름다움이 여기저기서 솟아오른다.
논두렁 밭둑에는 송아지가 울고 새참 나르는 아낙네의 발길이 차츰 바빠져 갈 때 동네 밖 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의 고요를 요란하게 휘저어 놓는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던 여름의 백천은 낙원 그 자체였다.
낯에는 발가벗고 물고기를 잡고 밤에는 발가벗고 멱을 감았다.
빨래하던 여자들 곁에 낮에는 감히 근처에 얼씬도 못했지만 밤이 되면 사정은 달랐다. 물장구를 치면서 목욕하던 여자들의 옷을 훔쳐 멀리까지 가져다놓아두곤 했다. 아름다운 몸매를 구경할 생각에서가 아니라 괜한 실술 때문이었다. 좀 커서 그런 장난을 했으면 옷 찾으러 뛰어가던 숙이 모습이 더욱 아름답게 보였을 텐데 지금은 참 후회스러운 생각이 든다. 그러나 커서는 또 그런 장난을 하지 못했다. 더욱 아름다웠던 숙이 와는 시집갈 때까지 짝사랑으로만 지냈으니까..
여름의시냇가에는 수박 참외 밭이 있고 버드나무끼리 지은 원두막이 있었다. 요란하게 울부짖는 매미 소리에도 낮잠은 정말 잘 왔다. 어른들의 논매기 노래를 은은하게 들으며 원두막에서 자던 낮잠은 세상에서 가장 맛좋은 잠이었다. 대지의 품에 안겨 잠자던 어린아이의 모습과 같은 평화로운 단잠이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더운 여름 날씨에도 버들가지를 등에 꽂고 흥겹게 논메기 노래를 부르면서 논메기를 했다.
⌜잘하고 자로 하네 에히요 산이가 자로 하네. (후렴) 이봐라 농부야 내 말 듣소 이봐라 일꾼들 내 말 듣소. 잘하고 자로 하네 에히요 산이가 자로 하네. 하느님ㅁ이 주신 보배 편편옥토(片片沃土)가 이 아닌가. 물꼬 찰랑 돋아 놓고 쥔네 영감 어디 갔나. 잘한다 소리를 퍽 잘하면 질 가던 행인이 질 못 간다. 잘하고 자로 하네 우리야 일꾼들 자로 한다. 이 논매미를 얼른 매고 저 논매미로 건너가세. 담송담송 닷 마지기 반달만치만 남았구나. 일락서산(日落西山)에 해는 지고 월출동령(月出東嶺)에 달 돋는다. 잘하고 자로 하네 에히요 산이가 자로 한다. 잘하고 못하는 건 우리야 일꾼들 솜씨로다. -논매기 노래-⌟
한 잠을 자고나면 동네 아저씨가 논 가운데에서 송어 1마리 잡아 배를 딴 후 논물에 이리저리 흔들어 씻고는 입에 넣는다. 그 모습은 잊어지지 않는다. 얼마 전 낙동강물이 넘쳐 논에도 고기가 많이 들어왔다.
▶ 모내기를 하기 위해 모를 찌고 있는 모습
여름 내내 백천에서 고기 잡고 목욕하고 강둑에 소 풀을 먹이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 듯 소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가을이 다가온다.
들녘은 쓸쓸해진다. 하늘은 더욱 맑고 푸르고 잠자리는 신나게 날아다니고 밭에도 논에도 곡식들이 알차게 익어가는 가을이다.
코스모스와 야생 국화가 피어있는 시냇가를 따라 고향 떠난 아가씨가 백천의 시냇가를 따라서 집으로 간다. 파라솔 우산을 하고 가는데 긴 머리와 스커트 치마가 가을 산들 바람에 나부낀다. 내일 모레가 추석이다.
추석은 설과 함께 우리의 최대명절인 아닌가!
조상들과 고향의 동무들과 함께 온갖 추억의 이야기를 엮어 낸 명절이다.
낮에도 달빛이 아름답던 밤에도 그네를 타기도하고 널뛰기도하고 강강수월래 노래도 부르고 고향처녀와 함께 뒷동산에서 밤새 이야기를 하며 지냈다. 둥근달을 쳐다보며 밝게 미소 짓던 모습과 길게 땋은 비단 같은 갈색 머리에 밤바람에 나부끼던 치마와 저고리 고름은 찔래꽃 유행가처럼 정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아름답던 그 때 그 시절이었다.
알밤이 익어가고 울타리에서 자란 감나무에 익어가는 감이랑 지붕위의 하얀 박이 영글어 갈 때 하늘은 더욱 푸르고 밤하늘의 별은 더없이 밝게 빛났다.
고향의 하늘을 수놓은 철새도 서서히 자리바꿈을 한다.
제비는 남으로 날아가지만 기러기는 북녘 하늘에서 날아왔다. 그 때는 북녘이라는 곳이 무척이나 아늑하게 보이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러시아나 북한이라는 곳이 그저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머나먼 곳으로만 생각되었다.
황금곡식으로 꽉 차있던 들녘이 수확을 다하고 무서리가 내릴 때쯤 되면 무배추만 남아 황량한 들녘을 참 서글프게 한다.
혹독한 추위가 오기 전에는 흰옷 입은 어른들은 묘사를 지내려고 산비탈을 지나 산으로 간다.
여자들은 혼기를 앞두고 있는 아들딸을 위해 산 너머 이웃 저 멀리로 나들이를 한다.
감나무에서 아침에 까치가 와서 울면 좋은 손님이 온다고 어른들은 마당을 쓸어 라고 청소를 하라고 했다.
어린 시절에 고향에는 마을 앞을 지나가는 유일한 길이 있었다.
우리는 어릴 때 그 국도를 신작로라고 불렀다. 길 양쪽에는 가로수가 버드나무였다.
가을이 되면 버드나무 잎 단풍도 참 고왔었다.
노란 단풍잎을 주워서 책속에 끼워두고 가끔 꺼내보곤 했다.
그 길은 참 많은 사람들이 다녔던 곳이다.
가장 심금을 울리게 한 사연은 아버지가 8세 때 부모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할 때 장티브스 전염병을 알고 난 뒤 고기가 몹시도 먹고 싶었으나 돈이 없어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마찬가지로 머슴살이를 하는 11살의 형님에게 가서 논에서 일하는 형을 만나 돈을 얻어 문어를 산 뒤 10여리를 걸어가며 문어1마리를 다 먹고는 어린 두 형제가 길가에 앉아 손을 잡고 한없이 울었다는 이야기를 하시었다.
길가의 논두렁에 앉아 두 형제는 손을 잡고 한없이 울다 이야기하다 해가 진 뒤에야 다시 각자의 머슴살이 집으로 갔다는 이야기를 하시었다.
그 때 그 시절의 조상들은 모두가 다 그렇게 나라 잃은 설움에다 모진 삶의 고통에서 몸부림 쳐야만 했던 사연들이 있었던 것임을 글도 몰랐던 그 당시 서민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서야 어찌 알 수 가 있으랴!
과거보러 한양 길로 떠나가던 옛 선비들!
생활이 어려워서 그리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흔히들 이야기대로 개나리 봇 짐 지고 많은 고향사람들이 이 길을 지나갔다. 일본 식민지 시대 때는 모두들 만주로 많이 떠나갔었다.
우리 아버지도 그런 길을 걸었다. 광부로 보국대로 전쟁터로 중국과 남태평양을 기약 없이 정처 없이 끌려 다녀야만 했다.
해방이 되어서도 이내 곧 겪었던 한국전쟁은 어릴 때 가장 많은 추억을 남긴 시절이었다. 어께 띠를 두르고 군가를 부르면서 트럭에 타고 가던 동네 아저씨들의 눈물겨운 모습들!
위안부로 가는지? 취업하러 가는지?
어디를 가는지 모르고 옷고름에 눈물지으며 고향을 떠나가야만 했던 고향 처녀들!
군복을 입은 키 큰 외국 군인들의 모습도 어릴 적에 보았다.
국군과 인민군이 오고가던 신작로 길!
▲ 1950. 8. 3. 뙤약볕 속에 전선으로 가는 국군 행렬
그 시절 어릴 때는 전쟁인 줄 모르고 그냥 신기하게 구경만 했을 뿐이다.
먼 길을 걸으면서 통학하던 학생들!
버드나무 가로수마다 수없이 박혀있던 기관총 탄피자국들!
이러 모습을 보면서 나는 책 보따리를 어께에 메고 작은 고추를 달고 불과 십 여리 밖에 안 된 시골길을 산 넘고 물 건너 학교를 다녔다.
이렇듯 유행가의 가사처럼 세월 따라 걸어온 저 길에는 사연이 참 많았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였는데 그 때는 얼마나 머나먼 길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알 수가 없다.
시냇가에 우뚝 선 버드나무 그림자를 발로 그으면서 시계를 해서 때로는 뛰기도 하고 걸으면서 학교를 다녔다.
마을의 여자 친구 ◯자와 같이 다녔는데 마치 전쟁터로 나가는 군대의 행렬처럼 양쪽 길을 따라서 한마디 말도 없이 그냥 서로 고개를 떨 군 채 땅만 쳐다보고 따로따로 다녔다.
◯자와는 그 후 내가 결혼을 하려 할 때 시집간 마을에서 예쁜 처녀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 때 참 오래토록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미군 수통을 옆구리에 차고 집집마다 구걸하러 다니던 많은 거지들을 피해서 열심히 뛰기도 했다.
괜한 두려움이었다.
그 때의 거지들은 참 순박했었는데도..
그 후 그들 부모를 잃어버린 거지의 아이들도 딩굴어 가는 낙엽처럼 모두가 이 길을 다녔었다.
가을은 더욱 쓸쓸하게 모든 이들의 무리들을 동행하게 하는 계절이다.
지난 어느 날 이후부터 잃어버린 저 길은 이제 먼지도 나지 않고 거지도 없다.
가로수가 없어서인지 낙엽도 없다.
나귀타고 가던 백의의 신사도 가마타고 가던 천사도 없다.
군인들의 모습도 학생들의 모습도 잘 보이질 않는다.
하늘의 별도 푸르던 창공의 모습도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가로수가 없는 저 길에는 수없이 많은 차들만 빠르게 오고 간다.
그러나 겨울로 가는 저 길에는 옛날에도 그랬듯이 흰 눈은 내리겠지.
깨끗하고 고운 그런 눈은 아니더라도..
첫댓글 겨울로 간 저 길에는 흰 눈이 내리겠지.......봄이면 지금도 뒷동산 할머니 무덤앞 할미꽃(노구초) 피고, 저멀리 보리밭 푸른 창공엔 노고지리(종달새) 아름다운 선율 수놓고 있는지? 그리운 시절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게 하는 님의 글,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마을의 아련한 추억이니다. 백천,만수무강하시어 좋은 얘기 들려주소.